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2. 10. 29. 04:48

[기후교회로 가는 길]

 

2. 파괴된 세상과 하나님의 사랑

 

2차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독일군들은 지구상에서 유대인을 말살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강제 수용소에 몰아넣고 잔인한 방식으로 죽였습니다. 이렇게까지 끔찍한 일을 당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절망에 빠졌고, 끔찍한 죽음의 위기에 놓여 있으면서 이런 절실한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17,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며 인간의 이성은 미래에 대하여 장미빛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떤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통념을 뒤집어 놓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 2차 세계대전이 그것이 입니다. 이성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것은 결국 처참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한 비참한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은 인간 이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신학자들은 신학을 다시 정립했습니다. 이성이 몰아낸 신앙의 자리를 다시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죠. 다시 말해, 하나님을 쫓아낸 세상에 다시 하나님을 모셔 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그러한 세상을 경험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러한 세상입니다. 파괴되고 있는 세상. 짐 안탈 목사님은 아주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몬타나(Montana) 주 버트(Butte)에 있는 구리 폐광, 버클리 광산(Berkeley Pit)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기 공급에 쓰이는 구리를 생산하기 위해 파헤쳐진 버클리 광산은 한 때 세계의 구리 수요의 3분의 1을 공급하던 거대한 구리 광산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버클리 광산이 폐광된 후, 그곳에 물이 차면서 자연스럽게 거대한 연못이 생겨났습니다. 그 연못의 물은 구리, 카드뮴, 아연, 비소 등이 섞인 오염된 물이었고, 환경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겨울이 다가오자 남쪽으로 이동하던 기러기 떼가 잠시 쉬어 가기 위해 그 거대한 연못에 내려 앉았습니다. 밤새 연못으로부터 기러기 떼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아침에 가보니, 모든 기러기가 죽어 있었습니다. 배를 갈라보니, 내장이 모두 녹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처음 발생한 때는 1995년입니다. 그러나 20여 년이 지난 2016년 똑 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이때는 더 많은 기러기 떼가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자원을 얻기 위해 무분별하게 파헤쳐진 광산과 그 이후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아 엉뚱한 생명들이 죽어 나가는, 이렇게 파괴된 세상, 이런 세상이 바로 하나님 없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이렇게 파괴된(또는 파괴되고 있는)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짐 안탈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파괴하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비통해 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근본적인 사명이라고 나는 믿는다”(기후교회, 83쪽). 파괴된 세상을 향해 비통한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자주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들의 마음은 비통한 마음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당시의 상황 속에서 파괴된 세상을 향해 비통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파괴된 세상을 어떻게든 다시 살려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파괴된 세상을 향해 비통한 마음을 갖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성경을 보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아주 보편적인 마음입니다.

 

베트남 전쟁 반대와 소수자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힘썼던 인권 운동가 줄리안 본드(Julian Bond)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큰 울림을 줍니다. 1960년대부터 인권 운동가로 살았던 본드는 사회변혁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끈덕진 지속성”이라고 말합니다. 끈덕진 지속성을 갖는 일은 영성이 형성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기후변화에 대해서 공부하는 이유는 기후변화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함입니다. 끈덕진 지속성 외에 사회변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전략과 연대입니다. 그러니까, 전략, 연대, 그리고 끈덕진 지속성은 사회변혁을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요소입니다.

 

『찬미받으소서』에서 프란체스코 교황은 “우리는 새로운 보편적 연대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찬미받으소서. 21쪽).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 ‘보편적 연대’를 말하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가톨릭(catholic)’이라는 용어는 ‘보편적인’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보편적인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인종과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종교다원주의 세상입니다. 하나의 보편적인 종교가 지배하지 않고, 여러 개의 종교가 가치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 외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등이 서로 종교적 가치를 놓아두고 경쟁하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편적인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연대’를 말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기후변화의 문제는 각자 종교적 신념을 넘어서는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후변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각자 종교적 신념의 바탕 위에,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서로가 ‘연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기후교회』에는 상상으로 쓴 편지가 등장합니다. 제목은 “2070년 성회수요일에 교회 문을 닫게 되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기후교회, 99-105쪽).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아주 가슴 아픈 문구가 나옵니다. “나의 가장 큰 슬픔은 지난 수십 년 동안에, 신앙이 가장 크게 필요한 시간에, 마치 코끼리, 호랑이, 판다, 그 밖의 수천 종의 생물종들의 멸종을 매년 성 프란체스코의 날에 애도했듯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인류가 하나님을 포기한 것은 널리 번진 전쟁의 증가, 국경 장벽들에서의 지속적인 살해들, 사정없는 모기들이 전염시킨 바이러스들이 이제는 심지어 캐나다에도 침략했다는 것 등등에 대한 정말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문명생활의 파괴자들로(유지자들이 아니라) 경험되면서, 사람들이 더 이상 사랑의 하나님을 믿을 수 없게 된 것으로 봅니다”(101쪽).

 

끔찍한 일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유슈비츠와 같은 끔찍한 일을 경험한 많은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라고 질문하며, 자신들의 고통 가운데서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렸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만약, 기후변화를 계속 방치하여, 기후변화로 인해 더 깊어지는 사회적 문제들 가운데 끔찍한 일들을 앞으로 계속 경험하게 된다면, 편지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점점 더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될 것입니다. 즉, 기후변화 때문에 코끼리, 호랑이, 판다 등 수많은 생물종들이 멸종하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멸종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기후재앙을 막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깨어서 열심을 내야 하는 이유는 파괴되고 있는 세상을 보면서 신앙을 잃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멸종’을 냉소적으로 받아들이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지, 멸망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후변화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는 재앙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자초한 재앙입니다. 인간들이 연대하여 힘을 합치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재앙입니다. 이 재앙을 막아내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고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세상에 선포하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바로 지금, 기후변화를 해결하기 위해 힘쓰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Posted by 장준식

[반려견과 동물신학과 리추얼]

 

우리 교회 집사님네는 키우던 반려견을 안락사로 떠나 보냈다. 17년 간 한 가족처럼 지내던 반려견을 안락사로 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안락사 예약을 몇 번이나 취소하고, 또 취소했다. 그러다 사고와 노화로 인해 이제는 몸을 가누는 게 힘들고, 밤마다 아파서 울어대는 반려견을 살게 놓아두는 것은 집사님네나 반려견에게 더이상 좋은 일이 아니어서 결심을 했다.

 

반려견 해리(Harry)를 안락사 시키기로 한 날 아침, 우리는 집에 모여 함께 리추얼을 했다. 나는 예식서와 오일과 십자가를 준비했다. 우리는 헐떡이며 누워 있는 해리 곁으로 갔다. 눈을 뜨지 못하고 숨만 헐떡이는 해리 곁에서 해리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의식을 시작했다. 나는 예식사를 낭독했다.

 

"우리는 해리를 떠나 보내면서 해리를 주님 손에 맡기기 위하여 이 예식을 행합니다. 해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이제 해리는 하나님 품으로 되돌아 갑니다. 이제 해리를 떠나 보내지만,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해리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찬송가를 불렀다. "그 큰 일을 행하신 주께 영광!" 찬송가를 부른 후, 나는 주님께 기도하며 반려견을 떠나 보내는 가족들을 위로했다.

 

말씀은 이사야 11장 1-9절을 봉독했다. "하나님의 새창조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될 해리를 기억하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말씀의 요지는 이사야가 전하고 있는 종말론적 비전 안에서 우리가 갖을 수 있는 소망에 대한 이야기였다. 특별히, 그동안 해리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기억하면서, 해리가 가족들로부터 받은 은총과 해리를 통해서 가족들이 받은 은총을 기억해 보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은총을 주고 받은 사이이기 때문에, 해리와 가족들은 주님이 베풀어 주신 은총 안에서 영원히 하나가 될 것이고, 결국 이사야가 전하고 있는 종말론적 비전이 완성되는 날,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말씀을 전하고, 나는 마지막 떠나는 해리에게 오일을 바르며 축복해 주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는 해리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또한 해리를 떠나 보내면서 마음 아프지만 해리와 소중한 추억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새창조의 때에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는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오일을 한 번 바르고)성부와 (오일을 한 번 바르고)성자와 (오일을 한 번 바르고)성령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해리를 주님 품에 맡기노라."

