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착각]

 

'주권-국민국가' 개념은 근대의 산물이다. 주권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 국민을 이루고, 그 국민이 자신들의 주권을 국가에 (계약에 의해) 위탁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개념이 바로 근대에 생겨난 '국가'의 개념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산다. 그래서 '국가'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에 세금도 내고 징집도 되고 열심히 일한다. 현대 정치철학은 국가에 대한 그러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신자유주의의 출현 때문이다.

 

정치 철학자들의 비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주권-국민국가'의 신념을 산산이 부서뜨린다. 대신, 국가를 '주권-국민'에서 분리시킨다. 이것은 더 이상 국가 주권을 가진 국민을 보호하는 존재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국가는 시장과 대립관계에 있으며, 국가는 시장에 대하여 간섭하는 존재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는 더이상 국가가 시장을 간섭하는 기구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국가는 시장의 하위 주체로서 잔인한 경쟁 원리를 내장한 시장 질서를 국민들에게 관철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국가는 시장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시장원리, 즉 무한경쟁 원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주권-국민'을 통제하며 법을 무기 삼아 시장원리에 국민들이 지배되도록 강제한다.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주권-국민'은 국가의 변절로 인하여 당황스럽고 황당한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시장질서에 의하여 자신이 시장의 하위 주체로 전락한 것을 숨기기 위하여 국가는 각종 복지혜택을 국민들에게 제공한다. 현대 정치가 포퓰리즘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백신 접종 문제를 통해서 이것을 좀 더 살펴보자면, 국가가 백신 접종을 무료로 제공하고 접종을 권고하는 것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 국가는 국민의 건강을 염려하여 그러한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보이나, 전혀 그렇지 않다. 국가가 백신 접종을 무료로, 즉 복지혜택으로 국민들에게 제공하는 이유는 시장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작동하는 방식 중 하나는 노동의 유연화이다. 즉 자본가가 노동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노동자를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노동자가 말랑말랑하지 않으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무한경쟁을 통한 이윤추구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국가의 임무는 시장의 요구에 따라 '주권-국민'을 자본이 원하는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항시 대기시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팬데믹 상황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노동력의 유연화에 불가피한 타격이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팬데믹 상황에서 국가의 역할은 '주권-국민'을 다시 자본이 원하는대로 쓸 수 있는 말랑말랑한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백신 개발을 위한 국가의 저돌적인 투자, 그리고 개발된 백신을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국민들에게 투여시키는 정책은 '주권-국민'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시장의 하위 주체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즉 시장을 위한 충성에 불과하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체제 하의 국가의 통치술을 '벌거벗은 생명'의 통치(생명정치biopolitics)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주권-국민'을 벌거벗은 상태로 만들어 시장의 경쟁과 이윤 추구를 위하여 국민들을 관리하고 규제하는 통치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국가가 행한 백신개발과 백신공급을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 착각하며 산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안에서 그것은 가장 큰 착각일 수밖에 없다. 국가는 더이상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참담한 현실 앞에서 국민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의 배신에 저항하려고 백신을 맞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은 이미 벌거벗겨져 있으며, 백신을 맞지 않으면 그 어느 곳에서도 자본의 선택을 받지 못해 살림살이를 꾸려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우리를 이 벌거벗겨진 상태에서 구원하리요.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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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약함(weakness)]

 

인간의 위약함이란 인간 이하로, 즉 존재의 무의미로 추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인간의 이러한 위약함을 존재론적으로(ontologically) 규정해 주는 신학 용어가 바로 '죄(sin)'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위약함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무의미로 추락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것은 어느 시대나, 어느 한 개인이나, 어느 집단이나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조에ζωή'라는 신학적 개념은 인간의 위약함을 극복하기 위한 신학적 제시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존재의 위약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장치를 마련한다. 우리를 유혹하는 모든 것은 유약함을 극복하게 해준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 인류사는 그렇게 진행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체계나 과학기술의 발전도 모두 인간의 유약함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유약함을 극복하게 해줄 것이라 기대했던 모든 것들이 인간의 유약함을 극복하게 만들어주기는 커녕, 인간에 대한 지배 통치술로 자리잡았다는 데 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해주겠다고 약속하는 바로 그것에 자신의 생명을 맡겨버림으로 인하여 그것에 의해 자유를 빼앗겨 버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가 자기를 '조에'라고,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주장한 것은 바로 그러한 지배 통치술에 대한 반기라고 볼 수 있다. 예수가 '조에'를 주장하는 이유는 인간의 유약함, 즉 존재의 무의미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지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선포이다. 하나님의 영 이외의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하지 않는 것은 궁극적인 구원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조에(하나님의 생명)'에 우리의 존재를 의탁하기 보다, 다른 것에 우리의 존재를 의탁한다. 가령, 건강, 경제적 풍요, 세련된 정치체계 등, 이러한 것들에 우리의 생명을 의탁하고 있으며, 우리는 점점 더 '조에'에서 멀어지고 있다.

 

현대인들이 겪는 이 끝간 데 없는 불안, 이것은 우리의 존재가 원래 유약한 것인데, 그 유약한 존재의 구원을 구원하지 못할 것들(우상)에게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불안은 이유모를 불안이 될 수밖에 없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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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조에! 조예!! 심조!!!요즘 자주 희락당의 글을 자주 읽지 못하지만 글을 읽을 때 마다 절차탁마, 자강불식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예라는 말을 넘어 심히 깊은 조예에 이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최근에 쓰신 글들을 보니 희락당의 신학, 철학, 사상이 확장 되고 있다고 보입니다. 잘 통합되어 하나의 체계로 정립된다면 성도가 세상을 바라보는 큰 창의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2021.06.05 05:30 [ ADDR : EDIT/ DEL : REPLY ]

기도문2021. 5. 30. 20:51

조에를 찾아 나서기를 간구하는 기도

(롬 8:1-11)

 

주님, 우리는 무엇을 애통해 하며 살고 있습니까?

