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702건

  1. 2012.11.07 노란과자와 빨간 과자
  2. 2012.11.07 병신처럼 살아도 괜찮어
  3. 2012.11.07 피로사회
  4. 2012.11.07 신비를 체험하라
  5. 2012.10.31
  6. 2012.10.31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5
  7. 2012.10.31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4
  8. 2012.10.31 어떤 크리스마스 이브
  9. 2012.10.31 유전에 대하여
  10. 2012.10.29 성령에 취하라
  11. 2012.10.25 불혹? 1
  12. 2012.10.25 남자의 기쁨 1
  13. 2012.10.25 홈리스
  14. 2012.10.25 창조는 발견이다
  15. 2012.10.22 신품(信品)이 중요합니다!
시(詩)2012. 11. 7. 05:46

노란 과자와 빨간 과자

 

노란 과자를 달라는 아이에게

기어코 빨간 과자를 먹인다

아이는 노란 눈물을 흘리고

어미는 빨간 심술을 부린다

노란 과자 먹는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어미는 왜 기어코 빨간 과자를 먹이는 것일까

노란 눈물을 흘리며 빨간 과자를 먹는 아이는

빨간 물감이 뇌에 번져가고

눈물로 쏟아내는 노란 물감은

상처가 되어 고름처럼 심장에 고여간다

이제 아이는 노란 과자를 먹고 싶어도

그래서 심장이 뛰어도

빨간 과자를 먹어야 한다는 뇌의 심술에

눈물을 머금고 복종한다

그렇게 아이는 커간다

그렇게 아이는 어른이 되어간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2  (0) 2012.11.07
한 사람을 위한 고독  (3) 2012.11.07
병신처럼 살아도 괜찮어  (0) 2012.11.07
피로사회  (0) 2012.11.07
  (0) 2012.10.31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1. 7. 05:45

병신처럼 살아도 괜찮어

 

병신자식이 효도한다는 옛말이 있어

 

내가 오늘 신문을 봤는디

한국이 급속하게 고령사회로 접어드는 바람에

노인문제가 가장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는 내용이여

 

요즘엔 그렇게 부모를 내다 버리는 사람이 많은가벼

특별히 치매노인이 많이 버려진다나벼

요양원에 버려진 어느 노인네는

딸자식이 자신을 여기에 버리고 갔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딸이 쥐어준 핸드폰만 부여잡고 산다는 기사를 봤어

 

병신자식이 효도한다는 옛말이 있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어?

 

잘난 자식은

지 잘난 거 자랑질 하러 다니느라 부모님 돌아볼 시간이 없는겨

잘난 자식은

너무 바빠서 부모님과 놀아드릴 시간이 없는겨

잘난 자식은

지가 혼자 큰 줄 아는겨

지가 아장아장 걸을 때 부모님이 손잡아 준거를 기억 못하는겨

지가 커갈 때 부모님이 함께 놀아준 것을 모르는겨

지는 지가 혼자 걷게 된 줄 아는겨

지는 지가 혼자 큰 줄 아는겨

 

병신자식이 효도한다는 옛말이 있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어?

 

병신자식은 자랑질 할 거리가 없어서 어디 돌아다닐 데도 마땅치 않은겨

병신자식은 세상이 무서워서 부모님 곁을 떠날 엄두도 못내는겨

세상은 이런 사람을 병신 쪼다라고 하지만

그거 알어?

그래도 부모님 아플 때 손잡아 주는 것은 병신자식인겨

부모님 돌아가실 때 임종 지키는 것은 병신자식인겨

돌아가시고 나서 부모님 그리워하며 눈물 흘리는 것도 병신자식인겨

 

잘난 자식은 잠깐 왔다 잠깐 보고 가지만

병신자식은 늙으신 부모님 그림자처럼 늘 곁에 있는겨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처럼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못된 말 하면 못쓰는겨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 내가 끝까지 책임지는거 당연하거 아녀?

이거 하나만 잘해도 인생은 성공인겨

나라를 구하면 뭘 하고

유명인사가 되어 칭송을 받으면 뭐 할겨

지 낳아주신 부모님 갔다 버리면서

지 낳아주신 부모님 심심해 죽게 만들면서

지 낳아주신 부모님 외로워 죽게 만들면서

 

너무 잘난 놈 되려고 하지 말어

잘난 놈 돼봤자 부모님만 외롭게 만드는겨

그냥 좀 병신처럼 살면 어뗘?

병신처럼 살아도 괜찮은겨

병신자식이 효도하는겨

그러면 인생 성공한거라니께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사람을 위한 고독  (3) 2012.11.07
노란과자와 빨간 과자  (0) 2012.11.07
피로사회  (0) 2012.11.07
  (0) 2012.10.31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5  (0) 2012.10.31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1. 7. 05:44

피로사회

 

내 안에 독수리가 한 마리 살고 있다

그 독수리는 매일 내 간을 쪼아 먹는다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이 이런 것이었을까?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였던 프로메테우스는

얼마나 피곤했을까?

 

어디 내 안에만 독수리가 살고 있으랴

현대인들은 애완동물로 강아지나 고양이를

가장 많이 키우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보이는 애완동물일 뿐

그들 마음 속에도 독수리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어떤 사람은 이 사회를 일컬어

피로사회라고 했겠는가!

