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2. 9. 27. 11:34

불평등을 허물어내기를 간구하는 기도

(롬 13:8-10)

 

주 하나님,

우리가 로마서에서 죄와 죽음보다 믿음과 사랑을 먼저 발견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 편만하게 퍼져 있는 지독한 불평등을 보면서

오늘도 우리들은, 특별히 젊은이들은 절망에 빠져 삽니다.

우리는 그러한 불평등의 고통 속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고자 노력하지만

세상이 가르쳐 주는 방법은 그저 돈의 빚을 지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는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품고 돈의 빚을 지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의 빚을 지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하시고

그 나라를 지금 여기서 살아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사랑할 때,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서로 존중하고 서로의 가치를 지켜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시고

죽어야만 평등을 맛보는 삶이 아닌

살아서도 사랑으로, 믿음으로 평등을 맛보고 성취하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 되기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주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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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9. 27. 11:31

불평등을 허물려면

(로마서 13:8-10)

 

1. 영어 이름의 ‘Meg’는 ‘Margaret(마~거,렛)’의 줄임말이고, ‘진주(pearl)’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진주는 Meg라고 이름을 지었으면 딱 미국식 이름이 되는 것이다.) 영어 이름의 ‘Jo’는 독립적인 이름이기도 하고, ‘Joanna, Joanne, Jody and Josephine’이나 ‘Joseph’의 줄임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God is gracious)’의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 이름의 ‘Beth’는 ‘Elizabeth’의 줄임말이고, ‘집(house)’라는 뜻이다. 영어 이름의 ‘Amy’는 프랑스, 라틴어에서 온 이름이고, ‘Beloved’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사랑이 듬뿍 담긴 이름이다.

 

2. Meg, Jo, Beth, Amy는 루이자 메이 올컷(Louisa May Alcott)의 소설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다.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68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매사추세츠 주에 사는 마치(March) 가족의 네 자매의 성장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너무 유명한 소설이라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었고, 세계명작소설 리스트에 올라가 있어, 어린 시절 이 책을 읽어보았으나, 남자인 나로서 여자 아이들 이야기가 재미있게 다가올 리 없었다. (요즘 다시 읽으면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다시 읽고 싶다.)

 

3. 요즘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한국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바로 이 소설을 모티브로 만든 드라마이다. 물론 내용은 완전히 다르지만, 드라마의 구성 중 소설에서 따온 것들이 눈에 많이 띈다. 세 자매의 캐릭터도 그렇고, 원래는 네 명의 자매였다는 설정도 그렇다. 그리고 자매들의 성장 과정을 그린 것도 그렇다. 그런데,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이 드라마를 쓴 작가의 집필 의도이다. 드라마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듣길 원할까? 사랑도 아니고, 복수도 아니고, 모험도 아니고… 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우리 사회 곳곳에 돈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흐른다. 그런 사회의 영혼은 어떤 모습일까? 돈에 대한 우리들의 욕망은 어디에서 왔을까? 오늘도 우리는 돈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꿈을 꾸었나? 그런 것들을 쓰려고 했다.”

4. 2천년 전 로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향해 쓰여진 <로마서>는 2천년이 지난 21세기 우리 시대에 무슨 메시지를 던지는 것일까? 조금 의식 있는 사람이라면 성경을 읽으면서 이러한 질문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2천년 전에 쓰여진 이 고문서가 지금 나의 삶에,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몇 주에 걸쳐 로마서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로마교회에는 큰 갈등이 있어 평화가 없었는데, 그 갈등의 원인은 ‘강한 자들’이라고 불리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약한 자들’이라고 불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간의 다툼 때문이었다.

 

5.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강한 자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들이 실제로 로마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먹는 문제나 절기를 지키는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약한 자들’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들은 실제로 로마 사회에서 별볼일 없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아무 음식이나 먹을 수 없었고 절기를 지키는 문제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6. 이들은 동일하게 ‘그리스도인’이라 불렸지만, 그들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문화적 배경은 너무도 달랐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익숙했고 율법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몰랐고 율법을 존중하지 않았다. 이렇게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집단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를 이루어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높은 지위’에 기대어, 즉 자신들이 가진 힘에 기대어 힘없는 유대인들을 업신여겼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가진 ‘특권’, 즉 자신들이 가진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와 율법에 근거하여 이방인들을 판단했다. 사람을 업신여기는 부류와, 사람을 판단하는 부류가 한 공동체에서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바울은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고자 로마교회에 편지를 써 보냈다.

 

7. 로마서에 전개되는 모든 이야기들은 로마교회에 발생하고 있는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목회적 호소다. 본문도 그러한 배경 속에 있다. 바울은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모두에게 호소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십시오. 사실 남을 사랑하는 이는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이 말은 율법을 잘 아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나, 율법을 잘 모르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매우 적합한 접근이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율법의 조항을 일일이 열거하고 드러내지 않더라도, 율법이 담고 있는 그 정신을 담아내는데 있어 두 부류 모두에게 설득력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8. 우리는 지금 로마서를 거꾸로 읽고 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로마서를 앞에서부터 읽었다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용어보다 ‘죄’, 또는 ‘죽음’이라는 용어를 먼저 만났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로마서를 거꾸로 읽은 덕분에 교리 같은 딱딱한 내용을 먼저 만난 것이 아니라 ‘뵈뵈’와 같은 사람을 먼저 만난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서는 거꾸로 읽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가 만약 죄나 죽음을 먼저 만났다면, 우리의 마음은 더 무겁고 어두웠을 지 모른다. 하지만 죄나 죽음보다 사랑을 먼저 만나면, 그 이후에 죄와 죽음을 만나더라도 우리의 밝고 생기 넘치는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다.

 

9. “아무에게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십시오.” 너무 멋진 말이다. 이것만큼 우리 시대를 날카롭게 꼬집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2천년 전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에 살아 역사할 수 있는 이유이다. 우리 시대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는 빚이 무엇인가? 돈에 대한 빚이다. 얼마전 나온 한겨례 신문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가계 부채가 GDP(국내총생산) 대비 104%에 이른다. 전세계 1위다. 가계부채비율이 국내총생산을 넘어서는 것은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유일하다. ‘영끌’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사람들은 돈을 빚지고 집이든 땅이든 ‘부’를 소유하려고 한다.

 

10. 위에서 본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작가의 집필 의도에서 보았듯이, 요즘 젊은이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 복수에 대한 이야기, 모험에 대한 이야기보다 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세상이 온통 돈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그 이외에 다른 이야기는 모두 허황된 이야기이고 쓸데없는 시간낭비로 취급당한다. 실로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지는 시대가 결코 아닌, 돈의 빚을 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한 우리 시대에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말라”는 이 말씀은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11. 바울은 왜 로마교회를 향해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고 말하는 것일까? ‘빚지다’라는 말은 빚을 갚으라는 말이 아니라, 빚진 사람처럼 생각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사랑의 빚을 졌다는 것은 사랑이 서로에게 ‘의무’라는 뜻이다. 바울은 어떻게 하면 로마교회에 있는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고,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판단하는 상황 속에서 이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은 ‘복음’에 충실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1장부터 11장이다. 그리고 그 복음에 기대어 서로 평화롭게 지낼 것을 권면하는 것이 12장 이후의 말씀이다.

 

12.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은 서로 평등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이들은 서로 자신들이 저들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강한 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위, 힘에 기대어 그런 생각을 했고, 약한 자들은 자신들의 가진 특권에 기대어 그런 생각을 했다. 이들 사이에는 엄연한 ‘불평등’이 존재했다. 평등이란 서로가 서로의 가치를 동등하게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강한 자들은 자신들의 가진 힘에 기대어 약한 자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약한 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특권에 기대어 강한 자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서로가 평등하지 않다고 불평등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여러분은 모두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평등한 인간입니다!’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설득할 수 있을까?

