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7. 1. 03:5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도행전 3:11-26)

 

오늘 말씀이 쉬워 보이지만 쉬운 말씀이 아니다. 오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우리가 공부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 그것을 오늘 다 살펴볼 수는 없다. 오늘 포인트를 말씀 제목에 맞게 전하고자 한다.

 

성전미문에 앉아 있던 중증 장애인을 치유하는 사건으로 인해서, 사도들이 복음 전할 기회를 얻게 된다. 솔로몬 행각에 모이게 된다. 좋은 시간과 좋은 공간을 얻게 된다. 기적이든, 선한 일이든, 자선이든 사람들에게 칭송 받는 일이 있다면, 그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기회가 된다.

 

왜 그러냐면, 그런 것을 통해 사람들은 나에게 주목을 하게 되어 있다. 칭송 받는 일은 통해서 나의 잘 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때 나에게 귀를 기울인다. 마음 문을 연다. 사람들은 좀처럼 귀를 기울이거나 마음 문을 열지 않는다. 마음을 열지 않은 사람들에게 아무리 좋은 말,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해도 그 사람들에게 그것이 그렇게 마음에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 문이 열렸을 때는 한 마디만 해도 눈물을 뚝뚝 흘린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 한 마디만 해도 눈물을 뚝뚝 흘린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기회를 주시려고 하신다. 사도들은 그런 기회를 얻었다. 중요한 기회를 얻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복음을 막 전한다. 첫 번째로 이런 말을 한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질까? 와 대단하다, 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왜 우리에게 주목하느냐?”라는 말을 하면, 그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거다. “그러면 우리가 너한테 주목하지 누구한테 주목하냐?”라고 하면서 그러면 누구에게 주목하라는 거야?”라면서 물음표가 생긴다. 바로 그 물음표에 답을 전해주는 것이다.

 

기적은 권능과 경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뭔가를 잘 하면 기적을 베풀 수 있을 것 같고, 뭔가 스페셜한 능력을 발휘할 것 같은데, 그것을 위해서는 권능을 가져야 하고, 경건생활에 힘써야지 그런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착각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자기 스스로 경건하다. 그러니까 오후 세 시에 기도하러 올라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알았다. 자기들의 경건으로부터 권능이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러면 어디서 왔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어떠한 스페셜한 능력을 갖고 싶으신지 모르겠지만, 그럴 때 일수록 경건생활에 힘쓰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시라. 이것이 무슨 말인지 성경을 통해서 하나하나 깨달아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 솔직하게 질문해 보자. 지금 베드로가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에 대하여 얼마큼이나 확신하고 있는가?

 

오늘 사도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은 복음의 핵심이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살아나신 생명의 주이시다! 그냥 주님이 아니라 생명의 주님이시다.

2)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언의 성취 à 우리가 구약성경을 봐야 하는 이유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그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모두 구약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냥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선지자들의 예언에 근거해서 그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생뚱맞은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예언)대로 이루신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구약성경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예언의 성취이다.

3)    만물의 회복과 예수님의 도래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별로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무슨 예언을 하셨는지 관심이 없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 지금 내가 당장 시집 가고 장가 가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 많은 것에만 관심이 있지,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계를 이끌어 가시는지, 어떤 식으로 운행 하시는지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데, 거기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에 근거해서 시집 가고 장가 가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 많은 것을 꾸려 나갈 텐데, 그거랑 전혀 상관 없이 바쁘고 힘들게 살아간다.

 

하나님께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욕심과 자기 자신의 교만 속에서 살아간다는 증거이다. 그렇다 보니, 사도 베드로의 복음이 우리 삶 가운데 잘 들어오지 않는다. 사도 베드로가 전하고 있는 복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 가슴이 얼마나 받아 들이고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새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In the name of Jesus Christ, 이것이 갖고 있는 무한한 능력을 믿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야기 한다. “회개하라!” 여러분 회개하시라. 여기서 회개하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여러분은 마음 속에 무슨 생각이 번뜩 드시는가? 죄가 생각이 난다. 마음 속에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지?’ ‘어제 내가 장사하다가 손님이 한 5불 정도 더 나에게 줬는데, 그거 내 주머니에 넣는데…’ 우리는 이러한 것부터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회개란 이러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회개그러면, 도덕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을 생각하니까 포인트를 잘못 맞추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 한 것이고, 자기 자신의 욕심과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두 나한테만 관심을 갖는 것이다. ‘회개하라’, 그러니까 뭐 나한테 잘못한 게 없나?’라고 하면서 모두 나한테만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회개는 도적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거기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시집가고 장가 가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 많은 것만 생각하며 살았는데, 회개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에 매몰되어 있던 마음을 돌이켜서 나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게 집중하는 것, 그것이 회개이다.

 

그럴 때 비로소 도덕적으로도 우리가 서서히 변하면서 깨끗해지는 것이지, 사람이 하루 아침에 변하게 되면 사는 게 아니라, 죽는다. 도덕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은 금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습관을 통해서 젖어온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금방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결단이기 때문에 바로 거기서 벌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점차적으로 gradually 도덕적으로 깨끗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도덕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그것이 회개라고 생각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심을 전혀 갖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회개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능력을 믿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라. 우리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사는가? 말로는 그렇지만, 진정으로 거기에 나의 삶을 걸고, 예수의 이름이 나의 모든 삶이라고 고백하면서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가?

 

우리의 능력, 우리가 살아가는 능력,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기적들, 선한 일들, 우리가 누군가에게 베푸는 일들, 무엇보다 구원은 다른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온다.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경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권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도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 들이시길 바란다.

 

그 놀라운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고, 삶 가운데 승리를 일구어 가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혜의 눈을 발견하라  (1) 2013.07.12
당신은 에노스의 후손인가?  (2) 2013.07.04
실패는 없다  (1) 2013.06.24
살아 남은 자의 슬픔  (1) 2013.06.20
기도의 퀄러티가 삶의 퀄러티이다  (1) 2013.06.17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6. 24. 05:48

실패는 없다

(갈 3:23-29)

 

의란 무엇입니까? 의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러니까, 의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죠. 그러면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느냐의 문제가 남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율법이 그 일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대로 살면, 의로워진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의로워지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멋져 보여서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인물이 되니까요? 그런 것은 이차적입니다. 의로워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유대인들에게 의로운 사람의 몫인 셈이죠. 유대인들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서 모세에게서 율법을 받은 이래로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 의하면, 율법을 통해서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악만 밝혀줄 뿐, 우리를 의로움으로 이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예수라는 분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난감한 일입니다. 그 예수라는 사람은 유대인들에 의해 로마당국의 손에 넘겨져 처형을 당한 인물이었거든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예수가 십자가 형에 처해 죽었다는 사실은 그가 의롭지 못하다는 증거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를 이들은 그리스도로 소개하면서 예수라는 분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의로워질 수 있을 뿐, 율법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님으로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구원사건, 즉 우리를 의롭게 한 사건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부활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는 유대인들에 의해 로마당국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 처형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무덤에 누워 있는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험한 꼴 당하고 죽었던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이 믿기 참 힘든 일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한 예수를 직접 만났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이 일의 증인으로 자처하고 나선 겁니다.

 

사도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과 예수의 그리스도, 주님 되심을 증거했을 때 그것을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은 처음에 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전해졌으니까요. 이들은 처음에 복음을 받아 들었을 때, 유대교 내에서 율법을 준수하며 예수를 믿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서부터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을 너머, 사마리아와 땅끝(이방지역)으로 퍼지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방지역으로 복음을 전파하는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이 쓴 서신서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이방 사도로 부르셨다는 고백이 촘촘히 들어 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한 지역 중 하나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배경이 되는 갈라디아 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지역에 세워진 교회에 보낸 편지인 것이죠. 이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바울은 이렇게 갈급한 마음으로, 강력한 필체로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일까요?

 

갈라디아는 이방지역입니다. 유대인들이 주축을 이룬 지역이 아닙니다. 그 말은 유대인의 율법이 영향을 미치는 지역이 아닙니다. 문화 자체가 유대인들의 문화와는 관계가 없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갈라디아 교회에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율법을 지켜야만 온전히 의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율법의 필요성을 동시에 강조한 것이죠.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즉 구원 받는다는 것을 이들도 인정했지만, 어딘가 좀 부족해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강조하는 이유는 율법의 준수만이 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율법은 단순히 종교생활만이 아니라 일상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의 모든 것을 규정합니다. 예컨대 소가 이웃집 밭에 들어가서 곡식을 망가뜨리는 경우나, 성폭력이 발생한 경우도 율법이 대답을 제시합니다. 율법에 정진해 살면 모든 것이 의로운 상태로 복귀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는 유효합니다. 지금도 우리의 사회를 그나마 정돈시켜 주는 것도 법 때문입니다. 법이 없다면 무법 천지겠죠. 아마도 자동차 타고 다니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도로교통법 때문에 자동차 운전하고 다니는 것도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니까요.

 

이에 대해 바울은 놀랍게도 본문에서 유대인들의 전통을 거부합니다. 율법이 정의롭게 하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는 율법의 한계를 정확하게 뚫어보았습니다. 법은 일시적으로, 또는 표면적으로 정의를 말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정의를 세우지 못합니다.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은 세계에서 법이 가장 잘 정비된 나라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미국에서 오랫동안 사신 여러분들이 느끼시기에 이 나가 정의로워 보입니까?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하나도 없으세요?

 

그리고 더 중요하고 현실적인 문제는 이것입니다. 법이 우리를 보호해 줍니까? 가령 누군가를 살인하거나 강간하면 그 일을 행한 가해자는 무기징역 또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것이 법입니다. 이러한 법이 있다고 한들, 살인이나 강간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러한 법이 있는 것 때문에 우리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습니까? 법은 법이고, 사건은 사건입니다. 아무리 법이 있어도, 살인이나 강간 사건이 일어나고 나면, 피해자나 그 가족은 그 사건으로 인해서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가해자가 아무리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망가진 인생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법이 모든 것을 의롭게 규정해 주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의 요구가 이 세상의 성공과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는 늘 불안합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뒤떨어진 삶을 살 가봐. 그래서 대도시에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남보다 좋은 학교를 나와야 하고, 남보다 큰 비즈니스를 해야 하고,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집 등등이런 것의 성취가 곧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이 삶의 완성을 어떻게 추구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일반적으로는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또는 행복한 조건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돈도 좀 잘 벌고, 이름도 내고, 착한 일도 하고, 취미활동도 잘 하고, 스펙도 잘 쌓고, 등등 ... 할 일이 많습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습니다. 목사의 경우에는 교회를 크게 키우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이런 노력들은 다 필요합니다. 모두 좋은 율법들입니다. 모두 열심히 자기 몫을 감당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인생을 걸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의미해집니다.

 

의로움은 삶의 완성이나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는 데서, 즉 그리스도로 옷 입는 데서 옵니다. 바울은 3 2절에서 갈리디아 교회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의로움을 이루고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성령, 즉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증언을 듣고 믿는 데서 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성령 받는 것은 40일 금식기도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통해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너무 허무한가요?

 

복음을 듣고 믿는 데서가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이룸으로 의를 이루고 구원을 성취하려는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3: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다, 라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구별은 헛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내가 조금 부자로 살았던 가난하게 살았던, 도시에 살았던 시골에 살았던, 많이 배웠던 많이 배우지 못했던, 몸에 장애가 있던 없던, 그것들은 모두 율법의 요구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하면 실패한 삶이라고 자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자로 살지 못하면 실패한 삶이다. 시골에 살면 실패한 삶이다. 많이 배우지 못하면 실패한 삶이다. 몸에 장애가 있으면 실패한 삶이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해서 그들보다 뭐 하나라도 우위에 있지 않으면 불안해 하면서 실패한 삶이라고 규정하고 비탄에 잠기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자꾸 '성공'하게 해달라는 부르짖음으로 치닫습니다. 율법의 요구, 이 세상의 성공의 기준을 이루기 위해서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예수님의 삶은 실패 중의 실패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처형 당한 사람의 삶이 뭐가 승리의 삶입니까? 그런데, 바로 거기에서 부활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복음을 통한 의를 믿지 못하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사느라 허우적댈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 본다면, 우리가 남들보다 좀 우월하게 살았다고 교만할 것도 없고, 남들보다 좀 못한 삶을 살았다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느냐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기만 한다면, 우리 삶에 실패란 없습니다. 그러니 주어진 환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붙들고 불꽃처럼 사십시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으면, 여러분은 이미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사는 자들에게는 실패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교해도 괜찮은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사명 감당하면서 한평생 살아도 괜찮은 겁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불안해 하지 말고, 평안 가운데 사십시오.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구원 사건에 집중하면서, 즉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을 의롭게 할 것이며, 구원으로 이끌 것입니다. 아멘.

 

 

* 이 설교의 몇몇 부분은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에서 가져왔습니다. 바울 서신을 갖고 설교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편지문 형태로 '교리'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 서신은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놓아두고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정확하게, 그것도 좀 재미있게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바울 서신은 오직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에 관심이 없는 요즘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한다는 것이 정말로 힘듭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을 갖고 말씀을 전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이지 '복음'이 먹히질 않습니다. 교인들의 표정과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목사가 지금 무슨 말을 하나...' 아.. 정말이지, 복음을 전하는 일은 정말 도전이 되고 절망적입니다. 제가 지금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데도 말이죠. 이게 참 아이러니입니다. 아이러니...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은 에노스의 후손인가?  (2) 2013.07.0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0) 2013.07.01
살아 남은 자의 슬픔  (1) 2013.06.20
기도의 퀄러티가 삶의 퀄러티이다  (1) 2013.06.17
신앙의 도약  (0) 2013.06.10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6. 20. 12:59

 

살아 남은 자의 슬픔

창세기 1

(창세기 4:1-15)

 

쉼보르스카의 시 <우화>입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어부들이 바다 깊은 곳에서 유리병을 낚아 올렸어요. 그 병에는 종이 쪽지가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답니다:

사람들이여, 나 좀 구해주세요! 나 여기 있어요. 대양이 나를 파도에 싣고서 무인도에 갖다 버렸답니다. 모래사장에 나와 도움을 기다리고 있어요. 서둘러주세요. 나 여기 있을게요.”

 

이 쪽지에는 날짜가 누락되어 있군. 틀림없이 이미 늦었을 거야. 유리 병이 얼마나 오랫동안 바다를 떠나녔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첫 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게다가 장소도 적혀 있질 않군. 대양이 한둘도 아니고, 어디를 말하는지 통 알 수가 없잖아.”

두 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늦은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야. ‘여기라는 섬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니까.”

세 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불현듯 어색한 분위기와 함께 침묵이 흘렀습니다. 보편적인 진실이란 원래 다 그런 법, 생각하기 나름이니까요.

