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의 중요성]

 

텍스트가 중요한 것을 두말할 필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주어진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너무도 자주 간과한다. 이것은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두 손에 쥐고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발생하는 가장 빈번한 실수이다.

 

텍스트를 제대로 독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고전일수록 더 그렇다. 고전 중의 고전인 성경에 대한 독법은 정말 쉽지 않다. 해석은 텍스트 자체가 지닌 무게와 의미를 가늠해 보는 일 뿐 아니라 그 무게와 의미를 우리 시대에서 다시 재어 보는 일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어떻게 읽어냈으냐는 우리의 실제 삶 속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독법에는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가령 불교의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십중팔구 다음과 같이 해석될 가능성이 크다. 세상 나 혼자 사는 거야! 즉, 이것을 인생의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로,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이니 누군가를 의지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로 해석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독법 아래서 인생은 원래 외로운 거라고 자위하면서 누구도 나를 도와줄 이 없으니 살아남기 위해서 독하게 마음 먹어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형편 없는 독법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은 인생의 고독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장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고정된 도(道)가 없으니 우리가 길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뜻으로 보는 게 좋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라고 한다. 그들이 정해준 길,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가기 보다, 자기 자신이 길을 개척해서 걸어가는 삶,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 정신을 보여준다. '인생은 어차피 외로운 거야'와는 다른 결을 가진 말이라는 뜻이다. 인생은 외로운 게 아니라 자유로운 거다. 인생이 외로운 이유는 자유롭지 못해서이다.

 

이와 같이 텍스트도 중요하지만 그 텍스트를 읽어내는 독법, 해석이 더 중요한 법이다. 해석의 잘못은 삶의 잘못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성경 독법은 QT로 대표되는 수준에서 맴돌 뿐이다. QT 수준의 독법은 아전인수의 해석을 낳을 수밖에 없다. 자기 중심적 읽기, 기복적 해석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욕망의 표현 밖에는 안 된다.

 

기독교의 역사는 '성경 해석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형태, 삶의 형태는 달라진다. 성경을 잘 해석하기 위하여 수많은 학자들이 성경 해석에 달려들었고, 그 해석의 역사는 고스란히 기독교 역사로 남아 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성경을 해석해온 역사 속으로 들어가 그 해석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역사성을 가진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성경 해석의 역사, 즉 기독교 역사를 무시하고 그냥 성경으로 들어가 성경을 읽어내는 일은 복음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무모한 신앙인일 뿐이다. 이는 수영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바다에 뛰어드는 일과 같다. 바닷물만 마시다 나올 수 있고, 바다에 빠져 죽을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일은 언제나 준비와 겸손한 마음이 필요하다.

 

기독교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그 역사와 소통하며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그냥 성경을 입으로 소비해 버리고 마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 시대 가장 무용한 무당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다. 성경을 해석하지 말고 그냥 믿음으로 받으라고, 말씀에 기록된 대로 살라고 말하는 사람만큼 위험한 사람은 없다. 은혜로운 말 같으나 사람들을 인간으로 만들지 못하고 짐승으로 만들고 노예로 만드는 것과 같다. 주체적이지 못한 것은 순종이 아니라 광신일 뿐이다.

 

기독교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그 역사와 진지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소통하며 해석의 작업을 하든지, 아니면, 입을 다물든지 해야 할 텐데, 입을 여는 일은 쉽고,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으니,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말들만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그야말로 말씀의 공중부양 시대이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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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 겸손 - 그리스도의 마음]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뒤에 세우며, 자기의 존재를 상대화하여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배치하려는 것입니다"(담론, 72쪽).

 

신영복은 <담론>에서 주역의 궤를 설명하며 겸손이 무엇인지를 위와 같이 말한다. 주역의 '지산겸괘'는 땅 속에 산이 있는 형상인데, 덕목 중 겸손이 최고의 덕목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쾌이다. 그리하여 겸손은 군자의 완성이라 불린다.

 

기독교인이라면 자연스럽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로 시작하는 빌립보서의 말씀이 떠오를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케노시스라고 부른다. 주역의 괘를 통해 표현하면, 예수의 케노시스는 군자의 완성을 이룬 겸손과 같다. 그러므로 동양적으로 말하면 예수는 군자의 완성을 이룬 분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동양적 사고로 예수는 '성인군자'로 불려왔다.

물론 기독교 일각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성인군자'라고 부르는 것에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격적 신이라는 개념이 부재한 유교적 사고 틀 안에서 '성인군자'라는 표현은 신적인 경지에 이른 인간을 뜻하는 것이므로 최고의 칭호가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케노시스의 마음, 즉 겸손의 마음이다. 그래서 겸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게 중요하다. 겸손은 관계성의 문제이다. 겸손은 그냥 자기 자신을 낮추는 일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를 낮추고 상대화시켜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재배치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존재를 낮추고 상대화시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재배치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었고,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었다. 구원은 결국 겸손의 열매였던 것이다.

 

케노시스, 겸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는 누구라도 구원을 창조할 수 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라면 누구나 창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독점하지 않으신다.

 

우리 시대에 구원과 기쁨은 없고 폭력과 슬픔만 늘어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생각은 안 하고, 다시 말해 자기의 존재를 낮추고 상대화하여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재배치하려는 마음은 없고, 그저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여 다른 존재를 자기 앞에 무릎 꿇리거나 줄세우려는 욕망만 존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결국, 우리는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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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1. 25. 12:31

진통사회에서 고통 소리 내기를 간구하는 기도

(출 2:11-25)

 

주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진통사회라

고통 소리 내는 것을 싫어하고

고통 소리 내는 사람을 루저라고 비난하는 사회입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의 삶에 고통을 가져다주는 문제들은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이고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성경책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인 듯합니다.

주님,

출애굽기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현재 잃어버리고 사는 신앙의 유산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고된 노동 속에서 고통 소리 내기를 쉬지 않았던

주의 백성들은

바로 그 고통 소리 내기를 통해서 주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고통 소리 내기는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은혜의 통로인 것을 잊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을 성경 속에서만 보는 자가 아니라

나의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역동적인 신앙인으로 살기 위하여

고통 소리 내기를 멈추지 않는

주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고통 소리 내기는 저항이며 용기이며 새로운 창조의 시작입니다.

주여, 우리의 고통 소리를 듣고 우리를 돌보아 주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 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으신,

그래서 부활의 몸으로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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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 25. 12:28

고통 소리 내기 (groaning)

출애굽기 2:11-25

 

1. 요즘 전염병의 난 때문에 혼란하고 싱숭생숭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종교계에서는 우리 시대를 보듬고 안아주었던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이 세상을 떠나는 안타까운 소식이 연일 들려온다. 가톨릭 신부였지만 ‘종교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종교 평화 운동에 앞장서 오신 한스 큉 교수가 얼마전 돌아가신 데 이어,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라고 절실하게 외치며 기독교의 교리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돌아봐야 한다고 하셨던 성공회의 존 쉘비 스퐁 주교가 소천하신 데 이어, 불교의 대중화와 종교 평화 운동(세계 평화 운동)에 큰 기여를 하신 틱낫한 스님이 입적했다. 모두 90세 이상 사시며 장수하셨다. 종교계의 스승들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우리 곁에 머물다 가셨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2. 위대한 종교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세상에서 들려오는 ‘고통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이다. 산업화 이전의 위대한 종교인들은 사람에게서 들려오는 고통 소리에 주로 귀를 기울였다면, 산업화 이후의 위대한 종교인들은 사람과 그리고 더불어 자연에게서 들려오는 고통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람이고 동물이고 자연(식물)이고 할 것 없이 고통 가운데 있다는 증거이다. 문제는 모든 생명체가 내고 있는 이 고통 소리를 우리가 듣고 있는가, 아닌가에 있을 뿐이다.

