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이야기2021. 4. 14. 08:37

[마음 아팠던 성금요일의 아침 풍경]

 

고난주간/부활절 임에도 모여서 마땅히 불러야할 찬양을 못 부르고 마땅히 받아야 할 말씀을 받지 못하는 이 때에, 나는 고난주간 내내 각 가정 심방을 돌고 있다. 사랑으로 환대해주는 교회 식구들의 집을 방문하여 함께 예배드리며, 고난주간에 불러야 할 찬송과 나누어야 할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 한다.

 

나는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개인적으로 준비한 선물과 교회에서 사순절 기간 동안 프로젝트로 진행한 Homeless Care Bag(우리는 이것을 Blessing Bag이라 부른다/사진)을 가지고가, 예배 드린 후 나누어드리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실리콘밸리 지역은 홈리스 문제가 참으로 심각하다. 세계를 선도하는 초일류 기업이 즐비한 곳이고, 세상에서 가장 막대한 부를 창출해내는 곳 중 하나이지만, 그 이면에는 홈리스와 같은 사회적 문제들이 아주 깊게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길거리를 지나가다 홈리스를 만나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생필품들을 조금씩 담은 "care bag"을 만들어 교회 식구들에게 나누어주고, 홈리스를 돕는 일에 모두가 동참하고 있다.

오늘 아침, 000 권사님 댁 심방을 하러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는데, 아파트 직원 몇이 나와서 한 여성 홈리스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철문 안의 아파트 단지로 어떻게 들어왔는지, 단지에서 나가지 않고 버티는 홈리스를 직원들은 내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여성 홈리스(아마도 정신이 반쯤 나가지 않으면 살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 같은)는 직원들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단지 바깥으로 쫓겨나가고 있었다.

 

이미 철문 밖으로 쫓겨나가 그 얼굴과 말에 억울함과 비참함이 섞여 나오고 있을 때, 나는 가지고 다니는 홈리스 캐어 백을 하나 꺼내들고 철문 사이로 그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캐어백을 받아든 그녀는 "이것을 정말로 자신한테 주는 거냐"고 물으며, 백 안에 들은 물건들을 살피며 연발 "Thank you"를 외쳤다. 캐어백을 품에 안고 자리를 떠나면서 소리내어 엉엉 우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성금요일 아침, 슬픈 풍경을 바라보며, 가슴이 너무 아팠다.

 

성금요일 아침, 이 슬픈 풍경을 돌아보며 촛불을 켜지 않을 수 없었고, 이렇게 기록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세상에 태어나 같은 하늘 아래 있는데, 왜 누군가에게 이 세상은 지옥이 될 수밖에 없는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후, 지옥으로 가셔서 그곳의 영혼들까지도 보듬어 안으신 주님께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얼른 오셔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그 날을 다시 한 번 소망하며 기다려본다.

나는 손이 짧아 그녀에게 캐어백 밖에는 전달해주지 못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녀를 구원해 주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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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20. 10. 23. 08:25

[가재 잡고 놀던 시절]

 

내 기억으로, 우면산 기슭에 물이 급격히 마르기 시작한 것은 1987년도,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이다. 그 이전까지 우면산 기슭엔 물이 풍성하게 흘렀다. 우면산 깊은 계곡엔 3월 말까지 눈이 쌓여 있었다. 겨우내 물을 품은 산은 졸졸졸 시냇물을 흘려 보냈다. 그 물은 저수지로 모여들었고, 저수지로 모여들지 전에 있었던 '장사바위'는 여름 내 동네 아이들의 가장 좋은 피서지였다. 큼지막한 돌로 물을 막아 놓고 만든 간이 수영장은 우리들의 행복한 놀이터였다.

 

저수지는 동네 아이들에게 여름에는 수영장,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이 되었다. 저수지는 수심이 꽤 깊었는데, 흔히 동네에 있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저수지와 관련하여 회자되었다. 누구누구 집 할머니가 여기에서 빠져 죽었는데, 그 할머니가 아직도 저수지에 살고 있어서 저수지에서 수영하다 잘못 걸리면 그 할머니가 다리를 잡아당긴다, 뭐 이런 류의 '전설'이었다. 그러한 전설은 동네 불량배 형들에 의해 '비신화화' 되기 일쑤였고, 그 형들은 그 전설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태도로 저수지에 설치된 수로 구조물에서 다이빙을 하며 저수지를 마음껏 활개쳤다. 그런 형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지 못했을 것이며, 다이빙은 더더구나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형들의 힘은 막강하여, 모든 동네 아이들을 '비신화화'로 이끌었으며, 저수지의에서의 수영과 다이빙은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저수지에는 일급수에만 산다는 고기들이 많았다. 모래무지, 송사리, 쉬리, 피라미, 참붕어, 소금쟁이 등, 저수지는 자연의 보고였다. 그리고 빼놓은 수 없는 목록 중에는 소라와 가재가 있다.

 

특별히, 가재 잡는 일은 즐거움이 가장 컸다. 가재를 잡으려면 정숙성과 정확성과 과감성이 있어야 했다. 조용히 물속에 손을 넣어야 했으며, 아주 천천히 돌을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가재가 발견되면, 정확하고 신속하고 과감하게 행동해야 했다. 무엇보다 가재의 몸통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집어야 했는데, 잘못했다간 가재의 집게에 손가락이 물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재는 저수지에만 있지 않았다. 가재는 우면산 계곡물을 따라 고루 퍼져 있었다. 그래서 가재를 잡기 위해 아랫계곡부터 저수지를 거쳐 윗계곡까지 훑고 지나가곤 했다. 그러면 족히 반나절은 후딱 지나갔다.

 

가재 잡는 일은 일종의 탐험이었다. 어느 돌 밑에 숨어 있는지 알 수 없기에, 개울물에 수없이 흐트러져 있는 돌들을 하나씩 하나씩 조심스럽게 들어 그 밑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고된 작업 자체는 고되게 다가오지 않았고,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돌 밑에 숨어 있는 가재를 발견하는 것 자체가 가재를 찾아 헤매는 탐험 자체를 즐겁게 만들어 주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돌을 들어 그 밑에 숨어 있는 가재를 발견하는 일, 그 자체가 얼마나 흥미진진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이 흥미진진한 탐험은 우면산 계곡에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게 된 후 멈췄다. 물이 흐르지 않으니 가재가 살지 않았고, 물과 가재가 없으니 더이상 계속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던 그 아름다운 탐험은 나의 인생에서 사라져버렸다. 그저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가재 잡는 일과 신앙은 묘하게 닮았다. 가재 잡는 일이 탐험이었듯이, 신앙도 탐험이다. 신앙은 사건에 숨어계신 하나님을 찾는 탐험과 같다. 한마디로, 신앙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탐험이다. 가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돌을 들었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간구하고 행동한다. 가재를 잡는 탐험이 고되고 지루한 일이긴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놀이이며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는 것은 가재를 발견하여 잡는 기쁨이 그 탐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탐험을 멈추지 않는 것은 그 탐험 속에 하나님이 계시며,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살아갈 힘과 기쁨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기 때문이다.   

 

우면산 계곡에 물이 말라 가재잡이 탐험이 멈추게 되었을 때 나는 삶이 축소되고 메말라 가는 것을 느꼈다. 실제적 탐험이 줄어드니 삶의 기쁨도 줄어들었다. 탐험을 멈추는 순간, 우리의 생명은 이렇게 축소되고 만다.

 

현대인의 삶이 왜 이렇게 축소되고 메말랐을까. 탐험을 멈추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강력하게 생각한다. 가재잡이 탐험이 멈추게 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탐험도 멈추게 되었다. 이게 참 신비한 현상인 거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향한 탐험을 하지 않고 사는지. 하나님을 향한 탐험이 없으니, 우리의 삶은 점점 더 축소되고 메말라 가고 있다.

