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2. 2. 23. 12:48

부드러운 마음을 간구하는 기도

(출 10:15-20)

 

주님,

내가 바로 바로(파라오)입니다.

내 마음의 완강, 완악을 풀어주시고

내 마음을 부드럽게(온유케) 하옵소서.

구원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고

평안과 평화를 이루게 하옵소서.

그것을 믿고

기꺼이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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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2. 23. 12:46

내가 바로 바로(파라오)다

(출애굽기 10:15-20)

 

1. 이런 상상을 해봤다. 천국문이 있고 그 문지기로 구약을 대표로 모세가, 신약을 대표로 베드로가 문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천국문을 통과하려면 모세가 내는 퀴즈와 베드로가 내는 퀴즈를 맞춰야만 한다.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는 그들이 낼 문제를 예상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러면 모세는 어떤 문제를 낼 것이고, 베드로는 어떤 문제를 낼 것 같은가. 아마도, 모세는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본인이 일으킨 열 가지의 재앙이 무엇인지를 순서대로 나열해 보라고 문제를 낼 가능성이 크고, 베드로는 열 두 제자의 이름을 성경에 나오는 순서대로 외워보라는 문제를 낼 가능성이 크다. 모세는 자신이 낸 문제를 맞힌 사람을 칭찬하면서 자신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고, 베드로는 자신이 낸 문제를 맞힌 사람 앞에서 열 두 제자의 이름 중 자기의 이름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는 것에 대해서 강조하며 자랑할 것이다.

 

2. 천국문을 통과할 때 풀어야 하는 문제가 이 정도라면 많은 이들이 어렵지 않게 천국문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식적인 문제를 넘어, 심층적인 질문을 던지면 어떻게 될까? 모세가 이런 문제를 냈다고 생각해 보자. ‘열 가지 재앙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열 가지 재앙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말 해보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천국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열 가지 재앙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해석을 내놓을 것이다. 그 대답이 만족스러우면 천국문을 통과하게 되는 것이고, 만족스럽지 못하면 통과 못하게 된다.

 

3. 가장 훌륭한 해석이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 보아야겠지만, 가장 저급한 해석은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열 가지 재앙은 우리에게 이러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안 들으면 이런 재앙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모세가 이러한 해석을 들으면 이렇게 말한 사람을 천국문에 들이겠는가, 아니면 들이지 않겠는가. 내가 만약 모세라면 천국문에 들이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것은 참으로 저급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폭력의 하나님으로 전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4. ‘하나님 말 안 들으면 이런 재앙을 입을 것!’이라는 해석은 가장 저급한 해석이다. 하나님을 폭력의 하나님으로 전락시키는 말이다. 우리는 누구든지 공포와 불안을 자아내는 사람과 멀리해야 한다. 공포와 불안을 자아내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공포와 불안 가운데 산다. 공포와 불안을 부추기는 자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취하려는 자일 가능성이 크다. 광고들(약장사들)이 다 우리의 공포와 불안을 이용해서 돈을 번다. 우리를 악에 내어주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다. 우리에게 공포와 불안을 가져다주는 일이 혹시 발생하거든, 그것에 휩쓸리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이 우리에겐 더 필요하다.

 

5.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재앙을 겪는다. 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사람은, 그런 때가 언제 자기에게 닥칠지 알지 못한다. 물고기가 잔인한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는 것처럼, 사람들도 갑자기 덮이는 악한 때를 피하지 못한다”(전도서 9:11b-12). 우리는 살면서 죽음, 질병, 인간관계의 손실, 금전적 피해, 자연재해, 전쟁 등의 재앙을 겪는다. 재앙이 닥치는 것은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무력해지고, 그 무력한 실존을 조금이라도 극복해 보고자 신앙을 갖는다. 정말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를 이루게 해주는 어떤 힘이나, 또는 우리를 너무도 괴롭게 하는 어떤 일의 원인적인 힘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차라리 섬기고, 그것으로부터 구원을 얻기 바라는 마음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무속(무당)은 인류가 숨쉬며 살아 있는 한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못 말린다. 권력의지가 있는 사람(정치인들이 무속을 의지하는 것), 성공의지가 있는 사람(‘나의 아저씨’ 고사지는 모습 공개), 무엇이든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간절함을 이루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하게 되어 있다.)

 

6. 간암으로 6년 동안 투병하시던 아버지에게 병원에서 의사가 이제 8개월 밖에 못산다는 선고를 내렸을 때, 아버지가 우리들을 병원으로 불러서 그 말씀을 전하셨다.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으로 경기도 양평에서 암병을 고친다는 기도원에서 몇 달 간 지내기도 하셨다. 매주 금요일 나와 형이 번갈아 가면서 아버지를 양평 기도원에 모시고 갔다. 내가 지금 후회하는 것은 그때 아버지랑 더 열심히 기도할 걸, 그렇지 못한 거다. 이제 8개월 밖에 못산다는 의학적 선고를 받으신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두려우셨을까, 그때보다 철이 좀 든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그때 그 마음을 더 이해하고 함께 집회 참석해서 아버지의 마음에 힘이 되어 드렸어야 하는데, 아버지가 기도원에 들어가 집회 참석하시면서 기도하시는 동안 나는 차 안에서 잘 때가 많았다. 그때는 왜 그렇게 피곤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사실, 그때 기도원 원장이 여자 목사였는데, 솔직히, 사기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그때 잘못 생각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에 초점을 맞췄어야 하는데, 사기치는 것 같은 그 기도원 원장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에 신경이 쓰이다 보니, 아버지의 마음을 좀 더 따스하게 보듬어 드리지 못한 것 같다. (아버지는 주치의 선고대로 8개월 사시다 가셨다.)