 

3. 본문의 이야기는 장성한 이후의 모세에게 발생한 일을 들려주고 있다. 모세는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주 중요하고 훌륭한 민족의 지도자인 동시에 종교 지도자였다. 위대한 종교인들이 고통 소리에 귀 기울였듯이, 모세에게도 위대한 (민족)종교 지도자의 자질이 보인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11절).

 

4. 장성한 모세가 세상에 나가서 본 것은 ‘고되게 노동하는 자기 형제들’이었다. 사실 왕궁에서 자란 모세가 세상에 나가서 ‘고된 노동’을 보았다는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왕궁에서 자랐기 때문에 귀족의 화려한 생활이나 사치, 또는 질서가 잘 잡힌 계급사회를 보면서 자기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흡족해 하며 자신의 왕궁 생활에 도취되어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회적 갈등이나 폭력 등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모세의 눈에는 ‘고된 노동’과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고통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5. 모세의 고통 소리 듣기는 이집트에서만 발생한 일이 아니다. 그가 고통 소리를 들은 일 때문에 정의를 행하다 오히려 살인자로 몰려 이집트를 떠나 도망자 신세가 되어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었을 때에, 그는 미디안의 우물가에서 들려온 고통 소리를 듣는다. 광야에서 우물은 생명줄이다. 미디안 광야의 한 우물에 도착했을 때 모세는 그곳에서 발생한 다툼에 끼어든다. 힘센 남자 목동들이 힘없는 여자 목동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모세는 약자의 고통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약한 자들을 도와주었다.

 

6. 민수기에서 보는 모세의 모습처럼 성숙한 모습은 아니지만, 출애굽기에서 볼 수 있는, 성장한 이후의 모세의 모습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그가 고통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고통 소리를 들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떻게 접근하고 어떤 성숙한 모습을 모이느냐는 차후의 문제다. 우선 중요한 것은 고통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으냐, 고통 당하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느냐이다. 일단 고통 소리가 귀에 들려야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떠한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

 

7. 그런데 본문에 보면, 고통 소리 듣기’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고통 소리 내기’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모세의 영웅적 탄생 이야기나 타지 않는 떨기 나무에서의 하나님과의 신비한 조우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그래서 영웅적 이야기를 듣고 너무도 빨리 그 영웅이 신비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로 곧바로 달려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 멈추어서 반드시 머물러야 하는 이야기는 장성한 모세가 고통 소리를 들은 것 때문에 발생한 고통스러운 이야기이다. 이 고통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의 존재뿐 아니라 신앙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 너무도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8. 여러 가지로 고통스러운 팬데믹 시대를 보내면서 이 고통을 이겨보려고 나름 몸부림치면서 읽은 책 중에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저서 <고통 없는 사회>는 우리가 사는 시대를 꿰뚫어볼 수 있는 좋은 안목을 선물해 주었다. 한병철은 우리 시대를 ‘진통사회’, 즉 고통 없는 사회로 명명한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사는 시대, 우리가 사는 사회는 고통을 싫어하는 사회, 고통을 없애려는 사회, 마치 우리 눈앞에 있는 고통을 없는 것처럼 여기려는 사회라는 것이다. 얼마 전 뉴스를 통해서 사회적 문제로 지적된, 진통제의 남발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9.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는 그토록 고통(통증)을 마치 없는 것처럼 없애려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한병철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진통사회와 성과사회는 서로 조응한다. 고통은 약함의 신호로 해석된다. 고통은 숨기거나 최적화를 통해 제거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고통은 성과와 병립할 수 없다. 고통의 수동성은 능력에 의해 지배되는 능동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다. 오늘날 고통은 모든 표현 가능성을 빼앗긴다. 고통은 침묵을 선고받는다. 진통사회는 고통을 격정(passion)으로 활성화하고 언어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12쪽).

 

10. 이것은 이 땅에서 코미디 프로그램이 자취를 감춘 원인이기도 하다. 코미디는 ‘풍자’를 매개해서 웃음을 자아내는 장르이다. 대개 코미디에서 풍자되는 것은 정치이다. 정치풍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고통을 코미디로 승화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에서의 고통을 더 부각시켜 보여준다. 그래서 코미디는 민중의 저항운동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는 더 이상 고통을 허용하지 않는다. 한병철 교수가 위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진통사회는 “고통을 격정으로 활성화하고 언어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통사회에서는 코미디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11. 그러면 어떠한 현상이 발생하는가. 전 분야에서 예능만 넘쳐날 뿐이다. 고통을 없애는 일, 진통, 즉, 위로만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코미디와 예능이 다른 점은 코미디는 위에서 말한대로 우리의 감추어진 고통을 풍자의 방식을 통해 드러내 놓지만, 예능은 반대로 우리의 드러난 고통을 위로의 방식을 통해 감추어 버린다. 그래서 지금 모든 방송은 예능화되었고, 연예인이나 정치인이나, 너 나 할 것 없이 예능인이 되어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고 있는 고통을 위로의 방식으로 감추느라 여념이 없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자들이 예능의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하는 것을 보면 예능화가 얼마나 깊고 넓게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12. 우리는 행복을 강요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실상은 행복하지 않은데, 행복을 말하지 않으면 ‘루저’로 낙인 찍힐까 봐, 사람들은 ‘난 행복해’를 자기 최면 하면서 살아간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 각종 SNS를 자기 최면의 도구로 활용한다. SNS에 불행한 모습을 올리는 사람은 없다. 모두 ‘행복한 모습’만 올린다. SNS는 마치 누가 더 행복하게 사는지 뽐내는 공간 같다. 사람들은 그곳에 올라온 타인의 행복을 보면서 부러워하며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지지 않으려고 조작된 행복을 올리기도 한다. 마치 자신에게는 아무런 고통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13. 우리가 사는 시대는 고통 소리를 듣기 쉽지 않다. 모두 겉으로는 행복한 척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 소리 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시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좀처럼 고통 소리를 내지 않는다. 우리 사회를 보면서 대학생들이 더 이상 ‘데모’하지 않는 것이 가장 마음 아프다. 대학생들이 더 이상 데모를 하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에 더 이상 데모할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고통을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고통을 표현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고통을 표현하면 ‘루저’로 낙인 찍히는 기이한 문화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14. 출애굽기를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본문을 뽑으라면, 2장 23절에서 25절이다. 모세를 죽이려던 애굽 왕이 죽었다는 기사와 더불어, 무엇보다 비로소 ‘하나님’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헤세드의 하나님, 즉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밑도 끝도 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을 기억하시기 때문에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관계 속에 계신 분이시다.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그 언약을 지키시고, 그 언약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 현재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 언약에 따라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우리의 신앙은 밑도 끝도 없는 신앙이 아니라 언약 안에 있는 신앙, 즉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신앙(relational faith in God)이다.