 

해리를 주님 품에 맡기고 우리는 기도문을 함께 낭독했다. 이 기도문은 동물신학자 앤드류 린지가 쓴 것이다. 그 기도문에 해리의 이름을 넣어서, 모두 함께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낭독했다.

 

"순례자 하나님

우리와 함께 여행하시는 분

이 세계의 기쁨과 그림자들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슬픔 안에서

우리의 고통을 어루만지소서.

비통함 없이

희망을 가지고

죽음의 신비를 받아들이도록 도우소서.

이 세계의 그림자들 가운데서

삶의 혼란과 죽음의 공포의 한복판에서

당신은 우리 곁에 서 계시며

항상 축복하시고, 늘 두 팔 벌려 안아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압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며

당신께 돌아간다는 것을.

우리가 이 신비를 깊이 생각할 때

당신께서 해리에게 생명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해리를 당신의 사랑의 손에 맡깁니다.

온유하신 하나님

당신의 세계는 깨지기 쉽고,

당신의 피조물은 섬세하며,

우리 모두를 낳으시고 구원하시는 당신의 사랑은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아멘."

 

우리는 기도문을 함께 낭독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해리를 사랑의 손길로 쓰다듬어 주라고 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헐떡 거리는 해리의 머리와 배와 등과 다리 등을 가족들은 따스한 손길로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모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마지막으로 축도를 했다. 이렇게 해리는 주님 품에 맡겨졌다.

 

해리는 그날, 오후 5시 가족들과 함께 병원에 가서 안락사했다. 그리고 화장터로 보내져 2주 후면 한 줌의 재로 가족들 품에 안긴다.

 

한국보다 미국은 반려견 문화가 오래됐다. 지난 20년 간 미국에서 살면서, 그리고 목회하면서 적응하기 힘든 문화 중 하나가 반려견 문화였다. 어릴 때 개를 키우긴 했지만 그때는 반려견 개념이 었었다. 옛날에 개는 집 밖에서만 키우던, 그야말로 그냥 '동물'이었지, 애완견 또는 반려견의 개념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변했다. 미국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리고 한국도 이제는 반려견(동물) 문화가 아주 깊어졌다.

 

반려견(동물) 문화가 오랜된 서구사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동물신학이 발전했다.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개념이지만, 서구사회는 동물신학을 바탕으로 동물의 권리가 많이 발전되어 있다. 동물신학의 관점에서 동물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권리를 지닌 존재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반려견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아주 큰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냥 동물 한 마리가 죽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 중 한 존재를 잃은 것 같은 슬픔이 닥치기 때문이다.

 

반려견을 떠나보내는 예식을 준비하면서 아직까지 반려견의 죽음에 대한 기독교 리추얼이 많이 발전되지 못한 것을 본다. 특별히 한국 교회에서 반려견을 위한 리추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내 나름대로 동물신학을 바탕으로 리추얼을 구성해 보았다. 리추얼이 제대로 구성되려면 의식과 언어가 잘 정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반려견(동물)에 대한 사랑과 감사, 또는 존중에 대한 언어가 매우 빈약한 것을 본다. 함께 지내던 반려견의 죽음을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개죽음?" 이처럼, 마땅한 말이 없다.

 

문화는 하루 아침에 유통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수고가 담겨 있어야 한다. 반려견(동물)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부과된 숙제는 단순히 반려견을 심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랑을 담은 리추얼과 언어를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리추얼과 언어가 대중적으로 유통되도록 힘쓰는 일에도 반드시 힘을 써야 한다. 그래야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해서, 죽으면 마음이 찢기듯 아픈 나의 반려견(동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들의 죽음 앞에서 내가 흘리는 눈물이 우습지 않아지는 것이다.

 

나는 반려견(동물)을 키우지 않지만, 목회자로서 반려견을 잃은 교우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보듬어주려 노력한다. 동물신학이 주장하는 바, 나는 모든 동물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축복권을 지닌 존재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는 것은 목사의 마땅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 10월 22일 토요일 오전 8시 30분에 있었던 해리를 떠나 보내며 가졌던 리추얼과 그날 세상을 떠난 해리를 기억하며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22. 10. 26. 08:27

[기후교회로 가는 길]

 

1. 우리가 처한 상황과 생태 영성

 

“기후위기는 시간 싸움이다.” 굉장히 무서운 표현입니다.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은 도둑같이 임합니다. 대기에 탄소 비율이 늘어나면서 산소가 부족한 상태가 되고, 이는 바다의 산성화를 불러와 바다 생물을 죽게 만듭니다. 식수난과 식량난이 급속하게 닥쳐서 식량 폭동이 일어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전세계는 전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지금은 세상이 태평한 것 같아도, 이러한 끔찍한 일이 도둑같이 임합니다. 탄소배출을 급속히 늦추지 않으면, 2040년 정도부터 우리가 맞닥뜨리게 될 현실입니다.

 

린 화이트는 다음과 같이 중요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종교를 발견하거나 우리의 옛 종교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더 많은 과학과 더 많은 공학기술조차도 우리들로 하여금 현재의 생태위기를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27쪽). 우리가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종교로부터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버드 대학교의 종교학과에서 오랜 세월 교수로 지낸 하비 콕스가 한 말이기도 합니다. 종교는 아주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종교의 힘을 올바로 사용해야겠지만요.

 

짐 안탈은 기후위기 앞에서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진지하게 성찰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기독교가 공동의 구원을 무시하면서 개인적 구원만 강조하기를 계속한다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로부터 아무리 멀리 소외되었어도 인류를 보호하고 특권을 주는 인간중심적 투사(projection)에로 창주 하나님을 축소시키기를 계속한다면, 종교의 실천은 점차로 감소하고 피조물들의 구원에는 별로 할 일이 없게 될 것이다”(30쪽). 개인의 구원, 또는 영혼의 구원에 대한 기독교 신앙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근대 세계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신앙이 매우 인간중심적 신앙으로 변질된 것은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개인(자기)에게 집중하는 문화를 가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앙의 역할은 자기를 좀 더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갔습니다. 그렇다 보니, 짐 안탈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만약 기후위기 앞에서 이러한 인간중심적이고 개인중심적인 신앙의 형태를 고수할 경우, 기독교인이 기후위기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 듣습니다. 기후변화 프로젝트 모임에서도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소위 믿음 좋다는 복음주의권 기독교인들은 기후변화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기후변화를 믿지 않거나, 아니면, 기후변화가 발생하더라도 지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개입이나 도움없이 기후변화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지구의 모든 자원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마음껏 쓰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에 기후변화 같은 것에 신경 쓸 필요없이 자유롭게 소비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같은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면서도 어떠한 신앙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기후변화에 대하여 대처하는 마음가짐과 방식이 다릅니다.

 

17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의 여파로 지구와 기후는 2백 년이 지나 수백만 년 동안 일정하게 유지되어 왔던 자연의 균형이 깨졌습니다. 그리하여 급기야 지구과학자들은 지금 현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이라고 명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류가 지구대기자연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일찍이 수십 억년에 이르는 지구의 역사에서 한 종(species)이 지구대기자연환경에 영향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인류(Human-being)가 유일합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는 ‘인류세’라고 불립니다.