 

7. 어떤 병으로 고생을 죽도록 하는 사람은 그 병을 내린다고 생각되는 존재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병을 거두어 가 줄 것을 요청한다. 그 뿐만 아니라 어떤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이 자꾸 우리를 괴롭힌다면, 우리는 그것을 일으키는 힘을 가진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으며 그 존재에게 제물을 바치며 구원을 간구하게 된다. 미신은 나쁜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 인간의 애환이 담긴 소박한 마음이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더 이상 그러한 미신은 많이 물러갔지만, 여전히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미신에 기대며 살기도 한다. 인간은 그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뜻이다.

 

8. 고대근동의 신화적 세계를 모르면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은 이해하기 쉽지 않고, 잘못 해석될 수 있다. 바로 위에서처럼 말이다. 열 가지 재앙을 보면서 ‘하나님 말씀 잘 안 들으면 재앙을 겪게 된다’는 해석처럼 말이다. 그런데 다행히 지금은 고대근동의 신화적 세계관에 대하여 많은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과의 대결이었다는 내용은 많이 알려져 있다. 옛날 사람들이 섬긴 신이라는 것이 사실은 별거 아니다. 간절한 소망이 미신을 만들어 낸다. 애기를 낳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는 여인은 삼신 할머니한테 정성을 들이는 법이다. 조선시대의 양반집 여인이 임신을 했을 때 신발조차도 가지런히 정돈하면서 조심조심 산 것은 출산을 할 때 어려움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아이가 잘못됐을 때 ‘나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인간은 아주 소박하고 연약한 존재이다.

 

9.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실존적으로 해석을 하게 되면, 하나님을 폭군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열 가지 재앙은 본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 재앙을 당하는 애굽의 입장에서는 그처럼 잔인한 폭력이 없다. 애굽의 생명줄이었던 나일강물이 피로 변하는 것은 애굽 사람들의 생명을 끊어 놓는 일과 다르지 않다. 매우 잔인한 재앙이다. 나일강에서 개구리가 올라오는 재앙도 그렇고, 티끌이 이가 되는 재앙, 파리가 가득한 재앙, 우박이 내려 삼과 보리 농사를 망쳐 놓는 재앙, 그리고 공포의 메뚜기 떼가 우박으로 인하여 상하지 않았던 밀과 보리까지 다 먹어버리는 재앙은 그야말로 애굽 사람들의 생명을 끊어 놓는 잔인한 일이다.

 

10. 게다가 세상이 온통 흑암으로 변하는 재앙은 어떤가. 지금이야 캄캄해지면 촛불을 켜든, 비상용 손전등을 켜든, 전기가 들어오면 전등을 켜든 하면 되겠지만, 그 시절 흑암은 공포 그 자체였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밤에 일할 수도 없고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밤은 깜깜했다. 불 끄고 떡을 칼 같이 써신 한석봉 엄마의 솜씨는 실로 신의 경지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깜깜한 흑암을 몰아내는 태양 빛을 사모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당시 사람들에게 폭력 중의 가장 큰 폭력은 태어난 것의 처음 것(장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 일이 발생했을 때,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애곡했다. 비극도 그런 비극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의 이야기를 실존적으로 해석하면 아주 끔찍한 폭력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경을 해석할 때 아주 조심스럽게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연습이 꼭 필요하다. 신학적으로 해석해서 실존적으로 적용해야지, 실존적으로 해석해서 신학적으로 적용하면 아주 큰 모순이 발생한다.

 

11. 한국어로는 ‘뱀’으로 번역했지만, 히브리어의 ‘나하쉬’는 바다 용, 바다 괴물, ‘큰 바다 괴물’을 뜻한다. 고대근동 사람들이 바다로 대표되는 혼란과 무질서의 신비로운 영역에 큰 바다 괴물이 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세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고 애굽의 술사들이 만들어낸 뱀을 모세의 뱀이 잡아먹은 것은 애굽 사람들이 생각했던 큰 바다 괴물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주권과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열 가지 재앙에서 일관되게 하나님께서 그 재앙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나일강에서 애굽 왕 바로의 장자에 이르기까지, 애굽에서 신격화되어 숭배받는 자연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며 “이제까지 네(바로)가 듣지 아니하도다.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7:16-17)에 대한 선포이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신이시다.

 

12. 애굽 사람들에게는 나일강이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에 그들은 나일강을 신처럼 모셨다. 나일강 신의 이름을 하피였다. 그 당시 고대근동의 사람들은 파리 떼 때문에 엄청난 괴로움을 당했다. 파리는 위생의 문제를 일으켰다. 파리 떼가 들끓어 많은 이들이 질병에 시달렸다. 그래서 그들은 파리로부터 구원을 받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파리를 섬겼다. 파리 왕의 이름은 바알세붑(Beelzebub/비엘저법)이었다. 이와 연관된 이야기가 열왕기하 1장에 나온다. 북이스라엘의 왕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서 병들었는데, 아하시야 왕은 자신의 병이 낫겠는지 신탁을 받으러 신하를 이웃 나라 에글론에 보낸다. 그리고 에글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묻는다. “내 병이 낫겠소?” 바알세붑, 파리 대왕한테 가서 자기의 병이 낫겠느냐고 묻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했다. 그때 활동했던 선지자가 엘리야 선지자였다. 엘리야 선지자가 아주 화끈한 사람인데, 열 받아서 아하시야 왕한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왕하 1:6).

 

13. 열 가지 재앙은 여호와 하나님과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의 싸움이었다. 나일강의 신에서부터 메뚜기 떼를 막아 준다는 민(Min) 신, 그리고 태양신 라, 죽음의 신 오시리스, 파라오들의 신 호루스 등, 그들이 믿는 신들은 여호와를 물릴 칠 수 없고 이겨낼 수 없으며 여호와 앞에서 무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집트에서 신의 현현으로, 즉 눈에 보이는 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바로(파라오)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대로 이스라엘을 내보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앙은 신학적인 이야기이고 신앙적인 이야기이다. 폭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재앙을 겪을 까봐, 폭력을 당할까봐 하나님을 믿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밖에 없다는 진리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겠다고 결심해야 하는 것이다.

