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1. 2. 28. 17:22

공덕이 아니라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

(로마서 4:13-25)

 

주님,

공덕(merit)이 아니라 은혜(grace)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그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통해 ‘구원 받았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공덕으로 움직이는 세상을 기뻐합니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 신앙입니까.

주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다시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예수의 죽음을 묵상하며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공덕에서 벗어나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인간을 조건 없이 긍정하신 극강의 휴머니즘을 마음에 품어

우리도 서로 용납하며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는 휴머니스트가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향한 극강의 사랑을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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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2. 28. 17:20

극강 휴머니즘 (Extreme Humanism)

(로마서 4: 13-25)

 

요즘 주식 투자 열풍이 불고 있는데, 혹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업이 있는가? 주식 투자에 관심 없는 사람은 주식 뉴스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기업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식 투자에 관심이 있고, 어떤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면, 그 기업에 대한 소식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왜냐하면, 주식이 오르고 내리는 것이 내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주식이 올라서 돈을 벌면 좋고, 주식이 떨어져서 돈을 잃으면 마음이 좋지 않을 것이다. 주식을 샀다는 것은 이제 나의 삶이 그 기업과 연관되었다는 뜻이다. 나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면, 그것에 대하여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사순절은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질문하는 절기이다. 단순히 죽음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예수의 죽음이 나의 삶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복음이다. 기독교 복음이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은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기업과 연관을 맺으려면 주식을 사야 하지만, 즉, 주식을 사지 않으면 그 기업과 연관이 없지만, 예수의 죽음은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갖든지, 갖고 있지 않든지 상관없이 나의 삶과 연관이 있다. 그것을 복음의 보편성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그 기독교 복음의 보편성을 받아들이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삶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깨달아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등 예수의 삶의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나의 삶과 연관시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햇볕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햇볕은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이든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든 동일하게 비춘다. 생명체는 햇볕 없이 살 수 없다. 그러나 햇볕의 고마움을 인식한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햇볕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겠지만, 그 고마움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은 햇볕의 소중함을 모른다. 그렇다고 그들이 삶을 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냥 비추이는 햇볕을 받고 살 뿐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기에, 그것이 복음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었는가?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은 그 신앙이 어떠한 ‘가르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받아들고 죽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놓아두고 그것의 보편적 의미를 논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소크라테스가 살아 생전에 행했던 가르침에 주목할 뿐이다. 그것도 플라톤이라고 하는 제자를 통해서 재구성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주목할 뿐이다.

 

더 나아가, 인류가 공자라는 인물, 석가모니라는 인물을 성인으로 추앙하며 그들을 기리는 것도 그들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 때문이다. 지구 상에 존재했던 그 어느 인물도 그 사람의 죽음이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오직 예수의 죽음만이 ‘문제적 죽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이 무슨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길래, 우리는 사순절기 동안, 즉 40일 동안이나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질문하며 묵상해야 하는가? 40일 동안, 절기를 정해서 예수의 죽음을 묵상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죽음이 우리 인간에게 큰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일단, 한 가지 질문을 해보고 싶다. 다음 세 가지 진술 중에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진술은 무엇인가? 즉, 가장 믿기 힘든 진술은 무엇인가?

 

1) 무에서 유를 불러내시는 창조의 하나님 (creation from Nothing / God of Creation)

2)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 (God of Resurrection)

3) 죄인을 아무런 조건 없이 의인으로 받아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 (God of Salvation)

 

사실 세 가지 진술 모두 믿기 쉽지 않은 진술이다. 그러나, 1)번과 2)번은 인간의 현실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믿기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술도 아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3)번이다. 이는 인간의 현실적인 행위와 연관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이 세번째 진술과 관련된 신학적 논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게 왜 문제인가?

 

로마서를 통해 바울은 유대인들이 통념적으로 가지고 있던 신앙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유대인들의 생각한 의는 율법의 행위를 통한 의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하고 지킴으로써 의로움에 이른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율법을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한 일인 것 같지만, 현실에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 문제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쉽다. 지금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하고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하고 우주개발 경쟁이 붙었다. 그들의 꿈은 지구가 아닌 우주의 한 곳에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갖춘 행성을 개발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우주 개발에 성공했다고 가정한다면, 사람들은 점점 황폐화되어 가고 있어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지구를 떠나 그들이 개발한 새로운 세계로 가고 싶은 소망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그들이 개발한 우주의 행성으로 갈 수 있을 것인가’ 이다. 당연히, 우주의 행성으로 향하는 우주선의 탑승권을 구매할 수 있는 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 값은 얼마쯤 될까? 아마도 일반 사람들은 꿈 꿀 수 없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 것이다. 즉, 우주에 있는 또다른 행성으로 가는 일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그림의 떡’같은 이야기이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실에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율법을 지킬 수 있느냐, 아니냐는 신앙의 문제, 또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아주 현실의 문제다.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613가지에 달하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오늘 먹을 게 없는 사람에게 ‘안식일 준수’를 말할 수 있는가? 하루만 일을 하지 않아도 굶을 수밖에 없는데,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할 수 있는가? 안식일에 일하지 않고 쉴 수 있는 사람들은 하루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이렇듯, 율법을 통해 의로움에 이르는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통념은 필연적으로 차별을 가져온다.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무능력’한 자들로 나뉜다.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는 의로운 자가 되어 머리를 치켜세우고 다니지만,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는 불의한 자가 되어 머리를 숙이고 다녀야 한다. 현실 세계에서 율법은 구원의 방편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차별하는 방편이 될 뿐이다.

 

이것은 요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능력주의’와 매우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요즘 사회의 키워드는 ‘공정’이다. 공정을 평가하는 기준은 개인의 능력이다. 예를 들어,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기준은 ‘개인의 능력’이다. 학교 성적이 얼마나 좋은 지, SAT 점수가 얼마나 높은 지, 등 객관적 기준이라고 불리는 것을 통해서 입학 사정을 한다. 만약, 어떤 학생이 그러한 객관적 기준에 못 미치는데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고 생각되면, 학교의 입학 사정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빗발 칠 것이다.

 

최근 마이클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 The Tyranny of Merit>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공정이라는 덫’에 걸려 있는 지를 파헤치고 그에 대한 대안을 말한 적이 있다. 샌델은 공정의 기준이 되는 개인의 능력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아이비 리그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을 분석해 보면, 그들이 지닌 능력은 결코 공정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공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어진 것이기에 공정 자체를 평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하는 일이다. 경제력 뒷받침이 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한국의 명문 대학에 진학할 확률이 그렇지 못한 아이들에 비해서 월등히 높다. 그러므로 명문 대학 입학 자체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이 제시하는 공정에 대한 해결법은 매우 흥미롭다. 명문대학교 입학을 할 때, 일정 자격이 되는 학생들 중에 제비를 뽑아 합격자를 정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대기업 취직도 마찬가지다. 일정 자격이 되는 사람들 가운데서 제비를 뽑아 입사를 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이 제시하고 있는 방법을 받아 들일 수 있는가? 아마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내가 경쟁자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특별히 이러한 방식을 거부할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은 매우 전복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유대인들이 생각한 구원의 방식은 율법을 지켜 의로움을 스스로 보이는 자들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방식을 ‘공덕(merit)’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통념에 정면적으로 도전한다. 유대인들의 믿음을 뒤엎는 전복적인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율법을 통해서, 즉 인간들의 행위를 통해서, 또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능력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구원의 방식을 ‘은혜(grace)’라고 한다. 이게 아주 은혜로운 이야기 같지만,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게 아니다.