 

13. 앞으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복음이 무엇인지를 다루는 1~11장에서 바울은 ‘죄’와 ‘죽음’의 이야기를 한다. 사람은 평등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것은 ‘죄’와 ‘죽음’을 대면할 때이다. 지위고하/특권의 유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죄인다. 이 말은 ‘너는 죄인이야!’라고 상대방을 정죄하려는 말이 아니라, 서로 자신들이 잘났다고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얼마나 평등한 인간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음 앞에서는 지위고하/특권의 유무는 아예 소용이 없다. 모두 죽는다. 모든 사람이 가장 평등해지는 순간은 죽음의 순간이다.

 

14. 그러나, 죄와 죽음의 순간만 인간이 평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실, 죄와 죽음의 순간에만 인간이 평등해진다면, 이것은 좀 억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인생이 너무 불쌍하지 않는가.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는 것,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 이것은 매우 진리이나, 매우 인간을 슬프고 아프게 만드는 진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준다. 우리 인간이 평등해지는 순간이 또 있는데, 바로 서로 사랑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믿음의 순간이다. 즉, 믿음과 사랑은 인간에게 평등을 가져다 준다.

 

15.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돈에 대한 이야기라는 통렬한 사실 앞에서, 젊은이들은 왜 돈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듣고 싶어할까를 묻는다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사회에서 지독한 불평등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이들이 사회에서 경험하는 지독한 불평등을 이겨내는 해결책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시피, 돈이 많으면 사회에서 불평등을 경험하는 일은 피할 수 있겠으나, 남들에 비해 돈이 많은 것 자체가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남들보다 돈이 많다는 것 때문에 돈 없는 자들을 차별하고 그들을 평등하지 않게 대하는 것은 자신의 특권인양, 비뚤어진 사고구조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즉, 불평등을 허물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이것을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16. “아무에게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을 너무 낭만적으로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울이 로마교회 교우들에게 이 말씀을 전할 때, 이 말은 전혀 낭만적인 말이 아니었고, 듣는 이들 입장에서도 전혀 낭만적인 말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아주 실제적인 갈등이 존재했다.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사이엔 막힌 담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교회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이었다. 얼굴 맞대고 사는 이웃이었다. 얼굴 맞대고 사는 이웃 사이에 ‘막힌 담’이 놓여 있다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바울은 말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은 서로 이웃이지만, 서로에게 악한 일을 저질렀다. 서로 업신여기고 판단했다.

 

17. 로마교회에 만연했던 불평등을 해소하는 길은 그들이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불평등을 해소하기에는 어딘가 좀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죄와 죽음을 떠올리며 불평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왠지 서글퍼보인다. 하지만, 바울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 더 좋은 길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 외에 빚을 지지 않는 것이다. 정말 너무도 인간적인(또는 너무도 복음적인), 인간의 품위와 인격을 세워주고 지켜주는 놀라운 방식이다.

 

18. 가계부채가 하늘을 찌르는 듯이 높은 이 시대에, 사회에서 경험하는 지독한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돈에 빚지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시대에,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 시대를 따뜻하게 보듬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빚지고 사는 인생, 지긋지긋하지 않나? 돈 버느라 날려버린 내청춘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 돈 때문에 내쉰 한숨, 돈 때문에 흘린 눈물을 생각하면 우리의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나? 우리는 언제쯤 돈의 빚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게 죽음을 통해서만 그럴 수 있는 거라면, 우리의 삶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19. 불평등을 허물려면, 세상이 가르쳐주는 돈에 빚지며 사는 것에 대하여 당당히 ‘No’를 외치며, “아무에게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을 믿어야 한다. 이것은 진리의 말씀이다. 돈이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불평등을 해결한다. 사랑하면, ‘너와 나’는 동등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 사랑하면 서로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일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 진리

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성취되도록 노력하며 이러한 세상을 상상하고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상대방에게 사랑의 빚을 진 것처럼 사랑하십시오. 십자가 위에서 사랑으로 불평등을 허물어버리신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그렇게 하십시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십시오. 이것은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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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개혁주의 유감]

 

공부를 하다 보면 여러 책을 읽게 되고 그 책들의 특징들을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된다. 그런데, 복음주의나 개혁주의에 속한 학자들 또는 작가들, 목사들의 책을 읽다 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들에게는 '침대'라고 하는 자신들의 스탠다드, 또는 교리가 있다. 그 교리에 맞춰 이들은 성경을 해석하고 세상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과 함께 머물며 '그것으로부터의 해석'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이미 형성된 시선을 통해서 그것을 재단한다. 그래서 그들의 해석은 '해석'(hermeneutics)이라기 보다 '판단'(judgement)일 때가 많다.

 

시를 읽다 보면 좋은 시와 별루인 시를 구분하게 되는데, 좋은 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시이고, 별루인 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데 실패하는 시이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눅 10:23). 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은 참 어렵다. 이것은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의 눈이 얼마나 복되지 못한 지, 우리는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왜곡한다. 좋은 시는 왜곡해서 보고 있는 그것을 바로잡아 있는 그대로 다시 재구성하여 보여주는 시이다.

 

그래서, 좋은 학자들의 책은 언제나 한 편의 시를 읽은 것 같다. 이렇게 한 편의 시와 같은 책들을 읽어야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물, 또는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아 그것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시선에 익숙한 것에 머물려는 습성 때문에 자신의 왜곡된 시선을 재구성하여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보여주려고 하는 시 한 편과 같은 책 읽는 것을 두려워한다.

 

복음주의자들의 책과 개혁주의자들의 책은 기독교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그들의 성서해석은 정직하지 못하고 그들의 세상해석은 판단(judgement)으로 가득 차 있다. 즉, 존재하는 것에 대한 정죄가 심하다. 그들은 사물과 거리를 두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들이 말해주는 것에 귀 기울이기 보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강요할 때가 많다. 소통이나 교감, 또는 관계 맺음이 없고, 일방적인 강요와 종속, 또는 복종이 있을 뿐이다.

 

복음주의, 즉 미국의 백인 남성 중산층의 시선이 기독교의 전부가 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개혁주의, 즉 칼뱅의 신학적 견해가 기독교의 전부가 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들의 시선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선의 전부인 양 생각하며 그들이 만들어 놓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딱 맞는 신체를 갖고자 하는 것은 그 신화적 이야기에서 보듯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 침대에 누웠던 모든 이들이 잘려 죽거나 늘어나 죽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악행을 멈추게 한 것은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였다. 복음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 발전을 이루려면 스스로 테세우스가 되어야 할 것이다. 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신학적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를 부수고, 좀 솔직하고 정직하게 성경 텍스트나 이 세상을 들여다보며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좀 더 주류 신학자들(사상가들)과 활발한 대화를 이어나갈 필요가 있다.

 

다행이 기독교 신학자들/목회자들 중에는 테세우스 같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를 만들지 않고, 그것을 깨부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을,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것과 건강한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의 책을 만나면 하나님께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그리고 시 한 편을 읽은 것처럼 영혼이 맑아진다. 그리고 영웅 테세우스를 만난 것 같아 마음이 우쭐하다.

