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2. 2. 22. 00:50

2012 2 1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열하 2 1- 22

제목: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자가 되라

 

모 재벌 총수가 기술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중에 한 사람의 기술이 백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기술은 단지 백만 명 정도가 아니라 수천만 명, 수억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1769년에 제임스 와트는 방에 있는 난로 위의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동안 뚜껑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증기기관을 발명했습니다. 거대한 기계를 움직일 수 있는 원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산업 혁명과 기술의 발전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1813년에는 스티븐슨이 바로 그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증기기차를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 일본의 신칸센이나 프랑스의 떼제베에 이르기까지 기차는 전 세계적으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어왔습니다. 이 기차와 관련해서 전 세계적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마차를 타고 여행하다가 갑자기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밤을 꼬박 새워야만 했던 포드가, 말이 없이도 달릴 수 있는 마차를 만들기로 하고 자동차를 발명한 것이 1892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오늘날 전 세계에 여러 자동차 회사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자동차 회사들과 관련된 하청공장이나 업체에서 근무하는 사람들과 부양 가족들을 따진다면,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동차로 먹고 사는 지 알 수 있습니다.

 

1903년에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를 발명했습니다. 그 이후 1919년 네덜란드의 KLM이 최초의 민간항공회사로 발족한 이래 항공망은 전 세계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습니다. 그러니 비행기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개발해야 할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영감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감의 개발을 위해서 2800년 전에 이 땅에 살았던 엘리사라는 인물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엘리사에게는 엘리야라는 훌륭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누가 참된 신인지 밝히기 위해 우상 숭배자 850명과 갈멜산에서 대결을 벌여 하나님으로부터 불로 응답을 받았던 영감의 사람이었고, 죽은 자도 살려 낸 능력의 선지자였습니다. 당대에 그와 같은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엘리야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죽음을 보지 않고 육신을 가진 채 승천했다는 전설일 겁니다. 얼마나 그 삶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충만했으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으면, 육신이 산 채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선지자 엘리야는 진실로 영감의 사람이었습니다.

 

열왕기 하 2 1절에서 18절 말씀은 바로 이 영감에 찬 선지자 엘리야가 이 세상을 떠나 승천하는 날의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2 1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신다는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곧 죽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엘리야는 그의 제자, 엘리사와 길갈을 떠납니다. 길갈은 선지자 생도들이 함께 모여 살면서 일종의 수도원 같은 것을 이루어 살 던 곳입니다. 엘리사는 그들과 함께 살았는데, 엘리야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엘리야는 길갈에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그리고 길갈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벧엘로 떠나려 했던 것이죠.  엘리야는 혼자 가려고 엘리사에게 길갈에 남아 있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죽어도 함께 가겠다고 고집합니다. 엘리사는 매우 고집이 센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 목숨 걸고 덤비는, 매우 집념이 강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3절에서 6절의 말씀을 보면, 이런 식으로 엘리사는 엘리야와 벧엘을 거쳐, 여리고, 그리고 요단까지 함께 여행을 합니다. 길갈에서 벧엘로, 그리고 여리고로, 그리고 요단으로엘리야의 마지막 인생 여정길에 함께 한 엘리사.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누군가와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한다는 것,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죠. 마지막 나날들을 함께 걷고, 함께 자고, 함께 먹고그러는 동안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무엇을 얻었을까? 바로 인생의 지혜를 얻었을 것입니다. 인생의 지혜를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다음 구절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단강에 이르러, 엘리사는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준비를 합니다. 그러면서 엘리야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마지막 몇 날들을 함께 해 온 제자 엘리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엘리야는 굉장한 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어떤 것을 구하더라도 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런 엘리야에게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엘리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가 구한 것은 오직 엘리야가 가지고 있던 영감을, 그것도 갑절의 영감을 요구했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9)

 

왜 엘리사는 다른 것을 다 제쳐 놓고, 엘리야가 가지고 있던 영감의 갑절을 원했을까? 이것이 바로 엘리사가 엘리야에게서 받은 지혜로 선택한 최고의 선물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감이란 무엇입니까?? 영감은 히브리어로 루아흐’, 즉 영, 생명, 또는 호흡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저 사람은 영감이 충만하다는 말은 저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자,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한 자, 하나님과 더불어 호흡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라고 한 엘리사의 말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혔던 것보다 갑절이나 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에게 충만했던 하나님의 생명력이 갑절이나 자기에게 충만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호흡했던 것보다 두 배나 더 하나님을 호흡하면서 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사가 엘리야에게서 얻은 지혜의 결과였습니다. 무엇이 중요한 지 정확하게 깨달았던 것이죠. 우리는 살면서 이러한 지혜를 꼭 깨우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 1:7). 지혜 있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할 줄 아는 자입니다. 지혜 있다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이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삶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되면,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게 됩니다. 이것을 알았던 엘리야, 그리고 이러한 지혜를 물려받았던 엘리사. 그래서 엘리사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이 갑절이나 있기를 바랐던 것이죠. 그런데 왜 갑절이나 바랐을까? 한 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엘리사처럼 날마다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주님의 신실한 종이 되어야만 될 줄로 믿습니다. 왜 갑절을 구해야 합니까? 그것은 세상이 점점 더 악해져 가기 때문입니다. 갑절을 구하지 않으면, 어제 보다 더 악해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대보다, 엘리사가 활동하던 시대는 더 힘든 시대였습니다(엘리야아합왕조, 엘리사예후왕조). 엘리사는 그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내가 활동하는 시대는 스승인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대보다 더 악이 충만해서, 스승 엘리야가 가지고 있던 영감의 갑절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는 것이 실로 자신 없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구했고, 갑절의 영감으로 위대한 일들을 많이 해 냅니다.


