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사회와 교회의 역할]

 

미국에서 산지도 벌써 20년이 되었다. 미국 와서 살다보니 한국에서 살 때와 다른 점이 정말 많았다. 그중, 목회자로서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한국에서 목회자는 세금을 내지 않지만, 미국은 목회자도 세금을 내야 한다. 

 

미국은 복지국가다. 사회보장제도가 비교적 잘 되어 있다. 한국도 복지국가로 가는 중이다. 나라가 부강해지면 가야 할 길이다. 복지국가를 이루려면 조세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어야 하고, 걷은 세금을 공평하게 써야 한다. 제도적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잘 살아도 복지국가를 이룰 수 없다.

 

옛날, 모두 못 먹고 못살았을 때 교회는 가난한 자에게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복지국가로 가면 갈수록 교회가 가난한 자에게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줄어든다. 가난한 사람들을 국가가 직접 돌보는 시스템을 갖추기 때문이다. 교회가 할 일이 줄어든다고 사회보장제도의 시행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교회는 오히려 사회보장제도가 잘 정착되도록 도와야 한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금이다.

 

복지국가에서, 그리고 사회보장제도가 공평하게 시행되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가 할 일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목회자를 비롯해서 모든 교인들이 세금을 잘 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세금이 온전히 정의롭고 공평하게 잘 쓰여지는지 사회보장제도를 잘 감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가에서 시행하는 사회보장제도에 교회가 참여하여 돕는 것이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해서 교회가 직접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은 복지국가에서는 잘 작동(workin하지 않는다. 복지국가에서 가난한 자들은 이미 나라의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도와주는 것은 별로 실제적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은 지난 20년간 미국에서 목회하면서 경험한 일이다.

 

복지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세금을 정직하게 잘 내는 일이다. 목회자부터 솔선수범하여 세금을 정직하게 내고, 교인들에게 세금을 정직하게 낼 것을 권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또한 조세제도와 사회보장제도가 정의롭고 합리적이고 공평하게 운영되도록 잘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목회하는 자로서 국가로부터 받는 혜택이 매우 크다. 이는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세금을 성실하게 내기 때문에 사회보장제도가 튼실하게 운영되는 덕분이다. 한국의 목회자들이, 그리고 한국의 교회들이 이미 복지국가를 이루고 튼실한 사회보장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선진 국가들로부터 잘 배웠으면 좋겠다. 세금을 잘 내서 사회보장제도가 잘 운영되면 생활이 어려운 한국의 목회자들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국가'라는 제도를 지혜롭게 잘 활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지혜로운 한국교회가 되면 좋겠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11. 29. 07:10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지켜내기를 간구하는 기도

(롬 3:1-8)

 

주님,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인생이 가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이제 곧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고 구원이십니다.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은 가치 있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

우리가 우리의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유지하려면

우리는 언제나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가치 있는 것을 가치 있는 것에 머물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 대림절기 동안에

우리에게 믿음을 더욱더 부어주셔서

다른 어떤 것에 마음을 쓰고 눈을 돌리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쓰고 시선을 집중하게 하셔서

우리가 주님께 받는 가치 있는 선물을

그 무엇에게도 빼앗기지 않도록

우리를 도와 주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소망과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내려 주소서.

우리가 그 안에서 힘써 살아가면

우리의 가치를 지켜내겠나이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1. 29. 07:09

그리스도인의 가치

(로마서 3:1-8)

 

1. 우리가 읽고 싶은 대로 읽는 게 아니라, 바울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따라서 로마서를 읽어 내려가면, 바울이 약간 우왕좌왕 하는 듯이 느껴진다. 그리고 바울이 하는 주장은 매우 급진적이다(래디컬하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요점 중 하나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주장은 유대인이 들었을 때 매우 기분 나쁠 수 있다. 반대로, 이방인이 들었을 때 기분 좋을 수 있다.

 

2. 로마서 2장에서 바울이 진술한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으나, 그것이 그들에게 우월감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생활 속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우월감을 가지며 살았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도구로 쓰였을 뿐이다. 그렇게 우월감 속에서 남을 정죄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바울은 말한다.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것이지, 율법의 소유가 아니다.

 

3. 그렇다면, 여기에서 당연히 제기되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3장 1절이 바로 그 문제제기이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 그러면 유대인의 나은 점은 무엇이며 할례의 이로운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비해서 나은 점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는데, 여러가지 중에서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신 것을 첫번째로 꼽고 있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2절).

 

4.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유대인의 가치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복음 앞에서 가치의 차이가 없다. 그러면 도대체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무슨 유익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통해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며, 그들에게 지도자를 주시고, 땅을 주시고, 무엇보다 ‘복’을 내려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특별한 민족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이가 없다고 말하니, 유대인의 입장에서 바울의 주장은 얼토당토 하지 않은(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에게 크나큰 핍박을 받았다.

 

5. 우리가 로마서를 읽으면서 경험하는 것은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일한 가치를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다고 유대인이 가진 고유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보니, 9장부터 11장에 걸쳐 바울은 유대인의 고유 가치와 미래에 대하여 고뇌하며 진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결론을 주는 것은 아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유대인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동족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겸손하게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이다.

 

6. 로마서의 이 본문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가치 있는 이유는 동일한 질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무엇인가?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면 흥미를 잃고, 열심을 내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에 자신의 삶을 드리고 싶어한다.

 

7. 그러나, 우리가 본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가치가 생성되는 원리’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내린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구약성경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유대인이 얼마나 복 받은 민족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지구상에 유대인과 같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민족은 없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복을 받은 민족인데, 하나님에게 반역(revolt)하고 결국 망하는(destroyed) 그들의 모습을 본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8. 바울이 유대인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의 가치에 대해서 인정하면서도 부정하는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무익한 것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유대인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보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다. 출애굽기의 가데스 바네아 사건에서 보듯이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반란을 일으켰고, 여리고성 전투 이후 아이성 전투를 하면서 탐욕을 버리지 못해 전투에서 패하고,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 사사시대를 통해서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마치 하나님이 없는 모습’이었다.

 

9. 그뿐만 아니다. 열왕기상하의 역사기록이 보여주듯이, 사무엘 시대 이후에 사울 왕을 세워 왕정이 시작된 이래 다윗 왕 이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 집권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고 신실한 나라를 세워간 역사가 거의 없다.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을 통해서 보듯이, 오므리 왕조(아합왕)와 예후왕조 등에서 보듯이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신앙은 온데간데없고, 바울과 아세라 등 우상을 섬기기에 바쁘고,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주변의 힘센 제국들을 의지하다, 의지하던 바로 그 제국에 의해서 나라가 멸망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불충과 불의의 역사이다.

 

10. 이스라엘(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사이에서 불충하고 불의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언약에 충실하시고 의로우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냥 지엽적인 이스라엘의 역사로 끝나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인 역사로 확대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보편적인 인류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불충하고 불의한 가를 그림언어로 보여주듯이 펼쳐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11. 가치는 저절로 생성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선택 받은 민족이라고, 율법을 받았다고, 하나님께 다른 민족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을 받았다고 해서, 그들의 가치가 천년만년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복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며, 그 안에 머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냥 놓아둔다고 가치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가치를 계속 가치 있는 것이 되도록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12.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되는 대림절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I am a Christian”이라는 고백이 무슨 가치를 지니는가?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데,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유대인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역사를 보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유대인들을 판단하고 핍박했는가? 그런 것을 생각하면,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뒤집어서 적용되는 듯싶다. 로마서에서는 유대인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지만, 현재 우리는 동일하게 이방인의 가치가 무엇이지,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이다.

