기도문2020. 1. 4. 01:54

믿음의 성장을 간구하는 기도

(마태복음 14:22-36)

 

주님, 사역하면서 고난을 많이 당한,

당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는 예수를 따라 출애굽한 주님의 백성이요

사역을 위해 배를 타고 풍랑이 이는 갈릴리는 건너고 있는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의 사역이 리얼이고, 사역이 리얼이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도 리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입에서는 때로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흘러나오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을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가면 흔들릴지언정

뒤돌아서거나 넘어지지 않는 것은

주께서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이고

우리 곁에 좋은 동역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들의 작은 믿음을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을 끝까지 따르겠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4. 01:52

흔들리며 성장하는 믿음

(마태복음 14:22-36)


도종환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가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2019년 한 해, 흔들리면서 잘 살아왔다. 찬양이 저절로 나온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시간을 돌아보면 그렇지만, 어려운 순간 순간에서는 이러한 찬양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먼저 나오기 마련이다.

 

출애굽기를 보면 재미난 이야기가 많다.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큰 통찰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긴 세월동안 자기 백성을 출애굽시키시기 위하여 모세라는 지도자를 준비하신다. 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은 가까스로 출애굽에 성공한다.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날 때 모세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했던 말씀은 유명하다.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4:13).

 

정말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자마자 남녀노소가 모두 모여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 높이 찬양한다. 그런데, 그들은 수르 광야로 들어서 사흘길을 걸었는데, 물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겨우 발견한 물이 있었는데, 먹으려고 보니, 써서 못 먹었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이 마라(쓰다)’이다. (먹지 마라,의 마라가 아니라, ‘쓰다의 마라이다.)

 

홍해가 갈라지는 큰 역사를 통해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 앞으로 어떠한 어려움과 시련을 당하더라도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갈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물이 없자, 금방 원망이 쏟아져 나왔다. 이게 우리 인간의 연약한 모습이다. 이것은 나쁜 게 아니라, 우리의 본연적인 모습이다. 그걸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마시게 만들어 주신다.

 

본문은 이러한 정황을 담고 있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교회를 시작했으나, 마태공동체(교회)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마치 그것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다. 갈릴리는 원래 호수이다. 그런데 너무 커서 호수라고 안 부르고 바다라고 부른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기상상태가 변해 고요하다가도 풍랑을 만나기 일쑤다. 갈릴리 호수는 지금 고난을 겪고 있는 마태공동체(초대교회)를 표현하기에 딱 좋은 메타포이다.

 

마태공동체가 겪는 고난을 본문은 이렇게 표현한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24). 배는 마태공동체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의 공동체가 시작된 지 시간이 지났다. 이제 다시 배를 육지로 돌이킬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것을 본문은 이렇게 표현한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24). 예수에 대한 신앙은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앙공동체는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토요일(1228) 어른 넷, 청년 셋, 이렇게 7명이 에머리빌항구에서 고기잡이 배를 타고 출항했다. 날씨는 좋았으나, 파도가 좀 높게 출렁였다. 나름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옷도 스키복으로 따스하게 입고, 멀미약도 먹고 붙였다. 따스한 물도 준비했고, 먹어도 크게 부담이 없는 간식들도 준비했다. 바람은 부드러웠고, 공기는 청아했다. 지나치면서 본 샌프란시스코와 알카트레즈, 그리고 금문교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금문교를 지나 앞으로 나아가니 태평양이 펼쳐졌다. 등대가 깜빡였다. 파도가 절벽을 쳤다. 등대의 깜빡임과 절벽을 끊임없이 때리는 파도소리는 감성을 자극했다.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우리는 뱃머리에 앉아, 파도의 출렁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1시간 30분쯤 지났다. 이제는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와서’ 돌이킬 수 없는 거리에 당도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 발생했다. 반복해서 출렁이는 파도를 몸이 견디지 못하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가 어지러워 왔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손과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몸을 눕히고 싶었다. 그런데, 배 안에 몸을 눕힐 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이미 좋은 자리는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자비를 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뱃머리에 몸을 눕혔다.

 

육지를 떠나 바다 가운데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파도는 거세 졌다. 파도가 배를 덮쳤다. 바닷물이 뱃머리에 누워 있는 나를 덮쳤다. 그래서 나는 바닷물에 젖기 시작했다. 바닷물이 내 몸을 적시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움직일 수 없었고, 피할 방법이 없었다. 머리는 계속 어지러웠고, 팔 다리에는 여전히 힘이 없었다. 존재가 이렇게 나약할 수 없었다.