 

14. 열 가지 재앙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윤동주의 다음 시가 떠오른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15. 윤동주의 <참회록>이라는 시이다. 열 가지 재앙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보이는데, 애굽의 왕 바로가 그이다. 그리고 곧바로 내가 바로 바로(파라오)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바로 바로(파라오)다.” 자신이 섬기는 신들을 무력하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면서도 바로(파라오)는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고 점점 더 강퍅해진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강하고 완악하게 하신 거라고 성경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누군가 나의 마음을 보면서 완강하고 완악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내 마음을 이렇게 완강하고 완악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주님, 내 마음의 완강, 완악을 풀어주시고

내 마음을 부드럽게(온유케) 하옵소서.”

16. 팬데믹 때문에 경제가 어렵고, 전쟁의 소문이 들려오고, 대통령 선거로 인하여 이념갈등과 진영갈등이 심한 이때에, 사람들의 마음은 완강해지고 완악해진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인간은 그렇게 외부의 조건과 환경에 의해서 휩쓸리기 십상이다. 팬데믹 때문에 경제가 힘들어지고 정신적인 공황이 심해지니까 약자를 향한 폭력이 심하게 늘었다. 이 어려운 때에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큰 나라들이 작은 나라를 중간에 끼고 불안을 조성하고 있다. 세상이 점점 더 살기 어렵다 보니, 사람들은 정치가 세상을 구원해 줄 것 인양, 본인이 지지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살기 좋은 세상이 올 거라는 믿음을 관철시키려고 서로 비방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고 있다.

 

17. 어렵고 힘들고 혼란스러운, 이 재앙 같은 시절에, 마음이 휩쓸리면 우리는 열 가지 재앙 이야기에서 완강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사태를 점점 더 힘들게 만드는 바로(파라오)를 만나게 된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이 어디에서 오는지 늘 생각하며, 우리의 마음이 완강해지고 완악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내보내 나를 섬기게 하라.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바로와 같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는다면, 우리는 이 어렵고 힘들고 혼란스러운 재앙 같은 시절에, 더욱더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내 마음의 완강, 완악을 풀어주시고

내 마음을 부드럽게(온유케) 하옵소서.”

 

우리의 부드러운 마음(온유한 마음)이 평안과 평화를 이루게 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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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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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개 넘치는 기독교 인간론]

 

'기개(氣槪)'란 씩씩한 기상과 꿋꿋한 절개를 가리키는 말이다. 기독교의 인간론은 기개를 담고 있다. 정말 그렇다.

 

삼위일체론의 완성(?)에 발판을 놓았던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저서 <성육신에 관하여 On the Incarnation>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로 신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것을 '신화(神化/,theosis)'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이유는 우리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인 존재가 되어 간다.

 

이러한 진술을 단순히 교리적 진술로만 보면 곤란하다. 그러면 '신화' 교리는 참 우스운 교리가 된다. 우습기 전에 이해가 되지 않는, 우리의 일상과는 참 먼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만다. 교리는 존재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이지 박제된 생각이 아니다.

 

아타나시우스는 기독교의 인간론을 참으로 대담하게 진술한 것이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존재라니, 감히 누가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생각하면 가히 웃음이 나오는 진술이다. '에이, 무슨 소리하는거야. 우리가 어떻게 신이 될 수 있어! 장난 치지 마!'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오는 진술이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의 인간론만큼 기개 넘치는 인간론을 찾아보기 힘들다. 신화(theosis)에 대한 인간론을 펼친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이 타락한 세상에, 이 비참한 세상에, 이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고 있다는 뜻이다. 신화만큼 정치적인 진술이 없는 것이다. 실로 기독교는 이러한 기개를 지닌 것이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어렵고, 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인간을 '개 돼지'로 보면서 피지배자들을 비웃으며 권세를 누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불의에 기죽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는 기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 성육신의 교리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아무리 비참하고 불의하더라도 거기에 굴복하거나 기죽지 말아야 한다. 누가 감히 우리의 인간성을 훼손할 수 있으랴. 누가 감히 우리를 '개 돼지' 취급할 수 있으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처럼 되어가는 존재이다. 신적인 존재, 그 고귀한 존재의 품위를 누가 무너뜨릴 수 있으랴.

 

신화(神化)적인 존재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그 어떠한 행위도, 그 어떠한 정치세력도, 그 어떠한 불의도, 우리는 거부한다. 그리고 저항한다. 기개를 저버리면 지는 것이다. 씩씩한 기상과 꿋꿋한 절개를 품고, 인간의 품위를 지켜내기 위하여 무쏘의 뿔처럼 가자.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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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詩論)2022. 2. 14. 16:34

[시론] 허수경의 시 ‘물을 좀 가져다주어요’ – 포기하기엔 너무도 아픈

 

물 좀 가져다주어요

물은 별보다 멀리 있으므로

별보다 먼 곳에 도달해서

물을 마시기에는

아이들의 다리는 아직 작아요

 

ㅡ 허수경의 시 ‘물을 좀 가져다주어요’ 부분,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에 수록

 

허수경의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은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한 인간이 쓰는 反전쟁에 대한 노래”다.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은 그만큼 전쟁의 참상을 알아버렸다는 뜻이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시인은 어떻게 전쟁의 참상을 알게 되었을까. 시집에는 곳곳에 고고학 발굴의 현장 묘사가 담긴 시가 있다. “에이디 2002년 팔월 새벽 여섯 시 삽으로 정방향으로 땅을 자른다, 비씨 2000년경 토기 파편들, 돼지뼈, 염소뼈가 나오고…”(‘시간언덕’ 부분).

 

독일로 건너가 고고학을 공부하며 현장에서 땅을 파면서 시인이 대면한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의 참상이었다. 땅을 파고 들어가다 보면 ‘파괴층’이라는 고고학적 지층의 끝이 나온다고 한다. 한 문명이 끝나는 곳에서 발견되는 마지막 층이 파괴층이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땅을 더 깊게 파고 들어가면 이 파괴층이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지층을 파괴층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거기에는 인류의 전쟁과 살육의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인류는 끊임없이 전쟁을 통해서 서로를 죽이고 죽는 역사를 반복하는 절망의 존재라는 뜻이다.