세상이 부추기는, 건강과 경제적 풍요가 없는 것에 대하여

애통해 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충분히 건강하고 충분히 풍요롭지만 우리의 욕심은 끝간 데 없어

만족을 모릅니다.

주님, 우리 안에 있던 ‘조에(하나님의 생명)’가 쪼그라든 것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도 우리 안에 있었던 조에가 쪼그라든 것을 바라보며 애통하게 하옵소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조에가 실종된 것을 바라보며 애통하게 하옵소서.

주님, 푸쉬케(건강)과 비오스(경제적 풍요)는 목적이 아니라

조에(하나님의 생명)를 위한 수단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옵소서.

목숨과 살림살이를 십자가 위에 바쳐

우리에게 조에(하나님의 생명)을 선물로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조에를 잃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조에를 잃어버리고 엉뚱한 것을 위하여 생명을 낭비하는 자들을 위하여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하는 신실한 주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조에를 찾아서 우리보다 먼저 앞서 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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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5. 30. 20:48

조에를 찾아서 (Finding ZOE/ζω)

(로마서 8:1-11)

 

‘조에를 찾아서’는 ‘니모를 찾아서’의 패러디다. 아빠 물고기 말린(Marlin)은 낛시꾼에게 잡혀간 아들 물고기 니모(Nemo)를 찾아서 멀고도 험난한 여행을 떠난다.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는 비극적인 장면에서 시작된다. 말린과 코랄은 보금자리 해초 더미 안에 알 400개를 낳는다. 알이 부화되기 직전, 꼬치고기가 알들을 잡아먹기 위해 공격해 왔고, 알들을 지키려던 엄마 물고기 코랄과 400마리의 알은 모두 꼬치고기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그 중에 한 알만 살아남는데, 꼬치고기의 습격 때문에 상처를 입어 그 알에서 태어난 아기 물고기는 한쪽 지느러미에 장애를 입는다. 아빠 물고기는 엄마의 소원대로 살아남은 아들 물고기에게 ‘니모’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니모(nemo)는 라틴어로 ‘nobody’라는 뜻이다.

 

400개의 물고기 자식들에게 ‘니모’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자식들이 너무 많아 니모의 의미처럼 ‘nobody’였을 텐데, 이제 단 하나 살아남은 자식 물고기에게 ‘니모’라는 이름은 더 이상 ‘nobody’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빠 물고기 말린은 니모를 애지중지하며 키운다. 어느 날 불행하게도 니모가 어느 스쿠버다이버에게 포획되었을 때, 아빠 말린은 아들 니모를 찾기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더 이상 ‘노바디(아무도 아닌 존재’)가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생명과도 같은 아들 물고기 찾아 떠나는 모험을 그린 애니메이션이 바로 <니모를 찾아서 (Finding Nemo)>이다.

 

우리는 방금 ‘니모를 찾아서’에 대한 줄거리를 전개하면서, 아빠 물고기가 ‘생명’과도 같은 아들 물고기를 찾아 떠났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생명’이란 무엇일까? 로마서 본문에서도 보면 ‘생명’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본문에 나오는 생명이라는 단어는 함께 등장하는 ‘죄와 사망’과는 이질적인 것,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오늘, 이 생명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깊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다. 한 나라의 언어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언어는 그 지역 문화의 총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에 번역하는 것 자체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배이지역(San Francisco Bay Area)에서만 살던 아이에게 ‘산(mountain)’이라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당연히, 배이지역에서만 살던 아이에게 산은 민둥산일 것이다. 그런데, 강원도에서 살던 아이에게 산은 어떤 의미일까? 당연히 숲이 우거진 산일 것이다. 같은 ‘산(mountain)’이라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배이지역의 아이와 강원도의 아이에게 ‘산’이라는 언어를 매개로 하는 산의 이미지는 서로 다르다.

 

성경을 한국어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동시에 불행이기도 하다. 축복인 이유는 성경의 이야기를 우리 언어로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이지만, 불행인 이유는 성경의 원래 언어인 헬라어가 담고 있는 깊은 뜻을 한국어가 오롯이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 많은 오해가 발생한다. 대표적인 예로, ‘죄’라는 용어가 그렇다. 한국어로 번역한 성경의 ‘죄’는 헬라어로 ‘하르마티아’이다. 한국어의 ‘죄’는 불교용어이다. 불교용어로서 죄는 ‘도덕성’과 연관된 단어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죄’를 나타내는 ‘하르마티아’는 도덕성과 연관된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관된 단어이다. ‘하르마티아’는 신학적인 용어이다. ‘죄’를 도덕성과 연관시키면 뭔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죄’라고 부르지만, 성경에서 ‘죄/하르마티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성경에서의 ‘죄’의 개념을 파악할 수 있다. ‘죄’를 도덕성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당장 감옥에 가야할 인물이다. 어떻게 아들을 잡아서 제사를 지낼 수 있는가?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을 죄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그를 ‘의인’이라 부른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 불린다. 왜 그럴까? 그가 가진 하나님과의 관계성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여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한 사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발생한 ‘신앙사건’이지, 아들을 죽이려 한 파렴치한 아버지의 부도덕한 사건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죄(하르마티아)’는 문제적 용어이다. 우리는 함부로 누군가를 ‘죄인’이라고 정죄할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서, 즉 도덕성 문제를 가지고서 어떤 사람을 판단하기 쉽지 않다.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의인이 아니고, 비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죄인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매우 도덕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의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이 보여준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세리와 창녀들은 매우 비도덕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의인(구원받은 이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보여준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매우 놀라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경에는 우리의 상식과 다른 전복적인 이야기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성경은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된다고 말한다. 즉,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증진시키는 일이지, 그것과 상관없이 도덕성을 키우는 일은 ‘위선’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이다. 형편이 넉넉한 사람들은 도덕성을 키우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도덕성을 키우기 어렵다. 그러나 누가 더 하나님 나라를 더 간절히 원하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일까? 이것은 이미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이다. (부도덕적으로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는 차원이 다른 도덕적 삶이 요구된다.)

