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2021. 2. 2. 05:26

[김남주의 시 "어떤 관료"]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ㅡ 김남주 시 "어떤 관료" 전문

 

외할아버지( 故 오지섭 목사님)께서 우리집에 내리신 가훈은 이렇다.

 

적극신앙

성실근면

평화위주

순종효도

 

전형적인 유교이념이 반영된 가훈이다. 이 시와 연관해서 눈에 띄는 가훈의 대목은 '성실근면'이다. 시에 등장하는 관료가 관료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근면하고 성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의 눈에 보이는 관료의 근면과 성실은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근면과 성실 자체는 좋은 덕목이나 어떤 근면, 어떤 성실, 무엇을 위한 근면과 성실이었나를 물었을 때, 문제는 달라진다.

 

철학자 강신주의 김남주의 이 시와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 사상을 연결시켜 해석한 적이 있다. 나치에 부역했던 전범 아이히만이 보인 덕목도 '근면과 성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근면과 성실은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이히만에게서 보이는 이 사실만 보더라도 무엇을 위한 근면과 성실인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대개 학창시절 각 학급에는 '급훈'이라는 것이 있었다.(지금도 있는 지는 모르겠다.) 그때 각 학급의 급훈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던 것이 '근면과 성실'이었다. 학교 교육의 목표가 마치 학생들을 근면하고 성실한 인간으로 키워내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근면인지, 무엇을 위한 성실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근면하고 성실한 학생들은 공부도 잘했다. 그렇게 그들은 근면과 성실로 좋은 대학에 입학을 했고, 각종 나라 시험에 합격을 했고, '관리'가 되었다. 나라는 관리들에 의해서 운영이 된다. 근면하고 성실한 관리.

 

그러나, 근면하고 성실한 관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나라에 봉사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우리는 독일의 관리 아이히만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근현대역사를 통해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근면과 성실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사유'이다. 사유하지 않는 사람, 사색이 없는 사람, 생각이 없는 사람이 근면하고 성실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이히만'과 같이 엄청난 대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렌트의 통찰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불렀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해 분업화가 심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떠한 사회적 파장을 불러올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각자 분업된 일을 근면하고 성실하게 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지금 발생하고 경험하고 있는 악한 일들에 대하여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듯이 방관하며 산다. 바로 이러한 현상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교묘히 들어와 있는 악의 실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지금 시대는 그 어느때보다 '사색적인 삶'이 절실히 필요하다. 내가 하는 일이 단순히 나를 먹고 살게 해준다고, 그 이후에 발생하는 일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말 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일이 혹시 누군가를 맘 아프게 하거나 누군가의 생명을 해치거나, 우리가 사는 지구(프란치스코 교황의 용어를 빌리자면 'common home')를 망가뜨리는 것은 아닌지, 순간순간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사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좋은 '근면과 성실'이라는 덕목은 가장 추악한 덕목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너무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지 말자." 좋지 아니한가.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21. 2. 2. 05:22

사랑의 진보를 간구하는 기도

(고전 8:1-13)

 

주님, 2천년 전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가진 문제점을

한 치도 극복하지 못한 현재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지식의 진보는 이루었으나

결국 사랑의 진보가 없어 멸망의 위기에 처한 우리들을 보시고

슬퍼하며 울고 계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식으로 잘못 생각한 2천년 전의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믿음은 지식을 넘어선 사랑이라는 것을 그토록 몸소 가르쳐 주셨지만,

우리는 지식에 머물러 만족하며

마치 구원받은 자인 것처럼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 다시 한 번 주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구원이 무엇인지 배우게 하옵소서.

결국 우리는 구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 십자가 사랑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나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는,

사랑의 능력을 배우게 하셔서

우리 뿐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곤궁에서 구원하는 실제적인 능력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결국 사랑이 구원합니다.

그러니 그 어떤 것보다 사랑을 배우게 하옵소서.

그 어떤 것보다 사랑의 진보가 있게 하옵소서.