 

무에서 유를 불러내시는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일은 어렵지 않다. 우리는 심지어 그런 하나님을 간절히 원한다. 아무 것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기를 원한다. 그런 하나님은 나에게 유익이 되고 온당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일도 어렵지 않다. 나도 죽을 것이기 때문에, 죽은 나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오히려 감격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죄인을 아무런 조건 없이 의인으로 받아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일은 쉽지 않다. 아주 실제적인 문제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전교 일등 하는 학생과 전교 꼴등 하는 학생이 동일하게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전교 꼴등 하는 학생이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는 일은 감격과 은혜로운 일이겠지만(grace), 전교 일등 하는 학생이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merit). 그러나, 전교 꼴등 하는 학생과 동일하게 하버드 대학교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과연 전교 일등 하는 학생이 전교 꼴등 하는 학생의 하버드 대학교 입학을 기뻐해 주고 축하해 주고, 함께 자랑스러워 할 것 인가의 문제는 다르다.

 

사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여기에서 걸려 넘어진다. 겉으로는 창조의 하나님, 부활의 하나님, 그리고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일을 우리는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어떻게 죄인이 아무런 조건 없이 의인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어떻게 나보다 못한 인간이 나와 동일한 신분을 유지하고 나와 동일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가? 우리는 그러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며 산다. 우리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우리가 저 죄인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며 살아야 속이 시원하다. 그게 공평한 신앙이라고, 그게 공정한 구원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전복적이다. 극강의 휴머니즘이다. 구원에 조건이 없다. 아무리 죄가 많아도, 아무리 부족해도, 아무리 찌질한 인간이어도 하나님은 그들 사랑하시며 구원해 주신다. 무엇을 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냥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의롭다 여겨주신다. 무엇 때문에 그러냐면, 바로 예수의 죽음 때문이다. 예수의 죽음 자체가 우리 모두를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구원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냥 믿으면 된다. 그러니 얼마나 이 복음이 전복적인가. 이것은 인간을 무조건 긍정하는 ‘극강 휴머니즘’이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로마서의 복음은 바로 이 세 번째의 전복적인 진술, 죄인을 아무런 조건 없이 의인으로 받아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복음의 선포이다. 우리는 이미 자격, 능력주의, 공정이라는 잣대에 찌들어 살기 때문에 이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삶 속에서 그러한 전복적인 극강의 휴머니즘을 실천하지 못한다. 기독교인들은 믿음 자체도 ‘공덕(merit)’으로 변질시킨다. 자신이 이렇게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모든 일이 다 잘 돼야 하고 형통해야지 안 그러면 하나님이 마치 불의한 것(또는 안 계신 것)처럼 생각한다.

 

영적인 문제는 육적인 문제, 현실적인 문제로까지 번지는 법이다. 현실에서 누군가 더 많이 가지면, 누군가는 덜 갖게 된다. 누군가 어디에 합격하면 다른 누군가는 불합격 하게 된다. 더 많이 가진 자, 어떤 위치에 올라선 자는 자신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자신을 정당화한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 그것을 소유하고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데 정말 그런가? 예수의 죽음은 우리에게 그것을 묻고 있다.

 

예수의 죽음을 묵상하면 할수록 ‘극강의 휴머니즘(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을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보게 되고, 예수의 죽음을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 이 세상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곳인가를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히 엎드려 주님의 자비와 사랑, 그리고 구원을 바랄 수밖에 없게 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처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놓을 줄 알 때, 실제로 그런 삶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삶의 자리에서 발생하는 모든 구원을 놓아두고 ‘나는 이것을 받아 누릴 자격이 있어’라며 그 풍요로움을 낭비하지 말고,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시는 은혜야’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풍요로움을 아낌없이 나누시라. 그것이 바로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을’ 정도로 극강의 휴머니즘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의 휴머니즘이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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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이런 글이 많이 읽혀야 됩니다. 귀가 있다고 다 듣지는 멋하고 눈이 있다고 다 보는것은 아니겠지요. 우둔한 저도 읽고 또 읽어 봐야겠습니다.

    2021.03.04 06:25 [ ADDR : EDIT/ DEL : REPLY ]

시론(詩論)2021. 2. 26. 13:30

강성은의 시 ‘외계로부터의 답신’

 

어떤 날에는 우주로 쏘아올린 시들이 내 잠 속으로 떨어졌다

 

어쩌면 이것은 외계로부터의 답신

당신들이 보낸 것에 대한 우리들의 입장입니다

 

ㅡ 강성은 시 ‘외계로부터의 답신’의 한 부분, 시집 <단지 조금 이상한>에 수록

 

2004년 11월, 북유럽의 시인들이 스웨덴에 모여 외계인을 상대로 시 낭송회를 열었다. 이 시는 그 이벤트에 대한 기록이다. 북유럽의 시인들은 모여 26광년 떨어진 항성 베가를 향해 무선방송으로 시를 쏘아올렸는데, 그들의 시낭송은 그곳에 2054년에나 도착할 것이라 한다. 참 재밌는 이야기다. 북유럽이어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아마 남태평양의 시인들도 동일한 생각을 했을 지 모른다. 그들은 모두 하늘의 별을 밤마다 경험할 테니까. 산업화가 진행된 나라의 시인들은 더 이상 밤 하늘에서 찾아볼 수 없는 별을 그리워만 할 뿐, 그들처럼 이렇게 앙증맞은 이벤트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으면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힘든 법이다.

 

이 이벤트 소식을 접한 시인의 시선은 자꾸 우주로 향한다. 그래서 시인은 어떤 날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에서 멜로디를 듣는다. “한밤중에 세탁기에서도… 냉장고에서도 가방에서도 심지어 변기에서도” 시인은 멜로디를 듣는다. 그 멜로디가 어떤 멜로디인지는 모르지만, 멜로디를 듣는다는 것은 경쾌한 일이다. 심지어 변기에서도 멜로디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시인의 마음이 그만큼 열려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멜로디만 들리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어떤 날 주변의 모든 것에서 ‘독’의 기운을 느낀다. “읽은 페이지마다 독이 묻어 있고 내 머리털 사이로 예쁜 독버섯이 자라난다”고 말한다. 독은 사람에게 치명적인 물질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독을 만지고 또는 자기 안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이뿐만 아니라 시인은 어떤 날 “미치도록 사랑에 빠져든다.” 사랑을 하면 생기가 넘쳐야 할 텐데, 시인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내어놓는다. “그런데 이상하지 나는 병들어가고.”

 

비로소 우주를 바라보게 된 시인은 ‘외계’로부터 밀려오는 답신을 들은 것 같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인생에 대하여 묻는다. 인생이란 무엇이냐는 질문, 산다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 삶의 의미는 무엇이냐는 질문. 이 질문에 대하여 ‘외계’는 인간을 향해 수없이 답신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바깥에서 답신이 밀려오지 않는다면, 외계가 우리에게 답신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의 인생에 대하여 성찰할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는 답신이 있었다는 것도 모른 채, 자기 자신에게 몰입되고 침잠되어 의미없이 사라져갈지 모른다.