 

전쟁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또는 최후의 폭력이다. 전쟁은 폭력의 바다라고 부를 수 있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아감벤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전쟁은 궁극적 ‘예외상태’가 발생하는 비극의 시간이다. 정상적인 게 하나도 없는 시간, 인간의 마음도 육체도, 안과 밖으로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는 시간, 무엇보다 살인(남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 정당화되는 시간이다. 전쟁은 그야말로 인간성이 포기 당하는 최고의 절망적인 시간이다.

 

땅을 파내려 가다 발견하는 파괴층을 보면서 시인이 상상하는 것은 그 땅에서 농사를 지었을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그곳에 감자를 심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땅에는 아직 감자의 시간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 결국 전쟁터에 끌려 나가는 군인으로 성장하고 만다. 군인이 되고 싶었던 아이는 없었지만 전쟁은 그 아이들을 모두 군인으로 만들었다. 누가 별보다 멀리 물을 길러 가기에는 아직 연약한 다리를 가진 아이들에게 그러한 폭력을 휘둘렀을까. 물을 마시고 싶었던 아이들에게 누가 칼과 방패를 쥐어 주었을까.

 

넷플릭스에서 얼마 전에 공개된 <지금 우리학교는> 우리 시대의 아이들이 어떤 폭력에 놓여 있는지를 좀비 장르를 통하여 형상화시켜 잘 보여준다. 우리 시대의 전쟁은 총칼을 들고 하는 전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전쟁의 시기와 평화의 시기가 따로 있지 않고 삶 자체가 전쟁터로 변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세상은 누가 만들었는가. 아감벤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 시대는 ‘예외상태’가 일상화되었다. 우리는 파괴층이 일상화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고고학을 공부하면서 파괴층의 반복 순환이 인류의 역사라는 비극적인 진실을 마주하면서도 시인이 희망을 포기하지는 이유는 삶을 포기하기에 우리는 너무도 너무도 아픈 역사를 지녔기 때문이다. 아프기만 한 삶과 역사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너무도 아프기에 우리는 끝까지 희망을 놓을 수 없다. 물은 별보다 멀리 있고 우리의 다리는 연약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별보다 먼 물에 도착하여 물을 마시게 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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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2. 14. 16:32

아는 자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출 5:1-14)

 

주님,

아는 자 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쉬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 우리도 우리 자신을 아는 자가 되게 하시고

상대방을 아는 자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나 자신을 못살게 구는 사람이 아니라 쉬게 하는 사람

상대방을 못살게 구는 사람이 아니라 쉬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중

‘내가 너를 안다’고 하시는 것보다 따뜻한 말씀이 없는 것처럼

우리도 아는 자가 되어

따스한 마음을 나누는

구원받은 주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아시기에

우리를 쉬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그곳에서 죽고 장사되어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의 영원한 안식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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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2. 14. 16:30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야다와 로야다)

출애굽기 5:1-14

 

1. 모세에게는 형 아론이 있었다. 출애굽기 7장에 보면 이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세 살인 것으로 나온다.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출 7:7). 출애굽기가 모세를 주연으로 해서 기록된 책이다 보니 아론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모세에게 아론은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아론이 없었다면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세의 부르심은 아론의 부르심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바로 앞에 서게 된다.

 

2.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이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1절). ‘절기를 지킬 것이다’는 ‘순례의 축제를 거행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순례는 신앙심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떠나는 여행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사랑하기 위해서 순례를 떠나야 한다. 주일에 교회에 오는 것은 일종의 순례이다. 교회 올 때마다 순례길을 간다고 생각하면 마음 가짐이 달라질 것이다. 자신의 일상에 거룩한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것은 우리의 삶에 큰 활력을 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야만 순례가 아니다. 일상에서 순례하는 일을 잘 해야 특별한 순례도 더 큰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3. 그런데, 이러한 요청에 대한 이집트 왕의 반응은 너무도 냉담하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내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는 ‘로 야다티 에트-아도나이’라고 히브리어로 표현되어 있다. 로’는 히브리어에서 영어의 ‘not’과 같이 부정어이다. ‘암미’는 ‘내 백성’이라는 뜻이고,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호세아의 셋째 아들 이름이 ‘로암미’였다. 호세아에게 아들 이름을 ‘로암미’라고 지으라고 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으셨다. (이스르엘, 로루하마(긍휼히 여기지 않는다), 로암미)

 

4. 히브리어에서 ‘야다’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야다’는 ‘안다’라는 뜻이다. ‘야다’에 ‘로’를 붙이면, ‘알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집트 왕은 지금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집트 왕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전혀 없는 것일까? ‘알지 못한다’라고 할 때,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는 뜻일까? 지금 이집트 왕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백성을 보내라’는 말씀을 하신 것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안다’라는 것은 어떠한 일이 발생하게 하거나 또는 발생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는 것 같다.

 

5. 이렇게 다시 물어보자.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가? 안다는 것은 대상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다. 히브리어의 ‘야다’는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격적’이라는 말은 ‘정서적’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누군가 나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었다는 것은 그가 나를 정서적으로 대해주었다는 뜻이다.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는 뜻이다. 관계에서 정서를 공유하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만약 상대방과 정서를 공유하지 못하면 서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알아간다고 하는 것,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정서를 공유하게 된다는 뜻이다.

 

6. 우리는 TV를 바보상자라고 부르는데, TV가 바보상자인 이유는 TV가 바보 같기 때문이 아니라 TV를 보는 우리들을 바보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 중에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가장 큰 것은 우리가 TV에 나오는 사람을 ‘안다’라고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대중매체의 힘이다. TV에 자주 나오는 사람일수록 우리는 그를 ‘잘 안다’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이나 그가 하는 행동에 영향을 받는다. 그가 치킨을 먹고 싶다고 하면 치킨 사서 먹고, 그가 이런 상품을 가지고 싶다고 하면 우리는 그 상품을 산다. 정서가 일방적으로 주입된다. 그야말로 우리는 바보가 된다.

