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 시대가 교회에 남긴 숙제

 

지난 100년 동안 세계사에서 있었던 일 중 모든 인류에게 동시에 고통을 안겨주었던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1,2차 세계대전 정도를 손에 꼽을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이번 바이러스 팬데믹은 인류 역사에서 처음 겪는 일로 기록되었습니다. 중세 시대에 유럽을 휩쓸고 지나가 인구의 3분의 1을 거둔 흑사병 같은 경우도 유럽에서만 발생한 국지적인 바이러스 피해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은 명실공히 전세계를 휩쓴, 말 그대로 ‘팬데믹’이었습니다. 세계적인 대 유행 감염병입니다.

 

근대에 생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신체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생물학의 발전과 더불어 의학이 발전되고, 의학의 발전은 인간 신체에 대한 정치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미셸 푸코나 조르조 아감벤 같은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일컬어 ‘생명정치(biopolitics)’라 부릅니다. 인간의 신체가 지배의 영역에 놓이게 된 것이죠. 즉, 우리의 신체는 지배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팬데믹을 통해서 그 사실이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났죠. 팬데믹 동안 우리가 우리의 신체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정부의 통제에 따라 일정 기간 꼼짝없이 감금당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모두 공중보건이나 사회적 안전의 이름 하에 시행되는 일들입니다. 여기에 저항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탈리아인들은 전염을 피하려고 평범한 일상, 사회관계와 직장, 심지어 우정과 사랑, 혹은 종교적∙정치적 신념까지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했다는 것이다. 벌거벗은 삶, 그리고 삶을 잃는 두려움은 인류를 하나로 묶는 것이 아니라 눈을 멀게 하고 분리하게 한다”(조르조 아감벤, <얼굴 없는 인간> 46쪽). 코로나 팬데믹 시대가 교회에 남긴 숙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아감벤이 팬데믹 사태를 고찰한 이 책을 세 번 정도 정독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는 성육신, 또는 성만찬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성만찬을 통해서 그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육신은 현장성, 그리고 현재성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신앙이 성육신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습니다. 한 덩어리의 떡을 떼어서 서로 나누어 먹고, 한 주전자의 포도주를 서로 나누어 마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팬데믹이 교회에 안겨준 가장 큰 시련은 성육신 신앙과 성만찬 공동체를 멈추어 세웠다는 것입니다. 팬데믹은 교회로부터 현장성을 빼앗아 갔고,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일을 제거했습니다. 예배는 결코 ‘설교를 듣는 일’에 국한되지 않는데, 가뜩이나 예배가 ‘설교 듣는 일’로 축소된 한국 개신교 상황에서 예배가 더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팬데믹으로 인하여 현장성을 확보할 수 없었던 교회의 예배는 인터넷을 통한 일방적인 소통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서로 접속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장성과 현재성의 부재가 길어지면 성육신 신앙과 성만찬 공동체는 와해되기 십상입니다.

 

현장성이 결여된 인터넷 예배는 편리성과 안도감을 제공해 주지만, 이는 초대교회 교회 공동체가 그토록 배격했던 영지주의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극단적인 이원론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앙을 세워가려 했던 사람들로서, 그들은 육신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했습니다. 그들이 주장한 신학을 가현설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육신을 입은 것은 정말로 육신을 입은 게 아니라 육신을 입은 것처럼 보일 뿐이고 실제로는 육신을 입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도 육신의 죽임이 아니라 육신이 죽은 척했을 뿐 예수의 영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주장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원론의 토대 위에 기독교 신앙을 끼워 맞추려 했을 뿐, 기독교가 가진 성육신 신앙의 깊이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실천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영지주의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약점은 물질세계에 대한 관심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물질에 갇힌 영을 원래 있던 하늘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었기에, 악한 물질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고, 악한 물질세계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 발생하는 온갖 악한 일들은 사악한 물질세계에 대한 심판일 뿐, 그것을 개선해야 할 필요성이 전혀 없던 것이죠. 그들에게 구원은 영지(어떤 깨달음)를 통해 영이 육신을 탈출하는 것이니까요.

 

조르조 아감벤은 그의 책 <얼굴 없는 인간>에서 정말 중요한 말을 합니다. “얼굴은 가장 인간적인 장소다. 인간은 단순히 짐승의 주둥이나 사물의 앞면이 아닌 얼굴을 갖는다. 얼굴은 가장 개방성이 있는 장소다. 얼굴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의사소통을 나눈다. 이것이 얼굴이 정치적 장소인 이유다. 지금의 비정치적 시대는 진짜 얼굴을 보고 싶어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 더는 얼굴이 없어야 하고, 숫자와 수치만 있어야 한다. 독재자도 얼굴이 없다”(138쪽). 팬데믹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최고의 도전은 ‘얼굴 없는 인간’의 도래라는 것입니다. ‘얼굴이 없다’는 것은 현장성과 현재성이 결여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얼굴을 서로 맞대고 볼 때만 ‘인간적’일 수 있습니다. 얼굴이 정치적 장소라는 뜻은 얼굴을 맞댄 인간들의 사귐만이 세상을 바꿀 힘을 잉태한다는 것입니다. 얼굴 없는 인간들의 만남은 정치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아감벤에게 정치는 사람을 통제하는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일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얼굴 없는 인간은 아무 것도 창조할 수 없습니다.