 

13.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다른 데서 오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아는 데서 온다. 대림절에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서 이루신 일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림절에 네 개의 촛불을 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찬양한다. 소망, 사랑, 기쁨, 평화의 촛불이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소망을 주셨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셨고, 우리의 기쁨이 되셨고, 평화를 이루셨다.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을 묵상하면서 동일하게 그렇게 살아가는 데 있다.

 

14. 우리는 소망 가운데 있는가. 혹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낙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마음에는 소망이 더 가득한가, 아니면 낙심이 더 가득한가?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가? 혹시 우리 안에 미움이 가득한 것 아닌가? 우리는 기쁨이 충만한가? 혹시 우리는 우울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가? 불화하는 것을 보면서도 마음 아파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땅에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15. 나는 무엇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시 집중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일은 성경을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된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읽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은 구원은 이 세상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다. 우리는 그 가치 있는 것을 가치 있게 머물도록 하고 있는가? 아니면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 있는 삶을 굳건하게 지켜 나가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2. 11. 27. 09:02

가지나무

 

가지나무 삶은 물에 발 담그고 있으면

발에 든 겨울 동상 낫는다 하여

텃밭에서 가지나무 꺾어다가

냄비에 물 가득 붓고 삶는다

 

아들이 겨울마다 동상 때문에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운 엄마는

가스 불 아끼지 않고

사골 우려내듯 가지나무를 삶는다

 

얼굴 비치는 스덴 대야에

한 가득 가지나무 삶은 물을 쏟아 붓고

엄마는 입술에 힘을 주며

무거운 대야를 들어 아들 발 밑에 내려놓는다

 

가지나무 또 삶고 있으니

걱정 말고 발 푹 담고 있으라고

한 삼십 분은 담그고 있어야 한다며

엄마는 아들을 의자에서 꼼짝 못하게 한다

 

가지나무 우려낸 물이 무슨 효험이 있는지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겨울마다 손발이 차가운 것은 엄마를 닮아서 그런 것

왜 하필 자기를 닮아 손발이 차가워 고생하냐며

뜨거운 물을 몇 번이나 대야에 실어 나르던 엄마

 

뜨거운 물이 우려낸 것은 가지나무가 아니라

엄마의 안타까운 마음

그 사랑 때문에 나는 손발이 차가워도

겨울을 따스하게 보냈다

손발이 차가워도

마음이 따스하면 겨울이 꼼짝 못하는 법

 

겨울 바람이 차가워 동상 들면

가지나무를 삶지 않아도

엄마를 떠올리면 손발이 저절로 따스해진다

엄마의 사랑은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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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11. 21. 12:48

불편한 감사를 기억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행 3:1-10)

 

우리에게 감사를 주시는 주님,

이렇게 감사절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감사를 넘치게 하신 은혜를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하며 주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사가 불편한 감사가 된 듯합니다.

세상을 돌아보면, 우리가 마냥 눈을 감고

감사를 고백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주님, 이 감사절에

감사의 눈물이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눈을 뜨게 도와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감사가 불편한 감사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들과 문제들을

보게 하시고, 그러한 이유들과 문제들을 보듬어 안게 하시며

우리의 감사가 불편한 감사에서 온전한 감사로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가 온힘을 다해 감사를 나누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제는 인간 존재만 생각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닌 것을 두 눈으로 보게 하시고

우리가 온전한 감사로 나아가려면 비인간 존재에게도

우리의 감사를 나누어야만 한다는 이 새로운 현실에 마음을 쓰게 하옵소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감사만큼

이웃의 입에서, 대지의 입에서도 감사가 흘러나올 수 있도록,

감사를 나누게 하시고,

모든 존재가 감사할 때까지 우리의 감사는 불편한 감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의 감사가 흘러 넘쳐 모든 이들이 감사 가운데 거할 수 있도록

십자가 위에서 감사를 풍성하게 부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1. 21. 12:46

불편한 감사

(사도행전 3:1-10)

 

1. 지난 달 들은 AP 뉴스 중에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 뉴스가 있습니다. 2019년도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했을 때 미군에 의해 부모와 형제들을 모두 잃은 아기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몇 달 후 적십자에서 그 아기의 친척들을 찾아내 그 아기를 친척 집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친척들을 모르게 미 해병 대원인 아무개(Joshua Mast)가 그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법원에 입양 신청서를 냈습니다. 그리고 2021년도에 있었던 아프가니스탄 미군 철수 작전 때 그 아기와 가족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그 아무개 해병 대원은 도왔습니다.

 

2. 미국에 도착한 그 아기와 가족들은 아프간 난민을 위한 이주 센터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사람들이 와서 그 아기를 데려갔습니다. 이유를 몰랐던 그 아기의 가족들은 나중에 미해병 대원이 그 아이를 입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아기의 가족들은 당황했습니다. 자신들도 모르게 아이를 입양하고 데려가는 것은 ‘유괴’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 해병대원 부부는 이 일에 대해서 이런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을 지키면서, 아이를 구하기 위해 훌륭하게 행동했던 것일 뿐입니다. We’ve acted admirably to save the baby, keeping with our Christian beliefs.”

 

3. 이 기사를 읽고/듣고 조금 혼란스러웠습니다. 이 미군 부부는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하여,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훌륭한 일이었다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것 때문에 수많은 무고한 목숨이 죽은 것은 무엇이고, 그 아이가 부모를 잃게 되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된 것은 누구의 탓일까요.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전쟁 고아를 입양해서 데려다 키우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자체를 일으킨 것에 대하여 회개하며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미국 정부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을까요? 아무튼, 이 기사를 접하고 오랫동안 깊은 상념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 감사절을 맞아, 아무런 거리낌없이 마냥 감사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어딘가 마음이 좀 불편합니다. 각 교회마다 풍성한 과일과 곡식으로 강단을 꾸미고 그것을 배경으로 한 사진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올라오지만, 지금 우리의 삶이 그렇게 정말 풍성한가를 돌아보면, 왠지 우리의 현실을 왜곡하고 속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설사, 부자들이나 부자 나라들에서는 아직까지 먹거리가 풍성하여 별 걱정 없이 감사절을 보낼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르나, 우리가 알다시피, 기후변화 때문에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고 있고, 수많은 동물과 어류, 식물들이 멸종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가 이렇게 마냥 ‘감사’를 남발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5. ‘불편한 감사.’ 미국의 부통령을 지냈던 엘 고어가 『불편한 진실Inconvenient Truth』라는 책을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2006년입니다. 16년 전입니다. 이 책은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 고어가 말하는 ‘기후변화’의 진실을 듣고 불편해했습니다. 마음도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받아들이면 몸과 삶 자체가 매우 불편해지기 때문에, 기후변화의 진실을 말하는 것은 불편한 감정을 자아낼 뿐이었습니다. 살던 대로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죠. ‘불편한 감사’는 바로 여기에서 가져온 용어입니다. 감사절을 맞아 마냥 감사하고 싶은데, 우리의 감사가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마냥 감사하기에는 세상살이가 너무 척박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6.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돌아와 남원 사또의 악행을 밝히면서, 이런 시를 지어 내놓습니다.