엘리사가 원했던 대로 엘리야에게 주어졌던 영감보다 갑절이나 많은 영감이 주어졌을 때 엘리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첫 번째로 일어났던 일을 13절과 14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갑절의 영감을 얻은 엘리사 앞에 제일 먼저 일어난 이른 그를 가로막고 있던 요단강이 갈리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영감을 가진 자에게는 그 어떤 것도 장애물이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영감이야말로 미래를 내다보는 힘이요, 장애물을 뛰어넘는 능력이요, 절망의 골을 메우는 다리입니다. 하나님의 영감을 가진 자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그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가 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영감에 찼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성서에 많이 나옵니다. 누가 있습니까? 모세가 있죠. 영감으로 가득 찼던 모세에게는 홍해가 그의 장애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또 누가 있습니까? 여호수아가 있죠. 영감으로 가득 찼던 여호수아에게는 8000년의 역사를 가진 여리고성이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갑절의 영감이 임한 엘리사에게 일어났던 두 번째 일은 19절에서 22절이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

 

엘리사에게 갑절의 영감이 주어졌을 때 일어난 두 번째 일은, 식물이든 사람이든 전혀 먹을 수 없는 죽은 물이 생명의 물로 되살아난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성읍이 바로 여리고 성읍이었는데, 도시가 오래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땅이 황폐해지고 물이 나빠졌습니다. 환경이 오염된 것이죠. 이렇게 모든 것이 오염돼서 죽어가던 성읍을, 영감에 찬 한 사람, 엘리사가 살려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죽어가는 자, 죄에 빠져 죽어가는 자를 살려낼 것이고, 환경이 오염돼서 신음하고 있는 이 지구를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일 들려오는 뉴스를 들어보십시오. 모두 죽어가는 소식뿐입니다. 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소식뿐입니다. 오래된 성읍, 여리고처럼 모든 것이 하나씩 하나씩 죽어가고 있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생명력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바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 컬럼버스 지역에 영적인 새바람을 불러 일으켜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여리고성처럼 죽어만 가는 내가 사는 삶의 터전 컬럼버스를 그냥 놓아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리고성과 같이 생명력을 잃어가는 이 컬럼버스 지역을 살릴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갑절의 영감을 구하면 됩니다. 갑절의 영감을 구해서, 컬럼버스를 이런 지역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컬럼버스 지역은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지역입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길이고, 그 일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감을 개발해야 합니다. 엘리사가 구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영을 구해야겠습니다. 그러면, 엘리사에게 일어났던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장애물들이 제거될 것이고,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수는 하나님의 새창조 사건이다  (1) 2012.02.27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1) 2012.02.23
예수님의 소외  (2) 2012.02.15
복음은 능력이다  (1) 2012.02.06
사랑은 덕을 세운다  (3) 2012.01.30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2. 15. 06:59

2012 2 1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왕하 5:1-14, 1:40-45

제목: 예수님의 소외

 