 

우리 모두, 보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질 때까지 분발하면 좋겠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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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9. 18. 21:36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기를 간구하는 기도

(롬 15:1-17)

 

주님,

우리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바울의 쓸쓸한 뒷모습을 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정서적 읽기를 하지 못하고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며 우리 자신을 내어주지 못하니

성경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보듬고 변화시키는 성령의 감동으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혼란케 하는 이 세상에 지고 있다는 증거이고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가 온 힘과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인내와 위로와 희망 가운데 거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부끄럽게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인내와 위로와 희망 가운데 거하며

서로를 받아들이는 일을 아직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주님의 은총을 간구해야 하지만,

우리는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로마서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려 하오니

우리의 죽어버린 감정을 되살려 주셔서

‘어머니가 성경을 읽으며 눈물 흘리셨던 것처럼’

우리의 두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게 하시고,

무엇보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인내와 위로와 희망을 가지고 서로 용납하는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게 하옵소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여서 우리의 모범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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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9. 18. 21:32

로마서 3.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로마서 15:1-7)


1. 바울 신학 연구(로마서)의 권위자 중 한 명인 비벌리 가벤타가 쓴 로마서에 대한 대중적 안내 책자인 <로마서에 가면>을 보면, 로마서에 충분히 머물라고 조언한다. 그래야 로마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충분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현대인들이 가장 못하는 것 중의 하나가 ‘충분히 머무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구석구석 보는 일을 시간 낭비라 생각하거나 지루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현대인의 습관은 ‘관광’이라는 여행 상품에 녹아 들어 있다. 아무리 좋은 곳에 가도 우리는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그래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피곤함과 ‘그곳에 다녀왔다는 약간의 만족감과 우월감’ 뿐이다.

 

2. 충분히, 오래, 머문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를 내어준다는 뜻일 거다. 자기를 내어주지 않으면 우리는 변화를 이룰 수 없다. 로마서에, 좀 더 넓게 말해, 성경에 충분히, 오래, 머무는 일은 단순히 시간을 거기에 쓰라는 말이라기 보다, 자기 자신을 로마서에, 성경에 내어주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 현대인들이 잘 하지 못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개인에 대한 숭배’, ‘개인의 우상화’가 깊이 뿌리내려진 현대 사회에서 ‘자기를 내어준다’는 말은 그 개념 자체를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이 말을 이런 식으로 알아들을 것이다. ‘나를 팔라는 뜻인가? (우리는 로마서에 오래 머물면서 구석구석 살펴볼 것이다.)

 

3. 인간이 가장 쓸쓸함(lonely feeling/마음이 외롭고 허전하다)을 느끼는 때는 (상대방/사람들/공동체로부터) 이해 받지 못할 때이다. 쉽게 얘기하자면,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줄 때 가장 섭섭하고 쓸쓸하다. 예수님의 인생도 그랬지만,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의 인생이 그랬다. 바울은 쓸쓸했다.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것에 대해서, 사람들로부터, 특별히 동족인 유대인(그리스도인)으로부터 이해 받지 못했다. 바울이 일평생 사역을 하면서 많은 동역자를 만나서 위로를 받았지만, 그의 마음 한 켠은 언제나 쓸쓸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서도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사람, 특별히 인정받기를 가장 바랐던 한 사람(그게 아버지든, 어머니든, 누구든)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바울은 동족/부형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4. 15장 후반부에 보면, 로마에 직접 방문하고 싶은 바울의 소망과 더불어 예루살렘 방문 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특별히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 계획에 대해서 기도 부탁을 한다.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라면서 간절히 기도 부탁을 한다. 이것은 참 간곡한 기도이고, 쓸쓸한 기도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예루살렘을 방문하려 했던 것일까?

 

5. 로마서는 AD 56년경에 쓰였다. 이제 쉰 살이 넘어선 바울은 지중해 동쪽 지역 선교를 끝내고, 지중해 서쪽 지역 선교를 하면서 인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지중해 동쪽 지역 선교를 하면서 바울은 유대인 동족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에게서나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서나 똑같았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대하여 적대감이 심했다. 그리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선교 방식에 대해서 별로 좋은 마음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지중해 동쪽 지역을 선교할 때 바울은 유대인들과 계속해서 아주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바울이 극심한 갈등 중에 선교를 그만 두지 않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바울이 자신의 편지 곳곳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없었다면 선교를 진작에 그만 두었을 것이다.

 

6. 15장 후반부에서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에 가난 자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얼마를 연보한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참 훈훈하구나’라며 그냥 지나칠 지 모르지만,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다. 일단, 이방인들의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받아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로마서에서 발생한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의 갈등에서 보았듯이, 이방인들의 구제 헌금은 유대인들이, 그것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넙죽 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방인들의 헌금은 마치 이방신에게 드린 제물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이 주는 구제 헌금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치 이방신에게 드린 제물을 먹는 것과 같았다.

 

7. 게다가,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다. 지옥의 불쏘시개 정도로 쓰이면 될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전하고 다니는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이방인의 멸망, 특별히 로마 제국의 잔혹한 멸망을 외치고 다녀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판에, 오히려 이방인의 구원을 전파하고 다니는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일제 시대 때 어떤 목사가 일본 사람들에 대하여 구원을 전파하고 다녔다고 해보라. 그러면 독립 운동하는 사람들이나 일반 한국 사람들에게 그 목사가 좋게 보일 리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였던 것이다. 피해자 측이 가해자에 대한 구원을 외치는 사람에 대하여 고운 시선을 갖는 것은 쉽지 않은 법이다.

 

8. 바울은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이러한 상황 때문에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방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모은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는 일은 매우 중차대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기 보다 자신이 직접 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에 가서 그곳의 성도들에게 전달하고 싶어했다. 만약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이방인들의 헌금을 흔쾌히 받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헌금이 전달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동안 그토록 노력해 왔던, ‘막힌 담’이 허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방인 사역이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9. 예루살렘에 이방인들의 헌금을 전달하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기에 한 사람의 동역자로부터라도 기도를 더 받고 싶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에게도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애달픈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바울이 경험하고 있는 쓸쓸함을 느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로마서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만약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일이라면, 우리는 바울의 사역을 위해서 함께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매우 긴장하고 궁금해할 것이다. 과연,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교회들의 구제 헌금을 기쁨으로 받았을까?

 

10. 로마서는 이러한 긴장감이 흐르는 시기에 쓰여진 편지이다. 로마교회에 편지를 보내 놓고, 바울은 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런데 사도행전(21장 이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폭동으로 인하여 체포된다. 바울의 바람과 기도대로 일이 잘 진행되지 못한 듯하다. 이방인들의 구제 헌금은 예루살렘 공동체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된다. 로마로 압송되어 갔을 때 로마 교회는 이미 뵈뵈를 통해서 바울의 편지를 받아본 후였다. 그럼 우리는 어떤 기대를 가질 수 있을까? 바울의 편지를 받아본 로마 교회 공동체가 바울이 편지에서 복음을 따라 권면한 대로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화평을 이루어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바울을 도와 스페인 선교를 했을까?

 

11. 아닌 것 같다. 사실 이게 마음 아프고 안타까운 장면이다. (성경을 읽을 때 이렇게 정서적으로 읽는 일(정서적 성경읽기)은 굉장히 중요하다. 감정의 교차가 있어야 성경이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 <나의 사랑하는 책> 찬송가에서 어머니의 성경읽기를 자식이 기억한다. 어머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의 신앙이 위대한 이유다. 우리는 그 장면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가?) 만약 로마교회가 바울이 편지에서 권면한 대로 화평을 이루어 바울의 스페인 선교를 도왔다면,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스페인 선교를 한 것까지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바울의 스페인 선교와 그의 말년 인생에 대해서 아무런 기록도 하고 있지 않다. 굉장히 열린 결말을 맺고 있다.

 

12. 로마서를 읽어 나갈 때, 바울에 대한 이러한 파토스(감정적 호소)를 느끼지 못하면, 로마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굉장히 수사적으로 쓰고 있지만(이성적으로 쓰고 있지만), 그 뒤에 흐르는 정서는 굉장히 감정적인 호소이다. 로마 교회에 화평이 있어야, 그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자신의 인생 말년의 마지막 사역 목표인 스페인 선교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서는 절실하다. 교리서가 아니라, 로마 교회 공동체를 온 힘 다해 설득하고 있는 호소문이다.

