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2. 25. 07:41

2013 2 24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5:1, 6-7, 10-12, 17

제목: 믿음이란 무엇인가?

 

영어로는 Faith. 우리 나라 말로는 믿음 또는 신앙. 믿음생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지만, 가장 손에 잘 안 잡히는 것이 바로, 믿음,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지금 믿음생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무엇을 믿는지, 무엇을 신앙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묵상 없이, 남들이 하니까 그냥 하는, 군중심리적 요소를 품고 믿음생활, 신앙생활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파블로프의 신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러시아의 과학자 파블로프가 이런 실험을 했었습니다. 개에게 밥을 주기 전에, 종을 언제나 울렸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 종소리만 나도 개는 밥을 주는 줄 알고 침을 줄줄 흘렸습니다. 개밥을 주지 않았는데도, 그냥 종소리만 울렸는데도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실험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 시사해 주는 바가 큽니다.

 

일요일이니까 교회 가고, 아침 기도회 하니까 교회 나오고, 교회 봉사해야 할 차례이니까 봉사하고 등, 무엇을 위해서 왜 교회에 나와야 하고 봉사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 없이, 그저 조건반사적으로 교회 나오고 봉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란, 신앙이란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신앙하는지 왜 믿는지, 신앙하는지를 깨달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언약(Covenant)을 맺는 사건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전과 이 후에도 하나님과 믿음의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들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노아 언약(무지개 언약), 다윗 언약 등이 그것입니다. 이들 언약 중에서, 구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언약이 바로 오늘 등장하는 언약입니다.

 

1절 말씀에서 우리가 잠시 볼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전에 교회 건축 프로젝트인 막벨라 프로젝트을 진행하면서 첫 번째 구호가아브라함처럼 기도하자로 정한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임했다는 말이, 바로 아브라함이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브라함이 길 가다가 환상을 보았겠습니까? 뒷간에서 볼 일 보다가 환상을 보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기도하다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줄로 믿습니다.

 

환상 중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대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람이 갖는 마음은 두려움입니다. 교회생활 하다 보면, 저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생활 하면서 어떤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맞나, 의문이 생길 정도로, 성격을 드러내시는 분이 있습니다.

 

복음성가 작사가 중에 송명희라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양 중를 작사하신 분입니다. 이 분이 작사하신 곡 중에, “참소경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참소경이 누구인가, 세상을 못 보는 사람인가, 참소경이 누구인가, 세상을 못 보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주님을 못 보는 사람 아닌가!” 이렇게 부르는 찬송입니다. 누가 소경입니까? 하나님이 안 보인다고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이 진짜 소경인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압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아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거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의 이웃에게 해를 끼치거나 맘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공중에 나는 새도 하나님이 아끼시고, 내가 보기에 좀 모자라고 짜증나는 사람도 하나님이 아끼시는데, 내가 어떻게 저 새를, 저 사람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6절 말씀처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어떻게 내 남편, 내 아내, 내 형제 자매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갈등이 왜 생깁니까? 서로가 서로를 우습게 여기고 막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서로가 서로에 대한 존중하는 마음은 우리 인간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때, 비로서 거기에서 이웃에 대한 존중하는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남편이 우습게 보이시거나, 아내가 우습게 보이시거나, 형제 자매가, 또는 내 이웃이 우습게 보이는 분이 있다면, 자기 자신을 한 번 살펴 보십시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어느새 삭으라든 것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반대로, 남편이 사랑스러워 보이고, 아내가 사랑스러워 보이고, 형제 자매가, 또는 내 이웃이 사랑스럽게 보이는 분이 있다면, 자기 자신을 한 번 곰곰이 들여다 보십시오. 자신도 모르는 사이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이 만큼 자라 있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무엇이 중요한 것입니까?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 있으면 내 옆에 있는 사람(남편, 아내, 자식, 형제자매, 이웃)과의 관계가 편안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어긋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실질적인 관계 회복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금 좋다고 해서, 몇 년 동안 불편한 관계 속에서 살아오던 사람과 갑작스럽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하하호호웃으면서 살게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음 가짐이 변한다는 것이죠. 꼴보기 싫어서 돌아누워 자던 부부 사이, 아예 방을 따로는 쓰는 부부사이였는데,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졌다고 해서 한 방에서 한 이불 덮고 오손도손, 그렇게 금방 좋아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돌아누워 자더라도, 여전히 각 방을 쓰더라도 남편을 향한, 또는 아내를 향한 마음이 달라진다는 것이죠. 그 사람을 향한 긍휼한 마음과 간절한 마음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면, 실제적인 관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여도, 이미 그 안에서 착한 일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빌립보서 1 6절에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전하고 있는 복음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내 안에 충만한 것. 그래서 (두려워서)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1절 후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그 마음이 나의 방패가 되고 상급되어서, 나의 힘이 되어서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나의 마음을 움직여, ‘착한 일을 시작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 신앙입니다.

 

종소리 나니까, 이유도 없이 그냥 밥 주나 보다 하고 침을 줄줄 흘리는 조건반사적인 신앙이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즉 하나님을 진짜 대면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진짜로 듣기 때문에 움직이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 두려움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는, 꼼짝 못하게 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게 하시는, 그야말로 두려움 없이 착한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엄청난 에너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산을 걸어가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서 추락하던 중 간신히 나뭇가지를 잡았습니다. 거기에 댕그랑 댕그랑 매달려 있으면서 소리쳤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손을 놓아라!”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여기 누구 다른 사람 없어요!”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간신히 잡은 나뭇가지를 놓는 것이 두렵습니까? 아니면그 손을 놓아라!’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두렵습니까? 나뭇가지를 놓는 것, 두렵죠. 떨어져 죽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 잡은 손을 놓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시는 두려움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6.25 한국 전쟁 때 참전군 중에 빌이라는 미국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전투중에 폭탄을 맞아서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목 이하는 완전히 마비되고 팔 다리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대소변도 자기 스스로 가리지 못했습니다. 목 위만 겨우 신경이 통해서 볼 수 있고, 말하고 들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상태로 평생을 그렇게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내 스텔라가 보험 외판원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병실을 지키며 3년이란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내 스텔라가 병상에서 남편의 손을 잡고 울며 기도하면서 남편에게 이혼을 제안했습니다. “여보, 도저히 나는 병실에서 이렇게 생활할 수 없으니 우리 헤어지도록 합시다. 당신은 국가에서 주는 연금으로 치료받으며 병원에서 생활할 수 있으니, 나는 나의 삶을 살아야겠어요. 나를 놓아주세요!” 그때 밀이 눈물을 글썽이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을 빌겠소. 그러나 하루만 더 참아주구려…” 그 날 밤 빌은 병상에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 주여, 내게 함을 주시옵소서. 성령의 능력으로 나를 일으켜주옵소서.” 그 순간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마비되었던 손이 움직이고 발가락이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얼굴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몸을 회복한 빌은 그 후 훌륭한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내가 이거 놓으면 죽을 것 같아.’라고 생각이 드는 두려운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 명예, 건강, 또는 긴장감, 복수심? 그것 때문에 지금 내가 죽어가고 있고, 그것 때문에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엉망진창인데도 불구하고, 두려움 때문에 놓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착한 일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즉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서는 지금 무슨 착한 일이 시작되었습니까? 들리지 않던 말씀이 들리시나요? 일어나지지 않던 몸이 일어나져서 아침 기도회에 나오시나요? 꼴도 보기 싫었던 남편을 위해서 눈물 흘리면서 기도하시나요? 쳐다보기도 싫었던, 원수 같았던 형제자매를 생각하면 애통하는 마음이 생기나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얼굴 대면하기 싫어서 안 보이는 길로 돌아가게 만들었던 이웃을 위해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었나요? 습관에 좇아 나오던 예배가 기다려지고 기다려지시나요? 이러한 변화가 있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 믿음이 내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아메리가 인디안들은 소년들의 용기를 훈련하기 위해 독특한 방법을 썼습니다. 이들은 소년들에게 숲 속에서 야생동물들과 함께 밤을 지새게 만들면서 소년들의 담력을 키웠습니다. 담력 훈련을 받는 날, 소년은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러나 날이 밝아오면서 소년은 그의 아버지가 가까운 나무 뒤에서 화살을 당긴 채 지키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아들 몰래 아버지는 아들에게 위험이 닥치지 않게 밤새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지키십니다.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겠습니까? 우리의 방패 되시고 상급이 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길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바라건데,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무릎은 무엇을 위해 힘쓰는가?  (1) 2013.03.25
믿음이란 무엇인가? II  (0) 2013.03.05
성령과 말씀  (0) 2013.02.19
십자가의 도로 해결하라  (0) 2013.01.15
다른 길  (0) 2013.01.07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2. 19. 23:24

2013 217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4:1-15

제목: 성령과 말씀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날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라고 기도합니다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한, 시험이란 사실 피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시험에 들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시험에 들더라도 그것을 이겨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마태복음 5 11,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그러나, 우리 삶 속에 실제적으로 시험이 다가올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시험 사건에서, 기쁘지 않고 즐겁지 않은 시험이 다가왔을 때 그것을 어떻게 기쁘고 즐겁게 이겨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한 번 배워보려고 합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배우는 것과 실제 내 생활 속에서 그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식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호세아서 4 6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시험이 다가왔을 때 우왕좌왕하지 마시고, 오늘 배운 말씀대로 한 번 해 보십시오.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고, 하늘에서의 상이 클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전에 나오는 이야기가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그 끝이 어떻게 끝나냐면,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로 끝납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사가 광야에서의 시험 이야기인데,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계속해서 사용하는 호칭이 바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입니다. 이게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호칭이 아닙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한복음 1 12절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할 때도 이 수법을 이용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네가 하나님의 딸이어든.” 이렇게 마귀는 속삭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의 아이덴티티(Identity)이고 디그니티(dignity)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 장준식은 육신으로는 아버지 장영산과 어머니 오세숙을 통해서 이 세상에 왔지만, 나 장준식의 근원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우리의 아이텐티티, 신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디그니티, 품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왕족을 한 번 만나보셨습니까? 저는 두 명의 왕족을 만나 보았는데, 한 명은 실제로 말레이지아의 국왕이었고, 다른 한 명은 남태평양 통가 왕국의 왕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자태가 다릅니다. 말레이지아 국왕은 제가 한나절 함께 모시면서 쇼핑도 시켜드리고 식사도 함께 해 보았는데, 품위가 다릅니다. 자기 자신 스스로를 왕이라고 인식하니까, 그냥 왕이니까, 왕답게 행동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살아갑니까? 나는 어떤 품위를 가지고 살아갑니까?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에 대한 확실한 신분인식과 그에 걸맞는 품위가 필요합니다. 곧 죽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품위 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도 그것을 아주 잘 아셨습니다. 그것을 잘 알 수 있는 길은,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4 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증거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내가 누구인지 나에 대한 인식이 올바로 생깁니다. 성령 충만하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성령 받지 않으면, 사람인지 멍멍이인지 분간이 안 갑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 형태가 그 옛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시험 받을 때와 똑같습니다. 시험은 이러한 유형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시험이 세 가지인데, 하나는 돌을 빵이 되게 하라. 둘째는 마귀한테 절하면 권위와 영광을 네게 주겠다. 셋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실 것이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어떻게 시험 받았는지 출애굽기와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를 보면 잘 나와 있는데, 첫 번째 시험은 출애굽기 16 3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모세와 아론)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0일 동안 굶주렸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겠습니까? 바로 그 약점을 치고 들어옵니다. 가장 필요한 부분을 치고 들어오는 것이 마귀의 계략입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는 마귀가 재정적인 부분으로 시험을 걸어옵니다. “네가 그리스도인이냐?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자녀냐?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궁핍하게 하시겠느냐? 네가 지금 배고파 주겠는데, 하나님한테 십일조 바칠 돈이 어디 있어? 하나님, 다 이해하실 거야. 그거 가지고 맛있는 거 사먹어. 그리고 빨리 이 빈궁한 생활에서 벗어나야지, 남 도와줄 여유가 어디 있어 내 코가 석자인데, 그 돈 가지고 헌금할 여유가 어디 있어? 그럴 돈 있으면 도박하거나 복권 사라. 하나님께서 다 이해해 주실거야. 도박해서 돈 따고, 복권 당첨되면 그 동안 못 냈던 헌금, 100배로 쳐서 많이 내면 되잖아. 그러면 너도 좋고, 하나님도 좋은 거 아니야? 하나님이 오히려 잘 되라고 도와주실걸?”

 

자신에게 약한 부분, 건강이면 건강, 자식이면 자식, 아무튼 자신에게 있어 약한부분을 치고 들어오는 것이 마귀의 계략입니다. 그 부분이 무엇인지, 각자 다 알고 계실 겁니다. 내가 약한 부분이 뭔지 아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 그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 드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약한 부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도 안 하는 것은, 아직까지 그것이 약한 부분인지 절실하게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통해서 마귀가 공격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약한 부분은 배고픔이었습니다. 마귀는 그 부분을 치고 들어왔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하지만, 성령 충만했던 예수님은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방어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당신의 약점을 파고 들어오는 마귀를 물리치십니다.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으니라.” 이는 신명기 8 3절 말씀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두 번째 시험은 신명기 614절 이하에 나오는 시험과 똑같습니다.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마귀는 영광과 권세를 약속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얻는데 있어서, 잘못된 방법으로 영광과 권세를 얻도록 부추깁니다. 영광과 권세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마귀가 아닙니다. 그런데 마귀는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자기에게 절하면 자기가 영광과 권세를 주겠다고. 이건 거짓입니다. 하지만 아주 달콤한 거짓입니다. 마귀는 그러한 것을 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얻게 끔 하기 위해서, 거짓된 방법을 쓰도록 합니다. ,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악한 수단을 쓰게 합니다.

