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2. 7. 18. 00:48

멈춤을 간구하는 기도

 

주님,

세상이 종말의 이야기로만 가득 찼습니다.

그 종말은 거룩한 주님의 종말이 아니라 비참한 우리들의 종말일 뿐입니다.

주님의 종말은 영생을 가져오지만 우리들의 종말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

주님,

왜 우리는 그토록 허탄한 것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면서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바쁘게 움직이게 하는 일은 세상의 요구에 따라 너무도 잘하면서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잠시 멈추는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던 대로 살던 방식을 너무도 익숙해 하고 좋아하고 편안해 합니다. 그렇다 보니, 멈추어 서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것을 너무도 힘들어 합니다.

하지만 주님,

멈추어 서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잘 해내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기후위기나 허탄한 종교적 신화에 빠져 생명을 잃은 일이나 모두

우리가 멈추어 서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실패하기 때문에 경험하는 고통과 아픔들입니다.

주님,

우리를 멈추어 세워 주시옵소서. 멈추어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자각하고 확신하는 시간을 반드시 갖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께 우리의 생명을 맡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 그리스도께서 하신 사랑의 일을 하면서 살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이 정체성을 잃지 말게 하시고, 허탄한 것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날마다 기억하며, 복된 인생을 사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잠시 멈추어 바라보고 구원 받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해 십자가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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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7. 18. 00:46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아모스 8:11-13, 골로새서 1:24-29, 누가복음 10:38-42)

 

1. 하인츠 폰 푀르스터 일리노이 공대 교수가 20여년 전에 수학 공식을 사용하여 지구 종말에 대하여 쓴 논문이 다시 회자된 기사를 보았다. 그는 인류의 인구 증가율을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지구 종말의 날을 계산했는데, 그가 지목한 종말의 시간은 2026년 11월 13일 금요일이다. 4년 남았다. 하인츠 교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가 종말론적 예언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구의 무한대 팽창이 인류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일인가를 경고한 학문적 분석이었다. 하인츠 교수 뿐 아니라, 이 시대의 양심 있는 과학자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 멸망을 계속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기후변화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다른 말로, 종말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인류가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무의식적 집단 자살 상태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2. 사우디 아라비아를 방문 중인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는데, 사우디 아라비아의 빈 살만 왕세자와의 회담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다. 요즘 물가폭등에 대한 원인에 대한 분석인데, 서방 국가에서 물가폭등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 그리고 그로 인한 에너지 공급의 차질이지만, 빈 살만 왕세자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했다. “탄소배출을 줄이려는 비현실적 에너지 정책은 에너지 가격 상승과 인플레이션을 일으킨다.” 즉, 빈 살만 왕세자는 물가폭등의 원인을 서방 국가들의 친환경 정책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석유 안 쓰려는 정책들이 물가폭등을 불러왔다고 말하는 것이다.

 

3.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하인츠 교수가 예견한 지구 종말의 날이 그대로 실현될 것 같은 분위기다. 게다가 종교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도 만만치 않다. 요즘 한국에서 신천지 활동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동안 음지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신천지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만방에 알려지게 되자 전략을 바꿔서 이제는 아예 대놓고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 방문 중 양재역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큰 싸움이 벌어져 고개를 돌려보니 어떤 장로교인 아줌마와 신천지 포교활동 중이던 신도들 간에 벌어진 싸움이었다. 장로교인 아줌마가 허망한 듯이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장로교인인데 나를 이단이라고 해?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4. 요즘 신천지에서는 신천지-보혈 서사가 유행이라고 한다. 코로나는 주님이 주신 시련이고, 그 시련을 신천지는 주님의 은혜로 잘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신천지 신도들이 제공한 혈장(피) 덕분에 코로나 치료제(백신)이 개발됐고, 그것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렸다는 서사이다. 신천지 신도들의 피는 그냥 피가 아니라 보혈이다. 생명을 살리는 보혈. 그래서 신천지는 요즘 이러한 신천지-보혈 서사를 통해서 내부결속을 다지고, 이 서사로 결속된 신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힘을 내어 열심히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5. 일본의 아베 전 총리 총격 사망 사건을 통해서 아베 집안과 통일교의 관계, 일본에서의 통일교 활동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아베 전 총리에게 총격을 가한 사람은 통일교, 즉 종교적인 이유로 그러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파악됐다. 노컷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일본에는 통일교피해대책변호사연합회가 존재하고, 그 조직을 통해서 통일교가 일본 사회에 어떠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지 밝혀지고 있다. 통일교에는 영감상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영감상법이란 ‘영계의 지옥에 있는 조상들의 고통을 없애고 후손들이 안전하려면 영적능력이 있는 물건을 구매하고 헌금을 해야한다'는 교리다. 중세의 면벌부를 흉내 낸 교리 같다.