 

13. 본문은 ‘강한 자들’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바울은 자신을 ‘강한 자들’과 동일시한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바울은 혈통으로는 베냐민 지파로서 엄연한 유대인이었지만, 바울은 자기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다는 소명을 가졌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강한 자들’, 즉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동일시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즉 ‘강한 자들’은 로마에서 ‘약한 자들’에 비해서 훨씬 지위가 높았다. 그들에겐 힘이 있었다. 힘 있는 자가 마음을 악하게 먹으면 힘 약한 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힘 있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내에서 악한 마음을 먹으면 힘이 약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차별을 받고 억압받으며 교회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14.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에서 ‘약점’은 ‘약한 자들’이 열등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법이다. ‘자기를 기쁘게 한다’는 말은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다. 강한 자들은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보통,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강한 자가 되고 싶어한다.) 이것은 ‘자기에게 좋을 대로 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지위가 있다고, 힘이 있다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한다.

 

15. 바울은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지 말라고 말하며, 그 이유를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결시킨다. 그리스도께서 만약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셨다면,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며,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지 않고 고난을 감당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을 내가 대신 다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힘 있는 자들이 행동할 때는 반드시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덕을 세우다는 ‘교회를 세우다, 공동체를 세우다’의 뜻이다. 덕이란 무엇인가를 허무는 게 아니라 세우는 것(upbuilding)이다. 우리는 무너뜨리는 사람인가, 세우는 사람인가. 덕 있는 사람은 세우지 무너뜨리지 않는다.

 

16.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4절). 바울의 이방인 선교 사역에 얽힌 괴로움과 쓸쓸함을 안다면, 이 구절은 정말 짠하게 들려올 수밖에 없다. 바울에게 성경은 구약성경이었겠으나, 바울은 이방인 선교 사역을 감당하면서 당하는 고통 가운데서 성경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이방인 선교 사역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내가 목회를 그만두지 않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목회 사역을 하는 이유는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인내할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인내와 위로와 희망을 준다. 그래서 성경은 정말 소중하다.

 

17. 바울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은 5절부터 7절에 담겨 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5-7절). 로마교회 성도들은 인내와 위로와 소망(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을 때’ 가능한 일이다.

 

18.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못하는 것이 ‘인내’이다. 참지 못한다. 기다리지 못한다. ‘내가 왜 참아!’하면서 폭발하기 일쑤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목말라 하는 것이 ‘위로’이다. 위로 받고 싶어 몸부림을 친다. 위로에 목말라 엉뚱한 것에 빠져 목숨과 생활(삶)을 잃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없는 것이 ‘희망’이다. 희망 없이 산다. 그렇다 보니,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소비하면서 산다. 남아나는 게 없다. 희망이 없으니 영혼까지 탈탈 털어서 오늘 끝장내고 만다.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19.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결국 로마교회 공동체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여기에 있다. ‘강한 자들’, 즉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나, ‘약한 자들’ 곧 유대인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으면 된다. 이거 너무 당연한 결론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리고 너무나 쉬운 결론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처럼 보이고, 너무나도 쉬운 일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 1세기 초대교회에서 너무도 당연하고 쉬운 일이었을 것 같은 ‘그리스도 예수 본받기’, 쉽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초대교회로 돌아가라!’는 말은 굉장히 어리석은 구호이다.

 

20. 우리의 신앙,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그리고 이 구절을 진지하게 묵상해 보자.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너희도 서로 받으라!” 너무나도 당연하고 쉬운 일 같으나,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하고 있지 못하는 일이다. 왜 1세기 로마교회 공동체는 이것을 하지 못했으며, 왜 우리는 여전히 이것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로마서는 그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 이유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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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9. 12. 02:12

복음으로 새롭게 빚어지기를 간구하는 기도

(롬 14:1-12)

 

복음으로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지만

우리는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 복음으로 오히려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비판하려 듭니다.

이런 일이 너무도 빈번하여서

복음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지 못하고

오히려 복음 때문에 상처 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슬픈 세상이 되어 가는 듯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복음을 온전히 깨닫을 수 있는 지혜와 사랑을 부어 주소서.

우리가 성령의 역사에 나를 맡기지 못하고

우리를 둘러싼 삶의 외적 요인들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다 보니

복음의 능력이 우리 안에 온전히 나타나지 못하는 듯합니다.

복음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존재를 무시하고 남을 판단하는 일에 열심인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복음으로 새롭게 빚어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길 원하오니,

주여,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자신이 가진 힘을 믿고 다른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자신이 가진 특권을 이용하여 다른 이들을 정죄하지 말라고,

그러지 말고, 복음으로 다시 거듭나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그것이 어떠한 삶인지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래서 온 우주만물을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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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9. 12. 02:10

로마서 2. 업신여기는 자, 비판하는 자

(로마서 14:1-12)

 

1. 성경이 시대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성경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친절하지 못하다. 구약성경 중 열왕기상하를 읽을 때도 가장 헷갈리는 것은 왕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면서 남유다 왕과 북이스라엘 왕에 대한 지시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잘 알고 있지 못한 이들은 남과 북 왕조의 이야기가 얽히고 설켜 있는 이야기 구조가 굉장히 헷갈린다. 현대인들이 열왕기상하를 읽으면서 잘 분별해야 하는 것은 누가 남유다 왕이고, 누가 북이스라엘 왕인지 구분해 가면서 읽는 것이다.

 

2. 신약성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이 쓰여진 시기에 따라서 차례대로 배열되어 있으면 좀 더 쉽게 다가올 텐데, 신약성경도 쓰여진 시기와 상관없이 뒤죽박죽 배열되어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굉장히 헷갈리게 만든다. 바울서신 중에 로마서가 가장 먼저 배열되어 있지만, 로마서보다 고린도서, 데살로니가서, 갈라디아서 같은 것이 먼저 쓰여졌다. 또한, 바울서신을 읽을 때는 사도행전과 함께 읽어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3.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전’, 즉 사도들이 예수님의 승천 이후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다녔는지를 기록한 책이지만, 실상 들여다보면, 베드로와 바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에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13장 이후부터는 바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도행전 28장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사도행전 다음에 로마서가 나온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굉장히 헷갈리고, 로마서의 메시지를 오해할 소지가 있다. 로마서는 사도행전 28장에서의 바울 사역을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 로마서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들여다보기 전에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을 먼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 이하에 보면, 바울은 베드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좋은 말로 표현을 해서 그렇지, 좀 거칠게 표현하면, 바울은 베드로를 욕하고 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갈 2:11). 게바(베드로)가 안디옥에서 무슨 잘못을 한 듯하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바울은 베드로를 만나 면전에 대고 욕을 했다. 도대체 베드로는 무슨 잘못을 한 것일까? 갈라디아서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베드로는 매우 비겁한 짓을 했다. 안디옥에서 이방인(이방인 그리스도인)과 함께 밥을 먹다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인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가 보낸 어떤 이들이 안디옥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는 급히 이방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자리를 피했다.

 

5. 베드로만 이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전도한 바나바조차도 베드로와 동조하여 이방인들과의 식사 자리를 급하게 떴던 것 같다. 바울은 베드로의 이 모습이 전혀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사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며 베드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다시 한 번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6. 바울이 베드로에게 화가 나서 욕을 퍼붓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힘주어 말하는 것에 대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도행전으로 가야 한다. 사도행전 15장에는 굉장히 중요한 공의회(Church Council)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이렇게 공의회를 열게 된 이유는 15장 1절 이하에 나온다. “어떤 사람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7. 초대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기독교의 유대화’ 문제였다. ‘그리스도인(follower of Christ)’이라는 말이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 11장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데, 안디옥에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모여 안디옥 교회를 세우고 함께 지냈을 때, 그곳 사람들이 이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안디옥은 이방 지역이었고, 이방인들이 주된 멤버들이었던 교회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큰 시련이 닥치는데, 그것은 교회 바깥에서 온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온 시련이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것이다. 이 핍박은 황당하게도, 복음의 핍박이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요구했던 것이다. “너희가 만약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거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이 되라!”