 

탄소 배출이 온실효과를 가져와 지구의 기후를 가열시킬 것이라는 과학적 사실을 인류가 처음 알게 된 것은 1850년, 존 틴달(John Tyndall)이라는 기후과학자 때부터입니다. 그 이후 1965년에 이르러서는 과학자들이 린든 존슨 당시 대통령에게 대기권에 이산화탄소가 증가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위험성을 경고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다 기후위기에 대해서 과학자들의 견해가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입니다. 특별히 1989년에 빌 맥키븐(Bill McKibben)이 쓴 『자연의 종말』이라는 책을 통해 기후변화는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수많은 과학자들은 기후위기에 대해서 여러 매체를 경고해 왔고, 이제는 일반인들까지 기후변화를 실제적으로 피부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기후변화가 발생하고 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위기가 닥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기후변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싶어도 그러한 관심을 막고 있는 두 단체가 있습니다. 바로 정치권과 종교권입니다. 이미 우리는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이 행한 파리기후협약 탈퇴 발언을 통해서 기후변화에 대한 정치권의 방해를 경험했고, 그와 더불어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했던 미국 복음주의권 기독교인들의 방해를 목도하기도 했습니다. 왜 사람들은 정치권과 종교권을 중심으로, 명백한 사실인 기후변화를 부정하고 기후변화에 대한 담론을 회피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조지 마샬(George Marshall)은 이러한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사실의 핵심은 우리가 기후변화가 일으키는 불안과 그것이 요구하는 깊은 변화를 회피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기후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53쪽).

 

화석연료 사용과 관련된 기업들이 로비를 하여 정치권이 기후변화에 대하여 부정하도록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그들의 이익이 달린 문제이고 기업의 존폐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종교권에서 기후변화에 대해서 부정하고 있는 일은 좀처럼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 외부의 현상이라기 보다 종교 내부의 현상에서 비롯된 것인데, 기독교의 창조론이나 구원론에 대한 큰 오해와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기후변화에 대하여 부정하고 기후변화 담론을 회피하며 기후위기에 맞서 기후정의를 실현할 의지나 행동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동안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뭔가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일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현재 사회정의 문제, 즉 기아, 홈리스, 인종차별, 이민과 난민 문제, 문명의 충돌과 전쟁, 식수 부족 사태, 이스라엘-팔레스탄인 문제, 공중 보건 문제, 주택 문제,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불의(injustice)와 씨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후변화는 이러한 문제들을 더 악화시킬 것이라는 데 전문가들은 의견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후변화에 의해 이미 가장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그 변화를 일으키는데 가장 적은 몫을 한 사람들이고, 그걸 다루기에 가장 적은 자원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당황스럽고 참담하게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처한 상황(현실)을 정직한 양심으로 바라보며, 기후변화로 인하여 촉발된 위기들, 또는 기후변화로 인해 더 깊어진 사회적 문제와 갈등들을 지혜롭게 해결하기 위하여 ‘생태 영성(Ecological Spirituality)’을 갖는 일은 인류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짐 안탈의 『기후교회』에서 인용했고, 이 책의 쪽수를 달았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10. 25. 07:41

정체성을 간구하는 기도

(롬 1:1-7)

 

주님,

정체성이 흐려지는 이 시대에

우리의 정체성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특별히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자로서

우리의 정체성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확고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종으로, 사도로 소개합니다.

우리는 종입니까? 우리는 사도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연관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특별한 사명을 위해 부름받았습니까?

주님, 나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도록 도우소서.

그래야

우리의 정체성을 흐리게 만들고 빼앗아버리는 이 시대에

우리가 길을 잃지 않고 주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주소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아셨기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여

모든 이들의 구원이 되시고 소망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0. 25. 07:39

바울과 나

(로마서 1:1-7)

 

1. 로마서의 첫 번째 단어는 ‘바울’이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바울, 종, 그리스도 예수 순으로 단어가 배열되어 있다. 한국어는 거꾸로 되어 있다. 바울은 지금 로마교회에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교회와 친분이 없었다. 로마에 가본 적도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겸손을 보이는 것이다. 겸손과 더불어서 자기 자신의 역할(신분)을 명확하게 표명하는 것이다. 바울은 종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2. 종(둘로스)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비천한 용어가 아니다. “애비는 종이었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에서 말하는 종은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바울이 말하는 종은 신학적 신분(하나님과 연관된 신분)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는 두 존재를 중재하는 중재자가 있다. 대표적으로, 모세가 있다. 일반적으로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중재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때 그 중재자를 ‘종’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바울이 자신을 ‘종’이라고 부를 때의 뉘앙스는 사회적 신분으로서의 노예계급을 나타내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를 중재하는 자로서의 ‘종’을 말하는 것이다.

 

3. 바울은 자기 자신을 소개하면서, ‘사도’(아포스톨로스) 라는 용어를 쓴다. 사도는 ‘messenger’라는 뜻을 가진다. 뭔가(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바울이 가지고 온 메시지는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다. ‘복음’(유앙겔리온)은 기쁜 소식이나 기쁜 소식을 낳은 업적을 말한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종, 사도, 복음에 잇대어서 소개를 한 뒤, 곧바로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4. 하나님의 복음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약속된 것이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데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신의 사도직이 구약의 예언자들, 특히 이사야 선지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물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체적 역사 속에서 나타난 인물로 소개하려는 것이다.

 

5. 로마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로마교회의 구성원인 강한 자들(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약한 자들(유대인 그리스도인)의 긴장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이 구체적인 정황과 긴장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로마서를 읽으면, 바울이 하는 말의 뜻은 산으로 간다.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겼다. 요즘 말로 개무시했다. 그런데, 그러한 태도를 지닌 강한 자들이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진지하게 듣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바울은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를 잇는 사도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약한 자들의 구체적 역사) 역사의 맥락 가운데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쉽게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6. 복음은 근거 없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 강한 자들이 업신여기고 있는 약한 자들의 구체적 역사 속에서 전해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약한 자들은 의기양양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약한 자들이 강한 자들을 향해 우월감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복음이 약한 자들만의 복음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강한 자들, 즉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시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5-6절).

 

7. 복음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와, 유대인(유대인의 역사)을 거쳐, 유대인이었던 예수 안에 나타났고, 사도들의 중재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 전체적인 과정은 은혜(카리스)이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이다. 그러면, 이방교회였던 로마교회가 가져야할 마음 가짐은 무엇이겠는가? 존중과 감사이다. 로마교회는 우선 사도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약한 자들(유대인 그리스도인)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복음을 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복음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전해졌는지를 말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마음에 존중과 감사를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8. 복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복음이 믿음을 견인한다. 하나님의 선물은 구원을 가져다 준다. 우리는 구원을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당 가는 것’으로 자꾸 축소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구원이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그냥 죽는 날 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 있는 순간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물은 그게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 생명을 풍성하게 한다. 그게 구원이다. 깨끗한 공기, 깨끗한 물, 맑은 하늘, 좋은 친구, 일할 수 있는 직장, 가족, 아름다운 자연 풍경, 이뿐 아니라 나의 마음에 위로와 평안을 주는 좋은 말들, 이 모든 것이 구원이다. 즉,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다.

 

9. 바울이 로마교회에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인사말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를 꼽으라고 하면, ‘믿어 순종하게 하다’를 꼽고 싶다.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 듯하면서도 모른다. 믿음에 대한 이해 중 가장 최악은 믿음을 ‘자기 확신’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심/욕망을 담아 믿음에 대해서 말하는 데 익숙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욕망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우리의 욕망과 전혀 상관이 없다. 믿음은 하나님의 복음(은혜, 계시)에 대한 반응이다. 믿음에는 우리의 욕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복음)가 먼저 일으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10. 바울은 믿음을 순종(복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순종이나 복종이라는 말은 현대인에게 매우 거슬리는 용어이다. 한국어로 성경이 번역될 때 현재 한국사회와는 크게 다르게 그때는 유교적인 문화가 한국사회를 훨씬 깊게 지배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의 사회적 맥락에서 볼 때, 순종(복종)은 위계질서 가운데서 아랫 사람이 윗사람에게 보이는 반응을 뜻한다. 특별히, 자녀가 부모의 말에 순종(복종)하는 것은 미덕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위계질서가 무너진 사회에서 순종(복종)이라는 말은 매우 위압감을 준다. 그래서 용어를 조금 변경할 필요가 있다. 순종(복종) 보다는 ‘존중’이라는 용어가 요즘 시대에 더 적합한 용어 같다.

