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1. 10. 26. 02:54

기름 부음 받기를 간구하는 기도

(요일 2:18-29)

주님,

사도 요한이 ‘적그리스도’라는 강력한 용어까지 쓰며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말씀이 무엇인지,

겸손히 듣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요한 공동체를 떠난,

진리를 떠난 ‘적그리스도’들을 생각하며

사도 요한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거함’의 영성이 없었던 그들을 생각하며,

여전히 진리 안에 거하고 있던 공동체의 지체들을 생각하며 쓴 이 편지에는

정말 오랜 세월 진리 안에 거한 어르신의 절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격려에 힘입어,

우리도 ‘처음부터 들은’ 복음,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진리 안에

몸과 마음과 영혼이 온전히 거하기를 원합니다.

이 복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주여,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 모두가,

어린 아이들이나, 청년들이나 부모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가

기름부음을 받아,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믿고,

모두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진리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우리는 진리로 이끌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0. 26. 02:52

적그리스도와 기름부음 

(안티크리스토스와 크리스마)

(요한일서 2:18-29)

 

글의 전개: 적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기름부음에 대한 이해, ‘적그리스도는 왜 요한 공동체를 떠났을까’의 질문에 대한 답변, 그리고 우리의 신앙 들여다 보기

 

1. 몇 절 안 되는 짧은 구절인데, 아주 무거운 단어들이 몇 개 등장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단어는 ‘적그리스도(안티크리스토스/안티크리스트)’이다.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지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말이었다. 지금도 일부 개신교인들은 가톨릭을 ‘적그리스도’라 칭하고 있고, 한 때는 가톨릭, 특별히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난무한 때도 있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당시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칭하며 공격하고 비판했던 것의 영향이 크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비난은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던 이승복 어린이의 말처럼 개신교인들의 마음에 가톨릭을 향한 적대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2. 또한 모든 서구적 가치의 전복을 꿈꿨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안티크리스트/적그리스도>라는 책을 써서 서구 사회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기독교적 요소를 적나라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을 통해서 서구 사회의 기독교적 요소를 비판했기에 기독교인으로부터 ‘악마’라는 비난을 들었고, 지금도 기독교인들은 그를 좋지 않은 눈길로 바라본다. 그래서 사람들은 니체를 일컬어 ‘적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는 기독교를 대적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3.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기독교 역사에서 하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에 우리는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성경 곳곳에 있는 말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요한1서에만 나오는 용어이다. 이 용어가 나올 법한 곳, 요한계시록에도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서로 사랑하라’를 그토록 강조하는 요한1서에만 이 용어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꽤 충격적이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4. 요한일서의 화자, 요한 할아버지는 왜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누구에게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까?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요한일서에서만 등장하지만 그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용어들은 성경 곳곳에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데살로니가 후서의 ‘불법의 사람’ 또는 ‘멸망의 아들’(살후 2:3-9)이 있고,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포학하여 가증한 것’(단 9:27)이 있고, 마가복음에 나오는 ‘멸망의 가증한 것’(막 13:14) 등이 있다. 적그리스도는 표면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하려는 사람 또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5.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데에는 특별한 정황이 있다. 요한 공동체는 매우 초기의 기독교 공동체이므로, 아직 분열이 없었고, 자기 스스로 ‘그 교회(the church)’라 생각할 만큼,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신앙 위에서 진리 그 자체를 품고 있는 공동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공동체에 시련이 닥친다. 함께 세례도 받고,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던 사람들 중에 스스로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한 마디로, 분열(schism)이 요한 공동체를 강타했다. 할아버지는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거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19절).

 

6. 할아버지는 아주 명시적으로, 콕 집어서, 요한 공동체를 떠난 이들을 일컬어서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다. 공동체를 떠난 이들에게 ‘적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의 특권처럼 느껴진다. 2천 년이 지난 지금, 교회가 엄청나게 나뉜 이 때에 교회를 떠난 이에게 적그리스도라는 부르는 일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개신교가 가톨릭을 일컬어 적그리스도라 부르는 것은 유체이탈 화법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을 통해서 교회로부터 나온 것은 개신교이지, 가톨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은 프로테스탄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불렀다. 물론 프로테스탄트들도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가톨릭과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부르며 비난했다. 기독교 역사에서 분열이 있을 때마다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계속해서 소환되었다.

 

7. 이런 아픈 역사성을 가진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요한 공동체의 특별한 정황 속에서 살펴봐야 엉뚱한 상황에서 엉뚱하게 쓰이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요한 공동체의 맥락 안에서 ‘적그리스도’는 ‘요한 공동체를 박차고 나간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요한이 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진리에서 떠나 거짓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이 말하는 진리는 무엇이고, 적그리스도가 말하는 거짓이란 무엇인가? 진리를 알면 거짓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법이다.

 

8. 요한이 말하는 진리는 그가 만들어낸 진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다. 그것을 사도적 전승(사도로부터 전해진 복음/그래서 교회는 사도적 교회라 불린다)이라고 하는데,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경험한 사도들은 다음과 같은 진리를 전해준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고, 진리의 표현이다. 요한 공동체를 비롯한 기독교 공동체는 모두 이 진리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했고, 주님은 베드로의 이러한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마 16:15-18).

 

9. “예수는 그리스도다!” 이것은 진리이다. 그렇다면, 거짓은 무엇인가? 이 진리를 부인하는 자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이다. 할아버지가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자들은 요한 공동체를 떠나갔다. 그들이 요한 공동체를 떠나간 이유는 그들이 더 이상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하는 진리를 고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들은 것에’ 더 이상 거하지 않았고, 그들이 요한 공동체를 떠났다는 뜻은 그들이 더 이상 진리 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을 말하는 자들일 뿐이다.

 

10. 본문에는 ‘적그리스도’처럼 문제적 용어는 아니지만, 그것과 매우 대조되는 신비한 용어가 하나 등장한다. 그것은 ‘기름부음(크리스마/anointing)’이라는 용어이다. 이 편지는 요한 공동체를 떠난 적그리스도에게 쓰는 편지가 아니라, 공동체에 여전히 ‘거하고 있는’ 지체들에게 쓴 편지이다. 공동체를 떠난 적그리스도와는 달리 그들이 공동체에 여전히 거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처음부터 들은 것’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 안에는 ‘기름부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 할아버지가 말하고 있는 ‘기름부음’은 무엇인가?