피로하지 않으면 현대인이 아니고

피로하지 않으면 눈총 받는 이 사회

그야 말로 권태를 모르는 사회다

 

아무리 유명인이 TV 광고에 나와서

간 때문이야~’를 외치며 투쟁해 보지만

좀처럼

내 안에 그리고 그들 안에 살고 있는

독수리는 떠날 기미가 없다

 

오 프로메테우스여

그대의 친구 헤라클레스의 도움으로

그 지긋지긋한 코카서스 산중에서 탈출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지긋지긋한 피로사회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불을 내려주소서 우리를 도와주소서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란과자와 빨간 과자  (0) 2012.11.07
병신처럼 살아도 괜찮어  (0) 2012.11.07
  (0) 2012.10.31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5  (0) 2012.10.31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4  (0) 2012.10.31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1. 7. 05:41

2012 11 4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에베소서 5:22-33 (에베소서 8번째 시간)

제목: 신비를 체험하라

 

오늘 말씀은 언뜻 보면 가정생활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언뜻 보면, 결혼생활이 어떠해야 한다, 부부생활이 어떠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가정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볼 때 이 성경구절을 들어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사도 바울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남녀의 결혼생활의 관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면, 이 말씀을 들어서, 남편은 아내에게 성경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그랬잖아그렇게 윽박지르게 되고, 반대로 아내는 남편에게 당신은 그것만 보여, 여기에 보면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 그랬잖아’, 하면서 싸우게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구절 들이대면서 서로 싸우라고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아니겠죠.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신비를 체험하라라고 정해 봤는데,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신비를 체험하고 깨닫지 못하면 성경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전제는, 5 21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것이 기본 전제입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 바울이 근본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교회론입니다. 교회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말하고 싶어서 이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론을 온전히 알면 그리스도인의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신앙과 우리의 일상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우리의 일상생활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이 둘은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중간의 말씀처럼,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우리의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것은 아내와 합하여 육체가 하나가 되는 것처럼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을 구분하니까 이러한 신비를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결혼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끌어옵니다. 그러나 사실 조금 위험한 메타포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부관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 생활에서 천국 같은 행복을 경험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그렇지 못하고 가정 생활에서 지옥을 경험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사실, 지옥과 천국을 오르락 내리락 하죠.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이것을 그대로 적용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교회)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 부부의 관계라고 하면 납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수 관계가 이러한 거라면, 내가 가정 생활에서 지옥을 체험하고 있는데, 그러면 나는 예수 안 믿겠다고’, 나올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에 로마문화, 헬라문화의 현상을 설명 드렸듯이, 그 당시는 간통이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었고, 매춘을 부추기고,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 보기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그 당시 사회에서는 혁명적인 일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아예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부부의 관계고, 부부의 관계가 또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서로 지금 회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관계가 원래 이래야 한다!’ 부부관계가 그 당시 깨져 있으니까, 그 관계를 거룩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운 관계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부부의 관계로 설명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사람들이 잘 감을 못 잡고 있으니까 우리 일상생활의 부부관계를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두 가지 효과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는 교회론,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실제적인 예를 들어서 보여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당시 깨져 있는 부부관계를 성스럽고 아름다운 관계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 두 효과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고 있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25-27절 말씀이 교회론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구절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교회에게 주신 이유를 세 가지 듭니다. 첫 번째, ‘교회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주셨다고 합니다.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교회를 영광스러운 신부의 모습으로 세우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행위에 강조를 둔 것이고, 세 번째는 그 행위를 통해서 우리 교회가 실제적으로 도덕적으로 모습이 변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기오스: 거룩한 백성, 거룩하다, 흠이 없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교회론과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이기 위해서 계속해서 쓰고 있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세 가지의 메타포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머리와 몸의 관계, 2) 신랑과 신부의 관계, 3) 사람과 자기 자신의 몸의 관계

 

이 세 가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머리와 몸의 관계이고, 신랑과 신부의 관계이고, 사람과 자기 자신의 몸과 관계입니다. 사람과 자기 자신의 몸과 관계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자기 몸처럼 아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몸을 학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몸을 사랑합니다.

 