 

8. 이것은 이방인 전도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복음에서 벗어난 요구였다. 그러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완강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으며, 이방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 그리고 바울이 가서 복음을 전하여 세운 이방 지역의 교회마다 찾아다니면서 바울의 가르침을 뒤엎는 일들을 했다. “바울이 가르친 것은 거짓이다. 너희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바울 서신을 들여다보면, 온통 이 문제이다. 갈라디아서도 그렇고, 고린도전서도 그렇고, 로마서도 그렇고, 중요한 바울서신들은 바로 이것에 대한 싸움이다.

 

9. 이 문제는 초대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을 예루살렘에 모이게 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있었던 첫 번째 공의회였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진다. 그 결정문을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는 베드로나 바울이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였다)가 읽는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행 15:19-21).

 

10. 예루살렘 공의회의 판단은 한 마디로,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있어 율법을 준수할 필요가 없고, 유대인이 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악한 일들만 피하면 된다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공의회가 그렇게 결정했어도, 보수적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율법의 행위들을 하지 않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멀리했고, 그들에게 계속해서 율법의 행위들을 요구했다. 그래야만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복음을 율법의 행위들과 집요하게 결부시켰다.

 

11.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은 율법의 행위들과 복음을 연관시켜 구원을 말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가는 곳마다 골머리를 앓았다. 그리고 그 문제는 로마 교회에서도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로마서의 본문은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로마서에는 ‘강한 자들’에 대한 교훈과 ‘약한 자들’에 대한 교훈이 번갈아 가면서 나온다. 이러한 구조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것을 모르면, 로마서의 메시지를 완전히 놓치고 엉뚱한 해석을 낳게 된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바울이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에게 번갈아 가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면, 로마서가 눈에 들어온다. 이 구조를 기억하는 것은 로마서 이해에 있어 필수적이다.

 

12. 14장 1절의 말씀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여기에 두 주체가 등장한다. 하나는 ‘믿음이 연약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당연히 ‘약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너희’는 그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강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먹는 것’과 ‘절기를 지키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울서신에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아는 것은 로마서뿐만 아니라 바울서신 전체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하다.

 

13.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율법을 지키라”고 말하고, 바울서신에 자주 등장하는 ‘율법의 행위들’은 율법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강요하는 율법의 행위들은 세 가지이다. ‘음식정결법(먹는 문제/무엇을 먹을 것인가)’, ‘절기법/안식일 지키는 문제’, 그리고 ‘할례’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도행전 16장에 등장하는 ‘디모데’다. 디모데의 엄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이방인)이었다. 디모데는 사실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를 데리고 선교 여행을 떠나려 할 때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유대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행한다. 또한 사도행전 21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데리고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아주 큰 소동을 겪게 된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오해하길,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드로비모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했다. 이 일 때문에 바울은 유대인들에 의해 고발을 당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바울은 체포되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로마로 압송된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한 사람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14. 교회의 일상생활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을 심하게 유발시킨 것은 ‘먹는 일’과 ‘절기를 지키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의 삶의 터전은 로마가 점령한 이방 도시들이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방 도시들에는 이방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방 신전에 바쳐진 음식들은 제의가 끝난 후 그 도시의 시민들이 나누어 먹었다. 이게 문제가 된 것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코셔 음식만 먹었다. 이방신에게 드려진 음식은 절대 먹지 않았다. 그러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이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이방신에게 드려진 음식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음식이었지, 다른 의미를 갖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에서 이 두 부류는 이 문제 때문에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식탁을 공유하기 힘들었다. (너랑 같이 밥 안 먹어!)

 

15. 본문은 이렇게 먹는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2-3절).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어떤 사람은 ‘강한 자들’을 가리키고, 믿음이 연약하여 채소만 먹는 자는 ‘약한 자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지금 두 부류에게 동일하게 교훈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어서 절기에 관해서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5절). 여기서,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어떤 사람은 ‘약한 자들’이고,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어떤 사람은 ‘강한 자들’을 가리킨다.

 

16.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무엇인가?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고,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서로를 업신여기고, 비판하는 자들 사이에 무슨 평화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교회에서 발생하는 일이라면, 이러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평화가 없는 교회는 그 자체로 악한 교회일 뿐 아니라 덕이 없는 교회요,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는 교회요, 하나님의 나라를 전할 수 없는 교회로 보인다는 것이다.

 

17. ‘업신여기다’는 헬라어의 ‘엑수테네오’를 번역한 말이다. 좀 더 쉬운 말로 ‘멸시하다’는 뜻이다. “어떤 이를 지위나 장점이나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대하고, 고려 대상도 되지 않는 사람으로 여긴다는 말”이다(요즘 말로 개무시하다는 뜻). ‘비판하다’는 헬라어 ‘크리노’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사람이나 사물을 판단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정죄한다는 뜻”이다(요즘 말로 꼴깝떤다는 뜻). (스캇 맥나이트) ‘업신여기다’와 ‘비판하다’는 말의 뜻을 보면서, 로마 교회를 한 번 떠올려 보라. 참담하지 않은가? 교회가 두 부류로 나뉘어서, 이 부류는 저 부류를 업신여기고 있고(개무시하고 있고), 저 부류는 이 부류를 비판(정죄)하고 있는(꼴깝떨고 있는) 모습 속에서 무슨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가.

 

18. 이러한 두 부류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6-8).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말씀이다. 그런데, 어떤가, 이게 단순히 개인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다가오는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극명하게 갈등을 겪고 있는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자신의 삶 속에 있는 극명한 갈등을 해결할 마음도 없고 관심도 없으면서, ‘사나 죽으나 나는 주님의 것’이라고 은혜 받고 마는 것은 말씀을 사사롭게 만드는 일이다.

 

19. 안디옥에서 베드로는 야보고가 보낸 유대인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더라도 결코 이방인들과 나누는 식사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안 되는 거였다.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은 아마도 매우 강경한 보수적인 유대인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정말로 복음에 붙들린 사도였다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의 행위들’을 요구했던 보수적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맞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지켜주었어야 한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식사 도중에 자리를 피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뻘쭘하고 황당했을까. 이 사건 때문에 아마도 교회를 떠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20. 우리가 삶 속에서(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든, 어디서든) 경험하게 되는 갈등들을 보면서, 우리가 그 갈등들을 해결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그 갈등을 해결해 나갈 때, 로마서의 말씀은 우리를 잠시 멈추어 세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알려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평강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나니…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17-19, 23b).

 

21. 우리가 어디에, 어느 자리에 있는지, 업신여기는 자가 되거나 비판하는 자가 되기보다, 믿음을 따라 의와 평강과 희락을 생각하고,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들에게도 칭찬받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되면 좋겠다. 존재하는 자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하지 말고(존재하는 자를 존재로 인정하는 첫걸음은 문안 인사 나누는 것 / 사람을 보면 인사를 하라), 내가 곧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존재하는 자를 존귀하게 여기고,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화평과 덕을 세우는, 즉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화평케 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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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9. 8. 15:36

[로마서와 한국교회]

 