 

지금도 시행되고 있는 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 조지아 정부에서 슈퍼 교통법을 시행했습니다. 거기에서 걷힌 돈으로 교육 사업 등 공공사업에 쓴다고 합니다. 교통법규를 어기면 물게 되는 범칙금에 무조건 200달러를 부과하는 교통법입니다. 좋은 일 하려고,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것이죠. 복권 사업도 정부에서 조장합니다. 복권에서 나온 세금 가지고 공공사업에 투자를 하지만, 복권에 애딕션되어서 인생을 망치며 사는 사람들의 삶은 돌보지 않습니다. 카지노를 건설합니다. 라스베가스에 카지노가 있습니다. 그것을 건설할 때 목적이 좋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미국 원주민들(인디안들)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인생이 망가지는 사람에 대해서 그들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마귀는 모두 이런 식입니다. 선한 목적을 위해서, 악한 수단을 쓰게 끔 우리를 부추긴다는 것이죠. 이러한 마귀의 계략을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 하였으니라.” 이는 신명기 6 13절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시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테스트 해보던 것과 똑같습니다. 출애굽기 17 3절에 보면, “당신(모세)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면서 하나님을 테스트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는데,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습니다. 그 뜻이,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다는 뜻이고, 17 7절에 보면 이 사건을 일컬어, “그들의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고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떨어지는 너를 붙잡아 지켜주시지 않겠느냐?” 마귀의 이 유혹은 결정적이고 치명적입니다. 마귀는 성경구절까지 인용합니다. 시편 91 11, 12절입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나님의 계심이 이런 것으로 증명이 됩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계신다고 그랬죠? 자 그러면 제가 이제 운전대를 놓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계시면 이제 하나님이 운전해 보세요.’ 그러면서 운전대를 놓으면, 하나님께서 운전해 주십니까?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가장 많이 유혹을 받는 형태가 바로 이 세 번째 시험의 형태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시험하면서 삽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하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어떻게 이기시는지,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성령 충만하셨고, 다른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귀를 물리치는 검과 같이 사용했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 제목과 같이, 성령과 말씀, 이 두 가지가 마귀를 물리치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날마다 부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예수님 긍휼히 여겨주세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보십시오. 매순간, 쉬지말고, 불러보십시오.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잘 배우십시오. ‘아차하는 긴박한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를 수 있도록, 말씀으로 나의 뼈와 살, 피를 채워야 합니다. 율법이 613개인데, 왜 율법이 613개이냐하면, 사람의 뼈마디가 248개이고, 일 년이 365일이니까, 248개의 뼈마디마디 마다, 365일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넣으라고, 248 더하기 365 하면 613개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려면 살아갈수록 마귀의 시험은 거세집니다. 특별히 사순절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 시간. 시험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겁니다. 예수 믿으면, 내 삶에 있던 모든 문제가 해결 받고, 마음이 평안해 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를 사랑하면 더 사랑할수록 아무런 문제가 안 일어나고, 시험에 들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도 평안함을 느끼는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 폭풍이 일었습니다. 제자들은 폭풍 속에서 안절부절 못했지만, 예수님은 배 밑바닥에 머리를 대로 편안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배에 누워 계시는 한, 폭풍은 그 배를 뒤엎을 능력이 없습니다. 내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내가 지금 시험을 당하고 있더라도,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고 계시면 아무것도 나를 뒤엎을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만 안다면, 우리가 어찌 평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순절기 동안, 이것을 한 번 연습해 보시고,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충만함을 받아,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치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이란 무엇인가? II  (0) 2013.03.05
믿음이란 무엇인가?  (1) 2013.02.25
십자가의 도로 해결하라  (0) 2013.01.15
다른 길  (0) 2013.01.07
맡겨야 기쁘다  (0) 2012.12.18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 15. 09:32

2013 1 1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3:1-18

제목: 십자가의 도로 해결하라!

 

오늘은 수세주일입니다. 수세주일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수세주일은 주현절기 가운데 들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세례 받는 것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공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특별히 수세주일에 임직식을 거행하게 된 것을 뜻 깊게 생각합니다. 임직식이란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대중들에게 드러낸 일과 같은 종류의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일차적으로 세례를 통해서 그 일을 합니다만, 세례 받고 나서도 숨어 지내는 기독교인이 많은데, 임직식이란 세례 받은 성도가 그동안 열심히 공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서, 그의 신앙이,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공적으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자신의 정체를 공적으로 드러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세상 앞에서, 그리고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유해 나갈 때,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오늘 말씀 제목처럼 삶의 모든 문제를 십자가의 도로 해결할 줄 아는 영성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세례를 통해서, 그리고 임직식을 통해서 세상에 공적으로 나 자신의 정체를 밝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꼭 배우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부인 사라, 그리고 조카 롯과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 여정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네게브라는 지역에서 벧엘로 이동하는 중입니다. 삶의 터전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와중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조카 롯도 그렇고 그냥 홀홀 단신 여행 배낭만 매고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재산, 즉 양 떼, 염소 떼, 소 떼 등을 거느리고 이주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축들을 풀어놓고 마음껏 먹일 수 있는 목초지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음이니라.”

 

영역이 겹치다 보면, 갈등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아브라함의 목자들(종들)과 롯의 목자들(종들)이 목초지 문제 때문에 자주 다투었나 봅니다. 서로 좋은 목초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다투었겠죠.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뜻하지 않는 문제(갈등)에 직면하게 됩니다. 문제(갈등) 없는 삶은 없습니다. 믿는 이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문제(갈등)이 없을 거라는 것이죠. ‘예수 믿는데, 왜 나한테 이러한 문제(갈등)이 생기는가?’ 하면서 신앙이 흔들릴 때가 있는데, 이것은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문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갈등)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육신을 입고 살아 숨쉬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문제(갈등)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 없는 삶이 아니라, 문제(갈등)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푸느냐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갈등)를 푸는 방법이 다르다는 겁니다. , 하나님 앞에서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욕심에 따라 인간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에서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갈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툼 없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삶 속에서 일어난 문제(갈등)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한 번 보십시오. 문제가 발생하자,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13:8).

 

사실, 삼촌이 조카랑 다투는 것은 참 창피한 일입니다. 부끄러운 일(shame)입니다. 상대가 되는 사람하고 싸워야죠.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창피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들끼리 싸우는 것을 말할 것도 없죠.

 

그러나 그것보다도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것은 이득과 손해가 아니라,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인지를 꼭 짚어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이득과 손해가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가르칩니다. 손해 보는 일은 절대로 안 하게 하고, 이득이 되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저지르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그것이 절대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 됨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갈등)가 발생했을 때, 그리스도인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 됨입니다. 사탄이는 갈등 상황에서 분열과 다툼을 일으킵니다. 그러니까, 거꾸로 얘기해서 분열과 다툼을 일삼는 말과 행동은 하나님 자녀로서가 아니라, 사탄의 자식으로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 됨을 생각하기 때문에, 갈등의 상황에서 화평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 8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5:9).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합니까? 문제가 발생하거나, 갈등이 생겼을 때 이득과 손해를 따져서 행동하지 않고, 속시원하게 내 속에 있는 것 다 풀어내 놓지 않고, 어떻게 우리는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까?

 

문제(갈등) 상황 속에서 다툼 없이 그 문제(갈등)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원리는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비전이라고도 부릅니다. 내가 바라보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서 용인해주시는 것이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것을 바라보는 것이 비전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제안합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3:9). 참 멋있지 않습니까? 우리 같으면, “가만히 있어, 내가 간 다음에 너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그러던지,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다 내꺼야!”할 텐데 말이죠.

 

삼촌 아브라함의 제안에, 롯은 신이 났던 것 같습니다. 아직 어려서 그렇기도 했거니와, 롯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롯은 눈을 들어서 자기 눈에 좋게 보이는 땅을 차지합니다. 그 지역이 어딘가 보십시오. 바로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소알 땅입니다. 눈으로 보기에 그 땅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의 땅과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을 조심하십시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이 곧 좋고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은 우리 마음의 탐욕대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눈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탐욕 대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눈을 감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내 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기 위해서 눈을 감는 것입니다.

 

롯이 선택한, 그의 눈에 좋게 보였던, 아름답게 보이고, 잘 먹고 잘 살 것 같았던 소알 땅, 나중에 이 땅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땅입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13:13). 탐욕스러운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았던 롯의 눈에는 이것이 안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나중에 롯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함께 심판 받습니다. 모든 재산을 다 잃고, 탐욕에 물들어 있던 아내까지 잃게 됩니다.

 

그리고 웃지 못할 사건도 발생하죠. 삼촌 아브라함 덕분에 소돔과 고모라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롯과 그의 두 딸은 자손을 보존해야한다는 명문하에, 첫째 딸이 먼저 아버지께 들어가고, 둘째 딸이 나중에 아버지께 들어가서 성관계를 가진 뒤, 임신을 하여 각각 모압과 암몬이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을 평생 괴롭혔던, 모압과 암몬 족속의 시조들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탐욕대로 세상을 보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화평을 이루지 못하고, 끝까지 골치거리로 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롯과는 달리, 자기 눈에 좋게 보이는 땅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땅을 바라봅니다. 그 땅은 롯이 택한 소알 땅에 비하면, 사막과 다름 없는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땅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땅은 아브라함의 눈에 보기에는 별로인 땅이였지만, 하나님이 복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은 고작 조카와 갈등을 겪으면서 빼앗은 땅은 아니라고 말이죠. 갈등을 겪으면서 빼앗은 땅에서 무슨 선한 열매가 맺어지겠습니까? 꼭 기억하십시오. 믿는 우리들이 어느 누군가와 갈등을 겪으면서 빼앗은 그 무엇이든,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알았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눈에 좋게 보이는 땅을 조카 롯에게 양보하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대로 움직여서 복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서울 송파구에 사는 김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형님과 유산 문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형님은 법원에 재산분할소송을 제기하며 유산을 독차지하려 하였고, 이에 동생도 맞고소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새벽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를 드리다가 문득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5:23-24)는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결국 권사님은 모든 법적 소송을 중지하였고, 유산의 대부분은 형님이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유산으로 사업을 확장한 형님은 얼마 후 도산하였습니다. 이를 안 권사님은 거주할 곳조차 없어진 형님의 가족들에게 전셋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더 나아가 크게 미안해하는 형님과 형수님께 생활비 일부를 보태 주었습니다. 형님은 동생에게 예수 믿는 사람이 정말 다르구나.”하고 말하면서 집 근처 교회에 등록하여 출석하기에 이렀습니다. 권사님은 유산을 받지는 못했지만, 양보함으로 평안을 얻었고, 주님의 제자 됨을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해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에서 봅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과의 갈등입니다. 아주 극렬한 갈등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딪치는 문제(갈등) 가운데, 그 문제(갈등)을 해결하는 마지막 단계는 죽음입니다. 요즘 말로, 막장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예수님과 이 세상이 얼마나 극렬한 갈등 가운데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과의 갈등을 죽음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해결할 수 있는 막장까지 간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데려다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성경에서 이 장면을 보면서 답답해 합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천사를 동원하시든지, 벼락을 동원하시든지 자신을 부당하게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을 혼내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그러나,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가 답답해 하는 심정처럼 그렇게 하셨다면, 예수님과 세상은 다를 게 없는 것이 되고,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 수 없었을 겁니다. 십자가에 달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도 끝까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으시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그냥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거기에서 정말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고린도전서 2:9절 말씀이 증거해 주고 있는 것처럼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부활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이 세상과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해 하신 예수님의 선택이 옳으셨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증명해주셨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롯과는 달리 큰 민족을 이룬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 됨을 위해, 화평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아브라함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증명해주셨다는 뜻입니다. 위의 예화에서 보았듯이, 김 권사님 형님이 동생 권사님의 믿음을 통해서 구원 받았다는 것은, 하나 됨을 위해, 화평을 위해 재산을 포기한 김 권사님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증명해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도로 이득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하나 됨을 위해, 화평을 위해 문제(갈등)를 믿음으로 해결하면서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옳다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부활의 은총이 있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임직하시는 분들이나, 여기에서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일을 만나든지, 부활의 주님을 생각하면서, 십자가의 도로 그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우리가 눈으로 보지도 못했고, 귀로도 듣지 못했고,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이란 무엇인가?  (1) 2013.02.25
성령과 말씀  (0) 2013.02.19
다른 길  (0) 2013.01.07
맡겨야 기쁘다  (0) 2012.12.18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0) 2012.11.19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 7. 05:37

2013 1 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2:1-12

제목: 다른 길

 

2013, 새로운 해가 밝았습니다. 기대도 되고, 긴장도 되는 해 입니다. 2013년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어떤 은총을 허락하실까 기대도 되는 반면에, 그 은총이 성취되기까지 어떠한 영적 싸움을 벌여야 할까를 생각하면 긴장되기도 합니다. 공동체란 그 운명을 같이 하는 집단을 일컫는 말입니다. 컬럼버스감리교회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신앙 때문에 모였다는 뜻이 들어 있고, 그 운명을 같이 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신앙 때문이 아니라 다른 뜻 때문에 모였다면 이 공동체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미이고, 운명을 같이 하지 않고 혼자만 살겠다고 하면 그것 또한 이 공동체에 적합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운명을 같이 하는 공동체입니다. 운명이 같다는 공동체 의식이 없으면, 우리는 온전히 지어져 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운명이 같다는 것은 우리의 운명이 한 분에게로 모아진다는 뜻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운명을 건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탁하신 명령을 수행하는 일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은, 예수 잘 믿어서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아닙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누구인지 잘 아는 것이고, 그분에게 우리의 삶을 거는 것이고,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달력을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달력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달력은 2013년 첫 번째 일요일이지만, 그리스도의 달력은 오늘이 주현절입니다.

