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노시스적 사유]

 

교부들의 신학을 보면, 삼위일체 교리는 독자적으로 발생했다기 보다는 마르키온의 그노시스적 사유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했다. 그노시스적 사유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꽤나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신정론의 문제를 아주 '논리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 아직까지도 신정론 문제는 미궁이다. 이 문제를 납득할 만하게 대답한 신학자는 없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납득할 만하게 신정론 문제에 대답한 신학자는 마르키온 밖에 없다. 그는 그노시스적 사유를 통해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구분하는 것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

 

우리는 지금 그노시스적 사유를 통해 신정론의 문제를 극복하려 했고, 그노시스적 사유를 통해 신론과 기독론을 발전시키고 성경의 정경화를 꾀했던 마르키온을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정죄하지만, 그 당시 마르키온은 '악의 문제'에 질문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신학을 제공했다. 그래서 그는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그 당시 교회의 교부들은 마르키온의 신학을 정통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했다.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다른 존재로 표현하는 것에 반대했다. 교부들에게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은 신약의 구원자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이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된 신학사상이 바로 삼위일체론이다. 삼위일체론이 말하고 싶은 일차적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의 일치를 말함으로 마르키온 신학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삼위일체 신학이 신정론의 문제(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를 납득할 만하게 잘 설명하고 있는지는 확신이 안 선다. 그래서 우리는 '신비'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신정론의 문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른다는 것이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노시스(영지주의) 사유의 특징은 이 세상은 낮은 단계의 하나님(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 악이 존재하는 세상은 파괴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결국은 '파국'이다. 그 파국에서 구원하는 것이 바로 구원자 하나님에 의해 기획된 '메시아 사상'이다. 메시아는 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그리고 이 악이 가득한 세상을 끝장낸다.

 

우리는 그노시스적 사유를 너무도 간단하게 '이단'이라고 치부해버리지만, 그러한 그노시스적 사유는 삼위일체 신학의 출현으로 인해서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은 역사에서 절대악을 경험할 때마다 그노시스적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악이 판치는 세상은 메시아에 의해서 끝장나야 하고, 우리는 메시아를 통해서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 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노시스적 사유가 가장 강하게 등장한 시대는 근대(Modernity)의 끝자락에 발생한 세계 1차대전 이후였다. (사실 근대의 끝자락에 1차 대전이 발발한 게 아니라, 1차 대전이 발발함으로 인해서 근대는 끝난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끝없이 긍정하던 근대, 그래서 그 역사의 끝에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거라는 소망 가운데 살아가던 근대인들은 세계 1차대전의 발발과 함께 그 모든 소망을 접어야만 했다. 바로 그때 다시 고개를 든 것이 그노시스적 사유였다.

 

그 당시 근대의 사상가들(철학자/신학자)은 그노시스적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신학 개념'을 만든 칼 슈미트를 비롯하여, 하르낙과 블로흐, 마틴 부버와 심지어 칼 바르트도 그노시스적 사유를 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과, 시몬 베이유도 그노시스적 사유 속에서 자신들의 철학을 전개했다. 그노시스적 사유를 가장 강렬한 방법으로 한 이는 발터 벤야민이었다. 발터 벤야민의 메시아적 사유는 그노시스적 사유의 바탕 위에서 세워진 사유였다.

 

칼 슈미트의 삼위일체에 대한 사유는 매우 독특하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 안에 숨겨진 '내전'에 대하여 주목하는데, 그에 의하면, 삼위일체 안에는 창조주 아버지(성부)와 구원자 아들(성자) 간의 '내전상태(statiastion)'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마르키온이 일찍이 신정론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설파했던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 간의 싸움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 슈미트가 삼위일체론을 통해 위와 같은 사유를 하는 까닭은 '정치신학'의 가능성을 논하기 위해서이다. 악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그 악과 대적하여 전쟁을 벌이는 일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한다.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 '정부'라고 말하는 것이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이다.

 

이러한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 논의를 계속 이어나가려면, 그의 '카테콘(Katechon)' 이론을 비판한 야콥 타우베스와 현대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논의를 살펴보아야 하지만, 그것은 너무 지난한 과정임으로 생략한다. 대신, 우리는 그노시스적 사유 속에서 발생한 근대의 '메시아 신학'을 다시 한 번 들여야 볼 필요가 있다.