 

6. 통일교피해대책변호사협의회에서 아베 총리 피살 사건에 대하여 이러한 해석을 내놓았다. "이번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야마가미 어머니가 통일교에 빠지고 그로 인해서 가정의 모든 경제적인 것이 파탄이 나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헌금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으로 내몰았다는 분노심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통일교에서는 모든 신자들에게 가진 모든 재산을 바치라고 하는 교육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통일교 신자들은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자녀들은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이 낮구요. 그로 인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야마가미씨도 마찬가지지만 심지어는 여러 가지 형편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교육,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도 낮고 그로 인해서 가정의 파탄을 일으키는 수많은 통일교 가정이 있습니다."

 

7. 정치, 경제, 종교, 어디를 둘러봐도, 혀를 쯧쯧 찰 수밖에 없는 종말의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가 사는 시대에만 있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종말의 소식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세상은 옛날부터 종말을 목전에 두었다. 대략 2천 7백년 전에 활동했던 아모스 선지자의 메시지도 종말론적이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8. 곤고한 날, 애통한 날, 죽음 같은 날이 닥친다. 특별히 기근이 닥치면 그렇다. 마실 물이 없고, 먹을 양식이 없는 것만큼 종말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그러한 상황이 닥친 것에 대한 아모스의 해석은 매우 독특하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모스 선지자의 선포에 의하면, 종말이 닥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종말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 때문에 온다. 종말은 먼 훗날 오지 않는다. 당장 온다. 양식이 없고 마실 물이 없을 때 우리는 종말이 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종말은 당장 온다. 종말은 이미 와 있다.

 

9. 기후위기가 왜 닥쳤는가? 우리 인간들의 탐욕 때문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탐욕을 그치는 일이 종말을 맞이하는 일보다 어렵다. 인간은 끝끝내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종말을 맞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이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말씀의 기갈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의 육신에 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탐욕에 대한 경고를 끊이지 않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씀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인류는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종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

 

10. 신천지나 통일교도 마찬가지다. 신천지-보혈 서사나 통일교의 영감상법 같은 교리가 왜 생겨나고 사람들은 왜 그러한 허탄한 신화에 마음을 빼앗기고 몸을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기는가. 말씀의 기갈 때문이다. 마음이 곤고한 사람(건강하고 건전한 하나님의 영이 가득하지 못한 사람들)은 허탄한 신화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그리하여 신천지가 만들어내는 허탄한 신화에 마음을 빼앗기게 될 뿐 아니라, 통일교에서처럼 허탄한 일에 열심을 내게 된다.

 