 

7. 이집트 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정서를 전혀 공유하지 못한다. 하나님과 정서를 공유하지 못하니까, 이스라엘 백성과도 정서를 공유하지 못한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에 대한 이야기도 전하여 준다. 그러나 그들과 정서를 전혀 공유하지 못하는 이집트 왕은 모세와 아론의 이야기를 듣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을 한다. 이들이 잠시 노역을 멈추고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집트 왕은 더 무거운 노역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떠맡긴다.

 

8.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던 일은 벽돌을 생산하는 일이었는데 벽돌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는 이집트 정부에서 제공했다. 그런데, 이집트 왕은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고 벽돌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마련하여 벽돌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렇다고 벽돌 생산량을 줄여준 것이 아니었다. 똑 같은 생산량을 유지하면서 벽돌 만드는 재료까지 스스로 조달하라는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역을 몇 갑절 더 힘들게 만들었다.

 

9. 이 과정에서 정말 큰 문제가 발생한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집트 왕에게 전달한 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역이 더 심해진 것을 두고, 모세와 아론을 심하게 원망한다. “너희가 우리는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5장 21절). 너희 때문에 우리가 미움을 받고 죽게 생겼어!

 

10.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이렇게 큰 차이가 존재한다. 안다는 것은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다. 정서를 공유하지 못하면 상대방을 아는 게 아니다. 우리는 객관적인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것을 ‘안다’라고 잘못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객관을 뒤집으면 관객이 된다. 객관적인 지식은 그저 관객으로 서 있겠다는 뜻 밖에는 안 된다. 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주관적으로 개입하는 것, 대상과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고, 그렇다 보니, 정치적 입장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상대방과 같은 편이 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그래서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알게 되면, 정서를 나누게 되면, 가만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시대 가장 편만한 정서가 무관심이다. 알고 싶지 않아.

 

11. 우리는 출애굽기 5장에서 전개되는 이집트 왕과 모세(와 아론) 사이의 첫 대면에서 발생한 사건을 통해서 알게 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점이 그것이다. 아는 자는 ‘쉬게 하는 자’이지만, 모르는 자는 ‘쉬지 못하게 하는 자’이다. 아는 자는 상대방과 정서를 공유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쉬게 해 준다. 그러나 모르는 자는 상대방과 정서를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쉬지 못하게 한다.

 

12. 이집트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정서적 교감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히브리 사람들을 향해 계속 이렇게 외치기만 했다.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면서 그는 히브리 사람들을 쉬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정서적 교감을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탄식과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님은 그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모세와 아론을 보내 그들에게 ‘쉼’을 주려고 하신다. 이렇게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행동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13.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안식을 주려 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부터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나 자신과 충분한 정서적 교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쉬게 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구원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안식(쉼)에 들이신 것처럼,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쉼을 주는 것이다.

 

14.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쉬게 하신다는 것을 아는 자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에게 얻은 쉼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나도 그들을 쉬게 한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구원받은 사람은 상대방에게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쉬게 해주자. 쉬게 해주자.’ 모르는 자가 되지 말고, 아는 자가 되라.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쉼’을 선물로 주자. 초콜릿이나 케익, 또는 꽃보다 더 의미 있고 달콤한 선물이 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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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2. 9. 11:27

더 큰 이야기에 참여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출 4:10-17)

 

주님,

우리는 참으로 작은 존재이지만

주님의 큰 존재와 주님의 큰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작은 존재를 벗어나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깨알같이 분리시키고 고립시키는 이 시대에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

믿음은 고립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립을 깨고 우리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증언하며

우리의 작은 존재를 그 어느 존재보다 크신 하나님에게 연결시키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내 작은 존재가, 내 작은 이야기가

믿음을 통해 더 큰 존재에, 더 큰 이야기에 참여하게 되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더 자유로워지고 의미 있는 인생이 된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주님의 큰 이야기로 부르시는 주님,

그 이야기로 선뜻 참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주님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고 참된 삶의 의미를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기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

주님,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오니

우리를 불러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참 자유를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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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2. 9. 11:24

큰 이야기, 작은 인간, 그리고 믿음

(출애굽기 4:10-17)
 

1. 출애굽기 3장과 4장은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을 담고 있다. 장장 두 장에 걸쳐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부르심(calling)’을 그냥 쉽게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타지 않는 떨기나무로 가까이 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매우 신비한 이야기가 부르심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 후에 전개되는 부르심의 이야기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타지 않는 떨기나무 장면보다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부분은 그 이후에 전개되는 모세와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2.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풍기는 분위기는 4장 14절이 말해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the anger of the Lord burned against Moses, NASB)”. 이 구절을 보면 모세가 ‘분노 유발자’인 것을 알 수 있다. 부르심의 이야기는 소위 말해 ‘은혜롭게’ 진행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모세는 다섯 번에 걸쳐 거절을 한다. 모세가 하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거절을 하니까 결국 하나님이 모세를 향하여 화를 내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 모세 입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절의 의사를 표시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본인이 아무리 이집트 왕궁에서 자란 왕자라고 하더라도 이집트를 떠나온 지도 오래됐고, 그곳을 떠나올 때 좋게 떠나 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집트라는 거대한 국가와 파라오(바로)라고 하는 막강한 군주와의 한 판 대결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고, 본인을 별로 좋게 인식하고 있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설득시켜 이끌고 나와야 하는 상황 속에서 그 부르심이 마음에 내킬 리 없다. 한 마디로,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이 일을 하다가 내가 죽겠구나.”

