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와 신앙2013. 2. 22. 03:14

군자삼락(君子三樂):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말

 

전국 시대, 철인(哲人)으로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맹자(孟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君子有三樂(군자 유삼락)]. 첫째 즐거움은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요[父母具存 兄弟無故(부모구존 형제무고)]. 둘째 즐거움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仰不傀於天 俯不作於人(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셋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다[得天下英才而敎育之(득천하영재 이교육지)]”. - 맹자(孟子) 진심편(盡心篇) -

 

군자의 즐거움은 조금 더 고차원적인 즐거움입니다. 인간에게는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즐거움이 존재합니다. 식량공급과 안보, 그리고 자녀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모두생명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

 

식량은 생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식량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즐거움을 모른 채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식량공급도 안보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구약의 많은 이야기들이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께 왕을 구한 것도 결국안보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생명에 가장 기본적인 식량공급을 위해 힘쓰고 애씁니다. 그러나, 애쓰고 힘써서 얻은 식량을 누군가에 의해 약탈 당할 때의 허탈감이란 곧죽음과 같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해서 살던 이스라엘은 열심히 식량공급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런데 추수가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주변 나라의 폭군들이 쳐들어와 생명과도 같은 식량을 약탈해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께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안보를 강화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그들은을 요구했던 것이죠. 이것이 좋은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좀 더 근본적인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이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왕을 의지하다, 결국 주변 나라 정세를 잘못 읽는 실수를 범해 나라가 망하고 맙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시적인 수사법을 동원해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강하고 오래된 민족이 와서 그들의 삶을 피해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들이 네 자녀들이 먹을 추수 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네 양 떼와 소 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믿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 5:17).

 

이것을 통해서 예레미야가 파멸해가는 이스라엘에게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이들이 이렇게 무력하게 무너지는 이유는 엉성한 군사대책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를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했던 이스라엘이 당해야 했던 대가는 엄청났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즐거움인 식량공급, 안보, 자녀 등 모든 것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신앙이란 인간의 기본적인 즐거움을 보이지 않게 떠받치고 있는 기둥과도 같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식량공급, 안보, 자녀 등을 통해서 즐거움을 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을 보이지 않게 보장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 이것으로 끝나는 것 같습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시편 33:1).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편 64:10).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군자는 세 가지의 즐거움을 가지고 있지만, 신앙인은 오직 한 가지의 즐거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즐거움이십니다.

'고사성어와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사천리(一瀉千里)  (2) 2013.02.08
명경지수(明鏡止水)  (0) 2013.02.02
해로동혈(偕老同穴)  (1) 2013.01.11
양금택목(良禽擇木)  (0) 2012.12.31
양약고구(良藥苦口)  (0) 2012.12.24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2. 19. 23:24

2013 217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4:1-15

제목: 성령과 말씀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날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라고 기도합니다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한, 시험이란 사실 피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시험에 들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시험에 들더라도 그것을 이겨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마태복음 5 11,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그러나, 우리 삶 속에 실제적으로 시험이 다가올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시험 사건에서, 기쁘지 않고 즐겁지 않은 시험이 다가왔을 때 그것을 어떻게 기쁘고 즐겁게 이겨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한 번 배워보려고 합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배우는 것과 실제 내 생활 속에서 그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식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호세아서 4 6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시험이 다가왔을 때 우왕좌왕하지 마시고, 오늘 배운 말씀대로 한 번 해 보십시오.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고, 하늘에서의 상이 클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전에 나오는 이야기가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그 끝이 어떻게 끝나냐면,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로 끝납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사가 광야에서의 시험 이야기인데,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계속해서 사용하는 호칭이 바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입니다. 이게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호칭이 아닙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한복음 1 12절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할 때도 이 수법을 이용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네가 하나님의 딸이어든.” 이렇게 마귀는 속삭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의 아이덴티티(Identity)이고 디그니티(dignity)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 장준식은 육신으로는 아버지 장영산과 어머니 오세숙을 통해서 이 세상에 왔지만, 나 장준식의 근원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우리의 아이텐티티, 신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디그니티, 품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왕족을 한 번 만나보셨습니까? 저는 두 명의 왕족을 만나 보았는데, 한 명은 실제로 말레이지아의 국왕이었고, 다른 한 명은 남태평양 통가 왕국의 왕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자태가 다릅니다. 말레이지아 국왕은 제가 한나절 함께 모시면서 쇼핑도 시켜드리고 식사도 함께 해 보았는데, 품위가 다릅니다. 자기 자신 스스로를 왕이라고 인식하니까, 그냥 왕이니까, 왕답게 행동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살아갑니까? 나는 어떤 품위를 가지고 살아갑니까?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에 대한 확실한 신분인식과 그에 걸맞는 품위가 필요합니다. 곧 죽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품위 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도 그것을 아주 잘 아셨습니다. 그것을 잘 알 수 있는 길은,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4 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증거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내가 누구인지 나에 대한 인식이 올바로 생깁니다. 성령 충만하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성령 받지 않으면, 사람인지 멍멍이인지 분간이 안 갑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 형태가 그 옛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시험 받을 때와 똑같습니다. 시험은 이러한 유형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시험이 세 가지인데, 하나는 돌을 빵이 되게 하라. 둘째는 마귀한테 절하면 권위와 영광을 네게 주겠다. 셋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실 것이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어떻게 시험 받았는지 출애굽기와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를 보면 잘 나와 있는데, 첫 번째 시험은 출애굽기 16 3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모세와 아론)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0일 동안 굶주렸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겠습니까? 바로 그 약점을 치고 들어옵니다. 가장 필요한 부분을 치고 들어오는 것이 마귀의 계략입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는 마귀가 재정적인 부분으로 시험을 걸어옵니다. “네가 그리스도인이냐?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자녀냐?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궁핍하게 하시겠느냐? 네가 지금 배고파 주겠는데, 하나님한테 십일조 바칠 돈이 어디 있어? 하나님, 다 이해하실 거야. 그거 가지고 맛있는 거 사먹어. 그리고 빨리 이 빈궁한 생활에서 벗어나야지, 남 도와줄 여유가 어디 있어 내 코가 석자인데, 그 돈 가지고 헌금할 여유가 어디 있어? 그럴 돈 있으면 도박하거나 복권 사라. 하나님께서 다 이해해 주실거야. 도박해서 돈 따고, 복권 당첨되면 그 동안 못 냈던 헌금, 100배로 쳐서 많이 내면 되잖아. 그러면 너도 좋고, 하나님도 좋은 거 아니야? 하나님이 오히려 잘 되라고 도와주실걸?”

 

자신에게 약한 부분, 건강이면 건강, 자식이면 자식, 아무튼 자신에게 있어 약한부분을 치고 들어오는 것이 마귀의 계략입니다. 그 부분이 무엇인지, 각자 다 알고 계실 겁니다. 내가 약한 부분이 뭔지 아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 그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 드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약한 부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도 안 하는 것은, 아직까지 그것이 약한 부분인지 절실하게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통해서 마귀가 공격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약한 부분은 배고픔이었습니다. 마귀는 그 부분을 치고 들어왔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하지만, 성령 충만했던 예수님은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방어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당신의 약점을 파고 들어오는 마귀를 물리치십니다.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으니라.” 이는 신명기 8 3절 말씀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두 번째 시험은 신명기 614절 이하에 나오는 시험과 똑같습니다.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마귀는 영광과 권세를 약속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얻는데 있어서, 잘못된 방법으로 영광과 권세를 얻도록 부추깁니다. 영광과 권세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마귀가 아닙니다. 그런데 마귀는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자기에게 절하면 자기가 영광과 권세를 주겠다고. 이건 거짓입니다. 하지만 아주 달콤한 거짓입니다. 마귀는 그러한 것을 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얻게 끔 하기 위해서, 거짓된 방법을 쓰도록 합니다. ,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악한 수단을 쓰게 합니다.