 

생명의 풍성함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탐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가재잡이 탐험을 다시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탐험하는 삶이 되어,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탐험하게 될 텐데, 그렇지 못한 현실, 말라버린 우면산 계곡을 바라보며, 말라버린 우리의 영혼을 바라본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는 환상을 보았던 이사야의 마음으로, 우면산 계곡에 물이 넘쳐 흐르는 것을 꿈꿔본다. 그때 우리는 숨어계신 하나님을 발견하여 구원을 얻으리라.

 

탐험은 계속되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20. 7. 25. 06:59

[나는 다시 태어나면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

 

인생을 돌아보면 후회되는 일들이 있다. 나는 내 인생에 가장 후회는 일 중 하나가 피아노를 잘 배우지 못한 것이다. 엄마가 피아노 배우라 할 때 기타를 배울 때라 '싫다' 말했고, 이후 내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엄마에게 졸랐을 때는 고등학교 입학시험(학력고사)을 앞두고 있었던 때라 엄마가 '안돼'라고 하셨다. 이렇게 시간은 엇갈리고, 나는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우지 못했다.

 

나는 클래식 매니아다. 중학교 2학년(그때로 기억한다), 아버지와 함께 말죽거리(양재역)에 갔을 때, 아버지가 일 보시는 동안 나는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FM 라디오 93.1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연주를 듣게 되었다. 물론 이 이전에도 클래식 연주는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지만, 그 순간이 바로 내가 클래식의 세계에 입문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클래식의 세계로 쭉~ 빨려 들어가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클래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주 어릴 때 바이올린을 조금 배운 터라 클래식 음악에 좀 더 쉽게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클래식에 대한 나의 관심은 계속되었고, 대학 들어가서 과외 아르바이트 하여 번 돈으로 처음 산 물건이 그당시 유행하던 인켈 오디오 시스템이었다. 그것을 들여오던 날, 나는 하루 종일 그 앞에 앉아 음악을 들었다. 그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음반은 칼 뵘이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6 '전원'과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이다.

 

나는 "음악은 듣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라는 음악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현장에 가서 음악을 '보려고' 한다. 조지아에 살았을 때 가장 좋았던 것은 그곳에 예술의 전당 같이 좋은 콘서트 홀이 있었고,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와서 연주를 했으며, 매우 싼 값에 그것을 관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살던 조지아 컬럼버스에 있는 '컬럼버스 교향악단'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교향악단으로서 꽤나 수준이 높았다. 매달 정기 연주회를 했고, 세계적인 연주가들을 초청하여 협연도 활발히 하였다. 조슈아 벨도 그 중 하나였다. 여러가지 좋은 연주회를 많이 관람했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크리스 보띠(Christ Botti)의 트럼펫 연주였다. 퍼포먼스의 화려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한 셀틱 우먼(Celtic Women)의 공연도 세 차례나 보았다. 빈 소년 합창단의 연주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아무튼, 조지아에 머무는 13년 동안 수많은 연주회를 관람했다. 그것은 나의 깊은 감성적 자원이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으로 이사 와서 가장 아쉬운 것은 음악회에 자주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악단임에도 접근성이 별로 좋지 않다.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길도 멀고, 콘서트홀까지 가려면 지하철을 타던지 자동차를 몰고 가야 하는데, 지하철 타고 걸어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고 차를 몰고 가서 주차하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입장료가 너무 비싸서 언감생심일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종종 스탠포드대학교 빙 콘서트 홀에서 열리는 음악회를 가는데, 그나마 그것을 위안을 삼고 있다.

 

나는 돈 쓸 일이 별로 없지만, 책을 사는 데와 클래식 음반을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동안 모은 클래식 음반이 많은데, 나름 체계적으로 모으려고 노력을 했고, 왠만한 클래식 음반은 다 소장하고 있다. 다행히 미국에서는 클래식 음반 구입이 손쉬울 뿐더러 가격도 착하다. 그런 점에서 아마존은 참 좋은 구매 사이트이다. (물론 아마존 때문에 로컬 경제가 무너진 것은 싫어한다.)

 

나는 바로크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클라비어 때문이다. 클라비어의 '찢어지고 갈라지는 듯한 음색'이 듣기에 거슬리고 부담스럽다. 그래서 클라비어가 들어간 바로크 음악은 별로 듣지 않는다. 그리고 쇤베르크 이후의 현대음악 중 전위적인 음색을 쓰는 음악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조화와 균형' 속에서 아름답게 진행되는 음악을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베토벤 음악과 그 이후 등장하는 낭만주의 음악을 선호한다.

 

음반을 고를 때도 깔끔하게 녹음된 디지털 리마스터한 음반을 선호한다. 언젠가 라흐마니노프의 오리지널 연주 음반을 구매한 적이 있는데 녹음 품질이 너무 좋지 않아 한 번 듣고 처박아 둔 경험이 있다.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연주한 것이라 소장 가치는 있지만, 녹음의 질이 좋지 않아 그것을 들으려면 적지 않은 인내가 필요하다. 그렇게 듣는데 인내가 필요한 음반은 사지 않으려 한다. 아무리 원작자의 연주여도 말이다.

 

교향곡, 사중주, 소나타, 협주곡 등 모든 장르의 곡을 즐기고 좋아하나, 나이 들면서 관현악이 많이 들어가 귀를 현란하게 때리는 관현악 교향곡보다는 협주곡이나 소나타 형식의 음악에 손이 간다. 특별히 협주곡은 우리의 인생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아 좋다. 대표적인 악기와 여러 악기들이 합을 맞추어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는 것은 마치 한 인간이 동료인간과 세계와 어우러져 인생을 빚어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별히 나는 피아노 소나타 곡이나 협주곡에 마음을 빼앗긴다. 피아노의 음색이나 선율은 왠지 나의 영혼과 합일을 이루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나의 마음을 사랑과 배려로 어루만지는 성령의 '루아흐'같다. 독서를 하며 틀어 놓고 있어도 나를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도와 뭔가 좀 더 의미 있는 시간으로 이끄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요즘 하나의 목표가 더 생겼다. 피아노 곡을 작곡가 별로 체계적으로 모아 보는 것이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 쇼팽의 녹턴을 들을 때면 이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 피아니스트가 되어 쇼팽의 녹턴을 귀로 듣는 게 아니라 손가락을 만지고 싶다. 그러면 얼마나 행복할까, 상상만 해도, 마치 천국에 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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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20. 5. 6. 04:29

아침 공복에 물 한 잔 마시기

 

나는 아침마다 공복에 물 한 잔을 마신다. 하루를 시작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이다. 습관이 굳어져서 이것을 하지 않으면 하루를 시작한 것 같지 않다.

 

사실, 내가 이렇게 아침마다 물 한 잔을 거르지 않고 마시는 사람이 될 줄 몰랐다. 참 이상한 거다. 이것도 보고 배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는 군생활 시절, 육군본부에서 장군을 모셨다. 내가 군생활 하던 시절 육본은 대전 계룡대로 이사 간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육군본부에는 장군이 많은 터라, 모든 장군 운전병이 공관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나, 나는 주요 보직에 있는 장군을 모셨던 관계로 공관 생활을 했다.

 

인력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육본에는 공관병을 따로 두지 않았다. '똘똘한 놈'을 뽑아 장군 운전병 및 공관병, 그리고 부관 역할을 함께 병행하게 했다. (이렇게 진술하고 보니, 내가 똘똘한 놈이라 장군 운전병이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으나, 그런 의도는 아니다.)

 

혼자서 장군을 모시다 보니, 장군과 친해지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내가 모시던 장군은 인품이 훌륭한 분이라 나를 매우 인격적으로 대해 주셨다. (그분이 누구인지, 이름을 대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 볼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을 것이다.)