마가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이 외에도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이야기가 복음서에 곳곳에 나옵니다. 레위기서에 보면 나병환자는 공동체에서 분리되어서 살았습니다. 한 마디로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소외된다는 것은 늘 마음이 아픈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외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열심히 일하는 것도, 열심히 인간관계를 쌓은 것도 모두 소외되지 않으려는 인간의 노력입니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부정의 개념은 일차적으로 의 개념이 아닙니다. 레위기에서 부정은 제의적인 부정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나아갈 수 없는 부정한 상태를 부정이라고 표현합니다. 부정한 자는 진영 밖으로 나가서 그 부정한 상태가 온전히 나아질 때까지 거기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부정한 사람을 꺼렸습니다.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부정한 사람과 접촉을 하면 자신의 몸도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부정하다는 것이 제의적인 부정이긴 하지만, 이것이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입니다. 부정한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제사) 드릴 수 없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굉장히 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죄사함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고,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는데, 부정한 상태에서는 그것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니까 매우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병 낫기를 간구합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일상적인 일이 아닙니다. 우선 나병환자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면 안 됩니다. 이가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부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면 안 된다는 율법의 규정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부정한나병환자와 접촉을 하면 안 됩니다. 당신도 부정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는 그러한 율법의 규정이 허물어지는 사건을 전개합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와 대면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굉장히 획기적인 것입니다. 이 사건 자체를 통해서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율법보다 크신 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달인데,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하나님 자체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니,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는 것이죠. 물론 이것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만이 깨닫게 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러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그러한 행동에 분노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들은 율법에 근거해서 분노했습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 오늘 말씀에서도 그 분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일 때문에 더 이상 예수님이 드러나게 행동하지 못하게 되신 것이 그것입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마음이 간절했을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이 병에서 나음을 받아 삶을 회복하고 싶었을 겁니다. 자신을 옭아매고 있고 파괴하고 있는 이 병을 고치지 위해서 안 해본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릎 꿇었다는 것은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을 겁니다. 이는 위에서 설명 드렸듯이 율법을 깨는 행동이었으니까요. 병이 나아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싶어하는 자가, 하나님의 은총을 담지하고 있는 율법을 깬다는 것은 거의 자포자기 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마음인 것이죠.

 

율법을 깨고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꿇어 엎드려 간구합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여기서 원하시면으로 번역된 단어는 영어로  ‘willing’입니다. 시행하는 자의 마음상태를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마음 내키지 않은데 하는 행동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행동을 표현할 때 ‘willing’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곧 이어 나오는 예수님의 반응이 나병환자의 간절함과 맞아 떨어집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불쌍히 여겼다는 것 또한 마음 상태를 알려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겉으로만 고쳐주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된 상태이지요.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위에서 설명 드렸듯이, 이 또한 율법을 깨는 행위입니다. 일반인은 절대로 부정한 사람과 접촉을 하면 안 됩니다. 물론 부지불식 간에 그럴 수는 있습니다만, 대놓고 그렇게 접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무시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이는 곧 죄로 간주됩니다. 그러니까 나병환자의 행동이 율법을 깨는 행동이었듯이, 예수님의 행동도 율법을 깨는 행동이었다는 겁니다. 이는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옥이야 금이야 생각하는 율법보다 크시다는 뜻입니다.

 

나병환자와 예수님의 사이에 오고 간 사랑의 행위는 나병환자의 병을 낫게 합니다. 예수님은 깨끗함을 입은 나병환자에게 제사장에게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무질서 하게 율법을 깨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중에 말씀하시듯이,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이시지 율법을 허무는 자가 아니십니다. 율법의 완성이 무엇인지, 율법의 온전한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고자 한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에게 가서 그의 병이 나았음을 보이고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이렇게 낫게 된 전말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나병환자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병이 낫게 되었는지를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병이 나았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이 온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다시 공동체로 들어가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나병환자의 삶과 예수님의 삶이 역전됩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으로 인해 소외된 삶에서 회복되었는데, 예수님은 이제 나병환자로 인해 소외된 삶을 사시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회복시키신 그 일 때문에 공동체로부터 소외 당하십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그 일이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행하는 일을통해서 자신이 소외 된다고 한다면, 그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이로운 일, 자기 자신을 확대시키는 일, 자기 자신을 높이는 일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오늘 말씀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소외 당하더라도 당신이 하는 일이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면 서슴지 않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willing) 소외 당하십니다. 그 소외 당하시는 장면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잘 나와 있지만, 복음서에서 전하는 결정적인 소외 사건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외침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에게까지 버림 받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소외를 통해서 큰 일을 이루셨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소외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소외는 우리의 소외를 거머쥐신 구원의 행위였습니다. 우리는 이사야서의 이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53:4-5).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소외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없는 구석에 가서 슬피 우는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병 때문에 고생하는 자, 마음이 아파 고생하는 자,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허덕이는 자, 죄악에 매여 삶을 허비하는 자가 없기를 바라십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소외의 문제입니다. 이는 모두 우리를 생명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느 누구도 생명으로부터 소외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소외를 담당하시고, 대신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기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당신께 나아오는 자는 누구에게든지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니 두려워 하지 마시고, 망설이지 마시고,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 나아갔던 나병환자처럼 여러분의 삶에 있는 소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그 문제들, 여러분의 삶(생명)을 괴롭히고 있는 그 문제들을 우리 주님께서는 기꺼이(willing)’ 짊어지십니다.