 

지금도 시행되고 있는 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 조지아 정부에서 슈퍼 교통법을 시행했습니다. 거기에서 걷힌 돈으로 교육 사업 등 공공사업에 쓴다고 합니다. 교통법규를 어기면 물게 되는 범칙금에 무조건 200달러를 부과하는 교통법입니다. 좋은 일 하려고,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것이죠. 복권 사업도 정부에서 조장합니다. 복권에서 나온 세금 가지고 공공사업에 투자를 하지만, 복권에 애딕션되어서 인생을 망치며 사는 사람들의 삶은 돌보지 않습니다. 카지노를 건설합니다. 라스베가스에 카지노가 있습니다. 그것을 건설할 때 목적이 좋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미국 원주민들(인디안들)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인생이 망가지는 사람에 대해서 그들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마귀는 모두 이런 식입니다. 선한 목적을 위해서, 악한 수단을 쓰게 끔 우리를 부추긴다는 것이죠. 이러한 마귀의 계략을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 하였으니라.” 이는 신명기 6 13절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시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테스트 해보던 것과 똑같습니다. 출애굽기 17 3절에 보면, “당신(모세)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면서 하나님을 테스트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는데,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습니다. 그 뜻이,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다는 뜻이고, 17 7절에 보면 이 사건을 일컬어, “그들의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고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떨어지는 너를 붙잡아 지켜주시지 않겠느냐?” 마귀의 이 유혹은 결정적이고 치명적입니다. 마귀는 성경구절까지 인용합니다. 시편 91 11, 12절입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나님의 계심이 이런 것으로 증명이 됩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계신다고 그랬죠? 자 그러면 제가 이제 운전대를 놓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계시면 이제 하나님이 운전해 보세요.’ 그러면서 운전대를 놓으면, 하나님께서 운전해 주십니까?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가장 많이 유혹을 받는 형태가 바로 이 세 번째 시험의 형태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시험하면서 삽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하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어떻게 이기시는지,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성령 충만하셨고, 다른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귀를 물리치는 검과 같이 사용했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 제목과 같이, 성령과 말씀, 이 두 가지가 마귀를 물리치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날마다 부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예수님 긍휼히 여겨주세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보십시오. 매순간, 쉬지말고, 불러보십시오.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잘 배우십시오. ‘아차하는 긴박한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를 수 있도록, 말씀으로 나의 뼈와 살, 피를 채워야 합니다. 율법이 613개인데, 왜 율법이 613개이냐하면, 사람의 뼈마디가 248개이고, 일 년이 365일이니까, 248개의 뼈마디마디 마다, 365일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넣으라고, 248 더하기 365 하면 613개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려면 살아갈수록 마귀의 시험은 거세집니다. 특별히 사순절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 시간. 시험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겁니다. 예수 믿으면, 내 삶에 있던 모든 문제가 해결 받고, 마음이 평안해 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를 사랑하면 더 사랑할수록 아무런 문제가 안 일어나고, 시험에 들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도 평안함을 느끼는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 폭풍이 일었습니다. 제자들은 폭풍 속에서 안절부절 못했지만, 예수님은 배 밑바닥에 머리를 대로 편안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배에 누워 계시는 한, 폭풍은 그 배를 뒤엎을 능력이 없습니다. 내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내가 지금 시험을 당하고 있더라도,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고 계시면 아무것도 나를 뒤엎을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만 안다면, 우리가 어찌 평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순절기 동안, 이것을 한 번 연습해 보시고,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충만함을 받아,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치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이란 무엇인가? II  (0) 2013.03.05
믿음이란 무엇인가?  (1) 2013.02.25
십자가의 도로 해결하라  (0) 2013.01.15
다른 길  (0) 2013.01.07
맡겨야 기쁘다  (0) 2012.12.18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3. 2. 8. 05:08

일사천리(一瀉千里): 신속하게 일을 처리함 / 말이나 글이 조금도 거침이 없음

 

중국의 長江(장강:양자강)黃河(황하)는 엄청난 스케일로 유명합니다. 각기 중국을 서에서 동으로 쌍둥이처럼 흐르면서 대륙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자연히 두 강은 예부터 시인묵객의 좋은 벗이 되어 명시나 명화에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남송의 학자 진량(陳亮)은 여신유안전찬(與辛幼安殿撰)이라는 글에서 장강의 위용(偉容)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長江大河 一瀉千里 不足多怪也 (장강은 대하이니 일사천리로 흐른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이처럼 一瀉千里 본디 장강이 거침없이 천리를 내닫는 모습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지금은 장강의 흐름처럼 어떤 일을 매우 신속하고 거침없이 처리하는 것을 비유하게 되었습니다. - '엄산당별집' –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국가반란죄를 뒤집어 씌운 로마당국이나, ‘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씌운 유대종교지도자들이나 모든 것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처리되기를 바랬습니다. 게다가 절대로 죽은 자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죽은 시체를 어서 빨리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야만 했습니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빨리 돌아갑니다. 물론 옛날이 지금보다 모든 것이 훨씬 느리게 돌아갔겠지만 지구의 자전만큼이나 바뀌지 않는 것이 인간 마음의 조급함일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그것이 자신의 허물을 감추는 것이나, 자신을 높이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무엇인가 분주한 사람들이 진리를 보고 듣고 깨닫기에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누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았을까요? 일사천리로 진행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본 사람은 누구일까요? 진리는 속도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빠르게 가면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잠깐 멈추어서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는 멈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로마 당국자는 자신들이 표방하는 팍스 로마나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평화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됐던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에 내어주었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생각됐던 하나님의 아들을 오히려 신성모독죄를 씌워 죽였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를 못박으라고 외쳤던 민중들도 자신들의 과도한 구원의 욕망을 멈출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진짜 구원자인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멈추어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볼 줄 알았습니다. 들에 핀 꽃 한 송이,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 그리고 병들고 배고픈 민중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분의 처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지만, 그분의 사랑은 멈추지 않으면 베풀어지지 못하는 형태로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멈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빠르게 살아갑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멈춤의 영성을 기르기 위한 가장 손 쉬운 일 한 가지는 자신의 두 발을 교통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쯤은 걸어보시지요. 무엇이 보이는지.

'고사성어와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자삼락(君子三樂)  (1) 2013.02.22
명경지수(明鏡止水)  (0) 2013.02.02
해로동혈(偕老同穴)  (1) 2013.01.11
양금택목(良禽擇木)  (0) 2012.12.31
양약고구(良藥苦口)  (0) 2012.12.24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3. 2. 2. 06:40

명경지수(明鏡止水): 맑은 거울과 조용한 물이라는 뜻으로, 티없이 맑고 고요한 심경을 이르는

 

춘추 시대, 노나라에 왕태라는 학덕이 높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교의 비조(鼻祖)인 공자와 맞먹을 만큼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인 상계(常季)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 올자(형벌에 의해 발뒤꿈치가 잘린 불구자)는 어째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흠모를 받고 있는 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마음이 조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거울 대신 비쳐볼 수 있는 물은 흐르는 물이 아니라 가만히 정지해 있는 물이니라.” - 장자(莊子) 덕충부편(德充符篇) –

 

톨스토이는 덕이 있는 사람이란 자기 인생의 의의(意義)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인생의 의의를 알고 있는 덕 있는 사람이 곧 명경지수가 아니겠는지요? 자기 인생의 의의를 아는 사람은 결코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자기 인생의 의의를 알게 되는 것을 일컬어 소명(Vocation)이라고 합니다. 소명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가지고 계신 계획을 의미합니다. ‘내적 부르심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도 있고, ‘인생의 목표라고 부를 수도 있겠네요.

 

사도 바울의 소명은 이방선교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무단히 노력을 합니다. 선교를 다니면서 박해를 받아 죽을 고비를 한 두 번 넘긴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생계를 위해서 천막 짓는 일도 합니다. 물론 동역자들을 만나 생계를 해결하기도 하지요.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특정한 직업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이러 저러한 것들이 동원될 뿐입니다. 소명을 받았던 사도 바울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지만, 그의 마음은 오직 한 곳만 바라보았습니다. 마음이 집중되니, 마음이 잔잔하니, 세상 풍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을 통해서 명경지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3:1). 여기에 등장하는 부르심을 받은이 바로 소명입니다. 하나님께 소명 받은 사람은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영어로 ‘fix your thoughts on Jesus’인데, 생각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릴 때 소명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나의 인생의 의의를 도대체 알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소명이 흐려질 때 우리의 마음은 소명이 흐려진 만큼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소명이 분명할 때 우리의 마음은 소명이 분명한 만큼 고요해질 것입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답게 자기 인생의 의의를 분명히 깨닫고 사는 명경지수의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고사성어와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자삼락(君子三樂)  (1) 2013.02.22
일사천리(一瀉千里)  (2) 2013.02.08
해로동혈(偕老同穴)  (1) 2013.01.11
양금택목(良禽擇木)  (0) 2012.12.31
양약고구(良藥苦口)  (0) 2012.12.24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3. 1. 19. 01:49

1. 고난을 진지하게 대하는 영성 (욥기 1:1-12)

 

고난에 대한 명언들이 많다. 그 중 기억에 남는 명언은 세 가지 정도다: 1) 고난은 가면을 쓴 커다란 행운이다 영국속담, 2) 고난이 없으면 성공도 없다 소포클레스, 3) 고난은 의식의 시작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이 중에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난에 대한 명언을 좋아한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고난을 좋아할 이유도 없다. 고난에 대한 명언들은 모두 고난을 미화(美化)’시키고 있지만, 명언들에서 미화되고 있는 고난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못하다.