 

11. 사실, 예전의 유교 문화, 위계질서가 확고한 문화에서 순종(복종)도 ‘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자녀가 부모를 ‘존중’하는 것은 순종(복종)하는 것이다. 종이 주인을 ‘존중’하는 것은 순종(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유교문화가 지배하는 위계질서 사회에 살고 있지 않으니, 용어를 고쳐, ‘존중’으로 쓰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즉, 믿음은 존중이다. (김근수, 로마서 주석 , 25쪽) 믿음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믿음을 생각과 의지를 없애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이해가 안 되면, 무조건 믿으라.”는 말을 너무도 많이 들었다. 그렇다 보니, 믿음은 이성과 상관없는 몰지각한 행위로 오해 받기도 한다.

 

12. 아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존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와 생각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신앙은 상호 존중 행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존중하신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때, 우리에게 복음을 주실 때, 우리를 무시한 상태에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존중해서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존중해서 받는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존중이 담겨 있다. 이 말은 바울이 로마교회에 바라는 것은 ‘존중’이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로마교회 교우들이 바울 자신을 존중해 줄 것을 바랬다. 더불어, 바울은 로마교회 교우들이 복음을 존중하기를 바랬다. 그래야, 서로 업신여기고 비판하던 사이가 서로 존중하는 사이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13.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종 무례한 사람을 본다. 일방적으로 말하고, 일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본다. 이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믿음은 존중을 불러온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대하여 존중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존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존중하는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상호 존중이 없는 신앙은 매우 험악하고, 상호 존중이 없는 교회에는 평화가 없다. 로마교회가 딱 그랬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가 바른 믿음을 갖길 원했다. 즉,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이 서로 존중하길 원했다. 복음에 의하여, 서로 존중하게 될 때, 평화가 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14. 로마서를 읽으며, 우리는 바울의 자리에 ‘나’를 놓아보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것과 같이, 로마교회도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이요 교회이기 때문이다. 요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왜 교회를 다니는지’를 모른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고, 교회를 다녀도 소속감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토대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자기 정체성이 약한 것은 토대가 약한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이 겪는 총체적 정체성의 위기를 반영하는 현상이다. 약물 의존이 많은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왜 사는 지 모르겠으니, 자기 정체성이 약해져 약물에 의존한다. 이것은 아주 큰 사회적 문제다.)

 

15.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가장 먼저, ‘바울’이라는 단어를 배치했다. 그리고 바울을 규정하는 용어로 종,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사도를 배치했다. 우리는 ‘나(내 이름을 배치하고)’ 그 다음에 나를 규정할 수 있는 어떠한 용어를 배치하겠는가? 바울이 자기 자신을 규정할 때, 종, 예수 그리스도, 사도 등의 용어를 이름 뒤에 배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복음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복음을 온 마음으로 존중(믿음)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을 둘러싼 종과 사도의 정체성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존중할 것이고, 그 존중은 서로 존중하는 평화의 상태로 이끌 것이고, 그 복음을 전하는 자로 따로 구별되어 부름 받았다는 자기 정체성 안에서 삶을 재구성할 것이다.

 

16. 바울과 나. 바울은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도로 규정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누구로 규정하는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교회’로 모인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실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자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 바울과 똑 같은 하나님의 복음을 받은, 나는, 누구인가?

Posted by 장준식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이 지닌 문제점]

어거스틴은 현대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일한 교부 신학자이다. 어거스틴이 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그의 신학이 라틴신학의 기초가 되었을 뿐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와 루터를 거쳐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앙 세계에 깊숙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학과 개신교 신학은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 개신교 신학은 라틴 신학에 뿌리는 두고 있다. 1세대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회 출신 수도사였다. 그의 사상에는 어거스틴의 신학이 스며 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 카파도키아 교부들로 대표되는 그리스 신학 전통과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 신학은 혁명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지고의 원리를 본질(ousia)이 아니라 본체(hypostasis)이며, 실체(substance)가 아니라 위격(person)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삼위일체의 위격을 중요시하며 삼위일체의 경륜을 삼위일체 신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경륜을 중시하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가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역사적 구원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즉, 삼위일체의 역사는 창조와 구원과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관계한다. 그래서 인간은 그러한 역사적 구원의 사역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고,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의 장이다. 이는 정치신학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은 위격이나 실체보다 본질이나 본체에 더 관심을 둔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에 관심을 덜 두게 만들 뿐만 아니라 위격의 역동성이나 위격의 구분을 필요없게 만든다. 게다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은 심리학에 관심을 둔다. 어거스틴은 인간 영혼에 하나님의 흔적이 있다고 생각하고, 인간 영혼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거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 영혼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 외부의 세계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고, 자연스럽게 역사적 구원의 경륜을 소홀히 하게 되며 정치신학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은 그냥 자신의 영혼 안에 새겨진 삼위일체의 흔적을 통해서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라쿠나는 다음과 같이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을 비판한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에 대한 심리학적 유비가 부적절한 이유는 그것이 심리학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심리학과 인간학이 개인의 영혼에 초점을 두는 경향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앎으로써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기 때문에 부적절한 것이다. 위로 향하는 여정인 내면을 향한 여정을 통해 영혼은 영혼 자신을 추구하면서 영혼의 하나님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주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영혼은 영혼이 갖는 사회적 관계들과 상관없는 영혼 자신을 인식하며,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상관없는 하나님을 인식한다." (LaCugna, <God For US>, 103)

이것은 현대 신앙인들에게 정말 큰 문제가 된다. 심리학의 발달과 그것과 신앙을 접목하는 일이 잦아지고 견고해지면서 신앙인들은 개인의 내면으로 빠져들어 하나님의 역사적 경륜을 바라보지 못하고 거기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그냥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신앙인을 생산해 낼 뿐, 역사에 동참하는 공동체적인 신앙, 즉 정치신학을 생산하지 못한다. 그래서 현대 기독교인은 무력하고, 기독교 교회는 비역사적이다.

어거스틴이 지금까지, 아니 지금 더 중요하게 유통되는 이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신앙인을 유통해야만 부흥할 수 있는 '기업형/자본주의형 교회'가 택한 생존 전략이 아닌가 싶다. 개인의 내면에 대한 집중은 거대한 자기를 만들어낸다. 이 거대한 자기는 결국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데까지 이른다. 내가 곧 하나님이다. 그래서 현대인의 신앙은 곧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고, 현대인의 교회는 '신들의 만찬'이 된다.