 

외계로부터 온 답신을 통해 우리는 인생을 돌아본다. 인생은 부조리하다고, 인생은 알 수 없다고, 인생은 온통 신비로 가득 차 있다고, 어떤 날은 사물에서 멜로디가 들리는 것 같다가도, 어떤 날은 독을 만지고 먹었는데도 죽지 않는다고, 어떤 날은 미치도록 사랑했는데 오히려 병들어 간다고, 우리는 우리의 부조리한 인생을 직면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해 의미를 찾으며 산다. 우리 자신의 바깥에서 들려오는 답신에 귀 기울인다는 것, 그것은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모험이다. 우리는 “우주로 쏘아올린 시들”에 대하여 어떤 답신을 듣고 사는가.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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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2. 23. 15:07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 안에서 종의 모습으로 살기를 간구하는 기도

(고린도후서 4:3-6)

 

주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인 것 자체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기 위하여 죽을 필요 없이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안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간 구원받은 존재로 삽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더 이상의 구원은 필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힘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주인’이 되려고 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낮추어

종이 될 수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온갖 악한 일을 생산해 내어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주인의 모습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전파하게 하시며

악에 의해 고통 당하는 이들을 섬기는 종이 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주님의 백성,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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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2. 23. 15:0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고린도후서 4:3-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익숙한 말이지만, 막상 뜯어보면 정말 어려운 말이다. 일단 언어구조를 보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형상이 동등한 관계로 설정되고 있다. A는 B이다(A = B).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복음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14:9).

 

세 단어,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형상 중에 어떤 단어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일까? 바로 ‘형상’이라는 단어이다. 영어로는 ‘Image’로 번역되는 ‘형상’이라는 말은 영어의 ‘이미지’라는 번역 때문에 많이 오해되는 단어이다. 우리가 대개 ‘이미지’라고 하면 어떤 상상적인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미지’는 어떠한 물체에 대한 ‘상상된 모사품’으로 이해된다. 또는 ‘그림’이나 ‘영상’ 같은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렇게도 쓴다. “그 사람 이미지가 어땠어?”라고 어떠한 사람에 대한 인상을 표현할 때 쓰기도 한다.

 

형상, 이미지라는 단어가 현대인들에게 위에서 열거한 용도로 사유되고 쓰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도 대단히 오해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모사품 정도로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인상을 볼 수 있다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을 매우 가벼운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불상사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형상(image)’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형상(이미지)’은 헬라어의 ‘에이도스(ειδως/eidos)’를 옮긴 말이다. 에이도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데아’라는 뜻이다. 플라톤 철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이데아’가 무엇인지 감이 올 것이다. 오래전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중 ‘교실 이데아’라는 노래가 있었다. 다음과 같은 가사를 지니고 있다.

 

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 족해 족해 족해

내 사투로 내가 늘어 놓을래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 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곤 덥석 모두를 먹어 삼킨

 

이 시커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 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진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교실 이데아>라는 노래를 통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교실의 이데아와 교실의 현실이 전혀 맞지 않고 심각한 괴리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실의 이데아를 회복하는 것이 학생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라는 강변이다. 교실은 원래 어떠해야 하는가? 교실은 학생과 학생이 뭔가 새로운 것을 함께 배우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서로의 기쁨을 나누고, 서로의 사랑을 나누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는 아이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경쟁자로 의식해 서로의 관계를 처참하게 밟아버리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즉, ‘형상’이라는 것, ‘이데아’라는 것, ‘에이도스’라는 것은 ‘~인 것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교실 이데아는 ‘교실인 것 자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교실인 것 자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 교실의 학생들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교실인 것 자체의 모습에서 벗어나면 교실의 학생들은 행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형상’이라는 것이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이 무엇인지를 마음 깊이 깨달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인 것 자체이다. 이것을 좀 더 설명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사람을 포함한 모든 물체들)는 ‘에이도스(이데아)’를 가지고 있다. 세계의 인구가 70억명이지만, 우리가 인간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라고 불리는 본질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에이도스(이데아, 형상)이다. 사자도 마찬가지고,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것들의 에이도스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각각의 에이도스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인간의 에이도스, 사자의 에이도스, 고양이의 에이도스는 어떠한 에이도스에서 나온 것일까? 각각 존재하는 에이도스의 에이도스를 일컬어서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플라톤 철학에서는 이것을 ‘일자’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일자인 하나님의 에이도스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에이도스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구원자)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보통의 고백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에이도와 동일한 존재라는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 자체라는 고백이고, 우리의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대어 있다는 고백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생명의 기원이시고 주인이시고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 자체가 그분의 존재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이도스(이데아/형상)는 우리의 감각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플라톤 같은 경우는 ‘동굴의 비유’를 써서 동굴 바깥에서 비춰오는 햇볕에 의해 동굴 벽에 맺힌 그림자를 보는 것처럼 우리가 ‘에이도스’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플라톤이 말하는 것보다 더 나아가서 매우 래디컬하게 말하고 있다. ‘에이도스’를 우리가 직접 봤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에이도스가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독교는 성육신 사건이라고 부른다. 플라톤이 말하는 구원은 인간이 죽어서 에이도스로 돌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는데, 기독교는 죽어서 에이도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에이도스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왔기 때문에 그 에이도스를 알아보고 믿으면 죽지 않아도 이미 구원 받았다고 말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3절). 여기서 말하는 복음은 ‘에이도스가 우리에게 육신을 입고 와서 우리의 눈 앞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정말 기쁜 소식 아닌가?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런 소망 없이 살다가 죽어서야 에이도스로 돌아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는 삶을 살다가, 에이도스가 우리에게 와서 그 에이도스를 알아보고 믿으면 지금 당장 구원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기쁨인가.

 

복음이 가리었다는 것은 구원의 현재성(구원을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누리는 기쁨)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의 현재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런 소망 없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일 뿐이다. 얼마나 불쌍한 인생인가. 그러나, 에이도스가 지금 여기에 오셨다는 것을 안 사람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인생은 이미 구원에 들어간 인생이기에 죽음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죽음이 두렵지도 않고, 이미 영원한 생명(에이도스)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삶 자체가 어메이징 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를 통해 다시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교실 이데아에서 묘사되고 있는 아이들은 교실 ‘이데아(에이도스)’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산다. 그들은 이데아(에이도스)에서 한참 벗어난 인생을 산다. 그렇다 보니, 교실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지옥을 사는 것 같다.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 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 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이런 교실의 풍경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다. 그러나, 교실 이데아(에이도스)가 실현된 교실을 경험하는 아이들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얼마나 생명력이 넘칠까. 그들은 더 이상 경쟁할 필요도 없고, 교실 안에 있는 다른 친구들을 자신의 경쟁자로 의식해서 그들을 미워할 필요도 없고, 교실의 다른 친구들과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 것이다. 그런 풍경, 그것이 바로 구원의 풍경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즉, 그리스도는 에이도스의 실현이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에이도스’, 그 생명의 깊이, 생명 그 자체를 경험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을 통해서 일희일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자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에이도스를 경험했다고 하면서, 이미 천국을 산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의 일들에 의해서 압도당하여 두려움에 떤다.