몸이 머리에 복종하듯이, 몸인 교회가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신랑신부의 관계, 이것이 핵심적인 것인데, 예수님하고 교회가 부부관계를 맺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 24절의 말씀을 끌어와서 사도 바울이 쓰는 것인데,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말씀인데, 이 모습처럼 신랑신부의 모습처럼 예수와 교회가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몸이 되었으니까, 사람이 자기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9절 말씀에 보면, ‘먹이신다, 자상하게 돌보신다는 표현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먹습니다. 이것은 본능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먹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자상하게 돌봅니다. 그런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먹이시고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신비를 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신비를 깨닫지 못하면, 오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 이 교회론을 들어서, 일상생활을 들어서 교회론을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 일상생활을 교회론의 신비로움이 가득찬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끌어올리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이 신비를 꼭 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머리고, 아내는 몸이고, 우리가 신랑이고 신부고, 우리가 한 몸이 되었으니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부의 관계다, 결혼생활의 관계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종합적으로 설명합니다. “너희들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고 표현합니다. 사랑에는 헌신과 돌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교회를 위해서 내어주셨는데, 그것이 헌신입니다. 그리고 먹이시고 자상히 보호하십니다. 그것이 돌봄입니다. 그리고 존경이라는 말, 아내는 남편을 존경해야 하는데,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섬기는 것처럼 그렇게 섬겨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잘못 생각하면, ‘내가 너에게 헌신하고 너를 돌봐줬으니까 너는 나에게 복종해야 해, 너는 나를 섬겨야 해이렇게 강요합니까?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내가 십자가에 달려서 너를 위해서 헌신했어. 그리고 내가 너를 맨날 먹이고 입히고 너를 세심하게 돌봐주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하고 있느니까 교회 너희들 나에게 복종하고 나를 섬겨야 해.’ 이렇게 합니까? 예수님을 이렇게 안 합니다. 반대로, 교회가 예수님 제가 당신 말씀에 복종하고 당신을 섬길 테니까 당신 나한테 헌신해 주시고 나를 돌봐주세요이렇게 합니까? 이렇게 하면 계약적인 관계고 인위적인 관계지, 이것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 자유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깨진 관계입니다. 굉장히 어색한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에게 헌신하고 아내와 가정을 돌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교회를 돌보신 것처럼 그냥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입니다. 이것이 좀 다가 오십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이게 뭐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비를 깨닫고 나면, ‘, 예수님께서 그렇게 헌신하시고 그렇게 돌보셨지. 아 그렇게 내가 가정에게 헌신하라고, 돌보라고 하시는 것이구나!’ 남편들이 이렇게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신비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면, 모든 것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열심을 다해서 헌신하고 자상하게 돌보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아내가 이 신비를 체험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 예수님하고 교회와의 관계가 이렇지. 머리와 몸이야. 한 몸을 이루어서 이렇게 하셨지. 그런 것처럼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섬김의 도를 펼치는 것처럼 가정에서도 그렇게 해야지.’ 이런 모습이 바로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고 가정을 사랑하고 섬기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돈많이 벌어다 주는 것, 맛 있는 거 해주는 것이 근거가 아닙니다. 돈 많이 안 벌어다 주면, 깡패처럼 굴것입니까? 요즘 결혼이 이런 형태로 돌아가니까, 가정이 힘들어집니다.) 이것은 누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헌신했으니까, 내가 돌봤으니까 이렇게 해’, 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심장, 창자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부터 체험해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참 자유, 자유의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결혼생활이라든지, 남편과 아내의 관계, 가정에서 자녀를 돌보고, 자녀가 부모를 섬기고 하는 것이, 이 믿음의 신비를,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면, 남편과 아내, 부모 자식 간에 이 신비로운 상태에서 서로 섬기는 것이 잘 될 수 없습니다. 이것만 잘 된다면 가정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현대인들의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가정이 깨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깨지고 있다는 것은 더 깊이 들어가면 신앙의 문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끝까지 들어가보면 결국 신앙의 문제로 갑니다. 신앙이 회복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을 깨닫지 못하니까, 자꾸 가정이 깨지는 것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 가정이 깨진 분들을 정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가정을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런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고, 신앙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하나님의 은총, 십자가의 신비,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한 몸을 이루셔서 우리를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그 신비로움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의 가정생활이 어떻게 변해야 하고, 아내를 어떻게 대하고, 남편을 어떻게 대하고, 자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온전하게 스스로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로서 성도님들에게 가장 전하고 싶은 말씀은 이러한 것입니다. 말씀의 신비를 체험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부분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깨어진 관계, 망가진 나의 육체, 깨어진 가정, 깨어진 나와의 관계, 이 모든 것들이 신앙의 문제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꾸 그 능력을 믿지 않고, 말씀의 능력을 자꾸 부정하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렇지, 모든 것이 다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그런 것을 부인합니다. 요즘 시대 사람들은 자꾸 부인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부인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도 제가 말씀 드렸듯이, 겉핥기로 보면 서로 싸움만 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신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화해하게 하는 것이고, 서로 깊이 사랑하게 하는 것이고, 서로 잘못했다고 하면서 용서하게 하는 것이 말씀이지, 말씀에 근거를 들어서 서로 싸우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늘 그렇습니다. 늘 안타까운 것이, 성경을 좀 안다, 읽었다고 하면, 괜히 성경을 들어서 싸울라 그러고, 성경을 근거 들어서 억지로 복종시키려고 합니다. 여태까지 남자들이 많이 그랬습니다. 성경을 들어서 어디 아내가 남편한테 그래 남편한테 복종해야지’, 하면서 여자들을 억압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즉 말씀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에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십시오. 신앙생활 하시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체험하십시오. 그러면 그 안에서 우리 삶의 모든 문제들을 풀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남편은 아내에게 이래야 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이래야 한다고 단순하게 지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어떤가, 그 신비로움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신비로움을 깨달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신비를 온전히 깨달으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거룩하고 아름답게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 삶에 문제가 있을 때, 가정에 문제가 있을 때, 내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신 그 신비로운 은혜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닌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를 자신의 몸처럼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신비를 체험하셔서, 삶의 모든 것이 거룩하고 아름답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설교를 음성으로 듣고 싶으시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columbus.onmam.com/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0) 2012.11.19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  (0) 2012.11.12
성령에 취하라  (0) 2012.10.29
언약시대 VS 언약성취시대  (0) 2012.08.13
사랑, 불가능한 가능  (1) 2012.05.14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0. 31. 07:08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을 믿고 싶다