물론 어거스틴이 자신의 사상이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식으로 유용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신학사상을 전개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에 깊이 도취되었던 것과 자신의 회심의 과정 속에서 겪은 심리적 변화를 면밀히 추적하면서 신학을 전개하다 보니, 의도치 않게 인간 영혼에 놓인 삼위일체의 흔적을 추적하며 삼위일체론을 진술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특별히 라틴신학의 역사에서 그가 가진 영향력을 생각할 때, 그의 신학은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려는 나쁜 의도를 가진 자들에 의해서 잘못 사용될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현대 기독교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방법은 없다. 어거스틴의 신학이 의미하는 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그 위험성을 알리는 것 밖에는 없다. 어거스틴의 신학이 나쁜 게 아니라, 그의 신학을 자신의 불의를 정당화시키는 데 활용하는 이들이 나쁜 것이다. 특별히 개인의 극대화를 통해서 이익을 창출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은 개인의 극대화와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정당화시키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인간 영혼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아보려는 어거스틴의 심리학적 유비는 인간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삼위일체 신앙 안에서 자기 자신을 성찰해 보려는 진지한 신앙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다. 그러나 라쿠나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개인주의적인 해석으로 흐르면 안된다. 또한 하나님의 역사적 구원의 경륜과 상관없는 개인주의적인 신앙으로 흐르면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에 새겨진 흔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구원의 경륜 없이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에게 집중하는 일보다 타자에게 집중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하고, 역사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에게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이 정치신학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역사는 하나님 나라와 거꾸로 가고 있는데, 자기 자신의 영혼구원, 만족에만 갇혀 있어 역사의 불의에 저항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인의 자기 기만이고 직무 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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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10. 19. 03:02

약속의 말씀을 간구하는 기도

(롬 9:1-16)

 

주님,

우리의 심장에 쌓인 슬픔과 번민를 주님께 드립니다.

우리의 심장을 가볍게 해주소서.

우리가 가진 특권, 능력들을 주님께 드립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몰라보는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주님,

우리에게 한 말씀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주여, 간절히 사모하오니, 우리에게 한 말씀만 해 주옵소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모든 만물을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0. 19. 03:01

약속의 말씀이 중요해

(로마서 9:1-13)

 

1. 바그너 음악을 좋아하세요? 바그너 음악은 아주 문제적이죠. 그래서 바디우나 지젝 같은 철학자들이 바그너의 음악이 가진 정치적 의미들을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바그너는 위험한가, 북인더갭, 2012) 바그너를 말하면 히틀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그너는 히틀러가 최애한 독일의 음악가였죠. 멘델스존도 독일의 음악가였는데, 히틀러는 멘델스존을 미워했습니다. 그가 유대인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죠. 얼마나 미워했는지, 멘델스존의 동상을 쓰러뜨리고, 그의 유산들을 모두 불태우라고 명령할 정도였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히틀러는 바그너를 최고의 영웅으로 추켜세웠습니다. 바그너는 순수 독일 사람이었고 그의 음악은 독일인의 정신을 고취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바그너의 음악은 선동적인 기질이 있습니다.)

 

2. 로마서를 살펴보면서 바그너와 히틀러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로마서에는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유대인들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11장이 바로 그 문제를 다루고 있죠. 사실 우리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유대인들이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다 보니, 그들의 성공에 관심을 두고, 그들처럼 성공하고 싶은 마음에 유대인들에게 관심을 두기도 합니다만(특별히 그들의 하브루타 교육법),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되든 사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크게 관심사항이 아닙니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유대인이라는 민족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일이 시간 낭비 같아 보입니다.

 

3.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유대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데, 바로 로마서에서 바울이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하여 엄청난 고뇌와 번민을 하고 있는 본문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9장 1절을 보면, 바울은 무언가 비장한 말을 할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바울은 심장에 슬픔과 번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심장에 슬픔과 번민을 가지고 있다, 라는 말만 들어도 심장이 벌렁입니다. 얼마나 답답할까, 불쌍합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러한 상태에 처해 본 적 있으신가요? 심장에 슬픔과 번민이 가득해서, 답답해 죽을 것 같은, 그런 일 말이죠. 그러한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혹시 그러한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심장을 가볍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4. 왜 바울은 자신의 심장에 슬픔과 번민을 가득 안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주 괴상한 일이 발생했는데, 이상하게도 이스라엘 사람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죠. 유대인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죠. “왜 유대인 대부분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복음을 전하면서 바울에게 이 문제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문제였는지, 심장에 슬픔과 번민이 가득하여 숨을 못 쉴 지경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할 수 있을 지, 뾰족한 아이디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5. 우리는 그냥 이 문제를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거라고 말이죠.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독교 교회를 제2의 이스라엘이라고 칭하면서, 하나님께서 촛대를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옮기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주 손쉬운 해결법이죠. 그런데, 로마서를 보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거의 소설을 쓰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왜곡하는 일이죠. 바울은 결코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 걸쳐,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다룹니다.

 

6.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로마서의 본문은 매우 복잡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유대인이 아닌 내가 왜 이렇게 지루한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흥미를 전혀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부분이 우리에게 불필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이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가 지나치게 이스라엘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그릇된 시선을 갖거나, 또는 이스라엘과 그릇된 관계를 맺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로마서의 본문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줍니다.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배우면 됩니다. (특별히, 이 부분은 로마 교회의 컨텍스트에서,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7. 우리가 읽은 본문과 관련해서 논의 좁혀,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이나 일상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정도입니다. 첫째, 우리는 기도를 배웁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저주를 받기까지 자신의 혈족인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겠죠. 심장에 슬픔과 번민이 가득하여 답답한데,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심장이 답답한 일이 있는데, 기도를 안 하는 게 이상한 겁니다. 답답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한 것이죠.

 

8.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문제는 바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바울은 가는 곳마다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유대인들에게 벌어진 일은 회개와 믿음이 아니라 바울을 향한 뭇매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 바울을 구박했습니다. 죽일 정도로 구박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이 문제를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바울의 심장에는 슬픔과 번민이 쌓여갔습니다.

 

9. 심장에 슬픔과 번민이 쌓였다고 해서, 모두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그렇게 속상한 일이 있는데도, 기도하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보면, ‘기도하는 행위’ 자체도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셔야 할 수 있는, 거룩한 일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또한,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고 허락하신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겠죠. 그래서 기도는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심장에 슬픔과 번민이 가득할 때,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10. 여러분의 심장에 슬픔과 번민이 쌓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심장에 슬픔과 번민이 쌓이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발걸음이 기도의 자리를 향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그토록 심장에 슬픔과 번민이 쌓이고,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마다 유대인들로부터 온갖 고난을 당하면서도 복음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그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만 한다면, 우리의 삶은 후퇴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심장에 슬픔과 번민을 쌓아 놓지 마십시오. 기도의 자리에 나아와 그 슬픔과 번민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께서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11. 둘째로, 이스라엘이 가진 특권이 오히려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 이러한 특권을 가진 나라, 민족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특권 때문에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큰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자신이 가진 특권, 능력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면, 우리가 가진 특권과 능력은 오히려 저주라는 것입니다.

 

13. 우리는 자녀들에게 특권과 능력을 물려주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래서 좋은 학군에서 교육시키고 싶어하고,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것을 입히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우월한 위치에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인생을 사는, 남부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것은 참 알 수 없습니다. 특권과 능력을 가지면, 인생이 잘 풀릴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을 뿐더러, 내가 가진 특권과 능력이 오히려 나의 발목을 잡거나 인생을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딱 그랬다는 것이죠. 이것은 바울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정통 유대인으로서 가말리엘 문하생이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에 아주 열심이었는데, 바울이 가진 바로 그러한 특권이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4.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즉 자신의 모든 특권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알기도 작정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깨달았던 것은 그가 가진 모든 인간적인 특권은 그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모두 잠정적인 능력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생명을 맡기고 인생을 맡긴다는 것은 도박처럼 불안하고 불안정하고 의롭지 못하다는 것이죠.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을 주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는 것을 바울은 깨달았기 때문에, ‘오직 예수(Only Jesus)’를 외쳤던 것입니다.

 

15.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자신에게도 그렇고,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그렇고, 특권과 능력을 갈망하고 물려주기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물려주십시오. 여러분이 가지려고 하는 특권과 능력,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특권과 능력은 우리에게, 우리 자녀들에게 구원이 되지 못합니다. 특권과 능력이 오히려 가장 귀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가진 특권은 이 세상 어느 민족 누구에게도 없는 특권입니다.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그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방 나라에서 받아들인 것보다 훨씬훨씬 적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고, 우리의 자녀들도 그렇고, 하나님의 은혜 자체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최고의 특권이고 능력인 것을 믿으십시오. 자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전하십시오.