 

우리가 경험하는 불의, 폭력, 압제 등은 하나님의 에이도스를 경험하지 못한 ‘망하는 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서든 구원을 성취해 보겠다는 몸부림이고 아우성이다. 왜 세상 사람들은 옆의 사람들을 도와주기는커녕 그들에게 불의를 저지르고, 폭력을 가하고 압제하는가? 존재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내가 저 사람의 것을 빼앗아 좀 더 가지고 있어야 자신의 삶이 안정을 누릴 수 있다는 거짓된 착각, 거짓 구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에이도스’를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 그에게 구원이 묘연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한 일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이루려는 구원의 성취에 대한 욕망일 뿐이다. 그들은 참된 생명, 참된 구원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에이도스’, 하나님의 생명에 거하게 된 자들은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5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에이도스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전파한다. 그게 불의, 폭력, 압제와 같은 악으로 나타난다. 구원을 스스로 이루려는 사람의 비참한 운명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에이도스’라는 것을 알고 그를 믿는 자,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낸다. 예수가 바로 에이도스들의 에이도스이기 때문이다. 생명 중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내가 드러나면 악을 드러낼 뿐이지만, 생명 중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면 구원사건이 발생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전적으로 알려준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

 

이 진술은 스스로 구원 이루려는 세상의 가치와 완전히 반대되는, 완전히 전복적인 가치를 말해 준다. 스스로 구원 이루려는 사람들은 ‘주인’이 되려 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에서 말하고 있는 ‘옆에 있는 그 애보다 좀 더 비싼 존재’, ‘옆에 있는 그 애의 머리를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좀 더 잘난 존재’가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의 가치는 완전히 전복적이다. 그리스도인은 주인이 되려하지 않고, ‘종’이 되려 한다. 왜? 모자란(모질란) 존재여서가 아니라 ‘옆에 있는 그 애보다 좀 더 비싼 존재’가 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그 애의 머리를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좀 더 잘난 존재’가 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무슨 구원이 더 필요한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바쁘게 사는가? 우리는 무슨 필요를 채우기 위해 힘들게 사는가? 우리는 무엇이 부족하여 두려워 하는가? 우리는 ‘주인’이 되기 위하여 이렇게 바쁘고 힘들고 불안해며 사는가? 아니면,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생명의 풍성함을 잃어버린, 그래서 삶이 쪼그라든, 이 세상의 불의와 폭력에 희생당하여 정신을 잃어버린 그들의 종이 되기 위하며 바쁘고 힘든가? 세상이 조장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휩쓸려 이리저리 휘둘리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되신 하나님의 에이도스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에이도스를 경험했다면,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에 휩쓸려 있는 이웃들에게 소망과 사랑과 자유를 가져다 주기 위하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종의 모습으로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바쁠수록, 불안할수록, 두려울수록, 그 바쁨과 불안과 두려움에 휩쓸리지 말고,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에이도스(형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하나님의 형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주인’이 되고자 하는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에서 ‘종’이 되고자 하는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우리를 잠잠케 하실 것이다. 하루에 단 1분이라도 좋으니, 촛불을 켜고,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안에 푹 잠기라.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그 구원에 잇대어 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예배 드리는 우리 모두는 이미 구원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자기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성취가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누리는 ‘놀이’어야 한다. 그러니, 평안을 누리라. 그 평안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라.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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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2. 7. 17:41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 생각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시편 147:1-11)

 

주님, 우리의 악함을 용서하옵소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크기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고

나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느라

악한 일을 저지르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주님, 믿음의 선조들이 보여주었던 신앙을 배우게 하옵소서.

그들은 자신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하나님의 그 위대하신 존재의 크기 안에서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신앙의 선조들은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들은 다른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며

이웃과 세상을 이롭게 하고

눈 앞에 닥친 어려움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않고

그 어려움을 뚫고 지나가 새로운 세상을 열어 젖혔습니다.

주님, 주님은 위대하시고 능력이 많으시고 지혜가 무궁하십니다.

우리의 존재의 크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 크기 안에서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게 하셔서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 안에서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가며

주님을 향한 찬양이 끊이지 않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가 얼마큼인지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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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2. 7. 17:39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와 우리의 존재의 크기

(시편 147:1-11)

 

외할아버지께서 내리신 우리집 가훈은 이렇다. “적극신앙 / 성실근면 / 평화위주 / 순종효도”. 여기에 ‘적극신앙’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이것이 기독교 집안에 내린 가훈인지, 아니면 일반 집안의 가훈인지 분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외갓집이 유서 깊은 유교 집안이라 우리 집안의 기독교는 ‘유교적 기독교’였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은 할아버지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신 지 오래되었고, 아버지 대의 목사님들도 거의 은퇴를 하신 시점이라, 우리 집안의 기독교는 예전보다 유교적 색채가 많이 없어진 것이 사실이다. 이제 3대째 자녀들이 일선에서 한창 목회를 하고 있는 시대이고, 유교문화보다는 서구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서구적인 기독교의 색채가 많이 들어와 있다.

 

유교적 색채가 워낙 강했던 터라, 우리 집안에는 샤머니즘적인 기독교의 색체는 거의 없다. 물론 한국 기독교의 4대 부흥사 중 하나로 추앙받고 있는 이용도 목사와의 인연 때문에 ‘부흥사 기질’을 가지고 있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유교적인 기독교 가풍에 의해서 집안의 목회자들이 모두 점잖은 편이다.

 

순수한 기독교는 없다. C. 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에서 기독교의 여러 전통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공통적인 신앙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변증하기는 했지만,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기독교는 없다. 어떤 토양에 복음이 전해졌는지에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모양은 조금씩 다르다. 집안 내에서도 각 가정마다 신앙의 모양이 다르다. 친형 가정의 신앙의 모양과 우리 가정의 신앙의 모양도 차이가 난다. 심지어, 나와 우리 집사람의 신앙의 모양도 차이가 있다. 하물며, 한 교회를 섬기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의 모양도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다양한 신앙의 모양을 갖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히려 축복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 현상도 마찬가지다. 생명이라는 것이 한 육체 안에 들어가면 그 육체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내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생명 현상과 내 자녀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생명 현상은 같지 않다. 아주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서 발생하는 생명 현상이 다르다는 것은 축복이다. 우리는 나와는 다른 상대방 안에서 발생하는 생명 현상을 통해서 생명의 넓이와 깊이를 배운다. 우리는 각자 생명을 받았지만, 모든 생명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어진 생명을 통해서, 그리고 이웃들의 생명을 통해서 생명을 조금 맛볼 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본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생명을 경외하는 것이다. 생명의 깊이와 넓이 앞에서, 아주 조그마한 생명 밖에 경험하지 못하는 존재로서 생명을 경외하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위대한 일이다. 생명의 경외는 사랑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 전체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명의 일부분만 경험하는 연약한 존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생명을 경외하지 않는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모든 생명을 알고 모든 생명을 경험해 본 것처럼, 그래서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하는 일은 ‘남을 판단하는 일’이다. 자기가 경험하는 생명이 아주아주 일부 밖에 안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아주 무례하게 행동하기 일쑤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을 ‘차별’한다. 차별은 마치 자신이 생명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의 대표 행동이다.