이 땅 위에서 별처럼 살았던 사람도 별이 되고

이 땅 위에서 별 볼 일 없이 살았던 사람도 별이 되고

죽어서 모두 별이 되어 만난다면

그 잘난 교만도

그 못난 마음도

반짝반짝 허물어지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별처럼 살아도 상관 없고

별 볼일 없이 살아도 상관 없다

죽으면 모두 별이 되어 만날 텐데

뭐 그리 아등바등 살아갈 필요 있겠는가

교만을 탓할 것 없고

못난 마음도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그저 빛나는 대로 살면 될 뿐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을 믿고 싶다

반짝반짝 허물어질 내 마지막 날

두 눈을 꼬옥 감으면

어느새 저 높은 곳에 별이 되어 걸리는 인생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너도 나도 다 한결같이 하늘에 걸리어 반짝반짝 빛나는 인생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병신처럼 살아도 괜찮어  (0) 2012.11.07
피로사회  (0) 2012.11.07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5  (0) 2012.10.31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4  (0) 2012.10.31
어떤 크리스마스 이브  (0) 2012.10.31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0. 31. 07:02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5

 

아버지,

제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은

교회 봉고차에서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면서부터입니다.

계절은 기억 나지 않지만

중학교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말죽거리 도로변에 봉고차를 주차해 놓고

아버지는 잠시 일을 보러 가셨죠.

할 일이 없었던 저는

라디오를 돌리다가 클래식 채널에서 멈춰서

현악기의 선율에 매료되었습니다.

무슨 곡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 그 느낌만은 기억합니다.

클래식 선율이

잔잔한 마음에 파동을 일으킨 것이죠.

가슴이 뛰었습니다.

마구 뛰었습니다.

멜로디와 화음,

그리고 소리.

마음이 그것을 기억합니다.

그때부터 내 마음은

곱지 않은 것

조화롭지 않은 것

아름답지 않은 것에는

눈과 귀를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홀수보다는 짝수를 좋아하게 됐고

네모보다는 동그라미를 좋아하게 됐고

독창보다는 합창이 좋아졌습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베토벤 교향곡 9 5악장 합창이

마음 속에서 연주됩니다.

아버지는 저를 외롭지 않게 하셨던 또 제 옆에 계셨던 짝수요

세상을 둥글게 바라보게 하셨던 동그라미요

사람들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게 하셨던 합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제게

환희입니다.

아버지,

오늘도 아버지 생각에

마음이 환합니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로사회  (0) 2012.11.07
  (0) 2012.10.31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4  (0) 2012.10.31
어떤 크리스마스 이브  (0) 2012.10.31
유전에 대하여  (0) 2012.10.31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0. 31. 07:00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4

 

아버지,

저는 이제서야 서른 일곱 살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이 날이 오기를 기다렸는지요!

사실 기다렸다기 보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왔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정확하게

서른 일곱 살 먹은 나에게

왔습니다.

 

남들은 서른 일곱이 무슨 대수냐,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알고 계시죠?

제가 왜 이렇게

서른 일곱에 설레 하는지.

아버지도 서른 일곱 살 된 해에

둘째인 저를 낳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둘째인 저를 낳으셨지만,

저는 둘째 아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되어

아들은 제가 되어,

약속한 것처럼 만났습니다.

 

저는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저를 안을 때 어떤 느낌이셨을지,

저를 보고 있을 때 어떤 미소를 지으셨을지,

이른 새벽 어둠을 가르고 일터로 나설 때

자고 있는 아들들의 모습을 보고

어떤 마음이셨을지.

저는 비로서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둘째 아들이 태어난

제 나이 서른 일곱.

이제부터는 더 아버지가 되는 듯합니다.

저는 아버지로 삽니다.

아버지가 아버지로 살았던 것처럼.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0) 2012.10.31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5  (0) 2012.10.31
어떤 크리스마스 이브  (0) 2012.10.31
유전에 대하여  (0) 2012.10.31
불혹?  (1) 2012.10.25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0. 31. 06:57

어떤 크리스마스 이브

 

 

배고픔 때문에 일어났다.

냉장고 문을 열어 들어있는 음식을 꺼내

상함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코를 들이대는 것도 이젠 일상이다.

상하지 않은 것이 확인 된 음식들을 프라이팬에 모아 볶는다.

이름도 없는 볶음밥,

후딱 먹어치웠지만,

속이 편하지 않은 것이 어째 소화제를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나름대로 낭만을 생각했는데,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건 볶음밥처럼 이름 모를

한숨 덩어리들뿐이다.

담배처럼 한 숨만 피우다,

집안이 좀 시끄러우면 괜찮아 질까 하고

보지도 않을 TV를 켰다.

집안을 채우고 있는 한 숨 소리와 TV 소리를 헤치며

이리저리 집안을 서성이면서 할 일을 찾아보았다.

어질러져 있는 방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손을 대기 싫었다.

이런 날은 사람 냄새가 나야 하는데,

방을 깔끔하게 치우고 나면,

어쩐지 사람 냄새가 가실 것 같아서였다.