 

대개 사람들은 고난을 만나면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고난에 걸려 넘어지거나, 고난을 외면하거나. 고난이 아무리 주는 유익이 크다고 미화되고 있어도, 고난을 겪고 나면 인생에는 고난의 얼룩이 남게 마련이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서 얻는 것도 있지만, 잃게 되는 것 또한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인간은 되도록이면 고난을 피하는 것이 좋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사실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고난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은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고난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난을 당하면 사람들은 대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원인을 자꾸 묻곤 한다. 특별히 기독교인들은 고난이 닥치면 신앙이 위축된다. ‘내가 뭐 잘못했나?’ 영락없이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리고 모든 고난을 죄의 문제로 치부하며, 결론을 회개로 이끌어 간다.

 

사실 신앙인의 입장에서 이것만큼 고난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고난이 닥쳤을 때 무조건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고, 이 고난을 거두어 주시며, 제게 다시 당신의 은총을 허락하옵소서하면 오히려 겸손해 보이고 신앙심도 좋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고난을 정당하게 이겨내는 방법이 아니다. 이것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을 이겨내는 신앙적인방법 같으나, 깊이 들여다보면, 고난의 문제를 살짝 비켜가는 처세술에 불과하다.

 

한 번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인생을 살면서 맞닥뜨린 고난 중,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진실로 만난 적이 있는지를. 위의 회개의 기도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께 아부해서 지금 당하는 고난에서 빨리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얄팍한 수사적 표현일 뿐이다.

 

그렇다면, 고난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욥기에서 배운다. 욥기는 우리를 고난을 진지하게 대하는 영성의 세계로 인도한다. 고난을 당했을 때 가볍게 회개기도를 통해서 고난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온 존재를 다해 직면해서 그 고난에 임재하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영성을 가르쳐 준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고난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욥기에 나타나고 있는 고난의 영성은 대게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고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고난을 직면한다는 것은 현재 나에게 일어난 고난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 대게 사람들은 자신에게 고난이 닥치면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하면서 고난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고난을 겪으면서도 더 이상의 진전 없이 마음만 상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서 속으면 안 된다. 우리는 고난을 겪으며 마음만 상한 상태로 그 고난을 시간 속에 묻어 둔 채 사는 것을 산전수전다 겪은 양 생각한다. 그 자체로 어느 정도의 유익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고난의 기억은 나의 인생의 에너지가 되지 못하고, 그림자만 될 뿐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겪을 때 우리는 온 몸을 다해서 그 고난을 우리 인생에 수용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억누르지 않는 것이다. 고난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하게도 하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 에너지가 바로 분노의 에너지다.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이는 필경 범죄로 이어진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대부분은 인생의 고난에서 생성된 분노의 에너지를 잘못 다스려서 생긴 것들이다.

 

그렇다면 고난으로 생성된 분노의 에너지를 어떻게 해야 건전하게 풀 수 있는 것일까? 이 세상에서 고난의 분노를 받아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해야 한다. 신앙인은 이것을 잘하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분노를 엉뚱한 데가 풀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범죄자가 된다.

 

고난의 분노를 하나님을 향해 푼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탄원하는 것을 뜻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대한 자신의 분노를 숨기지 않으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리고 오히려 자기를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은 용서하셨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이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와 좌절감의 표현을 방향 없이 허공에 또는 애꿎은 이웃에게 하지 말고, 하나님께 향하여 해야 한다.

 

세 번째 단계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고난을 삶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고난의 분노를 하나님을 향해 풀었다면, 이제 그 고난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날 차례다. 왜냐하면, 고난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욥의 고백은 옳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기 2:10).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고난을 통해 겪는 고통이 가라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고난에 의해서 생성된 분노와 좌절의 에너지를 선한 것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뿐이시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분노와 좌절이 절정에 다른 자리이다. 분노와 좌절의 끝은 죽음이다. 죽음은 부정적인 에너지의 끝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부활이 일어났다. 부활은 부정의 에너지를 긍정의 에너지로 바꾼 새창조의 사역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창조의 능력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한다. “고난은 의식의 시작이다.” 고난을 통해서 무엇을 의식하기 시작할 것인가? 바로 하나님이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면 그 고난은 그냥 형벌로 남겨질 것이고, 그림자 같은 상처만 남길 뿐이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는 고난을 통해 거듭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욥기에서 바로 이것을 봐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 15. 09:32

2013 1 1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3:1-18

제목: 십자가의 도로 해결하라!

 

오늘은 수세주일입니다. 수세주일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수세주일은 주현절기 가운데 들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세례 받는 것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공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특별히 수세주일에 임직식을 거행하게 된 것을 뜻 깊게 생각합니다. 임직식이란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대중들에게 드러낸 일과 같은 종류의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일차적으로 세례를 통해서 그 일을 합니다만, 세례 받고 나서도 숨어 지내는 기독교인이 많은데, 임직식이란 세례 받은 성도가 그동안 열심히 공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서, 그의 신앙이,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공적으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자신의 정체를 공적으로 드러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세상 앞에서, 그리고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유해 나갈 때,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오늘 말씀 제목처럼 삶의 모든 문제를 십자가의 도로 해결할 줄 아는 영성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세례를 통해서, 그리고 임직식을 통해서 세상에 공적으로 나 자신의 정체를 밝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꼭 배우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부인 사라, 그리고 조카 롯과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 여정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네게브라는 지역에서 벧엘로 이동하는 중입니다. 삶의 터전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와중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조카 롯도 그렇고 그냥 홀홀 단신 여행 배낭만 매고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재산, 즉 양 떼, 염소 떼, 소 떼 등을 거느리고 이주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축들을 풀어놓고 마음껏 먹일 수 있는 목초지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음이니라.”

 

영역이 겹치다 보면, 갈등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아브라함의 목자들(종들)과 롯의 목자들(종들)이 목초지 문제 때문에 자주 다투었나 봅니다. 서로 좋은 목초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다투었겠죠.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뜻하지 않는 문제(갈등)에 직면하게 됩니다. 문제(갈등) 없는 삶은 없습니다. 믿는 이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문제(갈등)이 없을 거라는 것이죠. ‘예수 믿는데, 왜 나한테 이러한 문제(갈등)이 생기는가?’ 하면서 신앙이 흔들릴 때가 있는데, 이것은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문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갈등)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육신을 입고 살아 숨쉬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문제(갈등)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 없는 삶이 아니라, 문제(갈등)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푸느냐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갈등)를 푸는 방법이 다르다는 겁니다. , 하나님 앞에서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욕심에 따라 인간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에서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갈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툼 없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삶 속에서 일어난 문제(갈등)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한 번 보십시오. 문제가 발생하자,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13:8).

 

사실, 삼촌이 조카랑 다투는 것은 참 창피한 일입니다. 부끄러운 일(shame)입니다. 상대가 되는 사람하고 싸워야죠.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창피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들끼리 싸우는 것을 말할 것도 없죠.

 

그러나 그것보다도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것은 이득과 손해가 아니라,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인지를 꼭 짚어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이득과 손해가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가르칩니다. 손해 보는 일은 절대로 안 하게 하고, 이득이 되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저지르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그것이 절대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 됨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갈등)가 발생했을 때, 그리스도인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 됨입니다. 사탄이는 갈등 상황에서 분열과 다툼을 일으킵니다. 그러니까, 거꾸로 얘기해서 분열과 다툼을 일삼는 말과 행동은 하나님 자녀로서가 아니라, 사탄의 자식으로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 됨을 생각하기 때문에, 갈등의 상황에서 화평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 8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5:9).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합니까? 문제가 발생하거나, 갈등이 생겼을 때 이득과 손해를 따져서 행동하지 않고, 속시원하게 내 속에 있는 것 다 풀어내 놓지 않고, 어떻게 우리는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까?

