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2022. 2. 15. 09:34

[시론] 허수경의 시 ‘물을 좀 가져다주어요’ – 포기하기엔 너무도 아픈

 

물 좀 가져다주어요

물은 별보다 멀리 있으므로

별보다 먼 곳에 도달해서

물을 마시기에는

아이들의 다리는 아직 작아요

 

ㅡ 허수경의 시 ‘물을 좀 가져다주어요’ 부분,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에 수록

 

허수경의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은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한 인간이 쓰는 反전쟁에 대한 노래”다.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은 그만큼 전쟁의 참상을 알아버렸다는 뜻이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시인은 어떻게 전쟁의 참상을 알게 되었을까. 시집에는 곳곳에 고고학 발굴의 현장 묘사가 담긴 시가 있다. “에이디 2002년 팔월 새벽 여섯 시 삽으로 정방향으로 땅을 자른다, 비씨 2000년경 토기 파편들, 돼지뼈, 염소뼈가 나오고…”(‘시간언덕’ 부분).

 

독일로 건너가 고고학을 공부하며 현장에서 땅을 파면서 시인이 대면한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의 참상이었다. 땅을 파고 들어가다 보면 ‘파괴층’이라는 고고학적 지층의 끝이 나온다고 한다. 한 문명이 끝나는 곳에서 발견되는 마지막 층이 파괴층이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땅을 더 깊게 파고 들어가면 이 파괴층이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지층을 파괴층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거기에는 인류의 전쟁과 살육의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인류는 끊임없이 전쟁을 통해서 서로를 죽이고 죽는 역사를 반복하는 절망의 존재라는 뜻이다.

 

전쟁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또는 최후의 폭력이다. 전쟁은 폭력의 바다라고 부를 수 있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아감벤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전쟁은 궁극적 ‘예외상태’가 발생하는 비극의 시간이다. 정상적인 게 하나도 없는 시간, 인간의 마음도 육체도, 안과 밖으로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는 시간, 무엇보다 살인(남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 정당화되는 시간이다. 전쟁은 그야말로 인간성이 포기 당하는 최고의 절망적인 시간이다.

 

땅을 파내려 가다 발견하는 파괴층을 보면서 시인이 상상하는 것은 그 땅에서 농사를 지었을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그곳에 감자를 심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땅에는 아직 감자의 시간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 결국 전쟁터에 끌려 나가는 군인으로 성장하고 만다. 군인이 되고 싶었던 아이는 없었지만 전쟁은 그 아이들을 모두 군인으로 만들었다. 누가 별보다 멀리 물을 길러 가기에는 아직 연약한 다리를 가진 아이들에게 그러한 폭력을 휘둘렀을까. 물을 마시고 싶었던 아이들에게 누가 칼과 방패를 쥐어 주었을까.

 

넷플릭스에서 얼마 전에 공개된 <지금 우리학교는> 우리 시대의 아이들이 어떤 폭력에 놓여 있는지를 좀비 장르를 통하여 형상화시켜 잘 보여준다. 우리 시대의 전쟁은 총칼을 들고 하는 전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전쟁의 시기와 평화의 시기가 따로 있지 않고 삶 자체가 전쟁터로 변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세상은 누가 만들었는가. 아감벤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 시대는 ‘예외상태’가 일상화되었다. 우리는 파괴층이 일상화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고고학을 공부하면서 파괴층의 반복 순환이 인류의 역사라는 비극적인 진실을 마주하면서도 시인이 희망을 포기하지는 이유는 삶을 포기하기에 우리는 너무도 너무도 아픈 역사를 지녔기 때문이다. 아프기만 한 삶과 역사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너무도 아프기에 우리는 끝까지 희망을 놓을 수 없다. 물은 별보다 멀리 있고 우리의 다리는 연약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별보다 먼 물에 도착하여 물을 마시게 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2. 15. 09:32

아는 자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출 5:1-14)

 

주님,

아는 자 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쉬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 우리도 우리 자신을 아는 자가 되게 하시고

상대방을 아는 자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나 자신을 못살게 구는 사람이 아니라 쉬게 하는 사람

상대방을 못살게 구는 사람이 아니라 쉬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중

‘내가 너를 안다’고 하시는 것보다 따뜻한 말씀이 없는 것처럼

우리도 아는 자가 되어

따스한 마음을 나누는

구원받은 주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아시기에

우리를 쉬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그곳에서 죽고 장사되어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의 영원한 안식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2. 15. 09:30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야다와 로야다)

출애굽기 5:1-14

 

1. 모세에게는 형 아론이 있었다. 출애굽기 7장에 보면 이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세 살인 것으로 나온다.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출 7:7). 출애굽기가 모세를 주연으로 해서 기록된 책이다 보니 아론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모세에게 아론은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아론이 없었다면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세의 부르심은 아론의 부르심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바로 앞에 서게 된다.