 

11. 지금 개신교 전통에는 이러한 것이 별로 없지만, 구약성경을 보거나 기독교의 다른 전통을 보면 기름을 바르는 전통들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기름부음’의 전통은 선지자나 제사장 또는 왕을 세울 때 나타난다. 그들에게 기름(올리브 오일)을 붓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히 구별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메시아라는 말 자체가 ‘기름부음 받은 자(the anointed one)’라는 뜻이다. 아직 일곱개의 성례전(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을 모두 가지고 있는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 같은 곳에서는 ‘병자성사’라고, 병자들에게 기름을 바르며 병 낫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전통도 있다. 이처럼 ‘기름부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보여주는 성례전적인 성격을 가진다.

 

12. 그러나,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기름부음’은 이러한 것과는 다른 맥락으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물리적 기름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요한복음 16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 16장에는 엄청난 긴장감이 흐르고 있는데, 요한 공동체가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출교 당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출교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법 바깥으로 쫓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출교 당한 이들을 누군가 죽여도 살인자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런데, 요한 공동체는 출교의 위기에 놓여 있으며, 유대인들이 출교 당한 요한 공동체를 죽이더라도 그들은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며 요한 공동체를 죽이는 일에 더 열심을 낼 것이다.

 

13. 이러한 무시무시한 일을 앞에 놓아두고 떨고 있는 제자들(요한 공동체)에게 위로의 말씀을 건네시면서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한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불린다.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 부르고, 그 진리의 영이 요한 공동체에 임할 것이라는 말씀은 굉장히 중요하다. 예수의 제자들(요한 공동체)이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고백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한 제자들에게 그들의 고백이 헛된 것이 아니며 진리를 행하는 것이고, 오히려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이 거짓를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이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옳다!’고 하나님이 판결을 내려주시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이든지, 그것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일이라면 박해를 받더라도, 설사 죽임을 당하더라도 가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하여 언제나 ‘진리’를 구하는 법이다.

 

14. 요한복음 16장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상황이 지금 요한일서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다. 요한일서에서 할아버지가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너희는 주께 받은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라고 말할 때의 ‘기름부음’은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기름부음, 즉 성령을 받은 요한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절).

 

15.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 적그리스도는 요한 공동체에 머물지 못하고 떠났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적그리스도’, 그리고 ‘기름 부음’과 함께 본문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용어 ‘거함(abide/메노)’이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라는 말씀을 하셨듯이, 요한일서에서도 ‘거함’이 강조되고 있다. 요한 공동체는 ‘거함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거함’에 대하여 강조한다.

 

16. 거한다는 것’은 머물고 집중하고 헌신한다는 뜻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어 단어 중에 ‘mindfulness’가 있다. 나는 이 단어를 컴퓨터에 붙여 놓고 일한다. 정신이 하도 딴 데로 가서, ‘바로 지금에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mindfulness’란 정신이 빈 데 없이 꽉 찰 정도로 딴 생각하지 않고 그 마음이 한 곳에 집중해 있다는 뜻이다. 마음이 지금 바로 여기에 100% 머물러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거한다’라는 뜻은 이것보다 더 강력한 뜻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함(abide/메노)’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즉 한 인간이 전인적으로, 온 인격체가 머물고 집중하고 헌신한다는 뜻이다.

 

17. 본문을 보면, 우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것을 요한일서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감사할 일이고 은혜이다. 한 번 상상해 보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선포를! 부흥회 용어, 또는 범퍼 스티커 같은 용어로 이것을 ‘성령충만’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약장사가 약파는 느낌으로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들어서 그렇지, 성령충만이라는 말은 사실 굉장한 말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고 우리에게 집중하시고 우리에게 헌신하신다. 이것을 좀 더 말랑말랑한 용어로 바꾸면, 성령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랑이란 머물러 있고 집중하고 헌신하는 것 아닌가.

 

18. 요한 할아버지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것’에 거하는 것, ‘성령이 우리를 가르친 그대로 주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것’ 즉 복음, 다시 말해,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진리 안에 거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진리 안에 머물러 집중하고 헌신하고 있는가. 나의 육체가, 나의 마음이, 나의 영혼이, ‘예수는 그리스도다!’에 ‘충만히/fully’ 머무르고 집중하고 헌신하고 있는가.

 

19. ‘기름부음’은 정말 중요하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셔야 우리가 우리의 육체와 마음과 영혼(우리의 전인격/인간성)을 엉뚱한 것에 빼앗기지 않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이 세상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만이 진리이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 안에 있는 자, 거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진리를 떠난 ‘적그리스도’가 아닌, 진리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1. 10. 23. 10:50

마음

 

해가 질 무렵에는 마음을 웅크리게 돼요

지구가 거꾸로 돌았으면 좋겠어요

시간은 왜 앞으로만 가는 걸까요

끝장을 보고 싶은 걸까요

붉은 하늘이 검어질 때

동쪽에 뜨는 별은 기어코 뚫고 들어오는 시간 바깥의 눈물일까요

별 하나

별 둘

어둔 하늘에서

눈물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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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10. 20. 06:09

크리스투스 사피엔스로 살아가길 간구하는 기도

(요일 2:7-17)

 

주님, 우리의 눈과 귀를 스마트 폰에 고정시키는 세상,

그래서 인류를 ‘포노 사피엔스’라 부르는 세상에서

우리는 여전히 ‘크리스투스 사피엔스’로 살아가기를 결단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주님의 품에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가족의 일원로서 양육을 잘 받아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으로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육신의 나이와 상관없이

성령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며

영적인 젊음을 유지하는 생명력 넘치는 주님의 가족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들,

‘크리스투스 사피엔스’로 살아가길 원하오니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워지게 하시고,

그 새로움을 가지고

노쇠해져가는 이 세상이 다시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생동감/생명력을 잃지 않도록 하거나

그것들을 되찾는 일에 헌신하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모든 만물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으로 이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0. 20. 06:07

크리스투스 사피엔스(Christus Sapiens)

(요한일서 2:7-17)

 

1. 시월과 가을은 참 잘 어울리는 말 같다. 구월을 가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좀 설익은 것 같고, 십일월을 가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좀 너무 깊어진 것 같다. 그러나 시월은 가을이라는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 가을이라는 옷이 딱 맞는 몸 같다. 자본주의에 좀 덜 찌들었던 시대의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영혼을 살찌우기 위하여 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책 구매량이 늘어나던 계절이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스마트 폰과 넷플릭스에게 신체를 빼앗긴 듯하다. 그래서 요즘 인류를 일컬어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라고 부른다. 스마트 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2. 스마트 폰은 우리를 붙들어 두기는 하지만 머물게 하지는 못한다. 스마트 폰을 붙들고 살지만, 우리는 한 가지 깊은 이야기에 머물지 못한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인내심을 잃어가고 공감능력을 잃어간다. 머물러 앉아 누군가의 이야기를 깊이 공감하며 들어주는 것을 지루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요즘 우리들의 인간관계는 매우 겉돌기만 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게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시(詩)를 읽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읽으면 머물 수밖에 없고, 머물다 보면 시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인내심과 이해력, 그리고 공감능력이 자연스럽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페이스북에 ‘詩사랑’이라는 개인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시를 읽으며 잠시 머물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 지역의 사람들과 시 읽는 모임을 가져보고 싶기도 하다.)