요즘 한국교회를 보면, 바울이 로마서에서 신랄하게 비판하는 '약한 자들(유대인 그리스도인)'이 된 듯합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특권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특권 의식을 가질 수 있는 구체적 물증은 '토라'였습니다. 토라를 통해 그들은 선민의식을 가졌고, 그 특권을 이용하여 그 특권을 공유하지 못한 '이방인 그리스도인(강한 자들)'을 비판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토라 준수를 강요하고, 특별히 음식정결법과 안식일, 할례의 준수를 통해서 이스라엘 회중에 들어와야 구원을 받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바로 이러한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들고, 경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고, 경계 바깥에 있는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 이들이라는 이상한 이분법을 통해 자신들의 특권을 주장하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바울은 "당신들이 틀렸소!"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를 보면, 바울에게 비판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는 '실패한 유대인'이 되려는 듯합니다. 성경(또는 복음)을 '토라'로 전락시켜 자신들이 토라를 가졌기에 특권층이고, 그 특권 의식을 앞세워 도덕적 정죄에 앞장서면서 위선에 빠져버린 듯합니다. 그들이 위선자인 것은 안과 밖을 경계짓는 몇 가지의 율법만 준수할 뿐, 율법 전체를 신실하게 지키려는 생각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에 등장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행위들은 음식정결법, 절기(안식일), 그리고 할례입니다. 그들은 이 세 가지를 지키는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유대인이냐 아니냐, 즉 구원받았느냐 아니냐를 구분 지었습니다. 이 행위들은 그들의 신실함을 표시한다기 보다 그냥 자신들을 다른 이들과 구분짓는 경계 표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경계 표시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함으로 그들도 자신들의 경계 안에 들어와야 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줄곧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구분짓는 경계 율법(행위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술담배 문제, 제사문제, 주일성수 문제 등이었다가, 최근에는 동성애 문제, 종교다원주의 문제 등으로 그 이슈가 바뀌었습니다. 성경이, 또는 복음이 '토라'화 되면, 경계 지으려는 행위들이 계속해서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이라는 것이 '행위들'로 축소되어 바울이 그토록 바로잡고자 했던 '율법과 복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발목이 잡혀 초등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딱 그 수준으로 전락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렇게 경계 짓고 구분 지어 사람들을 정죄하는 한국교회를 생각하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가 다음과 같이 경계를 짓는다면, 굉장히 기분 나쁠 것입니다.

 

E.P. Sanders(E.P. 샌더스)의 '바파유(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출간 이후, 바울 신학은 이전에 보던 방식으로 더이상 들여다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샌더스의 연구에 따라, 유대교도 행위의 종교가 아니고 은혜의 종교라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시대에, '은혜'를 말하면서도 결국 그 은혜와 믿음을 '행위'로 다시 환원시켜 온갖 경계들을 만들어내는 한국교회의 후진성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우리 시대의 과제입니다.

 

본인이 다니고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에게 'E.P 샌더스'를 아느냐고 한 번 물어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 샌더스의 '바파유'를 아느냐고 물어보면 어떨까요. 또한 샌더스가 바파유를 통해서 기독교가 바울 신학, 유대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어떤 통념을 뒤집었는지를 물어보면 어떨까요. 본인 교회의 담임목사가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그 교회를 계속 다녀도 괜찮을 것이고, 그러나 담임목사가 샌더스를 알지도 못하고, '바파유'가 뭔지도 모르고, 샌더스 이후의 바울 신학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른다면, 그 교회를 계속 다닐지 말지 한 번 고민해 보라고 하면 어떨까요. 이렇게 특정인이나 저서를 기준으로 해서 담임목사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그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아닌지 판단한다면, 굉장히 기분 나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마치 ‘율법의 행위들’을 요구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처럼 복음과 율법의 행위들을 연관시켜, 사람들을 판단하고 경계 짓는 일에 너무 열중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 이름 외에 어떤 것도 알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은 바로 이 복음에 있는 것인데, 왜 우리는 여전히 ‘율법의 행위들’을 요구하며,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나누고, 마치 자신들은 구원을 보장받은 사람들 인양 자신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경계 짓고 몰아내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아직도 복음이 온전히 전해지지 못해서 그런 듯합니다.

 

한국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입니다. 한국인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한국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인 한국교회가 바울의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2의 이스라엘(유대인)이 되려 하지 말고, 신실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 한국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행위들을 통해 경계 짓는 신앙을 구사하지 말고, 은혜를 사모하여 성령의 법을 통해 온 우주 만물을 품에 안아 사랑과 믿음으로 교회를 세워가길 소망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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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9. 8. 14:11

서로 문안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롬 16:1-16)

 

갈등이 있어 평화를 잃어버렸던 로마교회를 보듬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 거룩한 편지를 로마교회에 전했던 바울,

그리고 이 편지가 우리들에게 성경으로 전해진 것에 대해서

무한히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살면서 갈등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지만

주님께서 갈등으로 인해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의 길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평화롭지 못하면

이 땅의 그 어느 존재도 평안 가운데 살아갈 수 없습니다.

복음으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이들이 평화롭게 지내지 못한다면

이 땅의 그 어느 누가 평화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우리도 로마교회처럼 평화를 갈망하게 하시고

평화로운 교회, 든든한 교회를 세워 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문안하는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이 말씀이 능력이 되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우리도 우리 삶 속에서

무관심한 마음과 게으름을 내려놓고

부지런히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지체를 살펴

서로 문안하는 사역에 헌신하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문안을 온 몸으로 전달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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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9. 8. 14:10

로마서 1: 서로 문안하라

(로마서 16:1-16)

 

1. 로마서는 편지다. 2000년 전, 편지는 지금처럼 우편 배달부가 대신 배달해 주는 체계가 아니었다. 신뢰할 수 있는 인편을 통해 자신의 편지를 전달했다. 로마서는 바울이 썼지만, 그것을 로마교회에 전달한 인물은 ‘뵈뵈(Phoebe)’이다. 로마서가 편지라를 것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편지는 구체적인 발신자가 있고, 구체적인 수신자가 있다. 그리고 편지는 구체적인 내용을 다룬다. 즉, 편지를 쓴 사람은 수신자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의견을 표출하고, 그 의견을 통해서 수신자가 겪는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2. 로마서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교회가 당면한 삶의 정황을 먼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바울 당시 로마는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제국이었지만, 그곳에 자리 잡은 로마교회는 매우 보잘것없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로마교회는 한 덩어리의 교회가 아니었으며, 3~5개 정도의 가정교회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당시 교회는 지금처럼 한 처소에서 다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몇 명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각 가정에서 삼삼오오 모였다. 3~5개 정도의 가정교회 구성원을 모두 합하면, 100명에서 최대 200명 정도의 그리스도인이 로마교회를 구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몇 명 안 되는 구성원이 모인 교회였지만, 그 안에서 발생한 문제는 굉장히 다이내믹하고 해결하기 쉽지 않았다. 로마교회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 부류는 로마교회를 세운 유대인 그리스도인(Jewish Christian)이었고, 다른 부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Gentile Christian)이었다. 유대인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로마교회는 처음에 유대인이 가진 문화 중심으로 교회가 운영되었다. 그러다, AD 49년경 로마의 황제 클라우디우스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추방을 당한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 18장 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글라우디오(클라우디우스)가 모든 유대인들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4. 사도행전 18장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유대인 추방 명령 때문에 브리스길라(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그곳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 함께 사역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침 생업도 같아서 바울과 이들 부부는 함께 일하며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그곳에서 사역하는 일에 서로 잘 협력할 수 있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바로 그 시절에 고린도 근처에 있는 항구도시 겐그레아에서도 이들은 사역을 했고 그때 세워진 겐그레아 교회에서 뵈뵈를 만났을 거로 추측한다. 그러니까, 바울과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 그리고 뵈뵈는 꽤 특별한 인연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5. 몇 년 후, 추방령을 내렸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죽자 그 뒤를 이어 네로가 황제에 등극을 했고, 네로 황제는 클라우디우스가 시행했던 유대인 추방령을 취소한다. 그러자 로마를 떠났던 유대인 그리스도들은 다시 로마로 돌아왔고, 로마교회를 지키고 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다시 교회를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추방당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교회를 떠나 있는 동안에 시작된다. 유대인 중심으로 로마교회의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교회에서 떠나 있는 동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형성했던 교회 문화를 없애 버리고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교회 문화를 구축해 놓았던 것이다.