 

장군하고 친해지다 보니, 서울 외박 나갔을 때는 장군과 사우나도 함께 가고, 당구도 같이 치고 그랬다. 우연히도 장군과 나는 육군본부 '전출동기'. 육군본부로 전출 온 날짜가 같다. 00년도 4 16. 참 신기한 거다. 그래서 꼬박 육군본부에서 군생활을 같이 하다, 나는 전역을 하고, 내 전역 시기에 맞춰 장군은 진급하여 전방부대로 갔다. (나중에 전방부대로 놀러가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군대에서 모시던 장군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그때 장군이 아침마다 하던 습관 때문이다. 바로 장군은 아침마다 공복에 물 한 컵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물론 그 물은 내가 약수터에서 떠오는 것이었고, 아침마다 마실 수 있도록 식탁에 올려 놓았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상병 말 호봉쯤 되었을 때였던 것 같다. 하루는 그만 약수터에서 물 떠오는 것을 까먹은 적이 있다. 아침에 물을 컵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려 두려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물이 없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수돗물을 받아 약수물인 양 식탁에 올려 두었다.

 

새벽마다(새벽 5 30분에 기상하셨는데, 물론 내가 깨워드렸다. 군생활 내내 새벽 5 30분에 장군 깨워드리느라 엄청 고생했다.) 기상하여 아침 운동을 나가기 전 물 한 컵을 드셨는데, 그날 물을 마시고 한 마디 하셨다. "오늘은 물맛이 왜 이렇게 다르냐!" 딱 걸린 것이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그 말씀 한 마디만 하시고 더이상 추궁하지 않으셨다. 뜨끔했다. 그 이후로 전역할 때까지 한 번도 약수물 길어오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

 

나는 그때 20대 초반 젊은이로서, 아침마다 공복에 물 한 컵 드시는 장군의 습관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세월을 계산해 보니, 나는 지금 그때의 장군 나이에 다다랐다. 그리고 장군이 하던 것처럼, 나는 아침마다 기상하여 공복에 물 한 컵을 마신다. 그리고 수돗물이 아니라 약수물(spring water/샘물)을 마신다. 수돗물이나 정수물 마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 맛이 다르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내가 아침마다 이렇게 약수물을 공복에 한 컵 씩 마시게 된 것은 나의 젊은 시절 매일 같이 약수물을 마시던 장군의 모습이 뇌에 큰 기억으로 남아 자연스럽게 '모방'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내가 매일 아침 물 한 컵 마시는 장면이 어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겹기까지 한 것 같다.

 

나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아침마다 공복에 물 한 컵을 마실 것이다. 그리고 물을 마실 때마다 군생활의 추억이 떠오를 것이고, 성실하게 물을 길어 날랐던 그때를 생각하며, 성실하게 물을 마실 것이다. 물 한 잔 마시는 일에도 이렇게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 행복하고 감사하다.

 

*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도 아침마다 공복에 물 한 컵 마시시길 추천 드린다.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비결 중 하나인 듯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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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20. 1. 18. 05:16

바다낚시 멀미 경험

 

지난 연말, 교회 집사님들과 바다낚시를 갔다. 처음 가는 바다낚시라 긴장도 되었고, 주변에서 바다낚시 가서 겪을 수 있는 '멀미'에 대한 조언을 많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름 잘 대비한다고 했는데, 그만 출항 후 1시간 30분 되는 시간부터 멀미가 시작되었다.

 

금문교 밑을 지나 들어간 태평양의 파도는 거칠었다. 처음에는 파도에 몸을 실어 놀이기구 타는 것처럼 출렁였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멀미가 왔다. 마인드 콘트롤을 하려고 노력했다. '이건 놀이기구야. 그냥 즐기면 돼.'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마인드 컨트롤의 임계점을 넘어선 것 같았다. 그때부터 그냥 바닥에 눕고만 싶었다.

 

선실 안 의자에는 사람들이 자리를 이미 잡고 있어 자리 양보 부탁을 할 수 없었다. 한국 사람들도 아니었고, 대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었지만, 러시아 사람들과 국적을 알 수 없는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나는 선실 안에 눕는 것을 포기하고, 그나마 한적한 선수에 누웠다. 그런데, 파도가 거칠어지며 배 안으로 들이친 바닷물이 누운 나를 덮쳐 왔다. 손 하나만 까딱여도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아 덮쳐 오는 파도를 온 몸으로 받으며 견뎠다. 그렇게 1시간 30분을 더 갔다.

 

세 시간 항해 후, 배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전 9.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배가 서니 파도에 배는 더 출렁이기 시작했다. 죽을 것 같았다. 때마침 목적지에 도착하여 사람들이 바다낚시를 시작한 덕에, 선실 안의 의자가 비었다. 나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선실 안 의자에 몸을 눕혔다. 차가운 뱃바닥에 눕는 것보다 나았다. 그런데 문제는 추위였다. 이미 바닷물을 온 몸에 뒤집어 쓴 뒤라 바닷바람이 솔솔 불면서 몸을 춥게 만들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핸드폰 차저(charger)겸 손난로(hand warmer)를 부여 잡고 추위를 참았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그 작은 물건이 나의 유일한 생명 보존 장치였다. 나는 그 자그마한 물건이 뿜어내주는 온기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잠이 들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그 손난로가 마중물이 되어 잠이 들 수 있었다.

 

얼마를 잔 것일까. 잠에서 깨어 보니 아직도 사람들은 고기를 낚느라 분주했다. 그런데 몸은 따뜻해져 있었다. 몸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했다. 몸은 체온의 항상성을 유지하게 위해서 잠이 들었을 때 저절로 몸의 체온을 높였다. 깨어 있을 때 몸의 체온을 높이려고 노력해도 아무 소용 없더니, 잠이 들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데 몸은 스스로를 보호했다.

 

때로 우리는 자신의 의지를 통해 무엇을 성취하려 들기 보다, 자기 자신을 그냥 놓아버릴 때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생명은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가장 적절한 삶의 체온을 선물로 주는 것 같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배멀미를 하며 꼬박 8시간을 배 안에 누워 있었다. 8시간 동안 배멀미 하며 신음 가운데 있었던 나를 돌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너무 춥다고, 혹시 난로 있냐고 선장에게 물었을 때, 그런 거 없다고, 그냥 투박한 우비 하나 건네 받은 게 전부였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낚시를 하는 동안, 그리고 뭍으로 돌아오는 동안, 8시간 동안 아무 움직임 없이 누워만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나를 돌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사실 배 안의 모든 사람이 나를 돌봐준 것이었다. 배멀미에 고통 당하고 있는 나를 보며 그들은 아무 것도 해 줄 게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같다. 차라리 아무런 시선을 주지 않는 것, 아무 말을 붙이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고, 입을 열 힘조차 없었던 나에게 시선을 주고 말을 붙였다면, 나는 정말로 더 괴로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나는 선실 안의 한 의자(4, 5명이 앉을만한)를 차지하고 꼼짝 못하고 누워 있었지만, 그 누구도 누워 있는 나한테 일어나라고, 조금 비켜달라고 말을 하거나 불쾌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무언으로 나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이고, 돌봐준 적 없었으나, 정성을 다해 돌봐주었던 것이다.

 

8시간의 멀미는 배가 다시 금문교 밑을 지나 항구로 들어 왔을 때 점차 사라졌다. 그리고, 두 다리가 뭍을 밟자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로 멀쩡해졌다. 형편 없이 젖었던 옷은 모두 말라 있었고, 잠을 많이 자서 그런지, 몸은 오히려 상쾌했다.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도 참 신비스러운 것이다. 아무도 나를 돌봐준 이 없으나, 모든 이가 나를 돌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삶의 무한한 신비에 휩싸였다. 그리고, 문득, 먼 바다를 아득히 쳐다보며 삶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깊은 묵상에 잠기게 되었다. 삶은, 사람은 참 신비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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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이야기2019. 11. 5. 03:33

쏘나타(Sonata)

 

우리 차 이름이 뭔지 알아? 등굣길, 아들에게 물어본다. 몰라(고개만 가로저었다. 전형적인 중학생의 반응). 쏘나타(Sonata/영어 발음으로 스나라’). 현대 쏘나타. 아들의 무반응(거의 , 어쩌라고의 수준).