 

최근 AP 뉴스에 의하면, 디즈니가 그동안 인종차별 문제에 둔감했다는 비판을 받고, 작년에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인종차별적인 과거를 청산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놀이기구 테마를 바꾸었다고 한다. 디즈니에 가면 Splash Mountain이라는 놀이기구가 있는데, 이 테마가 인종차별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 영화 ‘Song of the South’에서 가져온 것인데, 이 놀이기구를 다시 재구성해서, 흑인 여성이 주연을 한 에니매이션 ‘the Princess and the Frog’를 테마로 바꾸기로 했다고 한다.

 

백인들이 인종차별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경험하는 생명 현상이 다른 인종들이 경험하는 생명 현상보다 우위에 있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백인이라는 바디(몸)에 들어가 있는 생명과 흑인이나 아시아인의 바디(몸)에 들어가 있는 생명이 다른가? 그렇게 생각하는 백인은 오히려 생명의 경험을 매우 좁게 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미국에 와서 제일 불편한 단어가 'people of color(유색인종)'라는 말이다. 한국에 살면서 나는 한 번도 내가 '유색인종'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미국에 살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냥 사람이다. 인간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나를 '유색인종(people of color)'이라고 한다. 영어 자체에 인종차별이 들어 있다.

 

인종차별뿐 아니라, 성차별(젠더의 차별), 아동차별, 노인차별, 장애인 차별, 등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각종 차별들은 상대방 안에 들어가 있는 생명을 무시하는 행위이고, 마치 자신이 상대방보다 생명을 더 잘 경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생명이라는 것이 그렇다. 그 생명을 몸에 품고 있는 내가 그 생명을 어떻게 향유하느냐에 따라서 생명의 가치가 달라진다. 주어진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풍성한 생명의 삶을 살면 그 사람이 보여주는 생명의 가치는 매우 크다. 그러나, 주어진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고 생명을 남용하면 생명은 매우 추악해 보인다.

 

부모가 자식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부모는 자식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이 잘 되면 자신의 영혼이 잘 된 것처럼 마음이 기쁘고, 자식이 좀 잘 되지 못한 것 같으면 자신의 영혼이 망친 것처럼 우울해 한다. 생명이라는 것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학생은 우울증이 심하다. 우울증은 병리적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병리적 우울증은 적당한 호르몬을 맞으면 극복이 된다(물론 극복이 쉽지 않고 안 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사회적 우울증은 호르몬을 맞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 관계가 건강해져야 한다. 요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사회적 우울증이 심하다. 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항간에는 기독교인들이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더니, 바로 그 차별금지법이 세워지지 않는 것 때문에 사회적으로 차별 받게 생겼다고 걱정한다.

 

가뜩이나 코로나 블루 때문에 우울한데, 사회적 우울증까지 겹쳐 기독교인들의 건강 상태가 매우 걱정된다. (반대로,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우울증을 유발하여 사람들을 더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는 비판도 받는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인데, 사회적 우울증으로 인하여 생명이 축소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기독교가 사회적 우울증을 유발한다는 것도 매우 불행한 일이다.)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릇된 신앙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을 잘못 배워서 그렇다. 기독교인들이 자주 범하는 잘못은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의 생명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고, 죄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가령, 기독교인은 자신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고 자기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구원 받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차등을 둔다. 이러한 영적 차별은 생명 차별로 이어지는데, 예수를 믿지 않아 구원 받지 못한 이들을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다 보니, 자칭 구원 받은 이들은 다른 생명을 차별하고, 판단하고, 무시하며, 상대방의 생명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한다. ‘너는 죄인이야. 너는 구원 받아야 할 불쌍한 존재야.’

 

또한 자기 자신을 매우 특별한 존재로 여기게 되다 보니, 자신에게는 어떠한 악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특별히, 요즘 전염병과 관련해서 자신들은 전염병에 안 걸릴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요즘 물의를 일으킨 선교단체의 선교사가 설교시간에 한 말이다. 그리고 어느 대형교회에서는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준다는 ‘anti-covid 19 카드’를 팔려다 세간의 비난을 받고 철회한 일도 발생했다. 주님께서 지켜주실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미신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기독교는 어떤 토양에 복음이 뿌려졌는지에 따라서 그 모양이 다르다. 유교적 토양에 뿌려지면 유교적 기독교가 자라고, 샤머니즘적 토양에 뿌려지면 샤머니즘 기독교가 자란다. 기복적 토양에 뿌려지면 기복적 기독교가 자라고, 냉소적 토양에 뿌려지면 냉소적인 기독교가 자란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의 존재에 하나님의 존재를 맞추는 일과 같다. 그렇다 보니,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의 존재의 크기만큼 밖에 안 자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신앙의 왜곡현상이 일어난다. 그러한 기독교의 왜곡현상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언제나 거꾸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생각의 방식을 시편에서 배운다. 그래서 성경이 중요한 것이다. 성경이 왜 중요하냐면, 무엇보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의 선조들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보았다. 이것을 배우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편의 시인은 첫 구절부터 먼저 “할렐루야!”를 외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1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선한 것이고, 그 일은 아름답고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선하거나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가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어떠한 일이 진행되어야만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것은 자기 중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의 시인은 정반대이다. 자신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선한 일이고 마땅한 일이다.

 

이어지는 시인의 사유(생각의 방식)를 보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를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2-3절). 모든 일의 주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흩어진 자를 모으시고, 하나님이 고치시며, 하나님이 싸매주신다. 사람의 일 뿐 아니라, 자연의 일까지도 모두 하나님이 주어이다.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8-9절).

 

구름이 하늘을 덮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비가 내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산에 풀이 난 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우리는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를 보며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우리는 아마도 그럴 겨를이 없다고, 그런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거나 찬양을 돌린 적이 한 번도 없을 것이다. 왜? 우리는 우리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을 생각할 뿐이지,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은 왜 나 자신의 존재의 크기까지만 성장하고 마는가? 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크기를 벗어나서 훨씬 더 풍성하게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조그마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의 크기만큼만 생명을 누리고 마는가? 왜 한 발자국도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의 이 조그마한 존재의 크기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10-11절). 자신의 말의 힘 안에서만 생명을 이야기 하는 자, 자신의 다리의 억셈 안에서만 생명을 이야기 하는 자, 곧 자신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만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 즉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 자기 자신을 생각할 줄 아는 자를 기뻐하신다.

 

우리 인간의 크기 안에서 지금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크기 안에서 생명을 극복해 보려고 이런저런 안간힘을 쓴다. 그렇다 보니 위에서 말한 이런저런 미신 같은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미신은 모두 자신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 생명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인간적인 노력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 우리의 인생을 바라다볼 줄 안다면, 우리는 시편의 시인처럼 우리에게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압도당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의 크기 안에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오히려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준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여호와께서는 겸손한 자들을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5-6절). 우리의 존재의 크기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은 크신 분이다. 그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지혜가 무궁하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크기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겸손한 자)들을 붙들어 주시지만, 자신의 그 조그마한 크기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바라보는 자(악인들)들을 땅에 엎드러뜨리신다.