 

문제(갈등) 상황 속에서 다툼 없이 그 문제(갈등)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원리는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비전이라고도 부릅니다. 내가 바라보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서 용인해주시는 것이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것을 바라보는 것이 비전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제안합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3:9). 참 멋있지 않습니까? 우리 같으면, “가만히 있어, 내가 간 다음에 너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그러던지,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다 내꺼야!”할 텐데 말이죠.

 

삼촌 아브라함의 제안에, 롯은 신이 났던 것 같습니다. 아직 어려서 그렇기도 했거니와, 롯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롯은 눈을 들어서 자기 눈에 좋게 보이는 땅을 차지합니다. 그 지역이 어딘가 보십시오. 바로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소알 땅입니다. 눈으로 보기에 그 땅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의 땅과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을 조심하십시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이 곧 좋고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은 우리 마음의 탐욕대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눈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탐욕 대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눈을 감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내 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기 위해서 눈을 감는 것입니다.

 

롯이 선택한, 그의 눈에 좋게 보였던, 아름답게 보이고, 잘 먹고 잘 살 것 같았던 소알 땅, 나중에 이 땅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땅입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13:13). 탐욕스러운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았던 롯의 눈에는 이것이 안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나중에 롯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함께 심판 받습니다. 모든 재산을 다 잃고, 탐욕에 물들어 있던 아내까지 잃게 됩니다.

 

그리고 웃지 못할 사건도 발생하죠. 삼촌 아브라함 덕분에 소돔과 고모라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롯과 그의 두 딸은 자손을 보존해야한다는 명문하에, 첫째 딸이 먼저 아버지께 들어가고, 둘째 딸이 나중에 아버지께 들어가서 성관계를 가진 뒤, 임신을 하여 각각 모압과 암몬이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을 평생 괴롭혔던, 모압과 암몬 족속의 시조들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탐욕대로 세상을 보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화평을 이루지 못하고, 끝까지 골치거리로 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롯과는 달리, 자기 눈에 좋게 보이는 땅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땅을 바라봅니다. 그 땅은 롯이 택한 소알 땅에 비하면, 사막과 다름 없는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땅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땅은 아브라함의 눈에 보기에는 별로인 땅이였지만, 하나님이 복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은 고작 조카와 갈등을 겪으면서 빼앗은 땅은 아니라고 말이죠. 갈등을 겪으면서 빼앗은 땅에서 무슨 선한 열매가 맺어지겠습니까? 꼭 기억하십시오. 믿는 우리들이 어느 누군가와 갈등을 겪으면서 빼앗은 그 무엇이든,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알았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눈에 좋게 보이는 땅을 조카 롯에게 양보하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대로 움직여서 복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서울 송파구에 사는 김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형님과 유산 문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형님은 법원에 재산분할소송을 제기하며 유산을 독차지하려 하였고, 이에 동생도 맞고소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새벽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를 드리다가 문득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5:23-24)는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결국 권사님은 모든 법적 소송을 중지하였고, 유산의 대부분은 형님이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유산으로 사업을 확장한 형님은 얼마 후 도산하였습니다. 이를 안 권사님은 거주할 곳조차 없어진 형님의 가족들에게 전셋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더 나아가 크게 미안해하는 형님과 형수님께 생활비 일부를 보태 주었습니다. 형님은 동생에게 예수 믿는 사람이 정말 다르구나.”하고 말하면서 집 근처 교회에 등록하여 출석하기에 이렀습니다. 권사님은 유산을 받지는 못했지만, 양보함으로 평안을 얻었고, 주님의 제자 됨을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해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에서 봅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과의 갈등입니다. 아주 극렬한 갈등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딪치는 문제(갈등) 가운데, 그 문제(갈등)을 해결하는 마지막 단계는 죽음입니다. 요즘 말로, 막장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예수님과 이 세상이 얼마나 극렬한 갈등 가운데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과의 갈등을 죽음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해결할 수 있는 막장까지 간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데려다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성경에서 이 장면을 보면서 답답해 합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천사를 동원하시든지, 벼락을 동원하시든지 자신을 부당하게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을 혼내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그러나,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가 답답해 하는 심정처럼 그렇게 하셨다면, 예수님과 세상은 다를 게 없는 것이 되고,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 수 없었을 겁니다. 십자가에 달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도 끝까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으시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그냥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거기에서 정말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고린도전서 2:9절 말씀이 증거해 주고 있는 것처럼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부활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이 세상과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해 하신 예수님의 선택이 옳으셨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증명해주셨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롯과는 달리 큰 민족을 이룬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 됨을 위해, 화평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아브라함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증명해주셨다는 뜻입니다. 위의 예화에서 보았듯이, 김 권사님 형님이 동생 권사님의 믿음을 통해서 구원 받았다는 것은, 하나 됨을 위해, 화평을 위해 재산을 포기한 김 권사님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증명해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도로 이득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하나 됨을 위해, 화평을 위해 문제(갈등)를 믿음으로 해결하면서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옳다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부활의 은총이 있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임직하시는 분들이나, 여기에서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일을 만나든지, 부활의 주님을 생각하면서, 십자가의 도로 그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우리가 눈으로 보지도 못했고, 귀로도 듣지 못했고,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이란 무엇인가?  (1) 2013.02.25
성령과 말씀  (0) 2013.02.19
다른 길  (0) 2013.01.07
맡겨야 기쁘다  (0) 2012.12.18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0) 2012.11.19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3. 1. 11. 01:48

해로동혈(偕老同穴): 살아서는 함께 늙고 죽어서는 같은 무덤에 묻힌다 / 생사를 같이 하는 부부의 사랑의 맹세

 

해로는 시경에 있는 '격고(擊鼓)'편의 시에 나오는 말로, 전선에 출전한 병사가 싸움터에서 방황하면서 고향에 두고 온 아내를 생각하며 멀리 떨어져 있음을 슬퍼하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生死契闊 與子成說, 執子之手 與子偕老 (삶과 죽음과 헤어짐과 만남에 상관없이, 항상 함께 하자 언약하였지. 그대의 손을 잡고, 그대와 함께 늙겠노라). ‘동혈은 시경의 '대거(大車)' 편의 시에 나오는 말로, 초나라에 의해 멸망한 나라의 군주와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군주는 포로가 되고 부인은 초왕의 아내로 지목되어 궁으로 끌려갔습니다. 초왕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부인은 포로가 된 남편을 만나 '죽어도 이 몸을 타인에게 바칠 수 없다.'고 하고선 시를 짓고는 자결했고, 남편도 따라서 자결했다고 전해집니다. 다른 한 유래는 대부(大扶)가 수레를 타고 가는 것을 옛 애인이 보고 부른 노래에서 연유한 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穀則異室 死則同穴 (살아서는 집이 다르나, 죽어서는 무덤을 같이 하리라.)  - 시경(詩經) –

 

마음이 훈훈합니다. 부부사이에 이러한 사랑을 나눌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에서 늙어 가는 일은 쉽지만, ‘함께늙어 가는 일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늙어감을 경시하는 사회풍조와 이혼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해로동혈이 그저 골동품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신앙과 인생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해 보지만, 사실 그것이 마음 먹은 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신적인 영역이라 쉽지 않고, 인생은 복잡한 피조물의 영역이라 쉽지 않습니다. 사실상 신적인 영역과 피조물의 영역이 함께 어울린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모순이고 부조리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신앙과 인생()을 일치시키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신앙이 부족해서, 의롭지 못해서가 아니라, 신앙과 인생()의 일치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신앙과 인생의 일치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과 인생의 일치를 몸소 보여주신 분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사시면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시며 신앙과 인생이 어떻게 일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신앙과 인생이 일치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부활이라는 또 다른 현실이 열렸습니다. 신앙과 인생을 일치시키는 삶 너머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신적인 영역, 즉 부활, 영원한 생명, 새창조의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겁니다.