 

4. 아무리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생명에 위협이 되는 일을 선뜻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 하나님의 정체성의 문제를 질문하고, 자신이 없고 능력이 없다는 핑계 등을 대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거부 의사를 계속 밝힌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모세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여 간구합니다. 그 일을 할 만한 다른 사람을 보내십시오. Please, Lord, now send the message by whomever You will”(4:13).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인간적인 모세의 모습을 볼 뿐더러,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5. 거대서사(Meta Narrative/메타 내러티브)’라는 말이 있다. 요즘엔 ‘메타 내러티브’라는 말보다 ‘메타버스(metaverse)’라는 말이 더 유명해졌다. 예전에는 인터넷 속의 세상을 ‘가상공간’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인터넷 속의 세상을 가상공간이라고 부르기에는 인터넷 속의 세상이 너무도 실재적인 공간으로 성장을 했고 현실 세계 못지 않게 사람들이 그 세계 속에서 실제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메타버스’라는 말을 쓴다.

 

6. 메타 내러티브는 큰 이야기를 뜻한다. 인간 존재는 자신보다 큰 존재를 만나면 움츠러든다. 인간 존재는 자신의 이야기(밥 하고 빨래하는 삶을 살다가)보다 큰 이야기(어떤 큰 사건에 연루되는 것)를 만나면 움츠러든다. 자신보다 큰 존재에, 자신의 이야기보다 큰 이야기에 마음을 열고 그 존재와 그리고 그 이야기와 연결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모세의 모습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모세는 자신보다 큰 존재인 하나님 앞에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이야기보다 큰 하나님의 이야기 앞에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7. 3장과 4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세의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큰 이야기(메타 내러티브)’이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큰 이야기는 창조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우리 인간의 존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에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자연에게도 의존되어 있고 인간 간에도 의존되어 있는 존재이다. 우리는 하도 ‘자율성’(autonomy/근대에 형성된 ‘자율성’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하나님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 사회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는 결과를 가져왔다.)을 강조하는 시대에 살다 보니 ‘의존’이라는 말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의존’은 자유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서 오히려 하나님과 자연과 인간 사이의 연결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8. 창세기가 보여주는 큰 이야기는 형이상학적(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면 출애굽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큰 이야기는 매우 역사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관찰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출애굽기에서 제시되고 있는 큰 이야기는 3장과 4장에서 하나님의 입을 통해 모세에게 ‘계획’이라는 형태로 전달된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땅… 의 지방으로 데려가려 하노라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7-10). 출애굽기는 이 계획이 현실화되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9. 성경이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하나님의 큰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신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큰 이야기는 아주 근본적인 역사의 본질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유’를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안겨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부터의 해방과 변화를 일구시는 창조의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출애굽기는 분명히 이러한 큰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10.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이러한 자유를 성취하기에는 너무도 작은 존재라는 것이다. 애굽에서 하층민으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가 없어 고통스러웠다. 그들은 애굽이라는 큰 나라와 파라오라고 하는 절대적 군주의 폭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고된 노동을 하면서 처절한 삶을 살았다. 자신들의 힘으로 해방과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너무도 역부족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모세에게 부르심이 임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모세도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 일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이 일을 하다가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완강하게 거부 의사를 밝힌다.

 

11.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 이야기일 수 있다. 우리는 대개 신앙을 가지면서 우리의 작은 존재가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고 우리의 작은 이야기가 형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신앙을 갖는다. 그리고 우리는 신앙을 가지면서 우리의 작은 존재에, 그리고 우리의 작은 이야기에 어떠한 균열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다. 우리는 이것을 평안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산다.

 

12. 그런데 출애굽기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그러한 소박한 일상을 넘어서는 일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 이제 애굽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모세는 작은 존재로, 작은 이야기 속에서 살고 있다. 양을 치면서, 가족들 돌보면서, 특별한 일이 아무도 없는, 그런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모세는 그렇게 살면서 애굽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족 이스라엘은 더 이상 자신과는 상관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모세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이스라엘이 받고 있는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고통은 여전했다. 모세는 그들의 고통을 남몰라라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에 여전히 신경 쓰고 계셨다.

 

13.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 장면은 신앙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신앙은 그냥 작은 존재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작은 이야기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이야기를 자기 바깥의 존재와 이야기로 연결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이야기는 우리가 인식을 하든지 못하든지 존재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계신다. “나는 나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면 존재하시고, 인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 이것은 다른 말로, 우리가 듣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께서는 쉴 새 없이 자신의 존재로, 자신의 이야기로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God is calling us)는 뜻이다.

 

14.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더 삭막하고 외로운 곳이 되어가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과 인간이 연결되지 못하게 하고 철저하게 고립시키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이 연결되는 것을 막고 고립시키는데, 인간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벗어나서 내 바깥의 존재에, 나의 작은 존재보다 더 큰 존재에, 나의 작은 이야기보다 더 큰 이야기에 우리 자신을 연결시키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 (소비사회라는 게 그런 거다. 이거 없으면 못살 것 같게 만들어서 존재하기 위해 엄청난 것들을 각 개인이 사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연결되어 있으면 불필요한 것들이 정말 많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점점 더 살기 힘들다고, 사는 게 고통스럽다고, 삶이 왜 이렇게 외롭냐고, 아우성 가운데, 결국 혼자서 요양원에서 또는 노인 아파트에서 쓸쓸하게 죽어간다. 

 

15. 믿음이란 무엇인가? 모세가 보여주고 있듯이, 믿음이란 결국 나의 작은 존재를, 나의 작은 이야기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큰 존재에, 하나님의 큰 이야기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작은 존재와 이야기에 균열이 생기고 붕괴가 일어나 우리의 작은 존재와 이야기는 새롭게 정의되고 새롭게 창조되는 흥미진진하고 신비로운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창조고 구원이다. 그렇게 우리의 작은 인생은 확장되고, 해방과 변화를 경험하게 되며 우리 인생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인생에까지 해방과 변화를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이다.