 

팬데믹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가해진 공포심, 그것은 자신의 신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을 지 모른다는 공포심입니다. 그 공포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내는 듯합니다. 그 공포로 인해 우리는 성육신 신앙과 성만찬 공동체를 기꺼이 포기하는 듯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서로 볼 수 없는 틈을 타서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교회 떠나기 좋은 시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팬데믹이 가져다 준 풍경, 얼굴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으니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교회를 지키는 사람도 서로를 간섭하지 못합니다(또는 사랑으로 보듬지 못합니다). 매우 슬픈 일입니다.

 

팬데믹이 교회에 남긴 숙제는 단순히 ‘어떻게 교회 성장을 다시 이룰 수 있을 것인가’가 아닙니다. 교회의 규모가 아무리 커도 그 교회가 ‘얼굴 없는 사람’의 모임일 뿐이라면, 결국 교회는 아무런 정치적 힘을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교회의 규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그 구성원들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인간과 하나님을 그리워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더라도, 주님은 그곳에 계시고, 두 세 사람이라도 얼굴과 얼굴을 진실하게 맞대어 세상을 바꾸는 힘을 모을 때, 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두려움을 내려놓고, 얼굴을 보여주세요. 얼굴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고, 얼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세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우리 함께 세상을 바꾸어 갑시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8. 28. 04:11

기뻐하는 자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예레미야 1:4-10, 누가복음 13:10-17)

 

주님,

우리는 자꾸 우리 자신을 특별한 위치에 올려 놓으려고 합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 일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기쁨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주님,

우리는 그저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들에 대하여 기뻐하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우리가 예레미야처럼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예수님처럼 기적을 베푸는 일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주님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평범하지만, 단순히 평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온 무리처럼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작은 일 하나에도 서로 축하해 주고 격려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 일이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고, 기적을 베푸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

평범한 우리의 일상을 세심히 들여다보며,

깨알같이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큰 기쁨 하나보다

작은 기쁨 여럿이 우리의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오니,

주여, 우리가 기뻐하나이다.

우리의 기쁨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8. 28. 04:10

부끄러워하는 자와 기뻐하는 자

(예레미야 1:4-10, 누가복음 13:10-17)

 

1. 예레미야의 말씀은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는 장면으로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이들이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보면 대개 매우 드라마틱하다. 사무엘 선지자의 이야기도 그렇고, 이사야 선지자의 이야기도 그렇다. 사무엘 선지자의 부르심에는 어린 사무엘의 순진함이 베어 있고, 이사야 선지자의 부르심에는 이사야 선지자의 결기가 묻어 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2. 예레미야 선지자의 부르심에는 신비와 저항이 묻어 있다. 이런 말씀은 매우 신비롭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5절). 예레미야가 산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그의 부르심은 매우 이례적이다. 남유다 왕국의 마지막 세 왕은 여호아김, 여호아긴, 시드기야이다. 여호아김 왕 때 이미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정복되었고, 마지막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이 격랑의 시대에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이 예레미야인데, 이 부르심이 예레미야에게 얼마나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 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3. 정황상,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나타나신 것은 그가 청소년 시절을 보낼 때인 것 같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나타나 그를 부르실 때 예레미야는 이런 말을 하며 그 부르심에 저항한다. “저는 아이라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6절). 이사야 선지자의 대답,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세요!”와는 매우 대조적인 대답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예레미야의 저항은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절대적인 경험이기에 결국 그 부르심에 순종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다. 순종은 자유의 박탈이 아니라 자유의 완성이고 은총의 수용이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임하는 법이다. (폭풍 속에서도 고요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갖게 된다.)

 

4.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보듯) 구한말 한국의 역사를 떠올려 보면, 예레미야의 부르심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10절). 남유다 왕국(이스라엘)의 멸망은 국제관계가 얽히고설켜서 발생한 일이다. 그 격변이 왜 발생을 했으며, 그 격변을 통해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그 격변이 남유다 왕국을 비롯한 세상의 나라들을 어떠한 미래로 이끌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말씀 선포가 예레미야의 소명인 것이다.

