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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2.08.29 은혜 받은 자가 사는 법
기도문2022. 8. 29. 13:24

은혜 받은 자로 살아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예레미야 2:4-13, 누가복음 14:7-14)

 

주님,

구약성경을 보면 참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나님을 떠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나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너무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주님,

은혜 받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하시고

이왕이면 장자의 복 받기를 사모하게 하셔서

우리의 갈망이 늘 주님을 향하게 하여 주옵소서.

은혜 받은 자는 결코 죄책감에 휩싸이거나

차별적 시선으로 내가 다른 이들과 같이 곤경에 처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한 마음으로

이 땅의 모든 이들을 주님 안에서의 형제자매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며

그들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삽니다.

주님, 부질없는 것,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복된 존재가 된 것을 저버리고

헛된 존재로 전락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지키게 하옵소서.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고

주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언제나 어디에서나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물게 하옵소서.

사는 동안, 은혜 받은 자로 살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는 진리를 눈으로 보여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8. 29. 13:22

은혜 받은 자가 사는 법

(예레미야 2:4-13, 누가복음 14:7-14)

 

1.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얼마나 특별한지, 그 특별함을 나타내는 용어가 등장한다.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이라는 말과 “그의 소산 중 첫 열매”라는 말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랑은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에 빗대어 말하고 있지만, 성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사랑을 말할 때는 ‘헤세드’라는 말을 떠올려야 한다. 헤세드는 ‘언약적 사랑’을 말한다. 사랑이라는 개념이 매우 사적인 감정 차원에서만 통용되는 우리 시대에 ‘헤세드’가 무엇인지 체감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사적 사랑과 대비되는 공적 사랑이라는 말로 헤세드를 다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공적 사랑이라는 말도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아무튼 헤세드란 감정에 기초한 사랑이 아니라 언약에 기초한 사랑이다.

 

2. 하나님과 언약적 사랑 안에 거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정말 큰 은혜이다. 헤세드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안에 거하게 된 것이다. 거기다가 이스라엘은 그러한 하나님의 헤세드의 첫 열매였다. 첫 번째 것은 언제나 특별하고 귀한 법이다. 성경에 보면, 첫 번째 열매(그것이 자식이든 곡물이든)는 하나님의 것으로 따로 구별하였다. 그만큼 거룩함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장자는 다른 자식들에 비해 두 배의 유산을 물려 받기도 했다.

 

3. 장자의 축복을 사모하는 일은 참 복되고 즐거운 일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기 때문이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생물학적 장자는 르우벤이었지만, 실질적 장자는 요셉이었다. 창세기 후반부를 장식하고 있는 요셉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장자의 축복을 받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신뢰했던 요셉은 결국 자신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열 두 지파의 반열에 올려 놓는다. 장자가 받는 두 배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얼마나 복되고 즐거운 일인가.

 

4. 열왕기하에 등장하는 엘리사도 스승 엘리야에게 ‘갑절의 능력’을 구했다. 엘리사가 스승 엘리야에게 갑절의 능력을 구한 것은 엘리사가 엘리야보다 갑절의 능력을 보유해서 더 큰 이적과 기적을 행사하고 싶다는 욕심이 아니다. 엘리야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선지자 생도 집단이 있을 정도였다. 그들 중 엘리야의 뒤를 이어 엘리야의 사역을 그대로 잇는 선지자는 한 명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엘리사는 바로 자신에게 그 자리를 물려 달라고 한 것이다. 즉, 엘리사는 엘리야로부터 장자의 복을 간구했던 것이다. 장자의 복을 간구했던 엘리사는 끈질기었다. 끝까지 엘리야 곁을 지켰다. 그래서 엘리사는 결국 갑절의 능력, 곧 장자의 복을 받는다. 아이들에게 성경의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장자의 축복을 받도록 권면하는 일은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그리고 마땅한 신앙교육이다.

 

5. 모세 5경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은총)를 크게 입은 사람들인지 자세하게 보여준다. 이런 나라와 민족이 없다. 부럽다. 그런데, 열왕기상하를 지나 선지서에 이르면 그토록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나라와 민족이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는지, 이해도 안 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향해 성토는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그토록 받은 이스라엘이 어쩌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버렸는가,이다. (이 주제는 로마서에서도 지속되어 언급될 정도로 불가해한 사건이다.)

 

6.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이끌어가시는 대화의 요점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묻는다. “너희 조상들이 나에게서 무슨 불의를 발견했다는 것이냐?” 즉,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적 사랑에 소홀한 적이 있었느냐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아무것도 없다’이다.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주 세심하게 돌보셨다.

 

7.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두 가지 행동을 폭로하고 있다. 첫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이다. 둘째, 그들이 헛된 것을 따라 가서 헛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둘은 긴밀히 엮여 있다. 헛된 것을 따라 가려다 보니,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묶여 복된 존재였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헛된 것을 좇아가니, 그들의 존재가 헛된 존재가 된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헛된 것’이라는 용어는 전도서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헤벨’이라는 용어와 같다.