 

15. 언약의 하나님이 어떠한 일을 하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출애굽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했던 일이다. 그들이 애굽에서 한 일은 고된 노동이지만, 그 고된 노동을 하면서 ‘고통 소리 내기’를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출애굽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신앙의 지혜, 또는 삶의 지혜가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고통 소리를 쉬지 않고 냈다는 것이다. 이게 왜 신앙의 지혜이고 삶의 지혜이냐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 소리 내기를 통해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고통 소리 내기가 없었으면, 아마도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출애굽 하지 못했을 지 모른다.

 

16. 이것은 마치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시각장애인 바디매오의 이야기와 같다.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사역하실 때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런데 길 가에 앉아 있던 바디매오는 지금 지나가는 분이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다. 시끄러운 소리로 예수를 불러 대는 바디매오를 보고 사람들은 꾸짖었다. “조용해!” (고통 소리 내기를 가로막는 자가 가장 못된 사람) 그런데, 사람들이 심하게 꾸짖을수록 바디매오는 더 큰 목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예수의 은혜를 간구했다. 바디매오는 예수 앞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고통 소리 내기’를 실행함으로 인하여 잃었던 시력을 되찾고 구원을 받는다.

 

17. 출애굽기를 통해서 우리가 반드시 깨달어야 하는 신앙적 통찰은 출애굽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물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이라는 선행적 은총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소리 내기’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고통 소리 내기)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23절). 이스라엘의 고통 소리 내기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나게 하였고, 그 자손들을 돌보게 하였다.

 

18.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의 시간이 줄고 예배로 나아오는 사람들이 줄고, 또는 교회에서의 예배와 프로그램이 점차 ‘entertainment 예능’화 되어가는 것도 고통을 표출하지 않고 위로를 통해 고통을 없는 것처럼 감추려는 이 시대의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고통 소리 내기’가 사라지니,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는 마치 하나님의 역사(구원)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안타까운 일이다. 바디매오처럼 ‘고통 소리 내기’를 하는 이가 없으니, 교회는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지루하고 따분한 곳이 되어가는 것 같다.

 

19. 삶에 문제가 있는데 왜 ‘고통 소리 내기’를 하지 않는가. 왜 기도의 자리에 나아오지 않고, 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지 않는가. 왜 목사를 붙잡고 우는 사람이 없고, 왜 아무렇지 않은 듯 웃기만 하고, 왜 위로만을 바라면서 TV예능 같은 것에만 몰두하는가. 고통 소리 내기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신앙인들)이 잃어버린 귀중한 삶(신앙)의 유산이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의 신앙이 더 훌륭하다) 요셉은 임종을 앞두고 다음과 같은 예언과 축복의 말씀을 전한다.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창 50:24). 여기서 ‘파카드(돌보시고)’라는 동사가 쓰이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찾아오실 것’이라는 간절한 소망과 예언이 담긴 말이다.

 

20. 고통 소리 내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통로이다. 진통사회, 고통 없는 사회에서 ‘고통 소리 내기’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은 ‘고통 소리 내기’를 가장 두려워한다. 고통 소리 내기는 고통을 지목하고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 소리를 내면 ‘조용히 해’라며 고통 소리 내는 것을 못하게 하거나, 고통 소리 내는 것은 ‘루저’나 하는 일이라고 폄하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전통을 이어받아 고통 소리 내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고통 소리 내기는 하나님이 그 고통의 자리로 오시게 하는 축복의 통로요, 그 고통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신비의 통로요, 고통으로부터 구원받는 은총의 통로이다. 우리 함께 다짐해 보자.

 

“나는 고통 소리 내기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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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1. 17. 18:18

선하고 아름다운 것, 토브를 간구하는 기도

(출 2:1-10)

 

주님, 참 쉽지 않은 상황인데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주님의 자녀들의 모습을 봅니다.

사랑 안에서 모세는 태어났고

하나님의 선함과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주님,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 주는 선물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선한 것이 있거든,

우리에게 아름다운 것이 있거든,

또한

우리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경험했거든,

그 안에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 임한 것을 알아보고

주님께 찬송과 경배와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삶을 풍성케 하는 소중한 것들

끊임없이 사랑하게 하시고,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

그곳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를 보시고 ‘토브(선하고 아름답다)’라고 복을 내려주신 주님,

우리의 삶이 주 안에서

창조와 구원의 삶이 되게 하시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드러내는 복된 삶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토브,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몸으로 보여주신,

온 우주에서 가장 잘생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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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 17. 18:16

잘생긴 모세

(출애굽기 2:1-10)

 

1. 창세기 1장과 2장에 보면, 각각 인간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1장에서는 7일간에 걸친 창조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데,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먼저 조성되고 나서 인간은 제6일에 창조된다. 제 6일에 창조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축복하신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그리고 2장에서는 인간 창조에 대한 사뭇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1장과는 달리 남자가 독처(혼자 지내는 것) 하는 것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보시고, 남자에게 여자를 ‘돕는 배필’로 지어서 주시는 것을 본다.

 

2. 창세기 2장의 이야기를 보면,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그 이후에 여자가 창조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취해서 만든 것으로 나온다. 하나님은 아담(남자/이쉬)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취해서 만든 여자(하와/이샤)를 이끌어 아담에게 주신다.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는 여자(이샤)를 보고 아담(이쉬)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 대한 축복의 말씀이 주어진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4-25).

 

3. 인간 창조에 대한 이 두 이야기는 분명 인간의 본성, 특별히 사회적 본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본성을 위해서 남자와 여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일,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본성(fundamental nature) 이라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본성(nature)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나면, 그렇지 않고서 출애굽기 2장의 시작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4. 요즘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사회적 문제 중 하나는 출산율의 저조이다. 출산율 저조로 인하여 한국은 지금 ‘인구절벽’을 경험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결혼도 별로 안 할 뿐 더러, 결혼을 해도 아기를 갖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혼도 안 하고, 아기도 낳지 않으니, 인구절벽을 경험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고, 사회가 고령사회로 변해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미래이다. 그런데, 한국의 사회적 현실을 보면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아기를 낳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결혼을 하거나 아기를 낳아서 키울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너무너무 거칠기 때문이다. 인간의 번영은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창조도 가장 마지막 날인 제 6일에 이뤄진 것 아니겠나.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인간은 살 수 없다.

 

5. 출애굽기 2장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고된 노동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왕의 명령으로 인하여 사회적 집단 살해(genocide)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생각으로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는 것일까. 너무 무모해 보인다. 1장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이 끔찍한 말로 끝나지 않는가.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무슨 병아리를 낳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낳는 것인데,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꼼짝없이 죽여야 할 상황인데, 그러한 상황 속에서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는 일은 매우 무모한 일이고 비상식적인 일처럼 보인다.