 

주현절이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나신 날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선포되는 절기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첫 번째는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경배한 것을 통해서,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통해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동방 박사가 아기 예수를 경배한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헤롯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헤롯이 등장하는데, 헤롯 왕가가 팔레스타인 지방을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의 헤롯은 헤롯 왕가를 시작한 대헤롯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에돔 사람인데, 그 당시 세계를 다스리던 로마의 황제로부터 팔레스타인 지방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얻어서 그곳의 분봉왕으로 왕가를 이루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에돔 사람인데다가, 로마 황제의 간섭을 받고 있던 터라, 언제나 자리가 불안했습니다.

 

삶이 불안한 사람의 특징은 포악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굉장히 포악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을 건축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세 번째 지어진 성전을 일컬어 헤롯 성전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 성전은 솔로몬 때 지은 것으로 솔로몬 이라고 하고, 두 번째 성전은 바벨론 포로기 때 귀환해서 지은 것으로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전 신앙이었기 때문에, 성전을 웅장하게 지어줌으로써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46년 동안, 정말로 웅장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그것이 완공된 후에, 6년만에 로마에 의해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파괴됩니다만, 엄청난 역사였음에는 틀림 없습니다.

 

헤롯은 정치적으로 교묘하고, 성정이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잘 몰랐던 동방 박사 세 사람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님을 영접하고자 왕도인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동방 박사는 Dr. East가 아니라, ‘마기라고 불리는 점성술사들입니다. 요즘에는 과학시대이기 때문에 점성술을 신봉하지 않습니다만, 그 당시 고대사회에서는 점성술이 지금의 과학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과학적 근거를 갖고 삶을 꾸려 나가는 요즘 사람들처럼, 옛날 사람들은 점성술에 근거해서 삶을 꾸려나갔습니다.

 

성경에서 마고스라고 번역된 이들은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왕들에게 조언을 하던 학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삶과 세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연구한 사람들이고, 세상의 운명에 대해서 늘 관찰하고 연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 이들은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지요.

 

사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가 세 명이었다고 통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성경에는 그들의 신분이나 명수를 언급한 곳이 없습니다. 다만, 황금, 유향, 몰약의 세 예물을 근거로 해서, 세 명이라고 추산할 뿐입니다. , 두 명이 그 예물을 드렸을 수도 있고, 더 많은 동방 박사가 와서 그냥 세 가지의 상징적인 예물을 드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유대인의 왕도인 예루살렘에 동방 박사가 찾아와서, 헤롯 왕에게 묻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이 말을 들은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합니다. 정권이 교체될 때는 언제나 소동이 일어납니다. 요즘에 우리는 좀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전쟁과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이 소동한 이유는 바로 왕권이 교체될 때마다 이어지는 전쟁과 혼란의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더 나가서, 기존의 옛 질서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 앞에서 언제나 소동하기 마련입니다. 이 소동은 장차 예수님에게 일어날 수난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옛 질서에서 살던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만나면, 그의 인생에 일대 소동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예수님 만나서 평안하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그 평안은 폭풍 가운데의 평안이지, 바람 한 점 없는 평안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예수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실 겁니다.

 

헤롯의 심리를 보여주고 있는 단어가, 4절의 물으니라는 단어입니다. 우리 나라 말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원어에는 에퓐싸네토라는 말인데, 이것은 과거의 반복적인 동작을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헤롯은 한 번만이 아니고, 반복해서,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가운데,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한 성경의 예언을 물었던 겁니다.

 

그런데, 성경의 예언은 이들의 기대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장악하고 있는 예루살렘이 아닌, 이름 없는 작은 고을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고 예언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박사들의 기대와도 다르고, 유대인들의 기대와도 다른 메시아이신 것이죠.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미가 5:2) 말씀의 인용.

 

사실, 동방 박사들은 자신들의 상식대로 왕의 도성에 와서 왕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된 이들은 자신의 상식을 버리고, 별을 따라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갑니다.

 

별을 따라 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의 인생관에 큰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우리의 상식과 이 세상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입니다. 상식과 세상의 가르침이 우리를 너무도 압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일 여력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상식을 따라 예루살렘을 찾았던 동방 박사들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헤롯은 이들을 가만히 불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를 만나면 자신에게 기별을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신도 가서 그를 경배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짓말이었습니다. 자신의 정권에 늘 불안해 했던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님이 어디에 있는 지 아는 순간, 아기뿐만이 아니라,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동방 박사들까지 모두 죽여 없애버리기로 마음 먹었던 것입니다.

 

헤롯이 동방 박사에게 아기 예수 나신 곳을 기별해 달라고 부탁할 때, 그냥 말로만 부탁했겠습니까? 분명,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많은 선물을 내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방 박사들은 거기에 혹하지 않고, 아기 예수를 만난 뒤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경배 한 뒤, 요셉처럼 박사들도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고이들은 순종해서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박사들은 헤롯의 지시를 따르는 길이 아닌,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이 바로 자신들도 안전하고 아기 예수님도 안전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한 자는 그 생활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른 길로 갑니다. 그 길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의 길, 생명과 진리의 길입니다. 그 길에 진정한 안전과 행복, 그리고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동방 박사들이 별을 보고 따라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헤롯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만나야 할 분을 만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라 간다면, 우리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2013년도 새로운 해가 밝았습니다. 새해가 밝으면 우리는 여러 가지 다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 다짐이 무엇에 근거된 다짐인지 다시 한 번 되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헤롯이 지시한 길을 따라가고자 한 다짐인지, 아니면, 별을 보고 따라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받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한 다짐인지 꼭 돌아보아야 합니다.

 

해가 지나면, 나이를 한 살 더 먹기 때문에 육체는 후퇴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더 가까이 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발짝 더 다가온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기 위해서 이 세상의 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다른 길을 걸어가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과 말씀  (0) 2013.02.19
십자가의 도로 해결하라  (0) 2013.01.15
맡겨야 기쁘다  (0) 2012.12.18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0) 2012.11.19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  (0) 2012.11.12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2. 18. 01:41

2012121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시편 46

제목: 맡겨야 기쁘다

 

옛날 한 수도사가 올리브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 연약한 나무의 뿌리에 물이 필요하오니 단비를 내려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단비를 내려주셨습니다. 그 수도사는 또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이 나무는 태양 빛이 필요합니다. 기도하오니 햇빛을 내려 주옵소서.” 그랬더니 검은 구름에 덮여 있던 해가 나왔습니다. 이번에 그는 또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이 나무가 단단해지기 위해서 서리가 필요합니다.” 그 작은 나무에 서리가 앉아 번쩍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저녁에 그 나무는 죽어버렸습니다.

 

그 수도사는 동료 수도사의 방을 찾아가 그의 이러한 경험담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동료 수도사가 말합니다. “친구여, 나도 역시 작은 나무 한 그루를 심어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아주 잘 자랍니다. 나는 나무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 나무를 만드신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분은 나보다 나무가 필요한 것과 그 때를 정확히 아시니까요. 그러므로 나는 내 방식이나 어떤 생각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기도하지요. ‘주여! 이 나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시옵소서. 강풍이든, 햇빛이든, 또한 바람이든, 비나 서리든 주님께서 때를 따라 주시옵소서. 주님께서는 이것을 만드셨고, 그리고 잘 아시나이다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내 생각, 내 주장, 내 원함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원하심 앞에 내 생각과 주장을 맞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나를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에도, 원치 않는 환란 가운데서라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해가 보이지 않는 캄캄한 한밤중에도 새벽이 올 것을 기대하며 서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어려움과 고통의 자리에서도 나를 신뢰할 수 있겠느냐?”

 

오늘 본문 말씀은확신과 신뢰라는 주제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통치하심을 확신하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이제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 한 가지, 그것은 신뢰의 삶입니다. 이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고라 자손이 불렀던 찬양입니다. 성전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지만, 이 노래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임재에 대한 강한 확신이 담겨져 있습니다. 1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분으로 강조합니다. 이처럼 예배드리기 위해 성전에 오르는 예배자들은 그들의 삶의 자리가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하는 강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2절과 3절에서는 성전에 오르는 예배자들의 삶의 자리가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보여줍니다.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솟아나고, 산이 요동하는삶의 자리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현 주소입니다.

 

미국에는 소셜 시큐러티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말로, 사회안전보장제도입니다. 그리고 미국은 보험제도가 세상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입니다. 별의 별 보험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회안전보장제도나 보험이 정말 우리를 보호합니까? 그것들이 있어서 여러분의 삶은 평안하고 안정되십니까? 사실, 사회안전보장제도나 보험은 삶의 문제를 모두 돈으로 해결하려는 발상입니다. 그런데, 사회안전보장제도가 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기쁜 것은 아니고, 생명보험을 들어놓았다고 해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고, 암보험 들어놓았다고 해서 암에 안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양, 하나님 외에 여러 가지 의지할 것들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것은 모두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것은 모두 인간이 가지고 있는불안이라는 요소를 통해서 내 주머니를 털어내고자 하는 상업술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 시편을 노래했던 고라 자손, 그 때는 사회보장제도도 없었고, 보험제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삶의 곤고함과 탄식이 저절로 터져나오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한 삶의 자리에서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이들은 이야기 합니다. “가만히 있으라!”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집 값이 떨어지든지, 기름 값이 오르든지, 지진이 일어나든지, 식량값이 오르든지,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아이구 답답해! 얼마나 답답한 말씀입니까? 이렇게 힘든 때에, 굶어죽지 않으려면 발빠르게 움직여야지, 가만히 있으라니, 얼마나 답답한 말씀입니까?

 

이것은 홍해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던 말씀입니다.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도록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데, 가만히 서 있으라고 말씀하시다니 이 얼마나 미련한 방책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답답하게 여겼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뢰하는 사람들은 손을 들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하나님 믿다가 죽고 말겠네. 그러니 내가 해야겠네!

 

우리는 살면서 걱정 근심합니다.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문제 없으면 걱정 근심할 필요도 없을 텐데, 우리네 인생은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걱정 근심하는 이유는 그 문제를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어려운 환경에 서 있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견고하게 서는 것을 볼 때에 반드시 문제가 우리를 근심 걱정하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염려하다, 근심걱정하다라는 말의 헬라어는메림나오입니다. 이 말의 뜻은마음이 나누어진다입니다. 염려가 왜 생기는가? 근심 걱정이 왜 생기는가? 마음이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의 마음이 나누어지기 때문에 염려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신뢰하는 것입니다. 맡기는 것입니다. 어떤 큰 문제가 있으면 어른은 염려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잠만 잘 잡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100% 믿고 맡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고 권고합니다.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맡기게 됩니다. 가장 큰 은혜 중 하나가 바로잘 맡기는 은혜입니다. 상황은 여전히 어렵지만 염려가 안 되는 것, 그것은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제가 사우나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미국에는 사우나가 없는 것이 저한테는 가장 큰 불편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우나에 가면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참 은혜로운 문구가 출입문에 붙어 있습니다. “귀중품은 주인에게 맡기십시오. 맡기지 않은 것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 문구를 보고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 귀중품도 보관해 주고 참 감사하네. 둘째, 주인을 어떻게 믿냐?

 

마음이 강팍한 사람은 절대로 귀중품을 맡기지 않습니다. 마음이 강팍한 사람은 절대로너희는 가만히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강팍한 심령은 절대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도가 사상의 대가인, 노자라는 분이 있습니다. 노자도 하늘에 뚝떨어진 사람이 아니라, 스승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노자의 스승이 나이가 들어 이제 제자들에게 마지막 교훈을 주고 있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경청하던 젊은 노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곁에는 많은 제제들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릅니다. 선생님 곁에 있기만 해도 행복했습니다. 우리가 아픔이 있었지만, 선생님을 만나면 아픔이 치유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갈등이 있었지만 선생님과 대화를 하다 보면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걸 느꼈습니다. 그 비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 때 노자의 스승이 노자의 손을 끌어다가 입속에 집어놓으면서 말했습니다. “얘야, 딱딱한 이가 있느냐?” “선생님,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말랑말랑한 잇몸은 있느냐?” “, 잇몸은 그대로 있습니다.” “말랑말랑한 혓바닥은 그대로냐?” “, 그대로 있습니다.” “너도 그렇게 살아라! 남을 찌르며 딱딱하게 살지 말고 부드럽게 살아라. 부드럽게 사는 길이 이기는 길이다.

 

가만히 서 있는다는 것은 부드러운 심령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부드러운 심령은 서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 앞에서 딱딱해지면 우리는 넘어집니다. 말씀 앞에서 강퍅해지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계획이 너무 뚜렷하고, 나의 좋고 싫음이 너무 뚜렷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이 너무 뚜렷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삶의 여러 가지 문제들 가운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근심과 걱정만 늘어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시는 처방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그리고 너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라!”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 외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많아서 문제입니다. 그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아갈 때에, 아무것도 없어서 의지할 것이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그 시절에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 외에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생생하게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하나님 외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하나님만 의지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을 경험했지만,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했을 때 그들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귀중품은 주인에게 맡기십시오. 맡기지 않은 것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목욕탕 주인과 같은 믿을 수 없는 주인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만드신,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내 삶의 주인이십니까? 목욕탕 주인도, 맡긴 물건에 대해서는 책임을 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내 삶의 주인이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좀 맡겨 보십시오. 맡겨야지 책임을 져 주실 것 아닙니까? 맡기지도 않아 놓고, 물건 잃어버린 다음에 주인에게 따져봐야 소용 없습니다. 삶의 문제 하나 하나를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좀 맡겨 보십시오. 맡기시고,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신 것을 체험해 보십시오. 그래야 우리의 삶이 기쁠 수 있습니다. 맡기지 못하면 걱정되고 불안해서 기쁨이 빼앗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모든 삶을 온전히 맡기는 자는 사나운 폭풍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라는 인생의 사나운 폭풍 가운데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랬더니, 부활의 기쁨을 맛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의 삶은 바로 이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보내면서, 기쁨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이 풍진 세상에서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꼭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모든 영혼을 하나님께 맡겨야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삶 가운데 있는 문제를 바로 이 시간 하나님께 맡기고,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기다리며, 기뻐하십시오. 아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란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됨 알지어다

열방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란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사랑합니다 내 아버지 찬양합니다 내 온맘 다하여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가의 도로 해결하라  (0) 2013.01.15
다른 길  (0) 2013.01.07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0) 2012.11.19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  (0) 2012.11.12
신비를 체험하라  (0) 2012.11.07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1. 19. 17:33

2012 11 18일 주일 예배 설교 (추수감사주일)

본문: 히브리서 3:1-6

제목: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신앙생활과 극기훈련은 다릅니다.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새벽기도나, 수요예배나, 주일예배를 성실히 참여하는 것도 극기훈련처럼 보입니다. 신앙생활 생활과 극기훈련이 무엇이 다릅니까? 신앙생활은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극기훈련은 자기 의(의지)로 합니다. 신앙생활은 은혜로 하기 때문에 결과가 감사가 나옵니다. 극기생활은 자기 의로 하기 때문에 자기 자랑만 나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극기훈련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들어나는 것은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모두 열심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이 열심이라는 것이 단순히 나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깊이 생각해 보면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나옵니다. ‘함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calling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을 일컬어,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합니다. 거룩한, ‘하기오스’,라고 하는데, 이것을 성도라고 한다. 우리는 서로서로 성도 외에, 형제자매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성도인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부르는 호칭은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아서 하는 삶이 신앙생활이고,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은혜라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아서 신앙생활 하기 때문에 우리 삶 가운데는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들아, 형제들아,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우리 나라 말로 들을 때는 조금 덜 마음 속에 오는 것 같은데, 영어로 보면, “Fix your thought on Jesus”라고 합니다. 시선이나 생각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라고 합니다.