 

3. 이 가을, 나의 영혼을 위로하며 살찌게 하는 시는 단연코 천양희 시인의 시이다. 천양희 시인은 당연히 본인 고유의 사유와 언어를 통하여 시를 쓰지만, 그의 시는 전혀 개인적이지 않고 매우 보편적 진리와 감성을 펼쳐 보인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위로하는 힘, 즉 내면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와 빛을 비춰주는 능력이 있다. 그녀의 시에 이러한 힘이 있는 이유는 그녀의 시를 읽다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시라는 덫’이라는 시의 한 구절만 봐도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지금 네 가망(可望)은 / 죽었다 깨어나도 넌 시밖에 몰라 / 그 한마디를 듣는 것.” 50년 넘게 그녀는 시라는 세상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시라는 언어를 길어 올렸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인간 내면에 깊이 자리잡은 고독을 위로하는 힘을 지녔다.

 

4. 천양희 시인의 시를 한 편만 보자. ‘무너진 사람탑’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잠언은

망언이 된 지 오래다

오래된 것과 낡은 것은 다르고 변화와

변질이 다르다는 말

믿지 않은 지 오래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도전보다는

도약을 꿈꾼 지 오래다

허명도 명성이라 생각하고

치욕도 욕이라 생각 않은 지 오래다

젊은이는 열정이 없고

늙은이는 변화가 없는 지 오래다

예술과 상술을 혼돈하고

시업과 사업을 구별 못 한 지 오래다

고난이 기회를 주지 않고 위기가

기회가 되지 않은 지 오래다

 

그러니 꿈도 꾸지 마라

자존심 하나로 버틸 생각

죄 안 짓고 살 생각

 

그러니 너는 조금씩 잎을 오므리듯 입을 다물라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에 수록)

 

5. 이 시에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세상이 아주 적나라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제목처럼 우리는 사람탑이 무너진 시대, 즉 인간성이 무너진 시대, 인간 냄새를 맡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자존심과 존엄성을 다 버리고, 마음껏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다. 죄를 크게 지을수록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입을 오므리고 어금니 꽉 깨물며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더 이상 인간이라는 아이덴티티(identity)로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는, 아주 잔인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이 선풍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그러한 세상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로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으며, 어떻게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6. 이렇게 잔인한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의 눈에 요한일서의 말씀이 들어올까? 어떤 할아버지(요한이라고 불리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까? 더군다나 이 편지는 대략 2천 년 전에 씌어진 것인데, 우리의 마음에는 이 오래된 편지를 받아들일 여유가 있을까? 할아버지는 이 편지를 쓰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절). ‘죄 안 짓고 살 생각’하면 안 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이 편지는 매우 도전적으로 보인다. 죄 안 짓고 살 생각하면 망하는 이 시대에 죄를 짓지 않고 살게 하려는 할아버지의 기획은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7. 게다가 편지를 읽다 보면 할아버지의 사고방식은 매우 극단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나누고, 사랑과 미움으로 나누는 것 같다. 중간이 없다. 빛 아니면 어둠이고, 사랑 아니면 미움이다. 빛이면서 어둠이고, 사랑이면서 미움인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아주 극단적이다. 빛 아니면 어둠이고, 사랑 아니면 미움이다. 할아버지의 이러한 극단적인 사고방식이 정말 고리타분해 보인다. 우리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아니 분간하면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을 분간하면 먹고 살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일만 충실히 할 뿐이다.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무엇을 사랑해야 하고, 무엇을 미워해야 할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8. 그러면서 편지를 보면 할아버지는 매우 ‘가족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12절에서 14절에 그러한 언어 구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할아버지는 마치 가족 구성원들에게 이야기하듯 언어를 구사한다. 자녀들아(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이것은 분명 할아버지가 속해 있는 공동체, 즉 요한공동체의 자기 이해이다. 요한공동체, 즉 교회는 가족(family)이다. 이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해한 사도 바울의 이해처럼 매우 특별한 이해이다. 생물학적, 또는 법적 테두리 안에서 가족을 구성하는 현대인들의 가족에 대한 인식을 뛰어넘는 매우 특별한 가족 이해다. 교회는 가족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9. 이 가족 안에는 자녀들(아이들)이 있다. 이들은 ‘죄 사함을 받은 이들’이다. 이것은 이제 세상에 새롭게 태어난 이들이라는 뜻이다.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죄 사함은 기쁜 것이다. 정현종 시인의 시 중에 ‘송아지’라는 시가 있다.

 

내가 미친놈처럼 헤매는

원성 들판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세상에 나온 지

한 달 밖에 안된!

송아지

 

너 때문에

이 세상도

생긴 지 한 달 밖에 안된다!

 

(시집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에 수록)

 

10.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이 태어나면, 세상은 막 태어난 그 사람만큼 젊어지는 것이다. 세상이 노쇠해지는 이유는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나는 사람이 줄어들거나 없기 때문이다. 요즘 교회들이 노쇠해진 이유, 정현종 시인의 시 ‘송아지’에서처럼 생동감이 넘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부흥을 해도 교회에서 교회로 수평 이동하는 사람들 때문이지, 요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세례가 얼마나 뜸해졌는가. 우리는 날마다 새생명을 갈망한다. 그 새생명을 보면서 먼저 태어난 이들도 다시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가장 기쁠 때는 새생명이 탄생하는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새로 태어난 이를 믿음으로 받아낼 때이다.

 

11. 이 가족 안에는 아비들(부모들/엄마와 아빠)이 있다. 이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하나님,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이들이다. 이들은 그것에 knowledgeable(경험적 지식이 많다) 하다. 그래서 이들은 방금 막 태어난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다. 교회는 갓 태어난 아이들만 있는 곳이 아니라, 그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는 영적인 부모들이 있어야 하는 곳이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깊은 경험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손에 키워지는 아이들, 이제 막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태어난 영적인 자식들을 능수능란하게 키울 수 있다.

 

13. 또한, 이 가족 안에는 청년들이 있다. 이들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고, 그래서 악한 자, 흉악한 자를 이긴다. 청년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네아니스코스’는 단순히 젊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싸움터에 나갈 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아비들에게는 지혜(wisdom)가 있지만, 청년들에게는 힘(strength)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은 악한 자들을 물리칠 수 있다. 이렇게 강한 청년들이 없으면 하나님의 가족은 악한 자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 안에는 강한 청년들이 있어야 한다.