 

세계 1, 2차 대전 이후 우리는 이 역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사의 마지막에는 하나님 나라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희망,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진보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는 희망, 그런 희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결국 하나님 나라는 역사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유 자체가 그노시스적 사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파국'을 경험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이러한 그노시스적 사유 안에서 그들의 사상을 세워나갔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노시스적 사유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여담이자만, 지금 사회적으로 한창 논의되고 있는 '젠더문제'도 그 밑바탕에는 그노시스적 사유가 깔려 있다. 무엇이 우리의 ''을 정하는가?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 정한다고 말해왔다. 남자의 성기를 가지고 태어나면 남자이고, 여자의 성기를 가지고 태어나면 여자였다. 그러나 그노시스적 사유에서는 그렇지 않다. 나의 정체성을 정하는 것은 '누스(nous/정신)'이다. 나의 누스가 나를 남자로 규정하면 내가 여자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어도 나는 남자인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그노시스적 사유는 우리의 삶 속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시대를 보듬으며 우리의 미래를 열어 가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사유 방식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더 이상 이 역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다면, 이 세상 바깥에서 오는 구원을 기다려야 할 텐데,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그러한 구원은 어떻게 발생하는 것인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어둡고, 구원은 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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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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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1. 26. 09:58

죽음의 구멍을 메우기를 간구하는 기도

(요나 3:1-10)

 

주님, 요즘 지구에 사는 우리 모두가 너무 춥습니다.

너무 큰 구멍이 뚫려 그곳으로 죽음의 칼바람이 마구 불어닥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뚫린 이 죽음의 구멍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다만, 요나처럼 죽음의 구멍을 회피하지 말게 하시고,

다시 요나처럼 죽음의 구멍을 응시하게 하셔서

우리의 삶에 뚫린 죽음의 구멍 앞에서

죽음을 이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그 은총으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죽음의 구멍을 막아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때로 실패하겠지만,

실패가 없으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오니,

주여,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으로 서로의 온기를 나누게 하시고

최후의 승리를 외치게 하옵소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죽음 자체를

십자가 위에서 막아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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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 26. 09:55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

(요나 3:1-5, 10)

 

서울에서 살았던 분들은 종로에 있던 단성사, 피카디리, 파고다극장 등을 기억할 것이다. 그곳은 청춘들의 낭만이 서려 있는 곳이다. 종로의 극장가와 연관된 청춘의 낭만이 없는 사람은 서울에서 살았다고 말하면 안 된다. 198937일 새벽 330분에 파고다극장에서 한 사람이 죽은 채 발견된다. 세간의 주목을 받은 사건은 아니나 후에 이 사람의 유고시집으로 인하여 그 죽음이 기억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시인 기형도(1960~1989)이다.

 

그가 파고다극장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그의 죽음이 애처로운 것은 그가 요절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담긴 그의 절망과 희망이 그의 죽음을 더 애처롭게 한다. 그의 시에는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오버랩되어있다. (강신주,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47) 얼마 못산 인생이지만, 그의 삶 속에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오버랩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죽음을 더 애처롭게 한다.

 

기형도는 삶 속에 구멍처럼 뚫린 죽음들을 응시하며 살았다. 그의 유고시집이 출간된 후 젊은이들은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공감했고 함께 울었다. 그의 시 제목을 차용하여 만들어진 영화도 두 편이나 된다. “봄날은 간다(2001)” “질투는 나의 힘(2003).” 그의 시 질투는 나의 힘에 나오는 마지막 문구는 매우 유명하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외로운 청춘이 읽어내려가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만한 문구이다.

 

기형도의 시를 평론했던 당대 최고의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렇게 말한다. “죽음은 늙음이나 아픔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가 반드시 겪게 되는 현상이다. 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실존의 범주이다.”(기형도 시집 해설,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중에서) 인간의 실존인죽음을 응시하는 일’, 누군가는 기형도처럼 예민하게 그 일을 잘 해내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죽음을 응시하는 일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응시하는 일도 거부하는 일도 하지 않고, 마치 죽음이 없는 것처럼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

 

요나서를 죽음이라는 렌즈로 읽어보면, 거기에는 엄청난 죽음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요나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1:1-2). 여기서 죽음은 악독으로 표현된다. 깊은 죽음의 그림자가 니느웨를 덮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요나에게 알려주신다. 그러나 요나는 그 죽음을 응시하지 않는다.