 

그렇게 1시간 30분을 더 가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배가 섰다. 배가 서니 출렁임이 더 심해졌다. 더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침 고기를 잡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 이들이 자연스럽게 푹신한 매트리스가 깔려 있는 의자가 공석이 되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그곳으로 가서 몸을 눕혔다. 찬 바닥에서 푹신한 매트리스에 몸을 눕혀서 고통은 약간 덜했지만, 이제 바람이 불면서 젖은 몸이 추워졌다. 몸을 떨었다.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엄마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순간 마침 챙겨온 손난로가 생각났다. 손에 쥐는 아주 작은 난로였다. 나는 그것을 부여잡고 추위를 견뎠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깨어보니, 사람들은 여전히 분주하게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는 동안 몸은 체온유지를 하기 위해서 저절로 뜨거워져 있었다. 그래서 추위가 사라졌다. 잠에서 깨니 뜨거워져 있던 몸이 다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또 추웠다. 나는 잠 들려고 노력했다. 잠을 자면 몸이 저절로 뜨거워지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통 가운데, 8시간 동안 배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고기잡이 배가 다시 금문교를 통과해서 항구로 입항할 때쯤 몸을 다시 가눌 수 있었다.

 

본문에서 말하는 물결로 말미암아 당한 고난은 멀미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다. 그것은 리얼이다. 가상의 고난이 아니다. ‘리얼이다.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고통이 극심해졌을 순간, 밤 사경(새벽 3-6시경), 밤이 가장 깊은 시간, 즉 고통이 가장 극심한 순간에, 제자들은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시는 예수님을 발견한다. 제자들은 처음에 그것이 유령인 줄 알았다. 죽음의 고통을 겨우겨우 참아내고 있는데,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결정적 한방이 온 줄 알고, 그들은 놀라서 소리쳤다.

 

그런데, 다행히 그것은 유령이 아니고, 예수님이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27). 예수님인 것을 확인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요청한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8). 이것은 고통 가운데서 외치는 간곡한 기도이다. “주님, 지금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랬더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렇게 하라고, 물 위를 너도 걸어보라고, 말씀하신다. 너는 능히 이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베드로는 힘을 내서 바다 위를 걸어본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예수님만 보고 물 위를 걸어갔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베드로의 눈에는 예수님이 안 보이고 이상한 걱정이 들었다. 바람이 부니, 파도가 쳐서 자기를 덮칠 거라 생각했다. 그러는 순간 베드로는 바다에 빠져갔다. 베드로는 소리쳤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30). 예수님은 바다에 빠진 베드로를 건져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31). 그리고, 베드로를 건져주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른다. 그랬더니, 바람이 그쳤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함께 사역을 하며 하나님께, 또는 내게 원망하고 불평하는 동역자는 참 귀하다!” 생각해 보라. 출애굽 해서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다고 모세에게, 하나님에게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나 저러나, 그들은 출애굽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출애굽하지 않고, 그냥 애굽에 남아 있었다면, 그러한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원망과 불평이 얼마나 귀한가! 원망 없이, 불평 없이, 어떻게 출애굽을 하며, 그 험한 광야를 어떻게 건너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 있는예수님의 제자들이 참 귀하다. 그들이 배를 타지 않았다면, 그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지 않았다면, 그러한 고난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를 탔다. 그리고 갈릴리 바다를 건넜다. 그러다 그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다. 그러니, 고난 당하고 있는 그들 입에서 나오는 원망과 불평, 그리고 탄식이 얼마나 귀한가.

 

사역(ministry)을 진짜(real)로 하지 않으면, 고난도 없다. 파도가 일렁이는 배를 타지 않으면 멀미때문에 고난 당할 이유가 없다. 배를 탔을 때 겪는 뱃멀미가 리얼이듯이, 사역을 하면서 겪는 고난도 리얼이다. 그러니, 뱃멀미 하면서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것처럼, 사역을 하면서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믿음이 없어서 그러한 탄식이 나오는 게 아니라, 사역하면서 고난을 리얼로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나 귀한가!