 

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을까요? 이 당시에 히브리서를 받아보는 성도들, 형제들이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박해와 핍박이 몰려오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다 보니, 예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던 생각이 자꾸 다른 데로 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거룩한 성도로서 감사함으로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극기훈련인지 신앙생활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무슨 신앙의 형태를 가지고 교회를 다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시선이라든지 우리의 생각이 예수에게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꾸 딴 데를 쳐다봅니다. 예수 외에 딴 데를 쳐다보게 하는 작전이 마귀의 작전입니다. 우리는 자꾸 거기에 말려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예수에게 시선을 집중하여라!” 왜 예수에게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까? 우리가 예수가 누구인지 잘 알아야 시선을 집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을 사도요 대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우선 예수님을 사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도라고 생각하면 금방 떠오르는 인물들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도는 좀 더 큰 의미에서 사도입니다. 사도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사람을 일컫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보냄을 받은 것도 아니고, 마귀한테 보냄을 받은 것도 아니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사도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주일예배에 오신 여러분들도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사도인 줄로 믿습니다. ‘사도 000’이라고 서로 불러 봅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재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로서 하나님께 보냄을 받고,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 중재하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러나 구원이라고 하는 것, 기독교의 구원을 잘못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느 종교에서는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구원입니다. 내가 열심을 내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일종의 극기훈련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구원은 하나님께 우리는 찾으시고 부르시는 것,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의 시작과 구원을 이루시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찾아오시고 부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은혜라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제가 우리 아들한테, ‘건유야 이리로 와봐!’하면 건유가 어떻게 할까요? 아버지가 아들을 이리 와봐하고 찾는 겁니다. 아버지가 부를 때 아들이 하면서 달려오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부르실 때 하고 응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찾으심과 부르심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부르심에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들을 불렀는데, ‘싫어요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불순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시고 찾으시는데, 아버지가 부르시는데 하고 가는 것이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기본적으로 응답(믿음)’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이것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부르실 때 하고 대답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완악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상하게 완악한 사람 빼 놓고는 아버지가 부르실 때 하고 대답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부르신다, 찾으신다할 때 거기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비교하고 있냐면, 2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그 집을 잘 다스리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 나라 말로는 그냥 이라고 번역했지만, 이것을 오이코스라고 하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가족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 건물을 생각합니다만, 교회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오늘 도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의미합니다. ‘권속이라는 말을 아시죠?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응답해서 거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까, 모세는 가족에 속해서 거기서 종으로서 이 가족이 하나님께 잘 갈 수 있도록 봉사를 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6절에 보면, 그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 가족을 이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종으로서 섬겼지만, 예수님은 아들로서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예수님 가운데 누가 높습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르심, 구원을 가져다 주신 분이고, 모세와는 차원이 다른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붙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고 합니다.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여된 소망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자랑입니다. 이것이 자꾸 흐려지니까, 신앙인들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소망과 복음의 자랑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끝까지 붙잡고 있으면, 하나님의 집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집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집을 다스리신다는 겁니다. 끝까지 붙잡고 있으면, 다스리시는 예수님께서 돌봐주시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꾸 여기서 떠나서 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되질 못합니다. 하나님의 집, 가족, 권속이 되어야지 예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시고 다스려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데, 우리가 자꾸 하나님의 집이 되지 못하니까 예수님의 돌보심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나가서 세상의 돌봄을 받던지, 스스로 돌보던지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2천년 전 성경의 시대(박해의 때)보다 예수 믿기가 더 힘듭니다. 너무도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많습니다. 너무 바쁘고, 너무 세상 살기 힘듭니다. 이것은 우리의 잘못은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 예수님께 집중하지 못하지 못하게 하려고 별 짓을 다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핍박을 받으면 오기가 생겨서 더 달려드는 법입니다. 누군가가 옆에서 핍박을 하면 이를 악물고 교회 나옵니다. 그런데 핍박이 없어지면 언제 예수를 믿었나 싶을 정도로 교회를 안 나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calling’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는 얼마나 응답을 하고 있습니까? 특별히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인데, 그 어느 날보다 더 강렬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들리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하는 믿음으로, 그분의 부르심의 은혜로 신앙생활 한다면, 우리는 오늘 감사절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여기에 나오시면, 어떠한 감사를 들고 오셨습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과 어느 시인의 시 한 편을 나누면서 감사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손에 대한 예의라는 시입니다. 제가 주보에도 실어놓았으니, 집에 가셔서 몇 번 더 보시면서 감사절 주간에 감사에 대해서 깊은 묵상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장 먼저 어머니의 손에 입을 맞출 것
하늘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것

일 년에 한번쯤은 흰 눈송이를 두 손에 고이 받들 것
들녘에 어리는 봄의 햇살은 손 안에 살며시 쥐어볼 것
손바닥으로 풀잎의 뺨은 절대 때리지 말 것

장미의 목을 꺾지 말고 때로는 장미가시에 손가락을 찔릴 것
남을 향하거나 나를 향해서도 더 이상 손바닥을 비비지 말 것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리지 말고
눈물은 손등으로 훔치지 말 것
손이 멀리 여행가방을 끌고 갈 때는 깊이 감사할 것
더 이상 손바닥에 못 박히지 말고 손에 피 묻히지 말고
손에 쥔 칼은 항상 바다에 버릴 것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한 손은 늘 비워둘 것
내 손이 먼저 빈 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자주 잡을 것
-
정호승, '손에 대한 예의' 부분
-

마음이 흔들리고, 삶이 어렵고, 불평 불만이 쌓여갈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집, 가족, 권속이 되는 것이고, 그럴 때 그 집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극진하게 돌아봐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실 때, 바로 그 때 우리의 삶은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됩니다. 다른 어떤 것의 돌봄은 우리에게 감사를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돌보심만이 우리에게 감사가 넘치게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고, 이 감사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깊이 생각하시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른 길  (0) 2013.01.07
맡겨야 기쁘다  (0) 2012.12.18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  (0) 2012.11.12
신비를 체험하라  (0) 2012.11.07
성령에 취하라  (0) 2012.10.29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1. 12. 11:33

2012 11 1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에베소서 6:10-24 (에베소서 9번째 시간)

제목: 영적 전쟁

 

오늘 말씀에 보면 기도에 대해서 나옵니다. 두 가지 기도가 나옵니다. 18절에 보면, 모든 기도 간구, 이런 것을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하라,고 나옵니다. 첫 번째 나오는 기도는 프로슈케라고 하는데, 일반적인 기도를 말합니다. 두 번째 기도는 우리 나라 말로는 간구라고 구분해 놓았는데, ‘데에시스라고 하는데, 구체적인 긴급한 탄원, 간청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일반적으로 일상적으로 기도하기도 하지만, 긴급한 일이 있을 때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탄원하고 간청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깨어 있으려고 기도합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기도하고 있는데, 기도하나 마나, 기도 하는 거나 기도하지 않는 거나 똑같다, 우리가 이런 말 한다. ‘눈뜨고 코를 베인다, 귀를 베인다, 눈 뜨고 당한다.’ 기도하면서 깨어 있어야 하는데, 깨어 있으려고 기도하는 중에서도 눈 뜨고도 당한다. 이 세상이 그렇습니다. 사탄 마귀가 그렇습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우리를 능가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서 깨어 있으려고 해도 눈 뜨고 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깨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눈 뜨고 당하는데, 우리가 깨어 있지 않고 자고 있을 때는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늘 깨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오늘은 영적인 전쟁에 대해서 살펴 보고 있는데, 이 당시에는 영적인 전쟁이 굉장히 심했습니다. 이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 어떻게 받았냐면, 로마의 수호신이 로마 사람들을 호위해 주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위협한다고 생각되어서, 그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무신론자라고 고발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무신론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신이 없는 상태로 살아가야 한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신을 만들어서 그것을 섬기면서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고 섬기는 신에 대해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기에는 무신론자이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에는 무신론자이지만 우리는 참된 진리의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성찬식 같은 것을 보면서, 성찬식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자라고 하는 것을 오해해서, ‘이 사람들은 살과 피를 먹는 식인종인가보다라고 생각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식인종의 풍습을 가지고 있다라고 오해를 받으면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만나면 서로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리고 가족 아닌 사람들에게 형제 자매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족보도 없다 보다, 이들은 근친상간을 하나보다’,라고 오해 받으면서 엄청난 박해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박해를 무릎 쓰고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영적인 전쟁터에 섰는데, 오늘 말씀에 보면 자기 자신이 선봉에 서서 영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19절과 20절 말씀을 보면, 이제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서 로마 법정에 가서 황제 앞에서 직접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앞에 섰을 때에 복음의 비밀을 황제 앞에서 당당하게 외칠 수 있도록,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가운데서는, 우리가 영적 전쟁을 잘 수행해 나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신갑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신갑주를 입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 인간의 마음으로, ‘나는 전신갑주를 입었어라고 생각해 보았자, 그것은 다 뚫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보다 강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신 것을 입어야지, 전신갑주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전쟁터에 들어 섰고, 우리는 이미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신갑주를 입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쟁터에 나간 사람이 무기를 갖추지 않고 전쟁에 나간다는 것은 나 스스로를 포기하는 삶의 자세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뜨뜨미지근한 신앙이 참 안 좋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저 사람은 왜 신앙생활을 저렇게 하나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핀잔을 듣기 때문에 안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영적인 전쟁에 임했는데, 거기서 살아 남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무조건 이기는 겁니다. 이기려면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지금 적군이 나에게 몰려오니까,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 전쟁에서 승리해야 살아 남을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전쟁에서는 강한 사람이 살아남습니까? 누가 강한 사람입니까? 전쟁에서 강한 사람이 살아남습니까? 살아남은 사람이 강한 자입니까? 어느 사람이 강한 겁니까? 살아남은 사람이 강한 거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렇게 치이고, 저렇게 치입니다. 창세기에서도 보면, 가인과 아벨이 싸웠는데, 세상 사람인 가인과 하나님의 사람인 아벨이 싸웠는데, 누가 이겼습니까? 가인이 이겼습니다. 이것을 보면 세상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강한 사람이 살아남을 것 같은데,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살아남은 사람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살아남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는 끝까지 살아남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 받고 하나님 앞에 나왔으면, 바로 거기서 고민할 것 없이, 곧바로 적극적인 자세로 영적인 전쟁에 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 몸을 들어서 머리에 투구를 쓰고, 가슴에는 호심경을 하고, 흉배를 하고, 허리띠를 띠고, 이런 말을 하는데, 여기서 신체적인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리, , 복음, 믿음, 구원, 성령’,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보면, 세상이 요구하는 전신갑주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전신갑주가 너무도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자기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세상에서 자기들이 하는 전쟁터에서 이기려고 할 때에, 세상이 요구하는 전신갑주는, ‘진리, , 복음, 믿음, 구원, 성령’, 이런 것이 아닙니다. ‘, 건강, 명예’, 또는 교묘하게 마음을 써서 악마의 마음으로 내가 저 사람을 무조건 이겨야 해뭐 이렇게 해서 저 사람을 끌어내리고, 거짓말 하고 그래서 이기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전신갑주는 이것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진리, , 복음, 믿음, 구원,’ 이런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 가운데서, 제가 두 가지를 참 좋아하는데, 다 필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첫 번째로 평안의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가라고 합니다. 우리가 신을 신고 어디든지 가는데, 그 가는 발걸음, 저 사람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도대체 무슨 발걸음인가라는 것입니다. 평안을 위해서, 화평을 위해서 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저 사람에게 따지러 갑니까? 세상 사람들은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가지 않습니다. 이 신에 가시가 들어서, 저 사람을 찾아가서 저 사람을 찌르는 말, 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 저 사람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는 말을 가지고 싸우려고 신을 신고 가지, 우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화평을 전하고, 원수 되었던 사람들과도 다시 화해를 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화목 되게 하셨던 것처럼, 그 복음을 우리가 신고, 찾아 다니는 사람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화평을 전하고, 화해하고, 복음을 전하고, 원수 되었던 것을 다 풀고 서로 평안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미움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범람입니다. 주체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마음 속에 밀려 오는 미움! 저 사람이 하는 말도 밉고, 저 사람이 하는 행동도 밉고, 그래서 저 사람하고 상종하기도 싫고, 이러한 것들이 우리 가운데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의 인간관계가 자꾸 나누어지고, 우리의 인생이 힘들고 어렵고, 심지어 우리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한 몸을 이루어서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런 것들은 바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우리가 취할 때 모두 물리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꼭 입으시고,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꼭 신으십시오. ‘진리, , 믿음, 구원, 성령,’ 이런 것을 우리가 다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두 번째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령의 검을 들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검을 의미합니다. 여성 분들을 잘 모르시겠지만, 로마군들도 처음에 싸울 때는 창 던지는 것 같이 서로 떨어져서 싸웁니다. 요즘에도 총싸움을 하기 때문에 떨어져서 싸웁니다. 그러나 제일 마지막에 하는 싸움은 뭐냐면, ‘백병전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검을 들고 일대일로 얼굴을 맞대고 싸우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멀리 떨어져서 총 싸움 할 때는 총으로 죽이는 것이니까 그냥 그렇지만, 내가 직접 일대일로 맞서서 싸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앞에서 그냥 이 사람의 땀 냄새, 피냄새 등 악독한 냄새가 많이 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쟁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삶을 살아가시면서 우리가 얼마나 악한 냄새들, 죽음의 냄새들이 얼마나 많이 납니까?