 

16. 셋째,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약속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 약속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받기를 간구하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중요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것의 중요성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8명의 자녀 중, 오직 한 명, 이삭만 하나님이 선택하셨습니다. 세 명의 부인(사라, 하갈, 그두라) 중 오직 한 명, 사라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받은 사라가 이삭을 낳았고, 약속의 말씀으로 태어난 이삭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받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역전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17. 우리는 살아가느라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 노력이 우리를 복된 삶으로 이끌어주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압니다. 도대체 복된 인생, 행복한 인생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해, 그냥 그렇게 일상에 치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말씀은 무엇이 복된 인생인지 정확하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은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받으려고 간절한 마음을 품은 적이 있으십니까?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어떠한 결단을 내려야할지, 우리는 대개 막막한 가운데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본토진척 아비의 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이른 이유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 때문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그 일을 감당하면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끝까지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18.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하나님께 긍휼히 여겨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주님께 자비를 구하며,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라고, 약속의 말씀을 간구하십시오. 성경을 읽는 가운데, 기도하는 가운데, 예배드리는 가운데, 찬양하는 가운데, 봉사하는 가운데, 친교 나누는 가운데, 주님이 어떠한 시간에 어떠한 방식으로 약속의 말씀을 전해주실지 모릅니다. 약속의 말씀을 간구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말씀을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하십시오. 약속의 말씀 한 마디가 우리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19. 세 가지를 꼭 기억하세요. 첫째, 기도의 자리에 나오십시오. 심장에 슬픔과 번민이 쌓일 때 기도의 자리에 나오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세요. 둘째, 우리가 가진 특권과 능력이 오히려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기억하면서, 구원 자체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삶의 지혜임을 잊지 마세요. 셋째,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약속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우리의 인생이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그 한 말씀만 있으면, 인생은 역전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사모하기를 마치 로또에 당첨되는 것처럼 사모하십시오. 아니 그보다 더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를 한 번 바꾸어 보세요

 

우리에게는 기도에 대한 통념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보통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무엇인가 필요하고 무엇인가 부족하고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어서 얻어내는 것.” 이러한 것도 기도에 포함되기는 합니다만, 기도를 이렇게만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가볍고 이기적이게 만들어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하는 기도의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앙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도 있죠.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는 마치 없는 것처럼 이 세상 나라의 일에만 몰두하게 만듭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 중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마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것처럼, 또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을 만들고, 이 땅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어, 편협하고 이기적인 사람, 그러한 인격을 가진 사람을 만듭니다. 모두 ‘나, 나, 나’ 밖에 없는 세상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다툼과 미움과 폭력과 범죄는 하나님 나라가 없는 것처럼 여기는 자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자들이 벌이는 일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세상에 저항하는 법은 어떤 것일까요? 기도를 바꾸면 됩니다. 우리를 편협하게 만들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기도, 즉 내가 원하고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으로만 기도를 드리는 게 낫습니다. 주기도문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신의 기도를 한 번 들여다보세요.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우리는 그것을 주기도문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위한 기도가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자(partakers)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자가 되면, 우리의 삶은 새로운 가치를 반영하기 시작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관심사를 바꾸면 우리 삶의 가치와 방식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결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헤치거나 나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죠. 내가 바라고 원하는 그것을 내가 가지게 됐을 때, 그것이 나의 삶을 좋은 삶(good life)으로 만들지, 나쁜 삶(bad life)으로 만들지 알 수 없습니다. 돈이 100만불 필요해서 그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100만불을 나에게 주셨는데, 그 100만불이 나의 삶을 좋은 삶으로 만들어줄지, 나쁜 삶으로 만들어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내가 간절히 소망했던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 가지지 못한 것을 탐내거나 아쉬워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것, 나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서 ‘먼저’ 기도하기 보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는 기도를 먼저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인생을 살면, 그 자체가 좋은 삶(good life)입니다. 좋은 삶, 선한 삶(good life)이란 공동체를 섬기는 것이지, 이런저런 개인의 자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삶만큼 좋은 삶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기본적으로 구원이니까요.

 

기도를 한 번 바꾸어 보세요. 무엇보다 주기도문을 ‘의식적으로’ 외워보세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그러하듯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는 기도를 반드시 먼저 드려보세요. 그런 다음에, 자신이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을 주님께 간구해 보세요. 아마도,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간구했을 때, 자신이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이, 그렇지 않았을 때와 다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는 “주님 100만불을 주세요!”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난 뒤, 나의 기도는 “주님, 어제 뉴스에서 본 그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세요.”라고 바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모범삼아 기도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인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a follower of Christ)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그냥 그리스도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닌다는 뜻이 아니라 이렇게 기도하는 법까지 따라서 할 정도로 총제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렇게나 하는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될 수 없겠죠. 그리스도를 따라서 기도하는 자의 기도만이 기도가 될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삶이 좋은 삶(good life)일까 고민을 많이 하게 만드는 세상입니다. 또한 저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이라고 우리에게 손짓합니다. 그 손짓이 너무 많아서 어느 손짓을 따라 가야할 지 막막한 세상입니다. 그렇다 보니, 좋은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냥 ‘될 대로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길을 잃지 않으려면, 히브리서의 기자가 힘주어 말하고 있듯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힘써 바라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가장 좋은 삶(good life)은 하나님 나라의 참여자(partaker)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따라,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참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바꾸면 삶이 바뀝니다. 그러니 기도를 한 번 바꾸어 보세요.

Posted by 장준식

[종말론 사무소]

 

김항은 그의 책에서 ‘종말론 사무소’를 연다. 그것을 열며 김항이 주목한 것은 김소진의 소설들이다. 요절한 작가 김소진은 여러 단편소설들을 통해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발전 아래 감추어진 인간의 소외 문제를 다룬다. 내 눈을 끈 것은 그의 소설 <개흘레꾼>이다. 이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아비는 개흘레꾼이었다. 오늘도 밤늦도록 개들이 짖었다.” 이것은 분명 서정주의 시 <자화상>을 따라한 것이다. “아비는 종이었다.”

 

김항의 분석에 따르면, 김소진의 개흘레꾼과 서정주의 종은 그 결이 다르다. 종은 주인과 대립관계에 있는 존재이지만, 개흘레꾼은 주인과 종이라는 이항대립적 관계 안에도 들지 못하는, 사회의 이물질에 불과하다. 역사는 언제나 착취와 피착취, 체제 대 반체제의 변증법적 대립 속에서 발전해왔다. 착취자가 되든, 피착취자가 되든,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이 되든,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이 되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역사적 변증법적 대립 관계 속의 구성원으로 삶을 산다. 소외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주인이 되든 노예가 되든 투쟁한다. 그리고 그 투쟁에는 반드시 승자나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김소진은 <개흘레꾼>에서 승자에도 패자에도 낄 수 없는 한 인간의 쓸쓸한 삶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한 쓸쓸한 인생을 대표하는 인물이 개흘레꾼인 셈이다. 조르조 아감벤이 ‘예외상태’라는 용어를 통해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한나 아렌트도 마찬가지다. 그는 ‘정치적인 삶’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정치적인 삶이 없는 상태가 무엇인지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벌어진 일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성문 밖에서 죽임을 당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떻게 개흘레꾼이 발생하고 있으며, 예외상태를 만드는 자들과 사람들에게서 정치적인 삶을 빼앗으려는 자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에 대해서 아주 면밀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성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언서도 그렇고, 복음서도 그렇고, 모두 역사적 변증법적 대립 관계의 구성원 바깥으로 밀려난 ‘개흘레꾼’ 같은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모세오경에 나타난 율법정신도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누군가를 정죄하고 벌하기 위해서 주어진 게 아니라, 법 바깥으로 밀려나는 이들이 없도록, 법 바깥으로 밀려나 ‘개흘레꾼’ 같은 신세에 처해져서 생명을 잃는 일이 없도록,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는 율법의 완성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수의 십자가는 아무도 예외상태에 처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는 본인이 예외상태에 처해져서 그 예외상태에 있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신다. 그래서 그의 구원은 모든 이들의 구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가 이 땅 위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그대로 수행하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종말론 사무소’이다. 요즘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혼란과 위험에 처한 우리들의 삶을 생각하면, 종말론 사무소로서 교회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개흘레꾼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개흘레꾼이 존재하지 않도록, 예외상태에 처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예상상태에 놓인 이들이 없도록, 정치적인 삶을 빼앗기지 않도록, 그리고 정치적인 삶을 빼앗긴 이들을 다시 정치적인 삶으로 회복하도록, 교회는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10. 10. 11:55

예수의 영이 충만해지길 간구하는 기도

(롬 10:1-15)

 

주님,

예수의 영이 우리 안에 충만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원합니다.