 

신약성경에는 우리말로 ‘생명’이라고 번역되는 단어가 셋이나 있다. 프쉬케(ψυχ), 비오스(βος), 조에(ζω)가 그것이다. 이 각 단어에 대응하는 한국어 단어가 마땅치 않다. 그래서 이 각 단어를 풀어서 설명하면, 우선, 프쉬케는 ‘생물학적 목숨’을 말한다. 이 단어가 쓰인 구절은 마태복음 6장 25절의 말씀이다. 프쉬케의 구체적인 뜻을 적용하여 그 구절을 풀이하면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생물학적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또한 요한복음의 말씀 중 프쉬케가 쓰이는 구절은 이런 것들이 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물학적 목숨’을 버린다”(요 10:11).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생물학적 목숨’을 버린다”(요 10:15).

 

다음, ‘비오스’는 우리말로 ‘살림, 또는 생활’에 가까운 말이다. 비오스는 살림살이, 생활수준의 뜻으로 바꾸어 생각하면 쉽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나오는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서 ‘이생’이라고 번역된 것이 ‘비오스’다. 우리가 보통 성경을 읽을 때 사용하는 개역개정판보다 새번역 또는 공동번역에서 이것을 좀 더 헬라어의 뜻에 가깝게 번역했다. 새번역은 ‘이생의 자랑’을 ‘세상 살림’, 즉 ‘살림살이, 생활수준’으로 번역을 했고, 공동번역에서는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이라고 번역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탕자)이 아버지에게서 ‘분깃’을 받아 나간 것, 그 분깃이 바로 ‘비오스’다. 즉,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살림살이/재산’을 분배 받아 나간 것이다. 아들은 그 살림살이/재산을 탕진했다. 요한일서의 언어로 옮기면, 탕자는 자신의 재산/살림살이를 세상에서 자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용어는 ‘조에’이다. 조에는 위의 푸쉬케와 비오스와는 완전히 다른 ‘생명’이다. 푸쉬케와 비오스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는 것이다. 물론 푸쉬케(생물학적 목숨)와 비오스(살림살이)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지만, 생물학적 목숨이나 살림살이(생활수준)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조에’는 하나님이 우리 존재 안에 넣어주신 생명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아주 원초적인 생명이다. 생명을 생명 답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숨결(루아흐)이다. ‘조에’라는 용어가 쓰인 신약의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나는 양들이 생명(조에)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 10:10). “내가 바로 생명(조에)의 빵이다”(요 6:35). (푸쉬케, 비오스, 조에에 대한 주석은 우진성 박사의 '일점일획 참조)

 

위에서 제시한 생명을 가리키는 신약성경의 세 용어, 푸쉬케, 비오스, 조에는 요즘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로 바꾸면, 푸쉬케(생물학적 목숨)는 ‘건강(외모)’으로, 비오스(살림살이)는 ‘경제적 풍요’로, 그리고 조에는 ‘영성(하나님의 생명과의 일치)’으로 옮길 수 있다. 건강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얼마나 우리에게 건강에 몰두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건강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가. 경제적 풍요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얼마나 우리에게 경제적 풍요에 몰두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경제적 풍요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가.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기도하고, 소망하고, 바라는 것, 즉,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대하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오셔서 우리를 건강하게 하시고, 우리가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도록, 또는 지금 누리고 있는 건강과 경제적 풍요를 계속해서 누릴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한다는 것이다. 아주 간절히. 이게 왜 문제가 되는가? 복음과 충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증거하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일차적으로 우리의 건강과 경제적 풍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에(하나님의 생명)’를 풍성하게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푸쉬케(건강)와 비오스(경제적 풍요)’를 찾아나서는 사람들은 즐비한데, 막상 가장 중요한 ‘조에(하나님의 생명)’을 찾아나서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데 있다. 왜 그럴까? 무엇이 진짜 생명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건강과 경제적 풍요가 생명이라고 생각하는데 머물고 만다. 그러나, 성경은 건강보다 경제적 풍요보다 더 중요한 생명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조에)’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니모의 아빠 말린이 니모를 찾아 그 험난한 여정을 떠난 것은 니모가 생명처럼 소중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로 ‘조에(하나님의 생명)’를 가장 중요한 생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푸쉬케와 비오스를 찾아나서는 것을 멈추고, ‘조에’를 찾아나설 것이다. 아니, 푸쉬케와 비오스를 찾는 것만을 강요하는 이 세상의 논리에 저항하며, 그러한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생명, 조에를 찾아나설 것이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고후 4:7a).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담긴 ‘보화’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조에’이다. 하나님의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프쉬케(생물학적 목숨)을 바쳐 십자가에서 죽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바로 그것, ‘조에’이다. 우리는 바로 그 조에를 우리 몸에 지니고 있다. 그렇게 ‘조에’를 지니고 있는 사람의 삶이 어떤가, 이어지는 구절을 보자.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조에를 지니고 있기에)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 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조에)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고후 4:7b-10).