 

니느웨라는 삶에 커다랗게 뚫린 죽음의 구멍을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알려주셨지만, 요나는 그 죽음의 구멍을 외면한다. 이런 요나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도처에 숭숭 뚫린 죽음의 구멍을 외면하는 일, 우리는 지독히도 요나와 닮아 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이 참 묘하다. 요나는 니느웨에 뚫린 커다란 죽음의 구멍을 외면하고 멀리 도망가나, 이제 그의 삶에 죽음의 구멍이 숭숭 뚫리기 시작한다.

 

요나는 니느웨로부터 멀어지기 위하여(죽음의 구멍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하여, 그것을 외면하기 위하여), 그 반대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탄다. 그러나 그가 그 배에서 만난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의 구멍이었다. 큰 바람이 바다 위에 불어 배가 전복될 찰나, 요나는 그 죽음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선원들에게 자기를 바다 위에 던져버리라고 말한다. 이렇듯, 우리 삶에 뚫린 죽음의 구멍들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이기는 길은 그 뚫린 죽음의 구멍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온 생명을 다해 막는 것밖에는 없다.

 

요나가 자기의 생명을 바다에 던졌을 때, 발생한 엄청난 일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죽음을 향해 돌진했을 때 오히려 그 죽음이 멈춰 선다. 바다는 고요해졌고, 바다에 빠져 죽을 것이 분명했던 요나는 커다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생명을 부지한다. 그리고 비로소 요나는 그 죽음과도 같은 물고기 뱃속에서 죽음을 응시한다. 요나는 그 죽음을 응시하고, 이렇게 고백한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2:3, 4, 5)

 

요나의 고백을 한 마디로 다시 정리해 보면 이런 것이다. “나는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죽음을 응시하지 못하던 요나는 이제 죽음을 응시하게 됐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니느웨의 죽음도 눈에 들어오게 됐다. 그리하여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그들에게 그들의 삶에 뚫린 죽음의 구멍을 말해준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

 

나는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를 무너뜨리게 할그 죽음의 구멍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요나서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다. 예전 같으면 이러한 생각을 못했을 것 같은데, 요즘에는 이런 생각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 아마도,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를 무너뜨릴 그 죽음의 구멍은 역병이었던 것 같다. , 전염병이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어서 잘 알지만, 전염병을 이기는 최선의 방법은 방역을 잘 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백신 같은 것이 없었으므로, 할 수 있는 일은 방역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선포되고 있는 방역조치를 한 번 보자.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3:7-8).

 

우리는 이것을 회개라고 하는 매우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는데 익숙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최고의 방역조치이다. 왕의 조서, 즉 법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이 방역조치에는 종교적인 의미가 더 깊이 담겨 있다. 그리고 매우 실제적이고 과학적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전염병은 인수공통감염병이다. , 인간과 짐승이 접촉해서 생긴 병이고, 인간과 짐승이 동일하게 감염되는 병이다. 다른 말로 해서, 인간이 짐승과 접촉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았을 병이다. 하지만 인간이 짐승과 접촉이 잦아진 이유는 인간의 무분별한 살림파괴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전염병을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는 성경에서 그토록 심판이 선포되던 죄악의 도시 니느웨보다도 영적이지 못하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죽음에 대한 감수성도 부족하고, 그 죽음을 응시하려고 하는 마음도 부족하고, 삶 속에 숭숭 뚫린 죽음의 구멍을 메우려고 하는 의지와 관심도 부족하다. 만약 지금 정부에서 법을 제정하여 니느웨가 했던 방역을 시행한다면, 쉽게 말해, 각자 골방에 들어가서 14일 동안 금식하라고 한다면, 오히려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니느웨는 그것을 시행했다. 그래서 그들은 니느웨에 들이닥친 죽음의 구멍을 막아낼 수 있었다.