11. 이러한 일은 신천지나 통일교 같은 곳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말씀의 기갈 현상은 이런 곳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정통 기독교에서도 발생한다. 이단이 별거인가. 말씀의 기갈 현상을 겪어 배고프고 목마르니까 허탄한 것으로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우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자세히 전해주고 있는 말씀이 골로새서의 말씀이다. 골로새교회에 어떤 일이 발생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골 2:4). 골로새교회에는 ‘교묘한 말로 교인들을 속이는’ 활동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넘어가 허탄한 것에 자기의 인생을 소비하는 인생이 아니라, 믿음 위에 굳게 선 신실한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12.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우리에게 좋은 지침을 준다. 마르다는 봉사(일함)의 대명사이고, 마리아는 침묵(멈춤)의 대명사이다. 신앙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멈추어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게(봉사) 된다.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말씀을 듣기 위해 멈추는 일과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일 중에서 말씀을 듣기 위해 멈추는 일을 우선 순위에 놓는 듯하다. 주님은 마르다보다도 마리아를 칭찬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13.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이렇게 우선순위의 관점에서 놓고 읽으면 우리는 아주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도덕적으로 더 옳은 일이고 봉사하는 일은 열등한 일처럼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옳지 못하다. 멈춤과 봉사는 동일하게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잠시 멈추는 일도 중요하고, 주님을 위하여 몸바쳐 봉사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14.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를 멈추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십계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제4계명, 즉 안식일법이다. (출애굽기 중, <우리들의 십계명>을 참고하라.) 애써 멈추지 않으면 우리는 멈추지 못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를 분주하게 만든다. 우리는 멈추는 것을 불안해 한다. 멈추면 마치 죽을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은 쉼 없이 돌아간다. 말씀의 기갈이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후위기나 또는 종교적 왜곡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씀의 기갈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씀의 기갈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르다의 영성(봉사의 영성)은 상대적으로 쉽게 도달할 수 있지만, 마리아의 영성(멈춤의 영성)에 도달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15. 우리는 쉽게 활동을 멈추지 못한다. 활동이라는 것은 관성을 가지고 있다. 관성은 하던 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던 대로 하면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면 하던 것을 멈추어야 한다. 관성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잘 하지 못한다. 힘들어 하고 어려워 하고 불편해 한다. 일례로, 팬데믹이 처음 닥쳤을 때 우리는 하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힘들어 했다. 팬데믹이 관성을 멈추어 세웠다. 그래서 우리는 관성대로 나오던 교회를 나오지 못하게 된 것을 힘들어 했다. 그런데 몇 년 사이에 이 관성이 바뀌어 버렸다. 재택 근무하는 게 이제 관성이 되다보니, 재택 근무를 그만 두고 회사에 나가서 일하는 것을 힘들어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직원을 뽑을 때 ‘remote work available’이라는 조건을 달지 않으면 직원 채용이 힘들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교회에 나와서 대면예배 드리는 일이 힘들어졌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일이 관성화되어 이것을 멈추고, 교회 다시 나오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16. 마르다와 마르아의 이야기에서 주님께서 마리아를 더 칭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봉사의 일이 하찮은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하는 일을 우리가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멈추지 못하면 사건이 발생한다. 기후위기가 왜 발생하는가. 탐욕을 멈추지 못해서 그렇다. 하인츠 교수가 예견한 것처럼, 2000년 동안 멈추지 않고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에,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지구에 대한 착취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신천지에서 말하는 신천지-보혈 서사 같은 황당하고 허탄한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 통일교에서 말하는 영감상법 같은 허탄한 요구에 자신의 재산을 바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는 이유, 그래서 아베 총기 총격 사건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멈추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17.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는 말이 무엇을까?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몸바쳐 열심히 봉사하겠다는 뜻일까? 물론 이러한 뜻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면, 우리는 멈출 수밖에 없다. 이전에 살던 대로 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울 수 없다. 멈추어 서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울 겨를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냥 살던 대로 살다가 멸망하고 말 것이다.

 

18. 우리가 허탄한 것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빼앗겨 우리를 분주하게 만드는 이유는 우리가 누구인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과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붙들고 잊지 않고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은 허탄한 것에 마음을 몸과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과 확신이 없는 사람은 존재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기 때문에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허탄한 것에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다. 이러한 사람은 사탄에게 착취당한다. 재산을 잃고 생명을 잃는다.

 

19.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생명을 그분께 맡긴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겠노라고 선언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다. 이러한 우리가 팬데믹이라는 것 때문에 주저 않아 있을 수 없다. 힘써 모이고, 함께 기도하고, 사랑의 역사를 일구어 나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 잠시 멈추어서, 우리가 멈추어서 바꾸어야 할 관성, 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을 방해하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자각하고 확신하는 은혜를 간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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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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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7. 12. 06:21

선한 이웃을 간구하는 기도

(눅 10:25-37)

 

선하신 주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입니다.

선한 이웃이 없다면 이미 죽었을 존재인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선한 이웃으로서

우리의 생명을 살려주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주님, 우리 자신을 높은 자리에, 강자의 위치에 놓는 자 되지 말게 하시고

언제나 약자의 위치에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러한 겸손한 마음과 행동이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닫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소서.

팬데믹을 지나면서

이 땅의 교회들이 모두 강도 만난 자처럼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선한 이웃이신 주님의 자비가 더욱더 간절히 필요한 시절입니다.

주여, 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께서 선한 이웃이 되어서 교회를 다시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도 조금 더 힘을 내어

주님의 몸된 교회를 회복하는 데 헌신하게 하옵소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을 온 몸에 새겨

우리의 몸으로 교회를 섬기게 하옵소서.