 

金樽美酒 千人血(금준미주 천인혈)

玉盤佳肴 萬姓膏(옥반가효 만성고)

燭淚落時 民淚落(촉루락시 민루락)

歌聲高處 怨聲高(가성고처 원성고)

금 술통의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 접시의 좋은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구나

 

7.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면서부터 저는 이몽룡의 이 시가 자연이 인간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쓴 시처럼 느껴졌습니다.

 

金樽美酒 千木血(금준미주 천목혈)

玉盤佳肴 萬膏(옥반가효 만수고)

燭淚落時 淚落(촉루락시 지루락)

歌聲高處 聲高(가성고처 풍성고)

금 술통의 좋은 술은 천 나무의 피요

옥 접시의 좋은 안주는 만 동물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대지의 눈물 떨어지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바람wind) 소리 높구나

 

8. 땅이 우리처럼 말을 한다면, 강단에 풍성하게 쌓인 과일들과 곡식들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할까요? 풍성한 결실을 내서 참으로 감사하구나, 할까요? 인간들의 탐욕을 욕하면서 자기들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면서 재배한 과일들과 곡식들을 향해서 위와 같은 시 한 수를 지어 날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사는 매우 불편합니다. 땅이 내는 소산에서 감사 소리가 아니라 원망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백성의 고혈을 짜내 자신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며 변 사또처럼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풍성함을 서로 나누는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대지의 고혈을 짜내 자신의 식탁만 풍성하게 하는 사악한 인간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9. 본문은 우리에게 그 해답을 줍니다. (지금도 그러는 유대인들이 있지만) 성경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오전 9시, 정오, 그리고 오후 3시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 구 시’란 오후 3시를 가리킵니다. 유대인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관습에 따라, 오후 3시에 성전으로 기도하러 갔습니다. 이들이 성전에 기도하러 간 것은 하루이틀 했던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령을 받아 거듭난 후에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매번 가던 성전이었고, 매번 드나들던 길이었는데, 예전에는 거기에서 구걸하던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받은 이들의 눈에 이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기적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에게만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발생한 것이죠.

 

10.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기도할 때 성령이 임재하여 성령 충만하게 된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에는 무엇보다도 ‘감사’가 넘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상한 일이 발생합니다. 평소 눈에 별로 들어오지도 않았고, 별로 관심도 없었던 성전 미문의 걸인에게 눈이 갔다는 겁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든,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3-4절).

 

11. 감사(thanksgiving)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감사란, 눈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감사가 넘쳤습니다. 성전으로 향하던 그들의 발걸음은 무엇보다도 감사의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감사가 참된 감사였던 것은 그들이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그들의 눈이 가려져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들의 눈이 뜨여져 구걸하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걸하는 사람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12.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너무도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감사를 나누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자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 몇 푼 정도 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그에게 준 것은 아주 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보행장애자였던 그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나누어준 ‘감사’ 덕분에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구걸해서 비굴하게 먹고 살지 않아도 되고, 이제 자기 힘으로 먹고 살 수 있게 됐습니다.

 

13. 저는 이렇게 다시 보행할 수 있게 된 이 사람의 인생이 정말 궁금합니다. 제가 소질 있는 작가라면 이 사람의 일생을 다룬 소설을 하나 써보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다시 자유롭게 보행할 수 있게 된 것을 잘 활용하여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꾸몄을까요? 아니면, 차라리 움직이지 못하고 구걸하면서 사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못된 사람이 되었을까요? 저는 이 사람이 자신이 받은 감사를 다른 어려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살았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받은 감사는 보통 감사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감사는 또다른 참된 감사를 낳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니까요.

 

14. 우리의 감사가 불편한 감사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감사가 온전한 감사가 되려면, 우리는 눈을 감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감사하기 어려운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존재한다면, 우리의 감사는 온전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모든 사람이 감사할 수 있을 때까지 불편한 감사, 유보된 감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 구원을 얻기까지 우리의 감사는 불편한 감사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모두’는 더 이상 인간 존재만 가리키는 것이 되지 못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대지가, 땅이, 자연이 우리 인간의 탐욕으로 인하여 신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인간 존재만이 아니라, 이 대지가, 땅이, 자연이 감사할 수 있을 때까지, 인간 존재와 더불어 비인간 존재에게도 우리의 감사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15. 참된 감사는 흘러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들의 감사를 보행장애인에게 흘려보냈던 것처럼, 감사는 흘러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보행장애인도 고침을 받은 후, 자신이 받은 감사를 흘려보냈을 것입니다. 자신처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도록 최선을 다해 살았을 것입니다. 당연히 자신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도록 어려운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을 것입니다. 불편한 사람이 없도록, 감사가 계속 흐르다 보면, 언젠가는 모두가 함께 감사드릴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감사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눈을 가리지 말고, 눈을 떠서, 우리가 주님께 받은 감사를 열심히 흘려 보내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눈이 뜨여지기를 소망합니다. 소망하지 않아도, 우리가 참된 감사 가운데 있다면, 베드로와 요한처럼 눈이 뜨여질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가 받은 감사를 흘려보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가 불편한 감사에 머물지 않도록, 인간 존재에게, 그리고 비인간 존재(동물, 식물, 자연)에게 선한 일을 하십시오. 친절하게 대해주고, 망가뜨리지 말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십시오.

Posted by 장준식

[기후교회로 가는 길]

 

5. 기후변화와 제자도

 

“차이를 만들어 낼 유일한 변화는 인간의 가슴을 변화시키는 것이다”(피터 셍지, Peter Senge). 일생 동안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신영복 선생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을 덧붙입니다. 결국 우리가 일생 동안 해야 할 여행 중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 발까지 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가진 ‘제자도’라는 말이 그 뜻을 담고 있으니까요. 제자도란 제자가 가야할 길을 가리키는데, 예수를 따르는 사람(a follower of Christ)의 길이란 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니리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기후교회』는 제자도를 묻습니다. “기후위기의 세계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기후교회, 161쪽). 제자도는 매우 역동적인 개념입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리퀴드’ 개념을 빌려 제자도를 표현한다면, 제자도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liquid)’입니다. 제자도는 한 시대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따라 바뀝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실하고자 했던 신앙의 선조들은 모두 자기 시대의 문제를 못 본 척하지 않고 끌어 안고 씨름했습니다. 멀리는 로마제국의 멸망의 지켜보면서 기독교 신학을 탐구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랬고, 가까이는 나치의 포학에 맞서 제자도를 고민했던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자들, 특히 바르트나 본회퍼가 그러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는 김교신이나 다석 유영모 같은 분들이 일제시대와 영적위기에 맞서 참된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제자도란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문제가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면한 시대의 문제와 씨름하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죠.

 

제자도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신앙인은 경건한 신앙의 선배들이 물었던 질문을 동일하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회퍼가 그 질문을 한 문장으로 아주 잘 정리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Wer ist Christus für uns heute?” 우리는 ‘오늘’을 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까? 『기후교회』는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고, 그러한 일들에 맞선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주목하는 것은 지난 2세기 동안 발생한 화석연료의 추출과 그것을 이용한 물질적 성장입니다. 화석연료의 사용과 물질적 성장의 추구가 가져온 결과는 풍요만이 아니고 기후변화를 동반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에 풍요를 가져오는 바로 그것이 인간의 생명을 멸망시킨다면, 이것만큼 모순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라스무센의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에 나온 진술을 이용해 짐 안탈 목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신앙인들로서 우리도 인간의 경제가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굴러가는 것을 곁에서 가만히 서서 지켜볼 수는 없다”(기후교회, 164쪽). 지난 2백년 동안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인류가 행한 일은 경제성장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경제가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굴러간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미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총기사고를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매일 같이 총기사고가 나서 무고한 생명이 수도 없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총기규제를 하지 않습니다. 모두 돈 때문입니다. 총기 사고로 인하여 일 년에 수만 명씩 죽어 나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생태학적 비용(새명이 죽어 나가는 일)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총기구매와 사용이 허가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류는 경제성장을 위해서 모든 생태학적 비용을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병리적 현상입니다. 병입니다. 병(disease).