 

나는 쏘나타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버지는 이렇게 아침마다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게 기쁘다. 왠지 알어? 할아버지도 아버지를 이렇게 데려다 주셨거든(물론, 가끔 내가 힘들어할 때였다. 우리 때는 그냥 버스타고, 걸어서 학교 다녔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데려다 주실 때, 그때도 쏘나타였어. 그래서 아버지는 이렇게 쏘나타로 너를 데려다 줄 때마다, ‘아버지가 생각나서 행복하다. 아들에게 물었다. 아버지 말 이해하지?(Do you understand my story? Right?). 또 고개만 끄덕였다.

 

한국인의 국민차, 쏘나타는 1985년부터 생산된, 한국 자동차 브랜드로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소중한 추억인 담긴, 나의 최애(favorite) 자동차이다. 나의 아버지는 1990년부터 1994년까지, 5년간 쏘나타를 타셨다. 아버지가 목회하시면서 타신 처음이자 마지막 승용차였다. 아버지는 평생 교회 봉고차를 타고 다니셨다(그때는 거의 모든 목회자가 그랬다.).

 

내가 세화교회에 부임했을 때(2017430), 교회에서 감사하게도 차를 사주셨다. 교회 리더들이 물었다. 어떤 차를 사드릴까요? 나는 쏘나타를 사달라고 했다. 이유는 너무도 명확했다. “저는 쏘나타를 타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목회를 더 열심히 할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다. 쏘나타를 타면서 나는 매일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로 거짓없이 진실하게목회할 것을 다짐한다. 그게 바로 내가 아버지를 추억하고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나의 이런 마음을 기뻐하고 계실 것이다.

 

1990, 노태우 대통령 시절, 한국은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었다. 골목마다 전경들이 쫙 깔려서 조그마한 범죄조차 저지를 겨를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집에 있는 물건 중 나의 호기심을 가장 끈 것은, 단연 쏘나타였다.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쏘나타 안에 머물며 운전하는 것을 시뮬레이션 했다. 그러다 아버지 몰라 쏘나타를 끌고 나가 동네 골목길을 돌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맘 먹고, 아버지 몰라 쏘나타를 끌고 나와 친구들을 태우고 학교에 갔다. 양재동, 언남고등학교, 우리 학교가 바로 눈 앞에 들어왔다. 도로 하나만 지나면 학교에 도착할 찰나, 우리는 전경의 불심검문에 걸리고 말았다. 세 명의 전경이 다가왔다. 창문을 내렸다. 면허증을 보여 달라는 전경의 말에 침이 꼴딱 넘어갔다. 전경들은 우리가 고등학생인 것을 알아채고, 우리 모두를 차 밖으로 불러냈다. 전경들은 우리보다 서너 살 많은 형들이었다. 우리는 싹싹 빌기 시작했다. 말이 안 통했다. 그래도 두 명의 후임 전경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려 했으나, 선임 전경의 눈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10분을 빌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선임 전경이 서초경찰서에 무전을 쳤다. 순찰차가 모두 바빠 지금 바로 올 수 없다는 회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택시를 잡더니, 운전자인 나를 태워 양재 파출소로 이송해 갔다. 나는 꼼짝 없이 범죄자가 될 신세였다.

 

후일담이지만, 후임 전경 두 명과 남은 나의 친구들은 후임 전경들의 선임 전경에 대한 뒷담화를 말해주었다. 선임 전경이 특박에 눈이 멀어서 저렇게 독이 올라 택시까지 잡아 타고 나를 이송해 간 것이라 했다.

 

양재 파출소에 도착하자 마자, 파출소장님을 비롯하여 그곳에 근무하는 경찰 아저씨들에게 엄청 욕을 먹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무면허 운전을 해?” 나는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그때, 파출 소장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받아봣!” ㅇㅇ 경찰서에 정보과장으로 계시던 삼촌의 목소리였다. “준식아, 괜찮냐? 삼촌이 잘 말씀드렸으니까, 파출소장님한테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고!” . 이런 구세주가 있나. 나는 그때 나를 이곳으로 이송해 온 선임 전경의 눈을 쳐다보았다. 거의 똥 씹은 표정이었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을 계속하며 파출소를 떠나려 했다. 그때, 아버지가 친구의 아버지(우리 교회 장로님)와 파출소로 들어오셨다. 아버지 눈에서 레이저가 발사되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파출소장님께 죄송하다며, 나 대신 사과하셨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원래 모범생이었다. 사춘기를 보내며 부모님 속을 썩인 일이 없다. 그런데, 이 사건은 내 학창시절 내가 친 최고의 사고였다. 30년 전의 일이지만, 어찌 생각하면 아찔한 사고이기도 하고, 이렇게 꺼내 놓을 수 있는 것은 쏘나타에 얽힌 학창시절의 영웅담 같은추억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이러한 일이 중대한 범죄로 분류되지만, 우리 때는 낭만이었다. (그 시절을 산 사람들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물론, 내가 잘 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정말 철없는 시절의 무모한 행동임에 틀림없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운전면허증부터 취득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마음 놓고 쏘나타를 몰고 다녔다. 재수학원(노량진 한샘학원)의 특강이 있는 날(주로 주일 아침에 했다.)도 쏘나타를 몰고 다녀왔다. 대학을 들어가서도 가끔 쏘나타를 몰고 학교에 갔다. 주차를 잘못한 바람에 견인된 적도 있다. 그때도 아버지는 나를 구하러 달려오셨다.

 

쏘나타와 얽힌 또 하나의 추억은 대학 들어가서 죽마고우와 설악산에서부터 경주까지 동해안 여행을 한 것이다. 지금도 그때의 아름다운 여행이 기억에 생생하다. 설악산에서 만난 교포와 경주에서 또 만난 덕에 그 친구가 묶는 경주의 힐튼 호텔 방에서 함께 라면 끓여 먹던 일도 기억나고, 결국 돈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경주까지 가서 불국사를 구경하지 못했던 아쉬운 추억도 있다. 불국사 매표소 앞에서 경비 아저씨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는데, 결국 입장 허락을 받지 못해, 우리는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를 추억하며,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가장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가 경주 불국사이다.

 

쏘나타는 나에게 그냥 차가 아니라, 추억이다. 그냥 추억이 아니라 아름다운 추억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쏘나타를 타며, 교회에 감사하고, 아버지를 생각하며 목회를 열심히 할 것을 매일 다짐하며,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을 잇는 추억을 이어가도록 쏘나타를 34년 동안 출시해준 현대자동차에 감사한 마음이다. 쏘나타 안에서 베토벤 피아노 쏘나타를 들으면, 쏘나타에 얽힌 추억이 샘솟는 듯하여, 이 세상의 모든 쏘나타를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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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이야기2019. 10. 18. 06:20

책 욕심

 

나는 물욕심(物慾心)이 별로 없다. 목회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부분이다. 물욕심이 많은데, 그것을 참으면서 목회하는 게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런데 나는 물욕심이 없어서 그것을 참느라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나는 무용한 것들을 좋아한다. , , 바람, 웃음, 농담, 이런 것말이다. 그렇다 보니, 좋은 집을 봐도 별 감흥이 없고, 좋은 차를 보아도 타고 싶은 욕심이 없다. 다행히 아내도 나와 비슷한 성품을 지녀(물론 아내는 나처럼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꽃 사다주면 핀잔만 듣는다.), 우리 가정은 물욕 때문에 고통 당하지 않는다.

 

나는 돈을 거의 쓰지 않는다. 별로 사고 싶은 것도 없고, 쓸 데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넉넉치 않은 생활비로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 다만 아이들이 커 가니, 아이들의 교육비 정도는 부족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유일하게 돈을 쓰는 때는 책을 살 때다. 학창시절, 엄마가 주는 용돈을 아껴, 매주 시집을 한 권 샀다. 내가 대학교를 다닐 당시 시집은 한 권에 5천원 정도 했다. 엄마가 하루에 용돈을 5천원 주셨는데, 하루에 4천원 정도 쓰고, 천원을 남겨 5일 모아 매주 시집 한 권을 샀다. 그렇게 소중하게 구입한 시집이라서 그런지, 지하철을 타고 등교와 하교를 하며 읽는 시는 왠지 모르게 꿀맛이었다.