 

이 땅에서 해로동혈하지 못하고 살았다고 자책할 필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함께 늙어가고, 같은 무덤에 묻힌다는 것은 오히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내려진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는 한 남자(한 여자)해로동혈하지 못했다고 하는 자책에 매이지 말고, 우리의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와 해로동혈에 힘쓰는 것이 보다 더 현실적인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 받는 의식을 통해서 해로동혈을 약속합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죽어 예수 그리스도가 묻혔던 그곳에 묻혔다가 다시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살아나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살겠다고 인침 받는 것이 세례이니, 이것만큼 확실한 해로동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례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해로동혈이 우리 육신의 부부사이의 해로동혈또한 가능하게 해 줄 것으로 믿습니다. 인생이 신앙을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인생을 이끌어 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젊어서 한 몸이 된 배우자와 해로동혈하는 은혜를 누리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고사성어와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사천리(一瀉千里)  (2) 2013.02.08
명경지수(明鏡止水)  (0) 2013.02.02
양금택목(良禽擇木)  (0) 2012.12.31
양약고구(良藥苦口)  (0) 2012.12.24
천재일우(千載一遇)  (0) 2012.12.19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 7. 05:37

2013 1 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2:1-12

제목: 다른 길

 

2013, 새로운 해가 밝았습니다. 기대도 되고, 긴장도 되는 해 입니다. 2013년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어떤 은총을 허락하실까 기대도 되는 반면에, 그 은총이 성취되기까지 어떠한 영적 싸움을 벌여야 할까를 생각하면 긴장되기도 합니다. 공동체란 그 운명을 같이 하는 집단을 일컫는 말입니다. 컬럼버스감리교회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신앙 때문에 모였다는 뜻이 들어 있고, 그 운명을 같이 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신앙 때문이 아니라 다른 뜻 때문에 모였다면 이 공동체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미이고, 운명을 같이 하지 않고 혼자만 살겠다고 하면 그것 또한 이 공동체에 적합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운명을 같이 하는 공동체입니다. 운명이 같다는 공동체 의식이 없으면, 우리는 온전히 지어져 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운명이 같다는 것은 우리의 운명이 한 분에게로 모아진다는 뜻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운명을 건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탁하신 명령을 수행하는 일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은, 예수 잘 믿어서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아닙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누구인지 잘 아는 것이고, 그분에게 우리의 삶을 거는 것이고,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달력을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달력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달력은 2013년 첫 번째 일요일이지만, 그리스도의 달력은 오늘이 주현절입니다.

 

주현절이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나신 날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선포되는 절기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첫 번째는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경배한 것을 통해서,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통해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동방 박사가 아기 예수를 경배한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헤롯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헤롯이 등장하는데, 헤롯 왕가가 팔레스타인 지방을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의 헤롯은 헤롯 왕가를 시작한 대헤롯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에돔 사람인데, 그 당시 세계를 다스리던 로마의 황제로부터 팔레스타인 지방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얻어서 그곳의 분봉왕으로 왕가를 이루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에돔 사람인데다가, 로마 황제의 간섭을 받고 있던 터라, 언제나 자리가 불안했습니다.

 

삶이 불안한 사람의 특징은 포악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굉장히 포악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을 건축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세 번째 지어진 성전을 일컬어 헤롯 성전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 성전은 솔로몬 때 지은 것으로 솔로몬 이라고 하고, 두 번째 성전은 바벨론 포로기 때 귀환해서 지은 것으로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전 신앙이었기 때문에, 성전을 웅장하게 지어줌으로써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46년 동안, 정말로 웅장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그것이 완공된 후에, 6년만에 로마에 의해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파괴됩니다만, 엄청난 역사였음에는 틀림 없습니다.

 

헤롯은 정치적으로 교묘하고, 성정이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잘 몰랐던 동방 박사 세 사람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님을 영접하고자 왕도인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동방 박사는 Dr. East가 아니라, ‘마기라고 불리는 점성술사들입니다. 요즘에는 과학시대이기 때문에 점성술을 신봉하지 않습니다만, 그 당시 고대사회에서는 점성술이 지금의 과학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과학적 근거를 갖고 삶을 꾸려 나가는 요즘 사람들처럼, 옛날 사람들은 점성술에 근거해서 삶을 꾸려나갔습니다.

 

성경에서 마고스라고 번역된 이들은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왕들에게 조언을 하던 학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삶과 세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연구한 사람들이고, 세상의 운명에 대해서 늘 관찰하고 연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 이들은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지요.

 

사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가 세 명이었다고 통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성경에는 그들의 신분이나 명수를 언급한 곳이 없습니다. 다만, 황금, 유향, 몰약의 세 예물을 근거로 해서, 세 명이라고 추산할 뿐입니다. , 두 명이 그 예물을 드렸을 수도 있고, 더 많은 동방 박사가 와서 그냥 세 가지의 상징적인 예물을 드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유대인의 왕도인 예루살렘에 동방 박사가 찾아와서, 헤롯 왕에게 묻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이 말을 들은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합니다. 정권이 교체될 때는 언제나 소동이 일어납니다. 요즘에 우리는 좀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전쟁과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이 소동한 이유는 바로 왕권이 교체될 때마다 이어지는 전쟁과 혼란의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더 나가서, 기존의 옛 질서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 앞에서 언제나 소동하기 마련입니다. 이 소동은 장차 예수님에게 일어날 수난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옛 질서에서 살던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만나면, 그의 인생에 일대 소동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예수님 만나서 평안하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그 평안은 폭풍 가운데의 평안이지, 바람 한 점 없는 평안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예수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실 겁니다.

 

헤롯의 심리를 보여주고 있는 단어가, 4절의 물으니라는 단어입니다. 우리 나라 말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원어에는 에퓐싸네토라는 말인데, 이것은 과거의 반복적인 동작을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헤롯은 한 번만이 아니고, 반복해서,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가운데,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한 성경의 예언을 물었던 겁니다.

 

그런데, 성경의 예언은 이들의 기대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장악하고 있는 예루살렘이 아닌, 이름 없는 작은 고을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고 예언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박사들의 기대와도 다르고, 유대인들의 기대와도 다른 메시아이신 것이죠.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미가 5:2) 말씀의 인용.

 

사실, 동방 박사들은 자신들의 상식대로 왕의 도성에 와서 왕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된 이들은 자신의 상식을 버리고, 별을 따라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갑니다.

 

별을 따라 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의 인생관에 큰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우리의 상식과 이 세상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입니다. 상식과 세상의 가르침이 우리를 너무도 압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일 여력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상식을 따라 예루살렘을 찾았던 동방 박사들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헤롯은 이들을 가만히 불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를 만나면 자신에게 기별을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신도 가서 그를 경배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짓말이었습니다. 자신의 정권에 늘 불안해 했던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님이 어디에 있는 지 아는 순간, 아기뿐만이 아니라,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동방 박사들까지 모두 죽여 없애버리기로 마음 먹었던 것입니다.

 

헤롯이 동방 박사에게 아기 예수 나신 곳을 기별해 달라고 부탁할 때, 그냥 말로만 부탁했겠습니까? 분명,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많은 선물을 내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방 박사들은 거기에 혹하지 않고, 아기 예수를 만난 뒤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경배 한 뒤, 요셉처럼 박사들도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고이들은 순종해서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박사들은 헤롯의 지시를 따르는 길이 아닌,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이 바로 자신들도 안전하고 아기 예수님도 안전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한 자는 그 생활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른 길로 갑니다. 그 길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의 길, 생명과 진리의 길입니다. 그 길에 진정한 안전과 행복, 그리고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동방 박사들이 별을 보고 따라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헤롯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만나야 할 분을 만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라 간다면, 우리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2013년도 새로운 해가 밝았습니다. 새해가 밝으면 우리는 여러 가지 다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 다짐이 무엇에 근거된 다짐인지 다시 한 번 되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헤롯이 지시한 길을 따라가고자 한 다짐인지, 아니면, 별을 보고 따라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받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한 다짐인지 꼭 돌아보아야 합니다.