 

14. 우리가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가족을 구성하는 아이들, 아비들, 청년들은 육신의 나이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족은 연차적 나이로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인간의 육신의 나이와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의 구분이 잘 겹치는 것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젊은 사람이 영적으로 젊을 때 더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게 사실이다. 신체 나이가 늙으면 아무리 영적인 나이가 젊어도 행동하는데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그래서 교회는 젊은 이들을 하나님 가족의 청년들로 키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구한말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은 모두 20대 청년들이었다!)

 

15. 가장 이상적인 것은 육신의 나이도 젊고, 영적인 나이도 젊은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주의 일은 육신의 나이와는 크게 상관없이 영적인 젊음으로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갈렙(Caleb)이 있다. 여호수아와 함께 출애굽 제 1세대 중 유일하게 가나안 땅을 두 발로 밟은 갈렙은 가나안에 입성했을 때 육신의 나이가 80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던 아낙 자손이 차지하고 있던 헤브론을 가리키며 ‘이 산지를 나에게 주소서’라고 여호수아에게 간청한다. 자신이 가장 어려운 일을 감당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10-12).

 

16. 우리는 세상을 행해서는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말하며 자기의 젊음을 자랑하고 유지하려고 하면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는 ‘이 나이에 내가 어떻게’라고 하면서 마치 자기의 젊음은 지난 것처럼, 또는 없는 것처럼 할 수 없다. 하나님의 가족은 육신의 나이로 구성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 믿음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져 새벽 이슬 같은 청년으로 머물기를 간구해야 한다. 나이 젊은 사람이 더 많이 섬기는 게 아니라, 주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이 섬기는 신비로운 현상이 발생하는 곳이 하나님의 가족, 교회이다.

 

17. 요즘 사람들을 일컬어 ‘포노 사피엔스’라고 부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불리면 안된다. 우리는 ‘크리스투스 사피엔스(Christus Sapiens)’라고 불려야 한다. ‘포노 사피엔스’가 스마트 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리듯, 크리스투스 사피엔스’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즉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내가 주조한 개념이다). 우리는 요즘,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사는가.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는지에 따라 우리는 바로 그 마음 둔 것에 의해 살아갈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혹시 나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 있다면 마음을 돌이켜,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불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 보자.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보자.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부질없이 지나가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태초부터 영원까지 우리와 함께 머물러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 끝날까지, ‘크리스투스 사피엔스’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가게 되길!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10. 12. 03:10

고백을 통해 어둠을 물리치기를 간구하는 기도

(요일 1:1-10)

 

주님, 우리 안에는 어둠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어둠을 쳐다보려 하지 않습니다.

두려워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 어둠을 어떻게 물리쳐야 할지 몰라서 그렇기도 합니다.

생명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통하여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어떻게 몰아내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고백하게 하옵소서.

고백은 주님과 함께 우리의 어둠에 대해서 두런두런 대화 나누는 것임을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고백은 빛으로 나아온 교회의 지체들과 어둠에 대하여 두런두런 대화 나누는 것임을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우리는 죄 사함을 믿습니다.

우리의 어둠이 빛으로 인하여 물러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과의 사귐 가운데, 지체들과의 사귐 가운데

끊임없이 고백하게 하시고

그 고백이 우리가 빛으로 나오는 것이요,

그것이 우리의 어둠을 물리쳐 줄 것을 믿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0. 12. 03:08

죄를 고백한다는 것의 의미

(요한일서 1:1-10)

 

1. “눈 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이 노래의 제목은 <굳세어라 금순아>이다. 우리는 이 노래의 제목을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 노래의 가사에는 엄청난 인간애와 역사적 아픔이 담겨 있다. 이 노래의 화자는 사랑하는 금순이, 그러나 전쟁통에 헤어진 금순이를 애타게 찾고 있고, 본인은 흥남부두 철수 작전 때 미군 함선을 타고 탈출을 했고, 그리고 지금은 ‘국제시장 장사치’로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금순이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은 남북통일의 소망으로 이어지고, ‘철의 장막(Iron Curtain)’이라는 매우 역사/정치적인 용어까지 등장한다. 촌스러워 보이지만, 이 노래의 가사가 담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공부가 많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대단한 노래다.

 

2. ‘그 날의 일’을 직접 경험한 이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다. 내가 우리교회에 부임하여 받은 축복 중 하나는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래에 등장하는 흥남 철수 작전을 직접 경험하신 故 박영희 권사님으로부터 그 날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것이다. 역사 교과서에서 또는 영화를 통해서 접하던 흥남 철수 작전(Hungnam Evacuation)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밀려오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떠한 사건을 직접 경험한 이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 그 사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가리키는 모든 후대의 작품이나 이야기들이 새롭게 다가오는 법이다. 나는 그 날 이후, <굳세어라 금순아>를 들을 때도,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볼 때도 마음 가짐을 다르게 하게 되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것이 故 박영희 권사님이 나에게 물려주신 유산이다.

 

3. 요한일서는 한 마디로 얘기해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박영희 권사님이 흥남 철수 작전을 직접 경험했듯이, 요한일서의 화자, 어떤 장로(할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1절). 사실 이게 굉장히 전율이 흐르는 진술이다. 이 진술을 들으면서 우리의 반응은 “와~~~”이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관찰하고 손으로 만져 봤다고!

 

4. 살면서 만나본 유명인들이 기억난다. 탤런트 심은하. 우리 동네 살았다. 어떤 예쁜 사람이 그랜저 몰고 지나가길래 누군가 했다. 처음에는 알아보지도 못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심은하였다. 탤런트 음정희. 도시인이라는 드라마로 스타덤에 오른 연예인이었다. 그런데, 그 남동생이 나의 고등학교 후배였는데, 내가 그 친구 영어/수학 과외선생을 했다. 그 집에 가서 괴외를 했는데, 그때 음정희를 보곤 했다. 가수 강타. 우리 동네 잠깐 살았다. 이 친구가 우리 동네 사는 동안 동네가 난리도 아니었다. 강타 오빠 보러 몰려드는 열성 팬들 때문에 동네가 맨날 시끄러웠다. 놀이터 앞집에서 잠시 살았는데, 강타를 보러 온 소녀 팬들이 날마다 놀이터를 가득 채웠다. 일반 주택만 있는 동네다 보니 공중 화장실이 없어서, 그때 아이들이 화장실 문제를 해결하느라 우리교회에 몰려들곤 했다.