이미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새일을 시작하신 주님을 믿고

우리가 닥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몸소 가르쳐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2. 2. 05:20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고린도전서 8:1-13)

 

“이제 개신교라면 지긋지긋합니다!” 지난 주 인터넷 뉴스 매체를 달군 헤드라인이다. 광주 IEM 국제학교(IM 선교회) 발 바이러스 전파를 두고 한 일반 시민들의 반응이다. 그 사람들이 ‘지긋지긋하다’라고 말할 때, 저렇게 콕 찍어서 “이제 ‘개신교’라면 지긋지긋합니다”라고 말했을 리는 없다. 그냥 “이제 교회라면 지긋지긋합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기자가 옮기면서, 교회 대신 ‘개신교’라는 단어를 넣었을 것이다. 이게 참 재밌는 현상인 거다. 예전 같으면, 그냥 ‘교회’, 또는 ‘기독교’라고 했을 텐데, 이제 아주 명시적으로 ‘개신교’라고 하는 이유는 기독교 내에 여러 종파가 있기 때문인데, 아마도 다른 종파(예를 들어 가톨릭)와의 구분을 두기 위해서 일 것이다.

 

개신교가 자꾸 바이러스 전파의 진원지가 되는 이유는 ‘친교문화’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단순히 ‘친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신경에 명시하고 있듯이,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 ‘친교, 교제, 코이노니아’는 신앙의 원리 중 하나다. 그래서 교회에는 친교의 문화가 깊숙이 들어와 있다. 친교(교제, 코이노니아)는 좋은 것이다. 요즘 시대에 어디서 이러한 친교를 나눌 수 있겠는가. 같이 밥 먹고, 서로의 삶의 문제를 놓아두고 위로해 주고, 함께 기도하고, 이러는 것은 참 좋은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인들은 이렇게 좋은 신앙의 원리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 문제를 일으키는 정황은 다르지만 문제의 성격은 같다. 고린도교회가 자리한 고린도라는 도시는 헬라도시였다. 헬라사회는 다신교 문화였기 때문에, 발달된 도시에는 여러 신전들이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종교행사를 중심으로 ‘feast(축제)가 열렸다. 지금처럼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았던 그 당시, 종교행사를 중심으로 열리는 축제는 모든 이들에게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신에게 바쳐진 음식은 종교행사가 끝난 뒤 그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지금 막 제사를 드린 그 신을 섬긴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 그것을 먹는다는 뜻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이다.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이방신들은 우리가 제물로 드린 음식을 신이 먹지만, 기독교에서는 우리가 신의 몸을 먹는다.)

 

고린도교회가 처한 현실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놓아두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지금 현재 우리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이 문제를 놓아두고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고대사회처럼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제사를 드리는 종교도 없을 뿐더러, 우리는 그러한 문화를 가진 곳에 살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설사 그렇더라도, 우리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아주 맛있게 먹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지식’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4절).

 

이런 것을 보면, 우리는 분명히 ‘지식의 진보’를 이루었다. 우리는 더 이상 우상의 제물을 꺼림칙하게 생각하거나 ‘우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진보이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당시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그런 문화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여전히 우상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교인 중에는 ‘복음’을 들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습관대로 우상의 제물을 먹을 때 우상에게 바쳐진 것으로 인식하면서 그 음식에 깃든 우상의 힘을 의식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그 음식을 먹는 교인들이 있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서로 다른 태도를 지닌 사람들의 갈등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갈등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지식(그노스)’ 때문이었다. 이 지식은 다른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지식이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5-6절).

 

우리가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영적 지식’이지만, 그 당시 이것은 최근에 드러난 아주 신비한 지식이었다. 지금 바울이 다시 진술한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드러난 하늘의 지식이었다. ‘우리에겐 한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모든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또한 만물이 그에게서 났다’는 이 지식은 현재 고린도 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자칭 신과 주님이라고 불리는 우상에 대한 숭배행위를 일소에 부정하고 무너뜨리는 엄청난 ‘하늘의 지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식(그노스)’을 알게 된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서 발생했다. 이 지식을 알고 난 후의 그들의 행동이 문제였다. 그 문제점은 1절과 2절에서 지적된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1, 2절). 위에서 진술한, 그 하늘의 지식을 알게 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교만해졌다. 교만의 특징은 자기를 높게 여기고 다른 이들을 낮추어 보는 것이다. 고린도교인들 중에는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알고 나서 교만해진 사람들이 있었다. 본인이 무슨 위대한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을 했고,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아직도 모르고 우상의 제물 앞에서 쩔쩔매는 사람들을 깔봤다.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 교만했던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요즘 문제를 일으키는 한국 교회의 교인들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안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쭐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은 그 지식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구원받았다’는 자기 확신 안에 거했다. 이것은 그 당시 굉장히 유행하던 ‘영지주의적인 생각’이다. 영지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그노스(특별한 영적인 지식)’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가진다는 것이다. 어떤 지식을 소유함으로 인해 그들은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을 했다. 교만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가졌던 영적 지식(그노스), 그래서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게 만들었던 그 영적 지식이 바로 6절에서 진술되고 있는 그 지식이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6절).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 “아니다! 그 지식(그노스)을 가지고 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며,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지식(그노스)’이 아니라 ‘사랑(카리타스)’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2절). 이것은 매우 매우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원리이다.