 

2.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이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1절). ‘절기를 지킬 것이다’는 ‘순례의 축제를 거행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순례는 신앙심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떠나는 여행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사랑하기 위해서 순례를 떠나야 한다. 주일에 교회에 오는 것은 일종의 순례이다. 교회 올 때마다 순례길을 간다고 생각하면 마음 가짐이 달라질 것이다. 자신의 일상에 거룩한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것은 우리의 삶에 큰 활력을 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야만 순례가 아니다. 일상에서 순례하는 일을 잘 해야 특별한 순례도 더 큰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3. 그런데, 이러한 요청에 대한 이집트 왕의 반응은 너무도 냉담하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내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는 ‘로 야다티 에트-아도나이’라고 히브리어로 표현되어 있다. 로’는 히브리어에서 영어의 ‘not’과 같이 부정어이다. ‘암미’는 ‘내 백성’이라는 뜻이고,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호세아의 셋째 아들 이름이 ‘로암미’였다. 호세아에게 아들 이름을 ‘로암미’라고 지으라고 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으셨다. (이스르엘, 로루하마(긍휼히 여기지 않는다), 로암미)

 

4. 히브리어에서 ‘야다’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야다’는 ‘안다’라는 뜻이다. ‘야다’에 ‘로’를 붙이면, ‘알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집트 왕은 지금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집트 왕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전혀 없는 것일까? ‘알지 못한다’라고 할 때,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는 뜻일까? 지금 이집트 왕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백성을 보내라’는 말씀을 하신 것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안다’라는 것은 어떠한 일이 발생하게 하거나 또는 발생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는 것 같다.

 

5. 이렇게 다시 물어보자.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가? 안다는 것은 대상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다. 히브리어의 ‘야다’는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격적’이라는 말은 ‘정서적’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누군가 나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었다는 것은 그가 나를 정서적으로 대해주었다는 뜻이다.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는 뜻이다. 관계에서 정서를 공유하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만약 상대방과 정서를 공유하지 못하면 서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알아간다고 하는 것,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정서를 공유하게 된다는 뜻이다.

 

6. 우리는 TV를 바보상자라고 부르는데, TV가 바보상자인 이유는 TV가 바보 같기 때문이 아니라 TV를 보는 우리들을 바보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 중에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가장 큰 것은 우리가 TV에 나오는 사람을 ‘안다’라고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대중매체의 힘이다. TV에 자주 나오는 사람일수록 우리는 그를 ‘잘 안다’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이나 그가 하는 행동에 영향을 받는다. 그가 치킨을 먹고 싶다고 하면 치킨 사서 먹고, 그가 이런 상품을 가지고 싶다고 하면 우리는 그 상품을 산다. 정서가 일방적으로 주입된다. 그야말로 우리는 바보가 된다.

 

7. 이집트 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정서를 전혀 공유하지 못한다. 하나님과 정서를 공유하지 못하니까, 이스라엘 백성과도 정서를 공유하지 못한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에 대한 이야기도 전하여 준다. 그러나 그들과 정서를 전혀 공유하지 못하는 이집트 왕은 모세와 아론의 이야기를 듣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을 한다. 이들이 잠시 노역을 멈추고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집트 왕은 더 무거운 노역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떠맡긴다.

 

8.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던 일은 벽돌을 생산하는 일이었는데 벽돌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는 이집트 정부에서 제공했다. 그런데, 이집트 왕은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고 벽돌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마련하여 벽돌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렇다고 벽돌 생산량을 줄여준 것이 아니었다. 똑 같은 생산량을 유지하면서 벽돌 만드는 재료까지 스스로 조달하라는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역을 몇 갑절 더 힘들게 만들었다.

 

9. 이 과정에서 정말 큰 문제가 발생한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집트 왕에게 전달한 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역이 더 심해진 것을 두고, 모세와 아론을 심하게 원망한다. “너희가 우리는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5장 21절). 너희 때문에 우리가 미움을 받고 죽게 생겼어!

 

10.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이렇게 큰 차이가 존재한다. 안다는 것은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다. 정서를 공유하지 못하면 상대방을 아는 게 아니다. 우리는 객관적인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것을 ‘안다’라고 잘못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객관을 뒤집으면 관객이 된다. 객관적인 지식은 그저 관객으로 서 있겠다는 뜻 밖에는 안 된다. 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주관적으로 개입하는 것, 대상과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고, 그렇다 보니, 정치적 입장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상대방과 같은 편이 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그래서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알게 되면, 정서를 나누게 되면, 가만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시대 가장 편만한 정서가 무관심이다. 알고 싶지 않아.

 

11. 우리는 출애굽기 5장에서 전개되는 이집트 왕과 모세(와 아론) 사이의 첫 대면에서 발생한 사건을 통해서 알게 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점이 그것이다. 아는 자는 ‘쉬게 하는 자’이지만, 모르는 자는 ‘쉬지 못하게 하는 자’이다. 아는 자는 상대방과 정서를 공유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쉬게 해 준다. 그러나 모르는 자는 상대방과 정서를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쉬지 못하게 한다.

 

12. 이집트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정서적 교감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히브리 사람들을 향해 계속 이렇게 외치기만 했다.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면서 그는 히브리 사람들을 쉬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정서적 교감을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탄식과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님은 그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모세와 아론을 보내 그들에게 ‘쉼’을 주려고 하신다. 이렇게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행동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13.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안식을 주려 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부터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나 자신과 충분한 정서적 교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쉬게 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구원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안식(쉼)에 들이신 것처럼,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쉼을 주는 것이다.

 

14.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쉬게 하신다는 것을 아는 자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에게 얻은 쉼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나도 그들을 쉬게 한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구원받은 사람은 상대방에게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쉬게 해주자. 쉬게 해주자.’ 모르는 자가 되지 말고, 아는 자가 되라.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쉼’을 선물로 주자. 초콜릿이나 케익, 또는 꽃보다 더 의미 있고 달콤한 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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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