 

지난 2백 년간 인류 역사에서 발생한 근대화(modernity)는 경제성장을 위해 모든 것이 희생되는 근대화의 시대였습니다. 경제가 블랙홀이 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정치도, 사회도, 문화도, 그리고 종교도 모두 경제를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세운 사회는 ‘물질적 소비’위에 세워진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용어들이 가치 있고 도덕적이고 미적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성장. 소비. 발전. 중독, 과잉, 편리, 무시, 자기중심.” 인류는 오로지 이것들 위해서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소비하지 않으면, 발전하지 않으면, 중독되지 않으면, 과잉되지 않으면, 편리하지 않으면, 무시하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이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성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이 문제인 이유는 ‘삶’을, ‘생명’을, ‘생태’를 지속적이지 못하게 합니다. 삶은 지치고, 생명은 끊어지고, 생태는 망가지고 맙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제자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제자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인데,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살아가신다면 어떠한 삶을 살아가셨을까요? 생명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성장과 소비, 발전과 중독, 과잉과 편리, 무시와 자기중심에 사로잡혀 삶을 지치게 만들고, 생명을 끊어지게 하며, 생태를 망가뜨리는 길을 걸어가셨을까요? 그럴리 만무합니다(It’s absolutely not!).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난 2백년 동안의 제자도라는 것이 경제성장과 맞물려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장’이라는 용어에 매몰되어 ‘제자도란 성장을 일구는 것’인 양, 우리도 모르게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제자도를 실행해 온 듯합니다. 『기후교회』는 기후위기의 세계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물으며, 제자도를 재설정하기를 촉구합니다. 성장 대신에 탄력성을, 소비 대신에 협력을, 발전 대신에 지혜를, 중독 대신에 균형을, 과잉 대신에 적당함을, 편리 대신에 비전을, 무시 대신에 책임성을, 그리고 자기 중심적 두려움 대신에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제자도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새롭게 제시된 제자도를 한 마디로 줄여서 다시 설명하면, 오늘 우리에게 제자도란 체제 변화 운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지난 2백 년간 인류는 화석연료 사용과 경제성장 추구의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우리는 ‘화석연료’에 심하게 중독되어 있습니다. 세계 최고 부호 탑 10 가운데 3개가 에너지 사업과 관련 있습니다. 미국의 코흐 인더스트리스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드 가문, 인도의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가 그것입니다. 쓰고 나면 다시 재생할 수 없는 화석연료 대신에 재생가능한 에너지로 경제를 구성하는 체제를 우리는 새롭게 구축할 수 있을까요? 『대지의 선물』에서 웬델 베리가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이 이웃을 사랑하면서 그 이웃의 삶이 의존하고 있는 위대한 유산을 경멸하는 것은 모순이다”(기후교회, 191쪽).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제자도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이 의존하고 있는 ‘위대한 유산’을 경멸하는 것은 겉으로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이웃을 욕보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것은 신앙이나 제자도가 아니라 기만이고 사기입니다.

 

기후위기를 맞아, 우리의 제자도는 기존의 제자도와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기후위기를 맞아, 우리는 여전히 개인구원, 영혼구원만 외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예배, 설교, 기도, 선교, 친교, 봉사의 측면에서 기존의 제자도와 어우러진 새로운 제자도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로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머리는, 우리의 가슴은, 우리의 발은 무엇을 향하고 있습니까?

Posted by 장준식

[바울의 해체, 우리의 해체]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해체(deconstruction)한다. 그에게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해체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넘나드는 보편적인 구원을 이루는 것이었다. 바울의 신학이 담고 있는 정치신학은 인간(유대인)과 인간(이방인) 사이에 놓인 막힌 담을 허무는 것이었다.

 

바울 신학의 정신을 이어받은 그리스도인이 오늘날 생태 위기를 맞아 더 진행시켜야 할 해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해체시키는 일이다.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정치신학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막힌 담을 허무는 것을 넘어서(이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작업이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놓인 막힌 담을 허무는 정치신학이다.

 

바울의 정치신학이 유대인 중심의 세계관을 이방인도 포함시킨 보편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이었듯이,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정치신학은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비인간도 포함시킨 보편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이다. 유대인이 이방인에 대하여 자신들과 동일한 가치를 인정할 때 그것이 곧 구원이었듯이, 인간이 비인간에 대하여 자신들과 동일한 가치를 인정할 때, 구원이 임할 것이다.

 

비구원은 가치의 불균형에서 온다. 구원은 가치의 균형이다. 마르틴 부버가 일찍이 간파했듯이, 비구원은 '나와 그것'의 가치이다. 나 중심에서 사로잡혀 상대방의 가치를 '그것(it)'으로 상대화시키면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 차별과 혐오와 폭력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악들은 합리적이고 타당한 행위로 둔갑한다. 구원은 상대화된 '그것'의 가치는 '너(당신)'의 가치로 대등화되는 것이다. 구원은 '나와 너(당신)'의 가치이다.

 

모든 것이 그렇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상대방의 가치를 '그것'으로 전락시키는가. 자신이 무슨 성취를 이룬 것처럼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에게 특히 이러한 가치 전락이 발생한다. 동양철학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이(理)'가 상대방의 '이(理)'보다 높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을 '그것'으로 취급하며 하대하게 된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에게 이를 높이는 수단으로 전통적으로 나이, 성별, 가문, 학식 등이 쓰였고, 요즘들어서는 재산, 학벌, 외모가 자신의  '이(理)'를 높이는 수단으로 긴요하게 쓰이고 있다.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바울이 하려했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해체도 그 완성이 묘연할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 절실하게 요청되는 인간과 비인간의 해체는 이제 걸음마 단계인 듯하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수도없이 존재를 '나와 그것'으로 설정지어 차별하고 혐오하고 폭력을 저지르며 산다. 우리는 언제쯤 '나와 너(당신)'의 관계 속에서 평화를 이루고, 서로 존중하며, 서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아주 묘연할 뿐이다. 이렇게 구원이 묘연한데,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자기의 구원을 자랑하는 자들이 말하는 구원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삶 속에서 성취하려는 구원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상대방(당신)을 '그것'으로 상대화시키지 않고 '너(당신)'로 대등화시키는 것이다. 나보다 '이(理)'가 낮다고 생각되는 존재도, 나보다 '이(理)'가 높다고 생각되는 존재도, 그저 나에게는 '너(당신)'일 뿐이다. 나는 누군가를 하대하거나 누군가에게 굽실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에게 굽실대는 존재를 거부한다. 나는 나를 하대하는 존재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와 너(당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구원받은 존재이지, 상대방은 '그것'의 가치로 상대화시키는 비구원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존재가 되기를! 비구원의 존재가 아니라 구원의 존재가 되기를! 무엇보다, 요즘 더 긴급하게 요청되고 있듯이, 비인간을 '너'로 받아들이기를!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여 생명이 지속적으로 번성하기를!

