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2024. 2. 28. 09:49

[소판 세상]

 

실리콘밸리의 상징

미션픽 정상에 오르는 길

협곡을 따라 오르다

굽이치는 바람을 만난다

고개를 숙이고 바람을 거슬러

오르다 오르다 보면

소 한 마리

또 소 한 마리

소 서너 마리

그리고 소

또 소

내 평생 개판인 세상을 보아왔어도

소판인 세상은 처음 본다

풀 뜯으며

지나가는 행인을 무심히 바라보는 소

평화로운 소판 세상을 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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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삼위일체 신학과 전망]

ㅡ 한국인이 삼위일체 신학을 어려워 하는 이유와 해결방안

 

삼위일체 신학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낯설어 하고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그리스 철학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특별히, 플라톤 철학과 그 철학이 발전해서 생긴 신플라톤주의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현대 한국인이 조선 시대 성리학을 잘 알지 못하는데, 어찌 고대 시대의 그리스 철학을 잘 알 수 있겠는가.

 

삼위일체 신학을 공부하다 보면 난관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플라톤 철학과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왜 삼위일체 신학이 그러한 언어로, 그러한 형태로, 그러한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깊이 파악할 수 없다. 기독론(Christology)을 공부하다 보면,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sus) 논쟁을 만나게 된다. 동일하게, 플라톤을 공부하다 보면 ‘역사적 소크라테스와 등장인물 소크라테스’에 대한 주제를 만나게 된다. 또한 역사적 플라톤과 철학적 플라톤의 주제도 만나게 된다.

 

역사적 예수는 2천년전 팔레스타인 땅에 실제로 존재했던 ‘인간 예수’에 대한 논의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예수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고 실제로 어떤 생각과 행동을 했는지를 탐구한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 예수를 만나기 쉽지 않다. 우리가 예수를 접하게 되는 자료는 ‘신학화된’ 예수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만나는 예수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다. 신학화된 예수다. 소크라테스도 그렇다.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있지만,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제자 플라톤이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자신의 저서에서 ‘등장인물’로 전해지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역사적 소크라테스이지만 실제로는 ‘등장인물’ 소크라테스이다.

 

플라톤 철학은 서양 사상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플라톤 철학을 모르면 서양 철학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바울에 의해서 예수 사건이 헬라 지역에 전파되고, 결국 기독교가 로마를 통해서 서양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 이상,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필수가 되었다. 특별히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서 플라톤 철학은 일종의 신학 문법으로의 역할을 감당한다.

 

역사적 플라톤은 당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역사적 플라톤은 정치적 관심과 열정으로 당대 사회를 개혁하고자 정치철학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플라톤은 그 당시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소피스트들과 한 판 대결을 벌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의 괴변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플라톤은 현실 정치에 관심을 두고 자신의 철학 사상을 펼쳐 나갔다.

 

그런데, 후대에 플라톤의 철학을 발전시킨 사람들의 관심은 좀 달랐다. 특별히 신플라톤주의를 꽃피운 플로티노스에 이르러서 플라톤 철학은 플로티노스의 신비적 형이상학을 펼치는데 활용된다.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철학을 사용하여 자신의 철학 사상을 주조해 가지만, 역사적 플라톤의 관심사였던 현실 정치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을 잘 알아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잘 알아야 한다. 신플라톤주의는 플로티누스에 의해서 발전했는데,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특징은 ‘범신론적 일원론’과 ‘철학의 종교화’였다. 플라톤 철학은 이원론의 구조를 지닌다. 이데아를 상정하고, 육체와 영혼을 구별하여, 사상을 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형상계(이데아)와 현상계(현실계)에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중간 단계를 설정해서 플라톤의 이원론을 범신론적 일원론으로 재설정한다. 그리고 플라톤 철학의 현실 정치적 색채를 현실을 초월한 신비주의적 색채로 탈바꿈시킨다.

 

플로티노스는 그의 저서 『엔네아데스』를 통해 '일자'(The One) 또는 '성선'(The Good) 사상을 펼친다. 플로티노스가 플라톤 철학으로부터 이러한 사상을 전개시킨 결정적인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출현과 영지주의 신학의 만연 때문이었다. 영혼의 구원과 신에 대한 추구라는 당대의 종교적 분위기는 플로티누스로 하여금 플라톤 철학을 신비주의적 형이상학으로 발전시키도록 이끌었다. 다시 말해, 신플라톤주의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러한 시기에 발전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신플라톤주의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일례로, 일자에 대한 생각, 누스(지성)의 개념, 그리고 관상의 개념 등은 삼위일체 신학과 기독교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플로티노스와 더불어 신플라톤주의의 부흥을 이끌었던 프로클로스(Proclus)도 그리스도교 신학의 발전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철학자이다. 프로클로스의 일자의 ‘삼위일체적 구조’는 그리스도교 신학자 위-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플로클로스의 ‘삼위일체 구조’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삼위일체’ 개념을 형성하는데 깊은 영향을 미친다. 삼위일체 신학을 급격하게 발전시켰던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경에 드러난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삼위일체 신학을 신플라톤주의에서 발전시킨 철학들과 용어들을 통해서 정립한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은 어느 신학자가 발명한 개념이 전혀 아니다. 삼위일체론을 인간이 발명했다고 말하거나,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교 신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신학은 발명하는 게 아니다. 신학은 계시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로 구성한 것이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신학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하나님 고유의 존재 방식이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가 정확하게 모두 담아낼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학이란 계시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인간이 임의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사건이 발생하고, 그 예수 사건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정리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에, 그리스도교는 헬라 문명에서 꽃피고 있었다. 그때 그리스 문명은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특별히 삼위일체 교리가 정립되고 있을 당시 헬라 문명은 신플라톤주의의 지대한 영향 아래 있었고, 그들의 용어는 어떠한 사상을 보편적으로 표현하기에 적합한 철학/신학 용어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은 신플라톤주의의 철학과 신학을 발판삼아 그들의 사고구조와 용어를 통해 정립되었다.