 

사역하면서 우리교회에서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누구일 것 같은가? 바로 나다! 나는 매일 운다. 울면서 나는 매일 원망한다. 불평한다. 탄식한다. 배 타고 8시간 동안 꼼짝 없이 뱃멀미하며 신음했듯이, 어쩌지 못해, 매일 신음한다. 가장 많은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늘어놓는 나를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신다. ? 내가 무엇을 잘 해서가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기 때문이고, 애굽을 따라나서 출애굽 했기 때문이고, 배에 올라타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을 가면서 겪는 고난을 리얼로 겪고 있기 때문이다.

 

사역은 장난이 아니다. ‘리얼이다. 배를 타고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넘는 것과 같다. 사역을 하면 고난을 당한다. 그 고난은 가상이 아니다. ‘리얼이다. 고난이 리얼이기 때문에, 입에서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하는 척 하는게 아니라, 진짜로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에 원망과 불평과 탄식도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사역을 하면서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쏟아 놓은 사역자를 주님이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귀하게 여기시며,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고기 잡으러 나가서 아무런 고기도 잡지 못하고, 꼬박 8시간 동안 뱃바닥에 붙어 있다 왔지만, 나는 행복했다. 좋은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 순간을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래서 우리가 두고두고 깔깔거리고 웃으며 추억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며,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많이 당했지만, 2019년도 바로 여러분들이 곁에 있고, 여러분들과 사역하면서 행복했다. 흔들리지 않고 성장하는 믿음은 없다. 사역은 리얼이기 때문에, 리얼로 고난도 당하는 것이다. 그러니, 혹시 사역을 하면서 겪는 고난때문에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쏟아져 나오거든, 참지 말고 내놓으시라. 나한테도 내 놓고, 주님께도 내 놓으시라. 괜찮다. 믿음이 적어서 나오는 탄식이 아니라, 여러분이 리얼로 사역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새해에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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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1. 4. 01:48

세상의 모든 라헬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

(마태복음 2:13-18)

 

주님, 세상의 모든 라헬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예수의 탄생을 황홀했으나,

그의 탄생 뒤에 악한 영들이 벌인 일은 슬펐습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황홀한 일과 슬픈 일들이 뒤섞여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 뿐 아니라,

기쁨의 눈물을 흘리다가도 이내

슬픔의 눈물로 바뀌는 아픔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서 위로를 받아야 하는지요.

자식을 잃고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라헬은 애통하며

위로 받기를 거부했지만,

주님께서는 결국 십자가에 달리신아들을 통하여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셨습니다.

주님, 위로 받은 자로서,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옵소서.

애통하는 세상의 모든 라헬이 위로 받는

한 해의 끝자락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4. 01:46

세상의 모든 라헬을 위한 기도

(마태복음 2:13-18)

 

우리는 성탄절의 기쁨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성탄절 때, 구유 안에 누우신 예수를 생각하며, 목자들의 찬양과,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도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처럼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를 찬양하고 경배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성경의 스토리 전개를 보면,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굉장히 다루기 어려운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우리는 대체로 이것을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서 따로 떼 내어 마치 없는 것처럼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동방박사들이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유대땅을 떠나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갔을 때, 잔인한 일들이 발생한다. 분위기가 완전히 전환된다. 찬양과 경배의 아름다운 분위기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갑자기 학살이라는 험악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하여 말해준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한다!”(13).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행동지침도 알려준다.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13). 이 사건에 대하여 마태는 이것이 예언의 성취를 이룬 이야기라고 설명해 준다.

 

마태복음은 기본적으로 유대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고자 쓰인 성경이기 때문에 모세오경의 구조에 따라 스토리가 전개되며,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은 예수를 모세와 같은 인물로 생각나게 한다. 이런 예언의 성취모티브는 다음 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요셉이 주의 사자가 지시한 대로 아기 예수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했을 때, 유대 땅에는 슬픈 사건이 발생한다.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을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모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이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라”(16) 지시했다. 그리고 그 일이 발생하여,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을 잃은 슬픔에 휩싸이게 된다.

 

이 사건을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마태가 끄집어 낸 구약의 성경은 예레시야서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31:15).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의 질문 거리를 가지게 된다. 왜 라헬이 등장을 하며, ‘라마라는 지명은 무엇인가?