 

나는 지금도 사고 싶은 책이 너무 많다. 그동안 수천권의 책을 샀고, 수천권의 책을 읽었지만, 아직까지 사서 읽고 싶은 책이 수천권이다. 나는 책을 살 때 알라딘US를 이용하는데, 그 사이트의 보관함에는 사고 싶은 책 수천권의 리스트가 보관되어 있다.

 

나는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책을 산다. 사서 읽고 싶었던 책을 주문하여 그 책이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마치 애인을 기다리는 시간처럼 기쁘다. 그리고 마침내 책이 도착하면, 포장을 뜯을 때의 기쁨이란 연애편지를 뜯을 때의 기쁨과 같다. 당장 그 책들을 다 읽지 못해도, 두 손으로 받아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하다.

 

그리고 내가 돈이 생기면 책을 사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문화'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서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책을 사는 것만큼 훌륭한 공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옛날에는 '도서상품권'이라는 것이 있어서, 누군가 그것을 선물해 주면 너무 좋았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도서상품권이 없어 약간 서운하다. 나는 '스폰서'를 가지고 싶은데, 마음껏 책 사보라고 스폰해주는 사람(또는 기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요즘은 스마트 폰이 발달하여 동영상이나 전자책으로 정보를 습득하고 독서를 하는 이들이 많아졌지만, 나는 아직도 마른 책장을 넘겨가며, 연필을 들고 글쓴이의 생각을 따라가며, 때로는 사색에 잠기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생각을 적어가며, 천천히 글쓴이와 대화하듯 독서하는 것을 좋아한다.

 

독서 경력이 쌓이고, 독서를 많이 하다 보니, 독서의 노하우도 꽤나 생겼다. 좋은 책은 마지막 장까지 독자를 이끄는 힘이 있고, 별로인 책은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 같은 짚신이지만 매끄러운 짚신과 껄끄러운 짚신의 차이와 같다.

 

나는 독서를 할 때, 한 권의 책만 읽지 않는다. 대개 한 번에 5-6권을 동시에 읽는다. 독서 경력이 쌓이고, 독서의 노하우가 쌓이면 이렇게 된다. 나처럼 독서 경력이 많은 분들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리고 그 대여섯권의 책은 대개 장르가 모두 다르다. 시집, 소설, 철학서적, 전공서적, 대중서적, 이런 식이다.

 

나는 독서를 하고 나면, 반드시 그 독서를 바탕으로 글을 쓴다. 이게 독서의 백미다. 독서를 하면 영감이 솟는데, 솟아나는 영감은 나의 영혼 속에 찰나의 시간만 머물기 때문에, 부지런히 받아 적어야 한다. 게으른 자는 창조자가 될 수 없다. 그렇게 영감을 통해 받아 적은 글들은 정신 차리고 보면 도저히 ''가 썼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고 아름답다. 그것을 바라볼 때의 환희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블로그를 두 개 운영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손으로 읽은 낙서판>이다. 거기에 올라간 글이 합해서 1,350개 정도 된다. 아직 안 올린 글을 합치면, 2천개 된다.)

 

독서를 할 때 '문학책(, 소설)'을 많이 읽는 게 중요하다. 나는 어떠한 책을 읽을 때 문학을 인용하지 않은 작가의 책은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문학을 인용하지 않으며 써내려 간 작가의 사유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학을 인용하지 않는 작가의 사유는 유연하지 않고 독선적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하다. 수많은 욕심 중에 '책 욕심'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며칠 전,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무슨 행복으로 살아?" 나의 삶에는 여러가지 행복이 있지만, 무엇보다, '책 욕심'의 행복을 말하고 싶다. 그래서 그 행복을 여기에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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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이야기2019. 9. 2. 01:17

중학교 추억 소환

ㅡ 아들의 중학교 생활을 응원하며

 

아이들이 개학을 했다. 큰 아이는 7학년, 작은 아이는 5학년이 되었다. 우리가 사는 프리몬트(Fremont, CA) 지역은 7학년부터 중학교(Junior High)이다. 그래서 한국의 학교 제도와 얼추 같다. (하지만 2021, 작은 아이가 중학생이 될 때부터 제도가 바뀌어 6학년부터 중학생이 된다. 이미 다른 지역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우리가 사는 지역만 제도가 늦게 바뀌는 거다.)

 

나는 중학생 시절, 서초동에 있는 '영동중학교'를 다녔다. (지금은 학교가 이사하여 우면동에 있다. 그것도 우리 형 교회(벌떼교회)와 담벼락 하나 두고 붙어 있다. 학교가 교회 바로 옆에 있어 여러 편리한 점이 많은 것 같다.) 내가 다닐 때만 해도 영동중학교는 인근 중학교 중 가장 규모가 큰 학교였다. 한 학년에 1천명이 넘었다. 한 학년에 60여명씩 17, 18반이 있었다.

 

인근 지역에서 아이들이 엄청 많이 몰린 탓에 영동중학교에는 전국 1등부터 전국 꼴찌까지 다 있었다. 매우 좋은 학교였지만, 그 당시 우리는 영동중학교를 '똥통 중학교'라고 불렀다. 학교가 나빠서 그런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불렀다. 중학생 때는 ''자를 붙이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각 중학교 학생들은 자기 학교 외에는 모두 똥통학교라고 부르며 내심 경쟁을 했다. 그랬던 시절을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아들을 생각하면, 그때가 얼마나 어린 시절이었는지 상상되기 때문이다.

 

큰 아이가 오늘부터 다니는 학교의 이름은 'Thornton Junior High School'이다. 영어 발음은 '똔톤 중학교'이다. 그런데, 이 발음이 영 까다운게 아니다. 발음 연습을 잘 하지 않으면 영락없이 'Thornton' '똥통'으로 발음하게 된다. 나는 큰 아이의 학교 이름을 발음하다가 이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혼자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물론 집사람한테 이야기했다가 썰렁하다고 핀잔만 들었지만 말이다.

 

한국에서 중학교 시절을 보낸 아버지와 미국에서 중학교 시절을 보내고 있는 아들의 공통점은 별로 없다. 그런데, 부모 마음이 그런 것 같다. 어떻게서라도 공동점을 찾아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하는 것이 내리사랑인 것 같다. 마치, 김동인의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의 주인공 M이 보이는 태도와 같다. 어떻게라도 공통점을 찾아보려는 그 절박함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중학교 환경은 한국과 미국 사이에 태평양이 있는 것처럼 멀지만, 그래도 아들 학교의 이름 덕분에 그 거리가 개울 하나 사이로 가까워진 기분이다. 나도 영동중학교, '똥통' 중학교를 다녔는데, 아들도 'Thornton', '똥통' 중학교를 다니게 된 것이다. 이 사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아들 학교에 정이 간다.

 

아들의 중학교 생활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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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이야기2019. 5. 16. 08:21

엄마, 사랑해

 

같은 풍경도 나이에 따라 달라 보인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학창 시절 읽었던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는 큰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불혹의 나이를 지나고 세상만사를 조금 알게 된 지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여섯 살 난 작은 여자 아이(옥희)의 눈으로 그려진 엄마와 사랑방 아저씨의 사랑은 애틋하기 그지없다.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리고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채 엄마와 아저씨 사이에서 우편 배달부노릇을 한 옥희의 눈에 엄마와 아저씨는 아무 일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는 어른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안다. 1935년에 쓰여진 소설 답게 엄마와 아저씨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여름 밤의 꿈으로 끝나고 만다. 엄마는 24살 먹은 젊은 과부였고, 아저씨는 아빠의 친구였다. 그들의 사랑은 시대의 통념을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소설에 나오는 재밌는 한 장면은 아저씨가 엄마를 따라 교회에 가는 것이다. 아저씨는 예수교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지만,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교회를 간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기에, 웃음 지어진다.