 

8. 마음 아프고 속상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복된 존재였다. 하나님과 헤세드의 사랑을 맺은 존재고, 더군다나 장자의 복을 받은 존재였다. 한 마디로 something special한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은 받은 복을 차버리고 나와 헛된 존재, nothing의 존재로 전락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들에게 벌어지는 일이다. 나 자신, 또는 내 배우자, 자녀들, 부모, 형제, 친구, 이웃 등, 하나님을 떠나 ‘헛된 것’을 좇아가 ‘헛된 존재’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즐비하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난 이들. 내가 그렇게 될까봐, 또는 누군가 그렇게 된 것을 보면서, 마음 아프고 속상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9. 예레미야 2장 13절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난 이들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있는 상태는 ‘악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악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난 상태를 말한다. 악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것을 방해한다. 시련과 고통이 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지 못하는 게 악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지 않은 악인은 형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는 의인은 시련과 고통을 당할 수 있다.

 

10.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다는 것은 ‘생수(생명)의 근원’을 버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이들이 행하는 일은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것’이다. 스스로 웅덩이를 판다는 것은 자신이 이룬 성취에 기대어 스스로 구원을 이루겠다는 탐심을 말한다. 누가복음 12장 15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사람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탐심에 갇힐 수밖에 없다.

 

11. 누가복음은 이러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난 자, 다른 말로, 은혜 받지 못한 자는 자기 힘을 자랑하며 산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누가복음을 들여다보자.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때로 참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특별히, 질병을 가지고 있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경 읽는 행위가 더 고통일 때가 있다. 누가복음 14장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배경은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떡 잡수실 때”이다. 성경에서 안식일은 늘 갈등의 원인이 된다. (왜 그런지, 로마서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12. 안식일에 바리새인 지도자 집에서 떡 잡수실 때 수종병 든 자가 있어 예수님은 그를 고치신다. (늘 그랬듯이) 당연히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고통스러운 것은 율법에 신실한 사람들이 병자와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물론 그들도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겠지만, 율법에 신실한 사람들(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질병과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았다. 질병과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게 되면 그들이 질병과 장애로 고통 당하는 것은 죄에 대한 마땅한 벌이기 때문에 결코 긍휼한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13. 이러한 이야기가 성경에 나온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질병과 장애를 가진 이들이 알게 모르게 죄책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병과 장애를 가지지 않은 이들은 알게 모르게 스스로 안도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질병과 장애를 가진 이들을 차별하는 시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차별적 시선을 가득 품고 산다. 질병과 장애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질병과 장애가 있는 것을 괴로워 하거나, 또는 질병과 장애는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질병과 장애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문제 있다고 여기는 차별적 시선을 가진 우리 자신이 문제다.

 

14. 우리가 성경을 매우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읽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을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읽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죄책감이 쌓이고 차별적 시선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질병과 장애가 ‘죄’라는 주제와 엮여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질병과 장애를 가진 자들에게는 매우 불쾌한 것이다. 반대로, 질병과 장애가 없는 이들은 자신들이 ‘죄’라는 주제와 엮여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에 안도의 숨을 쉬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바래시인들이 했던 기도를 드리게 된다. “주여, 제가 저들과 같지 않은 것에 감사하나이다!” 이 얼마나 불경한 기도인가.

 

15. 나는 은혜를 받지 못한 자와 은혜 받은 자와의 결정적인 차이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키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데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 14:12-14).

 

16. 성경에서는 안식일과 더불어 ‘밥 먹는 일’이 계속해서 트러블 메이커로 등장한다. (이것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로마서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잔치는 단순한 잔치가 아니다. 밥 먹는 일이다. 음식정결법에 대한 것이다. 정결법에 의하면, 부정한 것은 입에 대지 말아야 하고, 부정한 사람들과는 함께 밥을 먹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잔치를 베풀거든,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위에서 말한 것에 의하면,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에 의하면,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은 죄의 결과로 그렇게 된 이들로서 이들은 부정한 자들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이들과 함께 밥 먹는 일은 정결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칭 의인들은 이들과 함께 밥을 먹지 않았다.

 

17. 성경을 읽으면서 매우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되기도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들을 완전히 새롭게 바로 잡아 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죄책감과 차별적 시선을 말끔하게 거두어 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의인들아, 죄인들과 밥 같이 먹어라! 누가 의인이고, 누가 죄인이냐. 네 생각에 너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런 네가 죄인이다. 너희들이 정죄하는 그 죄인들이 오히려 의인들이다. 그들은 너희들처럼 스스로를 의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18. 역설적인 말이지만, 은혜 받지 못한 자는 자기 힘을 자랑하며 산다. 다른 말로, 자기 스스로 의인이라고, 은혜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내가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은혜 받은 사람이고, 내가 의인이 아니면 누가 의인이냐고 스스로 만족하며 자기를 자랑하며 산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죄책감에 휩싸이지 않고, 그리고 더불어 차별적인 시선을 전혀 갖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정죄할 수 있겠는가.

 

19.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것만큼 복된 인생은 없다. 하나님은 생수(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나서 절대로 스스로 웅덩이를 파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예배이다.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되, 장자의 복 받기를 사모하라. 다른 욕심은 부질없는 것이나 하나님께 장자의 복 받기를 바라는 욕심은 거룩한 것이다. 이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있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그들이 생수(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사는 법을 기억하라. 부질없는 죄책감을 갖지 말고, 알량한 차별적 시선을 버리라. 질병, 장애, 이런 것들을 죄와 결부시켜 생각하지 말라. 그런 개념 자체를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삶 속에서 지워버리라. 성경이 혹시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들거든 오히려 성경을 태워버리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주님 안에서 형제자매인 것을 기억하라. 그러니, 은혜 받은 자로, 서로 사랑하며 살라.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