 

예수님은 퓌쉬케(생물학적 목숨)와 비오스(재산/살림살이)를 바쳐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조에)를 가져다주셨다. 즉, 건강과 경제적 풍요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조에)를 찾아나서기 위한 수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하며 산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조에)을 주셨건만, 우리는 그것을 팔아 건강과 경제적 풍요를 사려고 한다. 우리의 목적은 어느새 ‘조에’가 아니라, ‘푸쉬케’와 ‘비오스’가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신앙의 비극이고 신앙의 소외다. 사실 이 비극과 소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푸쉬케의 정욕, 비오스의 자랑을 부추기는 세상을 따라갔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조에)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1-2절).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지 않고 자유인, 의인이 된 이유는 우리의 도덕성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물학적 목숨과 살림살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조에(하나님의 생명)’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성이 풍요롭기 때문이다. 건강(푸쉬케)과 비오스(경제적 풍요)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성의 풍요로움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조에가 그 풍요로움을 말해준다.

 

조에를 찾아서! ‘푸쉬케와 비오스만을 찾아나서!’라고 부추기는 이 시대에, 어느새 실종되고 만 ‘조에’를 찾아 나서는 일은 더욱더 긴급히 요청된다. 건강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경제적 풍요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조에’이다. 건강하지 못하면 인간취급 받지 못하고, 경제적 풍요가 없으면 무시당하는 이 세상, 그러나, 조에가 없는 것은 괜찮다고 말하는 이 세상! 건강하지 못한 것을 애통해 하고, 경제적 풍요가 없는 것을 마음 아파할 줄 알면서, 조에가 없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이 세상!  바로 우리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애통해 하며 사는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조에(하나님의 영원한 생명)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물로 받은 조에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이 세상에 저항하며, 우리가 가진 건강, 우리가 가진 경제적 풍요를 수단 삼아 ‘조에’를 찾아 나서야 한다. 조에를 잃어버린 이 세대를 놓아두고 애통해야 한다. 그리고 조에를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힘껏 전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 조에를 찾아서!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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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신학]

 

정치신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인류 역사가 모더니티(Modernity)를 거치면서 공공영역에서 '종교'를 몰아낸 행위를 뒤집는 것이다.

 

이성과 과학의 힘에 밀려 공공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난 '종교'는 더 이상 공공영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의견'을 내기 힘들어졌다. 공공영역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더이상 종교의 지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서는 현대 사회에 깊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공공영역에서 더 이상 종교의 지혜를 듣지 않게 된 것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특별히 허무주의의 문제, 물질의 노예가 되는 문제, 환경파괴의 문제 등)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이 맞닥뜨린 '파국' 앞에서 다시 생명의 가치를 되살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공공영역에서 종교의 지혜를 발현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해졌다.

 

정치신학은 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정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예전부터 '두 왕국 이론'은 이 세상에 마치 두 왕국(교회와 정부)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하고, 두 영역 간의 파워게임이 발생하는 것처럼 사유되어 왔으나, 그것은 '두 왕국 이론'에 대한 비참한 오해이다. 이러한 조악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회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적대적으로 싸우고 있다.

 

정치신학은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어떻게 견인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종말론적 정치 비전이다. '주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고백은 이 세상에 대한 거부나 저항이 아니라, 우리가 두 발 딛고 사는 이 땅, 이 세상의 나라에 대한 긍정이며, 이 땅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소망이다.

 

정치신학은 이 죄악 많은 세상에 대한 비판이나 저주나 멸망의 선포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사랑의 보듬음이다. 공공영역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한복판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게끔 공공영역을 이끄는 것이 정치신학이다. 그러므로 요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정치신학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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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시 '소리의 뼈']

 

김교수님의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드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 1989년 3월 7일 새벽, 29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기형도, 그리고 그가 남긴 시는 그 이후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유고시집으로 발간된 <입 속의 검은 잎>을 읽는 것은 그당시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그의 시가 유명해진 것은 그의 시집의 제목을 정하기도 하고 그의 시에 대한 평론을 쓴, 당대 최고의 문학평론가 김현의 공로가 큽니다. 김현은 기형도 시에 녹아 있는 '죽음'의 모티브에 주목했고, 그래서 시집의 제목도 '입 속의 검은 잎'이라고 정했죠. 기형도의 시 '입 속의 검은 잎'이 그의 시 세계를 대표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기형도의 시는 한국 예술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시 제목을 딴 영화도 두 편이나 있습니다. "봄날은 간다"와 "질투는 나의 힘"이 그것이죠. 그리고 그의 시 "우리동네 목사님"은 '진보적인' 목사님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기도 했죠.