  

그런데, 그 단검을 가지고 싸우는 치열한 백병전, 직접 맞대고 싸우는 그 전쟁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성령의 검을 갖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좀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성령의 검은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다른 전신갑주들은 모두 방어용 입니다. 방어용이기 때문에 어떠한 능력이 나타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냥 막는 것이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성령의 검은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방어용은 능력이 안 나타나는 것이 아니지만, 공격용은 능력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능력을 나타내야 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누가 병들었다,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하는 겁니다. 그것이 능력을 나타내는 겁니다.

 

우리 삶 가운데 왜 능력이 나타나지 않느냐, 이렇게 불평불만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성령의 검을 날마다 사모해 보십시오. 그러면 분명히 거기서 능력이 나타납니다. 정말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꼭 신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성령의 검을 사모해서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서 영적인 전쟁에 임해야 승리할 수 있는 것이지, ‘나는 조용히 살래하면 안 됩니다. 내가 조용히 살고 싶다고 해서 영적인 전쟁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전쟁 한 가운데 서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하셔서 살아남으십시오. 신앙생활 하실 때,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영적인 전쟁에 임하십시오. 그래서 끝까지 살아남으십시오. 그래야지 강한 자입니다. 그것이 강한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영적인 전쟁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힘들고 괴롭죠.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평안은 그냥 평안이 아니라, 폭풍 가운데서의 평안입니다. 영적인 전쟁을 하는 가운데서도, 우리가 전쟁 통에 있지만, 우리가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두려움과 떨림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평안을 내려 주실 겁니다.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면서 전신갑주를 취하면 끝까지 살아남아 승리하게 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 구원의 은총을 누리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설교를 음성으로 듣고 싶으시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columbus.onmam.com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맡겨야 기쁘다  (0) 2012.12.18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0) 2012.11.19
신비를 체험하라  (0) 2012.11.07
성령에 취하라  (0) 2012.10.29
언약시대 VS 언약성취시대  (0) 2012.08.13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1. 7. 05:41

2012 11 4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에베소서 5:22-33 (에베소서 8번째 시간)

제목: 신비를 체험하라

 

오늘 말씀은 언뜻 보면 가정생활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언뜻 보면, 결혼생활이 어떠해야 한다, 부부생활이 어떠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가정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볼 때 이 성경구절을 들어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사도 바울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남녀의 결혼생활의 관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면, 이 말씀을 들어서, 남편은 아내에게 성경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그랬잖아그렇게 윽박지르게 되고, 반대로 아내는 남편에게 당신은 그것만 보여, 여기에 보면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 그랬잖아’, 하면서 싸우게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구절 들이대면서 서로 싸우라고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아니겠죠.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신비를 체험하라라고 정해 봤는데,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신비를 체험하고 깨닫지 못하면 성경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전제는, 5 21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것이 기본 전제입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 바울이 근본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교회론입니다. 교회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말하고 싶어서 이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론을 온전히 알면 그리스도인의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신앙과 우리의 일상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우리의 일상생활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이 둘은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중간의 말씀처럼,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우리의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것은 아내와 합하여 육체가 하나가 되는 것처럼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을 구분하니까 이러한 신비를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결혼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끌어옵니다. 그러나 사실 조금 위험한 메타포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부관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 생활에서 천국 같은 행복을 경험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그렇지 못하고 가정 생활에서 지옥을 경험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사실, 지옥과 천국을 오르락 내리락 하죠.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이것을 그대로 적용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교회)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 부부의 관계라고 하면 납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수 관계가 이러한 거라면, 내가 가정 생활에서 지옥을 체험하고 있는데, 그러면 나는 예수 안 믿겠다고’, 나올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에 로마문화, 헬라문화의 현상을 설명 드렸듯이, 그 당시는 간통이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었고, 매춘을 부추기고,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 보기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그 당시 사회에서는 혁명적인 일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아예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부부의 관계고, 부부의 관계가 또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서로 지금 회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관계가 원래 이래야 한다!’ 부부관계가 그 당시 깨져 있으니까, 그 관계를 거룩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운 관계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부부의 관계로 설명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사람들이 잘 감을 못 잡고 있으니까 우리 일상생활의 부부관계를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두 가지 효과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는 교회론,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실제적인 예를 들어서 보여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당시 깨져 있는 부부관계를 성스럽고 아름다운 관계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 두 효과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고 있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25-27절 말씀이 교회론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구절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교회에게 주신 이유를 세 가지 듭니다. 첫 번째, ‘교회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주셨다고 합니다.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교회를 영광스러운 신부의 모습으로 세우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행위에 강조를 둔 것이고, 세 번째는 그 행위를 통해서 우리 교회가 실제적으로 도덕적으로 모습이 변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기오스: 거룩한 백성, 거룩하다, 흠이 없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교회론과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이기 위해서 계속해서 쓰고 있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세 가지의 메타포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머리와 몸의 관계, 2) 신랑과 신부의 관계, 3) 사람과 자기 자신의 몸의 관계

 

이 세 가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머리와 몸의 관계이고, 신랑과 신부의 관계이고, 사람과 자기 자신의 몸과 관계입니다. 사람과 자기 자신의 몸과 관계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자기 몸처럼 아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몸을 학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몸을 사랑합니다.

 

몸이 머리에 복종하듯이, 몸인 교회가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신랑신부의 관계, 이것이 핵심적인 것인데, 예수님하고 교회가 부부관계를 맺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 24절의 말씀을 끌어와서 사도 바울이 쓰는 것인데,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말씀인데, 이 모습처럼 신랑신부의 모습처럼 예수와 교회가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몸이 되었으니까, 사람이 자기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9절 말씀에 보면, ‘먹이신다, 자상하게 돌보신다는 표현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먹습니다. 이것은 본능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먹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자상하게 돌봅니다. 그런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먹이시고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신비를 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신비를 깨닫지 못하면, 오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 이 교회론을 들어서, 일상생활을 들어서 교회론을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 일상생활을 교회론의 신비로움이 가득찬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끌어올리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이 신비를 꼭 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머리고, 아내는 몸이고, 우리가 신랑이고 신부고, 우리가 한 몸이 되었으니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부의 관계다, 결혼생활의 관계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종합적으로 설명합니다. “너희들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고 표현합니다. 사랑에는 헌신과 돌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교회를 위해서 내어주셨는데, 그것이 헌신입니다. 그리고 먹이시고 자상히 보호하십니다. 그것이 돌봄입니다. 그리고 존경이라는 말, 아내는 남편을 존경해야 하는데,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섬기는 것처럼 그렇게 섬겨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잘못 생각하면, ‘내가 너에게 헌신하고 너를 돌봐줬으니까 너는 나에게 복종해야 해, 너는 나를 섬겨야 해이렇게 강요합니까?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내가 십자가에 달려서 너를 위해서 헌신했어. 그리고 내가 너를 맨날 먹이고 입히고 너를 세심하게 돌봐주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하고 있느니까 교회 너희들 나에게 복종하고 나를 섬겨야 해.’ 이렇게 합니까? 예수님을 이렇게 안 합니다. 반대로, 교회가 예수님 제가 당신 말씀에 복종하고 당신을 섬길 테니까 당신 나한테 헌신해 주시고 나를 돌봐주세요이렇게 합니까? 이렇게 하면 계약적인 관계고 인위적인 관계지, 이것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 자유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깨진 관계입니다. 굉장히 어색한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에게 헌신하고 아내와 가정을 돌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교회를 돌보신 것처럼 그냥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입니다. 이것이 좀 다가 오십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이게 뭐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비를 깨닫고 나면, ‘, 예수님께서 그렇게 헌신하시고 그렇게 돌보셨지. 아 그렇게 내가 가정에게 헌신하라고, 돌보라고 하시는 것이구나!’ 남편들이 이렇게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신비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면, 모든 것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열심을 다해서 헌신하고 자상하게 돌보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아내가 이 신비를 체험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 예수님하고 교회와의 관계가 이렇지. 머리와 몸이야. 한 몸을 이루어서 이렇게 하셨지. 그런 것처럼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섬김의 도를 펼치는 것처럼 가정에서도 그렇게 해야지.’ 이런 모습이 바로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고 가정을 사랑하고 섬기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돈많이 벌어다 주는 것, 맛 있는 거 해주는 것이 근거가 아닙니다. 돈 많이 안 벌어다 주면, 깡패처럼 굴것입니까? 요즘 결혼이 이런 형태로 돌아가니까, 가정이 힘들어집니다.) 이것은 누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헌신했으니까, 내가 돌봤으니까 이렇게 해’, 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심장, 창자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부터 체험해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참 자유, 자유의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결혼생활이라든지, 남편과 아내의 관계, 가정에서 자녀를 돌보고, 자녀가 부모를 섬기고 하는 것이, 이 믿음의 신비를,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면, 남편과 아내, 부모 자식 간에 이 신비로운 상태에서 서로 섬기는 것이 잘 될 수 없습니다. 이것만 잘 된다면 가정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현대인들의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가정이 깨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깨지고 있다는 것은 더 깊이 들어가면 신앙의 문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끝까지 들어가보면 결국 신앙의 문제로 갑니다. 신앙이 회복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을 깨닫지 못하니까, 자꾸 가정이 깨지는 것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 가정이 깨진 분들을 정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가정을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런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고, 신앙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하나님의 은총, 십자가의 신비,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한 몸을 이루셔서 우리를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그 신비로움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의 가정생활이 어떻게 변해야 하고, 아내를 어떻게 대하고, 남편을 어떻게 대하고, 자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온전하게 스스로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로서 성도님들에게 가장 전하고 싶은 말씀은 이러한 것입니다. 말씀의 신비를 체험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부분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깨어진 관계, 망가진 나의 육체, 깨어진 가정, 깨어진 나와의 관계, 이 모든 것들이 신앙의 문제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꾸 그 능력을 믿지 않고, 말씀의 능력을 자꾸 부정하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렇지, 모든 것이 다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그런 것을 부인합니다. 요즘 시대 사람들은 자꾸 부인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부인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도 제가 말씀 드렸듯이, 겉핥기로 보면 서로 싸움만 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신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화해하게 하는 것이고, 서로 깊이 사랑하게 하는 것이고, 서로 잘못했다고 하면서 용서하게 하는 것이 말씀이지, 말씀에 근거를 들어서 서로 싸우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늘 그렇습니다. 늘 안타까운 것이, 성경을 좀 안다, 읽었다고 하면, 괜히 성경을 들어서 싸울라 그러고, 성경을 근거 들어서 억지로 복종시키려고 합니다. 여태까지 남자들이 많이 그랬습니다. 성경을 들어서 어디 아내가 남편한테 그래 남편한테 복종해야지’, 하면서 여자들을 억압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즉 말씀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에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십시오. 신앙생활 하시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체험하십시오. 그러면 그 안에서 우리 삶의 모든 문제들을 풀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남편은 아내에게 이래야 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이래야 한다고 단순하게 지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어떤가, 그 신비로움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신비로움을 깨달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신비를 온전히 깨달으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거룩하고 아름답게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 삶에 문제가 있을 때, 가정에 문제가 있을 때, 내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신 그 신비로운 은혜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닌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를 자신의 몸처럼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신비를 체험하셔서, 삶의 모든 것이 거룩하고 아름답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설교를 음성으로 듣고 싶으시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columbus.onmam.com/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0) 2012.11.19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  (0) 2012.11.12
성령에 취하라  (0) 2012.10.29
언약시대 VS 언약성취시대  (0) 2012.08.13
사랑, 불가능한 가능  (1) 2012.05.14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0. 29. 03:43

2012 10 28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에베소서 5:15-21

제목: 성령에 취하라

 

오늘 말씀 보면 술 이야기가 나옵니다. “술 취하지 말아라.” 그와 대비해서 성령에 취하라는 말씀을 합니다. 술이라는 것 말도 많고 탈도 많습니다. 술 마셔야 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한국 교회 윤리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만큼 술이라는 것이 인간의 삶과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앙과도 어떠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에는 왜 이렇게 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지에 대한 것을 알고 나면, ‘, 그래서 그렇구나’, 뭔가 깨달음이 올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술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나 성령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예수님이 승천 하신 후 예루살렘에서 모여 예배 하던 제자들이 성령을 처음 받을 때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술 취했다고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같은 곳에서도 술 이야기를 하면서 성령 이야기를 함께 합니다. 왜 그럴까요?