 

6. 분명 수많은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나일강에 던져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결혼을 하지 않고 아기를 낳지 않는 것이 더 윤리적인 행동 아닌가. 아기를 낳으면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낳는 것 자체가 살인 아닌가.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의 본성만 생각하고 태어날 아기에 대해서는 너무도 배려를 하지 않는 것 아닌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들인가. 출애굽기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생기는 출산 이야기가 전개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7. 모세의 출생 이야기가 담긴 출애굽기 2장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2절이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레위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낳았으니 마땅히 나일강에 던져 죽여야 한다. 그런데 죽이려 보니까 그 아이가 ‘잘생긴 것을 보고’ 죽이지 못하고 살려 두었다. 그러면 그동안 못생긴 남자 아이들은 죽임을 당했던 것일까. 못생기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면 현빈이나 송중기, 정우성 같은 남자만 살아남고 나머지 남자들은 다 죽어야 하는가. 외모지상주의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이 보면서 딱 걸려 넘어지기 쉬운 구절이다.

 

8. 모세에게 붙은 수식어, “잘생긴”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외모가 수려했다’는 뜻일까. 잘생긴’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토브’이다. 레위 여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잘생긴 아이(fine boy. Fine child, beautiful child)’였다. ‘토브’가 처음 등장하는 성경은 창세기 1장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신의 창조물을 보시면서 ‘좋다(토브)’라고 하시며 흐뭇해 하셨다. 출애굽기가 창세기와 분리된 성경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성경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우리는 아기 모세를 보고 ‘잘생긴(토브)’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모세의 탄생, 또는 모세는 새로운 창조이고 창조의 활동이다. 아기 모세에게 ‘토브’라는 수식어가 붙었다는 것은 그를 통해 무엇인가 예상할 수 없는 ‘창조의 일’이 발생할 거라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9. 창세기 전반부에 나오는 이야기 중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다. 세상은 죄로 가득했고,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한탄하시며 세상을 물로 심판하려는 계획을 당대의 의인 노아에게 알려주신다. 노아는 하나님의 아름다운(토브) 피조물들을 구원하기 위해 창조의 일을 시작한다. 바로, 방주(ark)를 만드는 일이었다. 노아는 방주를 창조해 피조물들을 구원한다. 이처럼 창조에는 구원의 목적이 담겨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창조한다고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구원의 개념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곧 구원 행위이다.

 

10. 모세의 탄생이 창조와 구원의 드라마라는 것은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토브’한 아이는 점점 성장했고, 3개월이 지나자 더 이상 숨길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모세를 구원하기 위해서 ‘갈대 상자’를 만든다. 상자(테바)는 노아가 만든 방주와 같은 단어이다. 노아는 사람들(피조물들)을 홍수(물)에서 살려내기 위해서 ‘테바(방주)’를 창조했고, 모세의 가족들은 모세를 나일강(물)에서 살려내기 위해서 ‘테바(상자)’를 창조했다. 모세의 갈대 상자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의미이다. 물에 의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11. 창조와 구원의 역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모세의 가족들은 모세를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으로 떠내려 보낸다. 모세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일단 나일강에 바로 던진 것이 아니라 갈대 상자에 담아서 나일강에 풀어놓아 죽음을 지연시키긴 했어도 결국 죽게 될지, 아니면 구원을 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데, 모세의 탄생 이야기에는 또 하나의 ‘토브(선함/아름다움)’가 등장한다. 이집트 왕(바로)의 딸의 마음이다. 나일강에서 목욕하던 바로의 딸은 갈대 상자 안에 놓인 ‘히브리 사람의 아기’를 보고 ‘불쌍히’ 여긴다.

 

12. ‘히브리 사람’은 ‘노예 계급’이라는 뜻이다. 왕족이 노예 계급을 향해 불쌍한 마음을 갖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왕의 명령까지 있던 상황에서 왕의 딸이 노예 계급의 아이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를 죽이지 않고 자기의 보호 아래 있는 아들로 삼는 것은 단순히 훌륭한 일이 아니라 ‘새창조의 역사’이다. 창조의 일은 이렇게 ‘토브’를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어떠한 선한 일, 아름다운 일, 그래서 생명이 살아나고 풍성해지는 것을 보면 단순히 좋은 일, 훌륭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토브(선하고 아름다운 것)’는 하나님의 창조에 배어 있는 하나님의 숨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만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므로, ‘토브(선하고 아름다운 것)’를 경험했거든, 주님을 찬양하라.

 

13. 잘생긴 모세. 이것은 모세의 외모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잘생긴 모세. 이것은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신학적 진술이다. 고된 노동과 살해의 위협 속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했다는 것은 그들이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토브’가 임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14.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멈추지 않으신다. 잘생긴 모세의 탄생, 그것이 그 증거이다. ‘토브’가 탄생했다는 것,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생긴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죽이지 않고, 모세를 구원하기 위해 갈대 상자를 창조했다. 그리고 실제로 구원의 갈대 상자는 이집트 왕의 딸을 통해 ‘구원’을 성취했다. 모세의 이름은 뜻은 ‘물에서 건져냄’이다. 이 이름은 앞으로 발생할 또다른 창조와 구원에 대한 예언이고 기대이다.

 

15. 지켜야할 소중한 것이 있는가.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라.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인생/삶을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반드시 드러날 것이다. (자기 몸을 쓰다듬으며, ‘사랑해’라고 말해보라.)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들이 참 많다. 나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 친구들, 일터, 나라, 지구. 그리고 우리 신앙의 공동체 교회. 죽음의 위기에 처해져 있었지만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가족들의 사랑 덕분에 모세는 살았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아름다운 구원의 은총이 임했다. 그래서 모세의 인생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찬양이 되는 인생이 된 것 아닌가.

 

16. 우리도 모세처럼 잘생긴 사람이 되면 좋겠다. 사실 우리는 이미 잘생긴 사람으로 태어났다. 부모님 품에 안긴 우리들을 보고 하나님은 이미 ‘토브’라고 말씀해 주셨다.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 잘생긴 사람.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 창조의 일을 하고, 구원의 일을 하는 사람. 무엇을 하든지, 거기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드러내는 사람. 그리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드러내고 보았을 때, 자기 자랑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 그렇게 우리 모두 잘생긴 사람이 되면 좋겠다. “당신 참 잘 생겼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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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詩論)2022. 1. 11. 16:43

[시론] 장수진의 시 ‘2016 여름, 연우소극장’ – 불의의 가위에 맞서는 신앙의 주먹

 

인간을 파멸시키려거든 첫째로 예술을 파멸시켜라. 백치들을 고용하여 차가운 빛과 뜨거운 그림자로 그리게 하라. 가장 졸작에 제일 높은 값을 주고, 뛰어난 것을 천하게 하라. 그리하여 무지의 노동이 모든 곳에 가득 차게 하라.

 

ㅡ 장수진의 시 ‘2016 여름, 연우소극장’ 부분, 시집 <사랑은 우르르 꿀꿀>에 수록

 

지난 정권 때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소위, 예술검열이 그것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립국악원 등 공공기관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특정 연출가를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거나 그 연출가의 작품 공연을 취소하는 일이 있었다는 게 세상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장수진의 시 ‘2016 여름, 연우소극장’은 바로 그 사건에 대한 ‘저항시’이다. 위의 인용한 구절은 예술검열을 주도한 관료들의 비뚤어진 정신세계를 묘사한 것이다.