 

그렇다고, 헬라 철학,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발전된 삼위일체론이 삼위일체론의 전부이거나 가장 정확한 계시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계시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을 어느 한 사람이나, 한 사회, 또는 한 역사적 시대가 독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여기에서 한국인이 삼위일체론을 어렵게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나온다. 헬라 철학으로 표현된 삼위일체론이 삼위일체론의 표준이고 절대적인 기준인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 자신의 언어로 열심히 표현해야만 한다. 이미 표현된 계시만이 계시가 아니다. 우리의 언어, 나의 삶의 자리에서 표현된 계시가 우리에게는 더 쉽게, 편안하게, 그리고 간절하고 진실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한국인이 삼위일체 신학을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삼위일체 신학이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처음에 정립되어 있다보니, 플라톤 철학,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에 전혀 익숙하지 않고 잘 모르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 있다. 또다른 하나의 이유는 우리의 일상언어로 하나님을 경험을 풀어내는 데 서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다른 누군가가 해놓은 것을 가져다 하나님 경험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데 익숙하다. 그렇다 보니, 내가 내 삶의 일상언어로 하나님 경험을 표현하는데 서툴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야한다는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이것을 신학적 사대주의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러면, 한국인이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 신학을 쉽게, 그리고 건전하고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좀 어렵지만 힘을 내서 플라톤 철학,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이다. 교부들이 성경을 통해 계시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용어를 어떻게 활용하여 표현하고 있는지를 공부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했는지 알 수 있게 되고, 더불어, 두 번째 과제도 수행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기게 될 것이다. 두 번째 과제는 우리의 일상언어로 우리에게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교부들이 그들의 일상언어로 하나님의 계시를 표현했던 방식을 모범삼아,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의 계시를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어떠한 인간이, 어떠한 사상이, 어떠한 시대가 독점적으로 표현하고 가둬놓을 수 있는 분이 전혀 아니시다. 그러니, 우리는 조금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남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내것으로 하나님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하나님이 더 소중하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진정 내것이 될 때, 우리는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남이 표현해 놓은 하나님을 내가 따라 표현하려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나의 언어로 하나님을 표현하게 될 때, 하나님은 남의 하나님이 아니라 비로소 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두 가지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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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2. 15. 10:00

[사순절로 들어가는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는 이제 사순절로 들어갑니다.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의 신앙을 단련하고자 합니다.

 

모두가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이 시대에

우리도 정체성의 위기를 겪으며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흔들어대야만 이익을 취하는

수많은 세력들에 의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마치 노예처럼 이리저리 끌려 다닙니다.

 

주님,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난 당하시고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내어놓아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내어놓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 사랑으로

세상을 좀 더 따스한 곳으로 만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숨쉬게 하옵소서.

 

사순절로 들어가

그곳에 임재하며 우리와 동행하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몸으로 느끼며

기도와 봉사와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대면하고(기도)
이웃과 대면하고(봉사)
나 자신과 대면하며(금식)

부족함이 없는 영혼으로 거듭나게 하옵소서.

 

사순절 동안

주님이 기뻐하시고

이웃에게 칭찬받고

자기 자신에게 뿌듯한

선하고 아름다운 일들을 넉넉하게 행하게 하셔서

우리가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주의 백성이라는 것을

온 세상이 알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소서.

 

주님, 사랑합니다.

사순절 동안 무엇보다

주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깊어지게 하시고

사랑할 때만 알 수 있는 주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셔서

신앙이 자라고 삶이 풍성해지는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이제 사순절로 들어가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은총을 비오니,

사십일 동안의 여정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빛을 비추어 주소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 받는 사람을 놓아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야 58:6-7)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2. 15. 06:02

강하고 담대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수 1:1-9)

 

주님,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이루어 나가기 위하여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순종하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게 하소서.

그 길을 잘 걸어가면 삶에 형통이 있을 거라고

약속하신 그 말씀을 우리가 믿고 따르오니,

주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주소서.

십자가의 길을 먼저 걸어가시며

우리를 은총으로 이끌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어른 모세

 

한국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 받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대개 한국의 무속신앙인들이 그들을 추앙합니다. 대표적으로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등입니다.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구했고, 강감찬은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구했습니다. 이순신은 명량, 한산, 노량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구했습니다. 요즘 <고려 거란 전쟁>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주목 받고 있는 강감찬만 보더라도 수많은 신화적 이야기들이 전해집니다.

 

강감찬이 태어난 곳을 ‘낙성대’라고 부릅니다. 서울의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있다 보니 사람들이 또다른 ‘대학교’로 오해합니다. 낙성대는 강감찬의 탄생 설화에서 생긴 이름입니다. 강감찬이 태어나는 날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 별은 문곡성인데, 북두칠성의 네 번째 별이랍니다. 문(文)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입니다. 그래서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집을 일컬어 낙성대, 즉 ‘별이 떨어진 곳’이라고 부릅니다.