선한 이웃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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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7. 12. 06:18

선한 이웃

(누가복음 10:25-37)

 

1. 이러한 콤플렉스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 – 자기가 착하다고 착각하는 사람 (또는 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예쁜 여자 콤플렉스 – 자기가 예쁘다고 착각하는 사람 (또는 예뻐야 한다는 강박관념)

믿음 좋은 콤플렉스 – 자기가 믿음이 좋다고 착각하는 사람 (또는 믿음이 좋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2.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한 이웃 콤플렉스가 있는 거 아닌가 싶다. 선한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말이다. 모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때문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처럼 들린다. 이런 것을 고려할 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우리 모두 선한 사마리아처럼 선한 이웃이 됩시다’이다.

 

3. 성경에서 이러한 정도의 교훈만 얻어도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한 이웃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요즘 기독교가 개독교니 뭐니 사회로부터 욕을 먹고 있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실제적인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만큼 자선사업을 많이 하는 단체도 없다. 이는 모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덕분이다. 그리스도인은 싫으나 좋으나 선한 이웃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4. 그래도 우리가 좀 더 밀고 나가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가지는 의미를 좀 더 알아보는 게 좋겠다. 그리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 본문이 처한 정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누가복음의 특징은 이방인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누가는 복음이 유대 땅에만 전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다시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한 덩어리로서 ‘누가-행전’의 정체성은 다음 구절이 담고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이니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5. 누가복음은 이방인에 대하여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복음이 전달되는 것의 최종 목적이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방 지역의 대표격인 사마리아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를 드시면서 이야기의 주인공을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한 것은 본문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의 청중이었던 유대인들, 특별히 율법교사에게는 매우 전복적으로 들렸다. 율법교사에게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내 가족, 내 친구, 내 민족, 내 나라 등 자기와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존재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 당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이웃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었다.

 

6.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이러한 ‘전복성’에 대하여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어느새 새로운 유대인, 새로운 바리새인이 되어 예수님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생각의 틀을 수용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차별하고 이웃의 범주와 기준을 ‘나 자신’으로 축소시켜 그 안에 갇혀 버리는, 매우 어리석고 안타까운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7.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어떤 율법교사(아주 보수적인 유대인)의 질문이었다. 누가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시험’이었다고 평가한다. 율법교사의 질문 의도가 순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 영원한 생명. Eternal Life.

 

8. 율법교사의 질문에 맞서 예수님은 그가 스스로 답을 말하도록 유도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랬더니, 율법교사는 율법교사 답게 정답을 줄줄 이야기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는 모세오경의 말씀 중 두 군데서 가져온 것이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말씀은 신명기 6장 5절 말씀이고,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은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이다.

 

9.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100점짜리 대답이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누가는 그 정황을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29절). 율법교사는 자기 의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교사는 한 가지 더 질문을 한다. 다시 말해, 율법교사는 자신이 얼마나 이 말씀을 잘 지키고 있는지, 그래서 자신은 영생을 얻는 사람이 분명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쭐한 마음으로 물은 것이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10. 율법교사의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드신다. 그러면 일차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율법교사의 자기 의가 얼마나 교만한 것이고,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읽고 있는지, 그리고 그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한 예수님의 전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율법교사는 자기가 만든 이웃의 범주에서만 말씀을 실천했던 사람이다. 그에게 이웃이란 그저 자기와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자를 향한 자기애에 불과했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에게도 해당하는 아주 심각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11.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 속에서는 여러 명이 등장한다. 강도들(몇 명인지 알 수 없다), 강도 만나서 거반 죽게 된 자,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그리고 주막 주인이다. 이 비유를 연극 무대에 올리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역할을 맡고 싶어할까? 아마도 사마리아인을 맡고 싶어할 것이다. 우리는 선한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강도들처럼 나쁜 사람이거나,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몰인정한 사람이거나, 주막 주인처럼 주변인물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강도 만나서 거반 죽게 된 자는 절대로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선한 사마리아인에 투영하고 싶어한다.