 

5. 이런 소명 이야기를 들으면 대개 두 가지 반응을 기대할 수 있다. 하나는 ‘나도 이 사람처럼 소명을 받았으면 좋겠다.’라는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이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는 반응이다. 소명(召命)은 문자적으로 ‘어떤 일이나 임무를 하도록 부르는 명령’을 뜻한다. 이걸 좀 더 강력하게, 은혜롭게 표현하면, 소명이란 ‘부름 받은 목숨’이라는 뜻이 된다. 좋은가, 부담되는가?

 

6.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시다가 열여덟 해 동안 귀신 들려 앓으며 허리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성을 치료하시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4장에서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과 연관된 이야기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선포하신다.

 

7. 그런데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병든 여성을 치료한 행위를 두고 사람들의 반응이 엇갈린다. 치료 받은 당사자는 당연히 너무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여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런데 회당장으로 대표되는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행위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14절).

 

8. 안식일은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이다. 안식일은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안식에 대한 선취이다.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런 안식일에 병에서 놓임을 받는 것, 병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안식을 얻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고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안식일에 발생한 일을 두고 불평했다. 그 불평하는 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통쾌한 한 방이었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9.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할 말씀은 17절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여기에 보면, 부끄러워하는 자가 있고, 기뻐하는 자가 있다.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는 엄청 중요한 말씀이다.

 

10. 우리가 살면서 예레미야처럼 소명을 받고, 예수님처럼 이런 기적을 베풀 일은 별로 없다. 그리스도인은 자꾸 소명 받는 것에 대한 부담감, 기적(선한 일)을 베풀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기 쉽다.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지 못하고 남을 감동시키는 선한 일을 하지 못하면 신앙이 뒤처진 것처럼 주눅이 든다. 가령 이런 것이다.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아 주의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 기적(선한 일)을 베푸는 사람은 1등 그리스도인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2등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한다.

 

11. 그런데, 사실, 우리는 대개 평범한 그리스도인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은 경험도 없고, 예수님처럼 기적을 베푸는 능력(선한 일)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이 배워야 하는 영성은 어떻게 하면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을까, 어떻게 하면 기적을 베풀 수 있을까, 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온 무리가 예수님을 향하여 했던 바로 그 반응이다.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12.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자꾸 우리 자신을 예레미야와 동일시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 시 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렇다 보니, 예레미야와 같이 드라마틱한 소명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죄책감에 휩싸이기도 하고, 예수님처럼 기적을 베푸는 일(선한 일 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조바심을 내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에 기쁨으로 반응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13. 주목받지 못하고 자신의 권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을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복음 이야기에 등장하는 회당장 같은 사람들이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 때문에 고생을 하던 한 사람이 그 병에서 놓임을 받게 되었는데,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런데, 회당장과 그 무리들은 거기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그 은혜가 기쁨이 아니라 분노였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권위가 그곳에서 드러나지 않고,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에게 임한 것은 부끄러움뿐, 하나님의 은혜가 주시는 기쁨을 선물로 받지 못했다.

 

14. 물론 예레미야처럼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는 것을 갈망하는 영성도 있고, 예수님처럼 기적(선한 일)을 베푸는 것을 갈망하는 영성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다. 특별하다는 것은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이다. 우리가 바라고 소망해서 들어주시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냥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임하는 것이다. 이런 일에 우리가 마음 쓸 일이 뭐가 있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것이다.

 

15. 우리가 배워야 하는 영성은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는’ 영성이다. 누군가 잘 된 것을 축하해 주고, 누군가 병에서/어려움에서 놓임 받은 것을 축하해주고,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을 함께 기뻐해 주고, 나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소한 하나님의 은총에 기뻐하며,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영성. 기쁨을 주는 영성이라기보다 그저 기뻐하는 영성!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기뻐하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다. 부끄러움에 처해지지 않기 위하여서라도, 우리는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미식’이란 말을 아세요?

 

3년 전, 팬데믹이 오기 전, 우리는 ‘창조론과 기후위기’라는 특강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창조론)이 어떻게 기후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했었죠. 기억 나시죠? 그때 우리 ‘인류세’라는 용어가 무엇인지도 배웠잖아요. 인류세가 무슨 용어인지 모르는 사람은 세금의 한 종류인 줄 알지만, 이것은 기후위기에서 비롯된 지구과학(지질학) 용어입니다. 인류세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대기화학자 파울 크루첸이고요. 2000년 2월 멕시코에서 열린 지구환경 관련 국제회의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홀로세(Holocene)가 아니라 인류세(Anthropocene)에 살고 있습니다.”