 

여기 생각하기 나름인 사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사건입니다. 왜 가인은 아벨을 죽였을까요? 우리는 흔히,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제사 행위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여기서 의문은 한 가지 더 늘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아 주셨을까요?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가인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마음은 더더군다나 들어가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가인의 엄마 하와는 가인을 낳았을 때 가인에게 매우 기대를 걸었던 모양입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은 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1). 이를 풀어서 다시 옮기면 이런 뜻이랍니다. “내가 여호와와 함께 한 사람(남자)을 얻었다.” 하와는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낳았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얻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낳은 아들이라면, 분명 자신의 앞날에 이 아들을 통해 영광이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을 겁니다. 하와는 이 사람에게 어떤 희망을 품었던 것이죠.

 

그런데, 세월이 지난 후, 엄마의 기대와는 달리 기대주가인은 엉뚱하게도 살인자가 됩니다. 그것도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쉼보르스카의 다른 시 <베트남>입니다.

 

여인이여, 그대 이름은 무엇이냐? – 몰라요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디 출신인가? – 몰라요

왜 땅굴을 팠느냐 몰라요

언제부터 여기 숨어 있었느냐? – 몰라요

왜 내 약지를 물어뜯었느냐? – 몰라요

우리가 당신에게 절대로 해로운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아는가? – 몰라요

당신은 누구 편이지? – 몰라요

지금 전쟁 중이므로 어느 편인지 선택해야만 한다 몰라요

당신의 마을은 존재하는가? – 몰라요

이 아이들이 당신 아이들인가? – 맞아요

 

이 시는 쉼보르스카가 베트남 전쟁 때 구찌 땅굴에 살았던 베트공 여인을 생각하며 쓴 시입니다. 수많은 질문에 도리도리 고갯짓을 하며 몰라요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이러한 상황을 우리는 도처에서 만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도 발견됩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 몰라요!

 

이 대답 속에는 자신도 왜 아벨을 죽였는지 모르겠다는 대답이 들어 있는 것일 겁니다.

 

여러 해 전, 한국에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호찌민에 살았던 베트남 여성 후인마이가 대한민국 천안시 문화동의 한 방에서 전과 6범의 남편에게 구타당해 늑골 18개가 부러져 죽은 채 발견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후인마이는 죽기 전날 남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이렇게 죽게 될지 몰랐지만, 그것이 그녀의 유언장이 된 셈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무슨 음식 먹어? 물 먹어?라고 물으며 식모처럼 잘해주고 싶었어. 나는 결혼하기 전에 호찌민에서 일했어. 우리 가족에게 어려움 있었어. 가족을 위해 고생스러운 일 많이 했지만 월급은 적었어. 어느 해는 냉동식품 회사에서 일하고 어느 때는 가구 공장에서 일하고 어느 때는 고무 농장에서 일했어. 일 없으면 남의 논밭에서 일했어. 나는 힘든 일과 고생스러운 일을 잘 알아. 나는 한국에 와서 당신에게 이야기 많이 하고 싶었지만 잘 안 되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장난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신은 잘 모를거다(베트남어로 썼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에게 장난치고 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장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밖에는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고, 위로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가인과 아벨>의 사건도 하나님의 장난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 밖에는 그 사건을 이해할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자가 이 사건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한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런 진단을 내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단서는 5절 이하에 나오는 가인의 심리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분노를 잘 느끼는 사람의 특징은 어려서부터 통제를 잘 받지 못한 탓일 가능성이 큽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가인은 엄마의 기대주였기 때문에, 엄마의 사랑은 많이 받았어도, 엄마에게 통제를 잘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귀하고 곱게 자란 아이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상황을 맞닥뜨리면 분노를 쉽게 표출합니다.

 

분노를 노출하고 있는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분노를 잘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분노는 존재를 죄의 지뢰밭으로 이끕니다. 터트리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릅니다.

 

가인은 안색이 변할 정도로 몹시 분한 마음을 품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아우 아벨에게 풉니다. 분노를 터트립니다. 터진 분노에, 아우 아벨이 죽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입니다. 분노를 풀고 나면, 정신이 드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우가 죽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자신은 분노를 풀어내서, 살아 났지만, 그 분노의 폭발 때문에 아우가 죽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 몰라요!” 가인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당황합니다. 후회합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아우 아벨은 이미 죽은 상태입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은 세상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고아원 동기인 젊은 부부는 애를 낳자마자 족족 고아원에 넘깁니다. 만삭의 아내는 변기에 앉아 힘을 주다 그만 변기 속에 풍덩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꺼내서 닦아놓고 보니 눈과 코가 없었습니다.

 

평생 가정을 가져본 적 없이 무료 급식으로 연명하는 폐품팔이 할아버지는 어느 날 가출 소녀를 만나게 됩니다. 노인은 마냥 좋아 10대의 가출 소녀를 아가라 부르며 집 안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족이라 생각하며 가출 소녀를 매일 기다립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만나고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입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만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일까요? 어쩌면 처음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에게서 시작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처구니 없게, 아담과 하와는 기대주가인이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일을 겪게 됩니다. 아벨은 어처구니 없게 다른 사람도 아닌 형 가인에게 돌에 맞아 죽는 일을 겪게 됩니다. 가인은 어처구니 없게 자신의 분노를 아우 아벨에게 풀어내는 일을 겪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에덴동산에서 살아 남은 자들이 겪은 슬픔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처구니 없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사건입니다. 사람이 죽는 거야 최초의 인간 때부터 있어왔던 일이라 익숙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일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에덴동산을 떠나 이 땅에 온 존재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는 어처구니 없는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인 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나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그에 대한 인간들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몰라요!”입니다.

 

커트 보네거트의 <레퀴엠>이라는 시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지구가

목소리를 갖게 되고

아이러니가 무언지 알게 된다면

우리가 저지른 학대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는 게 바로 아이러니다

 

이것이 살아 남은 자의 가장 큰 슬픔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몰라요!”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사실 가인은 자신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그 아이러니!

 

가인은 그러한 아이러니를, 그러한 슬픔을 가슴에 지니고 살게 됩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15). 가인이 하나님께 받은 표는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죄를 면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가 바로 그러한 표가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는 내 죄를 들춰내는 거울이기도 하지만, 내 죄를 감춰주는 가죽 옷이기도 한 것이죠. 비록 우리의 인생이 어처구니 없고, 아이러니하고, 슬픈 일로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극복될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은 정말이지 눈물 나도록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어처구니 없는 하나님의 장난을 보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충분히 희망적입니다. 그러니 눈물을 닦고 힘을 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까요.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0) 2013.07.01
실패는 없다  (1) 2013.06.24
기도의 퀄러티가 삶의 퀄러티이다  (1) 2013.06.17
신앙의 도약  (0) 2013.06.10
당신은 선지자입니까?  (4) 2013.06.03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6. 17. 04:46

2013 6 1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12-26

제목: 기도의 퀄러티가 삶의 퀄러티이다

  

신약성경 중 마음에 와 닿는 성경을 고르라면, 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고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과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성령행전 또는 기도행전이라 불리고, 누가복음은 성령복음 또는 기도복음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꼭 지향해야 하는 삶의 가치를 너무도 잘 가르쳐 주는 지표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다면,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어디로 가게 될지 모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어떤 신적인 힘을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성령을 일컬어 예수의 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과 더불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을 차지하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생명의 영이고, 예수의 영이기 때문에 진리의 영이십니다. ,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뜻은 생명의 길로, 진리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지금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는데, 그 길에 끝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지금 나아가는 길 가운데 눈에 보이는 주변환경은 온갖 우리의 욕망을 자극시키고 만족시키는 것이 있어 즐거울지 몰라도, 그 길의 끝에 우리의 생명을 삼켜버리는 지옥이 있다면, 그 길은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지금 나아가는 길 가운데 눈에 보이는 주변환경이 우리의 욕망을 절제시키고 실망시키는 것이어서 재미 없다 할지라도, 그 길의 끝에 우리의 생명을 충만하게 하는 천국이 있다면, 그 길은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결코 우리를 죽음의 길, 거짓된 길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생명과 진리는 성령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겁니다. 우리는 본질에서 벗어나 방황하고 좌절하고 죄를 짓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산다면, 우리의 미래는 참으로 희망찬 것이죠.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생을 건 제자들이 어떻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지에 대한 기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120명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예수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교회 모습입니다. 기본적으로 교회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약속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약속을 간절히 사모했던 120명의 제자들은 모여서 주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4b).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에 마음이 참 끌립니다. 이 부분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hese all with one mind were continually devoting themselves to prayer.” 여기서 ‘one mind’라는 말과, ‘continually’라는 말, 그리고 devoting themselves’라는 말이 모두 ‘prayer’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아주 기본 자세를 말해주는 귀한 용어들입니다.

 

우선 ‘one mind’라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인에게 기도란 혼자서 하는 기도는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요즘 시대는 너무 개인주의가 판을 치는 시대가 이것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그냥 골방에 들어가서 혼자서 하면 되지, 무슨 ‘one mind’로 하라는 것일까?’, 라며 의문을 품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한 번도 혼자서의 기도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 기도는 언제나 공동체성을 지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연결된 한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동상이몽이라는 한자성어가 있습니다. ‘같은 침상에 누워 있으면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도는 이방인들의 기도입니다. 자신의 유익만 구하는 이기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기본적으로 사랑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데, 자신만의 유익을 구하는 기도는 사랑의 기도, 즉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랑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말 그대로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말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기도가 아닌, 자기 희생적인 기도, 즉 이웃을 향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례로, 현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비즈니스는 경쟁을 기반으로 합니다. 한 쪽이 흥하면, 한 쪽은 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나의 비즈니스가 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데 이 기도 속에는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자동적으로 이런 뜻도 들어가 있는 겁니다. ‘주님, 나의 경쟁상대인 저 사람의 비즈니스가 하게 하여 주옵소서.’ ‘저는 그렇게 기도한 적 없는데요. 저는 저의 비즈니스를 흥하게 해달라고 했지, 나의 경쟁상대인 저 사람의 비즈니스가 쇠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 없는데요.’ 물론 그렇습니다. 겉으로 볼 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만 들어 있지, 이웃의 유익은 아랑곳 하지 않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한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 비록 우리들이 경쟁관계에 있지만 저도 흥하게 하시고, 저 사람도 흥하게 하여 주옵소서.’ 물론 공동체성이란 이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다만 일례를 들어서 그것이 무엇인지 조금 맛을 본 것이지요.

 

다음으로 ‘continually’‘devoting’은 하나로 묶어서 살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단어를 통해서 우리는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여서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던 제자들이 얼마나 기도에 집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계속해서 기도했는데, 단순히 그냥 기도하는데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라, 기도에 헌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과 질이 함께 갔다는 뜻입니다. 1시간이든 2시간이든, 기도의 양도 중요하지만, 1시간 2시간 기도할 때 그 기도의 질 또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시간만 때우는 기도를 드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한다고 앉아 있긴 하지만, 중언부언하는 기도, 딴 생각 하는 기도를 드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continually’‘devoting’은 무슨 일을 하든 매우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끊임 없이 운동하는 사람, 그리고 운동할 때 운동에 집중하는 사람은 건강할까요 아닐까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끊임 없이 공부하는 사람, 그리고 공부할 때 딴 생각 안 하고 공부에 집중하는 사람은 공부를 잘 할까요 아닐까요? 반대로, 눈 온다고, 비 온다고, 바람 분다고 그런 날은 운동 안 하고,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 싶은 날, 마음에 내키는 날만 운동하고, 그나마 운동하면서 운동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이 건강할까요 아닐까요? 눈온다고, 비 온다고, 바람 분다고 그런 날은 공부 안 하고,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 싶은 날, 마음에 내키는 날만 공부하고, 그나마 공부하면서 공부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이 공부를 잘 할까요 아닐까요?

 

굉장히 단순한 진리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간과하면서 살아갑니다. 기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 기도하면서 기도에 집중하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까요 아닐까요? 눈이 온다고, 비가 온다고, 바람이 분다고, 왠지 기도가 안 되는 우울한 날이라고 하면서 기도를 거르고, 그나마 기도할 때 딴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까요 아닐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도를 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헌신해서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집중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굉장히 중요한 한 가지 문제를 처리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배신해서 자살해 죽은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의 자리를 보궐하는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를 열 둘로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12라는 숫자는 완전 숫자인데, 야곱의 12 아들, 이스라에르이 12지파처럼, 12 사도들은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새 이스라엘을 통치하도록 임명된 지도자의 지위를 확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누가 앉느냐는 교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이들은 이 문제를 놓아두고, 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집중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그 자리를 맡게 될 두 사람을 천거합니다. 그들은 요셉과 맛디아였습니다. 이 중 한 사람은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12 사도의 자리에 앉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과 봉사의 직무를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결과는 맛디아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맛디아가 아니라, 요셉으로 선정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매우 첨예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벌어지는 문제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늘, 인생을 살아가면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을 때,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어떤 선택이 올바른 선택인지, 우리의 미래를 밝게 해줄 것인지, 우리는 지혜가 부족하여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선택은 나의 미래를, 나의 인생을, 나의 삶을 이렇게도 바꿀 수 있고, 저렇게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결과이고,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삶의 질은 달라집니다. 그 모든 변수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영이시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가 어떠한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 아신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생명의 영이시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에 헌신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방법을 택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점 집에 찾아가시겠죠.)

 

예수님의 12 사도로 맛디아가 아니라, 요셉이 선택되었다면 초대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많은 것이 달라졌겠죠.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던제자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요. 왜냐하면, 이들은 분명,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선택이라면, 이 세상 어느 것보다 신뢰할만한, 그리고 삶의 질을 바꾸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레미제라블'의 저자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나폴레옹이 패망하게 된 워털루(Waterloo)전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격전이 있던 날 아침, 작달막한 키의 나폴레옹 황제는 싸움이 벌어질 벌판을 바라보며 사령관에게 그 날의 작전을 설명했다. “여기에 보병을 배치하고 저쪽에는 기병을, 그리고 이쪽에는 포병을 배치할 것이오. 날이 저물 때쯤 영국은 프랑스에게 굴복되어 있을 것이며 웰링턴은 나폴레옹의 포로가 될 것이요.” 하고 자신에 넘치는 야무진 소리로 말했다.

 

이 말을 듣던 한 사령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각하,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성패는 하늘에 달렸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그의 작달막한 몸을 쭉 펴서 키를 늘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장군은 이 나폴레옹이 친히 계획을 세웠다는 것과 나폴레옹이 성패를 주장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라오.” 하고는 듣기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빅토르 위고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부터 이미 워털루 전투는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나님께서 비와 우박을 퍼부었으므로 나폴레옹의 군대는 계획한 작전을 하나도 펼 수가 없었다.]