 

강감찬의 어머니는 인간이 아니라 여우라는 설화도 있습니다.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진이 태몽을 꾸고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을 때, 귀가 중 여인으로 둔갑한 여우를 만나 관계를 맺어 낳은 아들이 강감찬이라는 겁니다. 영웅설화의 전형적인 이야기입니다. 강감찬에 대한 신화 중 벼락설화도 있습니다. 강감찬이 벼락을 부러뜨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쟁 중에 벼락에 맞아 죽는 병사가 많고, 걸핏하면 일반 백성들이 벼락에 맞아 죽자 강감찬은 벼락을 분질러 없애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하루는 일부러 샘물가에 앉아서 일을 보는데 하늘에서 벼락칼이 내려와 강감찬을 치려고 했답니다. 그때 강감찬은 벼락을 얼른 잡아서 분질렀다고 합니다. 그후부터 벼락 치는 횟수도 줄어들고 부러진 벼락은 얼른 나왔다 다시 자취를 감추게 되어 사람들이 벼락에 맞는 일이 훨씬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훌륭한 인물은 이렇게 신화적으로 승화되어 칭송을 받는 법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 받던 인문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 단연 모세가 돋보입니다. 모세는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책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책을 ‘모세오경’이라고 부릅니다. 모세오경은 ‘모세 이야기’로 바꾸어 불러도 됩니다. 모세오경의 중심 사건은 ‘출애굽 사건’인데, 그 출애굽 사건의 중심은 모세입니다. 모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표현해 주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나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오경에 그려진 모세의 모습을 보면 모세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던 사람이고, 온유했던 사람이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모세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입니다. 또한 후계자를 세워 공동체를 든든하게 하고 후일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모세는 자기가 우상화 되는 것, 즉 자기가 신적인 인물로 높임 받는 것을 방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끝을 보면 안다고 합니다. 모세의 인생 마지막을 보여주는 신명기 34장은 모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한 마디로, 전무후무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한국 역사의 영웅적 인물이나 성경의 위대한 인물을 언급하는 이유는 요즘 우리 시대에 들리는 탄식 소리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는 탄식합니다. “어른이 없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하는 시절입니다. 강감찬이나 모세처럼 세상에 널리 알려진 어른이 되지 못하더라도, 내 삶의 자리에서 작게라도 어른이 된다면 우리가 머무는 삶의 자리가 얼마나 평안해지고 따스해질까, 상상해 봅니다. 어른이 없다는 탄식 소리가 들리는 이 때, 우리 함께 조금씩만 더 어른이 되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이다]

 

 푸코는 권력이라는 말 대신 '통치'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가 주조한 '통치성'이라는 용어는 '통치와 관련된 것'을 말한다. 푸코는 권력을 실체로 보지 않고 '관계'로 보았다. 그래서 권력은 빼앗고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정립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권력을 실체로 보지 않고 관계로 보았기 때문에 푸코에게 중요한 것은 통치성 안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이었다. 권력을 관계로 보면 자유의 개념이 바뀐다. 권력을 실체로 보면 자유란 자기실현을 위해 타자들의 저항이나 비판이 없는 '평온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권력을 관계로 보면 자유란 사람들 간의 경쟁이나 대항, 그리고 차이를 인정한 상태에서의 연대 등의 역동적 관계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자유란 권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서로의 배려이다.

 

푸코에게 권력은 관계이기 때문에 권력관계가 유연성을 잃고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고 고착되어 버릴 때, 이것을 지배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권력은 관계이기 때문이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견제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그 균형을 유지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푸코의 권력론(통치론)의 핵심은 '비판'과 '저항'의 문제이다. 통치자의 핵심 역량 중 하나는 비판적인 직언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것이다. 통치는 상호관계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강요할 수 없다. 정부가 통치권을 가졌다고 해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강요할 수 없다. 국민 입장에서는 정부의 정책이나 국정수행에 대하여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이 정부의 통치에 대응하는 '통치'이다. 그러므로 비판과 저항은 통치 행위이다. 권력은 관계적이기 때문에 정부도 통치 행위를 하는 것이고, 국민도 정부를 향하여 통치 행위를 하는 것이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관계이기 때문에 권력관계가 지배 상태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자기배려'이다. 자기배려는 권력관계(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 요구되는 자기의 힘을 조절하는 실천이며, 자기의 존재 방식과 행동 방식의 지속적인 비판과 문제화이다. 즉, 권력관계의 유지를 위해서 개인에게 필요한 자질은 끊임없는 자기 비판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타자와의 소통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여는 행위.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이다. 현재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이 정부(대통령)의 통치를 보면서 답답해 하는 이유는 권력이란 관계적이라는 것을 이해 못하는 권력자의 모습 때문이다. 자신의 통치만 중요하고, 자신의 통치만 일방적으로 강요할 뿐, 국민 쪽에서 정부(대통령)을 향해서 하는 통치에 대해서는 수용할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인데, 일방적인 통치만 실행되고 있으니, 민주주의의 후퇴는 물론이고 국민들의 마음에는 분노만 쌓여 가고 있는 것이다.

 

권력자들은 푸코의 통치성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싫어할 것이다. 푸코 공부는 피통치자들만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피통치자들은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푸코의 통치성을 공부해야겠지만, 더불어 권력자들도 '이런 식으로 통치하지 않기'위해서 반드시 푸코의 통치성을 공부해야 한다.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이다. 통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통치는 양방향에서 서로 주고 받아야 바른 통치이다. 이것을 알고 국민의 통치를 수용할 줄 아는 정부(대통령)가 바른 통치자이다.

