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1. 5. 12. 12:40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는 말씀을 붙들기를 간구하는 기도

(에스겔 16:1-16)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우리가 살아 숨쉬길 바라시며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시는 주님,

우리는 지금 ‘알 수 없는 영역’에 들어와 있어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힘을 모아 이 어려운 시대를 극복해보려고

온 인류가 노력하고 있지만,

우리의 지혜와 손은 너무도 짧아

이 ‘알 수 없는 영역’을 다 알지 못합니다.

이 알 수 없는 영역에 덩그러니 붙박여 있는 우리들,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에서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어떠한 모양으로든 품에 안아 주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 어려운 때일수록, 두려움과 불안이 몰아쳐 올 때일수록

주님의 말씀을 붙들게 하옵소서.

거기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음을 잊지 말게 하셔서,

죽음에서까지도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이 알 수 없는 영역에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있는 우리를

능히 구원하실 것을 믿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주님의 그 사랑의 손길을 갈망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5. 12. 12:28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에스겔 16:1-6)

 

드라마에 단골 메뉴로 나오는 설정은 ‘출생의 비밀’이다. 대단한 성공을 이룬 주인공의 출생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드라마의 이야기는 절정에 이른다. 본문은 딱 그런 순간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의 출생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사람아,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그의 혐오스러운 일을 알게 하여라!” 지금, 예루살렘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겠다는 뜻이다. 벌써 ‘혐오스러운’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을 보니, 예루살렘의 화려함 뒤에는 어두운 출생의 비밀이 담겨 있는 것이 보인다. 숨죽여 보게 되는 곳이다.

 

“예루살렘에게 주 여호와가 이렇게 말한다. 네 근본과 태생은 가나안 땅에서 비롯됐다.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고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었다. 네 출생에 대해 말하자면 네가 태어난 날 아무도 네 탯줄을 자르지도 않았고 물로 깨끗하게 씻기지도 않았다. 소금으로 문지르거나 포대기에 싸주지도 않았다. 이런 것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네게 해줄 정도로 네게 인정을 베풀거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너는 네가 태어나던 날 미움을 받아 들판에 버려졌다.”(3-5절/우리말성경).

 

출생을 가나안, 아모리, 헷과 연관시키는 이유는 예루살렘이 처음부터 영광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아모리, 헷은 대표적인 가나안의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말로 하면, 족보도 없는 이들이었다. 그 말은, 예루살렘은 그렇게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에스겔이 예루살렘의 영광이 무너진 이후, 즉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바탕으로 기록된 것을 감안하면, 이스라엘이 무너진 예루살렘의 영광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것은 넌센스라는 뜻이다.

 

에스겔이 예루살렘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예루살렘이 그토록 영광스럽게 된 이유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 덕분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교만에 빠져 영광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잊고 하나님을 떠나 살다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전의 그 비천한 모습으로 되돌아 갔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에스겔을 예루살렘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고 있다.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해,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던 존재, 예루살렘.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네가 들에 버려졌느니라”(5절). 참 가슴 아픈 문장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실존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모두 버려진 존재이다. 이런 문장이 있다. 엄마는 나를 자궁에서 버렸다.” 우리는 그것을 ‘탄생’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우리 인간은 모두 엄마의 자궁으로부터 (들과 같은) 세상으로 버려진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서 운다. 버려진 존재는 그 안에 깊은 불안과 쓸쓸함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 인간 안에 깊이 배어 있는 불안과 쓸쓸함은 바로 우리가 엄마의 자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원초적 경험에서 온 것이다.