 

전투가 벌어진 그날 밤에 나폴레옹은 웰링턴 장군의 포로가 되었고 프랑스는 영국에 굴복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나간 역사를 다 알 수 없고 다 판단하여 말할 수 없지만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군인 제1통령·황제로 제1제정을 건설했고 제1통령으로 국정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하는 등 개혁정치를 실시했으며, 유럽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세력을 팽창한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프랑스의 입장에서 보면 위대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전략가로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광활한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그가 세운 전략들은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려하지 못한 하나의 변수 때문에 그는 전쟁에 패하였고 다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그가 놓친 하나의 변수는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잠언서 16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와 비슷한 구절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언 16:1). 오늘 말씀에 근거해서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걷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 16:25).

 

그렇다면, ‘어떻게,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이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그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떻게 기도하고 있느냐는 단순한 신앙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에게 잘 보이고, 의무를 감당하고 말고의 문제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것은 나의 현실적인 실존적인 삶의 문제입니다. ‘내 삶의 질이 곧 기도의 질로 결정난다는 엄청난 메시지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너무도 자명한 일이 아닙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으면, 내가 보이게 바르고 좋아 보이나, 필경 사망의 길일 수 있다는 경고를 경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걸기로 결단한 사람답게, 예수의 영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 위해서, '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집중하여 기도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기도의 퀄러티가 삶의 퀄러티입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먹느냐, 내가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있느냐, 내가 지금 어떤 집에서 사느냐, 내가 지금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느냐, 내가 지금 어떠한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느냐가 삶의 퀄러티가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떻게 기도하고 있느냐가 삶의 퀄터티를 결정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패는 없다  (1) 2013.06.24
살아 남은 자의 슬픔  (1) 2013.06.20
신앙의 도약  (0) 2013.06.10
당신은 선지자입니까?  (4) 2013.06.03
황폐함을 보라!  (0) 2013.05.27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6. 10. 06:59

2013 6 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욥기 42:1-17

제목: 신앙의 도약

 

고난에 대한 명언들이 많다. 그 중 기억에 남는 명언은 세 가지 정도다: 1) 고난은 가면을 쓴 커다란 행운이다영국속담, 2) 고난이 없으면 성공도 없다소포클레스, 3) 고난은 의식의 시작이다도스토예프스키.

 

이 중에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난에 대한 명언을 좋아한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고난을 좋아할 이유도 없다. 고난에 대한 명언들은 모두 고난을미화(美化)’시키고 있지만, 명언들에서 미화되고 있는 고난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못하다.

 

대개 사람들은 고난을 만나면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고난에 걸려 넘어지거나, 고난을 외면하거나. 고난이 아무리 주는 유익이 크다고 미화되고 있어도, 고난을 겪고 나면 인생에는 고난의 얼룩이 남게 마련이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서 얻는 것도 있지만, 잃게 되는 것 또한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인간은 되도록이면 고난을 피하는 것이 좋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사실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고난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은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고난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난을 당하면 사람들은 대개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원인을 자꾸 묻곤 한다. 특별히 기독교인들은 고난이 닥치면 신앙이 위축된다. ‘내가 뭐 잘못했나?’ 영락없이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리고 모든 고난을죄의 문제로 치부하며, 결론을 회개로 이끌어 간다.

 

사실 신앙인의 입장에서 이것만큼 고난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고난이 닥쳤을 때 무조건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고, 이 고난을 거두어 주시며, 제게 다시 당신의 은총을 허락하옵소서하면 오히려 겸손해 보이고 신앙심도 좋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고난을 정당하게 이겨내는 방법이 아니다. 이것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을 이겨내는신앙적인방법 같으나, 깊이 들여다보면, 고난의 문제를 살짝 비켜가는 처세술에 불과하다.

 

한 번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인생을 살면서 맞닥뜨린 고난 중,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진실로 만난 적이 있는지를. 위의 회개의 기도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께 아부해서 지금 당하는 고난에서 빨리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얄팍한 수사적 표현일 뿐이다.

 

그렇다면, 고난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욥기에서 배운다. 욥기는 우리를고난을 진지하게 대하는 영성의 세계로 인도한다. 고난을 당했을 때 가볍게회개기도를 통해서 고난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온 존재를 다해 직면해서 그 고난에 임재하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영성을 가르쳐 준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고난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욥기에 나타나고 있는 고난의 영성은 대게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고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고난을 직면한다는 것은 현재 나에게 일어난 고난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 대게 사람들은 자신에게 고난이 닥치면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하면서 고난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고난을 겪으면서도 더 이상의 진전 없이 마음만 상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서 속으면 안 된다. 우리는 고난을 겪으며 마음만 상한 상태로 그 고난을 시간 속에 묻어 둔 채 사는 것을산전수전다 겪은 양 생각한다. 그 자체로 어느 정도의유익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고난의 기억은 나의 인생의 에너지가 되지 못하고, 그림자만 될 뿐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겪을 때 우리는 온 몸을 다해서 그 고난을 우리 인생에 수용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억누르지 않는 것이다. 고난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하게도 하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 에너지가 바로 분노의 에너지다.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이는 필경범죄로 이어진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대부분은 인생의 고난에서 생성된 분노의 에너지를 잘못 다스려서 생긴 것들이다.

 

그렇다면 고난으로 생성된 분노의 에너지를 어떻게 해야 건전하게 풀 수 있는 것일까? 이 세상에서 고난의 분노를 받아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해야 한다. 신앙인은 이것을 잘하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분노를 엉뚱한 데가 풀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범죄자가 된다.

 

고난의 분노를 하나님을 향해 푼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탄원하는 것을 뜻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대한 자신의 분노를 숨기지 않으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리고 오히려 자기를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은 용서하셨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이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와 좌절감의 표현을 방향 없이 허공에 또는 애꿎은 이웃에게 하지 말고, 하나님께 향하여 해야 한다.

 

세 번째 단계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고난을 삶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고난의 분노를 하나님을 향해 풀었다면, 이제 그 고난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날 차례다. 왜냐하면, 고난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욥의 고백은 옳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기 2:10).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고난을 통해 겪는 고통이 가라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고난에 의해서 생성된 분노와 좌절의 에너지를 선한 것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뿐이시다.

 

욥은 오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고난에 의해서 생성된 분노와 좌절의 에너지를 선하게 바꾸는 단계에 다다른 것이다. 고난을 이겨내는 마지막 단계에서의 고백은 공교롭게도 자기 자신의 무지에 대한 고백이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3).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고백의 속성이다. 이 고백은 패배자로서의 고백이 아니라, 깨달은 자로서의 고백이다. 고난을 회피한 자의 고백이 아니라, 고난을 자신의 온 존재로 맞닥뜨린 자의 고백이다. 그렇다면 이 고백을 통해서 욥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이 고백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창조주되심에 대한 인정이 들어 있다. 즉 고난의 문제는 신비로운 창조 주권 차원에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차원에서 들여다 보아야 해결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욥에게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인식의 전환은 이렇게 표현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이는 풍문으로만 하나님을 알다가, 고난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바뀐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이다. 가치의 전환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살아가시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시라. 그것이 잘 바뀌지 않을 것이다. 돈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사시는 분은 무엇을 해도 돈만 보일 것이다. 그것을 중심으로 삶을 꾸려나갈 것이다. 건강에 가치를 두신 분은 건강을 중심으로 삶을 꾸려나갈 것이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이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이 바뀐 것이다. 이제 욥은 세상을 하나님이라는 창문을 통해서 바라본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바꾼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42:6). 여기서 회개는 히브리어 나함이라는 단어인데, 이는 마음을 바꾼다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회개와 조금 다르다. 만약 욥이 통상적인 회개, 즉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의미에서 죄를 인정했다면, 이는 전체적으로 모순에 빠진다. 욥에게 닥친 고난은 욥의 죄 때문이 아니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라고 다그쳤지만, 욥은 거기에 저항했다.

 

여기서 욥이 하는 회개는 마음을 바꾸는 행위이다. 그동안 하나님에게 법정소송을 제기하거나, 탄식에 빠져든 자신의 마음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아픔을 훌훌 털어버리고 자신의 일상으로 되돌아갈 준비를 했다는 뜻이다. 어려운 일 당한 사람들의 특징은 마음이 그 어려운 일에 가 있기 때문에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삶이 비뚤어지고 어긋나고 파탄에 이른다. 그러나 욥은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일상으로의 복귀를 결정한 것이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자의 중대한 삶의 변화이다.

 

하나님은 욥의 편에 서셔서, 오해를 회복시켜 주시고,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고, 삶을 회복시켜 주신다. 우선 엘리바스, 빌닷, 소발을 꾸짖으시며, 욥을 제사장 삼아 속죄할 것을 명령하신다. 친구들에게 정죄 당하던 욥이 하나님에 의해서 친구들의 속죄를 담당하는 중재자(제사장)가 된 것이다.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주신다.

 

하나님을 만난 자리에서는 언제든지 화해가 일어나고 생명의 회복이 일어난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지표!) 이것이 참 놀라운 역사이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봤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분노와 좌절이 절정에 다른 자리이다. 분노와 좌절의 끝은죽음이다. 죽음은 부정적인 에너지의 끝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조우가 일어났다. 그것의 결과는 부활이 일이었다. 부활은 화해와 생명의 메시지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곳에 일어나는 놀라운 은총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한다. “고난은 의식의 시작이다.” 고난을 통해서 무엇을 의식하기 시작할 것인가? 바로 하나님이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의식하지 못하면 그 고난은 그냥 형벌로 남겨질 것이고, 그림자 같은 상처만 남길 뿐이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의식하는 자는 고난을 통해 거듭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욥기에서 바로 이것을 봤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도약이다. 고난을 통해 이러한 신앙의 도약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지 않는다면, 고난으로 가득 찬 우리의 인생은 허무에 빠질 수 있다. 허무한 인생을 살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고난을 통해서 당신을 의식하기 원하신다.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길 원하신다. 고난을 통해 당신을 만나 더 풍성한 은혜, 화해와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 원하신다.

 

고난을 은근슬쩍 회피하지 마시라. 온 존재를 다해 맞닥뜨리시라. 고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라. 신앙의 도약을 이루시라. 그것만이 인생을 새롭게 하는 능력임을 믿으시라.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6. 3. 11:43

2013 6 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왕상 17:8-24, 7:11-17

제목: 당신은 선지자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과 신약의 두 본문은 매우 비슷한 내용을 전해줍니다. 비슷한 두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우리는 어느 시각에서 본문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존재가 바뀌게 됩니다. 첫째는 우리가 과부의 입장이 되는 겁니다. 과부의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바라보면,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만 끝까지 붙들면 우리의 삶을 돌보시고 채우시는 은총을 체험하게 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가 엘리야와 예수님의 입장이 되는 겁니다. 엘리야와 예수님의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바라보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어디에 있든지 어디를 가든지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내고 있는 교회력은 성령강림절 후 두 번째 주일을 가리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총의 역사가 모두 이루어진 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부의 입장보다는 엘리야와 예수님의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끊임 없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처럼,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하나님 외에는 붙들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심령이 가난한 자, 또는 그냥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단장의 마음, 이 창자가 끊어지도록 아픈 마음으로 간절히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 붙들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많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 입술에서 감사가 사라졌습니다. 풍요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보지 못하고, 풍요로움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가려버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 본문은 오히려 엘리야와 예수님의 시각으로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시대는 시돈과 같은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명하여 시돈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시돈은 바알숭배의 중심지요, 예루살렘과 대비되는 이방인의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더러, 그곳에 가서 살라고 하십니다. 돈이, 풍요로움이 세상을 지배하는 우리 시대와 다를 바 없는 곳이 바로 시돈입니다. 돈을 벌어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 돈을 벌어 내 욕심을 모두 표현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까지도 팔아먹고 자기의 탐욕스러운 삶을 지지해 줄 수 있는 것을 신으로 모시고 사는 시돈과 우리 시대는 닮아 있습니다. 바로, 그런 곳에 들어가서 살라고 엘리야를 부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시돈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으로 재미 있으신 분입니다. 시돈과 같은 이방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보내주신 후원자가, 사르밧 과부였다는 겁니다. 우리 상식 같으면, 엘리야를 이방 도시에 보내시면서 든든한 후원자,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팍팍 밀어줄 수 있는 든든한 후원자를 붙여 주시는 것이 도리에 맞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텐데,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를 엘리야의 후원자로 붙여 주십니다.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고대 사회에서 고아와 더불어 과부는 약자 중의 약자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고아와 과부를 착취하지 못하게 하는 율법이 명시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약자 중의 약자인 과부 중에서도, 오늘 말씀을 보니까 더 약자인 과부를 엘리야의 후원자로 붙여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약자여도, 끼니를 그나마 대충 때울 수만 있다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숟가락 하나 그냥 더 얹어서 먹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붙여준 과부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고, 이제 굶어 죽을 처지에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상황이, 이것 먹고 자살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게 마지막 음식이니까 이것 먹고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상황이 이런 사람한테, 엘리야의 요청은 참으로 어이 없어 보입니다.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무슨 조직 폭력배도 아니고, 힘 없는 어린 아이 삥 뜯는 동네 깡패도 아니고, 이제 마저 남은 한끼 식사 하고 굶어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에게 그것 마저 내놓으라니요?

혹자는 이 본문을 가지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의 종을 잘 대접해야 축복 받는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주님의 종을 잘 대접해서 나쁠 건 없지만, 오늘 본문은 그것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어이 없는 요청을 한 것일까요?

 

이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열왕기에 흐르고 있는 전체적인 맥락을 봐야 합니다. 사르밧 과부의 형편과 매우 대조되는 본문이 열왕기상 4:22, 23절에 나옵니다. 바로 솔로몬의 식탁이 얼마나 풍성했는지에 대한 본문입니다. “솔로몬의 하루의 음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 고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 고르요 살진 소가 열 마리요 초장의 소가 스무 마리요 양이 백 마리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진 새들이었더라.” 어떻습니까? 사르밧 과부가 지니고 있었던 한 움큼의 밀가루와 약간의 기름과는 너무도 다른 식사 풍경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솔로몬은 축복 받았고, 사르밧 과부는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 반대입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풍요로움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점점 잊어 갔습니다. 위에서 예기한 것처럼, 풍요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점점 타락해서 풍요로움으로 하나님을 가려 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솔로몬 왕 이후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우상숭배의 징벌로, 하나님께서는 팔레스타인 지역 전역에 가뭄을 내리십니다. 그 가뭄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던 사람이 바로, 사르밧 과부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사르밧 과부가 살고 있는 시돈은 바알숭배의 중심지였으므로, 이 상황이 주는 메시지는 굉장히 큽니다.

 

농경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사는 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적절한 비는 농사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들이 바알을 숭배한 이유는 바알이 비를 내리고 멈추는 것을 주관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현상을 보고, 옛날 사람들은 참으로 멍청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엇을 섬기느냐, 대상만 다르지 그 근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요즘에 세상을 주관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돈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본산인 미국이 특히 그렇습니다. 돈이 되지 않는 것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상품 가치로 봅니다. 돈이 될 만한 사람에게만 투자합니다. 돈이 안 된다 싶으면, 이제 더 이상 상품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쓰레기 버리듯 버려 버립니다.