 

대통령의 KBS 대담을 들은 국민들의 입에서 탄식 소리가 들린다. 대한민국은 불행하다. 권력의 자리에 좋은 통치자가 앉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판을 물같이, 저항을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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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교회가 다시 살려면]

 

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가 분석한 현대사회의 현상.

 

ㅡ 스펙타클은 "보이는 것은 좋은 것이며, 좋은 것은 보이는 것이다"라고 말할 뿐이다. 스펙타클이 원칙적으로 요구하는 태도는 무기력한 수용이다.

ㅡ 스펙타클은 현대의 수동성의 제국 위에 머물고 있는 결코 지지 않는 태양이다.

ㅡ 사회생활을 지배하는 경제의 첫 번째 국면은 인간이 실현하는 모든 것을 존재로부터 소유의 관점으로 규정하는 명백한 퇴행을 초래한다.

ㅡ 인간의 특권적 감각은 다른 시대에는 촉각이었다. 스펙타클은 그것을 시각으로 대체한다.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신비화되기 쉬운 감각인 시각은 현대사회의 일반화된 추상과 일치한다.

 

이 정도만 살펴보아도, 우리 시대가 '스펙타클 사회'인 것과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모두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구조로 돌아간다. 그래야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정치. 이 두 분야만 봐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스펙타클의 사회인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스펙타클 정치, 스펙타클 종교.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정치와 종교만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런 곳만이 부흥을 한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스펙타클을 일으키는데 귀재이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부흥하는 교회는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것을 잘하는 교회들이다. 이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낳을 수밖에 없다. 자본과 인력이 있는 대형교회는 상대적으로 스펙타클을 일으키기 쉽다. 반대로 자본과 인력이 없는 교회들은 스펙타클을 일으키지 못한다. 결국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대형교회로 교회들은 흡수되어 간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현상이 정치를 망가뜨리고, 교회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포퓰리즘 정치, 포퓰리즘 종교. 위에서 기 드보르가 지적하고 있느 것처럼,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정치와 종교를 통해 사람들은 점점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간다. 스펙타클의 위력에 일방적으로 그들이 강요하는 것은 수동적으로 수용할 뿐, 저항하지 못한다.

 

이는 고도로 발달된 상품 사회, 즉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베오울프의 그렌델일 뿐이다. 스펙타클은 그렌델의 엄마 물의 마녀이다. 원래는 추악한 모습이지만, 물의 마녀이기에 자기의 모습을 스펙타클하게 변형시켜 사람들의 마음을 꾀어낸다. 그 꾀임에 넘어간 사람들은 모두 희생자가 될 뿐이다.

 

교회가 스펙타클을 일으킨다는 것은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세속에 물드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신비한 현상은 교회에서 그토록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외치면서도 정작 교회 자체가 세속에 물들어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데 혈안이라는 것이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생명의 힘을 지키려면,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일에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저항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수동적으로 수용하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 상품 사회의 무력한 소비자로 전락시키며 소비의 희생자로 만들어 버리는 스펙타클 사회에서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인지, 오히려, 너무 자명하지 않은가?

 

스펙타클 사회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너무 자명하다.

1)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교회에 가지 않기

2) 스펙타클을 일으키지 않기

3)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목회자 조심하기

4) Indication 해서 쉽게 말하면, 대형교회 가지 않기

5) 대형교회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기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었다. '한국교회는 대형교회와 대형교회가 되고 싶은 교회, 이렇게 두 종류의 교회 밖에 없다. 목사도 마찬가지. 대형교회 목사와 대형교회 목사가 되고 싶은 목사, 이렇게 두 종류의 목회자 밖에 없다.' 물론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 스펙타클 사회의 교회/목회자 현상을 잘 지적한 듯하다.

 

교회가 다시 살려면,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우리 사회에 저항해야 한다. 쉽게 말해,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해야할 일을 하면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도록, 조용히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예배 조용히 드리고, 진실한 교제 나누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손길을 내밀되, 그냥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하는 것이다. 흑탕물을 맑게 만드는 법은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다. 이처럼 스펙타클이 너무 심해 흑탕물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 우리 삶, 우리 신앙을 다시 맑게 만드는 방법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요즘 우리 시대의 교회들이 어려운 이유는 무슨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너무나 많은 일을 해서 스펙타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스펙타클 사회에 저항하지 못하고 이 사회의 요구를 따라가면서 가뜩이나 스펙타클 사회 때문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더 지치고 힘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스펙타클 사회에 저항하는 교회가 진짜 교회다.

스펙타클 사회에 저항하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고로 존재한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2. 6. 11:46

모세처럼 어른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신 34:1-12)

 

주님,

모세라고 하는 걸출한 인물이

우리의 신앙의 선조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의 인생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 사명을 다하기까지

어른의 모습을 간직한 것을 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어른이 없다’고 탄식하는 세상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반성해야 할 탄식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

그것을 삶의 원리로 삼았다면

이 세상에는 모세와 같은 어른이 곳곳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탄식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우리들이 잘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 세상에 널리 알려진 어른이 되지 못하더라도

내 삶의 작은 부분에서라도 어른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따스해지는 일들이 많아지게 하소서.

모세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과 인생을 돌아보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어른 모세처럼

우리도 어른으로 성장해가겠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소서.