 

5. 이런 유명인들을 직접 본 경험을 말하면 사람들은 눈이 반짝거린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유명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한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눈이 정말 반짝거려야 한다. 요한일서는 요한복음과 같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대한 증언을 한다. 우리는 이것을 정말 잘 알아들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한 인간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고 ‘영원한 생명’이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 그 자체’라는 뜻이다. 우리는 생명 그 자체를 경험할 수 없다. 우리는 생명 현상을 경험할 뿐이다. 그런데, 요한일서의 한 어르신(어르신 그룹 / 요한 공동체)이 증언하는 것은 정말 ‘와~~’가 저절로 나오는 것인데, 그는 생명 그 자체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6.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멋진 일은 무엇일까? 요한 공동체가 증언하듯이, 그것은 ‘생명’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보람찬 일은 무엇일까? 내가 경험한 생명을 나누는 일이다. 지금 요한 공동체는 그것을 하고 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3-4절). 생명 자체를 직접 경험한 요한 공동체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방법은 자신이 경험한 그 놀라운 일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이다.

 

7.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도’라는 게 다른 일이 아니다. 우리는 ‘전도’라고 하면, 어던 비즈니스가 고객을 유치하듯이 ‘교회 나오세요’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사실 전도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 기쁨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행위’이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 즉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들은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우물가의 여인처럼 생명에 목말라 한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 이야기도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가 더 이상 목마르지 않게 하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어떻게 했는가? 너무 기뻐서, 주체를 못하고, 마을로 뛰어 들어가서, 그 기쁨을 동네 사람들과 나누었다. 전도는 이렇게 기쁨을 나누는 일이다.

 

8. 생명을 직접 경험한 할아버지가 아주 멋진 이야기를 하신다. 생명 자체를 직접 경험한 할아버지는 이런 표현을 하신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5절). ‘빛’은 은유이다. 빛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보는 그런 빛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빛을 보면 그것이 하나님인양 그 빛에 고개를 숙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빛을 발산하는 태양이 마치 하나님인듯 태양신을 섬기게 될 것이다. 빛은 은유이지, 실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빛과 대조되는 은유는 어둠이다. 어둠은 뭔가 음산하고 베일에 싸여 있고 분명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그와 반대로 빛은 활기차고 열려 있고 확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어둠은 거짓 같은 것이지만, 빛은 진리 같은 것이다.

 

9. 할아버지는 우리를 빛과의 사귐으로 초대한다. 그 사귐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는” 사귐이다. 즉, 우리 안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사귐이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신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8-9절). 여기에는 빛, 진리, 사귐, 죄 사함이라는 말과 더불어 어둠, 거짓, 죄라는 말이 나온다.

 

10. 우리는 여기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는 말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죄는 무엇인가? 우리는 죄의 개념을 실정법 차원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법에 접촉이 되는 것, 법을 어기는 것, 우리는 그것을 범죄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매우 신학적이고 존재론적 차원의 죄이다. 죄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가리킨다. 우리 자신의 내면을 보면, 우리는 우리의 어둠을 만나게 된다. 사실 이게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어둠을 직면하길 싫어한다. 마치 어두운 밤길을 걷기 싫어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바깥에서 활동하는 어떤 것들인가? 우리 바깥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결국 내 안에 있는 어둠이다.

 

11. 김형영 시인은 시 <화실시편 18>에서 이런 고백의 기도를 드린다.

 

한 번만 더 / 못 박히소서

내 잘못 내가 모르오니 / 한 번만 더 / 한 번만 더 / 못 박히소서

주님, /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오니 / 내 대신 못 박히소서

못 박히소서 / 못 박히소서 / 아멘,

 

12. 그의 <화실시편 18>은 ‘아멘’으로 끝나지만, 아멘 뒤에는 마침표가 찍히지 않고, 쉼표가 찍혀 있다. 우리는 아멘 뒤에 마침표를 찍음으로 기도를 마칠 수 없다. 우리는 아멘 뒤에 쉼표를 찍을 수밖에 없다. 조금 쉬었다, 우리는 다시 기도를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어둠은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힌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할 수밖에 없다.

 

13.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에서 “자백하면”은 계속적 죄의 고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자백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호몰로게오’인데, 이는 문자적으로 ‘동일한 것을 말하다’, ‘함께 말하다’이다. 자백, 즉 고백(confession)이라는 행위는 “하나님과 죄인이 한 가지 동일한 것에 대해 함께 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죄의 고백, 또는 회개를 매우 기계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취조실에서 수사관들에게 취조 당하면서 실토하듯이, 그렇게 죄의 고백, 회개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고백(confession)’의 전통을 심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고백은 취조실에서 실토하는 것 같은 행위가 아니다. 고백은 하나님과 함께 앉아서 두런두런 내 안의 어둠에 대해서 대화 나누는 것이다.

 

14. 고백은 인격적인 행위이지 비인격의 기계적 행위가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개신교가 ‘고해성사’의 전통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때 이런 고백을 한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우리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고(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게 아니라 우리는 교회를 믿는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고(단순히 친교 나누는 게 아니라 우리는 친교를 믿는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다. 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 사함은 같은 호흡 속에 있다. 즉, 죄 사함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게 아니라, 사귐 안에서 죄 사함을 받는다.

 

15.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그리고 교회 지체들과의 사귐 안에서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고백은 우리가 할까 말까 내 마음대로, 마음내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고백은 우리의 믿음, 신앙이다. 왜냐하면, 고백은 우리 마음에 있는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고해성사의 전통을 잃어버린 개신교인들은 고백할 줄 모른다. 마음에 어둠이 가득한 데도, 그것을 어떻게 어디에다가 털어놓아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냥 상담가를 찾아가거나 정신과의사를 찾아가거나, 처방을 받아서 약을 먹는다. 이것을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최선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16. 죄를 고백한다는 것, 그것은 전혀 개인적이고 기계적인 일이 아니다. 종교적 행위나 관습도 아니다. 죄(우리의 어둠)를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가고, 교회의 지체들과의 깊은 사귐으로 들어가서, 그 사귐 속에서 내 안의 어둠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다는 뜻이다. 이것은 최고의 치유행위이며, 구원의 은총이 발생하게 하는 신앙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과 두런두런 대화하는 가운데, 우리는 빛으로 나아온 지체들과 함께 두런두런 대화하는 가운데, 빛이 스며들어 어둠이 어느새 물러간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17. 생명을 직접 경험한 할아버지의 이야기, 빛을 직접 경험한 할아버지의 나눔은 정말 소중한 것이다. 우리에게 어둠만을 전달해 주는 이 어두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어둠의 희생자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빛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의 어둠을 물리치고, 빛으로 나와야 한다. 그 길이 여기에 있다. 고백. 죄를 고백한다는 것. 우리의 어둠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 우리는 단순히 고백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백을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 개신교에는 ‘고해성사’라는 전통이 형식적으로는 살아 있지 않지만, 반드시 내용적으로는 살려 내야 한다. 기도할 때 고백하든, 목회자에게 고백하든(목사님, 고백(confession)하고 싶은 게 있어요! 얼마나 아름다운 사귐인가), 교회의 지체를 만나 고백하든, 우리의 고백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둠에 대하여 말하는 것, 그것을 꺼내 놓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그리고 교회의 지체와의 사귐 가운데서 하는 고백은 어둠을 몰아내고 빛으로 나아오는 신앙의 행위이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Posted by 장준식