 

옛날 사람들은 술에 취하면, 술 신(디오니소스)의 영감을 받거나, 영감에 사로잡힐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술에 취하면 디오니소스의 영감을 얻을 수 있고, 디오니소스의 능력을 행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신적인 존재가 되려고 합니다. 신적인 존재에 기대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디오니소스가 어떤 신입니까?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입니다. 그는 포도주의 신으로 포도경작법을 널리 전파시켰습니다. 디오니소스는 한번 죽었다 다시 살아난 신으로 죽음에서 부활한 구원의 신, 생명력의 신, 잔인함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도취와 쾌락의 신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신적인 존재가 되기를 욕망합니다. 그래서 신적인 존재에 신접하려고 노력합니다. 요즘 시대는 고대 사회처럼 미신적으로 신접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신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요즘에 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돈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 신의 능력을 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신적인 능력을 발휘하고자 자꾸 돈과 신접하려고 한다. 그래서 돈과 신접하기 위해 별 짓을 다 합니다.

 

최근에 공모자들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돈을 벌기 위해 무리들이 짜고 어떠한 사람들을 유인해서 공해 상이나, 중국의 한 병원에서 납치한 사람의 장기를 꺼낸 뒤, 그 시신은 콘크리트를 발라서 바다에 던져 버리고, 장기는 고가게 팔아 먹는 내용을 다룬 영화입니다. 실제로 인육을 공급하기 위해서, 그리고 장기를 팔아 먹기 위해서 사람을 납치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우리 삶의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그 영화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 ‘신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신접하기 위해서 별 짓을 다 합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고대 신비 종교가 그들 예배 시간에 성행위를 했다는 것을 보며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그 행위가 굉장히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돈에 신접하려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심각한지. 눈에 불이 켜져 있습니다. 똑같습니다. 고대 신비 종교에서는 예배 시간에 성행위를 하면서 그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신접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신의 능력을, 그렇게 함으로써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행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생각을 알고 넘어가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래야 왜 그들이 그렇게 했지는지를 알고, 그것을 보면서 왜 성경이 그것들에 대해서 언급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에는 이방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것에 빗대어서, 그것과는 대조적인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이 술 취하는 것을 통해서(신접해서) 디오니소스의 신적인 능력을 받을 수 있다는 개념을 통해서 성령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대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은 너희들이 술에 취하듯이 성령에 취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술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고, 술 이야기가 나오는 곳에는 성령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익숙한 것을 통해서 너무도 새로운 복음인 성령 취함에 대해서 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술 취함에 대해서 많이 나옵니다.

1. 음주는 습관화 된다( 23:21). 습관화, 이것을 중독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것이 무서운 것이죠. 무엇이든지 중독이 무서운 것입니다. 일단 어딘가에 중독되고 나면 나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그 일을 하게 됩니다. , 마약, 섹스, 게임, 성형, 심지어 운동 중독까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적당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약 같이 몸과 영혼을 망가뜨리는 것은 아예 손 대지 말고 쳐다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2. 음주로 인해 궁핍하게 된다( 23:21). 음주 많이 하면 가난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음주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음주에 빠져 사는 사람은 분명히 가난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3. 술은 뇌에 영향을 미치고 구토를 일으킨다( 19:14).

4. 술은 도덕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 28:7). 이사야가 술 취해서 재판을 굽게 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비판하면서 쓴 말씀입니다.

5. 술은 속이는 것이다( 20:1). 잠시 기분을 알딸딸하게 해주어서 만사형통인것처럼 느끼게 하지만, 술에서 깨어나면 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술 취하기 보다, 문제에 직면해서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푸는 것이 낫습니다. 술 먹으며 도망가지 마십시오.

6. 음주는 음란한 생각과 관련 있다( 23:33). 요즘 일어나는 성범죄의 많은 부분이 술 먹은 뒤, 성충동을 억제하지 못해서 일어납니다. 술을 먹으면 실제로 성충동이 일어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7. 음주는 잘못된 행위를 하게 한다( 9:24). 노아가 술에 취해서 정신 못차리고 있을 때, 그의 아들 중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는 패역한 일이 벌어집니다.

8. 음주로 인해 망령된 말을 한다( 23:33). 술 먹으면 입에서 예쁜 말 안나옵니다.

9. 음주는 방종하는 무법자를 만든다( 31:5).

10. 음주하는 자는 천국을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 5:21).

 

여기서 술 마시는 것 때문에 천국을 못 가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지극히 고대적인 생각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나오는 말씀인데,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에서의 맥락과 같습니다. 왜 그런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술 마시는 것이 우상숭배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요즘 시대는 좀 다릅니다. 요즘에는 술을 마시면서 우상숭배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요즘에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건강때문입니다. 신앙(우상숭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술 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이유를 신앙(우상숭배)과 결부시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몸과 영혼을 맑게 하고 건강하게 지킬 의무를 위해서 술 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더 이치에 맞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혹시 여기에 신접하시려고 술 마시는 분 계십니까? ‘나는 술 마시면 영감이 떠올라!’ 그런 분들은 절대적으로 술을 끊으십시오.

 

술 취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이 이렇게 많은 것을 보면서 술 취함과 성령 취함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습니다. 술 취함이 우리의 몸과 영혼에 해악을 미치는 것과는 다르게 성령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이롭게 합니다. 술 취해서 우리는 우리의 몸과 영혼을 망가뜨리지만, 성령의 취함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구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술 취하는 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새사람이 무엇인지를 나열하고 있다.

1.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한다.

2. 진정한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게 된다.

3. 감사게 된다.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술 취한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새사람입니다. 술 취한 사람은 대부분 울면서 원망합니다. 감사가 어디 나옵니까. 욕만 나옵니다. 그러나 성령에 취한 사람은 다릅니다. 눈이 오나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언제나 감사하게 됩니다.

4.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게 된다.

술 취한 사람은 막 나갑니다. 술 먹고 성질 난다고 파출소 들이 받고, 술 취하면 아버지 엄마도 없습니다. 그냥 누구든지 걸리면 들이 받게 됩니다. 성령에 취하면 서로 복종하게 됩니다. 성령의 눈으로 각자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을 보고, 피차 서로 복종하게 됩니다. 서로를 존중하게 여기게 되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귀하게 여기며, 서로 귀하게 여기면서 사는 삶, 새 사람의 삶, 성령에 취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그 당시 술 취한 사람들, 그렇게 신접해서 사는 삶, 영감을 받아서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지금 이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똑 같은 메시지를 줍니다. 성령에 취한다는 것은 하나님만 믿고 살아가는 것인데,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육체와 영혼이 어떻게 망가지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완전히 그것과는 다르게, 성령에 취해서 하나님만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어떤가를 볼 수 있습니다.

 

술 취해서 이 세상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열매(육체의 열매)와 성령에 취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열매(성령의 열매)를 대조해서 보여줍니다. 특별히 갈라디아서 519-23절에 보면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가 어떻게 다른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성령에 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성령 이야기를 하는데, 많은 분들이 헷갈려 합니다. 여러분 술 취하고 싶으시면 어디를 가십니까? 술 마시는데, 술집에 가서 술 사서 마시면 됩니다. 성령에 취하고 싶으시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교회 오면 됩니까? 틀리지 않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은 어떤 때 옵니까? 성령은 누구를 통해 옵니까? 성령은 예수님 통해 옵니다. 술 취하고 싶으면 술 사서 먹으면 되는 것처럼, 성령에 취하고 싶으면 예수님을 먹으면 됩니다. 우리가 매달, 예수님을 먹습니다. 그것이 성만찬입니다. 우리가 매일 무엇을 먹습니까? 말씀을 먹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분, 즉 예수님이십니다. 성령에 취하고 싶으면, 예수님을 먹고 마시면 됩니다. 많은 분들이 이것을 헷갈려 합니다. 술에 취하는 법은 우리가 잘 알면서 성령에 취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성령, 성령, 많이 들어보기는 했는데, 성령에 취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너무 간단한데, 너무 모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됩니다. , 단순하게 얘기해서, 예수님을 잘 믿으면 됩니다.

 

성령의 삶이라는 것이 성령 따로 있고, 예수님 따로 있고, 하나님 따로 있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 취하는 방법은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 찬양을 미친 사람처럼 부르거나 고대 종교 의식에서 행했던 것처럼 미친 짓을 하면 성령이 온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 잘 믿으면 됩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존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에 있는 그리스도를 존중히 여기면서 피차 서로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 안 빠지고, 기도 많이 하고, 찬송 열심히 부르고, 헌금 많이 내고, 이런 것이 예수를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 잘해도, 내 안에, 그리고 상대방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존중히 여기지 않고, 피차 서로 복종하지 못하고 술 취하는 것을 통해서 나를 망가뜨리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후벼 파면서 산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제 왜 자꾸 사도 바울이 술 얘기를 해 가면서 자꾸 성령 이야기를 하는가를 알 수 있죠? 그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취한다는 것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여러분, 술 취하지 마십시오. 단순히 술 먹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성령 외에 다른 것에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유익함이 얼마나 큽니까?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 담배도 잠시 우리에게는 유익을 주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다른 어떠한 것, 인삼이나 산삼, 또는 이 시대의 신인 이 가져다 줄 수 없는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을 가져다 주는 성령에 취해서 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지혜로운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술 먹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이것만 생각하시는 분은 오늘 설교를 잘못 들으신 겁니다.

 

술 취하지 마시고, 성령에 취하십시오. 여러분을 능히 구원할 것에 집중하며 사십시오. 여러분의 육체와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참된 능력인 성령에 취해 사십시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  (0) 2012.11.12
신비를 체험하라  (0) 2012.11.07
언약시대 VS 언약성취시대  (0) 2012.08.13
사랑, 불가능한 가능  (1) 2012.05.14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1) 2012.04.02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8. 13. 02:15

2012 8 1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7:24-35

제목: 언약시대 VS 언약성취시대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제자들을 보내, “당신이 오실 그이니이까?” 질문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는 사역을 보여주시며,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라고 전하라며, 당신이 바로 오실 그이라는 것을 드러내신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세례요한에 대한 평가를 내리신다. 오늘 읽은 본문이 그 부분이다.

 

1.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다 (예수님에 대해 보인 초기 입장과 현재 입장의 차이 때문) à 세례요한의 사역 초기에는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생각했던 메시아 상과 예수님에게서 실제로 보이는 모습이 다른 것을 보고, 점차 예수님이 진짜 오실 그이, 즉 메시아인지 아닌지 의문을 갖게 된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제자들을 보내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일컬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세례요한을 줏대없는 사람으로 평가절하하시는 것은 아니다.

 

2. 요한은 영광스러운 메시아적 존재가 아니다

그 당시 세례요한을 메시아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왕궁에 산 것이 아니라, 광야에 산 것처럼 그는 영광스러운 메시아적 존재가 아니다. 이 사람은 그저 메시아의 길을 예배하는 선지자일 뿐이다.

 

3. 요한은 가장 위대한 선지자이다

구약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사람은 가장 위대한 선지자이다. 왜냐하면, 구약의 메시지의 초점은 오실 이에 대한 증언인데, 그 오실 이를 직접적으로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 중 가장 큰 선지자이다.

 

구약시대란, 언약시대, 즉 언약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기다린 시대이다. 여기서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이루지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그리스도인)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고백한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고백은 구약의 예언을 통해서 기다려진 메시아가 바로 예수라는 뜻이다. 예수가 바로 그토록 대망하던 메시아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야말로, 예수를 통해서 구약의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를 이루신 이래로, 이제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언약 성취의 시대가 되었다. 더 이상 언약을 기다리는, 언약시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 상황을 예수님께서는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다.

 

장터에는 악기팀과 악기에 따라 연기하는 팀이 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악기팀에 해당하고, 백성들이 악기에 따라 연기하는 팀에 해당한다.

 

세례요한은 애가를 불러 사람들을 통곡하게 했다. 이는 구약시대의 관점에서 너무도 지극히 당연한 사역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하나님 나라를 받기 위해 회개하는 것 밖에는 없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곧 심판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신의 회개 메시지와 일치되는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물론 거기에 반응한 사람들이 있었다. 세례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쳤을 때, 요단 강가에 나와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며 회개로 응답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과 대다수 사람들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에 반응하지 않았다.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세례요한을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예수님은 피리를 불며 사람들을 춤추게 하셨다. 이는 언약성취의 시대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사역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는 이 땅 위에 도래했다. 예수님은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와 일치되게 식탁교제를 나누며 세리와 죄인들과도 어울리셨다. 세례요한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외쳤지만, 하나님 나라 자체이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바로 지금 여기에 왔다고 선포하셨다. 이 메시지를 믿은 사람들(주로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로 선포하며 그를 믿고 따랐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과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오히려 죽이려 했다. 특별히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일컬어 먹보요 술꾼이라고 비난했다.

 

33-34

세례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 들렸다 하더니 인자가 와서 먹고 마시대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는 객관적 시각이 없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해도 잘못이라 한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제대로 반응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것을 보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도 맹인으로 사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도 못 걷는 사람으로 사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도 나병환자처럼 사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도 귀먹은 사람으로 사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도 죽은 자로 사는가?

 

깨달으시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언약은 성취되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 이것이 보여야 한다. 그래야, 눈 뜬 이로, 걷는 이로, 무병한 자로, 잘 들리는 자로, 산 자로 살 수 있다.

 

이 시간 간구하라. 이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임하여,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 복음을 온전히 받고 거기에 열렬히 반응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달라고.