 

위의 시 "소리의 뼈"에 등장하는 김교수처럼, 때로는 저도 강단에 올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다가 내려오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칼 바르트가 말했듯이, 설교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설교'를 통해서 말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불완전하고 불가능한 작업입니다. 그래서 매주 '설교'를 해야하는 목회자로서, 불가능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아 늘 불안한 마음과 부족한 마음,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목사가 설교하려고 주일 강단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려오면, 교회가 갑자기 술렁대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런 심정으로 매주일 강단에 섭니다. 내가 지금 뭔가 설교를 하고 있으나, 나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는 심정. 나는 침묵할테니,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라는 심정. 우리 모두, 설교 시간에 발생하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집중하는, 좋은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침묵해야 하는데, 오늘도 말이 많았군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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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읽기 문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큐티의 영향으로 성경을 '구절구절' 읽고 묵상하는 데 익숙하다. 구절구절을 읽다 은혜되고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되는 구절에 밑줄을 진하게 긋고, 읊조리고, 외우고, 흐뭇해한다. 그리고 그 말씀 구절을 붙들고 하루를 승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구절구절 읽고 큐티하는 방식은 '은혜'가 될지는 몰라도 신앙의 성장을 가져오지 못한다. 한국교회가 영적인 성장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성경읽기 방식을 바꿔야 한다. 큐티식 구절구절 읽기 방식에서 벗어나 성경 각 권마다 발생하고 있는 목회적 또는 신학적 상황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 문제를 저자가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 지를 면밀히 살펴 봄으로써 현재 우리의 삶에서 또는 역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적용하여 삶과 역사를 조망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는 성경읽기를 해야 한다.

 

전체를 조망하는 성경읽기는 하루 아침에 되지 않는다. 인내와 열심을 가지고 믿음의 경주를 달리듯 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이 믿음의 경주에서 낙오되는 구성원이 없도록 서로를 돌보아야 한다.

 

믿음의 성장은 나이 먹어가는 것만큼 어렵다. 세심한 돌봄과 끈질긴 인내 없이는 불가능하다. 신앙의 성장을 일으키는 성경읽기가 아닌, 하루 반짝 은혜만 받고 마는 성경읽기는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그런 성경읽기로는 이 악의 시대를 건널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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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발전]

 

이성의 발전 역사를 보면, 이성은 사물(자기 바깥의 존재)을 '파악'하는 기능을 가지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파악'은 분석해서(또는 분해해서 / 조각조각 나누어) 손에 쥔다는 뜻이다. 이성의 파악 능력은 인간이 사물을 지배하는 능력을 갖게 해주었다. 즉, 인간이 사물을 지배하는 '지배자'의 입장에 올라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인간이 지닌 '이성의 능력' 때문이다.

 

그런데, 이성의 발전이 가져온 결과는 참담해 보인다. '사물'을 조각조각 내서(파악해서) 그것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고, 이성을 가진 인간은 우쭐해졌을지 모르나, 사물이 가진 '신비'는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인간의 마음과 현실을 황폐하게 만든 것이 분명하다. 파악해서 자기 아래 둔 존재에게서 '황홀감'을 느끼거나 '경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은 사물을 활용하거나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게 만드는 일에는 탁월해졌으나, 사물을 자기의 대화상대로, 즉 친구로 삼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이렇게 한 없이 외로운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성의 발전을 되돌아 보고, 이성을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사물을 지배하기 위해 이성을 발전시키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다. (외롭게)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인간은 이성을 발전시키되, 사물을 통전적으로 이해하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무엇보다 사물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그 사물과 거룩한 사귐을 갖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일찍이 신앙의 선조(선배)들은 '믿음'을 강조한 것이다. 믿음은 이성의 반대말이 아니라, 이성이 지향해야 할 방향성이다. 믿는다는 것은 사물을 파악하여 자기 아래 두는 행위가 아니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거기에서 신비를 발견하여 그 신비 안에 감추어진 신적 아름다움과 거룩한 사귐을 갖는 것이다.

 

인간이 이 우주에서 외롭게 쓸쓸히 죽어가지 않으려면, 이성을 버리고 믿음으로 회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발전시키되 믿음을 지향하는 이성을 발전시켜야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신비한 이 세계는 '파악'한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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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명칭의 의미]

 

'무기원'을 상정하는 온당한 이름은 '성부'입니다.

그리고 '무기원'을 지닌 낳음을 받은 자의 합당한 명칭은 '성자'입니다.

또한 무기원적으로 생기거나 발출 혹은 유출하는 존재의 적절한 이름은 '성령'입니다.

The Proper Name of the Unoriginate is Father, and that of the unoriginately Begotten is Son, and that of the unbegottenly Proceeding or going forth is The Holy Ghost.

(Gregory of Nazianzos, Fourth Theological Orations, 19)

.........................................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명칭을 '인간적인 관계'의 측면에서 이해하면 안 된다. 예수가 하나님의 '자식'이어서 '성자'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예수의 '아버지'여서 '성부'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성부'와 '성자'의 개념은 신학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의 본질,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더욱이, '성부'와 '성자'의 개념은 기독론의 발전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하기 위해서 고안된 언어이다.

 

성자를 '독생자(only begotten son)'이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님에게 자식이 단지 한 명 뿐이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독생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하기 위해 고안된 언어이다. 하나님에게 '낳음을 입은 자'는 오직 '성자' 밖에 없다. 그래서 성자는 성부와 동일본질을 갖는다. 즉, 성자는 하나님이다.

 

성령에게는 'unbegotten'이라는 용어가 붙는다. 이것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동일본질이기는 하나, 성자와 다른 위격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과 예수의 신성(Godhead)을 '성부'와 '성자'로 표현하는 것은 가부장적 표현 방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명칭을 굳이 여성적으로 바꾸려 한다면, '성모'와 '성녀'로 바꾸어야 할까?

 

'성모'는 이미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주어진 명칭이다. 그러면, 어떻게 바꿔야 할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명칭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과 관계를 더 잘 설명해 주는 명칭을 고안해 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려면, 교부들이 발전시킨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하여 일일히 반박하며 그 용어를 더 잘 개진시켜야 할텐데, 그게,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신학적 논의를 잘 간파하여, 이것이 가부장적인 표현이 아닌, 신학적 표현이라는 것을 충분히 숙지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더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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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만장일치가 줄어 들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선행에 있어서의 관대함이 감소하는 것과 비례하여 만장일치(unanimity/consensus)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 당시에, 그들은 자기 소유의 집과 농장들을 팔곤하였다. 스스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려고,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줄 비용을 사도들에게 제공하곤 하였다.