 

남의 이야기 할 것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이 운영하는 비즈니스를 찾는 손님들을 여러분은 무엇으로 보입니까? 그들을 Sir, ma’am, 이라고 보통 부르는데, 진짜 그들이 Sir이고 ma’am이어서 그렇게 부릅니까? 바꾸어서, 우리가 어느 상점에 갔을 때, 그들은 우리에게 Sir, ma’am 하고 부릅니다. 그들이 정말 우리를 Sir로 생각하고 ma’am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부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손님이나, 우리 자신에게 Sir, Ma’am 하고 부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를 보여드리고자 할 뿐입니다.

 

우리 시대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에서 Sir, Ma’am은 인격적인 언어가 아니라, 비인격적인 언어, 그저 돈이 매개가 된 사무적인 언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식하든 인식하고 있지 못하든, 그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숭배에 자신들도 모르게 빠져들었듯이, 우리도 돈(맘몬)숭배에 우리들 자신도 모르게 빠져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엘리야라는 한 선지자가 한 일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오늘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사르밧 과부여, 당신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지도자의 잘못이요, 당신의 지도자들과 당신이 믿고 있는 바알이 이 세상의 주관자가 아니요 당신을 먹고 살게 해주는 신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세상의 주관자시요 당신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인 줄 아시오!” 이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선지자, 엘리야가 어떻게 사르밧 과부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에서 보이듯이, 비를 내리는 분은 누입니까? 바알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까? 가루와 기름을 공급하시는 분, 생명을 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바알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까?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게 하셨을까요? 가루와 기름이 막 스스로 불어났을까요? 사실, 이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그렇게 역사할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미신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큰 축복 중의 하나가 뭔지 아십니까? 수고한대로 소출을 거두는 것입니다. 내 손과 발이 아무리 힘써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거둘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공부 열심히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공부한 만큼의 결실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사르밧 과부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아마도 아들이 수고한 대로 그 손에 가루와 기름을 쥘 수 있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을 겁니다. 내가 수고한 대로 내가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내 수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거기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면 감사하게 되는 거고, 이것을 모르면 내가 수고 해서 번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쓰는데 뭐가 잘못이야하면서 자신의 욕망만 드러내게 됩니다.

 

상황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루와 기름이 떨어져 굶어 죽게 된 상황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 사르밧 과부에게 발생합니다. 가루와 기름의 공급원이었던, 사르밧 과부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그의 아들이 죽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제는 정말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살아갈 이유도 없어졌습니다. 살 소망이 없는 것이죠. 엘리야에게 한 사르밧 과부의 원망에서 그것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한계를 정해 놓고 하나님을 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까지는 내가 하나님을 믿겠는데, 여기를 넘어가면 하나님은 더 이상 없는 거야!’ 사르밧 과부에게 신앙의 믿음의 마지노선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죽게 되자, 사르밧 과부는 돌변합니다. 절망합니다. 흔들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우리에서 발견되는 신앙의 한 형대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정해놓은 신앙의 마지노선은 어디까지 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신앙에는 마지노선이 없습니다. 그 끝이 없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그 끝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문구를 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이 문구를 보고,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 우리 신앙의 마지노선은 죽음까지야! 이 정도 마지노선을 생각하고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은 그나마 참 괜찮으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죽도록 충성하라, 죽기까지 순종하라라는 말들은 단순히 죽음까지만의 한계를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다 바쳐서 그리고 죽음 이후에까지, 영원히 하나님을 신앙하라 믿으라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 상황을 아주 잘 말해주고 있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계신다면 나는 지옥에 가겠다.” 끝까지 예수님 붙들겠다는 말입니다. ? 지옥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기 보다, 예수님이 안 계신 곳이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어디든지, 예수님이 계신 곳이라면, 그곳이 아무리 지옥과 같은 곳이라도,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천국입니다.

 

하나님을 놓는 순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믿음을 져버리는 그 순간, 그곳은 바로 지옥이 되는 겁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지옥의 순간은, 아들이 죽었을 때 하나님을 놓아버린 바로 그 순간입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그 사실이 지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렸다는 그 사실이 지옥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선지자, 엘리야는 지옥으로 변한 사르밧 과부의 삶을 천국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죽은 아들을 살게 한 것입니다. 죽은 것을 살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선지자가 하는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해 사르밧 과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바알이 생명을 주는 신이 아니요, 그것은 우상에 불과하고, 참 하나님, 생명을 주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초점을 엘리야에게 맞추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해 보십시오. 성령강림절 후,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너무도 메시지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엘리야와 같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선지자로 부르십니다. 우리를 선지자로 부르셔서, 시돈과 같은 바알숭배, (맘몬)숭배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살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살되, 바알숭배자로, (맘몬)숭배자로 이방인으로 살지 말고,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분명한 축복의 통로가 되는 선지자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참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지 증거하는 선지자로 살라고 부르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이 사르밧 과부처럼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여 나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는 귀한 사람입니다. 내 비즈니스를 찾아주는 손님은 내 욕망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주께 하듯 해야합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내 비즈니스를 찾아주는 손님은 내 돈벌이의 수단이 아니라, 내 섬김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섬겼는지,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를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나인성 과부의 슬픔에 동참하셨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축복의 통로인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이 마음이 꼭 있어야 합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것처럼, 나만 배부르면 그만이라는 무관심이 아니라, 저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줄 아는 긍휼함(Compassion)이 마음에 꿈틀거려야 합니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넬 줄 알아야 합니다. “울지 말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물질에 굶주린 시대가 아니라, ‘위로에 굶주린 시대입니다. 그냥 한 없는 위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들 왜 위로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나도 위로 받고 싶은데, 나한테 무슨 위로할 힘이 있다고 내가 저 사람들을 위로해 주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위로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힘이 있는 데서 위로하면 그것이 무슨 위로입니까? 동정이지요? 위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위로하는 것이 위로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먼저 위로하십시오. 죽을 힘을 다해 먼저 위로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갑절의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죽은 것과 같이, 소망이 없는 곳에서 생명을 심는 거룩한 일을 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관을 만지는 수고로움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율법에 관(시체)를 만진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 것을 깨면서까지 소망 없는 곳에,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불어 넣으신 분이 우리 예수님입니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우리는 우리의 체면 때문에, 내 성격 때문에, 관습 때문에, 어떠한 이유에서든 수고로운 일을 피하려 하고, 자신에게 불이익이 될만한 일을 절대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성령 받은 선지자라면, 수고로움을 마다하거나 겪게 될지 모르는 불이익 때문에 소망을 심는 일, 생명을 심는 일, 덕을 세우는 일을 피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긍휼과 위로, 수고로움을 통해 모든 사람이 무슨 고백을 하는지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는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 앞에, 이 사명 앞에, 당신은 정말 선지자입니까?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5. 27. 04:03

2013 5 2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학개 1:1-15

제목: 황폐함을 보라!

 

서울 가신 오빠가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비단구두이다. 그러면 내가 오빠를 사랑한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비단구두를 사가지고 오실 거라는 그 마음, 간절히 기다리는 그 믿음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십자가로 대표된다.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증거는 무엇인가? 십자가 목걸이 하고 다니면 되는가? 교회 안 빠지고 열심히 다니면 되는가? 헌금 많이 하면 되는가? 봉사 열심히 하면 되는가? 착한 일 많이 하면 되는가? 아마도, 그것은 각자마다 다 다를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증거는 성전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 또한 성전이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례대로 제사 드리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학개 선지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학개서의 배경은 포로귀한 이후이다.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는 망하고, 모든 백성이 흩어지고 고관들은 포로로 잡혀갔다. 이들은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생각 때문에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회복해 주실거라는 소망 가운데 살았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포로생활을 한지 70년 정도가 지나서,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한 뒤, 고레스 칙령에 따라 유다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것이 BC 537년의 일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17년이 지난 BC 520년에 일어난 일이다. 포로 귀환한 지 17,8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들이 처음 포로 귀환했을 때, 의욕을 가지고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여러 난관에 부딪혀 성전 재건의 사역을 손 놓는다. 그리고 성전 재건에 관한 생각을 이렇게 가졌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2). 여기에는 이러한 숨은 뜻이 들어 있다. ‘자신들은 성전 재건을 해보려고 했는데, 방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성전 재건을 못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외부의 요인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것이다.’ 이런 것을 심리학적 용어로, ‘핑계라고 하는 거다. 그러면서 이들은(바벨론에서 귀환한 사람들) 성전을 재건하는 일보다 자신들이 거주할 집을 짓는 일을 더 우선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만약 이들의 판단이 옳았다면 이들의 삶은 풍요로워졌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집을 먼저 세우려 했던 이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일을 간섭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잠시 멈추고, 이들은 이들의 삶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학개 선지자는 이 상황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5).

 

성전 재건의 일을 뒤로하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와 자기 집을 짓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한 이들의 삶을 한 번 보라. 6절 말씀을 좀 쉬운 성경으로 그대로 읽어보자. “너희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했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이 되었다.” 농사일과 집 짓는 일에 온 정성과 마음을 쏟아 부었는데, 그들은 기대했던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이럴 때 삶에 패닉이 온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학개 선지자는 다시 한 번 말한다.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Consider your ways.”(7).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시무 레바르켐알 다르케켐)”(7). ‘심 레바르는 문자적으로, ‘마음을 두다’, 즉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 주의하고 생각하는 행위를 표현한 것이다. ‘다르케켐은 문자적으로, ‘너희의 길들에인데, 이것은 삶의 여정이나 행동 방식 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들이 걸어가는 길과 삶의 방식, 현재 그들이 살아가면서 취하는 행동들 전반을 포함하는 표현이다. 멈춰 서서 자신의 삶을 좀 진지하게 돌아보라는 뜻이다. 왜 이럴까? 왜 이렇게 만족이 없을까? 왜 이리 평안하지 못할까? 왜 이렇게 풀리지 않을까?

 

어려움을 겪고 있는 포로귀환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해법을 주신다. 8절 말씀이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8). 그냥 겉에서 보기에는 굉장히 간단한 처방이다. 성전만 재건하면 된다!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이들은 17,8년 동안이나 하지 않고 있었을까?

 

겉보기에는 그래도,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자신들의 마음 또한 성전 재건이 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마음도 없을 뿐더러,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려는데, 방해까지 심하다면, 당연히 그 일 하기는 힘들어지는 거다. 마음에도 없었는데, 마침 그 일을 하는데 방해되는 것이 나타나면, ‘아 잘 됐다! 그냥 핑계 대고 그만 둬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마음이다. 교회 오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는데, 마침 자동차 시동이 안 걸리면 우리는 대뜸 마음에 핑계가 생깁니다. ‘내가 안 갈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고, 자동차 시동이 안 걸려서 못갔어!’

 

여기서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 성전만 건축하면 만사 OK이구나!’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니까, 신앙의 발전이 없는 거다. 이것은 철저하게 고대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서 해석해야 한다. 이들에게 성전은 무슨 의미, 무슨 상징인지 살펴야 한다. 이들에게 성전은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다. 아주 실재적인 문제였다. ‘성전이 있고 없고는 아주 실재적인 문제였다. 다른 말로 해서, 지난 17,8년 동안 이들에게 성전이 없었다는 것은 이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요즘 말로 옮기면, 이들은 없이 17,8년 동안이나 산 것과 똑같다. 17,8년 동안 돈 없어서 홈리스로 살았다고 생각해 보라. 이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겠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삶이 그렇게 피폐했음에도, 왜 그랬는지 그 문제의 근원을 몰랐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삶의 황폐함이 안 보였다는 것이다.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에 들어간 개구리는 자신의 운명을 잘 알지 못한다. 자신의 처지를 눈치채지 못한다. 그냥 물 속에서 놀기 바쁘고, 숨쉬기 바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뜨거워진 물에 인생을 마감하고 만다.

 

개구리에게 필요한 것은 잠시 멈추고 주변을 살피는 것이다. 뭔가 좀 이상한데?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Consider your ways!”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포로귀환한 유다 백성들에게 성전 건축을 재개하라고 부르신 때는 이들이 한가하게 놀고 있을 때가 아니다. 곡식들이 한창 자라나는 시기였다. 굉장히 바쁜 시기였다. 지금 당장 하는 일을 멈추면 굶어 죽게 될지 모르는 그런 시기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너 자신을 한 번 되돌아 보아라!’

 

사실, 하나님의 말씀도 중요하지만, 오늘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다 백성들의 반응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각 반응한다. 14절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

 

이들은 예전에 안 그랬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지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감동을 못받았다. 예레미야가 그렇게 목에 피가나도록 외쳤지만, 이들은 오히려 예레미야를 잡아 가두고 예언을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다. 그런데, 포로생활을 겪고 돌아온 이들의 반응은 달랐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두려움이 있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이다.

 

예수를 믿기 전과, 예수를 믿은 후의 삶 중 달라져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다. 예수 믿기 전이나, 예수 믿은 후나,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하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다르다. 예수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콧방귀를 꼈는데, 예수 믿은 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는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으시는 분들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실 줄로 믿는다. 예수 믿은 후에도 정신 없이 살다 보면, 무엇이 우선 순위를 가져야 하는지 헷갈리고 놓치는 경우가 있다. 성건 재건을 방해했던 도비야 같은 요소가 우리 삶을 둘러 싸고 있다. 그것과 싸우다 보면 정신 없다. 정신 못 차린다. 당연한 거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삶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잠시 멈추고 자신의 행위를 진지하게 되돌아 볼 줄 아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개 정신 차리고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멀리 뭍에서 떠나 있는 경우가 있다. 탕자처럼 아버지 집을 떠나서 허랑방탕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정신 차리고 배의 방향을 틀어서 뭍으로 돌아오면 된다. 그럴 때, 정신 차리고 발걸음을 돌려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면 된다.

 

자신의 삶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황폐함을 좀 보시라. 육신의 황폐함, 정신의 황폐함, 마음의 황폐함, 관계의 황폐함, 경제의 황폐함 등, 잠시 멈추고 돌아보면 이랬나!’싶은 정도로 황폐해진 삶의 한 부분이 보일 것이다. 그럴 때, 우리를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란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5. 20. 05:59

2013 519일 성령 강림 주일(오순절) 예배 설교

본문: 2:1-4

제목: 믿고 기대하는 자에게 성령이 온다!

 

워싱턴에 가면 미국 국방성이 있습니다. 그 건물을 일컬어 펜타곤이라고 합니다. 건물의 모양이 오각형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입니다. Pente라는 말은 헬라어로 숫자 5를 나타내는데, 그래서 Pentecost라고 하면 오순절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 나라 말에서열흘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은 열흘이 다섯 번 지난 날, 즉 오십일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해지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오십일이 지난 날을 오순절이라고 했느냐 입니다. 거꾸로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오십일을 거슬러 올라가면 무슨 날인가 입니다.