햇살만이 창문을 통해 나를 찾아왔을 뿐,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기 예수를 맞으러 온 세상이 해를 넘어가고 있을 때쯤,

하루 종일 울리지 않은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전화를 들어 내가 누른 건,

전화 번호가 아니라

볶음밥처럼 이름 모를

그리움이었다.

 

사람들은 잘 있는 것 같다.

소화제나 먹어야겠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5  (0) 2012.10.31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4  (0) 2012.10.31
유전에 대하여  (0) 2012.10.31
불혹?  (1) 2012.10.25
남자의 기쁨  (1) 2012.10.25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0. 31. 06:52

유전에 대하여

 

부자지간에는 닮은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닮은 데가 없어서도

발가락이라도 닮기 마련이다

나도 아버지를 닮은 구석이 많다

 

남들은 보이는 부분만 보면서

나를 보고 아버지를 닮았다고 말하지만

그 중에서도 아버지를 닮아

쥐 젖 같은 조그만 혹이 몇 개 있다

 

나는 매일 아들과 함께 샤워를 한다

어느덧 사물을 인식할 만큼 커 버린 아들이

함께 샤워를 하다가

마침내 내 몸에서 혹을 발견했다

 

아들은 신기한 듯 물었다

아버지 이게 뭐야?’

나는 대답했다.

, 이건 혹이라고 해

 

? 이건 어떻게 해서 생긴 거야?’

,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너한테는

할아버지도 이런 혹이 있으셨는데,

아버지가 아들이라 이렇게 생기게 된 거야!’

 

유전이라는 두 글자로 설명하면 될 것이지만

아직 유전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 아들에게

혹이 생기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늘따라 잠 못 이루는 아들과 누워

이야기도 들려주고 노래도 부른다

문득 아들은 아버지의 혹이 생각났는지

손을 더듬어 아버지의 혹을 찾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혹을 만지작거리는 아들에게

다시 유전에 대하여 설명한다

너도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네가 아버지 나이쯤 되면 이렇게 혹이 나게 될 거야.’

 

혹을 만지작거리던 아들은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유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내 몸에 이렇게 혹이 생기게 된 것은

나도 아들처럼 어린 시절 아버지의 혹을 만졌기 때문이 아닐까

 

아들이 아버지 몸에 난 혹을 만지작거리며 잠들지 않았더라면

아들은 이 다음에 커서 아버지처럼 혹이 안 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밤 아들은 아버지의 혹을 이렇게 만지작거리며 잠들었으므로

아버지처럼 혹이 날 것이다

틀림 없이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4  (0) 2012.10.31
어떤 크리스마스 이브  (0) 2012.10.31
불혹?  (1) 2012.10.25
남자의 기쁨  (1) 2012.10.25
홈리스  (0) 2012.10.25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0. 29. 03:43

2012 10 28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에베소서 5:15-21

제목: 성령에 취하라

 

오늘 말씀 보면 술 이야기가 나옵니다. “술 취하지 말아라.” 그와 대비해서 성령에 취하라는 말씀을 합니다. 술이라는 것 말도 많고 탈도 많습니다. 술 마셔야 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한국 교회 윤리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만큼 술이라는 것이 인간의 삶과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앙과도 어떠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에는 왜 이렇게 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지에 대한 것을 알고 나면, ‘, 그래서 그렇구나’, 뭔가 깨달음이 올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술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나 성령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예수님이 승천 하신 후 예루살렘에서 모여 예배 하던 제자들이 성령을 처음 받을 때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술 취했다고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같은 곳에서도 술 이야기를 하면서 성령 이야기를 함께 합니다. 왜 그럴까요?

 

옛날 사람들은 술에 취하면, 술 신(디오니소스)의 영감을 받거나, 영감에 사로잡힐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술에 취하면 디오니소스의 영감을 얻을 수 있고, 디오니소스의 능력을 행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신적인 존재가 되려고 합니다. 신적인 존재에 기대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디오니소스가 어떤 신입니까?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입니다. 그는 포도주의 신으로 포도경작법을 널리 전파시켰습니다. 디오니소스는 한번 죽었다 다시 살아난 신으로 죽음에서 부활한 구원의 신, 생명력의 신, 잔인함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도취와 쾌락의 신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신적인 존재가 되기를 욕망합니다. 그래서 신적인 존재에 신접하려고 노력합니다. 요즘 시대는 고대 사회처럼 미신적으로 신접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신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요즘에 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돈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 신의 능력을 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신적인 능력을 발휘하고자 자꾸 돈과 신접하려고 한다. 그래서 돈과 신접하기 위해 별 짓을 다 합니다.