오징어 게임

ㅡ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서사

 

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켜 놓은 라디오(KQED/샌프란시스코 배이지역의 대표 시사 라디오 방송)에서 ‘오징어 게임(Squid Game)’ 열풍에 대한 대담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라디오 진행자가 질문한다. “왜 한국의 드라마 컨텐츠가 이렇게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킬까요?” 대담의 패널 한 명이 이렇게 답한다. “그것은 한국 드라마 컨텐츠가 미국화(Americanized)되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기생충>의 성공과 BTS의 선풍, 그리고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연이은 흥행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오징어 게임. 우리 동네(서울시 서초구 우면동/개발 전 강남)에서는 ‘오징어 가이상’이라 불렀다. 우리는 그렇게 불렀으나 지역마다 게임에 해당하는 ‘가이상’을 다른 명칭으로 부른 것 같다. 아무튼 그 모든 명칭을 통일해서 정리한 것이 ‘게임’이니, ‘오징어 게임’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미국화(Americanized)의 흔적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오징어 가이상’이라 타이틀을 정했으면 아마도 세계적 열풍을 불러 일으키는데 큰 지장을 초래했을 것이다. ‘오징어는 알겠는데, 가이상은 뭐야?’ 직관적 이해가 없으면 요즘 사람들은 흥미를 잃으니까.

 

오징어 게임에는 여러 가지의 서사가 얽혀 있다. 우선 전면적으로 내세운 서사는 자본주의, 특별히 신자유주의 서사이다. 그래서 낯설지 않다. 지금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경제체제를 고스란히, 눈으로 보듯, 아주 감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오징어 게임 장에 들어온 참가자들 중 그 누구도 강제로 그곳에 참가한 사람은 없다. 모두 자발적 의지를 통해서 들어왔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작동 방식을 보여주는데, 신자유주의는 스스로를 통제하고 착취하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탓할 수 없다. 성과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며,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 자신만이 질 수 있다. 게임에서 진 참가자가 그 자리에서 죽는 장면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징어 게임에서 볼 수 있는 두 번째 서사는 리트로(retro/추억)서사이다.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게임은 한국의 7,80년대에 유행하던 게임들이다. 오징어 게임 자체가 그렇고, 딱지치기, 구슬치기, 달고나 뽑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줄다리기가 그렇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잔인한 게임 룰에서 등장하는 ‘깐부’라는 용어도 옛 추억을 떠올리기에 정말 좋은 장치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에서 술래를 맡은 거대한 인형은 옛날 교과서에 철수와 함께 등장했던 영희이다. 리트로, 즉 지난 날을 추억하는 서사는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에 향수를 불러 일으켜 따스한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아무리 어려웠던 시절도 ‘시간’이라는 매직을 거치면 그리운 향수를 불러오는 법이다. 리트로 서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기에 충분하다.

 

세 번째 서사는 현대성(또는 근대성/modernity)이다. 천재 시인 이상이 쓴 <날개>에는 현대인(modern people)의 지루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주인공은 현대성의 대표적 발명품인 백화점에서 “날자, 한 번 날아보자꾸나”를 외치는 것이다. 현대(또는 근대/modernity)라는 말 자체가 ‘새로움’이라는 뜻이다. 현대인은 새로움을 갈망한다. 현대인은 ‘신상품’을 갈망한다. 금방 싫증을 느낀다.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점점 자극적인 것을 원하게 되고, 오징어 게임에서 보듯이 온갖 탐욕이 그대로 노출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기획은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자본가들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다. 그들은 삶의 지루함을 ‘새로움’을 통해서 달래고자 하는데, 그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오징어 게임을 만들어 냈다.

 

오징어 게임을 직관적으로 보면 분명 그것은 자본주의, 특별히 신자유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오징어 게임을 통하여 직관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고통 당하는 자신들의 상황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것이 오징어 게임의 성공 요인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서사를 가진 오징어 게임을 본다. 오징어 게임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결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오징어 게임 자체가 자본주의적 서사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심화된 버전인 신자유주의는 실로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을 비판하도록 내버려 둠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체제를 더욱더 공고히 한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권위 있는 영화제나 예술대상에서 상을 받는 작품들은 대개 자본주의(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Parasite>이다. 그러나 대중매체라는 것이 원래 태생적으로 자본주의 선전물로 생겨난 것이기에, 대중매체는 결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한다. 결국 오징어 게임도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 같으나, 결국 자본주의에 이용당하고 말 뿐이다.

 

우리는 오징어 게임의 돌풍 이후 그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넷플릭스 CEO가 오징어 게임의 돌풍을 축하하며 본인이 직접 467번째 참가자의 유니폼을 입고 사진을 찍고, 오징어 게임 체험관을 만들어 드라마를 홍보할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 있다. 게다가 오징어 게임에 등장한 게임들은 다시 선풍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데, 특별히 달고나 세트는 없어서 못 팔릴 정도이다. 오징어 게임 컨셉은 돌풍을 타고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 파고 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오징어 게임을 통해 감각적으로 보는 바, 자본주의(신자유주의)는 무지막지하다. 그래서 현대 자본주의에는 ‘야수’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사람을 잡어 먹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한다. 자본주의적 서사에 열광한다. 이쯤 되면 이것은 종교라고 불러야 한다. 우리 시대 자본주의는 단순한 경제체제가 아니라 종교다. 신자유주의는 스스로 통제하고 착취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그래서 종교적이다. 그 어떤 종교보다 강력하다. 눈에 보이는 상(부/정규직/안정적 고용)과 벌(가난/비정규직/불안정적 고용)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지옥(불평등)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 가지 않으려고 사람들을 발버둥 치게 하는 것, 그 불안의 조장이 신자유주의 체제를 돌아가게 만드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악이 따로 없다. 우리는 지금 악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

 

현대/근대(modernity)의 산물인 자본주의를 마르크스가 비판한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의 생명을 터무니없이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 점을 분명히 간파했다. 자본주의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미워하게 만드는 체제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있으면 우리는 결코 서로 사랑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오징어 게임에서 아주 감각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자본주의에 열광한다. 지금 전세계에서 부는 오징어 게임 열풍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기 자신을 향하여 원망을 퍼붓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열광하게 만들어 그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마법과 같은 능력이다. 우리는 모두 이 마법에 걸려 산다.