 

우리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가졌던 ‘지식’, 그러나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갖지 못하고 일부 사람들만 가졌던 것보다 훨씬 더 진보했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잘 알고 있다.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그 우상을 두려워하며 먹는 그리스도인은 한 명도 없다. 엄청난 지식의 진보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요즘 보여지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지식은 진보했으나, 사랑이 없는 것은 2000년 전 교만했던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지식은 진보했으나, 사랑의 진보는 없는 것이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으로 발생한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사도 바울의 해법은 ‘사랑’이다. ‘지식(그노스)’이 왜 매력적이냐면, 어떤 지식을 갖게 되면 그 지식으로 인하여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억압받던 옛날 부모님들이 그렇게 자식을 가르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던 이유가 뭔가. 몰라서 억압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중세 때 일반 교인들이 교회와 사제들로부터 억압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모든 성경과 예배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는데, 라틴어를 몰라서 그랬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행했던 일차적인 작업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아직 우상의 제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그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두려운 마음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들에겐 자유함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식’을 통하여 자유를 얻는 이들이 아직 자유함이 없는 이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깊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해결책은 ‘사랑’이다. 지식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 놓는다는 뜻이다. 지식은 사람들을 분열시키지만, 사랑은 분열된 사람도 다시 이어 놓는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시험에 들게 하여 교회공동체(그리스도의 몸)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즉 분열을 일으키게 만들지만, 사랑은 그 지식과 상관없이, 믿음이 약한 자들도 교회공동체(그리스도의 몸) 안에 머물게 한다.

 

사도 바울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사랑을 말하는 것은 ‘복음’ 때문이다.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11절).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를 위해서만 죽으신 게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으셨다. 모든 만물이 다 그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몇 사람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만유를 위한 죽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이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고, 그리고 진실로 그들을 형제자매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없었다면,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종교의 자유라는 법을 들이대며, 종교차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세속적인 법에서 찾겠다는 뜻 밖에 안 된다. 세속적인 법을 통해서 차별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시킬 수 있어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다. 자유를 제한시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우리에게 예배할 자유가 있고, 모일 자유가 있고, 함께 밥 먹을 자유가 있고, 모든 게 다 자유롭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바이러스가 퍼져 이웃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자유를 포기할 줄 아는 게 사랑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믿음 있는 자들, 교회 안에 있는 자들) 뿐 아니라 그들(믿음이 없는 자, 교회 바깥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이다. 그 십자가 사랑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나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 교회가 일으키는 사회적 문제를 바라보면, ‘2천년이 지나서 지식의 진보는 이룬 것 같은데, 아직까지 사랑의 진보는 한 발자국도 이루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쓸쓸하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까지 든다. 우리는 여전히 성경에서 그렇게 배격하고 경고하던 ‘영지주의적 신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지식’이 구원한다는 생각,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지식의 산물인 ‘백신’이 이 팬데믹으로부터 구원해 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백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라. 백신을 빼돌리고 일부러 훼손하는 일 뿐만 아니라, 백신 생산과 구매를 놓아두고 각 나라 간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백신이라고 하는 지식에 더해 사랑이 없으면, 결국 우리는 백신을 맞아서 ‘구원받기’ 이전에, 백신을 둘러싼 전쟁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고 죽음에 처해질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사랑의 진보를 이루지 못할까? 지식이 구원하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여전히 지식의 진보를 이루는 일에만 몰두할까? 구원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고, 그렇게 성경은 외치고 있는데, 왜 우리는 그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못할까? 우리는 결국 지식이 없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을 바란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덕을 세워주는, 즉 사람과 사람 사이를 따스하게 이어주는 사랑의 진보를 배워야 한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