 

6. 게다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로마에서 오랜 세월 터를 잡아 살아온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추방당했다 다시 돌아온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신분에는 차이가 존재했다. 추방되었다 돌아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은 미미했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 또한 낮아졌다. 무엇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교회에 다시 합류했을 때 그들을 가장 괴롭힌 문제는 율법 준수의 문제였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떠나 있는 동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아도 되는 교회의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두 부류 간에는 갈등이 끊이질 않았고 둘 사이에는 깊은 골이 생겼다.

 

7. 로마서에는 로마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두 부류를 각각 지칭하는 명칭이 나온다. 강한 자들(the strong)과 약한 자들(the weak)이다. 누가 강한 자들이고, 누가 약한 자들일까?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강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약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정확히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르는 명칭은 아니다. 이방인 중에서도 약한 자들의 부류에 끼는 사람들이 있었고, 유대인 중에서도 강한 자들의 부류에 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을 나누는 기준은 율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율법을 준수하고 구약성경의 내러티브 안에 존재하기를 원했던 이들은 약한 자들의 부류에 속했고, 율법과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내러티브에 별 감흥이 없는 이들은 강한 자들의 부류에 속했다. (한국교회의 술담배 문제를 생각해 보라.)

 

8.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로마서에서 율법에 대한 이야기가 첨예하게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정황 때문이다. 율법이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이 평화롭게 지내는 것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두 부류가 평화를 이루는데 있어 율법의 문제를 넘어서지 않고는 해결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율법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매우 달랐기 때문에 두 부류 사이에는 긴장이 멈추질 않았다. 한 마디로, 평화가 없었다. 이 두 부류의 이러한 긴장 관계를 떼어 놓고 로마서에서 벌이고 있는 율법 논쟁을 읽으면 안된다.

 

9. 바울신학과 로마서는 개신교인들에게는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신학과 로마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색깔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서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바울의 신학과 로마서의 내용을 아주 면밀하게 살펴왔다. 최신 연구에 의하면, 로마서를 읽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로마서를 거꾸로 읽는 것이라는 제안이 있다(스캇 맥나이트). 로마서를 1장부터 정방향으로 읽어 나가면 놓치게 되는 것이 있는데, 로마서가 편지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는 교리서가 아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1장부터 정방향으로 읽어 나가면, 로마서는 바울이 기독교 신학을 정교하게 다듬은 교리서처럼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로마서가 편지라는 것을 망각하게 되고, 편지라는 것을 망각하게 되는 순간, 로마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왜곡되기 쉽다는 것이다.

 

10.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로마서는 16장부터 거꾸로 읽어 나가는 전략이 필요하다. 16장부터 거꾸로 읽어 나갈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어떠한 교리적 선언(doctrines)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리고 공동체이다. 우리는 뵈뵈라 불리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먼저 만나게 되고, 곧바로 로마교회 공동체의 일원들(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바로 이거다. 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복음이지, 사람을 어떠한 교리에 맞춰 재단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문안하는 것이다. 서로가 문안한다는 것, 안부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상대방을 내 삶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귐이 없으면, 그 어떤 장대한 교리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11. 로마서에서 뵈뵈는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가본 적이 없다. 로마교회는 로마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교회이지, 예수님의 열 두 제자나, 바울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전혀 아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가본 적도 없고, 그곳의 구성원 중 몇몇만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 그 교회의 구성원들을 만나본 적이 없다. 즉, 그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나눈 적이 없다. 그래서 로마서는 편지 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조심스러운 말투와 격식을 갖춘 말투로 되어 있다. 이런 분위기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 특별히 빌립보서나 고린도전후서와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바울은 빌립보서나 고린도전후서에서는 그곳의 구성원들과 친밀한 교제를 했던 터라, 감정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로마서에는 그러한 감정의 호소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로마교회의 구성원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에게 감정적인 호소를 하는 일은 별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적이지 못하다.

 

12. 뵈뵈는 ‘로마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를 들고 로마에 왔다. 아마도 뵈뵈는 겐그레아를 떠나 로마에서 살려고 왔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뵈뵈는 로마교회의 교인들 앞에서 바울의 편지를 낭독해야 하는 중대한 사명을 가진 여인이었다. 뵈뵈가 어떻게 바울의 편지를 낭독하느냐에 따라서 로마교회를 향한 바울 사역의 성패가 달렸던 것이다. 뵈뵈라는 이름의 뜻은 ‘타이탄의 여인’이라는 뜻이다. 이름에서 벌써 이방인이라는 게 나타난다.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에서 왔고, 그곳의 일꾼이었다. 한국어로는 일꾼이라고 번역했지만, 영어로는 servant 또는 deaconess로 번역한다. 우리가 잘 아는 말로,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였다.

 

13. 한국교회에서 집사(servant, deaconess/deacon/일꾼)라는 호칭은 장로나 권사 되기 전 단계의 직분 이미지가 강하지만, 성경에서 집사의 원래 뜻은 ‘교회의 사역을 공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교회의 공직자’라는 뜻이다. 지금도 공직자로 세워지려면 여러가지 도덕적 성품이나 지도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처럼, 뵈뵈가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였다는 것은 그가 교회 공동체로부터 그리스도인다운 성품이나 지도력의 은사를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집사 직분에는 이렇게 인정과 책임이 담겨 있는 것이다. (공무원, 공무수행)

 

14. 게다가 바울이 뵈뵈를 일컬어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라고 명확히 말하는 이유는 바울에게 있어 뵈뵈는 단순히 한 교회의 일꾼이 아니라 자신의 동역자라는 의미를 담고자 함이다. 뵈뵈는 그냥 집사가 아니었다. 바울의 동역자였다. 바울에게 아볼로나, 두기고, 디모데, 에바브로, 디도 같은 동역자가 있었듯이, 뵈뵈는 바울에게 이들과 같은 존재였다. 그뿐 아니었다. 뵈뵈는 “여러 사람과 바울”의 후원자였다. 그 당시 로마 문화에서 ‘후원자’라는 뜻은 매우 명예로운 호칭이었다. 바울에게 뵈뵈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뵈뵈가 바울의 편지를 로마교회에 전하는 사람인 것이다. 로마교회는 뵈뵈를 자매로 받아들여야 할 의무를 갖게 된다. 바울이 뵈뵈를 그들에게 추천했기 때문이다. 이제 뵈뵈는 로마교회에 머물며, 바울의 메시지를 생동감 있게 전하게 될 것이다. 바울의 사역은 뵈뵈에게 달렸다. (로마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그래서, 뵈뵈에 빙의하듯이 전해야 한다. 나는 뵈뵈다.)