 

요나는 니느웨에 뚫린 죽음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선택된 선지자였다. 우리 삶에 필연적으로 뚫리는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미국의 동화작가 매리 매입스 닷지(Mary Mapes Dodge)의 동화, “Hans Brinker(한스 브링커)”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한 이 동화에서 한스 브링커라고 하는 소년이 뚝 제방에 뚫린 구멍을 온몸으로 막아낸다. 이렇게 누군가는 우리 삶에 뚫린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을 해야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

 

군대에 있을 때 친구와 주고 받은 편지가 생각난다. 다른 부대에서 근무하고 있던 친구와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그 친구의 편지는 참 애처로웠다. 자신은 부대에서 이발병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이발병이라는 보직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이발을 하려고 친구는 부대에서 지급한 하얀 가운을 입었는데, 그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마치 우스꽝스러운 삐에로 같다고 한탄했다. 그 이유는 그 친구의 키가 190cm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190 센티미터의 키를 가진 친구는 별로 없었다. 당연히 군대에서 그렇기 키 큰 친구들을 위한 이발병 복장을 제공해주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전개되는 친구의 편지내용이 감동적이었다. 처음에는 짧은 이발병 가운을 입고 병사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운 삐에로 같아서 힘들었는데, 누군가는 이발병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라면,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여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면, 그 현실을 잘 받아들이고 그 일을 열심히 감당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신태준, 보고싶다.)

 

우리는 김현이 기형도의 시에 대한 평론에서 말한 것처럼 죽음을 실존의 범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상, 기형도와 같은 운명, 요나와 같은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다. 죽음을 응시하는 일, 그리고 삶에 뚫린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에 부름을 받았다는 일. 그래서 우리는 기형도처럼, 요나처럼, 우리의 삶의 도처에 뚫린 죽음의 구멍들을 메우기 위하여, 기형도가 시를 썼던 것처럼, 요나가 물고기 뱃속(죽음의 한가운데서)에서 주님의 은총을 간구했던 것처럼, 간절한 은총이 필요하다.

 

우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 숭숭 뚫려 있는 죽음의 구멍에 압도되지 않고, 그것을 최선을 다해 막아낼 수 있는 이유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의 구멍을 메우려면, 죽음을 이기신 그분을 내 삶으로 초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시편의 시인처럼 하루를 시작하며 주님을 삶으로 초대해야 한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편 5:3).

 

우리가 아침마다 죽음을 이기신 그분의 은총을 간구하고, 그분을 우리의 삶으로 초대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삶에 뚫린 죽음의 구멍에 압도당하거나, 그 숭숭 뚫린 구멍으로 세차에 밀고 들어오면 죽음의 황소바람에 치어 죽을지 모른다. 하지만,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우리가 먼저 만나고, 그분의 은총을 간구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힘이다.

 

요즘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죽음의 구멍이 너무 크게 뚫려 있어서 가뜩이나 추운 겨울, 황소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고통당하고 있는 시절이다. 춥다고 아우성이다. 구멍이 클수록 그 구멍을 막기 위해서는 '협동'이 필요한 법이다. 화이자나 모더나 같은 백신회사들만 그 구멍을 막기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전적으로 맡겨놓을 수 있는 구멍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이 큰 구멍을 막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협동'을 하고 있는가. 구멍이 크게 뚫려 칼바람이 세차게 밀려들어올수록 우리는 절망하지 말고 그 구멍을 막아내기 위하여 서로의 온기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버텨왔다. 삶을 위협하는 수많은 죽음의 구멍들을 잘 막아내며 살아낸 우리들이니, 이번에도 잘 막아낼 것이다. 다만, 간구하는 것은 너무 춥지 않기를, 지치지 않기를!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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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라는 신앙의 무대]

 

요즘은 개그맨들이 자신의 정신성을 펼칠 무대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공중파에서는 더이상 그들을 위한 무대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신성을 가지고 아주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특별히 요즘은 유튜브가 그들의 주 활동무대가 되어 가고 있다. 개그를 표현하는 방식과 개그를 소비하는 방식이 변했다는 뜻이다.