 

이방인이었던, 아니 이스라엘의 적국이었던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도 하나님께 나아가서 자신의 삶을 괴롭혔던, 자신을 생명으로부터 소외시켰던 나병을 치유 받았습니다. 이방인도, 적국의 장수도 고쳐주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들이야 얼마나 더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러니 믿음을 가지고 우리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예수님께 나아갔던 나병환자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기꺼운 마음으로 우리의 생명을 헤치는 그것들을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에게는 생명’, 즉 사는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날마다 풍성한 생명을 누리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1) 2012.02.23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자가 되라  (1) 2012.02.22
복음은 능력이다  (1) 2012.02.06
사랑은 덕을 세운다  (3) 2012.01.30
종말론적 신앙  (1) 2012.01.23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2. 6. 06:22

2012 2 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마가복음 1:29-39

제목: 복음은 능력이다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는 것에서부터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더러운 귀신을 내쫓을 것을 행하십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과 관련이 있는 행동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를 향해 온 존재를 트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어울리지 않는 악의 세력이 물러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도여행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나와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한 집안의 어머니가 누워 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계신 관계로 그 집은 당연히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을 겁니다. 악은 늘 이러한 모습을 띱니다. 그 위치에서 본인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각자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가 하나 비면 주변 사람들의 삶이 여간 버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축구 경기에서도 선수 하나가 반칙을 여러 번 해서 퇴장 당했을 경우, 그 선수가 맡았던 포지션이 비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에게 그만큼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악은 그런 식으로 공동체의 활기를 빼앗고, 공동체를 우울하게 하고, 공동체를 수렁에 빠뜨립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습니다. 마가복음 저자는 장모의 열병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열병을 우습게 볼 수 없습니다. 옛날은 요즘과 달리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병은 곧 죽음으로 치달을 수 있는 치명적인 병이었습니다.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를 예수님께서 일으키십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이것 또한 장황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너무도 간단하게, 몇 마디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몇 마디 안 되는 짤막한 표현이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개의 단어에 지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으키다(egeiro)”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종들다(diakoneo)”는 것입니다. 우선 일으키다라는 단어는 마가복음에서 매우 강력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일으키다는 행위는 어떤 사람의 힘이 다른 사람에게 전가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일으키신 것처럼, “일으키다는 힘이 전가되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시몬의 장모가 예수님에 의해 일으킴을 받았다는 것은 그녀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시몬의 장모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볼 때 조심해야 할 것 중 하나인데,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일으키다라는 말이 이렇게 의미 있는 말이 되는 이유는 마가복음 16 6절에서 예수님은 이 단어를 본인에게 직접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 6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기사가 담겨 있습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여기에서 시몬의 장모에게 쓰였던 일으키다라는 단어는 그가 살아나셨고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조금 잘못된 번역이고, 그 어감이 살아나지 않는 번역입니다. 이 부분을 정확하게 풀어서 번역하자면, “예수는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켜졌다.”입니다.

 

그러니까, 시몬의 장모가 일으켜진 사건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사흘만에 일으켜진 부활 사건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가 일으켜진 사건과 예수님이 부활한 사건이 동일한 사건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위에 임한 하나님의 능력이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몬의 장로가 일으킴은 받은 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으킴의 사건은 곧바로 시몬의 장모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수종 드는 일과 연관 됩니다. 우리가 눈여겨 살펴야 할 두 분째 단어가 여기서 등장합니다. 우리 나라 말로 수종들다로 번역된 이 단어는 영어로 “serve”입니다. 사실 수종들다는 어감이 좋지 못합니다. 시쳇말로 누구 밑에서 딱가리 또는 시다바리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심부름 정도의 하찮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수종들다보다는 우리에게 조금 더 친숙하고 점잖은 단어로 번역하면 섬긴다정도가 나을 듯 합니다. 그러니까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서 일으킴을 받아 예수님과 제자들을 수종들었다는 것은 심부름 정도의 하찮은 일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이로움을 끼칠 정도로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섬겼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이것 또한 예수님 당신의 사역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똑 같은 단어를 당신의 사역의 성격을 설명하시는 데 사용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10:45). 시몬의 장모가 수종들었을 때를 표현했던 그 단어와 예수님께서 섬기려오셨다고 말씀하실 때의 그 단어는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시몬의 장모의 섬김처럼 수종 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열병에서 일으킴을 받은 시몬의 장모가 본문에서 어떠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단순히 병석에 누웠다 고침을 받은 가엾은, 그러나 축복받은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그 몸에 지닌, 섬기는 참된 제자였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진술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후에 당신에게로 오는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십니다. 복음서에서 묘사되고 있는 병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질병이 아닙니다. 병원 가서 치료 받고, 약 몇 알 먹으면 낫게 되는 그러한 단순한 병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은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병은 악의 보이는 실체였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병든 사람은 우선 가정의 큰 짐이 됩니다. 가정의 각자 구성원은 곧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자녀를 많이 낳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병은 가정의 경제를 위태롭게 했습니다. 이것은 곧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빼앗아 가는 데까지 연결됩니다. 가정이나 공동체에서의 영예로운 지위를 박탈당함으로 소외된 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요즘 시대는 병이 이러한 식으로 가정이나 사회에서 작용하지 않습니다. 가정에 병든 사람이 한 명 있다고 그 가정의 생계가 치명적으로 어려워지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웬만한 병은 모두 치료가 가능합니다. 또한 병들었다고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요즘에 우리가 병에 대해서 생각하는 그러한 느낌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병을 바라보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 당시(고대 사회)의 사람들에게 이란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악의 실체였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칠 때 귀신이 나갔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병을 일으키는 악의 실체를 귀신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이렇게 악의 실체가 무너진다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실제적인 세력이 맥을 못 추고 물러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며 하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는 기쁜 소식(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드는 원인이 귀신 때문이라는 것을 믿는 사회에서 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문제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아마도 사는 동안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그 문제들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에게 온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삶 속에 실제적으로 깃드는 능력입니다.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 때문에 열병에 걸린 것처럼 누워 있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문제들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리고 우리가 속한 더 큰 공동체 내에서도 그저 주저 앉아 웅크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가 힘을 낼 수 있는 이유,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들여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우리에게 들려오는 이 복음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우리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하게 창조하신 그 목적에 맞게 우리 각자를 있어야 할 자리로 복귀시키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듣고도 일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헤매고 있는 이유는 그 복음에 우리의 자신의 온 존재를 던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손이 시몬의 장모의 손에 닿았다는 것은, 시몬의 장모가 복음에 온 존재를 던졌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시몬의 장모는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수종들 수 있었습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온 존재를 걸고 살 때 우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는 결정적인 사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부활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이 부활 사건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그 자체가 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 나라 자체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집중하면서 살아갈 때 복음의 능력, 일으킴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집중하면서 살아갈 때 일으킴을 받아 우리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음의 능력에 우리의 삶을 맡겨 봅시다. 그 능력이 우리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병든 몸을 낫게 할 것이며, 우리의 병든 마음을 치유할 것이며, 우리의 무너진 삶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공동체를 위하여 해야 하는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문제는 복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에 온 삶을 걸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 시간 결단하십시오. 복음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뒤 덮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립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자가 되라  (1) 2012.02.22
예수님의 소외  (2) 2012.02.15
사랑은 덕을 세운다  (3) 2012.01.30
종말론적 신앙  (1) 2012.01.23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1) 2012.01.16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 30. 06:18