Posted by 장준식

[불황과 호황: 카지노와 교회]

 

미국의 카지노 산업은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Despite high gas and food prices, there doesn't seem to be many inflation worries when it comes to gambling." 인플레이션이 심해서 개스값과 식료품 가격이 엄청 올라서 먹고 살기 힘들어졌는데, 도박장은 역대 최고의 호황을 맞았다는 기사다. 올해 3분기 실적이 무려 150억 달러란다. 이에 대하여 네바다 대학교의 도박 역사를 전공한 교수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한바탕 기회를 잡으려는 인간의 심리가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풍경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호황을 누리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도박 산업이 되었다. 사람들의 인식이 완전히 바뀐 것 같다. 불확실한 시대에 신의 인도를 받는 것보다는 돈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더 확실한 미래를 보장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가진 보편적인 생각인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각자 도생의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공동체는 없고 '개인'만 남은 세상에서 누가 우리를 구원하겠는가.

 

그동안 너무 '개인구원'만 힘써 외쳤던 복음주의 신앙이 이러한 현상을 한몫 거들은 것도 사실이다. '개인구원'이 각자도생과 무엇이 다른가.  종교가 각자도생을 endorsement(지지) 했으니,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이웃들을 돌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자기의 소유를 더 늘리려는 욕구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인 듯하다.

 

미국 투자 자본의 40%가 몰려 있다는 실리콘밸리, 내가 사는 동네도 불황을 맞고 있다. 빅테크 기업들의 layoff 사태가 줄을 잇고 있다. 우리 동네는 올 가을, 나무만 잎을 떨구어내는 게 아니라, 기업들도 나무가 이파리를 떨구어내듯 노동자들을 떨구어내고 있다. 그래서 올 가을, 바닥에 나뒹구는 낙엽이 별로 낭만적이지 않다.

 

어려운 시절, 모두가 조금씩만 양보하고 나누어서, 잘 버텨내면 좋겠다. 모두 살아남아 꽃을 피우고 다시 이파리가 무성해지길!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11. 15. 07:14

실천하는 사람(호모 프락티쿠스)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롬 2:1-16)

 

바울의 입술을 통하여 어떠한 삶이 좋은 삶인지 말씀해 주신 주님,

율법을 가졌고, 복음을 들었다고,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 우월감을 갖는 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지를 알려주신 주님,

우리가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하여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우월감을 십자가에 못박기를 원하나이다.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는 우월감에 근거한 신앙에서 벗어나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불의에 반대하는 선한 일을 하는 자 되게 하소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실천하는 자가 된다는 것임을 잊지 말게 하시며,

호모 프락티쿠스, 실천하는 사람들로 우리를 불러

리-바이벌(다시 살아남)이 절실히 필요한 이 시대에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 선하신 일을 행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뜻을 밝히 깨닫을 수 있도록 도우시옵소서.

손과 발이 좀 더 부지런해지길 원합니다.

손과 발이 좀 더 선해지길 원합니다.

실천하는 사람들로 불러주신 주님,

우리의 손길과 발걸음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며

우리 교회를 부흥케 하옵소서.

또한 우리의 삶이 선한 일로 넘쳐나도록 우리에게 복내려 주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손과 발이 못박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1. 15. 07:12

호모 프락티쿠스 (Homo Practicus/실천하는 사람들)

(로마서 2:1-16)

 

1.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로 시작하는 2장의 말씀은 율법을 소유한 것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물론 로마서의 진술을 도식적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로마교회의 정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약간의 도식적인 분석이 필요하지만, 성경이라고 하는 큰 틀에서 보면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지혜롭다. 우월감을 가진 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 또는 유대인에게만 있는 감정은 아니다. 우월감은 인간이 갖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무엇 때문에 우월감을 갖는가? 우리는 모두 상대방에 대하여 우월감을 갖는 지점이 있다.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하나님께 받았다는 것 때문에 우월감을 가지고 살았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구원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심판받은 자들에 불과했다. 바울이 하고 있는 작업은 율법을 가진 것 때문에 이방인을 향해 가지고 있는 우월감이 얼마나 불필요한 일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2.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고, 그로 인해 우월감을 가지게 된 유대인들이 한 일은 ‘남을 판단하는 일’이었다. 인간에게 있어 ‘법(Law)’이라는 것은 참 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예로부터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사회의 지도층에 속해왔다. 법을 다룬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보통 사람들보다 ‘남을 판단하는 일’ 하는 것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살다보면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일이 발생하는데, 유체이탈 화법이나 유체이탈 행동이 두드러져 나타나게 된다. 어떠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남을 판단하기만 하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발생한 사건과 자신을 결코 연결시키지 않고, 그 사건의 바깥에서 그저 판단하기만 한다. 한 마디로, 우월감이 고착화되면, 공감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3.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1절).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을 판단하는 그 사람도 판단받는 사람과 똑같이 죄를 짓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자기중심성, 어떠한 신학자는 이것을 원죄라고 말한다.)구원을 말할 때, 한국인들은 흔히 이런 질문을 많이 한다. “이순신 장군은 천국에 갔을까요?” 예수를 모르던 시대를 살았던 이순신 장군 같은 의인이 예수를 믿지 안았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이런 질문이 나온다. 한국인은 이순신 장군을 의인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의인 이순신은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도 천국에 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한국인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4. ‘의로운 전쟁 이론(Just War Theory)’라는 게 있다. 기독교 윤리에서 한 때 격렬하게 논쟁이 벌어진 주제이다. 특별히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놓아 두고, 신학자들 간에 ‘의로운 전쟁’에 대한 논쟁이 아주 격렬하게 일었던 적이 있다. ‘의로운 전쟁’이라는 것이 있을까? 전쟁을 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기독교에서 의로운 전쟁(just war)을 말하는 이유는 구약성경 때문이다.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워 행했던 가나안 땅의 전쟁은 의로운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수많은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의 칼날에 죽어 갔는데,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현대에 발생하고 있는 전쟁도 ‘의로운 전쟁’의 논리에서 전쟁을 수행한다.

 

4.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 영화 ‘명량’과 ‘한산: 용의 출현’에 보면 의로운 전쟁을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옳지 못하다고 판단한 한 일본 군사가 전향을 하여 이순신 편에서 조선군이 왜군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는 이순신에게 묻는다. “이 전쟁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대답한다. “이 전쟁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은 의와 불의의 전쟁이다.” 한국식 할리우드 대사이다. 전쟁을 인간의 비참한 죄악으로 보지 못하고, 의와 불의로, 즉 ‘의로운 전쟁’으로 보게 되는 순간, 전쟁에서 발생하는 살생은 모두 정당한 것이 된다. 이렇게 의로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은 불멸의 의인이 되고, 그러한 의인은 반드시 천국에 가야 한다는 논리가 발생한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이순신이 단순히 예수를 믿지 않은 것 때문에 천국에 못간다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5. 전쟁이 의로울 수 있을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전쟁이 한창 중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전쟁을 하면 나라들은 그냥 전쟁을 치열하게만 하는 게 아니다. 서로 도덕적으로 비난하기 바쁘다. 정당성을 스스로 입증하지 못하면 전쟁에서 발생하는 고통들을 수습하는 일이 쉽지 않다. 전쟁에서 발생한 그 수많은 죽음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로운 일, 선한 일을 하다 죽었다는 ‘자기 의’가 없으면 인간은 전쟁에서 발생한 상흔을 감당할 수 없다. 러시아 정교회의 키릴 총대주교는 러시아 젊은이들을 선동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전쟁에서 죽은 러시아 군인들의 죄는 없어질 것이다.” 러시아 측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은 의로운 전쟁이라는 뜻이다. 정말 그런가?