 

16. 너무 자기 자신 안에만 갇혀 있지 말라. 너무 자기 자신의 작은 이야기에만 머물러 있지 말라. 내 바깥의 존재에, 내 바깥의 이야기에 참여하려고 노력하라. 특별히 전염병이 돌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의 삶은 너무도 움츠러들었다. 조심하는 것과 연결을 끊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을 더 큰 이야기인 팬데믹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방역 차원에서 교회 문도 닫고 예배 온라인으로 드리고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일상을 팬데믹을 넘어선 더 큰 이야기에 참여시켜야 할 때가 오기도 했다.)이 어려운 시절,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며, 우리는 고립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서로의 삶에 참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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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2. 1. 11:48

존재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간구하는 기도

(출 3:1-12)

 

주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이 피곤한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내어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가까이 오지 말라, 신발을 벗으라, 고 말씀하시며

더 이상 아무것도 증명할 것이 없다고,

모세를 주님의 안식으로 초청해 주신 것을 보면서

우리도 그러한 안식으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뭔가 하지 않으면

존재를 증명하지 않으면 불안한 이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느라 참으로 지쳐 있습니다.

뭔가를 해야 한다고

존재를 증명해 보라고, 그렇지 않으면 너를 사랑할 수 없다고

나도 모르게 다그치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서

사랑은 없고 상대방을 향한 정죄만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주님,

사명이 없어도 괜찮다고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다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지만

우리는 왜 이렇게 사명감에 불타서 살아가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라

실적을 부추기는 이 시대가 우리에게 부과하는 짐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듬고 사랑하고 살아가게 하시고

너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듬고 사랑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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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2. 1. 11:45

사명이 없어도 괜찮아

(출 3:1-12)

 

1. 몇 번을 봐도 신비한 장면이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는 일이 정말 가능한가? 잘 믿기지 않는 장면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우리 신앙의 목표이기도 하고 인생에 있어 가장 영광된 순간 아닐까 싶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장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그리고 가장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타지 않는 떨기나무로 가까이 다가서려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2. 우리는 이 장면에서 우리의 부족함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기 십상이다. 다른 말로,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장면을 이렇게 읽어내는 것도 우리에게 큰 유익이 있으나, 때로 이러한 해석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지 못하고 웅크리게 하기도 한다. 죄, 부족함이라는 말은 우리를 겸손한 존재로 만들기 보다 위험한 존재로 만든다. 우리는 어차피 그런 존재야, 라는 자포자기의 마음을 가진 존재로 말이다.

 

3. “가까이 오지 말라, 신발을 벗으라”는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는 것일까? 나는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절규가 들린다. “주님, 우리는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쉼이 없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쉬지 못하며 산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계속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존재를 증명하는 일은 피곤한 일이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기 바라는 것,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서려는 것, 그래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 쉼은 묘연한 것이다.

 

4.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와 자신을 증명하려는 모세를 멈춰 세우신다. 그리고 신발을 벗기신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증명해야 할 것이 더 이상 없다. 불필요하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 필요도 없다. 있는 그 자리에 있어도 하나님은 모세를 아신다. 하나님 앞에서는 신발까지도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더 이상 가야 할 길이 없으니 신발을 신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 쉼, 안식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고단한 모세의 인생에 쉼을 주신다.

 

5. 우리가 얼마나 피곤한 인생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증명하느라 애쓰며 산다. 모세가 그랬다. 그는 이집트의 왕자로 왕궁에 살면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느라 애쓰며 살았다. 그러다가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게다가 우리는 나 자신을 증명하느라 애를 쓰는 것만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너 자신을 나에게 증명해 보라고 요구하며 산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너무 피곤하게 만드는 세상에 살고 있다. 존재가 증명되지 않으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세상. 말 그대로 피로사회다.

 

6. 자신을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했던 이집트 왕궁에서의 삶과는 달리 미디안 광야에서의 삶은 모세에게 훨씬 더 가벼웠을 것이다. 뭔가를 증명해야 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채우는 일이다. 뭔가 있어야 보여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뭔가를 증명할 필요 없는 일은 자기 자신을 비우는 일이다. 비워냈기 때문에 특별히 보여줄 게 없다. 그렇게 모세의 시간은 흘러간다. 출애굽기 2장과 3장 사이에는 큰 시간의 간격이 존재한다. 그러던 어느 날,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모세의 삶 속으로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사건이 발생한다.

 

7. 평소와는 달리 모세는 광야 서쪽으로 양 떼를 몰고 갔다. 우리말로는 ‘광야 서쪽’이라고 번역했지만, 히브리어는 ‘광야 서쪽’이 단순히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모세가 평소에 다녔던 길이 아니라 미디안 지경을 벗어난 새롭고 낯선 먼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건이 발생할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말이 ‘광야 서쪽(아하르 하미드바르)’인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이야기가 진행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정도의 긴장감을 뜻하는 말이 될 것이다.

 

8. 광야 서쪽으로 가서 모세가 도달한 곳은 ‘하나님의 산 호렙’이다. ‘호렙’은 어원상 ‘폐허’ 또는 ‘흙더미’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 호렙산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아무것도 없는 곳,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런 것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것은 너무도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이러하신 분이라는 것은 성경 곳곳에 드러나 있는데, 특별히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야기가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는 아무것도 아닌 여인이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기 자신을 일컬어 ‘비천한 종’이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는 곳,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그 소식은 천사에 의하여 아무것도 아닌 자들인 목자들에게 먼저 알려졌다.

 

9.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곳, 또는 아무것도 아닌 것(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고, 모세가 아무것도 없는 곳(호렙)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안다면, 큰 것, 화려한 것, 놀라운 것에만 마음을 쓸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향해서도 늘 마음을 쓰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작은 것, 누추한 것, 별볼일 업는 것을 업신여기지 말라. 오히려 하나님은 그러한 것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10. 이런 생각을 해 본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빛나는 도시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면 모세는 그것을 알아보았을까. 화려한 네온사인에 비하면 불타는 떨기나무는 초라하다. 아무것도 없는 호렙이니 불타는 떨기나무가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기독교 영성은 비워내기에 집중했던 것 같다.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느라 성전의 장식이 화려해질 때 오히려 하나님은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화려한 성전을 벗어나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나간 은둔 수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대표적인 인물이 세례 요한 아닌가. 요한복음에 보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가서 정체를 물었을 때, 요한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 1:23).