 

현대(modernity)는 사랑의 개념도 개인적인 사사로운 감정으로 전락시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전복적인 능력을 축소시키고 빼앗아 갔지만, 우리 인간이 서로 사랑하면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서로의 감정을 나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은 단순히 그러한 사사로운 감정 놀이가 아니다. 사랑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고 서로 미워하게 하며 인간성을 훼손하고 생명을 빼앗는 그 어떤 악한 세력들에게라도 저항하게 하여 그들의 악마적 게임 법칙에서 벗어나,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생명이 풍성한 하나님 나라, 새로운 세상을 여는 전복적인 힘이다. 사랑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악을 이기고 전복시켜 새로운 세상을 여는 힘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것은 오징어 게임 같은 자본주의적 서사가 아니라 새가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우리를 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총과 사랑에 있다. 이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이 세상이 정해 놓은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 세상을 구원한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10. 4. 12:14

약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고린도후서 12:9-10)

 

주님, 신앙의 신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강한 자가 되라고 부추기고

강한 자가 되기 위하여 영혼까지 파는 이 시대에,

‘약함(weakness)’의 영성에 대해서 묵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우리는 조금 두렵기도 합니다.

약해지면 지는 것 아닌가, 약해지면 무시당하는 것 아닌가,

약해지면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선뜻 ‘약함’에 대하여 묵상하는 것이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에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깊이 사랑하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기뻐하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 약함 속에 그리스의 능력이 오롯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는 하나님의 약한 것이 우리의 강한 것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것을 믿습니다.

주님, 우리는 우리가 약한 그 때에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하고

그 능력으로 인하여 세상이 감당하기 힘든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주여,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대로,

우리가 약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의 능력을 우리 안에 붙잡아 두는

참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 되게 하여 주옵소서.

높고 높은 저 하늘의 보좌를 떠나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셔서

이 곳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 십자가 위에서 약한 모습으로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0. 4. 11:56

약한 그리스도인 (Weak Christians)

(고린도후서 12:9-10)

 

1. 고린도후서 10장부터 마지막 13장까지는 한 호흡으로 가려고 한다. 마지막 네 장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용어는 ‘약함(weakness)’이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과 10절은 그 약함에 대해서 가장 극명하게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 운율을 붙여서 찬양으로 부르기도 한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복음의 맥락에서 ‘약하다는 것’, ‘약함(weakness)’이란 무엇일까? 살아남기 위해서 강한 자가 되라고 주문하는 우리 시대에 ‘약함’을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2.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을 받아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특별히, 2세대 종교개혁자인 칼뱅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 차원의 신학적 성찰이 담겨 있다. 그러나 나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읽어야 한다’를 조금 다른 차원에서 해석하고 싶다. 조명이란 어두운 곳을 밝히는 것이다. 어두우면 잘 안 보인다. 그래서 어두운 곳에는 빛을 비추어야 그곳을 잘 볼 수 있다. 언어는 때로 굉장히 어둡다. 언어는 인간의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 인간은 언어에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문자는 매우 건조하다. 나는 그 건조한 문자에 성령의 조명을 비춘다는 것을 그 문자/언어에 담긴 ‘감정선(emotion line)’을 밝히 보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감정선(지금 어떤 감정(emotion)이 여기에 흐르고 있는지)을 복원해야 한다.

 

3. 고린도후서 10장 이후의 말씀에는 바울의 아주 세밀한 감정이 흐르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그곳에 흐르고 있는 바울의 세밀한 감정을 복원해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조명을 받아 바울의 감정선에 감정이입을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부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곳에 흐르는 바울의 감정선은 ‘약함(weakness)’라는 용어에 집약적으로 드러나 있다.

 

4.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어떨 때 약해지며, 약해졌을 때 어떤 감정이 드는가? 병 들었을 때도 약해지고, 속상한 일을 겪을 때도 약해지고, 무엇인가 간절히 바랄 때도 약해지고, 누군가를 깊이 사랑할 때도 약해진다. 또한 누군가에게 부당한 공격을 받았을 때도 약해진다. 우리는 약해져 있을 때, 서러운 마음도 들고, 서글픈 마음도 들고, 억울한 마음도 들고,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이런 감정들은 모두 쉽게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약해져 있을 때, 우리는 감정노동을 아주 심하게 한다. 그래서 마음이 아주 지치게 된다.

 

5. 그런데, 본문을 보면, 바울의 약함은 이러한 약함과 조금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약함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따라가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매우 사랑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어느 순간 그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의 대적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아주 괴상한 말을 만들어 내어 바울을 공격했다. 10장 이후에는 그 공격이 무엇이었는지, 세 가지가 명시적으로 나온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글은 잘 쓰는데, 말하는 것은 시원치 않다. (10:10)

2) 다른 명성 있는 사도들에 비해 사도적 자질이 부족하다. (11:5)

3) 다른 교회들에게서 ‘탈취’하여 고린도 교회를 섬겼다! (고린도 교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고 사역한 일에 대한 비난) (11:8-9)

 

6. 바울은 이런 이유를 들어 자신을 깎아내리는 자들을 일컬어 ‘거짓 사도, 속이는 일꾼, 사탄의 일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비난에 맞서, 부득불 자기를 변호한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얼마나 피곤하고 고달프고 속상하고 서운했을까, 그의 감정선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역하느라 그 자체로도 엄청나게 피곤하고 힘들었을 텐데, 바울은 지금 자기를 그릇된 이유로 비난하는 자들의 비난을 듣고, 감정적으로 매우 힘든 상태에 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가서 ‘쓰담쓰담’ 해드리고 싶다. 힘 내시라고.

 

7. 바울은 자신에 대한 터무니없는 비난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다는 것과 고린도 교회가 그러한 터무니없는 비난을 쉽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꾸짖는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10:7). 광명한 천사(외모만 뻔지르르 한 사람/말만 잘하고 실제 영성은 없는 사람/왜곡된 복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사람)로 가장하여 나타나 사역하는 척하지만, 결국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재물만 탐하는 자들의 비난을 듣고 그들의 말에 동조하여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고린도 교회를 꾸짖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왜 바울을 비난하겠는가? 바울을 비난해서 그를 깎아내림으로 자기들이 높아지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건 정말 파렴치한 행위일 뿐이다.