 

엄마는 기계가 아니다. 엄마도 사람이다. 엄마에게도 감정이 있다. 그런데, 엄마는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감정을 감추며 사는 존재처럼 여겨져 왔다. 특히 동양 문화권의 엄마는 그 경향이 더 두드러진다. 엄마가 내색을 안 할 뿐이지, 엄마도 좋아하는 게 있고, 싫어 하는 게 있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고, 가고 싶은 데가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러나, 그냥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에모리 유학 시절, 아직 결혼하지 않았을 때, 나는 엄마랑 기숙사에서 6개월간 함께 지낸 적이 있다. 그때 엄마는 60대 후반의 나이였고, 아버지를 떠나보낸 지 6년째 되는 해였다(2004). 기숙사에서 엄마는 나를 뒷바라지 해주시면서 살림을 하셨다. 찬장에 그릇을 채우고, 양념통을 채우고, 여러 부엌 살림을 채우시는 데, 엄마가 정말 즐거워하셨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6년 동안 혼자 지내시다가, 아들과 둘이서 지내며 부엌 살림을 하시면서 아버지와 신혼살림 차리시던 그때가 생각나셨던 모양이다. 삼시 세끼를 정성스럽게 차려주셨고, 내가 공부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안 주무시고 계시다, 내가 도서관에서 늦게 기숙사로 돌아올 때, 나를 맞아 주시던 그 표정은 마치 남편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때 내색은 안 했지만, 엄마의 그러한 표정에 마음이 짠했다. ‘이렇게 새색시처럼 살림하고 밥상 차리고, 늦게 귀가하는 아들을 반갑게 맞아 주시는데, 아버지를 하늘 나라로 떠나 보내시고 얼마나 마음이 허전하고 힘드셨을까.’ 엄마는 겉으로 크게 내색은 안 하셨지만, 아버지 없이 혼자 사시는 게 힘드셨던 것이다. 그러다 이렇게 신혼살림 차리듯 기숙사에서 아들과 지내니, 옛날 생각이 나서 신이 나셨던 것이다. 엄마도 여자였던 것이다.

 

어머니 날이다. 세월이 흘러 엄마는 어느덧 여든 중반에 들어섰다. 카톡 통화 한 번 하려면 에너지가 많이 든다(버튼을 잘못 눌러 얼굴이 안 보이거나 음성이 안 들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제 엄마랑 화상 통화 한 번 하려면, 본격적인 통화에 들어가기 전부터 에너지가 반은 없어진다.) 여든 중반의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여전히 화장품과 옷과 가방에 관심이 많으시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받고 싶어 하신다.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아들한테 가까이에 있는 큰 아들 흉을 볼 때면 사랑 받고 싶은 그 마음이 절절히 느껴진다. 그런 엄마는, 나이를 많이 드셨어도, 여전히 여자다.

 

이제 한국을 떠나온 지 오래돼서 한국의 어버이날을 자꾸 놓치게 된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미국의 어머니 날은 아직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밤, 엄마에게 카톡 전화를 걸어, 엄마 얼굴 보며, 엄마의 볼에 뽀뽀해 드리며, ‘엄마, 사랑해라고 말씀드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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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와 고무신

- 신발에 대한 추억

 

생일을 맞아 신발을 선물 받았다. 마음에 드는 신발을 선물로 받고 나니, 지난 시절 신발에 대한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듯싶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필수품 중 하나인 신발이지만, 그래서 그런지 그동안 신었던 신발이 많았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 신발은 몇 안 된다.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신발 중 하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신었던 타이거상표의 신발이다. 검정색 신발인데, 신발 옆에 노란색 줄무늬가 세 개 그어져 있는 신발이다. 내가 그 신발을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사진 때문일 것이다. 우면동 1호집에 살 때, 그 신발을 사서 좋아라 하며 화단에 걸터앉아 찍은 사진이 아직도 나의 사진첩에 남아 있다. 게다가 4학년 정도면 기억이 생생할 때라 그때 그 신발을 사고 좋아하던 감정이며, 그 신발을 신고 사진을 찍던 장면이 모두 기억에 남아 있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신발은 중학교 2학년 때 샀던 프로스펙스 농구화이다. 가격도 기억이 난다. 2만 4천 5백원. 그 당시에 이 정도 가격이면 비싼 축에 들었다. 농구를 좋아하던 중학교 시절이라 부모님에게 몇 주일을 졸라 산 신발이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농구화였는데, 흰색 가죽에 빨간색 프로스펙스 상표가 달린 신발이었다. 그 신발을 사고 얼마나 좋았는지,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나는 그때 그 신발을 사놓고 한동안 장롱 위에 올려 놓고 신지 못했다. 목사 아들로서 가격이 꽤 나가는 신발을 신고 바깥을 나가는 게 두려워서였다. 그 당시만 해도 메이커 제품을 신고 다니면 남들에게 부러움을 사던 시절이라, 선뜻 남들의 시선을 받는 신발을 신고 다니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새로 구입한, 내 생애의 처음 메이커 신발, 그것도 그 당시 엄청 인가 많았던 프로스펙스 농구화를 신지 못하고 장롱 위에 올려 두고 마음을 졸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순진했던 시절이다.

 

그 이후, 어떤 마음으로 그 농구화를 신고 바깥을 나섰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그 농구화를 신고 기분 좋은 중학교 2학년 시절을 보냈고, 좋아하는 농구를 실컷 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 당시 나는 영동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농구를 잘하는 친구들과 팀을 결성하여 이웃 학교인 서운중학교 농구 대표팀과 친선 경기를 자주 가지곤 했다. 그때, 외곽에서 3점 슛을 펑펑 쏘아 대던 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세 번째로 생각나는 신발은 2006년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신었던 Clark 신발이다. 그냥 편안한 세미 가죽의 신발인데, 영국와 프랑스,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땅을 밟았던 신발이라, 게다가 알프스의 융프라우요흐를 밟았던 신발이라서 그런지, 그 신발이 닳아서 버리게 되었을 때, 무척이나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신발은 고무신이다. 고무신을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이유는 이 신발이 가장 기억에 남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무신을 자주 신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고무신에 마음이 갔다. 그래서 특별한 일 없는 한 고무신을 주로 신고 다녔고, 그게 학창시절 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기도 했다.

 

특별히, 하얀색 고무신에 매직으로 나이키 상표를 그려 넣어, 나이키 고무신을 만들어 신었다. 그 당시 나이키 신발은 프로스펙스 신발과 더불어 신발계를 주름잡고 있었는데, 나이키 상표는 그리기도 쉬워 고무신에 나이키 상표를 그려 넣은 뒤, 친구들에게 나이키 고무신이라고 우기며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갔다가 선생님에게 혼난 적도 있다. 고무신을 빼앗겨 실내화를 신고 집에 온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 웃음이 지어지는 재밌는 추억이다. 게다가 교회 등산 행사 때, 고무신을 신고 북한산 백운대 꼭대기를 올라간 적도 있다. 그때의 추억은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금 그 사진을 보면 참 앳된 중학교 2학년 아이에 불과한데, 어떻게 그렇게 고무신을 씩씩하게 신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겨울에는 털 달린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나름 따뜻했다. 물론 눈이 많이 온 날은 신지 못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주로 털 달린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내가 이렇게 고무신을 자신 있게 신고 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교회의 학생부 시절 전도사님 덕분이었다. 지금은 한국의 어느 시골에서 목회하고 있는 이세우 목사님은 그 당시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나에게 큰 격려를 해 주었다.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다른 이들 같으면 고무신 신고 다닌다고 핀잔을 주었을 텐데, 그분은 핀잔은 커녕 좋은 일, 멋진 일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생일 선물로 신발을 받으니, 신발과 얽힌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 신발도 기억에 남을 것이다. 생일을 맞아 신발을 선물로 받아 보기는 처음인 것 같다. 게다가 카드에는 이런 문구도 써 있다.