 

해가 지나면, 나이를 한 살 더 먹기 때문에 육체는 후퇴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더 가까이 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발짝 더 다가온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기 위해서 이 세상의 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다른 길을 걸어가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과 말씀  (0) 2013.02.19
십자가의 도로 해결하라  (0) 2013.01.15
맡겨야 기쁘다  (0) 2012.12.18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0) 2012.11.19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  (0) 2012.11.12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12. 31. 07:25

양금택목(良禽擇木):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 / 현명한 사람은 자기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을 가려서 섬긴다

 

춘추 시대, 유가(儒家)의 비조(鼻祖)인 공자가 치국(治國)의 도를 유세(遊說)하기 위해 위()나라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공문자(孔文子)가 대숙질(大叔疾)을 공격하기 위해 공자에게 상의하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사 지내는 일에 대해선 배운 일이 있습니다만, 전쟁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자리를 물러 나온 공자는 제자에게 서둘러 수레에 말을 매라고 일렀습니다. 제자가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한시라도 빨리 위나라를 떠나야겠다'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良禽擇木]고 했다. 마찬가지로 신하가 되려면 마땅히 훌륭한 군주를 가려서 섬겨야 하느니라." 이 말을 전해들은 공문자는 황급히 객사로 달려와 공자의 귀국을 만류했습니다. "나는 결코 딴 뜻이 있어서 물었던 것이 아니오. 다만 위나라의 대사에 대해 물어 보고 싶었을 뿐이니 언짢게 생각 말고 좀더 머물도록 하시오." 공자는 기분이 풀리어 위나라에 머물려고 했으나 때마침 노()나라에서 사람이 찾아와 귀국을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고국을 떠난 지 오래인 공자는 노구(老軀)에 스미는 고향 생각에 사로잡혀 서둘러 노나라로 돌아갔습니다. - 춘추좌씨전

 

옛말에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과 골라 사귀고,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과 일을 도모합니다.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는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이것 또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죄성(罪性)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다릅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8). 여기서 우리가 죄인 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도 맞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하나님을 오히려 미워했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오히려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이라는 것을 그 당시 사람들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아본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그들을 따르던 몇몇 제자들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드디어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신들을 사랑하시는지! 그래서 그때부터 제자들은 그리스도라고 하는 나무에 둥지를 틉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라고 하는 나무에 둥지를 트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일이라고 힘껏 전합니다.

 

우리의 재능을 진심으로 알아주는 분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재능을 알아준다기 보다, 그 재능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로움을 위해서 우리들을 이용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놓으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도 애절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디에 둥지를 틀어야 할지 분명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셔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그리스도는 우리 존재의 둥지를 틀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현명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고사성어와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경지수(明鏡止水)  (0) 2013.02.02
해로동혈(偕老同穴)  (1) 2013.01.11
양약고구(良藥苦口)  (0) 2012.12.24
천재일우(千載一遇)  (0) 2012.12.19
이목지신(移木之信)  (0) 2012.12.16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12. 24. 05:36

양약고구(良藥苦口): 좋은 약은 입에 쓰다 / 바른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유익한 것이다

 

()나라의 시황제가 죽자 천하는 크게 동요해서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그 중에 유방(劉邦)과 항우(項羽)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방이 항우보다 앞서 진나라의 도읍 함양에 입성하게 되어 3세 황제 자영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궁중에는 온갖 재보와 아름다운 궁녀들이 잔뜩 있었습니다. 유방은 마음이 동하여 그대로 궁중에 머물려고 했으나 장군 번쾌가 아직 천하가 통일되지 않았으니 다른 곳에 물러가 진을 치라고 충고했습니다. 하지만 유방이 듣지 않자 이번에는 장량이 간했습니다. “화려한 아방궁에 눈이 멀어서 진나라의 폭정을 본받으려 한다면 하나라의 걸왕이나 은나라의 주왕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고,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습니다. 번쾌의 충언을 들으시옵소서.” 이 말을 들은 유방은 불현듯 깨닫게 되어 왕궁을 물러나 패상(覇上)에 진을 쳤습니다. 이로인해 유방이 민심을 크게 얻게 됨은 물론입니다. -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

 

우리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말은 복음입니다. 바로 이 말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1:15). 이것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소식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이 말 듣기를 거부합니다. 아마도 회개라는 말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에 대한 오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는 묵시사상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묵시사상에 의하면 종말이란 곧 세상의 멸망인데 이를 심판의 개념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표현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싫어합니다. 자신들이 심판 당할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종말론이 무엇인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기독교 종말론은 묵시사상에서 말하는 그러한 심판 개념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구원을 의미하지 심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심판의 의미가 담겨있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거기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지옥의 불과 같이 무시무시한 심판의 개념이 들어가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새롭게하시는 분이지, 지옥 불에 태워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싫어한다는 예가 단적으로 들어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며 하나님 나라 운동을 벌이신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운동에 참여하고 그 운동을 통해 회개의 역사를 삶 가운데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에 적대적인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불의한 자들은 의로운 하나님 나라가 입에 쓰게 느껴지기 때문에 잔인하게 뱉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죄악이고 추함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전하신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보다 바른 말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 세상이 직면하고 있는 최고의 현실이요 진리입니다. 약이 입에 쓴 이유는 그 몸을 병()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귀에 거슬리는 이유는 존재를 불의()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이 말씀에 의해서 치유를 받을 수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9:12).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은 불의 가운데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더 없이 기쁜 소식입니다. 그 나라의 임재 덕분에 우리는 이제 의로운 자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사성어와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로동혈(偕老同穴)  (1) 2013.01.11
양금택목(良禽擇木)  (0) 2012.12.31
천재일우(千載一遇)  (0) 2012.12.19
이목지신(移木之信)  (0) 2012.12.16
지자요수 인자요산 (智者樂水 仁者樂山)  (0) 2012.12.07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12. 19. 03:33

천재일우(千載一遇): 년에 만날 있는 기회 /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를 이르는

 

동진(東晉)의 학자 원굉(袁宏)은 삼국시대의 탁월한 신하 20명의 업적을 찬양하는 글을 썼는데, 그 중 위()나라의 순문약(荀文若)을 찬양한 글에서 '명마를 가릴 줄 아는 백락(伯樂)을 만나지 못하면 천 년이 지나도 천리마[] 한 필을 찾아내지 못한다 [夫未遇伯樂則 千載無一驥]'고 적고, 어진 임금과 뛰어난 신하의 만남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만 년에 한 번의 기회는 이 세상의 통칙이며 [夫萬歲一期 有生之通途(부만세일기 유생지통도)] 천 년에 한 번의 만남은 현군과 명신의 진귀한 해후다 [千載一遇, 賢智之嘉會(천재일우 현지지가회)]. - 문선(文選) 원굉(袁宏) 삼국명신서찬(三國名臣序贊) –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서는 천 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용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천 년에 한 번 온다는 뜻입니다. 여름만 되면 납량특집 단골 주제로 등장하는 구미호도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천 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도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천 년에 한 번 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전설을 들으면, 이무기도 구미호도 무작정 천 년을 기다린다고 용이 되거나 인간이 되는 듯싶지 않습니다. 그들의 소망과는 달리, 또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천 년을 기다려온 바로 그 기회의 날에 스스로 다스릴 수 없는 일이 일어나서 그 기회를 놓쳐 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한 낱 미물에 불과한 이무기이고 구미호이지만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놓여버린 천 년 만에 온 그 기회를 또 얻기 위해서 또 다른 천 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 세월이 녹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한 맺힌 세월을 보내야 합니다.

 

기회의 뒤통수에는 머리카락이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기회는 지나가고 나면 그만이라는 뜻입니다. 기회가 지나고 난 뒤에 아무리 울어도 소용 없는 법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는 그만큼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뜻이고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머뭇거리거나 고민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라는 지도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출애굽을 감행합니다. 이들은 애굽의 압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천재일우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서둘러 모세를 따라 애굽을 탈출합니다. 그 탈출할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재현하는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그래서 이 날 유대인들은 지팡이를 지고 배낭을 메고 서서, 급하게 먹을 것을 챙기느라 누룩을 넣지 못한 빵을 손에 쥐어 들고 먹는 시늉을 합니다. 출애굽 사건이 그만큼 급박하게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급박한 상황의 절정이 누룩을 넣지 않는 빵에서 나타납니다. 누룩을 넣어 빵을 부풀릴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지요. 이 정도로 긴박하게 천재일우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는 먹을 것조차도 제대로 챙길 수 없습니다. 기회를 놓치고 나면 먹는 것도 먹는 것 같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이러한 긴박함이 전해지는 단락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배와 그물, 그리고 가족들을 내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좀처럼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생계와 가족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을까 말이죠. 그런데 복음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제자들을 부르시는 정황은 예수님께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1:15). 라는 복음을 선포하신 뒤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를 보여줍니다.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물쭈물 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천재일우입니다. 하나님 나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생계도 가족도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오직 그 나라는 회개(메타노이아) 와 믿음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데, 회개와 믿음이란 온 존재를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고 그것을 향해 여는 행위입니다.