 

이제 우리는 인색해서 십일조를 내는 것조차도 하지 않으며, 그리고 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팔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동산을 매입해서 늘리기를 좋아한다.

 

우리에게 신앙의 활기는 시들어짐에 따라서 믿음의 능력은 점점 더 희미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시대를 살펴보면서, 주님은 복음서에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 올 때에 참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하시니라."

 

우리는 그의 예견이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있어서, 의의 법에 있어서, 사랑에 있어서, 선행에 있어서, 우리의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도 다가올 두려운 일들에 대해서 묵상하지 않으며, 아무도 주님의 날과 하나님의 진노, 불신자들에게 쌓이는 심판, 배교자들에게 지정된 영원한 고통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양심이 믿는다면, 우리 양심은 얼마나 두려울 것인가? 그러나 우리 양심이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믿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믿는다면, 주의할 것이고, 만일 주의한다면, 빠져나올 수 있을 텐데.

...............................................................................

 

이것이 누구의 글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보면, 이것은 요즘 시대의 어느 '선지자'가 이 시대를 개탄하며 쓴 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글은 3세기에 살았던, 교부 키프리아누스(Cyprian)의 글이다. 그는 주후 250년경 노바티안(Novatian)으로 인하여 벌어진 교회의 분열 사건 때문에 쓴 '교회의 일치(on the unity of the catholic church)'에 대한 글 말미에서 위와 같이 그 당시 교회의 사태를 진술한다.

 

키프리아누스의 이러한 서술은 위안인가 절망인가. 위안의 측면에서 보자면, 현재 교회의 행태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는 게 위안이고, 절망의 측면에서 보자면, 교회의 행태의 이러한 역사는 하루이틀 된 것이 아니라는 게 절망이다.

 

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나 하는 것일까. 요즘 "스스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려고", 선행하는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다.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십일조 내는 것도 인색해진 초라한 믿음과 부동산(재산)을 늘리기에 급급한 욕망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마치 '하늘'이 없는 것처럼 산다. 그러다 보니, 신앙의 활기는 점점 시들어가서 더 이상 시들 것이 없는 것처럼 말라 비틀어졌고, 믿음의 능력은 점점 희미해져서 더 이상 능력이 없는 것처럼 무능하기 짝이 없다.

 

키프리아누스는 묻는다. 우리는 사도적 전승을 잘 지키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그 가르침에 따라 살며 그분의 법을 지키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는 말한다. "만일 당신이 교회를 당신의 어머니로 가지지 못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He can no longer have God for his Father, who has not the Church for his mother)."

 

어머니(교회)를 모르니, 아버지(하나님)를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 우리에게 '교회'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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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21. 5. 25. 13:47

놀이터

 

바람은 새들의 놀이터

사랑은 사람들의 놀이터

 

새들도

사람들도

잃어가는 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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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5. 25. 13:46

성례전적 삶을 간구하는 기도

(열왕기하 5:1-14)

 

주님,

성령을 간구합니다.

또한 성령의 임재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이끄는 성례전적인 삶이

불가능함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이들 간의 불화와 분쟁, 그리고 전쟁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이들의 불의와 무례, 그리고 무관심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들의 확신이 더 깊어 가는 이 때에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은 성령의 강림입니다.

주여,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인데,

우리의 삶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이 몸소 경험하도록

이끌고 있습니까?

주님,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드러내는 성례전적인 삶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 자체가 영광스러운 삶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에게

구원이 되는 거룩한 삶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을 드러내는 주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온 감각으로 경험하도록 이끄시고,

우리도 동일한 일을 감당하도록 부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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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5. 25. 13:43

그리스도인의 성례전적 삶 (Christian life as a sacrament)

(열왕기하 5:1-14)

 

지구상에서 가장 문제적인 도시는 예루살렘이다. 종교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성지로 생각하는 세 개의 종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수많은 분쟁을 겪었다. 그리고 그 분쟁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다행히도 국제사회의 압박 때문에 최근 일어났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간에 휴전협정이 맺어졌지만, 두 진영 사이에 있었던 분쟁 때문에 어린이를 포함한 무고한 시민들 수백명이 목숨을 잃고, 가자 지구 도시 자체가 마비 상태에 빠졌다.

 

지인이 나에게 물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냐고. 이번 분쟁으로 인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피해 규모를 보면, 이스라엘이 거의 일방적으로 팔레스타인을 학살한 것처럼 보인다. 질문은 그랬지만, 그 질문에 담긴 더 깊은 의미는 예루살렘의 평화는 어떻게 오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물론, 지인이 나에게 걸어온 질문은 무슨 깊은 학문적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냥 답답해서 한 말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할까? 사실, 굉장히 난감한 문제이다. 문제가 난감한 이유는 이스라엘은 유대교를 대표하고, 팔레스타인 하마스는 이슬람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두 거대 종교가 충돌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평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의 문제는 굉장히 난감하면서 심각한 문제이다. 물론 여기에는 종교적 문제만 개입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문제도 개입되어 있어, 그 문제를 푸는 해법은 굉장히 복잡하다.