 

라헬(Rachel)은 야곱의 두 부인(레아와 라헬) 중 한 명이다.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12명의 아들 중, 마지막 11번째와 12번째 아들이 라헬에게서 난 아들이다. 라헬이 난 두 아들은 요셉(11번째)과 베냐민(12번째)이다. 라헬이 베냐민을 낳는 이야기를 기록한 창세기 39장에 보면,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는다. 그래서 그녀는 베들레헴에 묻힌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 라헬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아기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아기 예수의 탄생 사건 때문에 발생한 유아학살사건도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그래서 라헬은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라마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남유다의 포로들을 바벨론으로 끌어가기 위해서 집결시켰던 곳이다. 라마는 슬픔이 시작된 곳으로서, 베들레헴의 이미지와 같다.

 

여기서 또 하나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라헬의 통곡을 말하는 이유다. 라헬은 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에브라임(라헬의 소생 요셉의 아들)의 할머니이자, 남유다를 이루는 베냐민의 어머니이다.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바벨론(이방인들)에 의해서 멸망할 때 활동했던 선지자로서, 남유다가 망해가는 것을 바라보며 한 없이 눈물을 흘렸던 선지자이다.

 

라헬의 통곡은 남유다보다 먼저 앗수르에 의해서 주전 722년에 멸망한 북이스라엘에 대한 기억이다. 자식을 갈망하던 라헬이 자식을 잃고 통곡하는 모습은 이방민족들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히며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비극적인 슬픔을 극적으로 묘사해준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망할 때 가졌던 가슴 아픈 기억이, 지금 남유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 라헬이 통곡하며 위로 받기를 거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리얼이다. 내장이 뒤틀린다. 그래서 그것을 단장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방 민족에게 자식을 잃게 된 라헬은 통곡 소리만 낼 뿐, 어떠한 말로도 위로받지 못한다.

 

마태가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끌어다가 예수의 탄생 사건과 함께 발생한 유아학살사건을 언급하는 이유는 라헬의 통곡을 언급하고 있는 예레미야서 31장의 말씀의 주제가 하나님이 이루실 회복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유대땅에는 유아학살사건이 발생하여 수많은 라헬이 통곡 중이다.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수많은 아이들을 죽인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다. 그는 에돔(이두메) 사람이었다. 이방인으로서 유대땅을 다스리는 왕이었다. 그런, ‘이방인에게 죽임을 당한 아이들은 그 옛날,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의 백성들과 같은 역사적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독자들은 유아학살사건과 라헬의 통곡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어떡하냐. 라헬의 통곡을 하고 있는 저 수많은 라헬은 누가 위로해 주지? 무슨 말로도, 그 무엇으로도 위로 받지 못하는 저 라헬은 어떻게 위로를 받게 될까?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저 가장 큰 슬픔을 지닌 수많은 라헬은 누가 어떻게 위로를 받지?” 이러한 깊은 질문에 마태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는 사건에 휩싸인 베들레헴의 수많은 라헬은 가까스로 애굽으로 피난하여 곧 귀환하게 될, 예수에 의해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성탄절은 기쁨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탄식의 시간이기도 하다. 장사 안 된다고, 탄식을 싫어하는 상업주의가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게 하여, 성탄절 이야기가 마치 기쁨만 있고, 탄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성경의 이야기를 두 눈으로 직접 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쁨과 탄식을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한다.

 

사실, 순서적으로 기쁨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탄식이 오는 것이 아니다. 메시아(그리스도)의 도래는 탄식때문이다. 사람들의 탄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메시아이다. 메시아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탄식, 라헬과 같은 깊은 통곡, 그 무슨 말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을 위로해 주신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소망인 이유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라헬의 통곡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우리의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 이유이다.

 

누군가는 성탄절 이야기에 등장하는 유아학살사건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만 살고 다른 유아들은 죽게 내버려둔 그가 무슨 메시아냐? 메시아가 탄생했을 때 왜 갑자기 그 메시아 때문에 죄 없는 아이들이 죽어야 하나? 이 사건은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사건이군!” 성경을 진지하게 읽으면, 충분하게 가질 수 있는 의구심들이다. 나도 그랬다. 나도 의문을 던졌다. “왜 메시아가 탄생했는데, 죄 없는 아이들이 죽어야만 했지?”

 

그러나, 복음서를 끝까지 읽으면 그러한 의구심들이 풀린다. 우리는 복음서의 마지막에서 자기만 살아난메시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슬픔과 고통을 몸에 지고 그들과 함께 죽는그리고, ‘그들에게 참 위로가 되기 위하여 죽는메시아를 만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단한 신비이자, 위로이다.