예수의 영이 충만해야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가정의 문제, 교회의 문제, 사회의 문제 등을 모두 지혜롭고 은혜롭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영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우리 각 개인의 과제이기도 하고,

우리가 가진 사명이기도 합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예수의 영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사명을 전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시는 그 능력,

막힌 담을 허무시고 평화를 주시는 그 능력,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예수의 영이 충만한 내가 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의 영이 충만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의 영이 충만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의 영이 충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주여, 무엇보다 가장 기본인, 예배와 기도를 소중히 여기게 하시고,

예배와 기도의 자리에 나아와 예수의 영이 충만한 삶을 위해서

나 자신을 내어놓는 신실한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아

우리의 주님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0. 10. 11:53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는 주님이시다

(로마서 10:1-15)

 

 1.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우리에게는 평화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평화가 없습니다. 연일 들려오는 뉴스를 들으면, 어떤 긴장감이 몰려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마겟돈(armerggedon/아머게른)’이라는 용어를 쓰며 임박한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고, 실제로 우크라이나-러시아 간의 전쟁은 더 격렬해지고 있어 푸틴 대통령이 수세에 몰려 핵 버튼을 누를지 모르는 긴장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러시아나 미국이나 방사선 치료제인 요오드를 대량 구입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2. 전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의 위협 속에서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조차도 인플레이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비율이 93%에 이른다는 조사결과도 있습니다. 44%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는 것으로 나타났고, 이는 작년보다 30여% 오른 수치랍니다. 이제 정말 어디 나가서 외식하는 것이 힘들어졌습니다. 베트남 쌀국수 한 그릇 먹는 것도 부담입니다. 치솟는 물가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점점 움츠러들기만 합니다.

 

3. 그뿐만 아닙니다. 각 나라마다 보수와 진보 세력의 극렬한 대립 속에서, 각 나라마다 보수 정권이 들어서고 있는 실정입니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가 서로 견제하고 협력해서 더 좋은 나라를 위해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일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현재 정치 풍토는 그렇지 못합니다. 핵전쟁의 위협과 경제적 불안정, 그리고 정치적 극한 대립 속에서 결국 고통받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사는 게 어려워지면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보수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포용(embrace)과 베풂(generosity)은 사라지고, 배제(exclusion/discrimination)와 자기챙김(selfishness)만 늘어납니다. 배제와 자기챙김으로 인해 누군가는 차별당하고 버림당하기 마련입니다. 누가 그러한 험한 일을 당하겠습니까? 약자들입니다.

 

4. 이러한 때에 신앙을 갖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 본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에 대하여, 그리스도인 됨에 대하여 깊은 묵상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쉽게, 신앙을 갖는다는 것을, 배제와 자기챙기에서 소외되지 않고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쉽게 말하면, 다른 이들이 굶을 때 굶지 않는 것, 다른 이들이 전쟁으로 죽어나갈 때 죽지 않는 것, 다른 이들이 보호받지 못할 때 보호받는 것 등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5. 신앙을 갖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이렇게 이기적인 것이라면, 이 어려운 세상에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신앙인,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이들이 굶을 때 내가 굶지 않는 것을 감사하는 게 아니라 굶고 있는 자들을 위해서 내가 가진 빵을 나누는 것이겠죠. 다른 이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고 있을 때 나는 삶아 있음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멈추어 세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겠죠. 다른 이들이 보호받지 못할 때 나는 안전하다는 것에 감사하는 게 아니라,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안전을 내어놓는 것이겠죠.

 

6. 시대가 어려울수록, 시대가 악할수록, 예배와 기도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악함은 우리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어려운 시대에, 악이 창궐한 시대에 마음을 강퍅하게 하거나 악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선하신 주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간구하고, 이 시대의 악함에 물들지 않도록 우리를 하나님께 내어놓는 일입니다. 예배의 자리만큼, 기도의 자리만큼 악에서 먼 자리도 없습니다. 예배의 자리만큼, 기도의 자리만큼 선에게 가까운 자리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대가 어려울수록, 시대가 악할수록, 예배와 기도의 자리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7.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것은 바울 서신에 계속해서 면면히 흐르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이것을 줄기차게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는 아주 실제적인 문제였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에 생긴 갈등은 보통 갈등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를 보면, ‘원수, 막힌 담’ 등이 있습니다. 원수 같은 사이, 막힌 담이 있어 원수처럼 지내는 사이에 무슨 평화를 바라겠습니까?

 

8.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그 당시 사람들이 들었을 때 코웃음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과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죠. 원수를 사랑하라. 바울도 똑같은 복음을 전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막힌 담을 허물라. 이 복음은 예나 지금이나, 굉장히 전복적입니다. 쉬운 말로, 사람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코웃음 치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취급받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남편을 사랑하는 것도 힘든데, 무슨 원수를 사랑합니까? 천사 같던 아이가 청소년기만 되면 천하의 원수가 되는데,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가당키나 합니까?

 

9. ‘원수, 막힌 담’ 이런 용어는 사람들 간에, 또는 존재들 간에 있는 극한 대립을 말할 때 쓰이는 용어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인간과 자연 사이에, 극한 대립이 있어 서로가 서로에게 악을 저지르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의 목숨을 빼앗는 지옥 같은 일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그러한 악함을 치유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복음의 역할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원수, 막힌 담’과 같은 용어를 써야할 극한 갈등을 해결하려면, 로마교회의 구성원들이, 강한 자들이나 약한 자들이나 누구든지, 복음을 더 굳게 붙드는 수밖에 없다고 강변합니다.

 

10. 복음을 붙든다는 것은 예수의 영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예수의 영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믿음에 대해서 엄청난 강조를 합니다. 본문에서도 ‘믿음’이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핵심은 9절과 10절 말씀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교회 사람들에게 구원은 무엇이겠습니까? 천국 가는 것이겠습니까? 그건 너무 구원을 탈맥락화시키는 것입니다. 로마교회의 구원은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사이에 평화가 내리는 것입니다. 둘이 더 이상 싸우거나 서로를 무시하거나(업신여기거나) 판단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며 화평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 그러한 구원이 임하기 위해서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복음에 더욱 붙들리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11. 믿음을 갖는다는 것, 복음에 붙들린다는 것, 예수의 영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여전히 신앙인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예수의 영(스피릿)이 충만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런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거리두기가 해제된 덕에, 지난 주에 많은 학교들이 축제를 벌였습니다. 학교 축제들 가운데 연세대학교의 ‘아카라카를 온누리에’와 고려대학교의 ‘입실렌티’가 유명한데, 그들의 축제가 화제였습니다. 연대생들은 ‘아카라카’를 한 번 참석하고 나면 애교심, 즉 연세의 스피릿이 증가합니다. 고대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실렌티에 참가하고 나면 고대의 스피릿이 증가합니다. 그래서 학교가 지향하는 가치들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모교를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그야말로, 연대 스피릿, 고대 스피릿이 그들 안에 생기는 것입니다. 스피릿이 있고 없고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연대나 고대의 스피릿이 없는 사람은 전혀 감흥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피릿을 가진 사람은 마음 가짐도 다르고 행동도 다릅니다. 