 

개그맨들의 웃픈 현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독교 신앙인들의 이야기가 오버랩 됐다. 예로부터 '교회'는 기독교인들의 정신성을 펼치는 '무대'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교회 공간은 예수님 시대의 성전처럼 '강도의 소굴'이 되어 가고 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공간인지 알 수 없게 됐다. 그리하여 점점 그 신앙의 '무대'를 찾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던 사람들마저 자리를 떠나는 현실을 맞이하게 되었다.

 

복음주의 신학의 가장 약점으로 지목되어 온 것은 교회론의 부재였다. 모더니티에 기반을 둔 복음주의는 '너가 곧 성전'이라는 매우 개인주의적인 교회론을 서슴지 않고 말한다. 이것은 개인을 굉장히 성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 같으나, 결국 교회를 개인에 의해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추락시키는 생각일 뿐이다.

 

'교회'라는 것이 참 신비스러운 게, 실체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신비를 다 지워버리고 교회를 어떠한 '실체'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그렇다 보니, 현재 우리가 '교회'를 떠올릴 때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실체로서의 교회가 그렇게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정신성이다. 기독교인의 정신성이 응집되면 교회라는 것이 발생한다. 거꾸로 말해, 기독교인의 정신성이 사멸하면 교회는 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인지, 아니면 죽은 교회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느덧 '교회는 이런 것이야'라는 어떠한 실체에 사로잡혀 왔다. 어떤 물질적인 것들이 교회라는 생각, 그래서 교회건물이나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소위 성물들, 그리고 그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가지 활동(프로그램)들 등을 교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교회 현상들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신성이 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기에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개그맨들처럼 기독교의 정신성을 펼칠 무대, 교회를 잃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지금 존재하는 '무대'에서 기독교의 정신성을 펼치기에는 그 무대와 정신성이 충돌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기독교의 정신성을 멋지고 아름답게 펼치기 원하는 신앙인은 그 정신성에 합당한 '무대'를 찾고 있거나,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성례전 신학(sacramental theology)에 의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상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성을 펼쳐내는 '무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어느 곳 하나, 그 어느 시간 하나 '성전'이 아닌 것이 없다. 우리가 사는 모든 세상, 우리가 보내는 모든 공간과 시간은 기독교의 정신성을 펼치는 무대이다. 즉, 우리가 사는 모든 세상, 우리가 보내는 모든 공간과 시간은 '교회'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어느 곳에 있든지 기독교의 정신성을 펼쳐 보인다면, 그곳에 '교회'가 생길 것이고, 그 교회는 많은 이들에게 생명을 전달해 주는, 기쁨의 사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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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세기말 현상  (0) 2021.01.11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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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 내러티브]

 

인간의 역사는 부단히 어딘가로부터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유의 투쟁이었다. 예수의 이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것도 종교적 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의 말씀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현상이 있다. 그렇게 어디론가로부터 속박당하는 것을 싫어하고, '해방'되고 싶어하면서도 '해방'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거나 들으면 어딘가 불편한 마음을 갖는 게 한국인의 심리인 것 같다. 왜 그럴까? 자유를 갈망하되, 그 자유는 나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누리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어서 그런가? 자신만 자유롭고 남들은 자신의 자유 아래 속박시키고 싶은 욕망 때문인가?

 

해방을 말한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이 겪은 어려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예수의 메시지는 해방이라고 말하는데, 거기에 열광하면서도 결국 해방신학자들을 죽인 것은 남미인들이다. 해방을 말하면 죽는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메타 내러티브(metanarrative)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독교의 메타 내러티브에 부합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신앙인이요 잘 사는 것이라 말한다. 기독교 메타 내러티브의 핵심은 창조-타락-구원-종말이라는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기독교의 메타 내러티브를 설명하는 것이 '복음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메타 내러티브는 계속하여 공격을 받아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그 메타 내러티브가 인간들을 자유하게 하지 못하고 못살게 굴었기 때문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에게 오히려 구속을 가져다 준다면 그 메타 내러티브는 무엇인가?

 

성경의 이야기를 '창조-타락-구원-종말'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한가지 방법'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 방식은 매우 플라톤주의적이다. 오죽하면, 니체 같은 철학자는 "기독교는 플라톤주의의 대중화"라고 말하겠는가.