 

최근에 공모자들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돈을 벌기 위해 무리들이 짜고 어떠한 사람들을 유인해서 공해 상이나, 중국의 한 병원에서 납치한 사람의 장기를 꺼낸 뒤, 그 시신은 콘크리트를 발라서 바다에 던져 버리고, 장기는 고가게 팔아 먹는 내용을 다룬 영화입니다. 실제로 인육을 공급하기 위해서, 그리고 장기를 팔아 먹기 위해서 사람을 납치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우리 삶의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그 영화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 ‘신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신접하기 위해서 별 짓을 다 합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고대 신비 종교가 그들 예배 시간에 성행위를 했다는 것을 보며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그 행위가 굉장히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돈에 신접하려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심각한지. 눈에 불이 켜져 있습니다. 똑같습니다. 고대 신비 종교에서는 예배 시간에 성행위를 하면서 그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신접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신의 능력을, 그렇게 함으로써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행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생각을 알고 넘어가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래야 왜 그들이 그렇게 했지는지를 알고, 그것을 보면서 왜 성경이 그것들에 대해서 언급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에는 이방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것에 빗대어서, 그것과는 대조적인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이 술 취하는 것을 통해서(신접해서) 디오니소스의 신적인 능력을 받을 수 있다는 개념을 통해서 성령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대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은 너희들이 술에 취하듯이 성령에 취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술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고, 술 이야기가 나오는 곳에는 성령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익숙한 것을 통해서 너무도 새로운 복음인 성령 취함에 대해서 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술 취함에 대해서 많이 나옵니다.

1. 음주는 습관화 된다( 23:21). 습관화, 이것을 중독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것이 무서운 것이죠. 무엇이든지 중독이 무서운 것입니다. 일단 어딘가에 중독되고 나면 나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그 일을 하게 됩니다. , 마약, 섹스, 게임, 성형, 심지어 운동 중독까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적당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약 같이 몸과 영혼을 망가뜨리는 것은 아예 손 대지 말고 쳐다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2. 음주로 인해 궁핍하게 된다( 23:21). 음주 많이 하면 가난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음주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음주에 빠져 사는 사람은 분명히 가난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3. 술은 뇌에 영향을 미치고 구토를 일으킨다( 19:14).

4. 술은 도덕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 28:7). 이사야가 술 취해서 재판을 굽게 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비판하면서 쓴 말씀입니다.

5. 술은 속이는 것이다( 20:1). 잠시 기분을 알딸딸하게 해주어서 만사형통인것처럼 느끼게 하지만, 술에서 깨어나면 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술 취하기 보다, 문제에 직면해서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푸는 것이 낫습니다. 술 먹으며 도망가지 마십시오.

6. 음주는 음란한 생각과 관련 있다( 23:33). 요즘 일어나는 성범죄의 많은 부분이 술 먹은 뒤, 성충동을 억제하지 못해서 일어납니다. 술을 먹으면 실제로 성충동이 일어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7. 음주는 잘못된 행위를 하게 한다( 9:24). 노아가 술에 취해서 정신 못차리고 있을 때, 그의 아들 중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는 패역한 일이 벌어집니다.

8. 음주로 인해 망령된 말을 한다( 23:33). 술 먹으면 입에서 예쁜 말 안나옵니다.

9. 음주는 방종하는 무법자를 만든다( 31:5).

10. 음주하는 자는 천국을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 5:21).

 

여기서 술 마시는 것 때문에 천국을 못 가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지극히 고대적인 생각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나오는 말씀인데,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에서의 맥락과 같습니다. 왜 그런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술 마시는 것이 우상숭배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요즘 시대는 좀 다릅니다. 요즘에는 술을 마시면서 우상숭배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요즘에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건강때문입니다. 신앙(우상숭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술 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이유를 신앙(우상숭배)과 결부시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몸과 영혼을 맑게 하고 건강하게 지킬 의무를 위해서 술 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더 이치에 맞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혹시 여기에 신접하시려고 술 마시는 분 계십니까? ‘나는 술 마시면 영감이 떠올라!’ 그런 분들은 절대적으로 술을 끊으십시오.

 

술 취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이 이렇게 많은 것을 보면서 술 취함과 성령 취함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습니다. 술 취함이 우리의 몸과 영혼에 해악을 미치는 것과는 다르게 성령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이롭게 합니다. 술 취해서 우리는 우리의 몸과 영혼을 망가뜨리지만, 성령의 취함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구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술 취하는 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새사람이 무엇인지를 나열하고 있다.

1.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한다.

2. 진정한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게 된다.

3. 감사게 된다.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술 취한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새사람입니다. 술 취한 사람은 대부분 울면서 원망합니다. 감사가 어디 나옵니까. 욕만 나옵니다. 그러나 성령에 취한 사람은 다릅니다. 눈이 오나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언제나 감사하게 됩니다.

4.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게 된다.

술 취한 사람은 막 나갑니다. 술 먹고 성질 난다고 파출소 들이 받고, 술 취하면 아버지 엄마도 없습니다. 그냥 누구든지 걸리면 들이 받게 됩니다. 성령에 취하면 서로 복종하게 됩니다. 성령의 눈으로 각자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을 보고, 피차 서로 복종하게 됩니다. 서로를 존중하게 여기게 되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귀하게 여기며, 서로 귀하게 여기면서 사는 삶, 새 사람의 삶, 성령에 취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그 당시 술 취한 사람들, 그렇게 신접해서 사는 삶, 영감을 받아서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지금 이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똑 같은 메시지를 줍니다. 성령에 취한다는 것은 하나님만 믿고 살아가는 것인데,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육체와 영혼이 어떻게 망가지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완전히 그것과는 다르게, 성령에 취해서 하나님만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어떤가를 볼 수 있습니다.

