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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12.21 대림절 네 번째 주일에 드리는 기도 1
  2. 2021.12.21 마리아, 아베 마리아!
기도문2021. 12. 21. 08:36

대림절 네 번째 주일에 드리는 기도
(미가 5:2-5a / 히브리서 10:5-10 / 누가복음 1:39-45 / 누가복음 1:46-55)

 

주님,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을 때

그것이 설사 우리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 놓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새창조의 사역에 동참하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 주소서.

또한 그 믿음을 공유한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을 기뻐하고 찬양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성실하게 감당하여

믿음의 경주를 아름답게 마칠 수 있도록 하옵소서.

하나님의 은혜에 순종한 여인

마리아를 통해서 이 땅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2. 21. 08:35

마리아, 아베 마리아!

(미가 5:2-5a / 히브리서 10:5-10 / 누가복음 1:39-45 / 누가복음 1:46-55)


1. 기독교는 크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있습니다. 원래는 하나였는데, 1054년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 논쟁’을 통해서 둘로 나뉩니다. 그러고 보면 ‘교리(doctrine)’라는 게 참 무섭습니다. 견해의 차이 때문에 사람들은 분열을 경험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교리’라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분열을 경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같은 주님을 믿으면서도 이렇게 서로 무슨 원수라도 된 것처럼 분열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마음도 아프고, 어찌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2. 가톨릭과 개신교는 대표적인 서방교회의 전통을 지닌 교파입니다. 개신교인들에게 동방교회는 매우 낯설지만 가톨릭은 그렇지 않습니다. 개신교는 가톨릭과 같은 신학적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 아주 가까운 사이죠. 그런데,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때로는 더 심하게 싸우기도 합니다. 한 부모를 둔 형제자매가 남들보다 더 심하게 다투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한 부모를 둔 형제자매가 원수처럼 지내는 것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같은 신학적 뿌리를 둔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것도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3. 개신교(프로테스탄트)는 16세기에 발생한 종교개혁을 통해서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이처럼 개신교는 동방교회로부터 분리된 게 아니라, 서방교회로부터 분리된 교파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분리되기 이전에는 한 식구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분리된 이후로 마치 원수처럼 싸웠습니다. 가톨릭 진영과 개신교 진영 간에 참 전쟁도 많이 했습니다. 대표적인 전쟁이 1618년에 발발하여 1648년에 끝난 30년 전쟁이죠. 이 전쟁으로 인해 자그마치 800만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두 진영 간에 좋게 지내는 게 쉽지 않습니다.

4. 그런데, 저는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400년 전에 발생한 전쟁이고, 그것도 유럽에서 발생한 전쟁인데, 우리 한국인들이 그 전쟁 때문에 가톨릭인과 개신교인 사이에 좋지 못하게 지낼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임진왜란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이었기에, 그리고 우리의 조상들이 고통 당했던 전쟁이었기에, 그 전쟁을 통해 일본에 대한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수 있으나, 우리가 유럽에서 발생한 400년 전의 전쟁 때문에 서로를 미워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를 보면, 누구에게서 그 미움이 전가됐는지 모르게, 한국의 가톨릭과 개신교는 별로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특별히 개신교인들은 가톨릭을 일컬어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참 기이한 현상이죠. 이런 현상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사랑은 잘 전달이 안 되는데, 미움은 참 잘 전달되는구나.’

5. 개신교인으로서 가톨릭을 생각할 때 가톨릭의 어떠한 교리가 마음에 걸리십니까? 아마도 이 질문에 십중팔구는 ‘마리아에 대한 교리’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개신교인들은 대개 가톨릭이 마리아를 숭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존재를 숭배하는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가톨릭은 정말로 마리아를 숭배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톨릭이 마리아를 숭배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개신교인들의 오해입니다. 가톨릭은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숭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개신교에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 신학(Mariology)’입니다. 개신교인들이 마리아에 관해 오해하는 이유는 가톨릭의 ‘마리아 신학’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6. 마리아 신학은 결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 신학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마리아 신학은 기독론(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깊이에서 나온 신학입니다. 종교개혁 전까지 개신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서방교회, 즉 가톨릭 교회만 존재했는데, 그때까지 마리아 신학은 사도신경에서 지금도 우리가 고백하고 있듯이, 마리아의 동정녀 신학과 마리아를 일컬어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떼오토코스)’라고 부르는 신학이 존재했습니다. 우리가 마리아를 ‘동정녀’라고 부르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를 통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한 신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리아를 통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 그리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7. 이러한 신학에 근거를 제시하는 본문이 바로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와서 건네는 인사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눅 1:28). 이 구절을 라틴어의 두 자로 줄여서 표현한 것이 바로 ‘아베 마리아(Ave Maria)’입니다. 한국말로 옮기자면, “안녕하세요, 마리아님!”, 또는 “마리아님, 만세!”입니다. 영어로는 “Hail, Maria.”로 옮깁니다. 그러니까 ‘아베 마리아’는 그냥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이미 거기에는 신학적 고백이 들어간 인사인 것이죠. 위에서 말했듯이, 마리아는 그냥 한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잉태한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고백입니다.