 

기독교 역사에는 수많은 순교의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순교를 잘못 생각한다. 우리는 순교를 예수를 위해 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순교란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에 대한 가장 숭고한 선포이다. 예수를 위해 죽지 말라. 우리가 죽어서 예수를 영화롭게 할 수 있나? 그렇지 않다. 우리가 순교하는 이유는 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순교하는 이유는 ‘예수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는 라헬의 통곡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다. 그래서 순교는 값진 것이다.


(아래 세바스티아의 40명의 순교자들 이야기는 옥성득 교수의 블로그에서 가져온 옴) 

"겨울이면 생각나는 세바스티아의 40명의 순교자들이 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박해종식 칙서에 공동서명한 리키니우스(Licinius) 동로마 황제는 316년 태도를 돌변하여 카파도키아 지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버리라고 명령한다. 교부 바질(Bishop Basil of Caesarea (370–379))의 기록에 따르면, 이 당시 세바스티아[지금 터기의 Sivas] 지역을 다스리던 총독 아그리콜라우스는 40명의 기독교인 군인들을 벌거벗겨 꽁꽁 얼어붙은 호수의 얼음을 깨고 집어넣는 고문을 가하며 배교를 강요한다. 그리고 호수 곁에는 장작불을 지펴 놓고 이교신을 위한 제단을 만들어 놓고 그 옆에는 따뜻한 물을 채운 욕조를 놓아두고 배교를 유혹했다.

 

그러나 40인의 군인들은 한 목소리로 밤새 노래를 부르며 버텼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40인의 선한 군인, 40인의 선한 순교자라네, 40 good martyrs, 40 good soldiers for Christ.” 이들은 3일간이나 지독한 추위를 견뎌내며 기도와 노래를 했는데 그만 그 중 한 명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이교 신에게 절하고 따뜻한 욕조에 뛰어들었으나 심장마비로 즉사하고 만다. 동료의 배교로 슬픔에 잠긴 군인들은 다시 힘을 내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39명의 선한 군인, 39인의 선한 순교자라네.”

 

이 때 이교도 교도관 군인이 잠시 졸다가 꿈을 꿨는데 하늘에서 천사장이 내려와 순교를 작정한 이들의 머리 위에 면류관을 씌워 주는 것이 아닌가. 이에 감동한 교도관 군인이 배교한 병사의 자리를 대신 자기가 채워 면류관을 받기 위해 옷을 벗어 던지고 자신도기독교인이 되겠습니다.”라고 외치며 순교를 다짐한 대열에 참가한다. 군인들은 다시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40인의 선한 군인, 40인의 선한 순교자라네."

 

그 다음 날 아침 총독은 아직도 숨이 남아 있는 40명을 끄집어 내어 화형에 처한다. 그러나 이들의 장엄한 순교로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중지되는데, 바로 2년 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동로마 황제 리키니우스를 마지막 회전에서 격파시키며 로마 제국을 재통일하고, 기독교에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UCAL 옥성득 교수의 블로그에서 가져옴 / 이것은 순수 창작물이 아니라 널리 알려진 기독교 역사의 일화이기에 그대로 옮겨 적는다.)

 

건장한 청년들이 전장에 나가서 적군에 죽은 것도 아니고, 그들의 기독교 신앙 때문에 죽었다는 전사또는 순교의 소식을 들었을 때, 이 건장한 청년들의 어머니는 어떠한 마음이었을까? 아마도, 이들도 라헬처럼 통곡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위로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순교는 예수를 위한 죽음아니라, “메시아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복음의 선포였기 때문이다.

 

성탄절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 세상의 모든 라헬을 위한 기도를 드리자. 그 어떤 말로도, 그 무엇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는 라헬의 통곡에 휩싸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나 자신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속사정, ‘라헬의 통곡이 있을 것이고, 우리의 부모님에게도, 우리의 형제자매에게도, 그리고 우리의 친구들과 이웃들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라헬의 통곡이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말로도, 그 무엇으로도 위로 받지 못하는, 위로 받기를 거부하는 그 라헬의 통곡을 위로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소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순교를 해서라도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를 전하고 싶은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순교자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를 전한다면, 머지않은 날, 세상의 모든 라헬은 위로를 받고,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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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