 

엄마들이 아기를 낳고 나서 겪게 되는 산후우울증은 자신의 자궁에 있던 생명을 바깥으로 버렸다는 죄책감과 이제 자유롭게 됐다는 해방감의 묘한 감정들의 섞임 속에서 오는 것이다. 그 우울증을 건강하게 잘 극복하는 엄마는 자궁에서 버려진 아이를 자궁이 품고 있던 것처럼 다시 품어 주지만, 극복하지 못하면 버려진 아이를 다시 품어주지 못한다. 이처럼 인간에게 발생하는 일들은 묘한 감정들이 뒤섞인 아슬아슬한 일들이다. 자궁에서 버린 나를 다시 품어 키워준 엄마는 참 고마운 존재인 것이다. 당연한 일이 아니라, 기적 같은 일이고 은혜이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출생의 비밀을 밝힌 뒤, “배꼽의 탯줄도 자르지 않은 채, 물로 씻겨지지도 않은 채, 소금을 뿌리지도 않은 채, 강보로 싸지도 않은 채” 들에 버려진 아이를 ‘사랑의 마음으로’ 품에 안아준 이가 누구인지를 말해 준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그때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가 네가 핏덩이인 채로 발길질하는 것을 보았다.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6절).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살던지 죽던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생명을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나는 외침이다. 애틋한 하나님의 마음.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내가 살던지, 죽던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이 세상에서 나의 생명이 끊어지지 않도록 나를 품에 안으시는 하나님!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우리는 발가벗겨져 세상에 던져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요즘 사람들의 고립감과 우울감과 위기감이 극에 달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에 이렇게 집단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7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과 좀 더 탄탄해진 경제구조와 좀 더 민주화된 정치체제 덕분에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이지, 좀 더 이렇게 가다가는 모든 게 무너져 내릴 판이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무너지면 다 소용없는 법이다.

 

요즘은 애틋한 하나님의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라는 이 음성이 참 절실한 때이다. 무엇인가가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이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이유와 핑계들이 존재하는 시대이다. 우리 생명들은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이지만, 거기에 붙어있지 않을, 수많은 이유와 핑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생명을 주시고,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버려진 것 같은 우리들을 다시 품에 안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살아가게 하신다.

 

어렵고 힘들 때, 버려진 것 같이 불안하고 쓸쓸한 때에 성경처럼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우리 인생은 기쁘고 즐거울 때, 또는 아무 일 없이 평안할 때가 대부분이지만,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깊은 절망과 우울에 빠질 때가 있다. 지금처럼 불가항력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사람들은 더 깊은 절망에 빠진다. 성경은 이럴 때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드라마 보는 시간의 10분의 1만 떼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데 시간을 써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어려운 시대를 잘 건널 수 있다. 이런 때는 성경을 기계적으로 필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물론 마음이 너무 지쳐 있으면, 성경 보는 것도 다 귀찮은 법이다. 아무 것도 하기 싫어, 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이것 한 가지 만은 꼭 기억해 두면 좋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성경은 환란의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사랑으로 돌보셨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큰 일을 통해서만 생명이 보존되도록 돌보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통해서도 그렇게 하신다.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노년에 이삭을 주셔서 그들의 생명을 돌보셨다. 이삭이 엄마 사라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그에게 리브가를 주셔서 결혼하게 하심으로 돌봐주셨다.

 

모세가 왕궁에서 도망쳐 광야에서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십보라와 장인 이드로를 만나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돌봐주셨다. 나중에 장인 이드로는 모세가 어려울 때 계속해서 큰 힘이 되어준다. 가뭄 때문에 죽을 위치에 처한 롯과 나오미, 하나님께서는 롯과 보아스 사이에 사랑이 싹트게 하심을 통해서 그들을 돌아보셨다. 다윗이 죽음의 위협에 처해 도망 다닐 때, 하나님은 요나단의 우정을 통해서 그를 돌아보셨다.

 

엘리야 선지자가 죽음의 처지에 놓여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를 통하여 그를 돌아보셨다. 요나가 물 속에 던져져 죽음에 처해졌을 때, 하나님은 바다의 생물(큰 물고기/고래?)을 통하여 그를 돌아보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무엇이 예수님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위로를 받으셨지만, 한 편으로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환대를 통해서 위로를 받으셨다.