 

6. 전쟁이 발발하면 서로 의로운 전쟁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의(justice)는 매우 상대적인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고 있고, 서방과 러시아가 대립하고 있고, 미국과 중국이 대립하고 있고, 한국과 북한이 대립하고 있지만, 서로가 총칼을 겨누고 서로의 생명을 빼앗는다면, 의로운 전쟁 같은 것은 아예 없다. 내 편에서 생각하면 상대편이 죽일 놈이지만, 상대편이 생각하면 내가 죽일 놈인 것이다. 이것을 누가 판단하겠는가? 당연히 모두 하나님은 자기 편이라고 생각할 것이지만, 의로운 전쟁의 논리는 전쟁에서 발생한 수많은 악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은 천국에 갔을까?’ 같은 질문은 매우 허무한 것이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순신 장군은 왜적을 물리친 영웅이고 의인이지만, 그가 죽인 일본 젊은이들은 무엇인가? 그들도 모두 그들의 부모들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하는 자식들이다. 전쟁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 의로운 전쟁은 없다.

 

7. 남을 판단하는 일이 고착화되면 이렇게 끔찍한 일이 발생한다. 자기는 의인이고, 남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좋은 일만 일어나야 하고 혹시 나쁜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뭔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남에게는 심판이 임해야 하고 그에게 발생한 나쁜 일은 죄에 대한 심판일 뿐이라고 아주 쉽게 정죄해버리고 만다. 이것만큼 공감능력을 상실한 상황도 없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같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4절). 좀 더 쉽게 풀어 번역한 것으로 보면 이렇다. “더구나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그 크신 자비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자가 있다니 될 말입니까?” 남을 판단하는 자들의 특징은 자신에게 발생한 나쁜 일은 별거 아니고, 다른 이에게 발생한 나쁜 일은 심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은 나쁜 일을 벌여도 심판을 받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에 불과한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8. 남을 판단하고, 우월감을 갖는 것은 좋지 못하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남을 판단하고 우월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선을 행하는 것이다. ‘꾸준히 선을 행하는 일’, 이것은 어려운 일인가? 인류의 역사를 보면, 전쟁 뒤에는 언제나 종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종교가 원래 그런 것일까? 종교는 전쟁을 부추기고 전쟁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일까? 우리는 이 지점에서 늘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아우슈비츠의 비극 뒤에는 종교가 있었다. 기독교 국가였던 독일은 유대인들을 미워했다.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것이다. 이게 신앙인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으니, 그 원수를 그리스도인들이 갚아야 하는 것일까? 전혀 아니다. 하지만, 나치의 선동은 독일인들에게 먹혀 들어갔다. 600만명의 대학살이 발생한 아우슈비츠 비극은 독일인이 가진 종교심과 우월감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쉽게 말해서, 나치는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그 일을 자행했던 것이다.

 

9.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서구사회는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고, 종교와 철학의 메시지를 다시 그 근본에서부터 성찰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유대인 프랑스 철학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다. 그렇다 보니, 타자(others)를 잘 보지 못한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윤리’를 발전시키는데, 유대인 학자답게 구약성경의 윤리를 보편화시키는 데 노력한다. 그가 발전시킨 ‘타자의 윤리’는 다음의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나를 죽이지 말라. You shall not kill me.” 이것은 죽음이 난무했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견한 종교/철학 윤리이다. 상대방의 눈에서 우리는 이 절실한 요청을 발견해야 한다. “나를 죽이지 말라.” 이 강력한 눈빛을 발견한 사람은 결코 상대방을 죽일 수 없다. 인류의 이 보편적인 윤리를 발견한 사람은 상대방을 죽이려고 손에 들었던 무기를 다시 땅바닥에 내려놓게 될 것이다. 꾸준히 선을 행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상대방, 타자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말씀과 같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10. 바울이 말하고 있는 깊은 신학적/인간학적 진리는 이 한 마디에 담겨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For God does not show favoritism)”(11절). 여기서 외모는 ‘잘생기고 못생기고’의 뜻이 아니다.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그러한 것을 가리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진술한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헬라인)이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하지 않으신다. 그러면서 바울은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율법을 가졌고, 율법을 들은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중요한 것은, ‘율법의 실행(practice of the law)’에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11. 유대인들이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서 우월감을 가진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가졌고 율법을 들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사실의 의미가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를 폭로한다. 율법을 가졌고, 율법을 들은 것은 결코 특권이 될 수 없다. 율법이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이나 양심에 율법에서 말하는 ‘정의(justice)’를 심어 놓으셨다. 그래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본성이나 양심에 따라 얼마든지 선한 일, 의로운 일을 할 수 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14-15절).

 

12.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이다. 율법을 가지고 있고 율법을 들었다는 것은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율법을 가지지 못한 이방인도 본성과 양심에 따라 얼마든지 율법의 요구를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율법을 가졌다면 그 율법을 가진 것에 만족하고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율법을 가지지 않았어도 본성과 양심에 따라 율법의 요구를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이방인들이 있다. 율법의 요구를 실천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냐, 아니면 그것을 가지지 못한 이방인이냐, 이렇게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율법과 본성과 양심에 새겨진 율법의 요구를 실천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13. 기독교인들도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어리석은 일을 수행할 수 있다. 복음을 가졌고 복음을 들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복음을 가졌다는 것, 복음을 들었다는 것, 그래서 믿음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요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은 판단하면서 살아가는가. 자기들은 의롭고, 다른 이들은 불의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들이 자행하는 못된 일들은 모두 ‘의로운 전쟁(just war)’인양 얼마나 사실을 왜곡하는가. 이러한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여전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을 가졌고, 복음을 들어, 믿음을 가진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오! 믿음은 실천의 동의어일 뿐이오!”

 

14. 성산 장기려 박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운영하고자 일생 헌신한 의사였다. ‘돈이 있으면 치료비를 내시고, 없으면 그냥 가세요’라는 식의 병원 운영이었다. 그러다 보니까 간혹 돈이 있는 사람들도 욕심을 내어 거짓말을 할 때도 있었다. 하루는 옷도 멀쩡하게 입고, 손에 다이아반지까지 낀 사람이 치료를 다 받고 난 뒤에 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장기려 박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없다면 할 수 없지요. 그냥 가시죠.”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서무과 직원이 박사님에게 손짓 눈짓으로 그 사람의 손가락을 보시라고 한다. 그 환자가 돌아간 후 장기려 박사가 말했다. “나도 보았지. 그러나 돈이 없다고 하는 사람 한둘을 의심하다 보면 진짜 가난한 환자도 의심하게 되지.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과 자기 양심은 못 속인다네.” (한겨레 신문에서 가져옴)

 

15. 장기려 박사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 일화에 등장하는 ‘다이아반지를 낀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복음을 들은 우리들, 마치 다이아반지를 낀 것처럼 우월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는 멀쩡하면서, 건강이 있고 능력이 있고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호모 프락티쿠스. 실천하는 사람들. 손과 발이 좀 더 부지런하게 움직인다는 뜻이다. 손과 발이 좀 더 선해진다는 뜻이다.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지 말고, 이웃을 섬기는 자리에 있으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호모 프락티쿠스이다.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섬기는 사람들이다.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세상은 실천하는 사람들을 통해 변화되고, 교회는 실천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부흥한다. 리-바이벌(revival, 다시 살아남)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22. 11. 13. 04:06

저항이 필요한 시간

 

예수께서 우셨다.