2012 1 2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고린도전서 8:1-13

제목: 사랑은 덕을 세운다

 

고린도는 우상이 판을 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복음 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지역뿐만이 아니라, 평생 우상의 그늘 아래서 살던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한 지역과 개인의 삶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문화가 자연스러운 곳, 그리고 어려서부터 하나님 말씀에 익숙한 사람이 신앙을 갖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문화를 전파하는 일, 그리고 가정에서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을 잘못 이해하면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주고자 했던 교훈을 놓칠 수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오늘 말씀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를 피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말씀의 핵심이 절대로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이 문제가 굉장히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이 교회의 분열을 일으키는 심각한 요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어떠한 교인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교인이 그것을 봤습니다. 그 교인이 노발대발 합니다.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어떻게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냐고요. 그러나 우상의 제물을 먹은 그 교인은 이렇게 맞받아칩니다. 고기는 고기일 뿐이지 이게 우상에게 바쳐졌다고 해서 무슨 효력이 있냐고요. 그러면서 이 사람은 그러한 것에 얽매여서 무슨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냐고 오히려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는 그 사람을 나무랐습니다. 이 문제로 고린도교회는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파와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 이렇게 나뉘어서 죽어라 싸웠습니다.

 

사실 이러한 비슷한 문제가 현재도 교회 안에 편만합니다. 한국교회는 처음에 이와 비슷하게 제사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도 되느냐 안 되느냐, 제사 드린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제사 드리면서 절을 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 등의 문제가 그것입니다. 장례식장에 가서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국문화는 장례식장에 가서 고인에게 두 배 반의 절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상주에게는 맞절을 한 배 반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장례식장에 가면 기독교인들은 고인에게 절을 하거나, 상주에게 절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앞에서 묵념(기도)하고, 상주와도 목례 정도 나누고 맙니다. 지금은 오히려 이러한 기독교 장례문화가 편만해져서 별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와 비슷한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합니다.

 