십자가 위에서 삶의 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성만찬에 대한 세 가지 생각]

 

기독교 예배의 중심에는 성만찬이 놓여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오랜 세월 동안 성만찬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신학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특별히 예배학(Liturgical Theology)의 발달이 더딘 탓도 있습니다. 새로운 밀레니엄(2000년) 전만 해도 한국의 신학교에는 예배학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예배학을 전공한 신학자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예배의 중심에 놓인 성만찬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예배학에서 가장 유명한 신학자는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입니다. 화이트 교수가 쓴 『기독교 예배학 입문』(Introduction to Christian Worship)은 예배학 분야의 교과서로 널리 쓰이는 책입니다. 이 책은 1980년에 쓰였습니다. 한국에 이 책이 번역 소개된 것은 2000년도입니다. 이와 더불어, 2000년대 이후 예배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한국의 각 교단 신학교에 포진하게 되면서 예배에서 성만찬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성만찬은 보통 영어로 ‘The Eucharist’(유카리스트)라고 합니다. 성만찬에 관한 명칭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존재합니다. ‘주님의 만찬’(Lord’s Supper), ‘떡을 뗌’(Breaking of Bread), ‘성례전’(Divine Liturgy), ‘미사’(Mass)’,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 그리고 ‘주님의 기념’(Lord’s Memorial) 등입니다. (화이트, 261쪽) 여기서 ‘주님의 만찬’과 ‘거룩한 교제’는 비교적 우리들에게 익숙한 용어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성만찬을 영어로 표기할 때 ‘Holy Communion’이라고 씁니다. 위의 용어에서 ‘미사’도 많이 들어본 용어일 겁니다. 천주교의 예배를 ‘미사’라 부릅니다. 이 말은 곧 천주교에서 예배와 ‘성만찬’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예배를 ‘감사성찬례’의 뜻으로 ‘미사’(Mass)’라고 부릅니다. 천주교 예배에 참석한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실제로 천주교는 성만찬이 예배의 ‘중심’입니다. 모든 예배에서 성만찬을 합니다. 그들에게 예배란 곧 성만찬이기 때문입니다.

 

성만찬의 보편적인 용어는 ‘유카리스트’(Eucharist)’입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받은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처음 교회(예루살렘교회)의 풍경을 보면, 교회가 세워진 뒤 교회의 구성원이 교회에서 행한 일은 ‘떡을 뗀’ 것입니다. 위의 용어에서 보았듯이, 이것은 성만찬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만찬은 교회가 처음 시작된 이래 교회에서 행하여 온 활동들 중 가장 핵심적인 활동에 해당합니다.

 

성만찬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 즉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드십니다. 그 유월절 식사 시간에 떡(빵)과 포도주를 축사하신 후에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시며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때만 해도 제자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뒤에 제자들은 그때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 만찬에서 나누었던 떡과 포도주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교회가 세워진 이후에 성만찬은 기독교 예배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외에 성만찬을 언급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며 그들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만찬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서에서 보았듯이, 유대인들은 세 가지 율법의 조항을 물고 늘어지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혔습니다. 음식 정결법, 절기법, 할례가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음식 정결법에 대한 문제가 고린도교회에 발생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가르침을 주면서 바울은 성만찬을 언급합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여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여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교회에서 성만찬이 ‘예식’으로 자리잡으면서 성만찬에 대한 복음서의 구절이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쓴 편지에서 예식문을 가져다 썼다는 겁니다. 성만찬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복음서나 고린도전서나 별로 차이가 없지만, 예배의 예문으로 쓰이기에는 고린도전서의 진술이 더 적합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복음서(마 25장, 막 14장, 눅 22자)와 고린도전서(고전 11장)의 성만찬에 대한 말씀을 비교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복음서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섞어서 성만찬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내어 주시면서 하신 말씀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성만찬 하나에도 이렇게 재밌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후 1500년간 성만찬에 대한 논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 종교개혁 시기에 이르러 성만찬에 대한 결렬한 논쟁이 발생합니다. 성만찬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보면, 종교개혁의 갈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때 발생한 성만찬 논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화체설(Transubstantiation), 다른 하나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 그리고 또다른 하나는 상징적 기념설(Symbolic Memorialism)입니다. 그냥 기념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화체설은 가톨릭 측의 신학이고, 공재설은 루터의 주장이고, 기념설은 쯔빙글리의 주장입니다. 각 ‘설’을 이해하는데 기본이 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입니다. 좀 크게 이야기하면 헬라철학이 성만찬 논쟁의 바탕입니다. 특별히, substance(실재)의 개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헬라철학에서 substance는 물자체를 말합니다. 어떠한 사물의 그 자체를 substance(실재)라고 지칭합니다. 성만찬에서는 빵과 포도주를 사용합니다. 빵은 빵의 substance가 있고, 포도주는 포도주의 substance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될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성만찬에 대한 신학이 갈립니다. 1) 가톨릭이 주장하는 화체설이란 substance가 transfer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가 예수님의 살과 피의 substance로 변화(transfer)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2) 루터가 주장하는 공재설이란 substance가 함께(con)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가 가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살과 피로 transfer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는 변하지 않더라도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와 함께(con) 예수님의 살과 피의 substance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직접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빵과 포도주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함께 실제로 임한다(real presence)는 뜻입니다. 3) 쯔빙글리가 주장했던 기념설은 가톨릭이나 루터의 주장을 모두 부인합니다. 성만찬에 덧입혀진 철학적 논의를 다 거두어 내고, 그냥 빵은 빵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이지 어떻게 이게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고, 어떻게 거기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실제로 함께 할 수 있느냐고, 아주 나이브하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쯔빙글리는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그냥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 성만찬이지, 거기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실제로 임하는 것은 아니라고, 아주 심플하게 말합니다.