 

현재 우리의 삶 속에는 내가 생명을 포기하지 않도록 돌보시는 하나님의 애틋한 손길이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정경아 집사님) 궁금하다. 그것이 비록 아주 보잘것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잡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다. 어떤 분이 정말 좋은 드라마라고 추천해 주어서 요즘 보게 된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있다. 거기를 보니까, 주인공 이지안(아이유)의 고단한 삶을 달래주는 것은 맥심커피 두 봉지를 끓는 물에 타서 먹는 것이다.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위로이고, 하나님의 손길이다.

 

우리가 의식했던, 의식하지 못했던 하나님은 우리가 힘들 때,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는 말씀을 건네시며 우리를 품에 안아주신다. 의식을 하면, 그 사랑의 손길을 느낄 때마다 주님께 감사하고, 의식하지 못했다면, 한 번 곰곰이 현재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라. 그러면 발견하게 될 것이다.

 

황인숙의 “우울”이라는 시를 나누며 마치고 싶다.

 

나는 지금

알 수 없는 영역에 있다

깍지 낀 두 손을 턱 밑에 괴고

 

짐짓 눈을 치켜떠보고

가늘게도 떠보고

끔벅끔벅, 골똘해보지만

도무지

부팅이 되지 않는다

 

풍경이 없다

소리도 없다

 

전혀 틈이 없는

알 수 없는 영역을

내 몸이 부풀며 채운다

 

알 수 없는 영역에

하염없이 뚱뚱한 나

덩그러니 붙박여 있다

 

시인은 ‘우울’을 ‘알 수 없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 ‘알 수 없는 영역’에 들어와 있기에 더 우울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알 수 없는 영역이지만,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는 영역은 없으시다. 그러니, 알 수 없는 영역에 들어온 것 같이 우울하고 두렵고 불안하더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 그곳에서 덩그러니 붙박여 있는 나를 안아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조금만 힘을 내자.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21. 5. 9. 08:26

[시론] 장수진의 시 ‘서울의 혜영이들’

 

혜영아 밥은 먹고 다니니

엄마 메시지 치지 마세요

내 시를 읽어드릴 수 없어요

나는 오늘 밤에도 바람에 스치우는 별을

찢어버리는 년이에요

우리의 우울을 합치면

껍질 벗긴 바나나로도

서로 찔러 죽일 수 있을 거에요

 

ㅡ 장수진의 시 ‘서울의 혜영이들’ 부분, 시집 <사랑은 우르르 꿀꿀>에 수록

 

1980년대 대학생들의 최고 키워드는 '데모'였다. 1990년대 대학생들의 최고 키워드는 '취업'이었다. 현재 대학생들의 최고 키워드는 '생존'이다. 198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낭만'이 있었고, 199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꿈'이 있었다. 현재 대학생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한국은 '헬조선'이라 불린다.

 

1997년 IMF 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왕은 '금융자본'이다. 지금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자본(돈)'이 세상의 왕노릇을 하고 있는 시대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자본이 우리에게 대항해야 할 '적'으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병철은 마르크스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자본은 자신의 번식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착취하는 것이다. 자유 경쟁 속에서 자유롭게 해방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자본이다"(심리정치 13쪽).

 

신자유주의 체제가 무서운 이유는 눈에 보이는 적이 없다는 것이다. 넘어야 할 산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 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해야 한다'는 외적 강제 대신 '할 수 있다'는 내적 강제를 통해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자기 착취를 하게 끔 유도한다. '할 수 없다'며 내적 강제인 '할 수 있다'에 저항하는 자는 무능력한 사회의 낙오자로 전락하고 만다.

 

요즘 대학생들은 모여서 ‘데모’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공공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모여서 ‘꿈’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넘어야 할 산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따로 각자 알아서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자기계발’에 힘을 쏟을 뿐이다. ‘할 수 있다’는 자기 동기,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아는 신자유주의적 주체이다. 즉, 신자유주의 체제에 묶여 있는 주체이다. 한병철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목적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심리정치 11쪽). 여기서 존재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무한한 자유 경쟁의 토대를 만들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고 오히려 노예의 상태에 놓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개개인이 고립되어 있어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을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이다”(같은 책 12쪽). 결국 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현할 기회를 박탈당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개인은 우울할 뿐이다.