 

자신의 크기 안에서 생명을 살아가니까 남을 차별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크기 안에서 생명을 살아가니까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신의 크기 안에서 생명을 살아가니까 두려운 거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이 아름다운 말씀이 우리 귀에 들린다면, 우리는 당장 우리 존재의 크기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려는 악한 일을 버리고,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 우리와 세상을 바라보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 악하게 살거나 미련하게 살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날마다 위대하고 능력이 많으시고 지혜가 무궁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찬양하며 아름다운 인생을 살자.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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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이용도 목사 전집을 새롭게 기획, 출간 중인 도서출판 주의 것의 정재헌 형제입니다. 이용도 목사님에 관한 내용을 검색하던 중 목사님의 귀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할아버님께서 이용도 목사님과의 '인연'이 있었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참으로 궁금한 부분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언제 전화나(010-4429-5578) 아니면 이메일(yesupeople@naver.com)로 한번 말씀을 들을 수 있을는지요. 이용도 목사의 자료를 계속 모아서 현재 새롭게 전집을 출간해가고 있는데, 귀한 내용이 있을 듯하여 이렇게 불쑥 연락드렸습니다. 편하신 때에 답장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재헌 형제 올림

    2021.02.09 18:47 [ ADDR : EDIT/ DEL : REPLY ]

[아나키즘]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좀 더 급진적인 질문은 ‘국가는 필요한가?’이다. 근대(modernity)의 특징 중 하나는 ‘국가’의 실체가 또렷해지고, 국가가 모든 권력을 거머쥐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세속 권력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어거스틴이 서로마제국의 몰락을 목격하며 그의 저서 <하나님의 도성>에서 지상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을 나누고 이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사유한 이래로 국가는 지상의 도성을 대표하고 교회는 하나님의 도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인간의 역사가 ‘근대’로 들어서기 전까지 인류의 역사는, 또는 기독교의 역사는 ‘지상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 간의 힘의 대결이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가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지상의 도성’이 ‘하나님의 도성’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현실적으로 나타났는데, 하나님의 도성인 교회가 이제 공공영역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사태로부터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국가(세속적 힘)가 교회(영적인 힘)를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분명 종교개혁 때부터였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진영 간의 합의한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1555년)에서 ‘Cuius regio, eius religio(whose realm, their religion, 각자 자신의 통치하는 영역에서 자신의 종교를 정한다/군주의 종교가 곧 그 지역의 종교이다)의 원칙에 따라 세속 권력이 ‘종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가 국가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교회(종교/가톨릭이냐, 아니면 개신교냐)를 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이후 교회의 권력은 계속 쇠퇴하였고, 국가의 권력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러나 급기야 ‘근대국가’가 들어서면서 힘의 균형은 완전히 깨지게 되었다. 더 이상 국가 권력에 필적할 만한 권력을 지닌 집단이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다. 근대 국가는 압도적인 힘으로 ‘폭력’을 독점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 홉스 같은 경우는 국가를 전설적인 괴물 ‘리바이어던’에 비유하기도 했고, 마키아벨리는 국가 권력의 무제약성을 논하기도 했다. 이제 국가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적인 힘, 폭력이 된 듯하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는 사람들은 국가를 긍정하며 국가가 올바른 기능을 수행하도록 이끄는 사유를 한다. 그러나 더 급진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 ‘국가는 필요한가?’를 묻는 사람들은 국가를 부정하고, 국가는 없어져야 할 것으로 사유함과 동시에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바로 이렇게 국가가 없는 세상을 사유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아나키스트’라고 부르고, 그들의 생각을 ‘아나키즘’이라고 부른다. 아나키즘의 어원은 그리스어 ‘아나르코스’이다. 이는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 당연히 배가 산으로 갈 위험이 있지만,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국가의 필요성을 물었다.

 

아나키즘은 오래된 미래이다. 한국에 아나키즘이 서구로부터 수입된 것은 1910년대 이후이지만, 동양사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나키즘을 품고 있었다. 묵가나 도가 사상에서 그 원류를 찾아볼 수 있는데, 예로부터 사상가들은, 또는 일반 민중들은 국가의 필요성을 질문했고,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국가’라는 것이 삶을 오히려 괴롭힐 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파악하여 거부해 왔다. 물론, 국가를 거부하는 생각은 ‘불온한 생각’으로 여겨져 국가 권력으로부터 무수한 핍박을 받아왔지만 국가의 존재에 대한 거부는 지금도 끊이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다.

 

서구에서 아나키즘이라는 사상이 처음 등장한 것은 1793년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의 저서 <정치적 정의와 그것이 보편적 미덕과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고찰>에서부터 이다. 그 이후 ‘아나키즘, 또는 아나키스트’라는 용어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은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가 삐에르 프루동(Pierre J. Proudhon)이다. 그는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 아나키스트 용어를 매우 긍정적인 용어로 바꾸어 놓았으며, 아나키즘이 널리 사유되도록 기반을 놓았다. 아나키즘은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 등지에서 꽃을 피웠는데, 그 중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들은 프루동 이후에 등장한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과 표트르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이다. 바쿠닌은 <국가주의와 아나키>를 통해서, 크로포트킨은 <빵의 쟁취>와 <상호부조론>을 통해서 각자가 가진 아나키즘에 대한 생각을 펼쳤다. 또한 미국의 머레이 북친 (Murray Bookchin)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사회생태론’을 주창하며 아나키즘을 더욱 심화시켜 사유했다. 최근에는 미국의 양심,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에서도 일제의 침략과 맞물려 독립운동이 발생하면서 ‘아나키즘’이 꽃을 피웠는데, 일제감정기 당시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 신채호 선생이 있다. 그는 김원봉이 이끌던 아나키스트 단체 의열단의 부탁을 받고 1923년에 <조선혁명선언>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식민지의 처참한 현실을 알리며 거기에 맞서 어떠한 나라를 세워 나가야 할지에 대하여 고민한다. (여담이지만, 초호화 캐스팅으로 성공을 거둔 영화 ‘암살’이 바로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나키즘은 혼란한 한국의 일제침략기에 독립운동을 하며 어떠한 나라를 세워나가야 할지 고민하는 사상가들이나 문이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아나키즘의 사상을 바탕으로 실제로 ‘이상촌’을 건설하려 했던 인물 중 김좌진 장군이 대표적이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서 벌어진 문학계의 ‘아나-볼 논쟁(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의 논쟁)’도 빼놓을 수 없는 아나키즘 논쟁이다.

 

‘국가 없는 삶은 가능할까?’ 현재 국가의 존재를 공기처럼 너무도 당연한 존재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질문은 ‘부모 없는 삶은 가능할까?’ 또는 기독교인이라면 ‘신 없는 삶은 가능할까?’처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엄청난 질문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사실, 특별히 기독교인에게는 ‘국가’라는 개념은 생소한 개념이어야 한다. (물론 현실은 이와 반대이지만.) 구약성경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가서 ‘(왕으로 대표되는) 국가’를 세워 달라고 요청했을 때 사무엘은 ‘국가’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리고 사무엘은 국가가 그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오히려 폭력을 가져올 거라는 경고를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열왕기상하의 이야기는 ‘국가’로 인하여 고통당하다 결국 멸망하고 마는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그렇게 성경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존재를 부정한다.