 

11.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은 이집트 왕궁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광야였다. 이집트 왕궁에 있었을 때 모세는 나름대로 ‘사명감’이 넘쳤었다. 동족 이스라엘의 아픔이 눈에 들어왔고,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동족의 아픔을 해결해 보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였다. 사명감없이 어떻게 모세가 사람(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 다툼을 향한 그의 개입은 우발적인 게 아니라 계획적이었다. 그런데 모세는 바로 그 사명감 때문에 이집트 왕궁에서 쫓겨나 미디안 광야에서 나그네 신세가 되었다. 이제 모세에게는 아무런 사명도 없다. 그냥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떼들을 돌보는 평범한 목동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12. 우리는 때로 왕궁에 있었던 모세처럼 사명 콤플렉스에 빠지곤 한다. 한 때 한국교회에서는 ‘사명 선언서 쓰기’ 붐이 인 적 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릭 워렌 목사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래서 그때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명 찾아 삼만리를 떠나야 했다. 사명은 좋은 것이다. 사명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사나. 그런데 문제는 사명이 없으면 마치 인간이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교회가 아닌 것처럼, 사명 콤플렉스에 빠져 사명만 있고 삶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데 있다.

 

13. 사명에 불타 살았던 왕궁 시절과 사명 없이 살았던 광야 시절 둘 중에서 모세에게 어느 시절이 더 행복했을까? 모세의 왕궁 시절은 모세에게 사명만 있고 삶은 없는 시절이었다. 사명 때문에 자기의 삶을 잃어버린 시절이었다. 그런데, 모세의 광야 시절은 모세에게 사명은 없지만 삶은 있는 시절이었다. 사명만 있고 삶은 없는 시절과 사명은 없지만 삶이 있는 시절 중 어느 시절이 더 행복할까? 너무도 자명하지 않는가. 사명은 없지만 삶이 있었던 광야 시절이 더 행복했다.

 

14.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명이 없어도 괜찮다. 사명 때문에 삶을 포기하지 말라.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사명보다 삶이 중요하다. 모세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가르쳐준다. 삶보다 사명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세의 왕궁 시절은 모세에게 비참한 결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사명은 없었지만 그냥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았던 모세의 광야 시절은 모세에게 영광을 안겨주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날, 모세는 아무것도 없는 곳 호렙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사명감에 불타고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그냥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찾아오신 것이다.

 

15. 우리는 본문에서 많이 성장한 모세를 만난다.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밝히 드러내신다. 계시의 순간이다. 감추어진 일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애굽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그곳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겠다는 구원 계획을 밝히신다. 그리고 바로 ‘너 모세’를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모세였다면, 그 말을 들은 즉시, ‘아멘’하면서 그 일을 감당하겠다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한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1절).

 

16. 내가 누구이기에. 미 아노키. Who am I? 마음이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대답이다. 하나님에게 대하여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성숙한 모습이다. 모세는 왕궁에서 살면서 어쩌면 이 질문을 한 번도 진지하게 던져보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모세는 이제 광야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호렙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모세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비워낸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것을 겸손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민수기 12장 3장에서는 모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17. 요즘의 교회를 보면 중세의 신앙으로 회귀한 듯할 때가 많다. 신앙은 삶인데, 어느덧 신앙이 사명으로 뒤바뀌어 있는 듯하다. 삶은 없고 사명만 있다. 공덕을 쌓아서 천국에 들어가려 했던 중세의 신앙인들처럼 우리 시대의 신앙인들은 사명을 성취하여 천국에 들어가려는 듯하다. 사명은 우리 시대의 공덕이 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공덕을 쌓기 위해 성물을 모으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선행이 유행했다. 중세의 거지들은 본인들을 통해 사람들이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거라며 자부심을 가졌고, 그래서 직업 거지들까지 생겨나기도 했다. 공덕을 쌓아서 천국에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은 공덕을 쌓을 거리가 필요했기에 조작된 성물을 사들이거나 거지들을 일부러 방치해 두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삶은 없고 공덕만 존재하는 상황인 것이다.

 

18. 공덕에 사로잡히면 삶이 눈에 안 들어온다. 사명에 사로잡히면 삶이 눈에 안 들어온다. 사명에 사로잡히면 상대방의 삶은 눈에 안 들어오고 그들의 죄나 그들이 나와 같지 아니한 것만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사명에 사로잡힌 사람은 상대방에게 무례하게 굴게 되기 십상이다. 모세가 바로 그랬다. 상대방의 삶이 들어온 게 아니라 그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만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들의 잘못에 개입하려다가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라며 저항을 받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부모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자식을 대하면 자식의 삶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식이 잘못하고 있는 것만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부모는 자식을 훈육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모세처럼 자식을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대하게 된다.

 

19. 사명이 아니라 삶이 먼저다. 미디안 광야에서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찾아오신다. 신학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는지, 아니면 이 세상에 오셔서 살다 보니 십자가를 지게 되셨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비슷한 논쟁이다) 우리는 신앙고백 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한다. 이 고백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신앙고백은 발생한 일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라기 보다는 이 세상에 오셔서 살다 보니 십자가를 지게 되신 것이다. 삶이 먼저이지 사명이 먼저가 아니라는 뜻이다.

 

20. 사명이 없어도 괜찮다는 말은 사명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사명은 삶 속에서 하나님과 사귀어 살다 보면 그 사랑 안에서 신비한 방식으로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나에게 임하는 삶의 한 형태이지, 삶과 사명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무슨 사명을 받은 거지, 나는 무슨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지, 라고 하면서 사명을 받지 못한 삶인 것 같아서, 또는 사명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힘들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명은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사명자로 사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사는 것이다.

 

21. 삶은 없고 사명만 있는 자는 왕궁의 모세처럼 얼마 가지 못해 무너진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를 성찰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가는 자는 어느 날 사명이 주어지면 그 사명을 잘 감당한다. 삶과 사명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명이 없어도 괜찮다. 사명을 통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증명하라고 말하지 않으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모두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주님의 품이 너무 좋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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