 

12. 그러나 우리의 실제 모습은 전혀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강도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투쟁했던 독립투사들, 성경에 등장하는 열심당원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단순히 민족적 투쟁이 아니라 신앙적 투쟁이었다. 지금도 이런 투쟁을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성시화 운동’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의 종교적 열정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으로 느껴지는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자금이 필요했고,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들은 강도 짓을 서슴지 않았다. 종교적 열정이 그 방향을 잘못 잡으면 어떤 폭력이 발생하는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드러나고 있다.

 

13. 강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 열정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서도 발견된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자를 못 본 채 하고 피하여 지나간 것은 그들에게 인정머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전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맡은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불가피 하게 피 흘리고 있는 사람을 지나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들이 사마리아인처럼 거반 죽게 된 자를 만졌다면, 그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며칠 간 자가격리를 해야 했고, 자신들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14. 그러나 이것 또한 종교적 열정이 불러온 폭력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의 세세한 항목(피 흘린 자를 만지면 부정해진다)에는 충실했지만, 율법(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정신(스피릿)을 읽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종교적 열정만 있고 방향을 올바로 잡지 못하면, 이렇게 폭력이 발생한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강도들을 만나 거반 죽게 된 자에게 폭력을 저지른 것이다. 이렇게 폭력은 무엇인가를 해도 발생하고, 무엇인가를 하지 않아도 발생한다. 하지만, 강도들이나 제사장과 레인인이 지닌 종교적 열정이 폭력을 불러왔다는 것은 동일하다.

 

15. 우리가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선한 사마리아인과 동일화 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모습은 강도들이나 제사장과 레위인, 또는 주막 주인에 가깝다. 더군다나 신앙인으로서 더 그렇다. 우리는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존경 받은 신앙인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많으나, 실제로 어떠한 사건에 연루되는 것은 싫어한다. 또한, 주막 주인처럼, 연루되더라도 최대한 주변부에서 수동적으로 연루되고 만다. 사마리아인처럼 실제로 어떤 사건의 중심에 서는 것은 극도로 꺼려한다.

 

16. 그러나,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동일화를 생각해 봐야 하는 등장인물은 오히려 강도 만난 자이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인생을 살고 있는가. 우리가 얼마나 많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가. 이국 땅에서 이민자로 20년 간 살면서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동일화 하는 데서 벗어나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 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이겠구나.

 

17. 우리는 나 자신을 약자의 위치에 놓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사실,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 당시에 약자 중의 약자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어느덧 사마리아인은 우리가 동일화 하고 싶어하는 강자처럼 그 위치가 바뀌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어려운 일을 당한 이에게 선한 일을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베푸는 자가 베풂을 받는 자보다 강자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18. 그러나,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내 가족, 내 친구, 내 민족, 내 나라를 벗어나 있는 사람들을 내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을 때 그를 도와주면서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율법교사도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고 “네 생각에는 누가 장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사마리아인이요!”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마지 못해 돌려서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여전히 그는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받아들 수 없었던 것이다.

 

19. 우리는 나 자신을 강자가 아닌 약자의 위치에 놓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실제로 누가복음이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더러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도덕적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강도 만난 자이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줄 참된 선한 이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자다. 우리는 거반 죽게 된 자다. 우리는 구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어 우리를 다시 살게 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20.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 강도 만난 자는 누구인가? 팬데믹을 지나면서, 강도 만난 자, 그래서 거반 죽게 된 자는 교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팬데믹 동안 교회 상황을 조사한 기관의 보고에 따르면, 코로나 이전에 비해 대면예배 회복율은 70% 정도이고, 목회자의 절반은 번아웃 상태이고, 인력이 없어 큰 교회에 비해 여러가지 활동을 못한 작은 교회들은 대부분 문을 아예 닫거나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팬데믹을 구실삼아 교회를 떠난 사람도 많고, 교회를 옮긴 사람도 많다고 한다. 내가 한국에서 방문한 모든 교회들이 팬데믹 동안 ‘거반 죽게 된’ 경험을 했고, 아직도 회복이 안 돼서 모든 목회자들이 힘들어 했다. 우리 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21. 우리가 좀 더 주님께 은혜를 간구해야 할 때이고, 우리가 좀 더 힘을 내야 할 때이다. 참된 선한 이웃이신, 선한 사마리아인이신, 주님께서 강도 만난 자 같은 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그래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돌보아 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선한 이웃이 되어, 우리도 주님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좀 더 힘을 내서 교회를 살려야 할 때이다.

