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바꾸는 기도]

 

사도행전 9장은 사도 바울의 회심을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바울의 회심이 중요한 이유는 그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운명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회심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리스도교는 1세기를 채 지나지 못해 유야무야 사라졌을 지 모릅니다. 바울의 조직적이고 적의에 찬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죽였을 겁니다. 바울은 회심 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온 세상(유대 땅과 외국 땅)을 돌아다니며 활동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그의 살기는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바울은 단순한 그리스도교 안티가 아니라 실제 사람을 잡아 죽일만큼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인생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북동쪽으로 2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외국이었습니다. 변변한 교통수단이 없었던 그 시절에 그 먼 곳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갔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열정이 대단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한마디로,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에게 잡히면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공적인 살인면허를 교부받아 바울은 다메섹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던 중 바울은 그 옛날 신앙이 선조들이 들었을 법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놀란 바울을 그 음성에 대답합니까?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 장면은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 그리고 이사야와 예레미야 등 하나님을 만난 신앙의 선조들의 삶에서 동일하게 나타난 장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부르는 이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주님이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실, 바울은 예수를 직접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그가 박해한 것은 그저 예수를 따르는 무리였을 뿐입니다. 게다가 바울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행동은 지극히 옳고 합리적이라 여겼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국가 반란죄로 사형당한 죄를 메시아로 잘못 믿는 광신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광신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을 박멸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정말로 옳은 일을 행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울에게 그가 예수님 자신을 박해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리스도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주 중요한 신학적 토대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계속하여 ‘몸 교회론’을 펼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학입니다. 바울이 그러한 신학을 당당하게 펼친 것은 그의 그리스도 경험 때문입니다. 자신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는데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나를 핍박했다’고 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몸 교회론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신앙의 기초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것이 담긴 의미를 진지하게만 생각할 줄 알고 실천할 줄 안다면 교회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사역을 해야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요즘은 이런 신앙이 옅어져 있는 게 사실입니다. 나는 나고, 교회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 교회 공동체가 능력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폭발력 있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반성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깊은 묵상을 통해 회복해야 할 신앙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눈도 보지 못하게 되고 식음을 전폐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위치에서 이제 그리스도인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됐습니다. 보이지 않고 먹을 수 없게 된 바울은 흑암에 싸여 외부로부터 차단된 채 계시와 씨름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아나니아를 보내 바울의 눈을 뜨게 하시려는 주님의 말씀 가운데, 주님은 바울의 이러한 상태를 일컬어 “그는 기도 중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기도신학을 배우게 됩니다. 기도는 흑암에 싸여 외부로부터 차단된 채 계시와 씨름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가벼워진 시대에 살아갑니다. 그렇다 보니, 위에서 말한, 몸 교회론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더군다나 기도에 대해서도 매우 가벼운 생각과 실천을 하고 맙니다.

 

몸 교회론을 깊이 묵상하지 못하고 가볍게 생각하니 존재가 가벼워집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그 깊이와 넓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도 쉽게 세상의 파도에 휩쓸려 버립니다. 무엇보다 우리 시대는 기도가 가벼워진 시대입니다. 그렇다 보니, 기도를 하면서도 계시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해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부르심을 발견하지 못하니,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이 얼마나 특별한 인생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낭비하기 쉽습니다. 기도하면서 계시의 깊이로 들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한 사람의 인생은 특별합니다. 소중합니다. 아름답습니다. 귀합니다. 행복합니다. 무엇보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인생이 바뀌고, 세상을 바꿉니다. 기도는 놀라운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4. 10. 02:38

복음 전도자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사도행전 8:26-40)

 

주님,

우리도 빌립처럼 복음 전도자가 되기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를 부르신 줄 믿사오니,

주여,

빌립에게 주셨던 성령의 은총을 우리에게도 내려주사,

우리도 빌립처럼 거침없이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에 큰 기쁨이 임하게 하옵소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불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사마리아 성에 기쁨이 넘친 이유]

 

사도행전 8장은 스데반의 죽음 이후 발생한 대(大)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난 그리스도인들의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선교는 전도자 빌립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빌립은 스데반과 같이 일곱 집사로 선택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빌립이 박해를 피해 처음 도착한 도시는 사마리아 성입니다. 그곳에서 빌립은 복음을 전했고, 빌립의 복음 전파 때문에 사마리아 성에는 기쁨이 가득 찼다고 성경은 전합니다.(행 8:8)

 

사마리아 성은 왜 기뻤을까요? 물론 복음을 받았기 때문에 기뻤겠지만, 그들에게 전달된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마리아인들은 원래 유대인들에게 천대받던 사람들입니다.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한 뒤, 사마리아 지역은 앗수르의 혼합주의 정책에 의해 이스라엘(유대인)의 순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사마리아 지역은 다른 민족과 섞여 다문화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유대인의 순수 혈통과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배척과 소외를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성의 수가라는 동네에 살던 여인 이야기는 널리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큰 기쁨을 얻게 되죠. 그와 동일한 역사가 빌립을 통해서 발생합니다. 배척당하고 소외당하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처럼, 빌립의 복음을 통해 유대인들에 의해여 개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진 역사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실로 복음이었습닌다. 하나님의 은총에서 제외되었다고 무시당하던 사마리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빌립의 사역을 통해 귀신이 물러가고, 병자가 낫고, 장애인이 고침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역사들은 표적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그들이 받아들여졌다는 표적입니다. 그로 인해 사마리아인들은 이제 자신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던 것이고, 그러한 상태가 사마리아인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삶(생명)의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지 발견합니다. 사마리아 성에 임한 기쁨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기뻐한 결정적인 이유는 단순히 귀신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장애인이 치료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기뻐한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이 다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정말 핵심적인 복음입니다. 귀신 들렸다는 것 때문에 배척 받고, 병 들었다는 것 때문에 소외당하고, 장애가 있다는 것 때문에 공동체에서 쫓겨나고, 사마리아인이라는 것 때문에 차별당하던 사람들이, 이제 그러한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다’는 복음이 이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차별하고 배척하면서 삽니다. 온갖 기준을 정해서 저 사람과 내가 같지 아니한 것을 증명하면서 삽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차별을 보십시오. 인종차별, 성차별, 경제적 차별, 노동자 차별, 장애인 차별, 성소수자 차별 등, 차별 아닌 게 없습니다. 우리가 채택하여 경제의 기본구조로 사용하는 자본주의는 온갖 차별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굴러갑니다. 자본주의 기본 정신은 ‘차별화’입니다. 더 뛰어난 것을 입증해야만 선택을 받고 성공합니다. 이것을 ‘경쟁’이라는 좋은 말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지만, 그래서 우리 사회는 우울증이 난무합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하여 차별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철폐하신 ‘차별’(막힌 담)을 허물고, 실제로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누구든지 환대하는 것입니다.(엡 2:14)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만큼 큰 기쁨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귀신 들린 자가, 병든 자가, 장애 있는 자가 기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귀신 들렸기 때문에, 그들이 병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장애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신 들렸어도, 병들었어도, 장애가 있어도, 그들이 사람들에게 사회에서 따뜻하게 받아들여진다면, 그래서 그들이 일반사람들처럼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그들의 삶이 그토록 슬프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만큼 큰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복음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내 삶에서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 나의 삶에, 그리고 너의 삶에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복된 삶이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우리의 삶을 받아들여주는 복된 삶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기쁨이 넘치면 좋겠습니다. 복음은 ‘받아들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기쁨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