 

그 당시 예술인들은 ‘예술검열’ 사태에 맞서 ‘권리장전 2016_검열각하’ 프로젝트를 구성하고 2016년 6월 9일부터 10월 30일까지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20개 극단의 참여로 21개의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그때 소극장 문 앞에는 이런 포스터가 붙었다. “검열의 가위에 맞서는 연극의 주먹”. 예술인들의 저항 문구답게 매우 창의적이고 위트 있는 문구였다. 장수진의 시는 그때의 저항을 ‘매미와 개미’를 주연으로 해서 마치 연극 한 편을 상영하는 듯 묘사하고 있다.

 

시에는 검열 당국을 향한 저항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끝내 나를 죽일 셈인가 / 이유가 없다는 걸 알고 있네 / 날개를 가진 내가 친구와 함께 땅을 기어가는 것이 / 그리도 불편한가 / 그러나 너의 열등감은 / 너와 나를 함께 죽일 것이다.” 국가는 정치적인 이유로 불편한 예술인들을 죽이려 들지 모르지만, 그 행동 자체가 결국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하게 될 거라는, 예언자적 메시지가 여기에 담겨 있다.

 

우리가 저항해야 할 일은 일제강점기나 군사독재 시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저항시를 쓰는 일은 이육사나 김수영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다. 저항시 쓰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저항은 계속되어야 한다. 신앙은 저항이다.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한국역사의 밑에 숨어 흐르는 바닥 가락은 고난'이라고 말했듯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신앙을 갖는 이유는 우리를 고난으로 밀어 넣는 존재(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에 대하여 저항하기 위함이다.

 

시인은 시에서 “인간을 파멸시키려거든 첫째로 예술을 파멸시켜라”라고, 예술가 답게 말하고 있다. 신앙인은 신앙인의 관점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파멸시키려거든 첫째로 신앙(종교)을 파멸시켜라.”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어느 시대든 불의한 통치 세력은 종교를 탄압했고 예술을 검열했다. 그것이 인간성을 파멸시켜 자신들의 통치를 용이하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통치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성이 훼손되고 문화가 쇠퇴하며 나라가 망해 가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신앙인(종교인)과 예술인에 대한 탄압이 가장 먼저 자행되었다. (또는 신앙인과 예술인의 타락이 두드러졌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신앙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는 자칫 물질의 복을 받는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 모든 것의 가치가 돈으로 환원되는 세상만큼 짐승 같은 세상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요즘의 자본주의를 ‘야수 자본주의’라 부르지 않는가. 야수에 물려 죽는 어처구니없는 삶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신앙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갖는 데서부터 시작한다고, 나는 믿는다. 신앙은 저항이다. 인간성을 파괴하는 그 어떤 존재에 대해서 저항할 줄 아는 사람이 신앙인이다. 신앙인은 ‘불의의 가위에 맞서는 신앙의 주먹’을 내는 자이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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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22. 1. 10. 17:50

십브라와 부아를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

(출 1:15-22)

 

주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따뜻한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갈기갈기 찢어져 서로의 생명을 해치려는 세상입니다.

아주 미미한 존재였던 십브라와 부아를 통하여

어떻게 좀 더 따뜻한 세상,

좀 더 생명력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인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

우리도 힘을 내게 도와 주옵소서.

그들이 생명을 해치려는 일에 ‘아니오’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고

그것은 곧 그들이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생각없이 행하는 우리의 일들이

거대한 악을 가져오게 되는 것을 역사의 교훈을 통해서 배우듯이,

살아가면서 생각없이 행하지 말게 하시고

날마다 주와 함께 동행하며 생각할 줄 아는

용감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주님의 자녀가 되어

생명을 해치려는 일에 대하여 ‘아니오’를 말하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좀 더 따뜻한 세상으로 만들어 가는 일에

동참하게 하옵소서.

십브라(Shiphrah)와 부아(Puah)의 이름을 기억하며 우리도 그들처럼

복된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십자가에 달려 죄와 죽음에 대하여

‘아니오’를 외치시며

우리에게 하늘의 생명을 가져다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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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 10. 17:37

십브라(Shiphrah)와 부아(Puah)

(출애굽기 1:15-22)

 

1. 21세기는 가히 동영상의 시대다. 사람들은 유튜브를 통해서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여 자기 자신을 뽐낸다. 다른 말로 하자면, 21세기는 가히 ‘드라마’의 시대다. 드라마틱한 인생을 갈망하는 시대, 동영상 드라마가 쏟아지는 시대, 드라마 시청이 압도적으로 많은 시대다. 책을 보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동영상을 보는 사람은 넘쳐나고 있다. 옛날에는 “읽은 책 중에 무슨 책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가 질문이었다면, 이제는 “시청한 드라마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드라마는 무엇인가?”로 바뀌었다. 그런 의미에서, 무슨 드라마가 가장 기억에 남는가?

 

2. 나는 개인적으로 <사랑이 꽃피는 나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4년 여에 걸쳐 방영된 이 드라마는 그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나의 청소년기와 함께 했던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를 통해서 스타덤에 오른 패표적인 연예인은 최수종과 이미연이다. 이 드라마를 통해서 수많은 스타들이 배출되었다. 최재성과 최수지도 그들 중에 포함된다. 지금 시대 사람들이 드라마틱한 인생을 꿈꾸는 이유는 아마도 드라마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를 하도 많이 보다 보니, 드라마틱한 인생을 꿈꾸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3. 성경이 문자로만 전달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만약 성경을 다시 써야 한다면, 문자보다는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배포하면 지금 시대에 더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될 거라 생각한다. (대한성서공회에서 성서 보급을 위해서 이런 거 기획하면 좋겠다.) 최고의 작가들, 배우들, 감독들, 그리고 최신의 촬영기법을 동원하여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드라마 형태로 동영상을 제작하여 성경을 다시 재구성한다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어떤 드라마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성경의 어떤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 드라마’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마음이 되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책 자체를 읽기 꺼려하는 시대의 사람들에게 ‘성경 좀 읽으라’고 권면 또는 강요한다고 성경을 진지하게 읽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하기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최고의 출연진과 제작진을 투입해 성경을 드라마로 제작해서 시청하도록 권면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성경을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4. 이러한 생각이 생뚱맞은 것은 아니다. 중세시대, 모든 성경이 라틴어로 보급되고, 모든 예전이 라틴어로 진행되던 때, 그러나 라틴어를 읽을 줄 알고 알아들을 줄 아는 이들이 별로 없었던 때, 성직자들이 성경과 예전을 독점하고 있었을 때, 일반 대중들에게 성경의 이야기(복음)을 알린 것은 글자가 아니라 그림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그림(성화)는 ‘가난한 자들의 성경’이라 불렸다. 성경이 비싸서 가난한 자들이 살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림은 직관적으로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그것에 대하여 상상하고 묵상하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에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갔다. 이처럼, 라틴어를 모르는 중세인들에게 그림을 통해서 성경의 이야기(복음)를 전달했듯이, 책 읽는 것을 싫어하는 세대에게 드라마(동영상)를 통해서 성경을 전달하는 것은 이 시대 기독교인들의 사명이 아닐까, 화두를 던져 본다.