 

성만찬에 대한 생각은 교회의 분열을 가지고 왔습니다. 루터는 화체설을 거부하고 공재설을 주장하면서 가톨릭에서 분리되었고, 쯔빙글리는 루터의 공재설을 거부하고 기념설을 주장하면서 종교개혁 운동을 함께 벌여왔던 루터와 작별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성만찬에 대한 신학 문제는 보통 큰 이슈가 아니었습니다. 성만찬에 대한 의견 차이로 루터는 쯔빙글리와 작별하게 되는데, 루터는 갈라설 때 쯔빙글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와 나는 영이 다르다!” 그리하여 오늘날 기독교에서 성만찬을 이해하는 세 갈래가 생겼습니다. 가톨릭 입장의 화체설. 루터의 입장인 공재설. 쯔빙글리의 입장인 기념설. 개신교의 주류 교단(감리교,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은 루터의 공재설 입장에서 성만찬을 이해합니다. 루터 이후에 종교개혁 2세대인 칼뱅이 성만찬 신학을 조금 다듬기는 합니다만, 큰 틀에서는 루터의 공재설 입장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침례교는 쯔빙글리의 기념설을 따릅니다. 우리교회는 개신교 주류 교단의 성향이니, 루터의 공재설을 따르는 입장인 것이죠. 물론 개인마다 다른 입장을 가질 수는 있지만요. 성만찬 하나에도 이렇게 흥미진진한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교회는 생명이고 사랑이다

 

최근 미국에서 <The Great Dechurching>이라는 책이 발간됐습니다. 한국어로는 ‘대규모 탈교회’ 정도로 옮길 수 있을 듯합니다. 영어에서 ‘de’자를 붙이면 ‘분리나 이탈’을 의미하니까, ‘de-churching’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조어’입니다. 이런 신조어가 생겼다는 것이 참 안타깝고 마음 아픕니다.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성장경제에서 ‘떠나야 한다’는 의미로 ‘Degrowth’(de-growth)/탈성장’라는 신조어가 생겼고, 이것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좋은 뜻의 신조어인데 반해, de-churching(탈교회)라는 용어는 교회의 위기를 표현한 신조어이기에 그리 좋은 뜻은 아닌 거죠.

 

책의 저자들이 조사(research)를 해보니, 지난 25년 동안 미국에서 자그마치 4천만명 정도가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미국 성인의 15% 정도에 해당되는 규모라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는 한 가지로 설명될 수 없겠지만, 주된 이유는 ‘소련 붕괴’, ‘극우에 결부된 기독교’, 그리고 ‘인터넷의 발달’ 등이 제시됐습니다. 구소련과 미국은 악과 선의 체제 대결로 미국인들에게 비춰졌는데, 소련이 붕괴되고 나서 악의 축이 사라졌기에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극우세력과 복음주의 교회들이 영합하게 된 것도 사람들이 교회에서 관심을 멀리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터넷(정보통신)의 발달로 누군가의 간섭없이 기독교 세계관 바깥의 세계관을 접하게 된 것도 기독교를 떠나게 된 요인입니다.

 

미국의 탈교회 현상을 설명하는, 그럴싸한 이유들이지만, 제 생각하는 이유는 조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탈교회 현상 문제는 좀 더 심층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 중 하나가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심층적으로 일으키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복음주의권 학자들은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주의 자체가 기독교의 자본주의화를 통해 부흥을 일군 미국 특유의 기독교 신앙체제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탈성장(자본주의로부터의 탈출)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반해, 미국 복음주의권 교회에서는 아직도 자본주의성장신화를 비호하며 탈성장을 오히려 비판하고 기후변화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탓을 자본주의 체제에 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미국의 탈교회 현상(또는 한국 교회의 탈교회 현상)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자본주의 문화 때문인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고, 이윤과 이익을 남기는 것을 최대의 과제로 삼는 자본주의 문화는 인간의 생명 현상을 말도 못하게 축소시킵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동료를 동료 인간으로 대하지 못하게 하고, 서로 이익을 취하는 사이로 만듭니다. 삶의 모든 부분을 시장화(market)시켜, 이윤과 이익을 위해 생명을 소모시키는 장으로 삶을 변환시켜버립니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은 생명을 나누는 사이가 더 이상 아니게 됩니다. 인간의 삶은 고립되고 파편화됩니다. 서로가 서로의 고통에 무관심합니다.

 

생명현상이 줄어든 것은 고스란히 비혼과 저출산으로 드러납니다. 사랑을 하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서로의 삶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회성이 줄어듭니다. 소통하지 않습니다. 무반응과 무관심으로 인해 사회가 삭막합니다. 사람들 사이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도 동일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자연은 인간의 이윤과 이익을 위한 착취의 대상일 뿐이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할 동료 ‘생명’이 전혀 아닙니다. 이렇게 생명력은 말도 못하게 축소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명백한 병폐입니다.

 

생명현상이 줄어든 사회에서 탈교회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교회는 생명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사건은 생명현상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생명력이 넘칠 때 교회는 부흥하게 되어 있고, 생명력이 축소될 때 교회는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생명현상인 성령으로 인하여 이 땅에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확장된 가족(extended family)입니다. 비혼과 저출산 사회에서 교회가 함께 생명현상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서 결혼이나 출산이 발생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랑이 없는 곳에서 교회는 생겨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책에서 아주 실질적인 사회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비영리단체 경영컨설팅업체 브리지스팬그룹에서 “미국 주요 6개 도시에서 신앙에 기반을 둔 비영리기관이 해당 지역 사회안전망의 40%를 제공한다”는 내용을 2021년에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가 사라지는 것은 사회안전망이 사라지는, 아주 실질적인 위협이라는 지적입니다. 교회가 사라지면 어려운 사람들은 더 어려운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사라지면 사회안전망이 줄어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가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 사회에 ‘사랑’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게 더 큰 문제입니다. 지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은 오직 ‘사랑’ 뿐인데,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교회가 사라진다는 것은 세상을 이길 힘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더 지옥이 되어 갑니다.