 

 

* 설교를 듣고 싶으시면

columbus.onmam.com

으로 오세요.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비를 체험하라  (0) 2012.11.07
성령에 취하라  (0) 2012.10.29
사랑, 불가능한 가능  (1) 2012.05.14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1) 2012.04.02
누가 왕인가?  (1) 2012.03.13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5. 14. 03:48

2012 5 1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로마서 13:8-14

제목: 사랑, 불가능한 가능

 

 

오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그 가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는 때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윤리가 사랑인데, 그것을 가장 잘 펼쳐 보일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게다가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성서정과의 주제 또한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계명을 받은 우리들, 그리고 가정의 달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스스로 질문해 봅시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능력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능력이 없다.” 그런데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 명령을 받아 든 우리들은 참으로 당황스럽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하는 성경이 이상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초등학교 시절, 보이스카웃이나 아람단 같은 단체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람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초등학교 6학년 때, 3공수여단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공수여단의 구호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참 멋진 말 같지만, 이것만큼 모순되는 말이 없습니다. 안 되는 것을 어떻게 되게 합니까? “안 되는 것은 포기하라!”라든지, “되는 일을 찾아 되게 하라!”라는 말이 더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는 한국이 군사독재 시절이었기 때문에 저렇게 말도 안 되는 무식한 구호가 난무했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도 똑같아 보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내리고 그것을 실천하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군사독재 시절 공수여단에서 보았던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구호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이상한,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하는 깡패집단 인가요? 하기야 말씀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라는 말씀이 있는 것을 보아,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능력이 기독교인에게는 부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지 못하면 그 사람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지, 믿음만 가지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우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고 우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얼마 전 그러한 우매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금식을 열흘 동안 하다 쓰러졌는데, 사모님이 믿음으로 낫게 하겠다고, 그리고 목사님은 금식하다가 쓰러진 것이기에 삼일 만에 부활할 거라고(일어날 거라고), 믿음을 가지고 쓰러진 목사님을 방치하다가 죽게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죽은 목사님을 부검해 본 결과, 쓰러졌을 때 손을 썼다면 살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그냥 방치해서 죽게 만든 그 사모님은 경찰에 구속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에모든 것이 들어 있고, 사랑할 때 모든 율법을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도대체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면서, 왜 사랑의 빚은 져도 된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랑할 때 모든 율법이 이루어질 정도로 위대한 것일까요?

 

이것을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것을 보면, 사랑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그 무엇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가능한 것일까요?

 

사랑을 일차적으로 꽃피워야 할 가정을 들여다 보면, 우선 사랑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부부 간의 사랑도, 부모자식 간의 사랑도 어딘가 모르게 날마다 불안합니다. 부족합니다. 특별히 부모자식 간의 사랑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영원하고 숭고할 것 같으나, 들려오는 뉴스를 보면 자식을 그냥 방치하는 비정한 부모도 많고, 부모에게 몹쓸 짓을 하는 후려 자식도 많습니다. 사랑이 저절로 되어야만 할 것 같은 부모 자식 간에도 그러니, 남남인 이웃에 대한 사랑은 묘연해 보이기만 합니다.

 

사도 바울의 오늘 말씀은 갑자기 뚝 떨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13장에 나오는 말씀이니까, 그 이전에 사도 바울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충분히 논증한 상태입니다. 로마서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합니다. 그것을 율법과의 문제에서 풀어냅니다. 사도 바울은 더 이상 우리는 죄의 법 아래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의 법 아래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우리 인간에게서는 가능하지 않은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하나님 고유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들은 사랑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이미 우리는 그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이 아닌 일그러진 사랑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느끼는 사랑은 늘 부족하고 만족함이 없으며 선한 결과를 내지 못합니다. 사랑하면 행복해야 하는데, 사랑이 화살이 되어 가슴에 꽂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인생을 살만큼 사신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불가능한 사랑의 행위를 가능한 것이 되게 하는 능력은 무엇일까요? 그 능력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옵니다. 11절 이하의 말씀은 그 상황을 종말론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 “자다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빛의 갑옷을 입자등의 표현은 종말론적인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표현들입니다. 이는 우리의 현실이 지금 우리가 눈에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서 우리의 영적 현실이 바뀌었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의 영적 현실이 어둠에서 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각성할 때 우리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이 영적 각성은 14절의 말씀에서 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때 가능해 집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만이 우리의 영적 현실을 올바로 바라 볼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사랑의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봐야 하는 이 시기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괴로워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부모님을 사랑해야 되는 데 왜 나는 부모님과 이렇게 사이가 안 좋을까? 남편, 또는 아내와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싶은데, 왜 이렇게 남편 또는 아내가 낯설기만 할까?(연애 할 때는 상대방의 몸에서 애기 향기가 나더니, 이제는 독소 냄새가 난다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식들에게 더 잘 해 주었어야 하는데, 뭐가 그렇게 살기 바쁘고 힘들었는지 더 잘해 주지 못한 자식 생각만 하면 가슴이 메어오지 않으십니까? 충분히, 그리고 서로 만족할만하게 사랑을 받고 베풀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삶의 모습 가운데 혹시 가슴 아파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너무 죄책감에 싸이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그렇게 주저 앉을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게 되었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오늘 말씀에서 명령하고 있듯이,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것도 빚지지 않은 자, 즉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능력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룰 때만 가능합니다.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영적 현실에 눈을 뜰 때만 가능해집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실존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눈에 들어왔다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온 존재를 그리스도에게 집중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면 이룰수록 우리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멀게만 보이던 아버지의 존재가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고, 있는 듯 존재가 희미했던 어머니가 눈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남편 또는 아내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를 서로의 첫사랑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식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식을 한 인격체로 대하며 자식을 위한 진정한 밑거름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이웃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만,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일에 실패했을 때 너무 좌절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함으로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랑의 능력이 충만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동영상을 하나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부모님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부모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뿐만이 아닙니다.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은 다 이웃(타자)인데, 이웃(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를 절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웃(타자)가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서 동영상을 감상해 보십시오.)

 

동영상 클릭 -->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36872966

 

우리의 모자란 마음 때문에 상대방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는 상대방을 아프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모자란 마음을 하나님께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에 취하라  (0) 2012.10.29
언약시대 VS 언약성취시대  (0) 2012.08.13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1) 2012.04.02
누가 왕인가?  (1) 2012.03.13
홍수는 하나님의 새창조 사건이다  (1) 2012.02.27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4. 2. 04:05

2012 4 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1-11

제목: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많은 갈등을 겪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은혜만 받는 사람은 영성이 뛰어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과는 너무도 다른 세상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빌립보 교회에게 하나가 되라고 강조합니다. 이는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저희들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을 뜻합니다. 언뜻 보면 참으로 은혜롭고 당연한 말씀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참으로 낯선 세상입니다. 현실적으로 한 마음을 품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뿐더러, 도대체 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이 잘 잡히질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첫째, 같은 사랑을 갖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는 뜻입니다. 둘째,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령이 하나가 되어 일치된 생각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셋째,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넷째, 각자 자기의 일을 돌아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곧 이기심을 채우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도 봉사하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위의 네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참으로 아득해 보이기만 합니다. 이 세상은 절대로 한 마음을 품도록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법칙은 한 마음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잠시 같은 생각을 품을 때도 있긴 합니다. 그 때는 분명 그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될 때만 그렇습니다. 손해 본다 싶으면 절대로 같은 마음을 품거나 같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합니다. 같은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다른 꿈을 꿉니다. 게다가 이 세상은 절대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높이 올라가려는 사람은 끌어내리고 어떻게 해서든 주변 사람들을 밟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많이 가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자기 일이나 잘 하면 됐지 남의 일을 도와 주는 것은 손해 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도와줄 때는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 때뿐입니다. 자기를 포장하기 위해서 남을 도와 줄 뿐이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몸에 베어 있는,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우리의 현실적인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한 마음은 우리의 피부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완전히 딴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은 그토록 한 마음을 가지라고, 하나가 되라고 강조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러한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신앙 실천의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의 삶을 맡긴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나의 운명을 건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어떠한 삶인가에 대한 선이해가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비하-영화의 도식을 발견합니다. 그는 이 도식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발견되는 비하-영화의 도식이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육신이 곧 자기 비하인데, 이는 자기 비움, 종의 형체를 가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남을 뜻합니다. 여기서 비우는 것을 뜻하는 헬라어 케노오는 신적 신분 또는 신적인 존재방식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사라졌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단지 신적 권위를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자기 비하의 마지막까지 가십니다. 바로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심, 즉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이해가 안 가는 부분입니다. 이 세상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비하시키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상승시키라고 가르칩니다. 올라갈 수 있는 끝까지 올라가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기 영혼까지도 팔아 먹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법칙과는 완전히 정반대인 자기 비하를 삶의 방식으로 취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비하의 끝인 십자가까지 자기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세상은 비웃었습니다.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고 허무에 빠졌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비우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낮추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비하는 구원을 위한 필수 요소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종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그의 죽음을 보고 비웃은 세상에 대한 비웃음이었고, 그렇게 죽음으로 끝나버렸다는 허무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고 자기 자신을 비운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게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비하를 통해,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주는 순종(복종)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생명 냄새 나는 일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원리입니다.

 

이 세상은 높아지는 것을 통해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한 높아져야만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높아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축복의 근거요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온통 부흥, 성장’, 그리고 의 구호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되는 생명의 원리는 높아지는 것에 있지 않고, 자기를 비우는 것, 죽기까지 순종(복종)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하나가 되어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교회에 충만하게 될 거라고 가르칩니다.

 

하나가 되는 일은 자의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호를 외치고, 의지력을 기른다고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아마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성경의 권면에 선뜻 아멘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마음은 세상이 가르쳐 주는 것처럼 우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낮추어 십자가로 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든지 말든지,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품는 것이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이 세상의 원리와 다르고, 우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추는 것 같아 별로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요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을 깨닫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겠다고 나선 믿음의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었습니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약시대 VS 언약성취시대  (0) 2012.08.13
사랑, 불가능한 가능  (1) 2012.05.14
누가 왕인가?  (1) 2012.03.13
홍수는 하나님의 새창조 사건이다  (1) 2012.02.27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1) 2012.02.23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3. 13. 07:32

2012 3 1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13-22

제목: 누가 왕인가?

 

작년에 연말 드라마 시상식을 휩쓸었던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과 그것의 반포를 막으려는 세력 간의 갈등을 그린 명품 드라마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었습니다. 우리는 세종대왕을 성군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세종대왕이 그렇게 성군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아버지 태종(이방원) 때문이라는 것이 한국 역사 학계의 정설입니다.

 

이방원(태종)이 아니었다면 조선은 왕조로서의 명백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이 존립하는 나라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고려 말기에 고려가 휘청거리는 이유 중 하나가 왕권이 무너지고 주변의 귀족 세력들이 득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을 세우기 위해 지독한 정치를 펼칩니다. 왕권에 위협된다고 생각했던 세력들을 모두 처단했고, 그 중에서도 조선 개국 공신 중 최고의 공신인 정도전을 제거합니다. 그야말로 정도전을 토사구팽시킨 것이지요.

 

정도전은 이방원의 생각과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입니다.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을 세우기 원했던 반면에, 정도전은 왕권은 최소화하고 유림들(선비들)이 실질적인 권한을 지닌 나라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의 서슬 퍼런 칼날이 정도전을 향했고, 정도전은 일등개국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작년에 안방 극장을 휩쓸었던 또 다른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 “공주의 남자라는 사극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보다 조금 일찍 다른 방송국에서 방영됐던 드라마입니다. “공주의 남자는 세종대왕 이후 문종과 단종, 그리고 세조에 걸친 역사를 바탕으로 구성된 드라마였습니다. 세종대왕 이후에 이방원이 세워놓은 강력한 왕권은 문종과 단종을 거치면서 무너집니다. 문종은 너무 건강이 안 좋았고, 단종은 너무 어렸습니다. 그 틈새를 타고 중신들이 득세를 했지요.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김종서입니다.

 

왕권이 중신들에게 밀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이 바로 수양대군(세조)입니다. 수양대군은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정이 할아버지 이방원과 닮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력한 왕권을 다시 정립하고자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릅니다. 그 과정에서 이전에 할아버지 이방원이 그랬듯이 피 비린내 나는 숙적제거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을 성공적으로 이끈 사람이 그 유명한 한명회입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던 사극 드라마가 그 유명한 여인천하입니다.

 

우리는 지금 왕이 다스리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왕권이 무엇인지 피부에 와 닿지 않습니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것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간접적으로나마 느끼는 왕권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합니다. 왕은 단순히 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왕은 백성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왕권이란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왕권’, 즉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지닌 자는 로마의 황제, 시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이 왕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것도 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들어가셨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3 대 명절 중 하나입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살았던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왔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은 순례자들로 북적댔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경제법칙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먼 나라에서부터 온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소나 양 그리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그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외국에서 생활하다 온 사람들이라 이들은 소나 양, 또는 비둘기를 그 먼 곳에서부터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에 성전에서 소나 양,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나 환전상들은 유대인 순례자들에게는 편의를 제공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일종의 공생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이지요.

 

예수님 당시 유대 땅을 다스리고 있었던 로마는 유대인들의 종교활동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대신 이처럼 종교활동에서 비롯된 수입은 고스란히 자신들이 차지했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종교활동을 승인해 주는 대신에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챙겼던 것이지요. 로마 당국의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종교활동을 보장해 주니까 유대인들의 원망을 들을 일도 없었고, 종교활동을 보장해 주는 대가로 짭짤한 수익을 챙길 수 있었으니까 금상첨화였습니다. 로마 당국의 입장에서 유대인의 절기 때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몰릴수록 좋았고, 성전에서 소나 양, 비둘기 그리고 환전이 많이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좋았습니다. 다만 로마 당국은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민란을 대비해서 유대인의 절기 때 감시할 수 있는 군사병력을 조금 더 배치하면 됐습니다.