 

신발 신고 다니시는 곳마다 만남의 축복이,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권능이 목사님과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새 신발에 정말로 이러한 은총이 내리기를 소망한다.


* 새로 산 신발의 메이커는 나이키도 프로스펙스도, 고무신도 아닌, New Balance 운동화다. 요즘 트랜드가 그렇다. 나는 멋을 아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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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이야기2016. 4. 18. 05:17

집게벌레와 한 여름 밤의 꿈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의 소설 <날개>의 첫 문장이다. 나는 오늘 집 근처에 있는 캘러웨이 가든(Callaway Garden) 나비관에 가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는 못 봤지만, 대신 박제가 되어버린 집게벌레를 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어느 덧 곤충과 멀어진 도시생활을 하고 있는 나이지만, 박제된 집게벌레를 보니 어린 시절 집게벌레를 잡기 위해 친구들과 한 여름 밤 숲 속을 헤매던 시절로 돌아가는 듯 했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우리들에게 곤충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장난감'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모형으로 된 곤충을 가지고 놀지만,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진짜 곤충을 가지고 놀았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곤충은 장수하늘소, 딱정벌레, 쇠똥구리, 잠자리, 매미, 그리고 집게벌레였다. 이 중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곤충은 집게벌레였다. 집게벌레도 여러 종류가 많았는데, 일반 집게벌레와 돼지 집게벌레, 그리고 사슴집게벌레가 대표적이었다. 이 중에서 사슴집게벌레가 가장 멋있고 화려했다. 사슴집게벌레를 잡은 친구는 사슴 뿔 같이 화려한 왕관을 쓴 양 우쭐해 했다.

 

집게벌레를 잡으려면 밤까지 기다려야 했다. 벌레들은 대개 야행성이라 낮에는 잠 자고 밤에 활동한다. 밤에 집게벌레를 잡으러 산에 가는 일은 무서워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낮 동안 친구들과 돌면서 오늘 밤에는 함께 모여서 집게벌레 잡으러 가자는 약속을 한 뒤, 저녁 먹고 해가 지면 놀이터에 모여서 집게벌레를 잡으러 함께 다녔다.

 

집게벌레를 잡으러 깊은 산 속까지는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어릴 때 보통 산에서 놀았기 때문에 어느 곳에 집게벌레가 살만한 나무가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단단하고 곧게, 그리고 아무런 상처도 없이 쭉 뻗은 나무에는 집게벌레가 없었다. 좀 허약해 보이고, 특별히 상처가 나 구멍이 뚫려 있거나, 마치 엄마의 자궁인 양 깊이 패인 둥근 아기집을 품은 나무들에게 집게벌레가 붙어 살았다.

 

집게벌레가 살고 있을 만한 나무를 찾으면 우리는 준비해간 후래쉬를 밝게 비추었다. 그러면 영락 없이 집게벌레가 집 밖으로 나와 나무에 붙어 있었다. 행동이 느린 집게벌레는 갑작스런 발각에 어쩌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미소를 머금고 집게벌레를 두 손가락으로 살짝 잡아 준비해간 빈 깡통에 집어 넣었다.

 

집게벌레를 한 번에 많이 잡지는 않았다. 각자 한 두 마리 정도 잡으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다음 날 학교 다녀와서 지난 밤 잡은 집게벌레를 가지고 놀이터에 모였다. 그리고 우리는 집게벌레끼리 싸움을 붙여 내기를 하곤 했다. 내기라고 해봤자 동네 수퍼에서 브라보콘이나 바밤바를 사먹는 게 전부였다. 우리는 그렇게 놀았다.

 

요즘엔 곤충도 별로 없을뿐더러, 여름이 되면 곤충을 잡기 위해 친구들과 산으로 삼삼오오 짝지어 다니는 아이들도 없다. 자신들은 그렇게 놀았으면서도 막상 곤충 잡으러 산에 가겠다는 아이들에게 허락해 주는 부모도 없다. 세상이 그만큼 흉흉해졌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점점 자연과 멀어져 가는 것 같다. 아이들이 곤충을 접하는 것은 자연박물관이나 파브르의 <곤충기>같은 책, 또는 부모의 어릴 적 모험담에서가 전부인 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꿈꾸고 살고 어떠한 세상을 만들어 가기에, 집게벌레 잡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누군가의 한 여름 밤의 꿈 같은 일이 되어버렸을까. 박제가 되어버린 건, ‘천재, ‘집게벌레도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박제가 되어버린 건, ‘한 여름 밤의 꿈인 것 같다. 박제된 것은 살아 있는 게 아닐 터, 나는 오늘 잃어버린 꿈들이 살아 숨쉬는 그런 세상을 다시 한 번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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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이야기2016. 3. 19. 02:50

젖니 가는 고통

 

여서 일곱살 먹은 어린 아이에게 가해지는 가장 큰 고통은 젖니를 갈아내는 이빨 빠지는 고통이어야 한다. 어린 영혼은 그보다 더 큰 고통을 겪어서는 안된다.

 

나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여서 일곱살 즈음 울퉁불퉁한 기억이 없다. 젖니 가느라 아팠던 기억, 감나무에 올라가 놀다 내려오는 중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팔이 부러져 한강정형외과에 가서 치료 받으며 아팠던 기억이 전부다. 이것은 나의 부모님께, 또는 하늘에 계신 그분께 감사한 일이다.

 

요즘 심심치 않게 언론에 오르내리는 사회적 문제가 아동학대이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아동학대, 심지어 부모에게 학대를 받아 고사리같은 생명을 잃는 여서 일곱살 밖에 안 된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찢어진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사회적 정의의 핵심은 힘 없는 약자를 돌보는 것이다. 그 약자에는 과부와 어린이가 포함된다. 현대사회에서 과부는 더이상 약자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지만, 어린이는 여전히 약자일 수 밖에 없다.

 

폭력은 강자와 약자의 힘의 불균형에서 오는 악이다. 더 힘센 사람은 자신보다 힘이 약한 존재에게 자신이 당한 폭력을 대물림하듯 가하는 경향이 있다. 일종의 폭력의 도미노 현상인데, 그 마지막은 항상 어린 아이일 수 밖에 없다.

 

자아가 형성될 시기에 가해지는 폭력은 평생 트라우마로 남아 인격장애를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은 이미 심리학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인간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 속에서만 '성장'할 뿐, 그것을 넘어서면 고통 속에서 익사해 죽고 만다.

 

여서 일곱살 먹은 어린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은 젖니를 갈아낼 때 겪는 고통을 넘어서면 안된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주셨다. 어린 아이의 눈에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자, 새싹처럼 연한 생명을 짓밟는 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으리라.

 

여서 일곱살 먹은 어린 아이에게 가해지는 가장 큰 고통은 젖니를 갈아내는 이빨 빠지는 고통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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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이야기2016. 1. 26. 13:35

잠 못 이루는 밤


예전엔 내일이 오는 게 좋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일이 오는 게 싫어졌다. 내일이 오는 게 너무 싫어서 일부러 밤에 잠을 안 잘 때가 많아졌다. 아마도 전도서의 이 말씀이 마음에 들어와 박히기 시작했을 때부터 인 것 같다.


"모든 것이 헛되니,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 1:2-3). /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전도서 2:16-17).


오늘 뭔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희망찬 내일' 또는 '성공'이 오는 게 아니라, 그저 나의 인생은죽음'으로 치닫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내 심장을 짓누른다. 어차피 이제 곧 늙고 병들어 죽게 될 텐데 무엇이 나에게 유익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전도서의 이 말씀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여 그저 하루하루 즐겁고 기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잠언 2:24). /  내 아들이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잠언 12:12).