 

홀로세는 약 11,650년 전 시작된 지질대를 말합니다. 홀로세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완전(Holo’)이라는 말과 ‘새로운(cene)’이라는 말이 합쳐진 용어로, ‘완전 새로운 시대’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빙하기(the last Ice Age)가 끝나고 시작된 홀로세는 지구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인 기후를 유지했습니다. 그 덕분에 현생 인류가 출현하고,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것처럼 번성하고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이죠. 그런데 지구 역사에서 지질대에 인류가 영향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인류는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의 힘에 압도되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인류는 자연의 힘을 압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지질대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는데, 20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인류는 자연의 힘을 압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지구과학적 현상을 일컬어서 ‘인류세(Anthropocene)’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지질대가 지구과학에서 공식적인 지질대 용어가 되었지요.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홀로세에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류세에 삽니다.

 

지구 역사에서 기후의 변화는 매우 자연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기후의 변화가 더 이상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 때문에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이것을 기후위기라고 부르는데, 자연적으로 온 위기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위기를 자초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외부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온 위기면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을 텐데, 스스로 위기를 불러온 것이라면 아주 큰 문제가 됩니다. 지금 인류는 스스로 멸망을 향해 가는 중입니다. 지금 당장, 내가 나를 총으로 쏴서 죽이는 것만 자살이 아닙니다. 인류는 집단적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 있는 중입니다. 집단적인 행동이다 보니 경각심이 덜 하고, 윤리적 부담이 적을 뿐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라는 본질은 같습니다. 매우 심각한 상황이죠.

 

최근 한국에서 출간된 도서 중 <기후미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직업환경의학·생활습관의학 전문의 이의철 작가의 책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미식’이라고 하죠.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을 ‘미식가’라고 하고요. 이러한 뜻을 가진 ‘미식’ 앞에 ‘기후’ 자가 붙어서 ‘기후미식’이라는 말이 탄생한 겁니다. 무슨 뜻일까요? 작가는 그 뜻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기후미식은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화하고,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염두에 둔 음식을 준비하고 접대하는 행동을 말해요. 2019년 여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본 단어죠. 행사 홍보 깃발에 ‘기후미식 주간’이라고 써 있었어요. 프랑크푸르트는 2014년부터 매년 기후미식 주간 행사를 열어왔더라고요. 규모가 커져 지난해부터는 ‘기후미식 축제’로 이름을 바꿨고요. 음식을 기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단어를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그 이후 기후미식에 대해 알리고 있죠.” (한겨례 신문 인터뷰 중)

 

기후위기에 대한 의사 이의철 작가의 말은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서 완전 다른 생각을 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기후위기를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으로 생각하죠. 그래서 우리는 석탄 연료를 덜 쓰기 위한 방안들을 구체적으로 내놓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의철 작가의 말은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일깨워 줍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재 한국인이 먹는 정도로 인류가 음식 섭취를 하려면 지구가 2.3개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동물성 식품 소비와 식용유 소비가 늘어서라고 합니다. 육류와 식용유 섭취가 늘면서 산림 파괴가 더 심해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가 내놓은 2019년 8월 ‘기후변화와 토지’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인류가 식습관을 바꾸어 고기·생선·달걀·우유 등 동물성 식품을 순식물성(완전 채식) 상태로 바꾸면 온실 가스 배출량의 17.4%를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화석연료 소비를 줄여서 온실 가스 배출량을 줄일 수 있는 16.2%보다 높은 수치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류의 식습관을 바꾸는 일이 화석연료 안 쓰는 일 보다 지구를 살리는데 더 효과적이고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사 이의철 각자의 주장이 매우 눈에 띕니다.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서 탄소 배출에만 집중하기엔 기후위기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전방위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은 물론, 식습관을 바꾸는 것에 더해서 해양생물 보호도 시급한 과제라고 말합니다. 해양생물은 육상생물과는 달리 죽어서도 몸속에 저장된 탄소를 밖으로 배출하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해양생물은 탄소 배출을 막아주는 방패막이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나빠서가 아니라 바빠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잘 돌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조금만 시간 내어 함께 배우고 깨우치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 수 있을 텐데, 먹고사니즘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살다 보니 우리는 우리가 지금 죽음을 향해 달려 가고 있는 사실조차 모르고 삽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지금 배우고 격려하고 실천해야 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그동안 잠시 멈췄던 ‘기후위기 프로젝트’를 다시 가동하려고 합니다. 기독교 창조론에 대하여 공부할 뿐 아니라, 실제로 탄소배출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보다 우리의 식습관을 바꾸려면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하며 어떤 먹거리들이 필요한지, 그리고 해양생물 보호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등을 구체적으로 배우고 격려하고 실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합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기후미식 행사를 세화교회에서 열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함께 배우고 격려하고 실천하면서 기후미식 행사를 차츰 키워 나간다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기후미식 축제처럼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이 시대를 선도하는 좋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함께 배우고 격려하고 실천합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