 

어진 임금(현군)과 뛰어난 신하(명신)이 만나면 태평성대가 이루어지듯이, 하나님 나라와 참믿음의 사람이 만나면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새창조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고 원하는 구원입니다. 신앙이란 천재일우같은 사건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총과 우리 인간의 응답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신비로운 구원사건입니다. 그러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놀라운 존재입니까? 신앙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고사성어와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금택목(良禽擇木)  (0) 2012.12.31
양약고구(良藥苦口)  (0) 2012.12.24
이목지신(移木之信)  (0) 2012.12.16
지자요수 인자요산 (智者樂水 仁者樂山)  (0) 2012.12.07
개과천선(改過遷善)  (0) 2012.11.26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2. 18. 01:41

2012121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시편 46

제목: 맡겨야 기쁘다

 

옛날 한 수도사가 올리브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 연약한 나무의 뿌리에 물이 필요하오니 단비를 내려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단비를 내려주셨습니다. 그 수도사는 또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이 나무는 태양 빛이 필요합니다. 기도하오니 햇빛을 내려 주옵소서.” 그랬더니 검은 구름에 덮여 있던 해가 나왔습니다. 이번에 그는 또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이 나무가 단단해지기 위해서 서리가 필요합니다.” 그 작은 나무에 서리가 앉아 번쩍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저녁에 그 나무는 죽어버렸습니다.

 

그 수도사는 동료 수도사의 방을 찾아가 그의 이러한 경험담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동료 수도사가 말합니다. “친구여, 나도 역시 작은 나무 한 그루를 심어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아주 잘 자랍니다. 나는 나무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 나무를 만드신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분은 나보다 나무가 필요한 것과 그 때를 정확히 아시니까요. 그러므로 나는 내 방식이나 어떤 생각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기도하지요. ‘주여! 이 나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시옵소서. 강풍이든, 햇빛이든, 또한 바람이든, 비나 서리든 주님께서 때를 따라 주시옵소서. 주님께서는 이것을 만드셨고, 그리고 잘 아시나이다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내 생각, 내 주장, 내 원함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원하심 앞에 내 생각과 주장을 맞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나를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에도, 원치 않는 환란 가운데서라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해가 보이지 않는 캄캄한 한밤중에도 새벽이 올 것을 기대하며 서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어려움과 고통의 자리에서도 나를 신뢰할 수 있겠느냐?”

 

오늘 본문 말씀은확신과 신뢰라는 주제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통치하심을 확신하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이제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 한 가지, 그것은 신뢰의 삶입니다. 이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고라 자손이 불렀던 찬양입니다. 성전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지만, 이 노래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임재에 대한 강한 확신이 담겨져 있습니다. 1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분으로 강조합니다. 이처럼 예배드리기 위해 성전에 오르는 예배자들은 그들의 삶의 자리가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하는 강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2절과 3절에서는 성전에 오르는 예배자들의 삶의 자리가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보여줍니다.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솟아나고, 산이 요동하는삶의 자리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현 주소입니다.

 

미국에는 소셜 시큐러티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말로, 사회안전보장제도입니다. 그리고 미국은 보험제도가 세상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입니다. 별의 별 보험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회안전보장제도나 보험이 정말 우리를 보호합니까? 그것들이 있어서 여러분의 삶은 평안하고 안정되십니까? 사실, 사회안전보장제도나 보험은 삶의 문제를 모두 돈으로 해결하려는 발상입니다. 그런데, 사회안전보장제도가 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기쁜 것은 아니고, 생명보험을 들어놓았다고 해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고, 암보험 들어놓았다고 해서 암에 안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양, 하나님 외에 여러 가지 의지할 것들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것은 모두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것은 모두 인간이 가지고 있는불안이라는 요소를 통해서 내 주머니를 털어내고자 하는 상업술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 시편을 노래했던 고라 자손, 그 때는 사회보장제도도 없었고, 보험제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삶의 곤고함과 탄식이 저절로 터져나오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한 삶의 자리에서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이들은 이야기 합니다. “가만히 있으라!”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집 값이 떨어지든지, 기름 값이 오르든지, 지진이 일어나든지, 식량값이 오르든지,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아이구 답답해! 얼마나 답답한 말씀입니까? 이렇게 힘든 때에, 굶어죽지 않으려면 발빠르게 움직여야지, 가만히 있으라니, 얼마나 답답한 말씀입니까?

 

이것은 홍해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던 말씀입니다.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도록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데, 가만히 서 있으라고 말씀하시다니 이 얼마나 미련한 방책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답답하게 여겼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뢰하는 사람들은 손을 들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하나님 믿다가 죽고 말겠네. 그러니 내가 해야겠네!

 

우리는 살면서 걱정 근심합니다.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문제 없으면 걱정 근심할 필요도 없을 텐데, 우리네 인생은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걱정 근심하는 이유는 그 문제를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어려운 환경에 서 있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견고하게 서는 것을 볼 때에 반드시 문제가 우리를 근심 걱정하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염려하다, 근심걱정하다라는 말의 헬라어는메림나오입니다. 이 말의 뜻은마음이 나누어진다입니다. 염려가 왜 생기는가? 근심 걱정이 왜 생기는가? 마음이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의 마음이 나누어지기 때문에 염려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신뢰하는 것입니다. 맡기는 것입니다. 어떤 큰 문제가 있으면 어른은 염려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잠만 잘 잡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100% 믿고 맡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고 권고합니다.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맡기게 됩니다. 가장 큰 은혜 중 하나가 바로잘 맡기는 은혜입니다. 상황은 여전히 어렵지만 염려가 안 되는 것, 그것은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제가 사우나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미국에는 사우나가 없는 것이 저한테는 가장 큰 불편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우나에 가면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참 은혜로운 문구가 출입문에 붙어 있습니다. “귀중품은 주인에게 맡기십시오. 맡기지 않은 것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 문구를 보고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 귀중품도 보관해 주고 참 감사하네. 둘째, 주인을 어떻게 믿냐?

 

마음이 강팍한 사람은 절대로 귀중품을 맡기지 않습니다. 마음이 강팍한 사람은 절대로너희는 가만히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강팍한 심령은 절대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도가 사상의 대가인, 노자라는 분이 있습니다. 노자도 하늘에 뚝떨어진 사람이 아니라, 스승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노자의 스승이 나이가 들어 이제 제자들에게 마지막 교훈을 주고 있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경청하던 젊은 노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곁에는 많은 제제들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릅니다. 선생님 곁에 있기만 해도 행복했습니다. 우리가 아픔이 있었지만, 선생님을 만나면 아픔이 치유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갈등이 있었지만 선생님과 대화를 하다 보면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걸 느꼈습니다. 그 비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 때 노자의 스승이 노자의 손을 끌어다가 입속에 집어놓으면서 말했습니다. “얘야, 딱딱한 이가 있느냐?” “선생님,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말랑말랑한 잇몸은 있느냐?” “, 잇몸은 그대로 있습니다.” “말랑말랑한 혓바닥은 그대로냐?” “, 그대로 있습니다.” “너도 그렇게 살아라! 남을 찌르며 딱딱하게 살지 말고 부드럽게 살아라. 부드럽게 사는 길이 이기는 길이다.