 

22. 선한 이웃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 없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는 우리 더러 선한 이웃이 되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도덕적 부담을 지우시는 말씀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우리에게 직접 선한 이웃이 되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선한 이웃인 주님의 돌봄을 받아 기력을 회복해서 남은 힘이 있거든, 그 힘 가지고 우리도 주님처럼 조금이나마 어려운 이들에게 다가가서 선한 이웃이 되어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선한 이웃 콤플렉스로 선한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선한 이웃이신 주님께 받은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선한 일을 하는 자가 되면 좋겠다.

 

23. 그리고 우리, 꼭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상황에 처해진 교회를 좀 더 진지하고 진실하게 돌봤으면 좋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주님의 몸이 강도를 만난 것처럼 어렵다면, 열일 제쳐 놓고 돌보는 것이 선한 그리스도인 아니겠는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기력을 회복하여 선한 이웃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힘을 내자. 선한 이웃인 주님처럼 우리도 선한 이웃이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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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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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7. 6. 03:59

겸손을 간구하는 기도
(왕하 5:1-14)

 

우리가 겸손하기를 바라시는 주님,

우리가 겸손해져서

눈과 귀가 열리고 감각이 열리기를 바라시는 주님,

그래서 당신의 역사를 경험하기를 바라시는 주님!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일들을 당할 때

절망하거나 슬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겸손은 치유와 구원의 시작인 것을 믿나이다.

요단강, 세례의 자리로 내려가

자기 몸을 일곱 번 씻어 치유 받고 구원 받은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통하여

겸손의 자리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배웁니다.

주여,

우리의 눈을 겸손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귀를 겸손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감각을 겸손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하시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게 하시며

느끼지 못하던 것이 느껴지게 하소서.

그럴 때 우리의 손과 발이 선해지며

우리의 발걸음이 주님을 향하겠나이다.

치유와 구원의 주님,

겸손한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소서.

주님은 우리의 소망이시나이다.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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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7. 6. 03:58

겸손은 치유와 구원의 시작이다

(열왕기하 5:1-14)

 

 

1.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개념은 참 중요한 것 같다. 구약의 이야기는 신약에서 재현되고 있다.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재현되고 있다. 열왕기상에서는 엘리야가 활약하고, 열왕기하에서는 엘리사가 활약한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의 사역을 재현하고 있다. 엘리사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흥미로운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2. 나아만 장군 이야기 전에 아주 짧게 나오는 보리떡 이십 개 이야기를 보면 이렇다.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왕하 4:42-44).

 

3. 이것은 복음서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엘리사의 이 이야기는 가뭄이 들었을 때 발생한 일이다. 가뭄 가운데 수확한 곡물을 바알에게 바치거나 자기가 먼저 먹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엘리사)에게 가져왔을 때 그것은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기적과도 같은 곡식이 된다. 우리가 나눔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해서 그렇지, 나눔은 이런 큰 기적을 일구어 낸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나눔의 가치를 잃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자기 자신만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한 자기 집중성을 내려놓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에 자기를 헌신하는 것 자체가 신앙이다.

 

4. 위기의 때에,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팬데믹이 처음 닥쳤을 때 그로서리의 식료품이나 공산품이 남아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인간은 쉽게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중국에서도 봉쇄령이 내려지면 식료품 가게는 금방 동이 나는 현상을 목격했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또는 신앙인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지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위기의 시대에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5. 평소에 위기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놓지 않으면 인간은 상황에 휩쓸리기 십상이다. 바알 살리사에서 온 한 사람도 가뭄의 때에 상황에 휩쓸릴 법했으나 그가 자신의 수확물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먼저 가져온 것은 그가 평소에 어떠한 신앙생활을 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행동이다. 위기의 때에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위기의 때에 자신 만의 안위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을 돌아보면, 위기의 때에 힘이 되어준 사람이 기억에 남는 법이고, 힘이 되어준 사람들을 위해서는 간절한 기도가 나오는 법이다. 위기의 때에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소중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

 

6. 열왕기하 5장 전체에 걸쳐 나아만 장군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을 보면, 나아만 장군의 위상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나아만 장군에 대한 수식어는 화려하다. “크고 존귀한 자”, “아람을 구원한 자”, “큰 용사” 등의 수식어가 그에게 붙어 있다. 그런데 그러한 수식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한 용어가 등장한다. “나병환자더라.” 그렇다. 나아만 장군은 화려한 명성을 지녔으나 나병환자였다.