   그리고 그는 울면서 애통하는 자들과 함께 영원히 함께 하셨다.

   그는 모든 시간에 걸쳐 계시며,

   이 우시는 예수는,

   울고 있는 자들을 그의 팔로 안아 주시며 말씀하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는 우리는 자들과 함께 계신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God-with us)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우셨다.

(앤 윔즈, 『슬픔의 노래』, 24쪽)

 

하나의 죽음이 발생하면 하나의 우주가 사라진다. 그런데, 떼죽음이 발생하면 우주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간은 살면서 숨쉬는 것만큼 죽음을 많이 경험한다. 죽음을 경험한 인간은 무기력에 빠지거나 불가지론에 빠지기 십상이다. 죽음을 경험하면 인간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왜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지’ 알지 못해 무지의 심연으로 추락한다. 무엇이 이렇게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인간의 손을 잡아줄 수 있을까? 죽음은 이렇게 인간에게 불안과 공포, 그리고 고통을 안겨준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많은 것을 인간에게 부정의 형식으로 남긴다.

 

미국의 계관 시인, 앤 윔즈가 쓴 『슬픔의 노래』에 보면, 그녀의 슬픔을 담은 시, 즉 탄식의 시편들을 쓰도록 격려해준 월터 브루그만의 간략한 시편 해제가 담겨 있다. 시편에 대한 아주 짧은 해제이지만 거기에는 시편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강력한 교훈을 담고 있다. 브루그만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아마도 이스라엘의 가장 독특하고도 생생한 믿음의 양식인 탄원과 푸념은 우리를 ‘저항의 영성’(spirituality of protest)으로 인도한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대담하게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옳은 것은 아님을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모든 것이 괜찮은’ 척하며 우리가 취하는 자기 부인의 쉬운 방식에 반대하는 것이다”(17쪽).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앞에서는 고분고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오해하는 경우 중 하나다. 실제로 시편을 보면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고분고분하지 않다. 욥기서에서도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욥의 고분고분한 모습보다는 욥의 저항하는 모습이다. 시편의 시인들도 욥도 자신들에게 발생한 죽음의 경험 앞에서 고분고분하지 않다. 그들은 저항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저항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에게 발생한 고통스러운 일들의 원인이 우리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쉽게 인정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시편의 슬픔 공동체는 “죄를 고백하기를 반항적으로 거부하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불의에 대하여 책임지기를 거부한다”(17쪽). 시편의 슬픔 공동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최고의 영성은 ‘저항의 영성’이다. 즉 그들은 “실패한 것과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것 그리고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시킬 줄 안다”(17쪽). 즉, 여기서 말하는 저항의 영성은 하나님을 향한 저항의 영성이다. 우리에게 발생한 고통스러운 일에 대하여 하나님에게 따져 묻는 것이다.

 

떼죽음의 고통이 발생한 대한민국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치쇼와 정쟁만 난무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는 자들과 그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자들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지혜를 성경의 슬픔 공동체로부터 배운다. 이미 존재하는 슬픔 공동체에 들어가 그들의 언어를 통하여 우리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슬픔의 언어는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저항’이다. 그 저항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치유와 회복, 그리고 정의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솟아오를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교회로 가는 길]

 

4. 기후변화와 새로운 도덕률

 

인간은 성공을 추구합니다. 교회도 성공을 추구합니다. 인간의 집합체이며, 공동체인 교회에게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이 땅의 수많은 교회들이 ‘부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각종 프로그램과 아이디어를 통해 성공을 추구해왔습니다. 교회의 생태계도 일반 집단의 생태계와 별반 다르지 않게 매우 경쟁적으로 성공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자신들이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호소력 있게 개발한 덕분에 성공했고, 어떤 교회들은 ‘예배, 선교, 봉사, 친교’ 등 전통적인 교회의 사역을 탁월하게 수행함으로써 성공했습니다. 또 어떤 교회들은 포스트모던 사회에 부합한 교회의 모습을 갖춤으로써 신선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 성공을 일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교회들의 성공은 우리가 현재 마주치게 된 현실 앞에서 매우 무기력해집니다. “모든 개교회는 힘겨운 새로운 현실에 직면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의 지속에 더 이상 의존할 수 없다는 현실이다”(기후교회, 139쪽). 사랑이 없으면 그 어떤 행위도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듯, 그 어떤 성공도 기후변화의 현실을 외면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후위기 시대를 맞아 교회는 ‘성공’에 대한 정의(definition)를 절대적으로 다시 세워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덕률이 요청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기후위기 앞에서 어떠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삶의 지속성을 위해서, 미래세대의 지속성을 위해서, 교회 사역의 지속성을 위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떠한 역할을 감당해야만 할까요? 『기후교회』에서 짐 안탈 목사는 지구와 이 땅 위의 생명들을 위협하는 두 개의 집단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화석연료를 뽑아냄으로써 엄청나게 부자가 되는 소수의 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피조물들을 쓰레기로 만드는 데서 이익을 얻는 발전된 산업국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거리를 두고 두 개의 집단이 명시되고 있지만, 실상 이것은 바로 ‘우리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발전된 산업국가에서 살며 화석연료를 소비하면서 생명을 보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거대한 쓰레기를 생산해 냅니다. 바로 ‘우리들’이 지구와 이 땅 위의 생명들을 위협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사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급진적인 제안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거대한 전환, 또는 놀랍게 거듭난 삶이 우리에게 요청됩니다. 이것은 기후위기 앞에서 인간의 생존을 모색하는 모든 ‘기후영성학자들(종교인이든 종요인이 아니든)’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최근 『회복력 시대』를 출간한 제러미 리프킨은 기후위기를 맞아 ‘회복력(Resilience)’을 키워드로 한 생존전략을 말합니다. ‘회복탄력성’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는 ‘Resilience’라는 용어는 ‘역경과 고난을 지나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회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리프킨은 상생을 강조합니다. 산업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은 생태계의 다른 종들과 구별된 종(spices)으로서 다른 종들을 지배하고 착취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왔으나, 이제는 인간도 지구 생태계에 종속된 하나의 종(one of them)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설정하여(또는 원래대로 돌아가)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적응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후교회』에서 짐 안탈도 같은 말을 합니다. 그는, 기후위기 앞에서 교회는 탄력적인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여기서 ‘탄력적인’이라는 용어도 ‘Resilience’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기에 직면했지만, 그 위기에 넘어지거나 휩쓸려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하여 계속해서 번성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할 의무가 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상호의존성’의 중요성과 체제를 바꾸기 위한 노력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서술합니다. 우리 동양인들은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서로 의존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러나 동양인의 삶이 서구화되면서 우리가 원래 지니고 있던 삶에 대한 가치, 즉 ‘상호의존성’의 가치는 상실된 지 오래입니다. 동양인은 자연에 순응(적응)하는 방식으로 삶을 꾸려왔습니다. 그러나 18, 19세기를 거치면서 산업화 시대를 먼저 일군 서구인들에 의해서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방식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삶의 방식이 우리 가운데 자리잡았습니다. 지배와 착취가 난무했던 서구인들의 제국시대는 동양인들로 하여금 자연에 순응하는 방식을 버리고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도록 이끌었던 것이죠.