 

교회는 세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교회는 세력을 키워 누군가를 지배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랑을 키워 세상을 섬기는 생명체입니다. 교회는 마치 어머니의 자궁과 같습니다. 교회 하나가 없어지면, 사랑이 줄어듭니다. 교회를 여느 사회 집단으로 보는 것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숫자가 아니라 능력입니다. 생명이 형편없이 축소된 우리 시대, 그래서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우리 시대, 우리는 마음 아파해야 합니다. 단순히 교회 숫자가 줄었다고, 교인 숫자가 줄었다고 아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없음을, 사랑이 없음을, 그래서 사람들의 고통이 더 심해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아파해야 합니다. 교회는 생명이고 사랑입니다. 이 악한 시대를 이기고 견딜 힘입니다. 교회를 사랑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 28. 16:55

최고의 사랑, 순종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신명기 11:26-32)

 

주님,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그리심산과 에발산에 가서

복과 저주를 선포하는 것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그들이 도달하게 될 그 복과 저주의 자리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도달해서

처음 정착하여 예배를 드린 곳입니다.

세겜, 그곳은 순종의 자리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바로 이 자리로 되돌아 가는 여정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삶의 여정도 이것 아니겠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그의 삶의 여정을 기록한 <고백록>에서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 평안을 누렸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의 선조들을 따라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그 자리는 최고의 사랑의 자리요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곳인 줄 믿사오니,

주여,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우리의 삶이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순종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최고의 사랑, 순종이 무엇인지 십자가에서 몸소 보여주셔서

모든 만물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성경 읽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

 

4세기에 활동했던 사막의 교부 에피파니우스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는 절벽이요 깊은 심연이다.”

 

기독교 영성가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에 대한 탐구를 진지하고 처절하게 했습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고, 오롯이 하나님과 대면하기 위하여 무던히도 애썼습니다. 그 중에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c.345-377)라는 사막의 교부가 있습니다. 이 수도사가 개발한 영성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 가운데 있을 때 우리의 생각을 어지럽히고 산만하게 방해하는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 유형을 밝히고, 그것을 이 길 힘인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한 것입니다.

 

에바그리우스가 밝힌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탐식’

(2) ‘음욕’

(3) ‘탐욕’이 그 뒤를 잇고,

(4) ‘슬픔’

(5) ‘분노’

(6) ‘아케디아’가 있고,

(7) ‘헛된 영광’

(8) ‘교만’이 있습니다.

 

1)~3)은 인간의 기본 욕구입니다. 4)의 슬픔은 인간의 기본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느끼는 좌절감의 감정입니다. 그래서 이 슬픔은 시기나 질투의 감정으로 나타나 인간을 괴롭힙니다. 5)의 분노는 슬픔의 시기가 지나면 오는 것인데, 인간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처음에는 슬픈 감정에 휩싸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슬픔이 분노로 바뀝니다. 대개 타자(other people)를 향한 폭력은 이 감정에 휩싸이게 될 때 발생합니다.

 

6)의 ‘아케디아’는 한국말로 옮기기 힘든 용어인데, 권태, 절망, 무기력, 우울 등의 감정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 아케디아가 무서운 것은 이 감정은 사람을 자살로 이끄는 치명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슬픔과 분노의 시기를 지나면, ‘아케디아’의 상태, 즉 우울한 상태가 되고, 이때는 타자를 해치는 게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해치게 됩니다.

 

7)의 헛된 영광은 ‘자기애, 자기의(self-righteousness), 인정욕구’를 의미합니다. 자기애가 강하고, 자기의를 표출하며, 인정욕구를 갈망하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조차 모릅니다. 불쌍한 인생이지요. 그리스 신화에서 나르키소스(Narcissus)가 가졌던, 그런 욕망이죠.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 부릅니다. 나르키소스는 물가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것에 매혹되어 결국 그 환영을 쫓아 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8)의 교만은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위에 올려놓은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교만은 단순히 자기를 다른 사람보다 낫게 여기는 행위가 아닙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 그것이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겸손한 척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교만은 결국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 최고의 악한 행동인 것이죠.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을 제시하고, 이것을 이길 힘은 성경을 읽은 데서 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악한 생각에 대응하는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위의 악한 생각 중에서 ‘아케디아’에 대한 대응 말씀을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제시합니다.

 

‘아케디아’의 사례 중 ‘아케디아에 빠졌을 때 형제들에게 얼른 가서 위로를 받고 싶다는 유혹’에 맞서 주님은 시편 77편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영혼은 위로도 마다하네. 하나님을 생각하니 즐거워지네. 내가 이 말을 하니 내 얼이 아뜩해지네” (『안티레티코스』 VI, 24).