다시 고린도교회의 문제로 돌아가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은 이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먹어도 상관 없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을 듣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도 된다파가 승리의 함성을 질렀을까요? “그것 봐!”하면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파를 나무랐을까요? 사도 바울은 문제의 핵심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피력합니다. 그것을 피력하는 핵심 구절이 바로 8 1절의 말씀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이 구절을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됩니다. ‘지식은 나쁜 것이구나, 무식하게 사는 것이 좋구나!’ 사도 바울은 지식은 나쁘고 사랑은 좋은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지식이 없으면 인생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당신들은 못 배웠어도 자식들은 교육 많이 시키려고 뼈빠지게 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지식이라는 것을 잘못 소유하게 되면 오늘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진, 그러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지식은 중요한 것이지만 지식만 쌓는 것은 남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지식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 지식이 남을 살리고 이롭게 하는데 쓰여질 수 있습니다. 지식에 사랑을 더해 덕을 쌓은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지성인이라고 합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지식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결정적으로 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파 사람들은 그것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지식의 핵심 내용이 6절입니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여기서 핵심은 한 하나님, 한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라는 뜻은 이 세상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사람들이 행하는 우상숭배는 코미디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그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있지도 않은 신에게 바친 제물에 무슨 효력이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도 이러한 지식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사회생활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음식을 먹어도 상관 없고, 장례식장 가서 예를 갖추어 절을 해도 상관 없습니다. 우리가 먹는 제사음식은 그냥 음식일 뿐이고, 고인에게 절 하는 것은 그 고인이 무슨 이 때문이 아니라 그냥 절을 하는 것이 우리 문화에서 예의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지식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은 교만하다는 뜻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공동체에 고집스럽게 적용하면 그 지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최고의 잘못입니다. 한 공동체 안에는 지식이 더 있는 사람도 있고, 지식이 덜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지식 수준이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 한 편을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제가 쓴 시입니다. 제목은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입니다. 부제는 사랑은 상식만큼 피어난다입니다.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 사랑은 상식만큼 피어난다

 

어린 시절 비 올 적마다 엄마가 만들어 주신 도너츠.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다. 기름에 튀긴 거라 끔찍하고 그런 걸 정신 없이 먹었다는 것이 끔찍하다. 그런데 그 시절엔 그것이 상식이었다. 기름에 튀긴다는 사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했을 뿐이고 그런 사실에 풍요롭다고 느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나에게 맛있는 간식을 주신 것이 아니라 독을 주신 것이나 다름 없다. 지금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트랜스 지방이 엄청 들어간 기름에 튀긴 도너츠를 간식으로 주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엄마의 사랑에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엄마의 상식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고, 그것이 엄마가 자식들에게 베푼 최고의 사랑이었다. 사랑의 행위는 늘 바르고 정직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사랑은 상식에서 벗어나 있고 상식을 비껴간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아는 만큼, 자신의 상식 선에서만 사랑을 베풀 수 있다.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은 이미 인간의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상식만큼 피어난다. 상식만큼만 사랑을 이해하고 받으면 된다. 그래서 난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면 엄마의 그 끔찍한도너츠가 그립고 또 그립다.

 

저희 어머니가 올해로 76(36년생)이십니다. 우리 어머니 세대에는 트랜스지방에 대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약 그 당시 트랜스지방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치고, 트랜스지방에 대해서 지식이 없었던 어머니가 사랑으로 만들어 준 도너츠 간식을 보고 어머니 앞에서 어머니는 참 무식하다며 내팽개쳐 버렸다면, 트랜스지방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저는 지식이 많은 아주 똑똑하고 훌륭한 자식입니까? 아니면 후려 아들놈입니까?

 

세상적인 지식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충만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목사입니다. 제가 아는 것만큼 여러분들을 지도하고 가르친다면, 아마도 여기에 앉아 계실 분 한 분도 없을 겁니다. 제가 아는 것과 여러 분이 아는 것이 달라 수많은 충돌을 일으켰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의학적 지식 만을 가지고 우리를 진찰한다면 우리는 의사 앞에서 얼마나 큰 면박을 받고 상처 받겠습니까? 다시는 그 의사를 만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9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여기서 자유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온 자유를 말합니다. 한 분 하나님과 한 분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안 그리스도인은 우상제물을 먹는 것에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이 없는 사람, 아직까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믿음이 약한 자들은 우상제물을 먹는 것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우상제물을 먹으면 큰 일 나는 줄 압니다.

 

이 문제가 단순히 유식과 무식의 문제 아님을 유념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 문제를 유식과 무식의 문제로 보았으면 이렇게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 문제가 거론된 고린도전서가 성경에 포함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 문제가 왜 중요하냐면, 이것이 구원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우상제물을 먹어도 된다파의 경솔한 행동이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던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에게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는구나!” 이 마음에 담력을 얻어 우상 숭배를 다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우상을 믿는 일을 어느 정도 병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우상의 제물을 다시 먹게 되는 일은 그들이 믿음 좋은 사람들처럼 그 우상제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믿으면서 동시에 우상도 섬기고 있었는데, 우상제물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우상숭배를 지속해서 해도 되는구나라는 타락한 믿음을 담대하게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이것은 곧 라고 사도 바울을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 문제를 끝맺음 합니다.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것이 믿음인데, 이것만 가지고 신앙생활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믿음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 다른 사람을 쉽게 핀잔 주는 일이 없어야 하지만, 신앙생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게 된 자유로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면 안 됩니다.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영어로 “Love builds up”입니다. “build”세운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up”이 들어가면 세우되 끝까지 온전하게 세운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 말로 이것을 덕을 세운다로 번역했습니다. 참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믿음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교회를 온전히 세웁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가정을 온전히 세웁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온전히 이웃을 세웁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나 자신을 온전히 세웁니까? 온전한 믿음생활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인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을 우리가 아는 이상, 우리의 믿음생활은 사랑그 자체가 되어야겠습니다.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의 소외  (2) 2012.02.15
복음은 능력이다  (1) 2012.02.06
종말론적 신앙  (1) 2012.01.23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1) 2012.01.16
갈렙에게서 배우라  (1) 2012.01.10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 23. 06:59