 

술 취해서 이 세상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열매(육체의 열매)와 성령에 취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열매(성령의 열매)를 대조해서 보여줍니다. 특별히 갈라디아서 519-23절에 보면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가 어떻게 다른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성령에 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성령 이야기를 하는데, 많은 분들이 헷갈려 합니다. 여러분 술 취하고 싶으시면 어디를 가십니까? 술 마시는데, 술집에 가서 술 사서 마시면 됩니다. 성령에 취하고 싶으시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교회 오면 됩니까? 틀리지 않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은 어떤 때 옵니까? 성령은 누구를 통해 옵니까? 성령은 예수님 통해 옵니다. 술 취하고 싶으면 술 사서 먹으면 되는 것처럼, 성령에 취하고 싶으면 예수님을 먹으면 됩니다. 우리가 매달, 예수님을 먹습니다. 그것이 성만찬입니다. 우리가 매일 무엇을 먹습니까? 말씀을 먹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분, 즉 예수님이십니다. 성령에 취하고 싶으면, 예수님을 먹고 마시면 됩니다. 많은 분들이 이것을 헷갈려 합니다. 술에 취하는 법은 우리가 잘 알면서 성령에 취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성령, 성령, 많이 들어보기는 했는데, 성령에 취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너무 간단한데, 너무 모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됩니다. , 단순하게 얘기해서, 예수님을 잘 믿으면 됩니다.

 

성령의 삶이라는 것이 성령 따로 있고, 예수님 따로 있고, 하나님 따로 있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 취하는 방법은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 찬양을 미친 사람처럼 부르거나 고대 종교 의식에서 행했던 것처럼 미친 짓을 하면 성령이 온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 잘 믿으면 됩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존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에 있는 그리스도를 존중히 여기면서 피차 서로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 안 빠지고, 기도 많이 하고, 찬송 열심히 부르고, 헌금 많이 내고, 이런 것이 예수를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 잘해도, 내 안에, 그리고 상대방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존중히 여기지 않고, 피차 서로 복종하지 못하고 술 취하는 것을 통해서 나를 망가뜨리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후벼 파면서 산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제 왜 자꾸 사도 바울이 술 얘기를 해 가면서 자꾸 성령 이야기를 하는가를 알 수 있죠? 그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취한다는 것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여러분, 술 취하지 마십시오. 단순히 술 먹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성령 외에 다른 것에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유익함이 얼마나 큽니까?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 담배도 잠시 우리에게는 유익을 주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다른 어떠한 것, 인삼이나 산삼, 또는 이 시대의 신인 이 가져다 줄 수 없는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을 가져다 주는 성령에 취해서 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지혜로운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술 먹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이것만 생각하시는 분은 오늘 설교를 잘못 들으신 겁니다.

 

술 취하지 마시고, 성령에 취하십시오. 여러분을 능히 구원할 것에 집중하며 사십시오. 여러분의 육체와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참된 능력인 성령에 취해 사십시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  (0) 2012.11.12
신비를 체험하라  (0) 2012.11.07
언약시대 VS 언약성취시대  (0) 2012.08.13
사랑, 불가능한 가능  (1) 2012.05.14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1) 2012.04.02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0. 25. 00:15

불혹?

 

공자님 말씀하시기를

나이 사십이면 불혹(不惑)이라

여기서 자는 유혹(誘惑)에서의 자와 같은 것

풀어 설명하자면

나이 사십이면 유혹되는 것이 없다는 뜻

 

내 나이 사십이 되어서

공자님 말씀이 모두 뻥인 것을 알았다

나이 사십이면 유혹이 없어진 불혹의 상태가 될 줄 알았던 나는

순진하거나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풋내기였을까

 

내 나이 사십

불혹은커녕

온통 유혹(誘惑)뿐이니

마음이 흐트러짐은 물론이요

인생의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아 막막하기까지 하다

 

불혹의 나이 사십이 이럴진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오십에 다다르면

과연 나는 하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을까

나 자신도 이렇게 몰라 헤매고 있는데

오십이 된들 하늘의 뜻은 어찌 알 수 있으랴

 

공자님 말씀이 뻥인지

아니면 공자님이 제시하신 인간됨의 기준에

내가 미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나는 유혹 받고 있으며

길을 잃었다는 것이다

 

거기 누구 나를 구원해 줄 이 없으시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크리스마스 이브  (0) 2012.10.31
유전에 대하여  (0) 2012.10.31
남자의 기쁨  (1) 2012.10.25
홈리스  (0) 2012.10.25
창조는 발견이다  (0) 2012.10.25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0. 25. 00:09

남자의 기쁨

 

장모님이 오신 덕분에

오랜만에 날개를 달고 서울(애틀란타)로 향했다

평소 먹기 힘든 회(사시미)로 배를 채우고

단연 향하는 곳은 찜질방사우나다

옷을 갈아 입고

잠적하듯이 굴 속으로 들어간다

내가 좋아하는 곳은 황토방 또는 참숯방

황토 냄새 또는 참숯 냄새를 수면제 삼아

스스르 잠이 든다

내 몸은 황토가루처럼 참숫가루처럼 부서져

꿈의 나라로 들어간다

시간과 땀이 만들어준 휴식에 만족해 하며

눈을 뜨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휴게실 음식점으로 향하고

나는 거기서 슬러시한 식혜 한 잔을 주문해서 마신다

달달한 맛이 꼭 천국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땀을 뺄 시간

에덴동산처럼 원초적으로 알몸이 되어

뜨겁디 뜨거운 사우나로 알몸을 밀어 넣는다

사우나는 인내력 테스트 장이 아닙니다라는 문구를 보며

인내력 테스트를 한 번 해보지만

결국 인내력은 바닥나고

묵은 땀으로 뒤 덮인 알몸은

출구 갈망한다

상쾌해진 내 원초적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대여섯살 먹은 아들 녀석 데리고 들어오는 동년배 아저씨