 

이것을 좀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절기 문화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 중, 유월절과 초실절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은 교회를 좀 다니신 분은 아실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과 관련이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가장 중대한 절기입니다. 모세가 애굽에 들어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오기 위해서, 애굽의 바로 왕과 싸울 때 내린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이 장자 재앙이었습니다. 이것은 애굽에서 태어난 장자(첫째 아들, First Son)를 모두 죽이는 재앙인데, 이 재앙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은 어린 양의 피를 현관문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신이 장자를 죽이러 돌아다니다가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문은 그냥 통과(Passover)했습니다. 이 마지막 재앙으로 인해, 애굽의 바로 왕은 모세의 요청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줍니다. 바로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제정된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의 어린 양과 같이 예수님의 죽임이, 그의 피가 재앙으로부터 구원해 주었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절기에 맞춰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냥 아무렇게나 진행되는 법이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 당신께서 제정하신 뜻에 따라서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은 안식 후 첫날 새벽입니다. 이 날이 유대인 절기 상으로 무슨 날이냐 하면, 초실절입니다. 초실절은 묶어두었던 보릿단의 첫 열매를 거두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에는부분이 전체를 대표한다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 중, 처음 것을 드림으로, 그 나중에 있을 모든 것을 대표한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첫 번째가 중요했습니다. 장자 재앙이 무서운 이유는, 장자가 그 집안의 첫 번째 아들인데, 첫 번째 아들에게 재앙이 임했다는 것은 그 집안 전체에 재앙이 임한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초실절에, 처음 익은 보리를 베어서 하나님께 제사(소제)를 드린 이유는, 처음 열매를 드림으로 인해 이제 앞으로 계속해서 거두게 될 열매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비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초실절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 20절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두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여기서 첫 열매는 초실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기대하고 소망할 수 있습니까? , 바로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겁니다.

 

오순절은, 바로 이 초실절로부터 오십일이 지난 날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오순절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길래, 굳이 이날, 다른 날도 아니고, 바로 이 오순절 날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신 것일까요?

 

초실절로부터 시작된 보리의 수확은 밀의 수확으로 이어집니다. 밀과 보리는 이스라엘에서 나는 곡물로서, 동물 사료로 쓰이거나 가난한 농부들이 주로 먹는 중요한 양식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신명기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들어가서 살게 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나는 식물들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실 때, 일곱 가지를 말씀해 주시는데, 밀과 보리, 그리고 포도, 무화과, 석류, 올리브, 대추야자를 말씀하십니다. 밀과 보리, 이 두 가지의 곡식과 포도, 무화과, 석류, 올리브, 대추야자, 이 다섯 가지의여름 과실이 가나안에서 나는 것들로서 그들의 먹고 산 양식이었습니다.

 

이 양식들은 두 철에 걸쳐서 수확합니다. 밀과 보리의 수확을 시작으로, 밀과 보리의 수확이 끝나면, 이제 여름 과실의 수확이 시작됩니다. 오순절은 무슨 시기인가 하면, 밀과 보리의 수확을 마치고 여름 과실 수확을 기다리는 과도기의 시기입니다. 밀과 보리의 수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고, 여름 과실의 추수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때가 바로 오순절인 것입니다.

 

, 그렇다면, 왜 오순절 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셨는지 이제 이해가 됩니다. 유월절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 사역이 예수님의 승천으로 일단락 되고, 이제 새로운 시대, 성령의 시대, 교회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오순절에 성령님을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31 31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시겠다는 말씀으로 유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건은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입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시기가 바로 유월절 사건이 있은 지, 50일이 지나서 입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사건과도 관련이 있는 날입니다. 바로 그 날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내려 주셨다는 것은, 예레미야의 예언처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새로운 언약을 맺어 주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니까,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을 맺어 주신겁니다. 그 언약의 매개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모세였던 것처럼)인 것입니다. 그 언약의 징표가 바로 성령님(십계명 돌판이었던 것처럼)이신 겁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순절이 이르렀다고 하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순절은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는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 “너희가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하신 말씀이 성취된 거라는 겁니다. 이 성취의 개념은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약속하고 있는 성령이라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라든지, 부활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그냥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성취된다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 편에서는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믿고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믿고 기다리는 것을희망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인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분명하게 성취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분명하게 성취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부활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분명하게 성취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선포하신 것은 꼭 성취되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때? 하나님의 때에!(이것이 카이로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걱정 근심을 하거나, 조바심을 낼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할 일은 그저 희망 가운데 하나님 주신 삶을 성령 충만하게 기쁨으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오순절, 성령 강림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성령 강림절이 무엇인지, 왜 성령님께서는 하필 오순절에 오셨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순절은 새 시대를 여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중대한 시기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철학적 용어 바꾸어 표현하면,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온 절기입니다. 우리가 교회력의 성령강림절(오순절)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새로운 시대, 새로운 패러다임에 접어 들었습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신 새로운 시대, 하나님께서 바꾸신 새로운 패러다임, 하나님께서 던지신 주사위는 그 누구도 바꾸거나 거둘 수 없습니다. 다문, 필요한 것은 결단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여신 이 시대, 이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언약에, 참여할 것이나 말 것이냐!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 새로운 언약에 참여하는 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신 새로운 언약의 시대,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고, 참여하지 않는 자는 아직도 그 은혜를 모르고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죄 가운데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 어떠한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시작된 구원의 은혜에 동참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은혜를 모른 채 살아가시겠습니까?

 

믿고 기대하는 자에게 성령이 옵니다. 왜냐? 우리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의 어린 양이 되어 우리를 대신하여 (또는 대표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 가운데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부분이 전체를 대표한다”. 이 원리는 우리 믿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표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것을 기대하십니까? 믿고 기대하는 자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실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자는 이 진리(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었다 부활할 것이다!) 가운데 살 것입니다. 이 소망 가운데 살 것입니다. 이 소망 가운데 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쁘고 즐겁고 복된 삶인 것입니다.

 

바로 오늘, 믿고 기대하십시오. 성령님께서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불의 혀처럼, 믿고 기대하시는 여러분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5. 19. 05:44

2013 5 1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고린도전서 15:50-58

제목: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IV – 부활을 살라!

 

요즘 인터넷에서 화제인 그림이다. <여자의 일생>이란 제목의 그림인데, 한 여인이 아기를 낳아 기르고 세상을 떠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확률 게임이다. 내가 태어날 확률이 얼마나 됐을까? 내가 결혼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내가 살다 사고를 당할 확률은 얼마일까? 내가 살다 암에 걸릴 확률은 얼마일까? 내가 살다 예수 믿을 확률은 얼마일까? 등 이 세상의 모든 일은 확률 게임이다. 그 확률이 0-100에 이른다. 세상을 살면서 일어나는 확률 게임 중, 100%의 확률을 지니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허상이 아니다. 죽음은 실체가 있는 대상이다. 지금 내가 눈으로 보고 있는 어떠한 대상보다 확실한 실체가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에 이 대상을 전혀 눈여겨 보지 않는다. 실체가 없는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죽음을 선고 받으면 그때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죽음이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즐거운 학문>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죽음, 그리고 죽음의 정숙함이야말로 우리 미래에서 유일하고 확실하며 모두에게 평등하다! 이 유일하고 확실하며 평등한 사실이 인간에게 아무런 힘도 미치지 못한다니, 또 인간들은 자신이 죽음의 형제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니, 이 얼마나 괴이한 일인가!”

 

평소에 우리는 살아 있다라는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한다. 그래서 지루함, 권태로움, 괴로움 등을 느낀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 들어서면 그때 비로소 생명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우리가 죽음을 이야기 하는 이유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죽음을 이야기 하는 이유는 생명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서다. ‘죽는다는 것을 가볍게 여기면서 인생을 막 사는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망나니라고 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실체를 인식하면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사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성인이라고 불릴 수 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현실에서 평상시와 다름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건강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떠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그런 최후는 많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도 막연히 마지막까지 정상인과 다름없이 살다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막상 그때가 닥치면 전혀 다른 현실에 배신 당한 기분까지 든다고 한다.

 

드라마 같은 곳에서는 죽을 때,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죽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현실 불가능 하다고 한다. 그것은 드라마이기 때문에 극적으로 그렇게 꾸밀 뿐이지, 현실 속에서는 그렇게 죽어가는 광경이 낭만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 죽음에 관해서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우리는 지난 3주 동안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죽음의 순간에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 보았다. ‘지금 당장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라!’,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 그리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주제를 가지고,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았다.

 

오늘은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라는 제목의 마지막 말씀으로 부활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앞 선 세 번의 말씀은 특별히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고, 또는 실천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은 기독교인만의 독특한 신앙에 관한 이야기이다. 죽음에 관해서는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주제이지만, ‘부활이라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말하기 힘든 주제이다. 그만큼 부활이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매우 독특한 신앙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기원을 사람에게서 찾자면, ‘예수라는 인물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라는 인물은 2천 년 당시 유대 땅에서 매우 흔한 이름이었다. 메시아 사상이 팽배했던 그 당시, 모든 유대인들은 자신의 자식이 메시아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예수라는 이름을 많이 붙였다. ‘예수는 구약의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으로,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메시아란 구원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팍팍한 삶의 현실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어떠한 인물이 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심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 예수가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사건이 있다. 그것이 바로 부활 사건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2천 년 전,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던 예수라는 사람, 나사렛에서 살다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라는 사람, 바로 그 사람에게서 일어난 어떠한 사건에 집중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 예수라는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없는 매우 독특한 사건이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는 십자가이다. 그리고 가장 흔하게 보는 조형물도 십자가이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십자가 사건을 기독교의 기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깊이 있게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이 중요해진 이유는, 부활 때문이다.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 사건은 그냥 어느 죄인의 그것과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중요한 이유는 십자가에서 달려 죽었던 그 사람에게 부활이라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부활을 가리켜 주는 손가락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찬송가에서도 십자가의 능력에 대해서 고백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 자체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가리키고 있는 어떠한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다.

 

십자가는 죽음의 자리를 가리킨다. , 우리의 죽음의 현실을 가리킨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서 봐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죽음의 현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의 현실이다. 이것을 보지 못하면, 백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그 능력이 나타나질 않는다.

 

우리가 읽은 본문이 들어 있는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대한 교훈이 담긴 곳이다. 바울 서신은 복음서보다 일찍 씌어졌는데, 바울 서신에는 예수의 일대기가 전혀 나오지 않고, 그저 이렇게 부활에 관한 복음만이 등장할 뿐이다. 복음서에는 부활에 관한 기사가 바울 서신의 그것과는 다른 형태로 등장한다. 그저, 일대기 형식으로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만 보아서는 부활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다. 그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정도로만 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부활이라는 것이 단순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정도의 사건이 아님을 가리켜 준다.

 

부활이란 무엇인가? 여러분은 부활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기독교인의 영성은 이 부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는 만큼 성숙해진다. 이 세상에서 잘 살려면, 그리고 세련되게 살려면 윤리도덕적인 사람이 되면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련된 삶을 위해서, 윤리도덕적인 삶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윤리도덕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혀 그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부활이란 무엇인가? 부활이란 종말에 관한 실체이다. 그러니까, 부활이란 차원이 다른 이야기라는 뜻이다. 사실,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하기도 힘들다.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어떠한 것을 설명할 때,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느낀다. 부활도 마찬가지다. 부활은 우리가 겪는 이 세상의 현실과 차원이 다른 현실이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활에 대해서 미주알 고주알 설명하지 않고, 듬성듬성, 애매모호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2-53).

 

이것은 부활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는 구절인데, 부활의 상황이 죽음과 연관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다음 구절이 이어진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

 

여기서 부활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부활은 죽음을 이기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은 이렇게 묻는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부활이란, 적어도, 우리가 가장 인생에서 두려워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상황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상황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21: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현실에서 가장 확실한 진리는 누구든지 언젠가는 죽는다라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죽음이라는 실체에 대해서 얼마나 깊은 반응을 하는 지와 상관 없이, 여러분은 반드시 죽는다. 그것만큼 우리의 삶을 허무하고 슬프게 하는 것도 없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가장 아픈 일이 바로 죽음의 이별아닌가!

 

죽음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현재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현실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 지금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바로 죽음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죽음의 현실과는 또다른 현실이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바로 부활이다. 이 부활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겪는 현실과 차원이 다른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것과도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부활이라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은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은혜이다. 복음서는 그러한 정황을 초자연적인 현상’(병자를 고친다든지, 죽은 자를 살리신다든지, 물 위를 걸으신다든지 등)을 들어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 사건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 부활의 현실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밖에는 없다. 믿음이란 나의 욕망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 사건에 집중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나의 욕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부활은 하나님만이 주권적으로 일으키실 수 있는, 새로운 창조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 사건에 집중하는 일이다. 그것이 왜 중요한 것인지,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 부활을 산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 사건에 집중하는 것을 뜻한다. 인생을 후회 없이 사는 가장 확실한 길이 여기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을 믿고 싶다

이 땅 위에서 별처럼 살았던 사람도 별이 되고

이 땅 위에서 별 볼 일 없이 살았던 사람도 별이 되고

죽어서 모두 별이 되어 만난다면

그 잘난 교만도

그 못난 마음도

반짝반짝 허물어지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별처럼 살아도 상관 없고

별 볼일 없이 살아도 상관 없다

죽으면 모두 별이 되어 만날 텐데

뭐 그리 아등바등 살아갈 필요 있겠는가

교만을 탓할 것 없고

못난 마음도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그저 빛나는 대로 살면 될 뿐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을 믿고 싶다

반짝반짝 허물어질 내 마지막 날

두 눈을 꼬옥 감으면

어느새 저 높은 곳에 별이 되어 걸리는 인생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너도 나도 다 한결같이 하늘에 걸리어 반짝반짝 빛나는 인생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5. 6. 04:35

2013 5 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욥기 34:14-15

제목: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III –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시키지 말라

 

애틀란타 갔다 차 다고 내려오면서 집사람과 나눈 대화. “아이들이 너무 이뻐서천년만년 함께 있고 싶다.” 그런데 우리는 머지 않아 뿔뿔이 헤어질 것이다.” 슬프다. 그냥 오늘 하루의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밖에.

 

오늘 참으면, 내일 더 행복한 날이 올거야!’ 우리는 이런 착각 속에 산다. 오늘이 가면, 내일은 오지 않는다. <희망찬 내일>은 오시다 심장마비 걸려서 돌아가셨다. 그러니 내일을 기다리지 말고 오늘 하고 싶은 일을 하라. 그것이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면.

 

일생은 하는 순간 지나간다. <사진> 하고 지나가는 일생에 우리는 너무도 내일타령만 하면서 오늘을 희생시키며 산다. 우리는 참고 견디는 인내의 인생을 미덕으로 여긴다. 누구나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인생을 갈망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요즘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 왜 그럴까? 우울증은 마음의 부조화 때문에 오는 병이다. 이는 어쩌면 지나친 인내와 희생이 마음의 부조화를 야기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희망찬 내일> 기다리다 그 <희망찬 내일>이 오시다 심장마비 걸려서 돌아가신지도 모르고, 마냥 참고 인내하고 희생하고 기다리다가, 지쳐서 생긴 병일지도 모른다.