 

시인은 신자주유주의 주체에 ‘혜영’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 주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서울에는 ‘혜영이들’이 가득하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 혜영이들의 ‘슬프고 우울한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자본주의가 몰려온다. 슬프고 우울한 감정이, 그것은 블루스…”(백색 숲의 골초들). 이 우울한 주체, 혜영이들은 “오늘 밤에도 바람에 스치우는 별을 찢어버릴” 수밖에 없다. 누가, 어떻게 ‘혜영이들’에게 시를 다시 읽을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5. 7. 06:38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요한복음 15:1-8)

 

주님, 우리는 삶의 풍요와 기쁨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은 풍요와 기쁨이 아니라

가난과 절망입니다.

우리를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

우리에게 풍요와 기쁨의 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참포도나무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로서

그 안에 거할 때,

우리에게는 참된 풍요와 기쁨이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거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머무는 것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교회론과 연결시켜 생각할 줄 알아,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교회의 성사(sacraments/성례)들을 통하여

우리가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로서

그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경험하게 하옵소서.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신 주님,

주님 안에 거합니다.

주님 안에 거한 우리의 삶에 풍요와 기쁨을 넘치도록 주옵소서.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5. 7. 06:35

거한다(abide/meno)는 것의 의미

(요한복음 15:1-8)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배경을 알아두는 게 좋다. 첫째, 이 설교는 고별 설교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을 때는 좀 더 진지하게 들을 필요가 있다. 포도농장의 로맨틱한 분위기가 아니라, 임종을 앞둔 부모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비장하면서도 슬프면서도 감사한 분위기다.

 

둘째, 이 포도나무의 비유는 이사야의 말씀과 엮어서 이해해야 한다. 이사야 5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해서 다음과 같음 말씀을 선포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이사야 5:1-2)

 

예수님이 본인을 가리켜 ‘참포도나무’라고 했을 때, 이것이 바로 이사야서에 나오는 ‘극상품 포도나무’를 뜻한다. ‘극상품’이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알레씨노스’는 ‘신뢰할 만한’, ‘온전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극상품은 ‘눈이 부실 정도로 붉은 종류의 포도’를 일컫는 말로, ‘매우 가치 있는’이라는 뜻이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되었던,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바로 그 포도나무다. 이 두 가지, 참포도나무 비유는 예수님의 고별 설교이고, 이사야의 말씀과 연관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수의 사건 이후, 기독교의 복음이 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것은 가까운 지역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말씀 자체에 대한 이해의 배경이 되는 문화적 유사성도 한 몫 했다.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도 그렇다. 포도재배가 주요 농업이 아닌 지역에 사는 자들은 포도재배의 중요성을 별로 알지 못한다. 포도재배가 정말 중요했던 지중해 지역의 나라들은 그것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가 마음에 깊이 와 닿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포도재배가 얼마나 지중해 지역 주민들의 삶에 중요하면, 포도재배를 주관하는 신이 있었겠는가. 그 신의 이름은 디오니소스 또는 바쿠스로 불린다.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 비극은 포도주 재배를 마치고 국가적 수준에서 포도재배를 관장하는 디오니소스 신을 위한 축제에서 상연했던 연극이다. 국가 최고의 축제인 이 축제를 비극(연극)으로 빛낸 이는 그 당시 최고의 영예를 안았고,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만큼, 그들의 삶은 포도 재배와 깊은 연관을 지녔다. 오죽하면, 알렉산더 대왕이나 로마제국이 점령한 나라는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 나라’에 국한되었을까. 그 당시 땅끝은 단순히 어떤 지형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 한계선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포도 재배가 되지 않는 땅은 땅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그 지역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예수가 극상품의 포도를 생산하는 포도나무라니! 이건 아주 귀가 쫑긋한 비유다. 극상품의 포도를 맺는다는 것은 삶의 풍요와 기쁨과 연결된다. 극상품의 포도는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었고, 극상품의 포도로 만든 포도주는 맛이 좋았다. 지금도 극상품의 포도로 만든 포도주는 매우 고가에 팔린다. 이처럼, 극상품의 포도는 풍요와 기쁨을 상징한다.