 

나는 그 질문에 간단하게 이렇게 답했다. “종교가 없어지거나, 아니면, 역사가 끝나거나. 마라나타!” 인간들 사이의 분쟁, 또는 전쟁을 어떻게 종식시킬 수 있을까? 더군다나, 예루살렘이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종교 때문이니, ‘종교가 없어지거나’라는 대답은 사실 굉장히 절박한 말이다. 평안을 위해서 종교를 가지는데, 그 종교가 오히려 분쟁과 전쟁을 불러와 서로의 생명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니, 차라리 ‘종교’라는 것 자체가 없으면 서로의 생명을 해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더불어서 인간 사이에 있는 분쟁과 전쟁,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은 인류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에, 예루살렘의 평화의 문제는 역사가 끝나지 않는 이상 어려울 것이라는 절망감이 우리의 마음을 짓누른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끝장 내시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마라나타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왜 나는 성령강림절(오순절)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간의 분쟁을 이야기하는가?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 전개되는 성령강림 사건을 본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일이다. 세계 각국에서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 그리고 오순절 축제를 ‘관광’하러 온 수많은 외국인들(이방인들)이 모여들었던 오순절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특별한 일이 발생했다. 오순절 축제에 걸맞은 매우 흥분되고 기이한, 축제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그것이 바로 성령강림사건이다.

 

성령강림 사건의 요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방언을 했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들이 방언을 했다는 것은 쉽게 말해, 외국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외국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뭐가 그리 큰 일인가. 중요한 것은 방언이 아니라, ‘그 방언으로 무엇을 말했는가’이다. 그 상황을 사도행전은 이렇게 전한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구네레에서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9-11).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방언(외국어를 유창하게 한 일)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을 말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하나님의 큰 일은 무엇일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큰 일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은혜가 보이게 드러났다는 데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큰 일(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의 모든 감각을 통해서 경험했다는 뜻이다.

 

즉, 성령강림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연장선 상에 있는 사건이다. 성령강림 사건은 기이한 일(우리가 흔히 방언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현상의 발생)이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게 드러나는 사건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즉 그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온 감각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진 결과,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온 감각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 결과는 이것이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1).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끔 하는 사건이 발생하니까,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역사가 발생한다.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요즘은 많은 이들이 종교를 떠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믿던 이들도 신앙을 버린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끔 해주는 사건보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경험을 사람들이 더 많이 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위에서 이야기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이다.

 

유대인도 하나님을 믿고, 팔레스타인의 무슬림들도 하나님을 믿는다. 두 진영 모두 전쟁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인 일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니, 거기에 무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가.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하는 것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전혀 안 계신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가 공적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우리가 읽은 열왕기하의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에는 이와 사뭇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성례전적 삶,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끔 하는 경험을 이끌어내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배울 수 있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아주 실제적인 문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싸움을 어떻게 멈출 수 있고, 어떻게 예루살렘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아만 장군의 나라, 아람(지금의 시리아)과 이스라엘은 서로 적대관계였다. 두 나라 사이에는 평화가 없었다. 두 나라는 전쟁을 했다. 마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평화가 없는 것처럼 그랬다. 성경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2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포로로 잡혀가는 일은 비극이다. 우리는 나아만 장군보다 전쟁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긍휼하고 정의로운 마음이 필요하다. 실제로, 나아만 장군 아내의 몸종인 ‘어린 소녀’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엉뚱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나아만 장군을 가까이에서 본 ‘어린 소녀’는 나아만 장군이 가지고 있는 삶의 아픔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되었다. 나아만 장군은 크고 존귀한 자였으나 치명적인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 불치병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가 ‘나병’을 앓았다고 표현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나병이 아니라 ‘악성 피부병’이다. 만약 그가 나병을 앓았다면 분리 수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리 수용되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나아만 장군의 고통을 본 ‘어린 소녀’는 장군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3절). 전쟁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 자기에게 고통을 가한 자에게는 저주를 퍼붓는 법이다. 그런데, ‘어린 소녀’는 원망보다는 용서를 택한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어떠한 결과를 가지고 오는지를 보면, ‘어린 소녀’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선택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어린 소녀’의 말을 들은 나아만 장군은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서 적극적인 노력을 펼친다. 왕을 만나 적국에 가는 것을 허락받고, 선지자에게 줄 선물을 가득 마련해 자기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며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만나러 간다. 이 이야기의 중심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왕이 아람 왕의 편지를 받고 두려워하자, 사신(메신저)을 보내 이스라엘의 왕을 안심시키는 엘리사의 말에서 발견된다.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8절).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선지자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 사람들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즉, 선지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하는 일을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과 일치한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도 제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예언(Prophecy)을 한다. 예언이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에, 즉 우리의 삶에 어떻게 드러나실 지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끔 하는 일이다. 이처럼, 나아만 장군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존재’였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 사람이므로 아람 신의 존재는 알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병을 고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병을 고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온 이유는 병을 고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며, 자신의 병을 고치는 일에 엘리사 선지자가 화려한 제의를 행하고, 자신에게 엄청난 일을 요청할 것을 예상하며 갔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병 고침은 싱겁기 짝이 없었다. 선지자는 나와 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병 고치는 방법이 너무 보잘것없었다.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10절). 얼마나 쉬운가.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쉬운 것도 못한다. 오히려 화를 내며 돌아선다. 만약, 그에게 현명한 부하들이 없었다면, 그는 병도 고침 못 받고, 하나님을 아는 기회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마음 내키지는 않았지만, 엘리사 선지자의 말대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었다. 그랬더니, 정말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같이 회복되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 일을 통해서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을 알게 된 이야기이다. 어린 소녀의 용서의 마음이 나아만 장군의 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6장 23절에서 끝나는데, 이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 것을 알게 된 아람은 이스라엘과 섣부르게 전쟁을 하지 못하게 된다.