 

15. 바울의 뵈뵈 천거에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는 온통 ‘문안’에 대한 것이다. 스물 대여섯 명의 이름이 나열되고, 거명되는 이름 외에도 그들을 둘러싼 이들에 대한 문안이 계속 이어진다. 인사를 나누는 이 장면에서 계속 반복되는 두 개의 용어가 있다. 하나는 ‘문안하라(greet)’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이다. 이들이 서로 나누는 문안 인사는 일반 사람들의 문안과는 다르다. 이들의 문안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문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권면을 아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이 편지를 로마교회에 보내게 된 이유를 알면 문안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16. 여기에서 열거되는 이름들을 볼 때 우리는 구분을 잘 하지 못한다. 우리가 보기에 모두가 그냥 이국적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 열거된 이름들은 그 사람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인지, 이방인 그리스도인인지를 드러내고 있다. 누가 유대인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이방인 그리스도인인지 구별하는 작업은 단순한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하지 않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이 두 부류 사이의 갈등을 생각하면 바울이 이들에게 서로 문안하라고 말하는 것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17. 마지막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서로 갈등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의 건강함은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서로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고 있는가, 아닌가. 서로 간에 평화가 없으면 서로 문안할 수 없다. 하지만 서로 문안하는 것은 서로 간에 평화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18.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첫 번째 원칙은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고, 그리고 서로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는 것이다. 문안하는 일은 내가 당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집중한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람의 삶을 보듬고 있다는 뜻이다. 진실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는지, 어떤지, 궁금할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안부를 묻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 새롭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19. 우리 교회의 정황을 돌아볼 때, 로마교회보다는 훨씬 평화롭다. 우리는 로마교회처럼 극렬한 대립 가운데 있지도 않고,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 문안하라’는 말씀을 지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00년대 들어와서 주류교회들이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동성애 문제 때문에 두 부류로 나뉘어 첨예한 대립을 함으로써, 교회가 분열의 아픔을 계속 겪고 있다. 최근 UMC 교회도 주류교회 중 마지막으로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는 중이다. GMC 교단이 새로 출범해서 UMC에 소속되어 있던 많은 교회들이 UMC를 떠나 GMC로 옮기고 있다. 우리는 적어도 이런 풍랑 가운데 있지 않으니, ‘서로 문안하라’는 말씀을 좀 더 잘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0.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면 좋겠다. ‘서로 문안하라!’ 이 말씀을 삶 속에서 실제로 실행에 옮겨보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문안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제애, 자매애는 교회 공동체의 기초이다. 기초가 튼튼해야 건물을 잘 지을 수 있듯, 신앙의 기초가 튼튼해야 교회 공동체가 든든히 세워지는 것이다. 말씀에 순종해 보자. (이번 주에 적어도 한 사람에게 카톡이나 전화해서 안부를 물어보자. 내가 먼저. 특별히 오랫동안 안부를 묻지 못했던 교회 지체에게 안부를 물어보자. 그리고 목사의 안부 연락을 수동적으로 기다리지만 말고, 목사에게 먼저 안부를 물어오는 형제자매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안부 묻는 일은 어떤 한 사람에게 지워진 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 된 교회 공동체 모든 구성원에게 지워진 사역이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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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프로젝트: 돌보는 사람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 어느 맑은 여름 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 / 연한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 연못 속에선 아무 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죠

(김민기 작사/작곡: 작은 연못)

 

평화를 기원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원래 정치적 평화를 기원하는 노래입니다.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정치적 평화만 잘 해결되면 아주 평화로운 세상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만 잘 해결되면 모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이상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만 생각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과 자연 사이의 평화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를 다루는 분야를 ‘정치학(politics)’라고 한다면, 사람과 자연 사이의 평화를 다루는 분야를 ‘생태학(ecology)’라고 합니다. 정치의 역사는 매우 깊습니다. 동서양 고전은 모두 정치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서구사회의 고전인 플라톤의 <국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그리고 동양사회의 고전인 공자나 맹자 등은 모두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하면 평화를 이루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생태학의 역사는 짧습니다. 그동안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매우 수동적이고 배타적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인간은 자연을 존재 바깥에 있는 존재로 여겨왔습니다. 자연에 어떤 인격을 부여하거나 의미를 부여해서 돌봐야 하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은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고, 인간은 자연을 필요한 대로 ‘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인간의 삶에 아무런 영향이 없을뿐더러, 인간은 자연을 이용해서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과학기술이 급격히 발전하자, 자연에 대한 ‘착취’는 극에 달했습니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라는 책은 생태 문제를 공론화 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책입니다.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이 생태계를 얼마나 망가뜨리는 지, 레이첼은 4년 간의 직접 조사와 연구를 통해 과학에 기초한 기술이 초래한 재앙을 온 세상에 고발합니다. 1962년에 발생한 일입니다. 레이첼 카슨의 책이 기폭제가 되어 그 이후 인류(특별히 미국 정부)는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정부가 정책을 세울 때 경제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생태 문제를 함께 돌보기 시작합니다.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지 60년이 지난 지금,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는 더 이상 인간과 인간에 대한 노래로만 여겨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인간이라는 존재와 자연이라는 존재의 두 붕어가 살고 있다는 상상력이 꼭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지구라는 연못 속에는 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입니다. 둘이 싸우고 있습니다. 인간 붕어는 자연 붕어를 두들겨 패고 있는 중입니다. 다행히 자연 붕어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반 죽게 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인간 붕어의 폭력은 멈출 기색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자연 붕어는 죽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작은 연못의 이야기가 치닫는 결론으로 인간의 운명은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 붕어의 연한 살이 썩어 들어갈 것이고, 지구 연못도 썩어 들어갈 것이고, 결국 인간 붕어는 더 이상 지구 연못에서 존재를 감추게 될 것이다.

 

상상력은 창작할 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상상력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현재 인류가 멸망의 길을 벗어나 생존과 번영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상상력입니다. 기후변화가 가져올 미래에 대한 상상력, 그리고 그 미래를 끔찍하게 여길 수 있는 상상력, 또한 그 끔찍한 미래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상상력, 그리고 그러한 실천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생존과 번영의 상상력, 이런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상상력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기후변화 프로젝트: 돌보는 사람들]은 단순한 교회의 프로그램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루는 구원에 대한 스토리입니다. 이 스토리는 흥미와 재미를 유발하는 스토리를 넘어선 변화(transformation)를 이끌어 내는 스토리입니다. 우리는 변해야 하고, 변하지 않으면 멸종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절박한 상상력이 추동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하여 우리가 다루게 될 것들은 우선, 기후변화에 대한 이해입니다. 예언자적 목소리를 지닌 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 그리고 신학자들은 60여년 전부터 끊임없이 생태 문제를 거론해 왔습니다. 특별히 지난 몇 년간 급박해진 기후변화 앞에서 절망의 목소리를 내는 예언자들(과학자, 인문학자, 신학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는 시간을 갖을 것입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브레이킹 바운더리스 Breaking Boundary> 같은 다큐멘터리는 기후변화 이해를 도와줄 것입니다.

 

둘째, 이 프로젝트를 통하여 우리가 다루게 될 것은 기독교 창조론과 생태 영성에 대한 이해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왜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예수 잘 믿고 천국 가면 그만인데, 우리가 왜 이 땅의 일을 돌봐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명백한 오해가 불러온 참사입니다. 기독교 창조론과 생태 영성에 대한 이해를 갖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질문이 기독교 신앙과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그 누구보다 기후변화에 대해서 적극적인 대응을 하도록 이끈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생태 영성은 하루 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태 영성이란 어떤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고 마인드 셋입니다. 생태 영성의 지혜와 마인드 셋을 갖추는 일은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수행해 나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셋째, 이 프로젝트를 통하여 우리가 다루게 될 백미는 실천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실천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손과 발이 움직이기 전에 머리와 가슴에 변화가 있어야 하고, 손과 발이 지속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머리와 가슴을 언제나 뜨겁게 유지해야 하기에 생태 영성을 갖추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는 실천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기후변화를 촉발시키지 않는 삶의 방식을 갖추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고, 어떠한 생활의 변화를 이루어야 하는지, 배우고 실천하고 구성하는 작업이 이 프로젝트의 백미입니다. 이 실천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도 상상력입니다. 실천은 매우 창조적인 작업입니다. 배우고 구상하는 것을 실현해 낸다는 것은 상상력 없이 불가능합니다.

 

[기후변화 프로젝트: 돌보는 사람들]을 시작하면서, 확실한 목표를 하나 더 설정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여정을 꼼꼼히 기록하여 1년 후에 책을 출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것, 우리가 나눈 것, 우리가 실천한 것들을 꼼꼼히 기록해서 우리와 같은 길을 걸어가려고 결단한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이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또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길을 걸어가는 일이 의미 있는 삶이라는 것, 그리고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메시지를 담아보려고 합니다. 이 의미 있는 여정에 도반(道伴/함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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