 

자식을 위해서 매일 참으면서 살았던 부모들은 자식이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안 되면, 이런 원망을 하면서 자식을 나무란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너 키우려고 내가 얼마나 희생했는데…” 그러나, 자식은 부모가 행복한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 모른다. 그러니, 그런 자식이 어떻게 부모님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는가? 자식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또는 누군가를 위해서 무조건 희생하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이 하루하루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행복은 바이러스와 같아서, 전달된다. 내가 지금 행복하지 않은데, 자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고 착각이다.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라! 그러면 자녀는 부모에게서 배운 대로 행복하게 살 것이다!

 

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가? 오늘 말씀을 보라.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무슨 말인가? 생명은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웰빙을 외치는 요즘, 운동 열심히 하고 먹을 것 잘 가려 먹고 그러면 잘 먹고 잘 살수 있다고, 장수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다른 말로, 내 생명을 내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삶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선전문구에 불과하다. 생명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생명의 여탈권을 쥐고 계시다. ‘그가 뜻을 정하시면’, 우리는 가는 것이다. 거기에 반항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좀 빨리 가고 늦게 가는 것뿐, 인생은 언젠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뜻대로 죽으며, 우리가 매일 밟고 다니는 흙으로 돌아간다.

 

요즘은 우리가 밟고 다니는 것이 흙이 아니라, 콘크리트, 아스팔트라서, 흙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흙과 친하게 지내지 않으니, 우리의 생명이 어디로 돌아가는지에 대한 깨달음도 더딘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오늘을 흥청망청 살라는 말이 아니다. 그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 행복은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숨쉬며 살고 있는 바로 이 시간, 이 공간에 있는 것이다. 행복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다.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보시라. 살면서, 내일을 위해 오늘을 얼마나 희생시키며 살아왔는지. ‘오늘 내가 이렇게 열심히 희생하면, 내일은 행복할거야. 더 이상 나의 눈에 눈물은 없을 것이고, 내 육체는 쉬게 될 것이야!’ 이런 생각하시면서 오늘을 희생하면서 살아오지 않으셨는가? 그러나, 정말 오늘 여러분의 삶 가운데 눈물이 없으신가? 여러분의 육신은 쉬고 계신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죽기 전에 후회하는 것들 중에, 이런 것이 있다. 1.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2.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했더라면. 3.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4. 죽도록 일만 하지 않았더라면. 5.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떠났더라면. 6. 고향을 찾아가 보았더라면. 7.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맛보았더라면. 8. 건강을 소중히 여겼더라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죽기 전에 후회하는 이런 것들이 여전히 여러분 마음 속에 안 와 닿을지 모른다. ? 죽음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정한 영성이란, 남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가슴 속 깊이 깨닫고 함부로 인생을 살지 않는 것이다.

 

이제 대부분 인생을 다 사신 분들이기 때문에,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이라든지,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했더라면’, 이라는 후회의 말을 듣고, 사실 인생을 획기적으로 바꿀만한 그 무엇인가를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나머지 것들은 우리가 귀담아 듣고 바로 오늘부터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다.

 

죽도록 일만 하지 말고, 좀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나러 다니시고,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도 가시고, 고향도 좀 찾아가 보시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맛보시고 다니시라. 이런 것이 왜 중요한지 아시는가?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제 탐험의 목적은 이것입니다. 아직도 언뜻언뜻 보이는 행복의 흔적들을 자세히 찾아나가면서 그것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측정해 보는 겁니다. 폐하의 주위가 얼마나 어두운지 알고 싶으시다면 멀리 보이는 희미한 불빛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셔야 합니다.” (76)

 

다른 사람과 사귐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내가 사는 곳을 떠나 여행을 한다는 것은 나를 돌아보는 일이다. 그것을 통해서 나의 행복이 얼마나 부족한지, 또는 나의 행복이 얼마나 넘치는지, 측정해 보는 일이다. 여행을 다닌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행복을 발견하는 일이다. 발견한 행복의 흔적들을 나의 삶 속에 비추어 보는 일이다. 그러면, 나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행복을 측정할 수 있다. 얼마나 부족한지, 아니면 넘치는지.

 

선교여행 같은 것을 가지고 하면, 뭐 하러 가냐고 그러시는 분들이 있다. 그냥 돈 보내주면 되지, 왜 돈 낭비하면서 거기에 가냐고 하신다. 선교여행이든, 그냥 여행이든, 그것은 여행의 목적을 전혀 모르시는 분들이 하는 말씀이다. 여행은 돈 쓰러 가는 것이 아니다. 여행은 나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내가 있는 곳을 벗어나 보아야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다. 선교여행 가자! 가서, 우리의 행복을 한 번 발견해 보자!

 

그리스 신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대단한 발명가인 다이달로스는 미궁 속의 괴물 미노타우루스를 제거한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이용해 탈출하는 방법을 알려준 죄로 아들과 함께 미궁의 꼭대기 감옥에 갇힌다. 다이달로스는 새의 깃털을 모아 큰 날개를 만들어 아들 이카루스에게도 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완성된 날개를 밀랍으로 몸에 붙이고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카루스는 하늘을 나는 것에 몰두해서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충고를 잊어버리고, 태양을 향해 높이 오르다가 밀랍이 녹아 바다에 추락하여 죽고 만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여기에는 불변하는 진리의 말씀이 새겨 있다.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 충고를 잊어버리지 말라. 이 충고를 잊어버리고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이카루스처럼 허무하게 추락하는 수가 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간 죽는다. 그때는 하나님만 아신다. 그러니, 우리는 그때를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의 할 일을 하면 된다. 우리의 할 일이란, 오늘 하루를 후회 없이 사는 것이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일 존재가 없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제발, 죽도록 일만 하지 말고, 좀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나러 다니시고,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도 가시고, 고향도 좀 찾아가 보시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맛보시고 다니시라.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인생에 대한 후회의 아픔은, 육신의 고통에서 오는 아픔과 비교되지 않는다고 한다. 제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시키지 마시라. 죽음의 순간에, 후회되는 인생을 살지 마시라.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4. 29. 04:48

2013 4 2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요한복음 14:21-24

제목: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II –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

 

죽기 전에 후회하는 일들이 많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합니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모두 평등하게 세상을 떠나 흙으로 돌아가겠죠. 이 진실을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그동안 훨씬 마음 편하게 살았을 거에요. 사소한 일에 그렇게 아등바등하지 않고, 너무 걱정하지 않으면서요.”

 

우리는 살면서, 이 사실을 깨닫지못하고 삽니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모두 평등하게 세상을 떠나 흙으로 돌아간다!” 수도 없이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듣고 보지만, 그것을 깨닫지는 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아니라, “모두 평등하게 세상을 떠난다입니다. 그래도 나는 잘난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죽음을 앞두고 생각해 보았을 때, 잘나고 못나고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 평등하게 세상을 떠난다입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으면서 후회하는 것은, “감정의 지배를 받을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잘 다스려야 했는데”,라는 것입니다.

 

화살에 맞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 화살을 빨리 빼내고 치료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화살을 맞으면, 우선 우리는 이 화살 어떤 놈이 쏜 거야!’라고 하면서 화 가운데서 시간을 허비합니다. 그러다 화살로 인해 난 상처를 제 때 치료하지 못하고, 그 상처로 인해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화살을 뽑지 못하고, 그 화살의 상처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고, 감정을 다스린다는 것은 일단 화살을 뽑아내고, 치료한다는 뜻입니다.

 

이탈로 칼비노가 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제국은 병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제국이 자신의 상처에 익숙해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에 휘둘리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만큼 내 자신이 병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나쁜 것은, 그 상처에 익숙해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처로 병든 사람들은 감정의 지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감정대로 살아갑니다.

 

성유리가 주연한 <누나>라는 영화를 보면, 동생이 물에 빠져 죽은 것 때문에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상황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남동생은 '누나'를 구하러 물에 들어갔다가 누나를 구하고 대신 죽습니다. 그 일로 아버지는 술주정뱅이가 되는데, 아버지는 술에 취해 '누나'에게 폭력을 휘두릅니다. '이 쓸 데 없는 년!'하면서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누나'는 아버지의 폭력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누나는 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을 아버지가 휘두르는 폭력으로 '속죄'하려고 합니다. 동생(아들)의 죽음을 놓아두고, 아버지는 매우 사디스트적인 행동(가학적 행동)을 취하는 반면에, 누나()은 매우 매조키스트적인 행동(피학적 행동)을 취하는 것이죠.

 

여기서 아버지나, 딸이나 감정에 휘둘리는 겁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죽은 탓이 딸 때문이라는 생각, 감정에 휘둘려, 틈만 나면 술을 먹고 딸을 구타하는 겁니다. 누나는 남동생이 죽은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구타를 통해서 속죄하려고 든다는 것이죠.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리면, 이렇게 삶이 일그러지고, 행복하지 못한 법입니다.

 

미국 버클리대학교의 심리학자 바울린드 교수는 자녀 양육에서 중요한 요소가 애정과 통제임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3-4세 된 유아들을 대상으로 다섯 가지 심리적 능력(대인관계 능력, 자제력, 자립심, 호기심, 생동감)을 측정했더니, 그 점수가 상중하로 확연히 나뉘었다고 합니다.

 

상에 해당하는 그룹은 다섯 가지 심리적 능력이 모두 우수한 아이들로 부모에게 적당한 애정 표현과 적절한 통제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중에 대항하는 그룹은 아이들이 부모들로부터 애정 표현은 잘 받지 못했지만, 적절한 통제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하에 해당하는 그룹은 대인관계 능력도 떨어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지나치게 의존적이며 자제력을 쉽게 잃었는데, 이들은 부모로부터 애정만 받으면서 모든 게 용인되는 분위기 속에서, 즉 통제 없이 자란 아이들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삶에서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이 바로 통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사랑의 가치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그런데 통제의 가치는 잘 눈치채지 못합니다.

 

자녀를 키우시는 분, 아이를 정서적으로 건강한 아이로 잘 키우고 싶다면, 무조건적으로 사랑만 베풀지 마시고, ‘통제를 적절하게 해야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어떻게 통제하는가?’의 문제가 우리에게 남습니다. 통제란 무조건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예로 들면, 자녀들은 부모가 세운 제한을 주의 깊게 따르는 것이지요. 적어도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에게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잘 다스리면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명확하게 밝혀 주고 계십니다. 이는 우리의 삶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삶의 기준을 나의 감정에 두고 살아갑니다. 감정이 삶의 기준이다 보니, 삶의 모든 행동이나 말이, 나의 감정을 기준으로 해서 나갑니다.

 

일례로, 학창시절에 공부 잘하는 학생과 공부 못하는 학생과의 차이가 여기서 납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은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 없이, 엉덩이를 책상에 붙이고 꾸준히 공부합니다. 그러나, 공부 못하는 학생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공부합니다. 공부가 좀 된다 싶은 날, 즉 기분이 좋은 날은 공부를 좀 하는가 싶다가도, 기분이 좀 우울하면 세상이 꺼지는듯한 한숨을 쉬면서 신세타령합니다.

 

어느 사람이든지, 감정 낭비가 심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있는 분야에서 성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을 한 번 돌아봅시다. 무엇이 우리 삶의 기준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께 인생을 건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기준이 이제는 나의 감정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말씀(계명)을 기준 삼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계명)조차도 우리의 감정을 중심으로 지키든지 안지키든지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으로 여러분의 삶을 통제하십시오. 감정이 여러분의 삶을 통제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통제하도록 그 말씀을 붙드십시오.

 

남의 것을 도둑질 하고 싶다가도, “도둑질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남을 헐뜯고 싶고, 부정적인 말을 하고 싶다가도,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1:26)”라는 말씀에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저 원수 같은 놈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가도,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에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감정을 부당하게 억누르고 무조건 참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하시고 우리를 참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통제하도록 허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에 치우친 삶,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얽매여 평생을 허비하면 돌아오는 것은 후회뿐입니다. 감정을 잘 통제하는 사람, 감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다스리는 사람의 삶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참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으시고, 끝까지 말씀으로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십자가에서 외쳤던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칠언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감정이 삶을 지배하게 놓아두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삶을 통제하시도록 맡기셨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부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감정에 휘둘리면, 그 당시 잠깐은 속 시원할 수 있지만, 어떠한 후회가 영원토록 남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화내고, 울고, 웃어도 인생의 시계는 흘러갑니다. 어차피 흘러가고 지나가는 게 인생이라면, 좀 더 웃고 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통제하시도록 내어드리는 겁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주신 사명을 따라 무쏘처럼 가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4. 15. 13:38

2013 4 14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전도서 1:2-11

제목: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I - 지금 당장 고맙다고 말하라

 

지금 설교가 시작되었는데,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는가? 아니면 설교가 빨리 끝났으면 하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예배 끝난 뒤 나올 점심식사에 대해서, ‘오늘은 메뉴가 무엇인가상상하시는가? 아니면 예배 끝나고 집에 가서 할 일에 대해서 생각하시는가?

 

설교를 들으면서, 목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나 보고, 듣고 난 후에,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해야 한다.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서,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할 예정이다. 지금 당장 후회하지 않더라도, 죽음의 순간에 인간은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사람의 마지막 길을 잘 가도록 보살피는 직업(의사, 호스피스)을 가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오늘 전도서의 말씀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헛되다인데, 우리의 인생이 왜 이렇게 헛되다는 것인가?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인생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평소에 죽음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하시면서 사시는가?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서 가장 많이 경험하는 것 중의 하나가, ‘죽음이다. 인간의 죽음, 동물의 죽음, 식물의 죽음, 수많은 생명의 죽음이 시간 속에 즐비하게 늘어져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나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 책에서 이런 문구를 본 적이 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은 후회가 적다. 죽음을 염두에 둔 사람은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알고 열심히 살아간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삶, 실존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살아가라는 뜻이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우리의 삶은 유한하다고 자각하며 사는 인생은 오늘 하루를 보람차고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만한 일을 하려고 노력하며 산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영원한 것처럼 착각하며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다며 착각하는 사람은 오늘을 흥청망청 살아간다.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절대로 오늘 하지 말라!”라며. 꼭 이솝우화에 나오는 배짱이처럼.