 

우리는 성경 읽는 법을 배우는 것, 성경 읽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합니다. 요즘엔 스마트폰으로 성경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스마트폰이나 다른 전자기기가 없어 그냥 성경책을 손수 펴서 보아야 할 때보다 성경을 더 안 읽는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을 열어서 성경을 읽을라 치면 그보다 재밌어 보이는 온갖 자극적인 기사나 영상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왕도는 없습니다. 스마트폰을 좀 내려놓고, 아날로그식으로 종이 성경책을 곁에 가까이 두고 수시로 성경을 들여다 보는 것이 최선입니다. 성경을 왜 읽어야 하는 지 모르겠다고, 혹시, 투덜거림이 내 안에서 올라오는 분이 있다면, 신앙의 선배로부터 배워보세요. 성경은 하나님께로 가는 그 험난한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안내자입니다. 성경은 힘입니다. 이 힘을 잃지 마세요. 힘이 있어야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갈 수 있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인 성경을 가까이 두고, 자주, 펴서 읽어보세요. 성경이 힘을 주고, 길이 되어 줄 겁니다. 성경(말씀)은 우리의 최종병기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 17. 03:03

[용어 통일 기도문]

 

주님, 헷갈립니다.

당신의 명칭은 '하나님' 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입니까?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한 개의 용어 'God'으로 당신을 부르고 있는데,

왜 한국 사람들은 당신을 부르는 용어가

이렇게 둘이나 됩니까?

하나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헬라식 이름입니까?

사울과 바울처럼요.

아니면 예수의 아버지가 둘이어서 그러는 겁니까?

신적인 아버지, 육적인 아버지, 이렇게 말이죠.

 

주님, 이 노래가 생각납니다.

"내동생 곱슬머리

개구쟁이 내동생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개

엄마가 부를때는 꿀돼지

아빠가 부를때는 두꺼비

누나가 부를때는 왕자님

어떤게 진짜인지 몰라 몰라 몰라"

 

주님,

남북통일이 되면 주님의 이름도 통일이 될까요?

요즘 남북관계를 보면 통일이 쉽지 않아 보이는데

'하나님'과 '하느님'의 통일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주님, 저는 소망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을 부르는 용어를 통일하면

주님께서 어여삐 보아 주셔서

남북통일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가 주님을 부르는 용어를

하루빨리 통일하는 것이

남북통일에 기여하는 것이 되길 바랍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주님,

다르게 불리더라도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하나인 줄 믿습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하느님도 하나이시니"(엡 4:5-6a)라는 말씀처럼,

당신에 대한 명칭은 두 개일지라도,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하나인 줄 믿습니다.

다만, 헷갈리지 말게 하시고, 분열에서 우리를 구하시옵소서.

 

용어를 통일시켜 주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1. 17. 03:03

최고의 노동을 간구하는 기도

(신명기 6:1-9)

 

주님,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최고의 노동이고

이 노동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줄 믿습니다.

신앙은 최고의 노동입니다.

이것을 잘 하면 세상의 어떤 일이든지

우리는 잘 해낼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주여, 우리를 지켜주사

주를 사랑하는 신앙의 노동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몸으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사도행전을 주목하는 이유

 

사도행전은 성령행전, 또는 기도행전이라는 별명을 가진 성경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후편으로서 누가복음을 읽은 후 읽어야 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가 같기 때문에 두 책의 강조점은 같습니다. 성령과 기도가 강조됩니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목격하고, 기도 사역을 배우게 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기도하는 주님’으로 묘사됩니다. 무슨 일을 하시든지, 예수님은 기도를 먼저 하십니다. 그래서 누가-행전은 성령행전, 또는 기도행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주님’이 부재한 상황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의 도우심과 이끄심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셨던 사역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어떻게 동일하게 수행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에서부터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의 사역, 그리고 십자가 죽음, 또한 부활과 승천까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성령 안에서 발생한 일인데, 사도행전은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교회(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것을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신앙과 사역의 매뉴얼입니다.

 

현대 기독교 신학이 교회를 비판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비판은 교회가 충분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고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야훼 신앙, 그리고 플라톤의 신학의 영향 아래 기독교인들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일신론/유일신론’으로만 생각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묵상이 부족하고, 삼위일체적 사고와 실천이 부족하다보니, 기독교 고유의 폭발력 있는 복음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충분히 사유하고 묵상하지 못하면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은 생활의 구조를 ‘가부장적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의 교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을 일신론/유일신론으로 인식하고 마니, 일상생활에서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이해보다는 ‘하나의 힘’에 집중해서 그 권위 아래 굴복하고 굴복시키는 생활 구조를 만들어 내고, 그러한 생활 구조를 오히려 편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죠.

 

일찍이 기독교 신학은 삼위일체론(Trinity)를 사유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삼위일체론에서의 쟁점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고유한 개체성을 유지하면서 삼신론이나 다신론으로 빠지지 않고 ‘한 하나님’이 될 수 있을 것인가였습니다. 이 문제는 너무도 중요하고 신비로운 것이라,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학이 발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삼위일체 신비를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신학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을 말하고 표현하고 싶은지,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왕적 군주의 모습을 가진 폭력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교제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일치를 이루지만 동시에 각자의 위격(고유의 품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민주사회를 이루어 가고, 생태 위기를 극복하는데 필수적인 신학적 통찰입니다.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강력한 신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사람들은 실제 교회생활에서, 그리고 선교활동에서 그것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한 하나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삼위 하나님이 위격을 가지고 고유의 사역을 성취하시는지,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역 속에서 몸소 경험하고, 그 경험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보여줍니다. 그래서 강력합니다. 하지만, 보여주다 보니,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그냥 우리의 눈에서만 흘러가 버리기도 합니다. 마치, TV 드라마를 보듯이 말이죠. 하지만,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이유는 우리에게 ‘구경’하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는 보여줄 수 있을 뿐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보여주고 있는 삼위일체의 역사를 눈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발생하도록 우리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 함께 사도행전을 거니는 동안,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더 사랑하게 되고, 그 신비를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실천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