 

신약성경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복음은 근본적으로 국가(국가에서 확장된 제국)에 대한 거부이다. 국가에 대한 거부는 예수의 이 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그리고 예수의 복음은 근본적으로 이 땅 위에서 ‘국가’ 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먹고 잘사는 법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다음 세상의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사는 이 현세의 세상에서 ‘국가’ 없이, 국가의 폭력을 당하지 않으면서, 국가의 폭력에 희생자가 되지 않으면서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복음’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런 관점에서 보지 못하고 죽은 후에나 도달할 수 있는 유토피아로 생각하며 이 땅에서 고통만 당하고 그 고통의 근원에 저항하지 못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사실, 기독교는 생득적으로 ‘아나키즘’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생득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이다.

 

잔인한 생존 경쟁으로 내몰리고, 국가의 강력한 통제 아래서 국가 폭력의 희생자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아나키즘이 전해주는 전복적인 생각들은 이 시대의 어려움을 넘어서는데 큰 지혜로 다가온다. 특별히 아나키즘이 말하는 ‘직접 행동의 습관’, 즉 ‘우리’와 관련된 결정을 내리는 권한을 ‘그들국가/권력자들, 자본가들)’로부터 되찾아오는 습관을 형성하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 또한 생태계의 위기 앞에서 아나키즘이 지향하는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스스로 자급하는 사회구조를 통해 국가와 자본의 집중화가 망쳐 놓은 이 세상의 생태계를 복원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장 급한대로, ‘국가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국가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더 힘을 쏟도록 길을 제시하는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국가는 필요한가’라는 급진적 질문을 통해 국가 없는 세상을 꿈꾸며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가 서로를 돕고 사는 생태적 지구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일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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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詩論)2021. 2. 1. 12:26

[김남주의 시 "어떤 관료"]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ㅡ 김남주 시 "어떤 관료" 전문

 

외할아버지( 故 오지섭 목사님)께서 우리집에 내리신 가훈은 이렇다.

 

적극신앙

성실근면

평화위주

순종효도

 

전형적인 유교이념이 반영된 가훈이다. 이 시와 연관해서 눈에 띄는 가훈의 대목은 '성실근면'이다. 시에 등장하는 관료가 관료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근면하고 성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의 눈에 보이는 관료의 근면과 성실은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근면과 성실 자체는 좋은 덕목이나 어떤 근면, 어떤 성실, 무엇을 위한 근면과 성실이었나를 물었을 때, 문제는 달라진다.

 

철학자 강신주의 김남주의 이 시와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 사상을 연결시켜 해석한 적이 있다. 나치에 부역했던 전범 아이히만이 보인 덕목도 '근면과 성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근면과 성실은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이히만에게서 보이는 이 사실만 보더라도 무엇을 위한 근면과 성실인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대개 학창시절 각 학급에는 '급훈'이라는 것이 있었다.(지금도 있는 지는 모르겠다.) 그때 각 학급의 급훈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던 것이 '근면과 성실'이었다. 학교 교육의 목표가 마치 학생들을 근면하고 성실한 인간으로 키워내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근면인지, 무엇을 위한 성실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근면하고 성실한 학생들은 공부도 잘했다. 그렇게 그들은 근면과 성실로 좋은 대학에 입학을 했고, 각종 나라 시험에 합격을 했고, '관리'가 되었다. 나라는 관리들에 의해서 운영이 된다. 근면하고 성실한 관리.

 

그러나, 근면하고 성실한 관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나라에 봉사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우리는 독일의 관리 아이히만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근현대역사를 통해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근면과 성실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사유'이다. 사유하지 않는 사람, 사색이 없는 사람, 생각이 없는 사람이 근면하고 성실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이히만'과 같이 엄청난 대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렌트의 통찰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불렀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해 분업화가 심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떠한 사회적 파장을 불러올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각자 분업된 일을 근면하고 성실하게 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지금 발생하고 경험하고 있는 악한 일들에 대하여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듯이 방관하며 산다. 바로 이러한 현상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교묘히 들어와 있는 악의 실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지금 시대는 그 어느때보다 '사색적인 삶'이 절실히 필요하다. 내가 하는 일이 단순히 나를 먹고 살게 해준다고, 그 이후에 발생하는 일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말 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일이 혹시 누군가를 맘 아프게 하거나 누군가의 생명을 해치거나, 우리가 사는 지구(프란치스코 교황의 용어를 빌리자면 'common home')를 망가뜨리는 것은 아닌지, 순간순간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사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좋은 '근면과 성실'이라는 덕목은 가장 추악한 덕목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너무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지 말자." 좋지 아니한가.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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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21. 2. 1. 12:22

사랑의 진보를 간구하는 기도

(고전 8:1-13)

 

주님, 2천년 전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가진 문제점을

한 치도 극복하지 못한 현재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지식의 진보는 이루었으나

결국 사랑의 진보가 없어 멸망의 위기에 처한 우리들을 보시고

슬퍼하며 울고 계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식으로 잘못 생각한 2천년 전의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믿음은 지식을 넘어선 사랑이라는 것을 그토록 몸소 가르쳐 주셨지만,

우리는 지식에 머물러 만족하며

마치 구원받은 자인 것처럼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 다시 한 번 주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구원이 무엇인지 배우게 하옵소서.

결국 우리는 구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 십자가 사랑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나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는,

사랑의 능력을 배우게 하셔서

우리 뿐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곤궁에서 구원하는 실제적인 능력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결국 사랑이 구원합니다.

그러니 그 어떤 것보다 사랑을 배우게 하옵소서.

그 어떤 것보다 사랑의 진보가 있게 하옵소서.

이미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새일을 시작하신 주님을 믿고

우리가 닥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몸소 가르쳐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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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2. 1. 12:20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고린도전서 8:1-13)

 

“이제 개신교라면 지긋지긋합니다!” 지난 주 인터넷 뉴스 매체를 달군 헤드라인이다. 광주 IEM 국제학교(IM 선교회) 발 바이러스 전파를 두고 한 일반 시민들의 반응이다. 그 사람들이 ‘지긋지긋하다’라고 말할 때, 저렇게 콕 찍어서 “이제 ‘개신교’라면 지긋지긋합니다”라고 말했을 리는 없다. 그냥 “이제 교회라면 지긋지긋합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기자가 옮기면서, 교회 대신 ‘개신교’라는 단어를 넣었을 것이다. 이게 참 재밌는 현상인 거다. 예전 같으면, 그냥 ‘교회’, 또는 ‘기독교’라고 했을 텐데, 이제 아주 명시적으로 ‘개신교’라고 하는 이유는 기독교 내에 여러 종파가 있기 때문인데, 아마도 다른 종파(예를 들어 가톨릭)와의 구분을 두기 위해서 일 것이다.