 

5. 내가 만약 출애굽기를 드라마로 제작하는 감독이라면, 본문에 등장하는 십브라와 부아 역에 김태희와 손예진을 캐스팅 하겠다. 그만큼 비중 있게 다루겠다는 뜻이다. 십브라와 부아, 이 두 사람의 이름은 반드시 사람들의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감독의 의도가 아니라, 성경 저자(작가)의 의도이다(하나님의 뜻이다.). 본문을 보면 이렇게 시작한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15절). 애굽 왕은 보통 ‘바로’라고 표현되거나, 아니면 그 왕의 이름을 거론하여 표기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혀 그러한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출애굽기의 저자(작가)는 매우 의도적으로 ‘애굽 왕’이라고 적음으로써 왕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6. 그러나, 이름 없는 왕과 매우 대조적으로 히브리 산파들의 이름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십브라와 부아.” ‘히브리(Hebrews)’라는 용어는 ‘하피루(hapiru)’에서 온 말로 그 당시 이집트 사회에서 ‘하층 계급의 사람들(low-class folks)’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상식적으로 후대에 기억되어야 할 사람은 애굽의 왕이고 전혀 기억될 수 없는 사람은 하층 계급 취급받았던 ‘십브라와 부아’이다. 그러나 성경은 전복적으로 기록한다. 애굽 왕의 이름은 전혀 기억하지 않고, 하층민이었던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이게 성경이 가진 멋진 전복성이다. 하나님의 신비.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가 되는. 놀라운 신비.

 

7.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마주하는 세상은 ‘살고 싶은’ 드라마틱한 세상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드라마틱한 세상이다. 위협적인 왕,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그리고 반항하는 산파들.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하나 같이 감당하기 어려운 캐릭터들이다. 게다가 우리는 점점 심해지는 핍박을 본다. 요셉을 모르는 애굽의 새로운 왕은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된 노동을 부과하다가, 그것도 모자라 생명 자체를 해하려 한다. 그래서 애굽 왕은 산파들을 불러 ‘히브리 여인들이 아기를 출산할 때 돕다 그들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한다. 이후, 산파들이 본인의 명령을 제대로 실행하지 않자, 생명을 해하려는 계획은 국가적 차원에서 구조적으로 실행된다.

 

8. 쥐는 삶의 질에 대한 바로미터다. 쥐가 시도때도 없이 출몰하는 지역에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한 지역의 삶의 질은 매우 떨어질 수밖에 없다. 쥐는 가난의 상징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는 도둑 대신 쥐가 드나드는 법이다. 못사는 나라일수록 위생의 문제 때문에 쥐가 들끓기 마련이다. 어린 시절, 한국이 지금처럼 부유하지 못할 때, 매일 아침 일과 중 하나는 집안에 설치해 놓은 쥐덫에 잡힌 쥐를 집 앞 개울물에 가서 죽이는 것이었다. 매달아 놓은 고구마를 먹으려고 쥐덫에 들어왔다 잡힌 쥐는 개우물에서 어린 아이의 불타는 사명감에 의해 생명을 잃었다. 지금 본문에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동일한 일이 발생하고 있다.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22절).

 

9. 쥐와 같이 하찮은 미물 취급을 당하는 히브리 사람들, 더 정확하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생존했을까? 국가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저질러지는 인간말살(genocide) 정책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하층 계급(low-class)’이었던 이스라엘이 생명을 잃지 않은 데에는 ‘보이는 거대한 힘’을 압도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생명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출애굽기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생명이 꽃피는 이야기다. 생명이 꽃피는 나무.

 

10. 생명의 위협 속에서 생명이 꽃피는 이야기는 두 가지의 큰 줄기를 통해서 전개된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내재된 생명력, 즉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이고, 다른 하나는 십브라와 부아의 용감하고 지혜로운 행동이다. 우리는 십브라와 부아가 꽃피는 생명에 대해 집중해 보려고 한다. 십브라와 부아의 이야기는 유명한 현대여성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한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유대인들이 대학살을 당한 것은 나치에 의해서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출애굽기에서도 대학살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다만 2차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서 일어난 아우슈비츠 대학살이 우리에게 시간적으로 가까운 역사이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떠올리게 될 뿐이다.

 

11. 한나 아렌트뿐 아니라 2차대전 때 나치에 의해서 자행된 아우슈비츠 대학살(홀로코스트: 이 말은 그리스어에서 온 것이다. 제물을 불러 태워서 드린 번제를 가리키는 말이다)에 대한 반성은 그 사건을 경험했던 20세기의 모든 서구 철학자들에 중요한 과제였다. “왜, 어떻게 이러한 일이 발생했을까?” 이 질문을 깊게 파고 들어갔던 두 명의 철학자가 있는데, 하나는 아도르노이고 다른 하나는 한나 아렌트이다. 아도르노는 근대성이 만들어낸 이성에서 그 원인을 찾았고, 아렌트는 그 원인을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12.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하고 있는 철학적 개념인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이해하는데 있어 본문에서 등장하고 있는 ‘십브라와 부아’의 이야기만큼 좋은 것도 없다.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의 주범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관하면서 그가 어떤 악마가 아니라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매우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그처럼 거대한 악을 저지를 수 있게 되었을까?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언어습관과 그의 ‘생각없음’에 주목을 한다. 그의 언어습관은 매우 관료적(별 생각없이 시키는 일만 하고 상투적인 용어만 사용하는 것)이고, 그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이 행하는 일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지 않고, 아주 성실하게 상부의 지시를 따라 행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악의 평범성이란 이런 것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뭔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 다만, 그 사람이 아무런 사유(생각) 없이 행동을 하면 거대한 악을 불러오는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속담: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 맞아 죽는다.)

 

13. 본문에 등장하는 ‘십브라와 부아’는 아이히만과 정반대의 인물이다. 그들은 생각할 줄 알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생각이 살아 있다는 뜻이다. 만약 산파가 아이히만 같이 아무런 생각없는 사람이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왕에 의해서 구조적으로 진행된 학살정책을 통해 자취를 감추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산파들은 아이히만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생각할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의 극악무도한 명령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었다.

 

14. 여기서 우리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생명을 꽃피우는 지혜를 배우게 된다. 부당한 것에 대해서는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한 능력은 ‘예’의 유일하게 타당한 배경이 되며, 이 둘을 통해 진정한 자유의 윤곽이 비로소 뚜렷해진다”(페터 슬로터다이크, <냉소적 이성 비판>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성숙한 사람이 가진 능력이다. 실제로 홀로코스트가 자행되고 있을 때 ‘아니오’를 실천한 사람이 있었다. 오스카르 쉰들러(Oskar Schindler). 그의 일대기는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에 의해 <쉰들러 리스트>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15. 나는 이 영화를 군대 있을 때 봤다. 하루는 내가 모시던 장군이 밤 늦게까지 안 주무시고 영화를 보시더니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 차 안에서 나에게 물었다. “쉰들러 리스트 봤나?” 안 봤다고 대답하니, “꼭 봐라!”라고 하셨다. 그래서 봤다. 그 이후 여러 번 봤다.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쉰들러가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지 못한 것에 대해서 자책하면서 안타까워하는 장면이다. 그때 유대인 랍비는 쉰들러에게 감사의 뜻으로 반지를 주며 이런 말을 한다. 한 생명을 구하는 자는,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그래서 우리 주님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겠죠.)