그의 인상은 자식 낳고 비로소 철이 든 인상이다

이 세상을 다 가진듯한 그의 흐뭇한 미소가 문득

집에 두고 온 아들 녀석들을 생각하게 한다

나도 사우나에 같이 올 아들 녀석이 있다고! 그것도 둘씩이나!’

, 남자들의 로망 남자의 기쁨

 

우리 마누라,

아들 낳아줘서 정말 고맙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전에 대하여  (0) 2012.10.31
불혹?  (1) 2012.10.25
홈리스  (0) 2012.10.25
창조는 발견이다  (0) 2012.10.25
시대가 아프다  (1) 2012.09.01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0. 25. 00:08

홈리스

 

큰 아들 감기예방접종 하고 오는 길, 빨간 신호에 걸려 교차로에서 잠시 정차한다. 교차로 모퉁이, 홈리스 아저씨가 붉은 색 카트를 세워두고 손에는 플래카드를 들고 구걸하고 있다. “I am homeless. God loves all.” 그의 손에 쥐어줄 현금이 없어 난감해 하고 있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큰 아들의 질문: “아버지, 저 아저씨는 저거 손에 들고 왜 저렇게 서 있어?” 이제 다섯 살 난 아들에게 이 세상의 부조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순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멈칫하다가 나는 이렇게 대답해 준다: “, 저 아저씨는 저거 들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중이야.” 아들은 커서 홈리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것이고 오늘처럼 홈리스를 보면 동전 몇 푼 손에 쥐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홈리스의 손에 동전 몇 푼 쥐어주는 동정심을 갖는 것보다 홈리스를 생산해 내는 이 세상의 부조리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정의와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으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혹?  (1) 2012.10.25
남자의 기쁨  (1) 2012.10.25
창조는 발견이다  (0) 2012.10.25
시대가 아프다  (1) 2012.09.01
나는 강간 당했다  (1) 2012.08.24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0. 25. 00:06

창조는 발견이다

 

컬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했고

뉴턴은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다

이 세상에 발견되지 않는 게 어디 있으랴

피에타상을 조각한

미켈란젤로도 대리석 속에 누워 있던

예수와 그의 어머니를 발견했을 뿐

그는 무엇인가를 창조하지 않았다

인간에게 창조라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인간에게 창조라는 것이 어울리는 것일까

창조는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신의 속성이 아닌가

인간은 그저 신이 창조해 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을 뿐

그 어느 것도 창조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찾을 것이라

인간에게 있어 창조는

구하는 일이요

찾는 일이요

두드리는 일이리라

신이 창조해 놓은 것을

그저 발견했을 뿐인데

그것을 창조라고 일컫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

그 불경스러운 불명예를 뒤집어 쓰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신의 창조를 발견하러 간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자의 기쁨  (1) 2012.10.25
홈리스  (0) 2012.10.25
시대가 아프다  (1) 2012.09.01
나는 강간 당했다  (1) 2012.08.24
해님과 바람과 아들  (2) 2012.02.21
Posted by 장준식

꽃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꽃의 화용(花容)만 봅니다. 꽃의 겉모습만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꽃을 보면서 예쁘네 안 예쁘네 라는 평가만 내립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꽃의 향기와 아름다움만을 본다면 그것은 꽃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꽃은 화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품(花品)을 봐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매란국죽(梅蘭菊竹,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일컬어 사군자(四君子)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꽃나무들의 화품 때문이지 화용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람의 외모만 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면서 잘 생겼네 못생겼네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인품(人品)을 보아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성인군자는 인품이 매화처럼 매서운 세파에도 굽히지 않는 고매함을 지니고 있고, 난초처럼 기세와 자태가 곧고, 국화처럼 굳은 지조를 지니고 있고, 대나무처럼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양사상에서는 자연이나 인간이나, 생긴 것은 다를지라도 ()이라는 측면에서는 서로서로 통하는 것들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한국에서는 선비정신으로 통했던 것이죠. 그래서 사람은 무엇보다 인품이 중요합니다.

 

인품이 그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지, 외모가 그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들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야 합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신품(信品)"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기품이라고 할까요?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신품으로 판단 받습니다. 기품 있는 믿음, 품위 있는 믿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죠. 믿음이 매화처럼 고매하고, 난초처럼 곧고, 국화처럼 지조 있고, 대나무처럼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면, 기품 있는, 품위 있는 믿음을 지녔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중시을 보십니다. 그 중심이 바로 "신품"입니다. 기품 있고, 품위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됩시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회법정과 천국법정  (0) 2012.11.30
사색(기도)하기 좋은 계절  (0) 2012.11.17
경이로운 하나님 나라  (1) 2012.10.02
탄식하는 기도  (0) 2012.09.17
육신의 웰빙  (1) 2012.08.28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