 

7. 열왕기하 5장 전체는 나아만 장군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막상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성경은 나아만 장군보다 이름 없는 한 아이에게 주목한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 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2절). 나아만 장군의 병 치유와 그의 구원은 바로 이 이름 없는 한 아이에게서 시작된다.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3절).

 

8. 나아만 장군이 평소 같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노예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그의 상황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어둠이 짙으면 작은 빛도 환하게 보이는 법이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이렇게 우리가 절박할 때, 그리고 한없이 겸손해져 있을 때 들린다. 우리는 평소에 겸손을 연습해야 한다.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높아진다. 교만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다. 날마다 자기를 쳐서 말씀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없다.

 

9.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라는 이어령 선생의 시집에 보면, 이런 시가 있다.

 

피었다

시드는 꽃을 보면 눈물이 난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누군가 울면

나도 따라 운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흐린 날 안개 속에 산이 없어지고

답답한 유리창에 빗방울이 흐르면

나의 눈에 눈물방울이 구른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신문을 읽다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너와 비슷한

이름을 발견하면

어느새 차가운 눈물이 흐른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거울 속의 나를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면

거기 남의 얼굴처럼 주름진 모습

눈물이 흐른 자욱이 보인다

정말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10. 딸을 잃고 한없이 겸손해진 시인은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 들리지 않던 것, 느끼지 못했던 것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 겸손해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눈과 귀가 열리고 감각이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 들리지 않던 것, 느끼지 못했던 것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아만 장군의 마음도 이랬다. 승승장구할 때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법한 노예 소녀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11. 눈이 가려 있고, 귀가 닫혀 있고, 감각이 무디어져 있다면, 그것은 내가 교만해져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안 들리던 것이 들리고, 못 느끼던 것을 느끼면, 비로소 내가 낮아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우여곡절 끝에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가지만, 그의 교만은 아직 완전히 꺾이지 않았다.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의 홀대에 기분 상해한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신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극진하게 자신을 대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아만의 예상은 빗나갔다.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10절).

 

12. 나아만 장군은 자신을 향한 엘리사의 이러한 처사에 분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나아만 장군을 치료와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 이름 없는 ‘종들’이었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13절). 이야기의 주인공은 위대한 나아만 장군이지만, 성경이 주목하는 것은 권력과 재력을 지닌 나아만 장군이 아니라 권력과 재력을 전혀 가지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이 주목하는 대로, 권력과 재력을 지닌 나아만 장군에게 집중하기 보다 권력과 재력을 전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그들에게 집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13. 나아만이 궁극적으로 나병에서 치유를 받고 구원받게 된 것은 이름 없는 자들의 활약 덕분이다. 나아만은 ‘이스라엘에서 온 소녀’에게서 예상치 못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종들 덕분에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치유와 구원의 길로 다가설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성이고 구원의 성격이다. 구원은 언제나 예상치 못하게 온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현재의 삶 속에서 발생한 어려운 일 때문에 숨 막혀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은 것, 보잘것없는 것, 그런 존재를 무시하지 말고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14.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의 지시대로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씻는다. 그리고 그는 병이 나았을 뿐만 아니라 구원(새로운 생명)을 받는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너무도 명백히 복음서의 ‘세례’에서 재현되고 있다. 세례는 무엇보다 겸손의 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자리이다. 겸손하지 않으면 죽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 겸손한 자리에서 치유와 구원이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15.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을 만나 치유와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그가 겸손의 자리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에게 나병은 그의 위대함을 무색케 하는 병이 아니라 그를 겸손으로 이끈 하나님의 은혜였다. 나병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스라엘에서 온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그는 엘리사에게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고, 그가 엘리사에게 나아가지 못했다면 그는 요단강에서 몸을 씻지 못했을 것이다.

 

16. 그러나, 그는 결국 요단강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몸을 씻고, 나병에서 놓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던 자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겸손의 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발생하는 일들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있다면, 그 일들 때문에 힘들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겸손은 치유와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겸손한 자에게 치유와 구원이 임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한없이 겸손하게 만들어주시길! 우리를 겸손하게 하실 때 슬퍼할 것이 아니라 기뻐하길! 우리에게 치유와 구원이 임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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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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