 

8.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꾸짖으면서 아주 재미난 말을 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재밌게 다가왔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을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2-3).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중매를 섰다고 한다. 고린도 교회는 신부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인데, 신부에게 최고의 신랑감을 소개시켜 줬다는 것이다. 근데 이게 참 난감한 일이다. 고린도 교회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최고의 신랑감이었을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린도 교회는 최고의 신붓감이었을까?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에 아주 점잖게, 복음적으로 어퍼컷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최고의 신랑감에는 최고의 신붓감이 어울리는 법인데, 지금 고린도 교회는 최고의 신랑감에 어울리는 최고의 신붓감이 아니라는 것이다.

 

9. 그렇다면, 바울의 목표는 여기서 더 분명해진다. 그의 목표는 최고의 신랑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울리는 최고의 신붓감으로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고후 12:19). 바울은 본인이 약해졌는데, 본인이 약해진 이유는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면서 보통 약해질 때와는 다른 바울의 약함이다.

 

10.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에서 ‘너희’는 ‘고린도 교회’이다. 그냥 교회라고 해도 무방하다. 바울에게 교회는 그냥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작은 우주다. ‘덕을 세우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οἰκοδομέω (오이코도메오)’이다. 이는 1차적으로 건물이나 집을 세운다(build)는 뜻이다. 그래서 영어로는 ‘upbuilding’이라는 단어를 쓴다. 바울은 교회 공동체를 몸 또는 건물로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몸이 건강해지기 위해서, 또는 건물이 튼튼하게 세워지기 위해서 여러가지 요소들이 조화와 질서를 이루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특별히 ‘덕을 세운다’는 말의 뜻은 성장과 성숙을 말하는 것이다. 몸은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그래야 온전한 생명이 되어 행복을 누리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덕을 세운다’는 것은 최고의 신랑감인 예수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최고의 신붓감인 교회로 성장하고 성숙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11. 바울은 최고의 신랑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려다 보니 약해졌고, 최고의 신붓감인 교회를 사랑해서 덕을 세우려다 보니 약해진 것이다. 특별히 바울은 연약한 교회의 덕을 세우려고, 교회를 너무 사랑해서 교회를 염려하고 교회를 향한 애타는 마음 때문에 약해졌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수고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옥살이도 많이 하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채찍으로 맞았고 한 번 돌로 맞았고 세 번이나 파선을 당했고 밤낮 꼬박 하루를 바다에서 헤맨 적도 있습니다. 나는 수차례에 걸친 여행에서 강의 위험도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들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나는 또 수고와 곤고와 종종 자지 못함과 배고픔과 목마름과 때로 굶주림과 추위와 헐벗음 가운데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와 별로도 날마다 나를 억누르는 것이 있으니, 곧 내가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것입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 마음이 애타지 않겠습니까?”(고후 11:23-28/우리말성경).

 

12.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구절은 마지막 절의 “이와는 별도로 날마다 나를 억누르는 것이 있으니, 곧 내가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것입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 마음이 애타지 않겠습니까?”이다. 교회와 교인들의 상황이 바울의 마음을 염려하게 하고 애타게 했다. 여기서 ‘애타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퓌푸마이’인데, 이는 ‘내가 불탄다’의 뜻이다. 바울은 실족하는 형제/자매가 생겨날 때마다 마음이 불타듯이 아파했다. 바울은 바로 이때 자신이 약해졌다. 교회를 사랑해서 염려하고 애타는 마음 때문에 약해졌다.

 

13.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종류의 약함이 대개 목회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을 왜 교회 공동체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겠는가? 그냥 목회자들에게 주어진 목회지침이라고 하면 될 것을. 성경이, 바울의 이러한 약함을 담고 있는 성경이 교회 공동체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진 이유는 교회 구성원 모두가 ‘약함(weakness)’에 대하여 묵상하라고 주신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 우리는 약해져야 한다. 아니, 그리스도를 높이고, 교회를 사랑하다 보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14. 개인주의를 태동시킨 모더니티를 받아들여 형성된 미국의 복음주의(20세기 중반미국에서 생겨난 미국 백인 중산층 중심의 보수적인 기독교)는 교회론을 형편없이 축소시켰다. 그래서 미국의 복음주의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리고 이제 그 수명이 다 했다고 비판 받는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교회를 개인들의 집합소 정도로 전락시켰다. 교회를 종교적 욕망이 있는 개인들에게 그 욕망을 해소시켜 주는 종교적 서비스 업 정도로 생각하게 끔 한 것이 미국의 복음주의이다. 개인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은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채워주는 교회를 찾아 나선다. 마치 쇼핑하듯이. 그러다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채워주는 교회를 만나면 거기에 등록하고 다닌다. 그러다 그곳이 식상해지면 새로운 교회를 찾아 나선다. (이게 모더니티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새로운 것(modern/신상품)을 찾아 떠나는 현상.) 한국교회가 미국의 복음주의를 받아들여 기독교 생태계를 형성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한 신앙의 생태계에서는 자아가 강한 그리스도인, 종교적 소비 욕망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만들어질 뿐이지, 오늘 우리가 바울을 통해서 본, 그리스도를 높이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해서 ‘약해지는 그리스도인’이 세워지는 것은 힘들다.

 

15. 우리가 정말로 성경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고린도후서에서 드러나고 있는 바울의 약함, 바로 그 약함을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교회로 세워져 나가면 좋겠다. 교회는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이건 매우 기독교 교회론을 세속적으로, 모더니티의 영향 아래서 왜곡시킨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는 주님께 부름을 받아 교회의 몸이 되어 ‘함께’ 지어져 간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바쁜데 시간을 내야 하는 것, 육체 노동, 감정 노동,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한 몸의 다른 지체를 섬겨줘야 하는 것, 다른 지체의 아픔을 들어주고 보듬어 주어야 하는 것, 때로는 다른 지체들의 불만과 불의, 불합리를 받아줘야 하는 것, 내가 가진 것을 관대한 마음을 나누어야 하는 것 등등,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져 가는 것은 오히려 내가 약해지는 일이다. 주님만을 높이고, 교회를 사랑하는 일은 약함(weakness)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16.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반전이 있다. 우리의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난다. 바울은 아주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아주 신비로운 고백을 하는데, 자신의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붙들어 두기 위해서 자신은 계속하여 약함 속에 자기는 내어주겠다는 고백을 한다. 우리의 약함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하는 통로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주님을 찬양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10절). 그래서 우리는 ‘약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쓰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읽는다. 이러한 존재의 신비가 우리의 삶을 휘감아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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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