 

12.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의 영(스피릿)이 충만하기를 바랐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스피릿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는 주님이시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교회 성도들만의 스피릿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스피릿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고백하며 마음 속에서 찌릿찌릿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다함께 고백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는 주님이시다!” 이 땅의 모든 이들이 이 고백을 하면서 마음 속에 찌릿찌릿한 경험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이 이처럼 전쟁과 당쟁 속에서 평화를 잃어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고 악한 일을 펼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평화이시고, 원수들이 서로 사랑하게 하시는 능력이시며, 막힌 담을 허무시고 둘을 하나 되게 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13.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하는 복음의 스피릿을 갖는 것은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이라면, 부부 간의 갈등도 복음 안에서 풀어나가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부부가 함께 예수의 스피릿, 예수의 영이 충만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만큼 평화롭고 사랑이 넘치게, 부부 간에 있는 미운 마음이라든지 막힌 담을 허물어낼 수 있는 방법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 전 한 남자가 직원이 동료 여직원을 스토킹 하다가 결국 살인을 저지른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들을 둔 부모들이 반성을 많이 했죠. 우리는 흔히, 딸자식 둔 부모들에게 딸들을 잘 간수하라고 말하지만, 이건 틀린 말이라는 겁니다. 아들을 둔 부모들이 아들 교육을 잘 시켜야 하는 것이죠. 여러가지 구조상, 남자들이 정신 차리고 잘 해야 합니다.)

 

14. 남자들이 잘 해야 합니다. 남편이 잘 해야 합니다. 남자들이 예수의 영이 충만해야 합니다. (물론 여성들도, 아내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남자들이 예수의 영이 충만해야 가정도, 이 사회도 평안합니다. 토요일 새벽기도회에 남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팬데믹 전에는 남자들이 토요일 새벽기도회에 더 많이 나왔는데, 팬데믹 지나면서 풍경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남자들이 예수의 영이 충만하면, 가정도 평안하고, 교회도 부흥합니다. 사회도 안녕해지고요. 여성분들, 남편들 바가지 긁을 때 돈 많이 벌어오라(술먹지 말라, 골프치지 말라, 게임하지 말라, 정신 좀 차리라)고 바가지 긁지 마시고, 토요일에 교회 가서 기도하라고 바가지를 긁으세요. 아니면, 남편을 데리고 오시던지요.

 

15. 삶이 어려울수록, 세상이 어려울수록, 세상이 악할수록, 신앙인은, 그리스도인은 예배와 기도의 자리에 나와서 예수의 영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우리가 구원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삶, 생명에 예수의 영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할 때, 마음이 뜨거워지길 바랍니다. 바래서 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를 내어 주어, 어려운 시절에 배제와 자기챙김에 휘말려들지 않고, 포용과 베풂(나눔)의 삶을 잃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며 막힌 담을 허무는,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두 가지 공부법]

 

1. 체제 순응적 공부법

2. 체제 변혁적 공부법

 

자기계발서는 대개 체제 순응적 공부법이다. '자기계발'이라는 말이 붙어서 뭔가 자신을 진일보시키는 공부 같지만, 실상 자기계발은 존재의 진보 보다는 체제에 순응하는 것을 지향한다. 체제에 자기를 맞추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도 해야한다. 그래야 체제 안에서 성공할 수 있고,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계발을 위해 에너지를 쓴다. 그런데, 체제 순응적 공부를 하다보면 결국 만나게 되는 문제는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과 '번아웃'이다. 자기계발은 체제가 자신을 착취하기 좋은 상태로 자기의 존재를 내어주는 것과 같다.

 

소위 '인문학 공부'를 자기계발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인문학을 잘못 유용하는 일이다. 인문학 공부는 자기계발과는 달리 체제 변혁적 공부법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인문학 공부가 별로 쓸모없다는 인식을 한다. 그건 정말 오해일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손해다. 인문학 공부는 자기계발이 아니라 존재의 진보를 가져온다. 존재의 진보는 기존의 체제에 순응하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인문학 공부는 필연적으로 체제 변혁을 요구한다. 체제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체제를 나에게 맞추어 재구성한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문학 공부를 자기계발의 도구로만 쓰라고 강요할 뿐이다. 인문학 공부를 체제 변혁적 공부로 하면 체제는 공격당하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체제가 교묘히 퍼뜨리는 프로파간다(propaganda)에 속지 말아야 한다. 체제는 언제나 보수적이다. 존재의 복종을 요구하지 존재의 진보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체제는 인문학 공부를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사람들은 그러한 프로파간다에 속아 인문학 공부를 하지 않는다. 아주 단순한 생각 때문이다. 인문학 공부가 당장 먹고사는 데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체제가 심어주는 거짓말이다.

 

체제 순응적 공부법과 체제 변혁적 공부법은 둘 다 필요하다. 체제에 대해서 반대만 할 수는 없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제 순응적 공부와 체제 변혁적 공부는 4대 6 정도로 하면 좋다. 먹고 사는 것을 무시할 수 없으니 체제 순응적 공부를 4정도 하고, 체제가 존재에 가하는 폭력에 저항하고 체제를 변혁하여 존재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번아웃에 도달하게 내버려 두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체제 변혁적 공부를 6정도 해야한다.

 

체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견고하고 힘이 세다. 그래서 체제를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체제 변혁적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한다. 그러나 인문학 공부를 자기계발로 하는 사람은 체제에 더 큰 희생양이 될 것이다. 인문학적 소양은 무지의 안개가 되어 체제를 더 공고히 할 수 있다. 배운 사람의 무지는 못 배운 사람의 무지보다 더 큰 혼란과 파괴를 가져온다.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는데도 체제 변혁의 힘이 솟구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자신의 존재가 체제 순응적 존재로 완전히 전락했다는 신호이다. 물론, 체제 순응적 존재로 깊이 빠져든 사람은 이것을 아예 모르겠지만 말이다.

 

체제 변혁적 공부법에 대해서 자각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인문학 공부는 자기 존재를 고상하게 만들기 위한 지적 장식품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두 발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며,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결단하게 이끌어주는 실천의 문제이다. 인문학 무용론을 은근슬쩍 퍼뜨려 체제의 안정을 꿰하려드는 체제의 프로파간다에 속지 말기를! 자신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고, 또 그만큼 타자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그래서 체제 순응적 공부보다 체제 변혁적 공부에 마음을 더 많이 쓰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Posted by 장준식

[갈증이며 선물인]

 

정현종 시인의 시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건 '갈증이며 샘물인'이다. 물론 그것도 내가 말하려는 것에 대한 은유일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성경의 언어를 쓰자면, 샘물보다 선물이 좋은 은유 같다.

 

그리스도를, 그리스도교를 알아가면 갈수록, 부족한 나의 존재만 드러난다. 존재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내 존재가 너무 부족해서 목마르다.

 

공부도 하고, 실제 목회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구현해 보기도 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목회를 하면할수록 드러나는 것은 '나의 부족함', 갈증뿐이다.

 

이 갈증을 내가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갈증을 채우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뿐인 듯싶다. 그래서 갈증 안에 있는 존재는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은총이다. 삶은 선물이다.

 

로완 윌리엄의 이 말은 사실이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 되새겨야 할 것은 교회는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바울을 읽다. 130).

 

정말 그런 것같다. 교회는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회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교회는 가능하다. 교회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믿고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우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성취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그저 참여할 뿐이다. 우리가 무슨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할 뿐이다.

 

갈증의 존재, 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선물로만 우리는 갈증을 채울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그냥 선물이다. 나는 시방, 우물가의 그 사람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