 

사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굉장히 단순하다. 풍요와 기쁨이다. 가난과 절망을 바라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인간은 누구나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은 풍요와 기쁨보다 가난과 절망이 많다. 훨씬 많다. 풍요와 기쁨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 말하지 않는다. 극도의 물질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생득적으로 안다. 물질적 풍요와 기쁨은 참 좋은 것이지만, 풍요와 기쁨은 그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풍요와 기쁨은 매우 총체적인 것이다.

 

실제적으로, 미국의 어느 기관에서 물질적 풍요가 주는 만족을 조사한 적이 있다. 조사 결과, 연봉 7만 5천불 이상 버는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가 주는 만족에서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러니까, 연봉 7만 5천불 버는 사람이나 연봉 20만불 버는 사람이나, 연봉 100만불 버는 사람이나, 물질적 풍요에 대한 만족도가 비슷했다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번다고 그에 비례해서 삶의 만족도가 높은 것은 아니다. 적당히 벌면 된다. 하지만, 7만 5천불 이하를 버는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가 주는 만족도에서 그 이상을 버는 사람들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질적 풍요가 어느 정도 채워지지 않으면 불행을 느끼는 세상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풍요와 기쁨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삶의 풍요와 기쁨을 위한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보려고 비즈니스에 뛰어는 것도 그렇고, 직장을 다니는 것도 그렇고, 결혼도 그렇고, 또는 독신으로 사는 것도 그렇고, 자식을 낳는 것도 그렇고, 또는 자식을 낳지 않는 것도 그렇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는 노력도 그렇고, 또는 대학에 가지 않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도둑질도 풍요와 기쁨을 지향한다. 그런데, 삶의 풍요와 기쁨을 얻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살았는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가난과 절망이다. 이것이 인간 실존이 맞닥뜨리는 현실이다.

 

예수님이 인간 현실을 응시하면서 본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지만 결국 가난과 절망을 경험하고 마는 인간들의 불쌍한 현실이다. 그런 상황을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도 표현했다. “목자 없는 양.” 양도 풍요와 기쁨을 꿈꾼다. 그래서 양은 푸른 초장을 찾고 쉴 만한 물가를 찾는다. 그런데, 양은 눈이 어두워 푸른 초장을 찾기 힘들고, 쉴 만한 물가를 찾기 쉽지 않다. 목자가 데려다 주어야만 한다. 혹, 목자가 이끄는 양무리에서 벗어나 다른 데로 갈라치면, 이리나 늑대에게 잡아 먹히기 일쑤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꿈꾼다. 그래서 세상으로 나간다. 그런데, 우리를 인도하겠다는 삯꾼 목자들은 우리 더러 이렇게 다그친다. 풍요와 기쁨을 꿈꾸면, “부를 추구하라고, 권력을 추구하라고, 예뻐지라고, 명성을 얻으라고, 경건해지라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라고, 명예로워지라고, 올바르게 살라고 우리를 다그친다.”(교회를 찾아서, 54쪽). 우리는 이러한 유혹들에 빠져, 이것이 풍요와 기쁨을 가져다주는 길인 양, 우리는 그 길을 열심히 걸어간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서, 이미 시간을 다 쓰고, 이미 인생을 다 쓰고 나서 깨닫는다. 그 길의 끝에는 풍요와 기쁨이 없었다는 것을!