16.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생명에 해를 가하는 것에는 무엇이든지 “아니오(No)”를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반대로 생명을 풍성케 하는 것에는 무엇이든지 “예(Yes)”를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예”를 말하는 것에 더 길들어져 있다. 이는 우리가 생명을 풍성케 하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에 해를 가하고 있는 일에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아니오”를 하면 불이익을 보게 되는 경우를 이 세상에서 자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장대한 출애굽 이야기의 첫 장면에 나오는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을 마주하며, 생명에 해를 가하려는 일에 맞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아니오’를 말할 줄 알았던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이 성경에 당당히 기록되어 있는 것의 뜻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도 그들처럼 혹시 살면서 생명에 해를 가하려는 일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것을 향하여 ‘아니오’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17. 일부 사람들에게만 기억되었을지 모르는 쉰들러의 이름이 헐리우드 최고 감독의 손을 거쳐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로 거듭나 수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이름이 되었듯이, 그리고 그의 삶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듯이, 언젠가는 ‘십브라와 부아’의 이야기도 좋은 드라마 또는 영화로 제작되어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이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드라마 또는 영화를 통하여 수많은 이들이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그들처럼 생명을 해치는 일에 대하여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영감을 얻게 되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우리들부터 우리의 삶 속에서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을 기억하며, 생명을 해치는 일에 대해서는 ‘아니오’를 말하며 생명을 보듬어가는 용감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그러한 용감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 이 세상이 좀 더 생명력 넘치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그런 세상을 꿈꾸고 소망하며 우리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니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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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Look Up, 돈 룩 업,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자의 최후]

 

이 세상에는 진실을 말하는 자와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자(진실을 보지 못하는 자가 아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힘겨운 일이다.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다. 진실을 말한 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지탄 받아서가 아니라, 대개 진실은 고통을 수반하는데, 진실을 말한 사람은 고통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마주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며 7년 가뭄과 7년 풍년에 대하여 진실을 말한다. 요셉이 다가올 세상에 대한 진실을 말했다고 해서 요셉이 7년 가뭄으로부터 그 자신만 살짝 비켜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도 고스란히 온몸으로 가뭄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말한다. 그리고 그 가뭄의 시기, 고통의 시기를 '함께' 경험하고 가로질러 간다.

 

최근 넷플릭스에 [Don't Look Up / 돈 룩 업]이란 영화가 개봉되었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천문학자와 그의 제자는 하늘의 별을 관찰하던 중 거대한 혜성(comet)이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그 진실을 알리고자 정부와 언론사를 접촉하지만 그들은 천문학자들이 발견한 혜성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그 이슈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 만을 채우려 할 뿐이다.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준다. 진실을 말하려는 자와 진실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 간의 전쟁은 'Look Up' 운동과 'Don't Look Up'운동으로 번져, 진영 간의 극심한 갈등으로 치닫는다. 영화는 인간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와 이성의 꽃이라고 불리는 과학에 대한 비판이 도사리고 있다. 이성과 과학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다. 현실을 왜곡하는 이성, 현실을 왜곡하는 과학이 잘못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무엇인가를 과도하게 신뢰하는 탓에 현실을, 아니 진실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진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모든 것이 하나의 가치를 위해 도구화 되어버린 이 시대에, 진실이란 이익을 포장해 주는 포장지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이성의 시대,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이성과 과학이 '탐욕'이라는, '돈'이라는 가치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면, 이성과 과학의 힘은 진실을 감쪽같이 속이는 거대한 악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의 후반부는 마치 흩어진 진실의 조각들이 진실의 힘으로 자기의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 같았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지구가 진실을 외면한 대가로 멸망이라는 끝에 다다르는 여정은 감추어져 있는 추함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진실의 현미경 같았다.

 

지구로 돌진하고 있는 혜성을, 그 현실을, 그 진실을 쳐다볼 필요 없다고 외치는 'Don't Look Up' 진영과 그 진실을 알리려고 하는 'Look Up' 진영의 끝은 결국 같다. 다른 것이 있다면, 전자의 사람들을 그들의 마지막 삶을 가장 아름다운 시간으로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과 후자의 사람들은 그들의 마지막 살을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준비하고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마지막 만찬, 그 밥 한 끼, 그 마지막 웃음, 그 마지막 터치, 그 마지막 눈길, 그 마지막 숨소리, 그 마지막 말.

 

신자유주의 정치경제 체제는 인간의 삶을 종말로 몰아넣고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민주주의 위기, 즉 인간성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고, 기후 위기, 즉 생존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인간은 지금 겉과 안이 동시에 타 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 진실이 다가오는 혜성처럼 눈에 보였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잘 보이지 않을 게 안타까울 뿐이다.

 

영화에서처럼, 현실에서도 진실을 말하려는 자는 힘이 약하고,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자는 힘이 강하다. 'Look Up'의 외침보다 'Don't Look Up'의 외침 소리가 더 크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쉽게 더 큰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노아의 방주 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세상이다. 시간이 그렇게 흘렀어도, 세상은 그대로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늘을 올려다보며 진실과 마주할 것인가, 아니면 땅만 쳐다보며 눈 앞의 일만 생각하고 말 것인가. 우리의 삶은 이렇게 매 순간 진실을 앞에 두고 기로에 서게 되는 것 같다. 이 진실 앞에서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그러한 자기의 종교적 정체성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땅만 쳐다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순간,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인간인가? 인간으로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마지막 만찬, 그 밥 한 끼, 그 마지막 웃음, 그 마지막 터치, 그 마지막 눈길, 그 마지막 숨소리, 그 마지막 말을 원한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성찰적으로 허무에 대하여 말한다. 결국 지구는 혜성과 충돌하고 멸망하고 만다. 바로 그때 힘 있는 'Don't Look Up' 진영의 몇몇 사람들이 우주선을 타고 멸망하는 지구를 탈출한다. 그들은 과학의 힘으로 목숨을 구하고 우주를 떠돌다 22,740년 후에 생명체가 존재하는 지구와 비슷한 행성에 착륙해 수면 상태에서 깨어나 바깥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영화는 생존자들이 그곳에 있던 타조처럼 생긴 동물들에게 잡아 먹히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자의 최후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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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1. 6. 16:10

출애굽의 삶을 간구하며 드리는 새해 기도

(출 1:1-14)

 

주님, 새로운 해를 맞았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시간으로 들어섰습니다.

이 새로운 시간, 새로운 해가 주님이 주신 복으로 가득 차길 원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더욱더 알기 원합니다. 신앙이 깊어지길 원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이 무엇인지

더 잘 알게 되고, 그 복을 소중하게 여기며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 복된 시간을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깊어진 신앙을 통해 나 자신에게 내린 복만 알아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내린 하나님의 복을 알아보게 하셔서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복된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여러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많지만,

우리는 주님께 ‘원복’을 받은 주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말게 하시고,

더 번성하고 더 강해지게 하시며,

우리의 삶의 여정 자체가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아는 상태, 즉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는 삶으로 나아가는

출애굽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그것이 가장 복된 인생인 것을 기억하며,

신앙의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그 복을 활짝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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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 6. 16:08

하나님의 축복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출애굽기 1:1-14)

 

1. 2020년도도 다 못 산 것 같은데, 벌써 2022년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 중 가장 미스터리 한 것은 ‘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똑같은데, 그 시간의 양과 질은 사람마다 달라지는 것 같다. 시간의 본질은 같은 것일 텐데, 그 시간을 받아는 우리는 모두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가? 우리 모두가 복된 시간을 살고 있기를 소망한다.