 

가만히 서 있는다는 것은 부드러운 심령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부드러운 심령은 서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 앞에서 딱딱해지면 우리는 넘어집니다. 말씀 앞에서 강퍅해지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계획이 너무 뚜렷하고, 나의 좋고 싫음이 너무 뚜렷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이 너무 뚜렷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삶의 여러 가지 문제들 가운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근심과 걱정만 늘어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시는 처방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그리고 너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라!”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 외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많아서 문제입니다. 그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아갈 때에, 아무것도 없어서 의지할 것이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그 시절에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 외에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생생하게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하나님 외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하나님만 의지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을 경험했지만,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했을 때 그들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귀중품은 주인에게 맡기십시오. 맡기지 않은 것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목욕탕 주인과 같은 믿을 수 없는 주인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만드신,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내 삶의 주인이십니까? 목욕탕 주인도, 맡긴 물건에 대해서는 책임을 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내 삶의 주인이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좀 맡겨 보십시오. 맡겨야지 책임을 져 주실 것 아닙니까? 맡기지도 않아 놓고, 물건 잃어버린 다음에 주인에게 따져봐야 소용 없습니다. 삶의 문제 하나 하나를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좀 맡겨 보십시오. 맡기시고,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신 것을 체험해 보십시오. 그래야 우리의 삶이 기쁠 수 있습니다. 맡기지 못하면 걱정되고 불안해서 기쁨이 빼앗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모든 삶을 온전히 맡기는 자는 사나운 폭풍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라는 인생의 사나운 폭풍 가운데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랬더니, 부활의 기쁨을 맛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의 삶은 바로 이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보내면서, 기쁨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이 풍진 세상에서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꼭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모든 영혼을 하나님께 맡겨야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삶 가운데 있는 문제를 바로 이 시간 하나님께 맡기고,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기다리며, 기뻐하십시오. 아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란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됨 알지어다

열방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란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사랑합니다 내 아버지 찬양합니다 내 온맘 다하여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가의 도로 해결하라  (0) 2013.01.15
다른 길  (0) 2013.01.07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0) 2012.11.19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  (0) 2012.11.12
신비를 체험하라  (0) 2012.11.07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12. 16. 03:17

이목지신(移木之信): 위정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들을 믿게 한다는 / 약속을 실행한다는

 

()나라 효공(孝公) '상앙'이란 명재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라의 공족(公族) 출신으로 법률에 밝았는데 특히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부국 강병책을 훗날 시황제의 천하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정치가로 유명했습니다. 번은 상앙이 법률을 제정해 놓고도 즉시 공포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믿어 줄지 그것이 의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앙은 가지 계책을 내어 남문에 길이 3(三丈: 9m) 이르는 나무를 세워 놓고 이렇게 붙였습니다. ' 나무를 북문으로 옮겨 놓는 사람에게는 십금(十金) 주리라.' 그러나 아무도 옮기려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십 (五十金) 주겠다고 붙였더니 이번에는 옮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상앙은 즉시 약속대로 오십 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법령을 공포하자 백성들은 조정을 믿고 법을 지켰다고 합니다. - 사기(史記) 상군열전(商君列專) -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옮기신 나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따라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늘에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자손을 번성케 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 때였습니다. 75세도 적은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자손을 그렇게 번창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참으로 믿기 힘든 약속이었습니다. 75세에 자손을 번창시켜도 시원치 않을 판에,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도록 자손이 없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아브라함은 부인의 몸종을 통해 자손을 이어보려 시도했으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에 괜히 험한 꼴만 당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순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셨습니다.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들조차 번제물로 바치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참으로 참기 힘든 순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을 힘을 다해 순종했습니다. 그제서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대신 어린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옮기신 궁극적인 나무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나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셨습니다. 언덕에 굳건하게 나무를 박고 거기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야말로 십자가에 뼈를 묻으신 것이지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모든 만물들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님처럼 모든 만물이 부활하게 것을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어떠한 일을 행하실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못미더워 아우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위의 고사성어에서 걸린 오십금의 상금과는 비교도 정도로 귀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귀한 상금을 걸고 하나님의 약속을 못미더워 합니다. 아니,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약속의 말씀을 힘써 전하는 수밖에는 없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신 약속을 지키실 겁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속성상 그러실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무엇도 하나님보다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 스스로 존재하시며 스스로 이루시는 분입니다. 어떤 것에도 방해 받거나 영향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고사성어와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약고구(良藥苦口)  (0) 2012.12.24
천재일우(千載一遇)  (0) 2012.12.19
지자요수 인자요산 (智者樂水 仁者樂山)  (0) 2012.12.07
개과천선(改過遷善)  (0) 2012.11.26
실사구시(實事求是)  (1) 2012.11.18
Posted by 장준식

예기치 못한 기쁨

 

마가복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람’이 전체적인 흐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와 생활하는 동안 놀람의 경험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놀람이 무엇을 가져다 주는가에 대한 관찰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예기치 못한 일을 겪었을 때 놀랍니다. 예기치 못한 일은 두 가지를 결과로 가져다 줍니다. 하나는 아픔이고, 다른 하나는 기쁨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은 예기치 못한 일을 겪을 때마다 놀랐고, 그 놀라움은 기쁨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놀람과, 그 놀람에서 생겨나는 기쁨으로 가득 찬 책입니다.

 

교회력의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기치 못한 때, 예기치 못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당시 아무도 십자가에 달린 자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던 그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놀람 중의 놀람이었고, 기쁨 중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놀람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예기치 못한 때,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놀라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놀라지 못하는 신앙은 긴장감이 없는 신앙이요, 마음이 곤고한 자, 굳은 자는 놀람을 놀람으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자에게는 기쁨도 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나는 얼마나 기쁨 가운데 살아갑니까? 혹시 기쁘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 놀람이 없다는 것이고, 놀람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나의 마음이 곤고하고 굳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역사하실 때, 우리는 놀라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대가 갖고 있지 않은 기쁨을 얻으려면 즐겁지 않은 길도 기꺼이 걸어야 한다.

 

예수님은 즐겁지 않은 길, 골고다 언덕 길을 걸으셨기 때문에 기쁨 중의 기쁨인 부활의 기쁨을 맛보셨고, 그리고 그 기쁨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었습니다. 즐겁지 않은 길도 기꺼이 걸으려는 그 마음, 바로 그 마음이 우리 신앙인의 마음이요, 그 마음에 놀람의 경험이 있을 것이요,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져보지 못했던 기쁨을 날마다 얻게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이 우리의 삶을 복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예기치 못한 기쁨을 언제나 주시는 우리 주님을 늘 갈망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희망이 절망에게  (1) 2013.04.24
그리스도인의 삶 – 역설적인 삶  (0) 2013.04.08
아가페 사랑 묵상  (0) 2012.12.15
그리스도인의 희망  (0) 2012.12.13
긍정의 밥  (0) 2012.12.08
Posted by 장준식

아가페 사랑 묵상

 

우리나라 말에는 사랑에 대한 언어가 별로 다양하지 못하지만, 옛날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랑에 대한 언어를 몇 가지로 구분해서 사용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불리는 C. S. 루이스(Lewis) 의 책 네 가지 사랑을 보면 그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 책에서 구분하고 있는 네 가지의 사랑은 스톨게, 필리아, 에로스, 그리고 아가페 입니다. 우리나라 말 번역본은 그것을 각각 애정, 우정, 에로스, 그리고 자비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선 스톨게(애정)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나타낼 때 씁니다. 반대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을 나타낼 때도 씁니다. 두 번째로 필리아는 흔히 친구 간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는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C. S루이스는 스톨게(애정)와 에로스와 관련해서 필리아(우정)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에로스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아무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스톨게(애정)이 없었다면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양육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필리아(우정) 없이도 우리는 살고 번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리아(우정)는 왜 필요한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진리를 공유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 에로스는 흔히 남녀 간의 사랑을 나타낼 때 씁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에로스에 대한 얇은 이해에 불과합니다. 에로스의 깊은 뜻은 누군가 또는 어딘가에 빠져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에로스는 언제나 다른 무엇인가에 지배를 받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만 섬길 것을 요구하는 기독교 교리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위험한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아가페(자비)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씁니다. 위의 세 가지 사랑과 이 아가페 사랑은 엄청난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위의 세 가지 사랑은 기본적으로 나와 같은 것, 나와 비슷한 것, 그래도 사랑할 만 한 것을 사랑하는 것인데 반해, 아가페의 사랑은 나와 전혀 다른 것,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아가페의 사랑에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력의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의 주제가 바로 사랑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네 가지의 사랑을 모두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 들려오는 뉴스를 보면, 부모 자식 간의 스톨게 사랑도, 친구 간의 필리아 사랑도, 어딘가에 빠져드는 에로스 사랑도, 그리고 원수까지도 받아들이게 하는 아가페 사랑도 그 순수함과 진실성을 모두 잃어버린 듯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묵상은 아가페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죄로 인해 원수 된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의 온갖 사랑은 각자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낼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인의 삶 – 역설적인 삶  (0) 2013.04.08
예기치 못한 기쁨  (0) 2012.12.15
그리스도인의 희망  (0) 2012.12.13
긍정의 밥  (0) 2012.12.08
사회법정과 천국법정  (0) 2012.11.30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