나는내일이 아직 오지 않은 '오늘'이 제일 좋다. 이제 한 번 가버리고 나면 내 인생에 또다시 오지 않을 오늘만큼 소중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그래서 나는 내 소중한 오늘을 함부로 빼앗는 사람이 제일 싫다. 내 소중한 시간을 빼앗을 권리가 있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뿐이다. 그들은 나에게 기쁨을 주므로. 나에게 기쁨을 주지 않는 것에 내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는 것만큼 허무하고 아까운 것도 없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이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것에만 나의 시간을 내어줄 수 있으랴. 그것은 허무를 넘어선 악인들의 세상이 아니겠는가. 너무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하는 것은 쾌락에 빠질 위험성이 있으므로 그것이 선한 일인지 아닌지 또한 살피는 것도 중요한 듯싶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알았고…”(전도서 3:12). , 그래서 나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위해서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모든 것은 나의 기쁨이 되므로.


이제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려 한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을 뿐이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나의 시간을 내어주며 기쁨을 얻고 싶을 뿐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래서 그는 자신의 묘지에 이런 문구를 새겨 넣었을까? "나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자유다."


잠이 안 온다. 비가 와서. 기차가 지나가서. 그리고 하루가 지나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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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이야기2015. 12. 19. 05:10

부성애

 

많은 이들이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부성애 이야기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살면서 모성애에 대한 감동과 그리움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내가 부성애 이야기 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일단 아버지의 부재때문이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여전히 살아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없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것은 내게 있어 당연한 일이다. 아마도, 어머니가 세상을 뜨시고 나면 그때부터는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도 팝콘처럼 내 마음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그런 날을 생각하니, 그저 가슴만 시리다.

 

아이의 학년이 높아지니 아이의 숙제를 도울 일이 점점 많아진다. 며칠 전 큰 아이는 학교 프로젝트라며 큰 도화지에 ‘Three branches of government’(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나무 모양으로 그렸다. 그리고 각 부에 대한 설명을 그 아래에 달았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흐뭇해서, 나는 그것을 보며 아들을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들은 자신의 프로젝트를 학교에 제출했다.

 

그런데 며칠 뒤, 아들이 받아온 프로젝트에 대한 점수는 충격적이었다. 38. 83점이 아닌 38.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 점수를 보며, 선생님의 노트를 읽어보았다. 이 프로젝트는 몇 주 전에 공지한 프로젝트이며, 또한 어떤 요소가 들어가야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안내문도 발송했으며, 심지어 아들은 하루 늦게 프로젝트를 제출했다는 노트였다. 그리고 어떤 요소가 빠져서 이런 점수를 받았는지, 거기에 하루 늦게 낸 것 때문에 점수가 더 깎인 것에 대한 안내를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선 아들이 프로젝트에 대한 안내문을 엄마 또는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다는 게 화가 났고, 선생님이 이 아이의 부모인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 지를 떠올리니 부끄러웠다. 선생님은 분명 아이가 부모님에게 프로젝트에 대한 안내문을 보여주었을 거라고 생각할 텐데, 프로젝트를 엉망으로 해 갔으니,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당장 선생님에게 노트를 썼다. 우리 아이가 프로젝트에 대한 안내문을 보여주지 않아서 이런 상황에 처해진 거라고. 그리고 프로젝트를 다시 해가면 추가 점수를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리고 다음 날 노트를 아이의 선생님에게 보냈다.

 

아이의 선생님은 친절한 답장을 보내왔다. 다시 해 와도 되고, 다시 해 오면 점수를 주겠노라고. 그래서 나는 아이와 함께 문방구에 가서 큰 보드를 사와 프로젝트를 다시 했다. 컴퓨터에서 자료를 찾아 컬러 프린터를 해서, 요구하는 요소에 따라 ‘Three branches of government’를 완성했다. 그리고 제출했다. 며칠 후, 아이는 다시 해 간 프로젝트로 100점을 받았노라며 좋아했다. 물론 그 점수가 고스란히 성적에 반영된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은 이미 해온 친구들과 똑 같은 점수는 줄 수 없다며, 원래 낙제한 프로젝트를 구제하는 수준에서 점수를 주겠다고 했다. 물론, 다시 해간 프로젝트 자체는 100점이라고 했다.

 

만약 내가 낙제점을 받아 온 아이를 혼내기만 하고 말았다면, 아이는 그냥 낙제점 받은 것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을 너무도 사랑하는 아버지인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아들을 낙제에서 구제해 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대처를 했고, 결국 바람대로 아들의 낙제를 면하게 해주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 우리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발벗고 나서 주셨다. 아들을 낳아서 키워보니,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싶다.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무슨 일이든지 기꺼이 도와주고 싶은 마음, 무엇이든지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 마음, 자식이 잘 되면 기쁜 마음, 바로 이런 마음으로 아버지는 나를 위해 사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프로젝트를 100점 받아 기뻐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보이고, 그것을 바라보며 흐뭇해 하는 나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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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이야기2015. 11. 14. 04:05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 참 슬픈 문장이다. 이 문장을 처음 세상에 내놓은 사람은 가수 백설희 씨이다. 그 이후, 이미자, 조용필, 나훈아, 장사익 씨 등이 리메이크해 불러 대중들에게 더욱더 알려진 노래이다.

 

봄날은 간다,는 역설적인 문장이다. 이 문장에는 한국전쟁 통에 봄날을 겪은 한() 맺힌 한국인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전쟁은 이렇게 비참한데, 여전히 봄날은 찬란한 역설적인 상황이 담겨 있다.

 

(비교적) 젊은 나는, 이영애와 유지태가 주연한 영화 <봄날은 간다, 2001년 작>를 통해 이 문장을 접했다. 사실, 그때만 해도 봄날은 간다의 문장보다는 이영애의 미모만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40대에 들어선 지금, 내게는 봄날은 간다의 문장만 눈에 들어온다. 문장의 발견이라고나 할까.

 

내 어린 시절, 이미자가 봄날은 간다를 부른 것을 TV에서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 제목이 기억나는 것이 아니라,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는 가사가 기억난다. 20대 후반, 젊음이 넘칠 때 본 <봄날은 간다>의 영화에서 기억나는 건, 영화 속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와 봄날은 간다의 그 시적인 표현만이 생각난다. 그런데, 지금은 봄날은 간다라는 문장이 슬프게 다가온다. 이 몹쓸 세상을 알아버린 탓일 거다. 세상의 이치에 나를 이입시킬 줄 알아버렸기 때문일 거다.

 

나는 어느 순간, ‘봄날이라는 보통명사에, ‘의 존재를 이입시킬 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봄날은 간다의 주어인 봄날가 된 것이다. 문장에서 주어는 어떤 서술어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데, ‘봄날은 간다의 문장에서 주어인 봄날은 하필이면 간다라는 서술어를 만나서, 슬퍼졌다.

 

만약, 주어 봄날이 서술어 온다를 만났으면 그 분위기는 완전히 달려졌을 것이다. ‘봄날은 온다라는 문장은 더 이상 슬프지 않고, 희망적이다. 이처럼, 주어는 어떤 서술어를 만나냐에 따라서 운명이 좌우된다. ‘봄날이라는 주어 대신 겨울이라는 주어를 생각해 보자. ‘겨울은 간다.’ 이 문장에서 주어 겨울이 봄날은 간다의 문장에서와 같은 서술어를 만났지만, ‘겨울은 간다라는 문장은 봄날은 간다의 문장과는 다르게 슬프지 않고 오히려 희망적이다.

 

이 문장에서처럼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는 것 같다. ‘봄날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간다의 서술어 같은 사람을 만나면 그 인생은 슬프다. ‘겨울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간다의 서술어 같은 사람을 만나면 그 인생은 희망적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내가 어떠한 주어의 모습을 하고 살고 있느냐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어인 내가 어떠한 서술어를 만났느냐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를 만나고 있는가. 만나면 따뜻해지는 서술어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인생은 짧으니까. 봄날은 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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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