 

이러한 일로 배를 채울 수 있었던 부류가 또 한 부류 있었습니다. 바로 제사장 그룹입니다. 원래 제사장은 아론 계열의 레위인들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유대 땅을 다스리던 예수님 시대에는 그 법칙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중에 영향력 있고 친로마 정책을 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로마 당국에 의해서 법적인 보호를 받으며 제사장으로 임명되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사가 온전히 드려졌을 수 없었고, 제사를 집례하는 일을 통해, 즉 종교활동을 통해 적지 않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제사장 그룹의 관심은 하나님의 규례대로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 드리는 것에 있지 않았고, 오직 자신들의 배속만 채우는데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때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 정화 사건을 벌이입니다.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예수님 당시 종교는 타락할 때로 타락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습관처럼 모여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시다는 위로를 받았지만, 사실 그것은 자신들만의 착각에 불과했습니다. 이미 성전은 도둑의 소굴이 되어 있었고, 돈벌이 수단이 되어 있었고, 정권을 유지시켜 주는 권력의 안전장치로 변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은 그 당시 정권을 쥐고 있었던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에 대한 정면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를 보고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다른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와 요한복음이 다른 점이 이런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표적보다는 기적이 등장을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표적에 대한 이야기가 일곱 번 나옵니다. 첫 번째 표적이 그 유명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표적입니다. 이렇게 표적을 보이라는 유대인들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는 말씀으로 대응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그야말로 동문서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육체를 일컬어 말씀하신 것인데, 영안이 열리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성전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AD 70년경에 로마 군대에 의해서 성전이 무너집니다. 요한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이후에 씌어진 복음서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로마 당국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전을 허물어 버립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로마 당국은 누가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눈으로 보기에,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이 거주하고 계셨던 성전을 로마 당국이 허물었다는 것은 곧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로마의 황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성전정화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의 미움을 삽니다. 이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암암리에 인정하고, 로마 당국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로마 황제의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이방원이나 수양대군이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는가를 잠깐 살펴 보았습니다. ‘왕권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에 휩싸인 사람들에게 왕권에 도전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숙적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꼭 죽여야 하는 적으로 간주됩니다. 자신들의 왕권에 도전한 예수님은 이로써 꼭 죽여야 하는 숙적이 된 것이지요.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대로 신성모독죄와 국가반란죄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형에 처해져 죽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성전이 헐리는 것을 보아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은 로마 황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생각에 제동을 겁니다. ‘왕권을 지니고 있는 자는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그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헐었던 성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는 표적인 성전이 헐렸지만, 하나님께서 참으로 거주하고 계신 참된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는 죽임 당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은 누가 왕인가를 보여줍니다. 생사여탈권을 로마의 황제가 쥐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서 신성모독죄와 국가반란죄의 명목을 씌워 십자가에 매달아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누가 왕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왕권은 로마 황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로마의 황제가 다스리는 시대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왕권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 시대도 여전히 자신이 왕권을 쥐고 있다고 주장하는 존재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누가 여러분의 생명을 위협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삶을 주장합니까? 무엇 때문에 여러분은 삶이 힘들고 어려우십니까? 그러한 것에서 자유함을 얻으십시오. 그 길이 여기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 길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거룩한 사순절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누가 왕인가를 매일 같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부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 나의 삶을 다스리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존재에게 나의 생사여탈권을 내어주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삶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십시오. 주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에 저항하십시오. 예수님처럼 믿음의 채찍을 들고 뒤엎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지켜드리기 위해서 영적 전쟁을 치열하게 수행해 나가십시오. 그러면 왕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아멘.


* 참 좋은 설교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이런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은혜를 못 받는다는 것이다. 참 딜레마이다. 훗훗.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2. 27. 06:11

2012 2 2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창세기 9:8-17

제목: 홍수는 하나님의 새창조 사건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노아와 홍수 사건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홍수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면서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홍수를 일으키셔서 모든 육체를 멸하셨을까요?

 

노아와 홍수 사건은 창세기 처음에 등장하는 창조사건과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진행형동사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만드신 만물을 보시면서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불화가 존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창조란 하나님과 피조물 간의 조화로운 상태를 일컫습니다. 그런데 그 조화가 깨지니 창조 세계에 어두운 그늘이 드러워졌습니다. 우리는 그 형편을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 가인과 아벨 사건, 그리고 창세기 6장에서 이어지는 사람의 죄악과 하나님의 한탄스러운 마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6 5-6절은 이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는 생명과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마음에 합했던 한 사람, 노아를 통하여 새창조의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 새창조의 계획이 바로 홍수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창조의 사역을 이루실 때 모든 것을 완전히 쓸어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시지 않습니다. 선한 것을 가지고 새창조를 하십니다. 우리는 노아를 남겨두시고 노아를 통하여 새창조의 역사를 이루시는 사건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로움의 씨앗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하십니다.

 

노아와 홍수 사건을 더 들여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홍수 사건 후에 노아와 무지개 언약을 맺으십니다. 무지개 언약은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을 어떻게 새롭게 하셨는지 보여주는 인간의 희망입니다. 그 희망을 안고 새롭게 시작한 노아의 후손들은,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 보시기에 민망한 삶을 만들어 나갑니다. 결국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홍수 사건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죄의 삶을 이어갑니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들의 측면에서 보면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결국 이렇게 가다가는 노아와 홍수 사건 때처럼 모든 육체는 또다시 멸망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위기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기를 매일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죄가 드리워진 곳에는 언제나 생명의 위기가 닥칩니다. 이 생명의 위기를 뚫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인간에게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 실존은 늘 답답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7:18-19).

 

이 절망적인 인간의 실존과 위기가 눈에 들어와야 합니다. 이러한 절망과 위기의 실존에서부터 탄식 소리가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십자가 사건이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왜 구원자가 되시는지 깨달아 집니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맺으신 무지개 언약을 결코 폐기하지 않으십니다. 무지개 언약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아무리 당신과 불화 가운데 있더라도,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끝까지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바로 무지개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무지개가 고운 빛깔을 내며 곱게 허리를 숙인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곱게 하고 하나님 앞에 허리를 숙여 감사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인간의 실존은 온통 죄로 가득 찬 인생입니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과 계속해서 불화를 일으키는 삶을 살다가 스스로 멸명의 길로 가는 인간의 연약함을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결단하시고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노아와 홍수 때처럼 새창조의 역사를 단행하십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고통스러운 장면을 보면 감성이 자극되어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께서 고통스럽게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셔서,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보면서 눈물만 흘리고 만다면 우리는 여전히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카타르시스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는 새창조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씨앗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여기서 선한 씨앗은 다른 말로 의로움입니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들이 거룩하고 의롭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창세기에서 보는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움을 지켜내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움을 우리 인간의 형상 속에 다시 심어 놓는 구원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당신의 피조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절망과 위기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창조는 믿음을 통해서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로움의 씨앗)가 우리 안에 심겨져 그 의로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믿음이 실제로 우리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세례를 통해서 봅니다. 세례는 노아와 홍수 사건을 기억나게 합니다. 물 속에 잠겼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눈으로 확인시켜 줍니다. 세례는 아무에게나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베풀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새창조 역사를 믿고 고백하는 자에게 베풀어 지는 것이 세례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얼마나 절망적이고 위태로운 상황이 많습니까? 선하지 못함, 거룩하지 못함, 의롭지 못함, 보기에 좋지 못함, 그야말로 절망적이고 위태로운 순간을 우리는 매일같이 경험하고 직면합니다. 그것이 건강의 문제로, 경제의 문제로, 가정의 문제로, 사회의 문제로, 환경의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다양한 형태로 경험되는 절망과 위기, 즉 악()을 우리는 어쩌지 못해 전전긍긍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럴 때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직면하고 있는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붙들어야 합니다.

 

저 무지개가 보이십니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물로 모든 악을 멸하신 후 하나님의 새창조의 세계에 우뚝 선 의인 노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노아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당신의 피조물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롭게 하시며 복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희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이 십자가가 보이십니까?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답습니까? 이 십자가는 저 무지개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 십자가에는 저 무지개가 내뿜고 있는 아름다운 색깔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확증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저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8).

 

홍수 같은 고난이 우리에게 닥쳐도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은 고난이 우리에게 닥쳐도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망 가운데 위기 가운데 내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새창조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망과 위기 가운데서 당신께 부르짖는 우리의 탄식 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노아는 홍수 사건 이후에 이러한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니리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9:1-3).

 

이러한 복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만복을 누리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1) 2012.04.02
누가 왕인가?  (1) 2012.03.13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1) 2012.02.23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자가 되라  (1) 2012.02.22
예수님의 소외  (2) 2012.02.15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2. 23. 09:21

2012 2 22일 참회의 수요일 예배 설교

본문: 요엘 2:1-2, 12-17

제목: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독교의 신앙이나 예식, 그리고 절기는 하루 아침에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로마가 하루 아침에 세워진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있은 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두고 묵상하는 가운데, 긴 시간에 걸쳐 기독교라고 하는 신앙형태가 형성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아직도 끝나지 않는 진행형 동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기독교는 끊임없이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고 있는 재의 수요일(참회의 수요일, Ash Wednesday)은 주후 6세기 정도에 생긴 기독교 전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하는 가운데, 어떻게 하면 그것을 우리의 삶 가운데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만들어진 전통입니다. 이제 이 전통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지 지키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 날을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진지하게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는 어떠한 연유에서 이 자리에 나오셨던지 간에 기독교 영성의 중심에 들어오시게 된 겁니다.

 

사순절기는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우리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즉흥적으로, 임기응변 식으로 때울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닥트릴 수 없습니다. 그 사건은 이 세상에서 일어났던 어떤 일보다 놀라운 일이요, 이 세상의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순절기에 들어서는 오늘, 신앙의 선조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맞이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재의 수요일에 신앙의 선조들은 회개를 상징하는 베옷을 입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전년도 종려주일에 흔들었던 종려나무를 잘 보관해 두었다가 이날 꺼내서 그 나뭇잎을 태워 나온 를 이마에 바르며 참된 회개를 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물론 구약 성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꿇어 앉아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면서 예배 드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만, 오늘 말씀이 전해 주고 있듯이, “마음을 찢고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 드릴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는 왜 마음을 찢어야 할까요? 그리고 마음을 찢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요엘서는 여호와의 날을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날이란 이 세상에 일어났던 그 어떤 재앙의 날보다 더 무시무시한 날입니다. 그런데 그 무시무시함이란 어떠한 잔인함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을 가장 위협하는 두 가지 는 전쟁과 기근입니다. 모두 인간의 생명과 관련이 있는 문제입니다. 적어도 제 1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요즘 전쟁과 기근의 공포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로 국지적 전쟁은 끊이질 않고 있으나, 적어도 제 1세계의 나라에서는 전쟁이 억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옛날처럼 기근이 와서 굶주리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엘서에서는 전쟁과 기근을 메뚜기 떼가 공격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1 4절에 보면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메뚜기 떼가 공격하면 농산물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메뚜기 떼는 공격해 들어오는 적군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기도 합니다. 적군이 밀려 들어오면 도시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됩니다. 둘 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목숨이 위태로울 때 인간은 극도의 공포심을 느낍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날은 이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인간을 압도한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것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인간을 압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기근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생사여탈권을 쥐고 계신 존재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 하라”( 12:4-5).

 

우리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음모에 의해서 신성모독죄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레위기서 24장에 보면, 신성모독죄는 사형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을 죽일 요량으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씌워서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하면서, 죽기까지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본인이 말씀하신 대로,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시지 않고,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자, 즉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끝까지 운명을 맡겼던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시키셨습니다. 부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 이상의 사건입니다. 이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사순절기 동안에 부활을 온전히 준비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였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을 일컬어 부활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나사로는 죽었다 살아났지만 나중에 다시 죽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마음을 찢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배타적 구원행위에 우리의 온 존재를 맡긴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경험하지도 못했고 알 수도 없는, 어떠한 완전히 다른 현실이 우리에게 오고 있는데, 그것이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부활의 현실을 먼저 맛보신 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일컬어 부활의 첫 열매라고 증거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 아닙니다. 어떠한 잘못을 하고서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전혀 다른 현실, 즉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행위에 우리의 온 존재를 맡기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신앙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참여하기 위해서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외적인 행위를 통해서 자신들이 지금 내적으로 회개하고 있다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외적으로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금식하는 것도 우리 마음의 표현일 수 있으나,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행위에로 이끌어 준다고 장담하지는 못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행위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확실한 길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이 길은 아직 온 세상에 드러난 길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감추어져 있는 길입니다. 믿을 때만 보이는 신비로운 길입니다. 그 길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순절기를 시작하면서 이 진리와 맞닥트리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의 현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세상은 구원의 현실을 소유와 소비, 그리고 자기확대에서 찾으라고 합니다. 많이 소유하는 것, 마음대로 욕심나는 대로 갖고 싶은 물건을 살 수 있는 소비력, 그리고 남보다 더 돋보이는 삶의 조건들이 곧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사는 것처럼 살게 하고, 우리에게 생명력을 가져다 준다고 허위광고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현실이라고 증거합니다. 오늘날,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실로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 시대가 추구하고 있는 풍요로운 삶과는 정반대인 십자가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꿩도 먹고 싶어하고, 알도 먹고 싶어합니다. 예수도 믿으면서 소유와 소비, 그리고 자기확대도 믿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맘몬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절기는 그 어느 때보다 도전이 되는 그리스도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구원의 현실을 찾고 있습니까? 무엇이 나에게 실질적으로 생명을 가져다 준다고 믿고 있습니까? 이는 쉽게 결론 낼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현실은 여전히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기는 바로 성경에서 부활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구원의 현실을 우리의 온 존재를 다하여 받아들이기 위해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구원의 현실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옵니다. 그러니 사순절기 동안 어떠한 경건행위를 하던, 그 경건행위에 초점을 맞추지 마시고, 그 경건행위를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 어느 때보다도 자주, 그리고 높이 부르십시오. 오늘 요엘서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기도하면서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한 것처럼, 사순절기 동안 기도하시면서 여러 가지 말보다는 이 말 한마디에 집중해 보십시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활이라고 하는 구원의 현실로 이끄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 왕인가?  (1) 2012.03.13
홍수는 하나님의 새창조 사건이다  (1) 2012.02.27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자가 되라  (1) 2012.02.22
예수님의 소외  (2) 2012.02.15
복음은 능력이다  (1) 2012.02.06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