8.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개신교인들도 동일하게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로 고백하는 것도 개신교인들의 신앙(교리)에 포함됩니다. 종교개혁자들도 대개 마리아에 대한 이러한 신앙고백은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닙니다. 기독론과 관련해서 마리아에 대한 신학을 전개할 뿐, 그 이상 나아가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개신교는 마리아에 대한 예배적 쓰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마리아를 통해서 중보기도를 하지 않고, 마리아에 대한 찬가를 예배 시간에 부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가톨릭과 개신교를 구분하는 가장 뚜렷한 차이 중 하나입니다.

9. <아베 마리아>는 굉장히 널리 알려진 음악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가 있고, 구노의 아베 마리아가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는 제목만 그렇지 실제로는 ‘마리아 찬가’가 아닙니다. 곡의 앞 뒤에 ‘아베 마리아’라는 구절만 나올 뿐 나머지 가사는 모두 월터 스콧(Walter Scott)의 서사시 <호수의 여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대중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죠. 제목은 <아베 마리아>이지만 실제로는 마리아에 대한 찬가가 아니라 그냥 대중적인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구노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에 멜로디를 붙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슈베르트의 것과는 달리 마리아 찬가입니다. 곡에 마리아 찬가 가사가 붙어 있습니다.

10. 우리는 마리아를 이렇게 교리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오히려 마리아에게 주목하지 못합니다. 가톨릭은 너무도 발달된 마리아 신학 때문에 ‘여인 마리아’에게 주목하지 못하고, 개신교는 마리아 신학이 너무 없고 오히려 가톨릭의 발달된 마리아 신학에 대하여 반발하느라 ‘여인 마리아’에게 주목하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상황이죠. 그러나 우리가 교리적인 접근을 내려놓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이 세상에 존재했던 여인 중에 마리아만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여인도 없을 겁니다.

11. 우리는 마리아에게 교리를 덧 씌워, 평생 동정(The Perpetual Viginity), 하나님의 어머니(The Divine Maternity),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에 덧 붙여진 마리아에 대한 교리 무염시태(The Immaculate Conception / 마리아에게는 원죄가 없다), 그리고 성모승천(The Assumption)을 말하지만, 인간 마리아의 고뇌와 결단에 대해서 쉽게 간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무 살도 안 되었던 한 소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을 때, 그녀가 감당해야만 했던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원하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그런 욕망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은 마리아의 경우에서 보듯이 인생 전체가 바뀌는, 새창조의 역사입니다.

12. 요즘으로 말하면 청소년 시기를 보내고 있던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 즉 자기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 놓는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에 동참하고 순종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깜짝 놀랐을 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웠고, 불안했고, 초초했고, 근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모든 것을 감당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이것은 그녀의 인생이 통째로 바뀌는 순간이고, 인류의 역사가 새롭게 창조되는 순간입니다.

13.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수태고지’를 듣고 엘리사벳에게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연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마리아가 받은 수태고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 마리아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에게 발생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에 대해서 털어놓았다면, 아마도 부정한 짓을 저질러 놓고 하나님 핑계 댄다며 곧바로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달랐습니다. 엘리사벳 부부는 이미 앞서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을 맛보았던 이들이라 마리아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14.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순종의 의미와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셨으면 하는 은혜는 사실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는 은혜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은혜에 대한 우리의 욕심과 편견과 왜곡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욕망을 채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꾸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새창조 사역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한다는 것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주님께 내어드리는 순종의 행위입니다.

15. 물론 이러한 순종은 세상 사람들이 알아 줄리가 없습니다. 마리아처럼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입어,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순종을 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친놈’ 소리를 듣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러한 순종을 귀하게 여기고 함께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한 겁니다. 만약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이 없었다면, 마리아는 끝까지 순종하지 못했을 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자신의 순종을 비하하는 말만 듣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가혹한 핍박만 받고 말았다면, 마리아는 어느 날 언덕에 올라 하나님을 저주하며 자신에게 임한 ‘수태고지’를 파기(요즘 말로 ‘낙태’)했을 지 모릅니다.

16. 그러나, 마리아는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그녀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를 낳았고, 그를 길렀으며, 그가 죽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그녀가 그러한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곁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순종의 도를 귀하게 여기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간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당신 덕분입니다!” 우리는 서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17. 마리아, 아베 마리아! 우리는  개신교인들이라 예배 시간에 마리아 찬가를 비록 부르지는 않지만, 그 누구보다도, 마리아의 순종을 기억해야 하고 마리아가 끝까지 순종할 수 있도록 그녀를 보듬어준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거든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며, 주님의 새창조 사역에 동참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하고, 우리의 그러한 순종과 결단을 소중하게 여기며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신앙 공동체가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메리 크리스마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