2012 1 2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14-20; 3:1-5, 10; 고전 7:29-31

제목: 종말론적 신앙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기독교 사상의 핵심을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기독교 용어로 그것을 표현하면, 종말론입니다. 종말론이 기독교 사상의 핵심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실제적으로 종말론적 신앙을 견지하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종말론이 기독교에서 말썽꾸러기가 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정통 기독교 때문은 아니고, 이단들 때문입니다. 기독교 이단 교파들은 종말론을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종말론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심리를 흔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사람들에게서 착취합니다. 실례로 1992년에 있었던 다미선교회사건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어느 특정한 시간에 예수님의 재림과 휴거가 있을 거라고 선동해 놓고,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바치게 만든 다음, 재림이나 휴거와 상관 없이 성도들이 바친 재산을 가지고 도망치는 겁니다. 재림과 휴거에 열광했던 사람들은 이미 넋이 나가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속은 지도 모르고 다시 정신 차리기도 힘듭니다. 이렇게 자꾸 종말론이 말썽꾸러기 역할을 하니까, 기독교인들이 아예 종말론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겁니다.

 

둘째로, 시대가 종말론을 필요 없게, 그리고 생각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누가 더 많이 가졌느냐를 경쟁하는 시대입니다. 삶의 토대가 철저하게 소유에 있게 하는 시대입니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말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그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파스칼은 인간을 일컬어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옛말이고 철학적인 골동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즘 시대는 이렇게 인간을 정의합니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파스칼 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쇼핑하는 갈대입니다. 소유는 철저하게 이 세상을 생각하게 하고, 이 세상에 토대를 두게 합니다. 그러니 종말론을 생각할 겨를 없게 됩니다.

 

셋째로, 종말론이라는 개념 자체의 어려움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머리 아픈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을 만질 수 있는 것에 관심을 더 갖는 법입니다. 그런데 종말론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 개념을 이해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살기도 바쁘고 힘든데, 종말론 같은 것에 신경 쓸 겨를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회에서도 종말론 같이 힘든 이야기는 잘 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축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맙니다. 그렇게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갑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눈 가리고 아옹하다.” 영어 표현은 “hide one’s head in the sand” 정도가 되겠네요. 이는 현실을 도피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인이 종말론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눈 가리고 아옹하는격입니다. 삶의 현실을 도피하는 꼴이 된다는 것이죠. 종말론을 모른 채 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삶의 자세입니다. 이 세상의 실제 모습을 못 본채 하고,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만 마음에 그린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살고 싶겠지만, 인생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게 현명한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 현실을 직시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선포하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선포한 이 세상의 현실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1:15). 이것이 이 세상을 향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절박하고 유일한 메시지였습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온통 이 메시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들여다 보는 우리들은 이 메시지를 애써 외면 합니다. 바로 위에서 열거한 이유들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비겁한 사람들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비겁함이 어느 정도에 이르는지,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생생하게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이스라엘의 이곳 저곳을 다니시면서 줄기차게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에 대해서 전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그 메시지에 반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제자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에서도 그 상황이 그려집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장면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그리고 가족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을 품습니다. 그러한 의구심은 우리가 그만큼 종말론에 대해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깊이 있게 묵상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은 다름이 아닌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을 보여줍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본문이 오늘 우리가 읽은 요나서의 본문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한 대상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적국이었던 앗수르였습니다.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아주 명확하고 간결하게 선포합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3:4). 굉장한 임박성과 긴박성을 보여줍니다. 심판의 날이 사십일 밖에 안 남았다는 겁니다. 그날 이후에 모든 생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선포입니다. 이 선포에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은 신속하게 즉시 그리고 철저하게 반응합니다.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가축들까지 금식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회개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자들이나 니느웨 사람들처럼 반응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애써 외면합니다. 외면하는 정도가 아니라, 복음서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렇게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까?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한 자들에 의해서 고난 당하시고 미움 받으셔서 죽으신 겁니다. 비겁한 사람들은 단순히 숨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것은 이렇게 죽여버리기까지 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세상입니다.

 

사실 종말론이 무엇인지를 오늘 이 시간에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평생 연구해도 다 알지 못할 주제입니다. 다만 종말론이 담고 있는 핵심적인 의미는 꼭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그 핵심적인 의미는 고린도전서의 본문이 보여줍니다.