 

소위 복음주의적 메타 내러티브의 성경 해석을 보자. 우선 우리는 성경에 비추어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에 의하면,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금을 받은 존재'이다. 여기서 '형상'이라는 말은 플라톤주의에 따라 해석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형상'은 설계도 같은 것이다. 플라톤은 이것을 '이데아'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는데 '설계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설계도에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설계도(이데아)에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설계도에 걸맞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데아'를 따라 창조된 인간은 세상을 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왜 그럴까?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형상(이데아)대로 사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라고 한다.

 

그러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인간에게는 '이데아'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죄가 그것을 가로 막고 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하다.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에 의하면 그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이시므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 인간은 그분을 믿음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인간은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묻게 된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에 의하면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그 형상의 완성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되찾는 일은 현재의 이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저 천국에 가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제 완전한 구원, 완전한 형상의 회복이 있는 저 천국을 소망하며 살게 된다.

 

메타 내러티브는 이렇게 인간의 인생을 방향 지어주는 순기능을 한다. 그러나 메타 내러티브는 인간의 인생을 구속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속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는 인간을 미리 규정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데아)으로 지음 받았지만 죄로 인하여 형상을 잃어버렸고 그 형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구원 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 없으며, 예수를 믿어 구원 받은 뒤, 구원의 완성을 소망하며 천국을 갈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내러티브의 궤적에서 벗어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 궤적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존재를 속박하는 그 무엇이든지 거부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메타 내러티브' 자체를 거부한다. 우리 인간은 그러한 내러티브에 의해서 결정되고 목적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메타 내러티브에 의해서 그 내러티브와 동일하게 삶의 이야기를 복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신만의 메타 내러티브를 창조해 나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누구의 주장이 맞는 것일까? 딜레마다. 메타 내러티브를 인정하면 인간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속박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메타 내러티브를 부정하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허무에 처해질 수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허무에 처해질지언정 자유를 빼앗길 수는 없다는 결기 속에서 진행되는 것 같다. 여기서 기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내 눈에는 분명해 보인다. 자유를 빼앗지 않으면서도 허무를 피할 수 있게 해주는, 현대인들이 공감할 만한 '메타 내러티브'를 재창조하는 일이다. 그러한 메타 내러티브를 창조해내기 위해서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성경을 재해석하는 일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과 과학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그리고 그것들이 인간의 자유를 빼앗지 못하도록 견제하며 그들과 함께 자유를 지켜내며 허무를 몰아내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기독교가 계속하여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오래된 메타 내러티브를 고집하려 든다면, 기독교는 인간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폐기처분 될 것이다. 죽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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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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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

 

추운 겨울을 생각해 보죠. 그리고 집 한 채를 생각해 보고요. 칼바람이 부는 겨울 한 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집 한 채. 그곳에 ''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라는 게 사방으로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습니다. 옛날 허름한 초가집이라서 그럴까요. 문풍지를 대서 겨우겨우 막아 놓은 구멍들이 막아도 막아도 소용없는 듯, 구멍은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우리는 추위를 막아보고자, 온 힘을 다해서 그 구멍을 막아봅니다. 그런데, 구멍 하나를 막으면 다른 곳에 구멍이 또 뚫려서, 새로 생긴 구멍을 막느라 정신이 없죠. 추운 겨울 밤을 이겨내고자 열심히 구멍을 막아 댑니다. 열심히 막다 보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거라는 희망을 가지긴 합니다. 그런데, 정말 봄이 올까요?

 

구멍은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우리 삶에는 수없이 많은 죽음의 그림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죽음의 그림자들을 하나씩 지워 나갑니다. 우리가 하는 활동은 모두 죽음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한 것이지요. 아무리 막아도 들어오는 칼바람처럼 죽음은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위협합니다.

 

우리가 연애를 하는 것도, 결혼을 하는 것도, 직장을 갖는 것도, 스포츠를 하는 것도, 낚시를 하는 것도, 축구를 차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종교를 갖는 것도, 그리고 미쳐버리는 것도 모두 죽음에 맞선 행위들입니다.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행위들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행위를 열심히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늘 불안하고 불만족스럽죠. 우리가 마주한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죽음의 구멍이 있고, 그 구멍을 모두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항상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생, 사실, 우리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끝은 '실패'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실존이지요. 정말 허무하기 짝이 없죠.