 

아무리 남의 등을 쳐먹고 살던 인간도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말을 할 때는 ‘진실’을 말하는 법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풍요와 기쁨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그러면 그들 중에 “부를 추구하라고, 권력을 추구하라고, 예뻐지라고, 명성을 얻으라고, 경건해지라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라고, 명예로워지라고, 올바르게 살라고” 다그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여기, 죽음을 앞둔 한 사람이 풍요와 기쁨이 넘치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말하고 있다. 그 사람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는 사람, 우리 인간 뿐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제 2위격,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풍요와 기쁨이 넘치는 인생을 살고 싶는가? 그렇다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내 안에 거하라!” 이는 우리가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행하는 그 많은 일들을 통해서 풍요와 기쁨을 얻지 못하고, 가난과 절망을 얻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하는 그 헛된 일들을 전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 헛된 일들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죽음을 앞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귀에 들린다면, 풍요와 기쁨을 얻고 싶거든,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안에 거하라!”는 이 말씀에 마음이 요동쳐야 한다.

 

왜 우리는 ‘그 안에’ 거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그는 참포도나무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극상품의 포도를 재배하려면 참포도나무가 필요하다. 참포도나무의 가지는 극상품을 얻을 수 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하면, 가지인 우리는 극상품을 얻는다. 극상품 포도, 풍요와 기쁨을 가져다주는 바로 그것! 같은 포도여도, 참포도나무인 그리스도 안에 거해서 얻는 포도와, 그냥 포도나무에서 얻는 포도는 그 질이 다르다. 같은 돈을 벌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기에 거하며 버는 돈과, 그냥 버는 돈은 그 질이 다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포도열매를 얻고 있는가? 내가 지금 삶에 얻고 있는 포도열매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거해서 얻는 포도열매인가, 아니면, 그냥 포도열매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길 것이다.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무슨 방법을 통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참포도나무의 가지로서 그 안에 거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고려야 할 것은 교회론이다. 현대 기독교인에게 가장 약한 부분이 교회론이다. 교회에 대한 이해력 수준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이는 근대 자본주의의 영향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복음이 아니라 자본(돈)에 휩쓸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근대 자본주의의 최대 목표는 인간을 고립된 개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고립된 개인으로 만드는 이유는 그 고립된 개인이 바로 노동자가 되고 동시에 소비자가 되기 때문이다. 노동력과 소비력을 동시에 갖춘 근대인,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게 교회론의 약화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노동력과 소비력을 갖춘 고립된 개인은 교회를 고립된 개인의 연합 정도로 생각하게 만든다. 고립된 개인의 연합으로서의 교회는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헤쳐 모일 수 있다. 다른 말로 해서, 교회를 개인의 필요와 의지에 따라서 얼마든지 나가고 들어올 수 있는, 하나의 회사 같은 조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를 그러한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은 유기체적으로 이어져 있다. 팔이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심장이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리가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팔이 몸에 붙어 있기 싫다고 스스로 떼고 나가지 않는다. 심장도, 다리도 마찬가지다.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인 우리가 ‘거한다’라는 것은 반드시 교회론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거한다’라는 말을 심리적인 것으로만 조그맣게 생각하고 만다. ‘거한다’는 것은 매우 구체적인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심리적 동의가 아니다. 믿음은 삶 전체, 몸과 마음과 영혼 모두가 그에게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거한다’는 것은 매우 육신적인 것이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로서 ‘거한다’는 뜻을 매우 피상적으로만 생각하고 말 것이다.

 

‘거한다’는 것의 의미를 좀 더 깊이 파악하기 위해서 레이첼 에반스의 저서 <교회를 찾아서 Searching for Sunday>에서 도움을 얻어보고자 한다. 이 책은 교회의 성사(sacraments/성례전)에 맞춰 쓰인 책이다. 그 이유는 레이첼 에반스가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된 계기가 바로 성사(성례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성례전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실제였다. 그래서 레이첼은 성사(성례전)을 다음과 같이 아주 쉽게 풀이하고 있다.

 

교회는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고 말한다(세례).

교회는 우리가 망가진 존재라고 말한다(고백/고해성사).

교회는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성품/직분).

교회는 우리를 먹인다(성찬).

교회는 우리를 환대한다(견진/confirmation).

교회는 우리에게 치유의 기름을 붓는다(도유).

교회는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혼인).