 

그런데, 기후위기 앞에서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일군 자연에 대한 지배와 착취의 방식이 결국 얼마나 잘못된 삶의 방식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양인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우려고 합니다. 그 지혜란 바로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서로 의존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후변화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기후변화의 담론(discourse)을 이끌고 있는 서구세계의 학자들이 쓴 책들을 참고하고 있지만, 사실, 동양인으로서 우리 안에는 이미 오랜 시간동안 삶에서 채득한 ‘상호의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에 직면하여 다시 살펴보면,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진 삶의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를 앞서가는 삶의 방식이고, 올바른 도덕률에 근거한 정의로운 삶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후변화의 담론을 이끌고 있는 서구 생태학자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운다기 보다, 우리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지를 확인하고 자랑스러워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구인들에게는 회개가 필요하지만,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감사와 칭찬이 필요한 것이죠.

 

기후위기는 모든 형태의 불의를 강화합니다. 이렇게 불의가 증폭되고 있는 기후위기의 시대에 교회가 빛을 발할 수 있는 이유는, 교회는 이미 오랫동안 정의(Justice)를 교회의 특색으로 명시했으며 모든 불의에 반대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자기 정체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의 말을 인용하여 짐 안탈은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는 건설계획(building plan)을 가지고 왔지 ㅡ그의 추종자들에게 땅 위에서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데 그와 함께하자고 확신시키기를 희망하면서ㅡ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살피라고 위탁하신 생명을 주는 피조세계로부터(죽든지, 혹은 우주선을 타고) 철수하여 도망가자고 온 것이 아니다”(기후교회 144쪽). 기후위기로 인하여 증폭되고 있는 불의에 대하여 눈감고 그저 어떠한 방식으로든(죽든지, 혹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탈출하기만 하면 그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인에게 도덕적인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증폭되고 있는 불의에 맞서, 불의를 증폭시키는 원인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행동해야 합니다. 탄소생산의 진짜 비용과 탄소가 원인이 된 공해가 그 값에 반영되도록 탄소배출 기업들을 압박해야 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로 전환하는 부담을 부자들이 공정한 몫을 지불하도록 요청해야 하며, 탄소의 진정한 값을 지불하는 부담을 가난한 자들에게 떠맡기지 않도록 주장해야 합니다(기후교회, 151쪽).

 

기후변화를 마주하며,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새로운 도덕률입니다. 도덕이란 내가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준점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행위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그 수많은 행위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도덕률’이라는 기준점이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내가 하는 행동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알 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알지 못해서 선하고 도덕적인 일을 하지 못하지 악하기 때문에 선하고 도덕적인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후위기 시대에 절실하게 요청되는 도덕률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전지구적으로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 힘을 모으는데 교회는 도덕적 나침반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을 외면하면 그 어떤 성공도 교회의 부흥이 아닙니다.

Posted by 장준식

[유보된 구원]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존재가 인격적이며, 그래서 관계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관계 안에 있는 존재(being-in-relation)이다. 그러므로 존재란 타자를 위한 존재(being-for-another), 타자로부터의 존재(being-from-another), 혹은 사랑의 존재(being of love)라고 말할 수 있다.

 

어려운 말 같지만, 그리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나 혼자서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타자와 함께, 타자를 통해 존재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우리는 사랑할 때 결코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고 싶을 때는 외로울 때이다. 혼자인 것이 싫을 때, 우리는 사랑을 갈망한다. 우리는 타자를 갈망한다.

 

관계적 존재에게 구원이란 고립된 개념일 수 없다. 나 혼자만의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자기-반성과 자기-성찰을 통한 자기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내가 자기-반성과 자기-성찰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게 되었더라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구원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늘 유보되고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구원받지 못한 이웃이 있다면, 타자가 구원의 상태로 들어오지 못했다면 우리의 구원도 묘연해지는 것이다.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다른 이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다른 이들의 구원 여부와 상관없이 나의 구원은 확정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존재는 관계적이기 때문에, 어느 한 존재라도 구원에서 멀어진 존재가 있다면, 모든 존재의 구원은 유보된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존재가 관계적이기 때문이다. 99마리의 양이 구원받았어도 1마리의 양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그 한 마리의 양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 한 마리를 포기하고 구원받은 99명의 우리들에게 관심을 가져 달라고 집중해 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한 마리의 양이 구원받지 못한 것 때문에 구원은 완전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1마리의 구원받지 못한 양이 존재하는 한, 구원은 유보되고 잠정적인 것이 된다.

 

남이 어떻게 되든, 나만 살았으면 그만이고, 남이 어떻게 되든, 나만 풍요로우면 그만이고, 남이 어떻게 되든, 나만 안전하면 그만이고, 남이 어떻게 되든, 나만 건강하면 그만이고, 남이 어떻게 되든, 나만 구원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기독교 신앙에 없는 개념이다. 만약 이런 생각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면 안 된다.

 

구원은 차별이 아니라 포괄이다. 구원은 개별이 아니라 보편이다. 구원은 혐오가 아니라 사랑이다. 구원은 나 자신의 신앙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신앙에 달려 있다. 그러니, 우리는 나 자신의 신앙뿐 아니라 이웃의 신앙을 위해서도 나 자신을 내어놓아야 한다.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우리 모두의 사랑이다. 나의 구원이 상대방에게 달렸다고 생각한다면, 내 존재가 아니라 상대방의 존재가 귀한 법이다. 그러니 서로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Posted by 장준식

[심리학 또는 역사학]

 

삼위일체론은 심리학보다는 역사학이 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론이 심리학으로 기울게 된 탓은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의 흔적을 인간 내면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이 심리학으로 흐르면,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가 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비판해야 한다.

 

삼위일체론은 심리학보다는 역사학이 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삼위일체론을 정교하게 발전시킨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입장은 역사학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가를 논리적(또는 합리적)으로 전개시킨 것,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론이었다. 그래서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본성(ousia)보다 위격(hypotasis)에 집중한다. 이것은 삼위일체론이 사변, 또는 심리로 흐르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실체(substance)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이 심리학으로 흐르면,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하게 되고,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기 십상이다. 이러한 신앙은 영지주의 신앙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내면을 살펴, 즉 내면을 탐구하여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 하나님을 믿고 갈망함으로 자기 구원(개인 구원)만 이루면 그만이기에, 자기 외부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자기 구원에만 집중하고 역사를 외면하는 신앙은 영지주의 신앙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삼위일체론에서 지켜내야 할 것은 역사학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내면에 어떠한 흔적을 남기셨는지에 집중하기 보다, 역사에 어떠한 흔적을 남기셨는지, 그리고 남기고 계신지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역사의 참여자로서 역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동역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이 중요한 이유, 그리고 어거스틴과 그 이후의 신학자들보다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이 중요한 이유는 성경과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이 '역사 안에서 활동하신(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이 발달한 요즘, 기독교 신앙은 심리학의 발달과 더불어 더 개인주의적으로 흐를 위험성을 안고 있다. 아니, 우리는 이미 그것을 목격하고 있다. 이러한 위험성을 차단하고 '역사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심리학 공부는 조금 덜 하고, 역사 공부를 더 많이 하는 것이다. 역사를 알아야, 역사에 대한 영성(spirituality/정신성)이 생기고, 그 역사 안에서 활동하신(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구원 역사에 부름 받고 동참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교회에서 성경공부 좀 그만하고, 역사 공부 좀 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의 정신을 적용하여) 성경공부 반, 역사 공부 반, 이렇게 반 반씩 만이라도 하면 좋겠다. 성경이 역사의 기록인데, 우리 역사를 공부하지 않는 것은 너무도 이상한 일 아닌가. 삼위일체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