 

아람 왕은 자신의 도발 계획이 매번 수포로 돌아가자 나아만 장군을 스파이로 의심하지만(명시적으로 나아만 장군을 의심했다고 나오는 것은 아니나, 정황상 그렇다), 이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아람의 군대는 엘리사의 존재를 아람 왕에게 알린다. 그리고, 아람 왕은 엘리사를 죽일 계략을 꾸민다.

 

자기를 죽이러 온 아람 군대를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사마리아성으로 유인한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몰살시키고자 한 이스라엘 왕에게 그들을 죽이지 말고 살려주라고 말한다.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소서”(왕하 6:22).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아람 군대가 썼던 방법을 따르지 않고, 그들을 용서하는 것을 선택한다. 아람 군대는 포로를 자신들의 노예로 데리고 갔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을 용서하고 돌려보냈던 것이다. 그랬더니,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가 생겼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왕하 6:23).

 

평화는 용서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용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일이다. 용서는 엄청난 성례전이다. 용서의 경험은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낸다. 아람의 전쟁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는 주인인 나아만 장군을 용서하고 그에게 ‘하나님의 선지자’를 알려 주었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지만, 결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엘리사는 자기를 죽이러 왔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마리아성에 갇힌 아람 군사들을 용서하고 돌려보냈다.

 

‘어린 소녀’의 용서와 엘리사의 용서는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를 가져왔다. 나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우리는 이 가치를 놓치면 안 된다. 나의 작은 용서가, 또는 힘겨운 용서가 어떠한 위대한 결과를 가지고 올지 모른다. 다만,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용서(순종)를 들어 쓰실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평화는 사람이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고 높여질 때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기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고 높여진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하나님이 드러나고 높여지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다. 그러한 삶을 성례전적 삶이라고 한다. 성례전이란 바로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경험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역사에서, 그리고 현재 우리 시대에, 또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서 볼 수 있는 일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행동을 하니, 하나님을 원래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을 보고 “내 생각이 맞어.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시대는 점점 세속화되어 간다. 세속화란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없는, 하나님의 존재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강요를 통해서 갖게 될 수 없다. 더군다나 요즘 시대는 더 그렇다. 어떻게 종교적 신념을 강요할 수 있나. 요즘엔 그랬다가는 잡혀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어느 시대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게 끔 해주는 믿는 이들의 삶 자체가 더 중요하다. 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가 용서를 통해 나아만 장군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엘리사가 자기를 죽이러 온 아람 군대를 용서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람 사람들이 경험하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믿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는 성례전이 되어야 한다.

 

성령강림절(오순절). 예수의 제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끌었다. 덕분에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 전쟁의 소식만 늘어가고, 죽음의 소식만 들려오며, 하나님이 마치 안 계시는 것처럼 행동하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늘어가는 이 때에, 그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없다고 하는 확신하게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즐비한 이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삶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며 높이고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진 가장 깊은 질문이고 도전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끄는 성례전적 삶. 우리는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끄는 성례전적 삶을 가능케 하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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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신학 ㅡ 정치경제학]

 

현대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을 통해 그것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악한 일들의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조력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공부는 정치신학과 정치경제학이다.

 

신학의 정치적 측면, 그리고 경제의 정치적 측면을 본다는 것은 신학과 경제가 지배자들에 의해서 자기 지배를 공고히 하는 도구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치신학'을 말한 카를 슈미트와 '정치경제학'을 말한 카를 마르크스에게서 만천하에 드러난 사실이다.

 

종교(신학)와 경제는 사람들이 '삶'을 의미 있고 평안하게 살아가는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몰두할 수밖에 없는 분야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 삶의 전부다. 경제는 인간 삶의 전부다. 그렇게 모든 사람의 삶의 문제에 해당되는 분야이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종교와 경제를 이용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의 모든 삶에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경제를 통한 지배계급의 지배는 점점 더 교묘해지고 있고, 점점 더 세련되어지고, 점점 더 종교화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왕정에서 귀족정으로, 그리고 지금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입고 지배계급은 생존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노예제도에서 봉건제로, 그리고 자본가-노동자 제도(자본주의)로 발전했다.

 

18세기에 등장한 자본주의 제도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등에 업고 등장했지만, 그것은 아주 세련된 노예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에서 이제 금융자본주의로 그 모습을 탈바꿈하여, 아주 교묘하고 절묘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정치신학과 정치경제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현대사회에서 종교(신학)와 경제가 인간의 해방을 위해 봉사하지 않고 인간의 억압을 위해서 이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억압하고 착취하는데 이용당하고 있는 종교와 경제는 자신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그만큼 그 억압과 착취의 메커니즘이 깊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신학과 정치경제학 공부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는 지배논리, 즉 억압과 착취 메커니즘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공부이다. 만약 그 억압과 착취의 메커니즘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신학(신앙생활)을 하거나 경제생활을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억압과 착취의 희생자가 되기 십상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억압과 착취의 조력자가 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불쌍한 인생을 살거나 죄짓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종교인 기독교에 몸담고 있는 그리스도인, 특별히 목회자들은 정치신학과 정치경제학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 공부의 시작은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와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이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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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5. 19. 10:27

상호내주의 기도

(요 17:11-21)

 

주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어떠한 기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상호내주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상호내주 하게 되며,

그렇기에 우리의 기도는 상호내주의 기도가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상호내주 안에서 드리는 기도이기에

우리의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거룩하고 위대한 기도임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가진 무게와 능력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역동적인 기도의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하시고,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기도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의 기도를 사역(ministry)으로 이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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