(교회를 찾아서, 26-27쪽)

 

특별히, 세례와 성찬 이외의 성례전은 한국 개신교인들에게는 낯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례전’이라고 이름을 더 이상 붙이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의 신앙생활은 일곱가지의 성례전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세례를 받는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한다. 우리는 직분을 받는다. 우리는 성찬을 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정체성)을 다시 확인한다. 우리는 아픈 이들을 심방한다. 우리는 결혼(사랑)을 한다. 이러한 성례전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우리가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은혜이다.

 

우리는 삶의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정말 그런가? 그렇다. 우리는 삶의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로서 거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참된 풍요와 기쁨을 가져다 준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하여, 참여하는 것이다.

 

ㅡ 우리는 사랑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사랑해야 한다. (세례).

ㅡ 우리는 우리가 망가진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용서 받는다. (고백/고해성사).

ㅡ 우리는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의 직분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직분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 (성품/직분).

ㅡ 우리는 먹여 주시는 주님 안에서 늘 배부르다. 우리는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주님께 맡겨 놓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한다. (성찬).

ㅡ 우리는 환대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환대한다. 누구든. (견진/confirmation).

ㅡ 우리는 치유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픈 이들을 돌본다. (도유).

ㅡ 우리는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서로 배려하며 아껴주고 사랑하며 산다. (혼인).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그러나, 무엇이 풍요와 기쁨을 주는지 알지 못해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 우리의 인생을 허비한다. 여기, 우리에게 참된 풍요와 기쁨을 주는 길이 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로서 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한다는 것의 의미’를 배웠다. ‘거한다’는 것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실제적인 삶의 문제이다. 그것은,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과의 실제적인 관계 안에 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풍요와 기쁨을 누리기 원한다면, 교회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면 좋겠다. 교회는 우리의 풍요와 기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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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부활은 시 그 자체]

 

파리코민이 낳은 시인 랭보의 '견자의 미학'에 의하면, 자유로운 주체인 견자(Voyant)가 되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을 보게 되는 상태에 놓인다. 견자는 '보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다. 이러한 상태에 대하여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되다"(눅 10:23). 이것이 '견자'의 의미 일 것이다.

 

랭보에 의하면 '견자(보는 자)'는 내 의지나 바람에 따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나 바람을 좌절시키면서 내 앞에 주어진 것(객관/대상)을 보는 자이다. 즉 견자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자가 아니라 내가 보고 싶지 않더라도 내 앞에 주어진 대상이 보라고 하는 대로 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활'은 견자가 아니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들은 이미 정해진 것들만 보도록 강요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볼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부활은 우리의 감각들이 익숙해져 있는 것들을 넘어서는 '대상'이기 때문에 현재 고착된 감각들에 대한 초월 또는 극복 없이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랭보는 견자가 되기 위하여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을 '감각들의 착란'이라고 말한다. 감각들의 착란. 매우 중요한 용어이다. '이렇게 보라'고 우리 앞에 던져진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우리는 감각의 질서를 규정하고 지배하고 있는 사유체계와 가치체계를 전복시켜야 한다. 이러한 작업 없이, 즉 이러한 감각들의 착란 없이 내 앞에 던져진 대상을 그대로 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랭보에게 시란 감각들의 착란을 통해서 기존의 사유체계와 가치체계를 전복시켜 보이는 대상을 보이는 대로 옮긴, '미지(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의 세상을 펼쳐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를 '상징주의' 또는 '초현실주의'라고 부른다. 사실적이지 않아서 상징주의, 초현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현실에 가려져 있는 '전복적인 현실(미지)'을 감각들의 착란을 통해서 눈에 보이게 끔 펼쳐보여주기 때문에 상징주의, 초현실주의라 부르는 것이다.

 

기존의 사유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착란된 감각으로 세계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포착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부활은 기존의 규칙과 이성, 그리고 사유를 전복시킨 '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우리 앞에 던져진 대상인 부활을 착란된 감각으로 포착하고자 하는 시인의 몸부림과도 같은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