 

나는 개인적으로 한 2년 전쯤부터 죽음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죽음에 관련된 책도 읽고, 특별히 죽음의 신학에 대한 책을 읽으며, 그리고 종말론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나에게도 일어나는 매우 명백하고 현실적인 일이라는 자각이 생각 뒤 첫 번째로 한 일이 무엇인지 아는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은 1 8일이다. 결혼 7주년을 맞아 나는 아내 몰래, 선물을 준비했다. 그리고 결혼기념일에 그 선물을 꺼내서 주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죽더라도 아내가 우리 아이들과 여생을 힘들지 않게 보낼 수 있도록 준비한, 생명보험증이었다. 내가 나온 에모리대학교 동문회에서 단체로 들어 값싸게, 하지만 좋은 배네핏을 누릴 수 있는 보험이다. 꽃 백송이 선물하는 것보다, 기뻐하더라.

 

이탈노 칼비노가 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 마르코 폴로가 수많은 도시들을 여행을 하면서 실패를 하는데, 쿠빌라이 칸이라는 사람을 만나는데, 그 사람은 네가 전세계를 여행했다는데, 너는 유토피아에 가봤지?” 묻는다. 폴로는 대답한다. “제가 다닌 도시들 중에는 유토피아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유토피아에 어떻게 가는지도 모릅니다.” 칸이 또 묻는다. “전세계를 다녀봤자 유토피아가 아니라면, 왜 그렇게 여행을 다니느냐?” 폴로가 대답한다.

 

어차피 세상은 지옥입니다. 그 지옥 같은 세상을 지옥이 아닌 것처럼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쉬는 것인데, 지옥 같은 세상에서 지옥처럼 사는 것이다. 그러면, 지옥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쉽다. 두 번째 방법은 어려운 것인데,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마치 지옥처럼 살지 않는 사람을 찾아내서 그 사람의 공간을 넓혀주는 것입니다.”

 

어떤 시인이 이런 말을 한다. “어떤 이는 공원을 감옥처럼 여기며 살고 어떤 이는 감옥을 공원처럼 살고 있으니, 세상엔 안과 밖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 놓은 욕망의 철창이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어떠한 인생을 살고 계시는가? 내일은 행복할거야, 하면서 지옥 같은 오늘을 견디면서 살고 계신가? 유토피아를 꿈꾸며, 어딘가에 무지개 마을이 있을거야 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사시는가? 아니면, 이 지긋지긋한 인생,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라며 죽지 못해 사시는가?

 

마지막 순간,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 중 첫 번째가, 지금 옆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한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데, “사랑해의 또다른 표현이 고마워이다.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 것도 없다. 모두 고마운 일이다. 내가 돈을 지불하니까, 당연히 저 사람이 해주어야 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굉장히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당연하지 않다. 봄에 꽃이 피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늘 그렇게 봐 왔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느낄 뿐이다. 오늘 아침 태양이 뜨고, 비가 오고, 시간이 지나면 해가 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북극만 가봐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백야라는 것이 있다. 해가 지지 않고, 밤인데도 낯처럼 밝은 날을 말한다.

 

돈을 지불했으니까, 자동차 정비업소 직원이 오일 갈아주고, 자동차 손 봐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냥 그렇게 값이 매겨지고, 경제적 활동을 서로의 사회적 약속 안에서 하고 있을 뿐, 그것은 그렇게 당연한 것이 아니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의 모든 일, 인간의 활동은 모두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 지금 여기에 나와 앉아 있는 사실도, 당연한 것이 아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집사람에게 고마운 일이 있지만, 집사람이 빨래 개서 넣어주는 것 특히 속옷 개서 정리해주는 것, 너무 고맙다. 나는 그래서 그것을 늘 고맙다고 말한다.

 

말 귀를 알아듣는 큰 아들에게 말한다. ‘건유야, 아버지는 네가 아버지 아들인 것이 정말 고맙다.’

 

감사헌금도, 정말 감사해서 하는 거다. 이렇게 아무런 탈 없이 교회 온 것이 얼마나 고마운가. 누구는 교회 오다가 사고 당해서, 신앙을 잃은 사람도 있다.

 

목사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목사니까 당연히 여기 앞에 서서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가? 한 마디 들을 때 마음이 고맙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은혜 받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버전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을뿐더러, 낯부끄러울 수 있다. 그렇다면, 고맙다는 말로 대신해도 된다.

 

가장 고마운 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이 가장 고마운 일이다. 왜 그런지는, 죽음에 가까울수록 알게 될 것이다. 인생은 유한하고, 언젠가 우리의 인생은 끝나고 말거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지 못한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사는 자에게는 감사가 넘친다. 그런 인생은 후회가 없다.

 

예배란 하나님께 고맙다고 말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이 세상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참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예배를 고맙게드릴 것이다.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사람의 특징은, ‘감사가 없다는 것이다. ‘고맙다는 말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다른 사람에게는 감사를 강요하면서, 정작 자기 스스로는 다른 사람에게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불쾌해하고 마음이 어그러진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상대방에게 감사할 줄 모른다. 자신이 상대방에게 한 것은 특별한 것이고, 상대방이 자신에게 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돌아보라. 죽을 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죽음은 서서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갑자가 찾아온다. 물론 죽음을 서서히 맞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서 주변을 정리할 시간이 주어지는 사람도 있다. 축복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죽음은 갑자기 찾아온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죽음의 공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필연적인 운명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 이 세상에서 존재가 없어진다. 그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지금 살아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 말씀 드리는 것이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지금 당장 사랑한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한다고맙다고 말하는데, 입이 잘 떼지지 않는 분들은 후회할 인생을 살고 계시는 거다. ‘저 인간 생각하면 갈아 마셔도 속이 시원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을 합니까?’라는 분, 후회할 인생을 살고 계시는 거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게 될 후회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의사나 호스피스들은 말한다. “육체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마음의 고통입니다. 죽으면서 사람들은 육체의 고통보다, 후회스러운 인생에 대하여 마음의 고통을 너 크게 느끼면서 죽습니다.”

 

후회라는 말을 우습게 여기지 말라. ‘후회되는 인생 때문에, 눈을 제대로 못 감을 수 있다. 평안히 눈을 감고 싶으신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사랑한다, 고맙다고 말하라.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4. 8. 04:38

201347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0:19-31, 5:27-32

제목: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의 달력과 절기를 지키신 분이었죠. 우리가 요즘 쓰는 달력은 로마 황제 율리우스가 만들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에 의해서 다듬어진 달력을 씁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요즘 우리가 쓰는 달력으로 따지면 금요일 저녁 해 진 후부터 토요일 해지기 바로 전까지 입니다. 그래서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요즘 우리가 쓰는 달력으로 따지면,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일요일을 일요일이라고 부르지 않고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앙고백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부르고, 그분이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에 그분의 날이라는 신앙고백을 담아 주일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로마 황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에 박해 받던 시절, 박해 받던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기독교인들이 로마 황제를 섬기기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을 때 로마의 모든 국민은 로마 황제를 일컬어, 주님(퀴리오스)라고 불러야 했습니다. 이것을 거부하면 곧 죽음이었죠. 그런데,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주님은 황제가 아니고,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들의 참 주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더욱더, 박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주님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일에 더 박차를 가했습니다. 물론 이것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정부에 의해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죽는 것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증거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이들은 부활의 주님의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부활을 믿는 이상, 더 이상 이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주님이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 아닌 로마 황제에게 절하면서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두려운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안식 후 첫날 저녁에, 그러니까 주일 저녁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처럼 끌려가서 십자가 처형을 당할까봐, 또는 돌에 맞는 처형을 당할까봐, 욕을 볼까봐 무서워서 어느 한 곳에 숨어 모여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곳에 가셔서 제자들을 만나 주셨다는 겁니다. 두려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평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의 가장 필요한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복을 빌어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부활한 당신의 몸을 보여주십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던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부활한 몸을 보고 마음 속에 기쁨이 생겼습니다. 기쁨이 생긴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인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잘 보셔야 합니다. 제자들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변하게 되는 사건이 무엇입니까? 보기를 드립니다. 1. 십자가 사건, 2. 예수님의 부활 사건, 3.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사건. 정답은 3번입니다. 두려움만이 가득 찼던 이들의 마음이 기쁨으로 변하게 된 사건은, 다름 아닌,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이 부활한 주님을 못 만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냥 평생을 두려움 가운데 살았을 겁니다. 그 두려움 가운데, 예수님께서 살아생전 주신 사명도 잊어버리고, 그냥 두려움 가운데 인생을 살다 두려움 가운데 죽었을 겁니다. 그런데 부활한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삶은 그런 삶이 아니었습니다. 기쁨이 가득한 삶이었고, 그 기쁨 가운데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감당하는 능력의 종들이 되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삶 가운데 왜 평강이 없고, 기쁨이 없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평강이 없고 기쁨이 없는 이유를 기껏 생각해 봐야, 세상적인 기준에서 세상적인 것들이 나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난 이것도 없고, 이것도 없고, 이것도 없고, 누구처럼 이런 것들이 나한테 있었다면 내 삶에 평강이 있고 기쁨이 넘쳤을텐데그래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적인 것들을 간구합니다. 포인트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죠.

 

우리에게 평강이 없고, 기쁨이 없는 이유는, 부활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나의 마음 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마음 속이 늘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은 나.. 맘이 늘 평안해.” 그러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에 평안을 원하시고, 참된 기쁨을 원하시면, 세상의 헛된 것을 간구하시지 마시고, 부활의 주님 만나 뵙기를 간구하십시오. 기도하실 때, ‘이것도 주시구요, 저것도 주시구요’, 이러지 마시고, ‘주님, 부활의 주님 저를 만나 주십시오!’ 하고 간절하게 간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인 것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안 주시는 이유는 그것을 우리의 정욕대로 쓸 것을 아시기 때문에 안 주시는 것이지만,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 간구는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평강과 기쁨을 얻고 사명을 받고 있었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평강과 기쁨이 없으니까, 의심만 생깁니다. 제자 한 명이 도마에게우리가 주를 보았다하니까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못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도마의 의심을 의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도마을 일컬어의심 많은 도마라고 하지만, 이 의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에서 나온 의심이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의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의심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싶은 간절한 소망에서 나오는 의심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의심조차도 없지 않습니까? 의심은 둘째치고 부활하신 주님에게 관심조차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관심이 있으니까, 의심도 하는 것입니다.

 

도마의 의심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의 고백에서 알 수 있습니다.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라고 했던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나서, 가장 강력한 신앙의 고백을 주님께 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은, 이렇게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우리의 참 주님이시라는 것을 전하고 다니다가 공회(유대인들)에 붙잡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과는 180도 다른 모습입니다. 위에서 살펴 보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이들은 잡힐 것을 뻔히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돌아다니며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 있습니까! 이게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참으로 만나 사람들의 삶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작은 일에도 쉽게 실망하고 절망하고, 두려워합니다. 어떻게 될까봐 전전긍긍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담대한 마음이 생깁니다. 결코 작은 일에 쉽게 실망하고 절망하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작은 일 뿐만이 아니라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마음이 생깁니다. 바로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세상의 노예가 되어 어떻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살게 되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세상도 감당하지 못하는, 즉 세상으로부터 자유한 참된 하나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공회로 잡혀간 제자들의 당당한 모습을 보십시오. 위에서 본, 두려워하는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공회로 잡혀 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다는 말인데, 베드로와 제자들은 공회 앞에 서서 당당하게 말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어떻게 될까봐 두려워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어떻게 될까봐 두려워서 꽁꽁 숨어 있던 제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단 말입니까?

 

공회 앞에 서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이들의 기세를 보십시오. 죽음인들 이들을 감당하겠습니까?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뭔지 감이 잡히시나요? 뭡니까? “나를 죽여라!” 이거 아닙니까? 죽음이 하나도 안 무섭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말씀이 너무도 감격스럽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성령이 하시는 일과 자신들이 하는 일이 똑같다는 겁니다. 증인의 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구세주로 증거하는 일이 자신들의 일이라는 겁니다. 이 일을 하는데, 죽음도 자신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죽일 테면 죽여봐라, 나는 이 진리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복음 전하면서 죽을란다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이들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담대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될까봐 숨어 있던 이들이, 세상이, 죽음이 감당하지 못하는 증언자들이 되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여기서서 말의 구슬이 뭡니까?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러면 꿰는 것은 뭡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겁니다. 그러면 보배는 뭡니까? 담대한 증인으로 인생이 180도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는 법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외치면서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면서 부활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의 부활 내 삶에 보배가 되고 참된 진리가 되고 의미가 되려면, 그 부활하신 주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서 말의 구슬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꿰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의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3. 25. 11:12

2013 3 24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룻기 4:18-22

제목: 내 무릎은 무엇을 위해 힘쓰는가?

 

성경에서 족보가 나오는 곳은 유심히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물론 족보를 살피는 일은 참 재미가 없죠. 하지만 족보는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룻기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룻기가 족보로 끝나고 있다는 것은, 룻기서의 주인공인 보아스와 룻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은총을 베푸셨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오늘 족보를 보면 보아스의 아버지가 살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 5절 말씀을 보면 이 사람이 누구인지가 분명해지는데, 거기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살몬의 아내가 라합입니다.

 

그러니까, 보아스의 아버지는 여리고 성 정탐꾼으로 파견 받아서 갔던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보아스의 어머니는 아버지 살몬이 여리고 성 정탐 갔다가 만났던 라합이었다는 것입니다. 참 기가 막힌 인연입니다.

 

전쟁을 하려면 반드시 먼저 정탐을 먼저 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에 정탐꾼 두 명을 보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 때에 가데스 바네아의 가나안 정탐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지 않고 믿음의 실상을 볼 수 있는, 기도하는 두 사람이면 정탐하는 데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예전에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이 눈에 보이는 현상에 겁을 먹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서 불신앙을 선동했던 기억이 생생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여리고 성으로 몰래 잠입해서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잔뜩 겁을 먹고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아모리 왕국과 바산 왕국과 모압 족속이 히브리 족속들한테 다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정탐꾼들은 몰래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 집에 숨어 들어갔습니다. 이를 눈치 챈 군사들이 쫓아오자 기생 라합은 두 사람을 지붕 위에 있는 삼대 밑에 숨겨 주었습니다. 정탐꾼은 정탐을 눈으로 합니다. 그런데 삼대 밑에 숨어 뭘 정탐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예전처럼 눈으로 보고 겁먹지 않게 이들의 눈을 가리고, 대신 믿음의 사람 기생 라합을 통해서 성안의 소식을 듣게 하십니다.

 

라합은 옛날 우리나라로 치면 주막 같은 곳에서 일하던 여성일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한 번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난 적이 없지만 출애굽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행적을 다 들었을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라합은 들어서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당신들에게 반드시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백성들은 마음이 녹아버렸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할 때 자신과 가족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정탐꾼들은 그녀의 믿음을 보고붉은 줄을 문에다 내리고 있으면 여리고 성을 전부 멸할 때 너희 집만은 살려주겠다.”고 말합니다( 2:18-19 참조).