 

그렇다면,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실패가 끝이니까 실패를 받아들이며 절망 가운데 살아가야 할까요?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생에 대하여 물었던 수많은 철학자들과 시인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을 묻고 있는 철학자들과 시인들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오롯이 존재하는 '죽음'을 응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생산해 내고 있는 구멍들을 최선을 다해 메우는 것이 죽음의 허무를 이겨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요즘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구멍이 너무 크게 뚫려 있어서 가뜩이나 추운 겨울, 황소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고통당하고 있는 시절입니다. 춥다고 아우성입니다. 구멍이 클수록 그 구멍을 막기 위해서는 '협동'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화이자나 모더나 같은 백신회사들만 그 구멍을 막기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전적으로 맡겨 놓을 수 있는 구멍도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이 큰 구멍을 막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협동'을 하고 있습니까? 구멍이 크게 뚫려 칼바람이 세차게 밀려들어올수록 우리는 절망하지 말고 그 구멍을 막아 내기 위하여 서로의 온기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버텨왔습니다. 삶을 위협하는 수많은 죽음의 구멍들을 잘 막아내며 살아낸 우리들이니, 이번에도 잘 막아낼 것입니다.

 

너무 춥지 않기를, 지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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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1. 17. 19:19

우리 시대의 나다나엘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요한복음 1:43-51)

 

주님,

혼란의 시대에 자칫 잘못하다간 길을 잃고

우리의 귀중한 생명을 헛된 것에 소모할 수도 있는 이 시대에,

사도 나다나엘과 같은 신앙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시대의 질곡을 돌파할 수 있는 지혜와 성찰이 반드시 필요한 이때,

우리도 나다나엘처럼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주의 말씀을 열심히 청종하며

우리의 시대와 삶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주여,

아무리 시대가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께서는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물이 흐르게 하시는 분이시니

구원의 길을 반드시 있는 줄로 믿습니다.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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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 17. 19:17

나다나엘이 필요한 시대

(요한복음 1:43-51)

 

(나다나엘이 필요한 시대, 라는 제목을 듣고, 왜 나다나엘이 필요하지? 나다나엘은 누구지?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떤 시대이길래 나다나엘이 필요한 시대라는 것이지? 이런 질문들이 떠올라야 한다.)

 

나다나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이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ㅡ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전문

 

이 시가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나왔는지 모르는 사람은 껍데기는 가라를 아주 웃기는 방식으로 해석할 것이다. “껍데기는 가라. 살코기만 오라.” 그러면서 먹는 것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한국 역사를 아는 사람은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고 있는 신동엽의 안타까움에 금방 스며들 것이다. 신동엽이 이 시를 세상에 내놓은 때는 1960년도에 있었던 4.19 혁명 후이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탄압, 그리고 억압적인 정치에 맞서서 민주화를 갈망했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사건이 바로 4.19 혁명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대한민국에 민주주의는 오지 않았고, 박정희에 의한 군부독재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면서 어느새 4.19 정신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신동엽은 그러한 시대의 아픔과 절망을 시 껍데기는 가라에 담아내고 있다.

 

성경의 인물인 나다나엘과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가 무슨 상관이 있길래, 나는 나다나엘을 생각하며 신동엽의 이 시를 떠올렸을까. 두 가지 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나다나엘의 순교와 관련된 전승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통찰력이 신동엽과 닮았기 때문이다. 우선, 나다나엘은 주님을 전하다 순교할 때 피부 껍데기가 벗겨진 채로 죽었다고 한다. 그러한 전승을 담은 예술작품이 이탈리아의 밀라노 두오모 성당과 바티칸 성 시스티나 성당에 남아 있다.

 

나다나엘의 순교 이야기를 가장 적나라하게 담고 있는 작품은 밀라노 두오모(대성당/dome이 있는 대형성당)에 세워진 마르코 다그라떼(Marco d’Agrage)의 나다나엘 입상이다(1562). 대개 사도들의 입상은 로마시대 영화에서 보듯이 긴옷을 겉에 두른 형식을 띄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나다나엘은 겉옷으로 천을 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벗겨진 피부 껍데기를 두르고 있다. (아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