 

개신교가 자꾸 바이러스 전파의 진원지가 되는 이유는 ‘친교문화’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단순히 ‘친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신경에 명시하고 있듯이,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 ‘친교, 교제, 코이노니아’는 신앙의 원리 중 하나다. 그래서 교회에는 친교의 문화가 깊숙이 들어와 있다. 친교(교제, 코이노니아)는 좋은 것이다. 요즘 시대에 어디서 이러한 친교를 나눌 수 있겠는가. 같이 밥 먹고, 서로의 삶의 문제를 놓아두고 위로해 주고, 함께 기도하고, 이러는 것은 참 좋은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인들은 이렇게 좋은 신앙의 원리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 문제를 일으키는 정황은 다르지만 문제의 성격은 같다. 고린도교회가 자리한 고린도라는 도시는 헬라도시였다. 헬라사회는 다신교 문화였기 때문에, 발달된 도시에는 여러 신전들이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종교행사를 중심으로 ‘feast(축제)가 열렸다. 지금처럼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았던 그 당시, 종교행사를 중심으로 열리는 축제는 모든 이들에게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신에게 바쳐진 음식은 종교행사가 끝난 뒤 그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지금 막 제사를 드린 그 신을 섬긴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 그것을 먹는다는 뜻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이다.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이방신들은 우리가 제물로 드린 음식을 신이 먹지만, 기독교에서는 우리가 신의 몸을 먹는다.)

 

고린도교회가 처한 현실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놓아두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지금 현재 우리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이 문제를 놓아두고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고대사회처럼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제사를 드리는 종교도 없을 뿐더러, 우리는 그러한 문화를 가진 곳에 살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설사 그렇더라도, 우리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아주 맛있게 먹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지식’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4절).

 

이런 것을 보면, 우리는 분명히 ‘지식의 진보’를 이루었다. 우리는 더 이상 우상의 제물을 꺼림칙하게 생각하거나 ‘우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진보이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당시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그런 문화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여전히 우상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교인 중에는 ‘복음’을 들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습관대로 우상의 제물을 먹을 때 우상에게 바쳐진 것으로 인식하면서 그 음식에 깃든 우상의 힘을 의식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그 음식을 먹는 교인들이 있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서로 다른 태도를 지닌 사람들의 갈등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갈등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지식(그노스)’ 때문이었다. 이 지식은 다른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지식이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5-6절).

 

우리가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영적 지식’이지만, 그 당시 이것은 최근에 드러난 아주 신비한 지식이었다. 지금 바울이 다시 진술한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드러난 하늘의 지식이었다. ‘우리에겐 한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모든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또한 만물이 그에게서 났다’는 이 지식은 현재 고린도 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자칭 신과 주님이라고 불리는 우상에 대한 숭배행위를 일소에 부정하고 무너뜨리는 엄청난 ‘하늘의 지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식(그노스)’을 알게 된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서 발생했다. 이 지식을 알고 난 후의 그들의 행동이 문제였다. 그 문제점은 1절과 2절에서 지적된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1, 2절). 위에서 진술한, 그 하늘의 지식을 알게 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교만해졌다. 교만의 특징은 자기를 높게 여기고 다른 이들을 낮추어 보는 것이다. 고린도교인들 중에는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알고 나서 교만해진 사람들이 있었다. 본인이 무슨 위대한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을 했고,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아직도 모르고 우상의 제물 앞에서 쩔쩔매는 사람들을 깔봤다.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 교만했던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요즘 문제를 일으키는 한국 교회의 교인들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안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쭐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은 그 지식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구원받았다’는 자기 확신 안에 거했다. 이것은 그 당시 굉장히 유행하던 ‘영지주의적인 생각’이다. 영지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그노스(특별한 영적인 지식)’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가진다는 것이다. 어떤 지식을 소유함으로 인해 그들은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을 했다. 교만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가졌던 영적 지식(그노스), 그래서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게 만들었던 그 영적 지식이 바로 6절에서 진술되고 있는 그 지식이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6절).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 “아니다! 그 지식(그노스)을 가지고 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며,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지식(그노스)’이 아니라 ‘사랑(카리타스)’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2절). 이것은 매우 매우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원리이다.

 

우리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가졌던 ‘지식’, 그러나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갖지 못하고 일부 사람들만 가졌던 것보다 훨씬 더 진보했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잘 알고 있다.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그 우상을 두려워하며 먹는 그리스도인은 한 명도 없다. 엄청난 지식의 진보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요즘 보여지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지식은 진보했으나, 사랑이 없는 것은 2000년 전 교만했던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지식은 진보했으나, 사랑의 진보는 없는 것이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으로 발생한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사도 바울의 해법은 ‘사랑’이다. ‘지식(그노스)’이 왜 매력적이냐면, 어떤 지식을 갖게 되면 그 지식으로 인하여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억압받던 옛날 부모님들이 그렇게 자식을 가르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던 이유가 뭔가. 몰라서 억압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중세 때 일반 교인들이 교회와 사제들로부터 억압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모든 성경과 예배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는데, 라틴어를 몰라서 그랬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행했던 일차적인 작업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아직 우상의 제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그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두려운 마음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들에겐 자유함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식’을 통하여 자유를 얻는 이들이 아직 자유함이 없는 이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깊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해결책은 ‘사랑’이다. 지식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 놓는다는 뜻이다. 지식은 사람들을 분열시키지만, 사랑은 분열된 사람도 다시 이어 놓는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시험에 들게 하여 교회공동체(그리스도의 몸)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즉 분열을 일으키게 만들지만, 사랑은 그 지식과 상관없이, 믿음이 약한 자들도 교회공동체(그리스도의 몸) 안에 머물게 한다.

 

사도 바울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사랑을 말하는 것은 ‘복음’ 때문이다.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11절).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를 위해서만 죽으신 게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으셨다. 모든 만물이 다 그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몇 사람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만유를 위한 죽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이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고, 그리고 진실로 그들을 형제자매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없었다면,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종교의 자유라는 법을 들이대며, 종교차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세속적인 법에서 찾겠다는 뜻 밖에 안 된다. 세속적인 법을 통해서 차별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시킬 수 있어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다. 자유를 제한시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우리에게 예배할 자유가 있고, 모일 자유가 있고, 함께 밥 먹을 자유가 있고, 모든 게 다 자유롭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바이러스가 퍼져 이웃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자유를 포기할 줄 아는 게 사랑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믿음 있는 자들, 교회 안에 있는 자들) 뿐 아니라 그들(믿음이 없는 자, 교회 바깥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이다. 그 십자가 사랑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나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 교회가 일으키는 사회적 문제를 바라보면, ‘2천년이 지나서 지식의 진보는 이룬 것 같은데, 아직까지 사랑의 진보는 한 발자국도 이루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쓸쓸하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까지 든다. 우리는 여전히 성경에서 그렇게 배격하고 경고하던 ‘영지주의적 신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지식’이 구원한다는 생각,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지식의 산물인 ‘백신’이 이 팬데믹으로부터 구원해 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백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라. 백신을 빼돌리고 일부러 훼손하는 일 뿐만 아니라, 백신 생산과 구매를 놓아두고 각 나라 간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백신이라고 하는 지식에 더해 사랑이 없으면, 결국 우리는 백신을 맞아서 ‘구원받기’ 이전에, 백신을 둘러싼 전쟁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고 죽음에 처해질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사랑의 진보를 이루지 못할까? 지식이 구원하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여전히 지식의 진보를 이루는 일에만 몰두할까? 구원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고, 그렇게 성경은 외치고 있는데, 왜 우리는 그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못할까? 우리는 결국 지식이 없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을 바란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덕을 세워주는, 즉 사람과 사람 사이를 따스하게 이어주는 사랑의 진보를 배워야 한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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