 

실제로 여리고 성이 정복당했을 때 기생 라합의 믿음으로 그 집안 식구들은 모두 구원을 얻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16:31). 정탐꾼들은 왜붉은 줄을 매달라고 했습니까? 잘 보이는 색깔이니까 그렇기도 하지만, 그것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 십자가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리고 정탐 사건을 통해서 꼭 배워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보아스의 아버지 살몬은 정탐꾼이었습니다. 그의 무릎은 정탐을 하느라 힘들었어야 합니다. 그게 상식입니다. 그러나, 보아스의 아버지 살몬이 여리고 성을 들어가서 그의 무릎이 정탐 하느라 힘들지 않았습니다. 정탐하러 들어갔는데, 라합의 집 옥상에 갇혀 지내고 말았습니다. 거기서 살몬이 무엇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적군 속으로 정탐하러 온 사람이 숨어 지낸다는 것은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잡히면 죽습니다. 가슴이 조마조마했겠죠. 기도가 저절로 나왔을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정탐꾼에게, 보아스의 아버지 살몬에게 여리고 정탐 일을 통해서 받고 싶은 것이 뭐였냐면 바로, 기도였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무릎을 통해서 받고 싶어하신 수고로움은 정탐의 수고로움이 아니라, 기도의 수고로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옛날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이 다리품 팔아서 자유롭게 가나안 땅 정탐을 하고 돌아왔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절망적인 말뿐이었습니다. 그 일 때문에 모세가 얼마나 고통을 겪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게 됩니까? 위에서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눈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던 여호수아. 본인이 직접 가나안 정탐꾼 임무를 수행해 보았기 때문에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 정탐하는 일에 두 명만 보냈던 것인데, 이들이 무엇에 능한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정탐 잘 하는, 정보 파악 능력이 뛰어나고, 눈이 좋아서 먼 곳까지 보는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가를 볼 수 있는 영안을 지닌 자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기도 할 줄 아는 사람들을 보냈던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일은 돈 많은 사람, 잘난 사람, 건강한 사람 등 눈에 보이는 것이 화려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일은 기도하는 사람이 합니다. 무릎을 기도하는데 쓰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일하신다는 겁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가장 중점에 두고 있는 것이 기도요, 여러분들에게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제 마음을 이해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기도에 중점을 두는 이유는,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늘 엎드리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고, 여호수아처럼 기도의 사람을 쓰는 것이 주의 일을 부흥케 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무릎이 기도하는 데 힘쓰게 해 보십시오. 다리가 저리도록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지 기도를 통해서 알게 되면, 경거망동하거나 요동치 않습니다. 폭풍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보아스의 아버지, 살몬의 삶이 그랬고, 보아스의 어머니, 라합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배우며 자랐던 보아스도 그랬습니다.

 

라합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역사를 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던 여성입니다. 하나님을 볼 줄 아는 여인이있습니다. 그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직접 보진 않았지만, 듣고 믿은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재물, 창칼, 전술의 의지했던 여리고 사람들이 다 죽어갈 때, 그 여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던 이 사람 라합. 두 명의 정탐꾼 대신에 정탐 일을 합니다. 사실, 라합은 여호수아가 보낸 두 명의 정탐꾼 대신에 여리고 성 곳곳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여리고 성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막에서 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온갖 소문을 한 번에 접할 수 있는 정보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필요한 곳에 필요한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 있는 자를 들어서, 쓰시고자 하는 일에 쓰신다는 겁니다. 이 믿음의 사람 라합. 그런 라합이 아들 보아스를 키우면서 무엇을 가장 열심히 가르쳤겠습니까? 무엇보다 자기 일생 최대의 경험, 즉 여리고 성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틈바구니 속에서 자기가 살 수 있었던 이유를 들려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고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17:6”. 보아스가 살던 시대는 왕이 없었으므로, 자기 자신이 왕이 되어 자기가 옳은 대로 살았던 시대입니다. 요즘 시대와 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을 배웠던 보아스는 남들이 다 각자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던 무법 천지의 시대, 사사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외우고 실천하며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라합은 자신의 무릎이 무엇을 하는데 힘쓰게 했다는 겁니까? 아들 보아스를 무릎에 앉혀 놓고 하나님 말씀 전하는데 힘썼다는 겁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이 찬송이 누구의 찬송으로 들리십니까? 물론 이 찬송을 지은 사람은 M. B. 윌리암스라는 분이지만, 이 찬송이 보아스의 찬송으로 들리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자녀들 앞에서아이고 무릎이야…’ 하면 자녀들이 물어봅니다. ‘왜 무릎이 아프세요?’ 그러면 우리는 흔히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희들 먹여 살리느라, 죽도록 일해서 그렇다!’ 그래요, 이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신 것 때문에 무릎이 아프다니요참 가슴 저미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 일이 그렇습니까? 무릎 아프도록 열심히 돈 벌어서 키워놨더니, 자식이 효도하던가요? 사람 되던가요? 내가 계획하고 생각했던 대로, 가르친 대로 자녀들이 자라던가요?

 

노인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하시는 분들이나, 정신과 치료를 하는 의사들은 한결 같이 이런 말을 합니다. ‘자녀들, 계획하고 가르친 대로 절대로 자라지 않습니다!’저희 어머니도 이런 저런 이유로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하시는데, 그 정신과 의사가 그러더랍니다. ‘자식 때문에 속 썩는 일은 없으시죠? 그러면 정말 행복하신 거에요. 저한테 오는 대부분의 노인분들 자식 문제 때문에 가장 속상해들 하세요! 어머님은 두 아드님이 다 목회 잘 하시고 속 안 썩이시니까 감사한거에요!’

 

자녀들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계획했던 대로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던가요? ‘어쩌다 내가 컬럼버스까지 굴러오게 됐나…’ 조지아에는 숲 밖에 없으니까, 대도시에 살다 오신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여기가 사람 살 곳인가? 짐승 사는 곳이지?’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내 생각과 계획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이고 교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살몬처럼, 라합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겼을 때, 살몬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었고, 하나님께 맡겼을 때, 라합은 남들 다 죽어나가고 멸망 당할 때 생명이 보존되고 구원 받는 역사가 있었다는 겁니다.

 

기도하는 데, 하나님 말씀 배우고 전하는데 무릎이 한 번 아파 보십시오. 자녀는 기도하시는 부모님, 무릎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상하게도, 돈 버느라고 수고하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 흘리는 자식 거의 없습니다. 와서 돈이나 달라고 떼쓰지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리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허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께 무릎 꿇고, 다리가 저리도록 무릎이 시리도록 기도했을 때 참된 안식과 복이 임합니다. 이건 이 장목사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저도 성경에서 배웠을 뿐입니다. 성경에서 배운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목사 아닙니까? 그것을 가르쳐 드리는 것이 이 목사의 의무이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증거합니다.

 

여러분의 무릎은 무엇을 위해 힘쓰십니까? 무엇 하시느라, 무릎이 시리고, 다리가 저리십니까? 생계를 위해서, 즉 돈 버는 일 때문에 무릎이 아픈 것, 그것은 참 거룩한 일이고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너무 매몰되지 마십시오. 사람은 기본적으로 돈을 버는 일에 몸을 망가뜨리고, 망가진 몸을 치료하기 위해서 힘들게 번 그 돈을 쓴답니다. 참으로 악순환이죠. 안타까운 일이죠.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긴다는 것은 우리가 무능력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나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즐비합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우리를 지으시고 돌보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는 지혜가 우리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내 무릎은 무엇을 위해 힘쓰는가? 무엇을 위해 힘을 썼길래 이렇게 아픈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보아스의 아버지 살몬처럼 특별히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데 앞 뒤가 꽉 막히신 분! 하나님께서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는, 바로 그 자리에서 꿇어 엎드려 기도하게 하시고, 그 무릎이 기도를 위해 힘쓰게 하시기 위함임을 꼭 깨달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무릎이 기도를 위해 힘쓰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 막힌 문제를 부지런히 풀고 계신다는 것을 꼭 깨달으셨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3. 5. 11:57

2013 3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5:1, 6-7, 10-12, 17

제목: 믿음이란 무엇인가? II

 

지난 주에 이어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아브라함이 기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했을 때 두려워했던 상황을 통해서, 믿음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 두려움은 뱀이나 마귀를 보았을 때나,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느끼는 공포 같은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의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공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도 누군가를 공경하게 되면, 그 사람의 말을 잘 듣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처럼,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그보다 더 위대한 능력 갖게 되는 것이죠. 이 능력은 무엇인가를 행하는 능력도 포함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쳐서 굴복시키는 겸손의 능력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오는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려 했습니다. 16장에 그것이 잘 나와 있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죠. 믿음이 들어가면, ‘이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뭇별들과 같이 자손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나이는 들어가고 둘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질 않으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행하는 것이죠. 성숙한 믿음으로 가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성령 받으면, 믿음이 생기면 힘이 먼저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무엇이든지 다 해야 한다는 일종의 열심이 생깁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사라의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들여보내서 자식을 생산하는 것이었습니다. 15 4절 말씀에 보면,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는데, 비록 사라가 낳은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 풍습으로 봐서 몸종 하갈에게서 난 아들은 아브라함에게서 난, 즉 아브라함의 몸에서 난 자가 맞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렇게 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혼 줄을 내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 또한 믿음의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17장에 보면, 이스마엘이 하나님께 축복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20절입니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여러분, 믿음으로 행할 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그 실패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아름답게 사용하시고, 그 실패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즉 믿음에서 우러난 행동은, 믿음에서 행한 최선의 행위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갔기 때문에 적지 않은 트러블을 만들어 낼지언정, 언제나 하나님께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행위인양 가장하고 만들어 내는 트러블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트러블 만들어도 좋다는 말씀이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전진하라는 말씀입니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믿음이 생기면 우리는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고, 어떤 일이든지 해야 한다는 열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성숙한 믿음은 오히려 그 힘을 빼는 데 있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고 뺀질거려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성령이 흘러가는 데로 나 자신을 맡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운동을 좀 진지하게 해 보신 분들은 이 말씀이 무슨 말인지 좀 더 잘 이해 가실 겁니다. 골프를 예로 들면, 힘 주는데 3년 힘 빼는데 3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수가 되려면 힘을 빼야 합니다. 스윙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되어야 공이 멀리 그리고 정확하게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추어와 프로, 하수와 고수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얼마큼 힘을 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죠.

 

지금 대만에서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이 열리고 있는데, 한국팀이 네덜란드에게 졌습니다. 한국은 네덜란드보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앞섭니다. 그런데 왜 졌겠습니까? 힘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꼭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작용해서 힘이 들어간 것이겠죠. 힘이 들어가면 집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힘이 필요 이상 들어가지 않도록 힘 조절을 잘 하는 사람이 진짜 프로입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 사건, 즉 힘 주는 사건을 통해서 이제 힘 빼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18장에 나와 있는 대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세 명의 낯선 나그네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잘 대접해서 결국 이삭을 얻는 큰 축복을 받습니다. 18 14절에 보면, “ 여호와께서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하시면서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두 노인네에게 아들을 선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들은 너무 늙어서 이제는 더 이상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힘이 완전히 빠진 것입니다. 힘 빼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냥 지켜보는 것입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것이죠.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체험하고 영광 돌리고 감사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결국 믿음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 이제 우리는 이것이 믿음인 것을 저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입니다. 그 언약을 맺는 의식(Ceremony)가 나오는데, 그 의식을 들여다 보면 믿음이 무엇인지 더 깊은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언약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약속입니다. 현재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장차 그렇게 될 거라는 약속입니다. 언약이 체결되면 쌍방 간에 철저하게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뭇별과 같은 자손을 주겠다고, 그리고 이 땅,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대신 아브라함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 징표로,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 삼 년 된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다가 새는 그냥 놓아두고, 소와 염소와 양은 반으로 쪼개어 마주 대어 놓는 의식을 행합니다. 하나님과 맺는 신실한 언약은, 땀과 눈물 없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나의 수고와 헌신이 꼭 필요합니다. 솔개가 그 짐승들의 시체에게로 달려들 때 아브라함은 쫓아냈습니다. 언약의 징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죠. 얼마나 힘들었는지, 해 질 때 아브라함이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수고로움과 헌신이 있고 난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만나주시고 언약을 맺으십니다.

 

17절 말씀입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햇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하나님께서 연기 나는 화로와 같은 모습으로, 타는 횃불과 같은 모습으로 임재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자 이제, 하나님 입장에서는 언약을 성취시켜 주어야 할 의무가 있고,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그 언약이 성취될 것을 믿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처럼,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진 줄로 믿고 나아가는 것, 즉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십자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십자가는 무엇에 대한 언약입니까? 우리는 흔히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기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한 사건으로 이해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이는 십자가 사건을 너무 죄와 관련시켜 본, 십자가 사건을 좁은 관점에서 본 표현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더 큰 틀에서 봐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을 새 창조의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죄에 대한 심판 사건이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이 부활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신 언약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듯이, 누구든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 죽지는 않지만, 어느 모양이든 육신을 갖고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다 죽습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인생이 끝난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심판 받고, 그냥 끝나버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성실하게 수행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이들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언약, 새 창조의 언약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란 바로 이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일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갖고 있는 믿음입니다.

 

이 언약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거라는 언약.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미래는 누구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잠 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셨고, 하나님의 맏아들이시고, 우리를 당신과 같은 운명으로 이끄는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거는 일,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하기 위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를 맛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을 빼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렇게 될 줄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사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19세기 미국 시카고에 스패포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변호사로서 결혼하여 네 딸을 두고 남부럽지 않은 유복한 생활을 하던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부유한 생활을 누리는 성공한 인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의사의 권유로 부인과 함께 네 딸 아이를 잠시 유럽으로 보냈습니다. 타이타닉 같은 큰 유람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던 중 충돌 사고가 일어났고 그들이 타고 있던 배는 대서양 한복판에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네 딸은 모두 익사했고, 아내만이 간신히 구조를 받아 살아남았습니다. 같은 시각, 설상가상으로 스패포드는 시카고의 대화재로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현실적인 행복 기반이 대화재로 내려앉은 셈입니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여느 사람 같으면 극심한 절망에 빠져서 도저히 헤어나지 못할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창조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스패포드 역시 잿더미 속에 놓여 있으면서도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고백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흐르고 있는 찬송가 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을 이미 경험한 믿음의 사람들은 걱정 근심에 사로 잡혀 살지 않습니다. 두려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예수 안에서 평안을 누릴 뿐입니다. 마귀가 달려와서 우리를 삼키려 해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장되시고, 최후의 승리를 믿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 지은 죄가 아무리 주홍 같다고 해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 흰 눈 보다 더 깨끗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걱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그 때에도 우리는 이미 천국 인침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건 인생, 부활의 새 창조의 역사를 믿는 인생은, 평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는 마음으로 이 찬양 함께 부릅니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0) 2013.04.08
내 무릎은 무엇을 위해 힘쓰는가?  (1) 2013.03.25
믿음이란 무엇인가?  (1) 2013.02.25
성령과 말씀  (0) 2013.02.19
십자가의 도로 해결하라  (0) 2013.01.15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