 

2. 우리 나라 말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히브리어로 보면 출애굽기는 ‘베엘레’로 시작하는데, ‘베’는 접속사이다. 즉, 출애굽기는 창세기와 동떨어진 기록이 아니라 이어지는 기록이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창세기 마지막에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축복이 출애굽기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접속사이다. 그래서 출애굽기는 야곱의 열 두 아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야곱을 통해 아들들에게 주어진 축복이 어떻게 실현되고 보전되는 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7절).

 

3. 여기까지만 보면, 야곱의 축복은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8절을 보면 분위기가 드라마틱하게 전환된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8절). 지금은 완전 사막으로 변하여 고대 문명의 문화재를 바탕으로 관광산업을 통해 먹고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고대 이집트(애굽)는 매우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는 거대한 강대국이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피라미드만 보더라도 고대 이집트 문명이 얼마나 강성하고 풍성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4. 고대 이집트는 한 왕조가 연속적으로 다스리지 않았다. 지금은 정권교체를 할 때 같은 민족, 같은 나라의 어떠한 당이 집권하지만, 고대 이집트 당시에의 정권교체는 완전히 다른 민족이 나라의 주인으로 등극하곤 했다. 그 정황이 8절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이집트에도 극적인 변화가 생겼는데, 완전히 다른 민족이 이집트의 정권을 차지했고, 정권을 차지한 민족과 왕은 ‘요셉’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른 말로 해서, ‘요셉의 신화’에 전혀 영향 받지 않는 민족이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5. 자료를 찾아보니까, 2016년도 5월쯤에 발생한 일인데, 그 당시 잘 나가던 어떤 걸그룹이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퀴즈를 푸는 중 안중근을 알아맞히지 못해 대중들로부터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젊은 세대가 안중근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안중근에 대한 퀴즈를 맞히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안중근의 신화’라고 하는 집단적 윤리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뭇매를 맞은 것이다. 안중근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는 국민적 영웅으로 ‘윤리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를 모르거나, 그에 대하여 합의되지 않은, 즉 비윤리적인 해석을 내놓은 사람이 있다면(가령,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은 윤리적이지 못한 사람으로서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안중근의 신화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풍요롭게 하고 대한민국 국민들을 하나로 모아주며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영감을 주는 한 나라의 윤리적 공공재인 것이다.

 

6. 이처럼, 요셉도 이집트에서 이러한 역할을 감당했던 인물이다. 창세기 41장 이후에 펼쳐지는 이집트에서의 요셉의 활약은 가히 민족적 영웅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 요셉의 지혜를 통해 이집트는 가뭄 때문에 망하지 않고 존속했으며, 이집트의 주민들 뿐만 아니라 그 주변 나라들의 주민들까지도 기근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요셉의 신화는 가히 오래오래 사람들의 마음에 머물며 큰 영감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7. 그런데, 그 신화가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안중근을 전혀 모르는 민족이 대한민국의 정권을 차지했다고 생각해 보라. 안중근을 전혀 존경하지 않으며 안중근의 이야기를 듣는다 하여도 전혀 감흥이 없거나 영감을 얻지 못하는 민족이 있다고 생각을 해 보라. 안중근의 신화 아래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이내 절망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요셉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애굽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니, 요셉의 신화 아래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이 어떨지, 눈에 보듯 훤하다.

 

8.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당황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복을 받았는데, 바로 그 복 때문에 고난 당하게 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게 된다. 7절에서 보았듯이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했다. 우리가 모두 알고 인정하다시피,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복이다. 이스라엘은 비로소 약속의 성취를 맛본 듯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리신 복을 다른 시각에서 보는 아주 이질적인 왕이 등장했다.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데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9-10절). 그러면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거운 노동의 짐을 지워 괴롭게 하고 고통을 준다.

 

9. 어떻게 하루 아침에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주신 복이 갑자기 저주로 바뀌는 순간이다. 하나님이 복 주셔서 번성하고 강해졌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고통 받는 상황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고통으로 바꾸어 놓는다. 요셉을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요셉을 모르니, 요셉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이 내리신 복이 그들의 눈에 ‘귀하게’ 다가올 리가 없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복은 ‘찬양과 영광과 감사’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대적해야 할 두려움과 위협으로 다가온다.

 

10. 우리는 여기에서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knowing God)’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그 무엇보다도 사랑의 행위이다. 그리고 신앙은 그 어떤 것보다도 여정이다.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차츰차츰 알아가게 되고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 즉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깊어지고 있는가. 좀 더 직관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나님과 사랑에 빠져 있는가.

 

11. 요셉과 그의 형제들 간에 발생한 일을 보면, 신앙이 무엇인지 좀 더 알게 된다. 요셉은 ‘꿈 꾸는 자’였다. 그 꿈은 요셉 자신의 헛된 꿈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꿈, 즉 비전이자 사명이었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꿈을 무시하고 비난했다. 급기야 형제들은 요셉을 시기 질투하여 그를 애굽으로 향하던 노예상에게 팔아 넘기기까지 했다. 무슨 뜻인가? 그 당시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만큼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들의 신앙이 별로 깊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그들은 요셉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복을 알아보지 못했다.

 

12. 결국, 신앙이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복을 알아보는 것이다. 요셉을 노예상에 팔아먹을 때만 해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던 요셉의 형제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감사하게도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갔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덕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알았던 야곱은 부지런히 자식들에게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이끌었다. 즉 그들에게 신앙을 주었다(부모의 역할/사랑을 많이 주라. 그 사랑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려주라.). 세월이 흘러, 요셉과 형제들이 만났을 때, 비로소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리신 복을 언급하며 울었을 때, 요셉의 형제들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내리신 복을 알아보고 인정하며 부둥켜안고 울었다. (창세기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13. 출애굽기는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또는 하나님을 모르는 열방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출애굽’이 무엇인지를 여기에서 배우게 된다. 출애굽이란 어떤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것, 즉 신앙에 이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탈출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상태,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출애굽이다.

 

14.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알아보지 못해 하나님의 복을 두려워하고 그 복을 위협의 대상으로 생각해 대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막아 서지 못한다. 출애굽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또다른 구약성경 민수기 22장에 보면 발락과 발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발락은 선지자 발람을 불러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보려고 시도하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막아 설 수 없었다. 발락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가던 발람은 결국 하나님께 이런 음성을 듣는다.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민 22:12).

 

15. 하나님의 축복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에게 복을 받은 자는 아무도 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원죄(original sin)’라는 말에 익숙해 있지만, 사실 우리가 더 익숙하고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말은 ‘원복(original blessing)’이다. 신학적으로 말해,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된다는 것의 의미는 원죄를 넘어서 원복의 상태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최초의 축복은 무엇인가? 번성하고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의 삶을 가로막고 있어 여러분을 두렵게 하거나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거든, 오히려 하나님을 더 힘써 알라.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신앙이 더 깊어지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이 더욱더 풍성해지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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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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