 

이것이 종말론의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다시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는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왜 이렇게 해야 하느냐?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는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영어로는 “The present form of this world is passing away.” 입니다. 이 세상의 현재 모습(형태)은 영원하지 못하고 일시적이고 잠정적이라는 뜻입니다. 잠깐 그 형태를 갖고 있을 뿐 곧 사라지고 말 거라는 것이죠.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토대로 다시 설명하자면, 결혼생활도 영원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이 오면 내가 언제 결혼생활을 했는가 싶은 정도로 훌쩍 지나가 버린다는 겁니다. 또한 우리가 울고 기뻐하는 것도 잠깐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울고 기뻐하는 일의 근거도 결국 이 세상의 일 때문인데, 우리를 울게 했고 기쁘게 했던 그것들도 결국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매매하는 자들이나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 타고 있는 차, 그리고 내가 아끼는 물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비싼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무리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영원히 소유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입니까? 모든 것 다 버려두고 산 속에 들어가서 살라는 것입니까? 인생은 허무한 것이니 허무주의에 빠져 살라는 뜻입니까? 성경에서 전하고 있는 종말론이 이렇게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복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외침,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 그리고 사도 바울의 종말에 대한 교훈은 우리의 삶의 근거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요즘처럼 소비와 소유에 물들어 사는 현대인들에게 더욱더 경종을 치는 말씀입니다. 미국과 같은 주류문화 사회는 인생의 기준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둡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생명(, 살아 숨쉰다)의 기운이 소유에 있다고 말합니다. 누가 더 큰 집에서 사느냐, 누가 더 좋은 차를 타느냐, 누가 더 친구가 많느냐, 누가 더 예쁘고 잘 생겼느냐, 누가 더 자존심이 세느냐, 누가 더 성공했느냐, 등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생명의 가치를 둡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 능력은 오직 소비력입니다. 누가 더 많이 소유할 수 있느냐, 누가 더 원하는 물건, 원하는 것을 차지할 수 있느냐를 따집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돈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돈 때문에 미쳐 날 뛰는 것이지요. 그것이 곧 나의 생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눈 가리고 아옹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오늘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생명을 아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일깨워 줍니다. 현대인이 꿈꾸는 생명, 즉 많이 소유하는 것, 소유하기 위해서 소비를 극대화시키는 것, 그래서 우리가 많이 갖게 되는 그것들은 모두 지나갈뿐이라고 말합니다. , 그러한 것들은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토대와 근본이 만약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근거해 있다면, 그것만큼 허무하고 헛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착각 속에서 그것들이 우리를 영원하게 만들어주는 양,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는 양, 우리를 구원해 주는 양,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린 손을 한 번 떼어내 보십시오. 그리고 현실을 똑바로 보십시오. 고린도전서의 말씀처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가고 맙니다. 우리가 그토록 소유하기 원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 생명의 토대가 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을 살면서 사랑했던 사람들이나 물건들이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도 다 떠나갑니다. 사랑하는 자식도 부모보다 먼저 떠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도 다 떠나갑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죽고 지나가고 없어집니다. 그것을 우리는 매일같이 경험하면서도 왜 그렇게 죽고 지나가고 없어지는 것에 기대어 삶을 꾸려가려는지, 거기에 생명의 토대를 삼아 살아가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참된 진리를 말해 줍니다. 기쁜 소식을 줍니다. 죽고 지나가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 있다고! 죽고 지나가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생명의 토대를 삼아 살아가라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갈릴리 해변에서 부름 받은 제자들처럼 즉시 그리고 철저하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죽고 지나가고 없어지는 것에 기대어 살아가느라 정신 없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외형은 다 지나갑니다. 때가 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온 존재를 걸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런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시니 내가 흔들리지 않으리로다”(시편 62:5-6).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이 신앙 안에서 사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은 능력이다  (1) 2012.02.06
사랑은 덕을 세운다  (3) 2012.01.30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1) 2012.01.16
갈렙에게서 배우라  (1) 2012.01.10
하나님의 능력  (0) 2012.01.02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 16. 06:36

2012 2 1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삼상 3:1-10, 1:43-51

제목: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부르심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무엘상의 말씀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고, 요한복음의 말씀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입니다. 사무엘은 이미 나실인으로서 실로에 있는 제사장 엘리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제사장 수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의 부르심은 제사장으로서의 부르심은 아니었습니다. 나다나엘의 부르심 또한 무슨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부르심이 아니었습니다. 빌립과의 관계 속에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생각할 때, 무슨 직분을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목사, 선교사가 되는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포함되기는 하나,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전부는 아닙니다. 부르심이란 그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목사직은 그것을 감당할만한 자격과 자질이 갖추어진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의사직이 그것을 감당할만한 자격과 자질이 갖추어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오히려 자격과 자질이 되지 않는데, 소명(부르심)을 받았다고 달려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자꾸 성직과 세속직을 구분하는데, 하나님 안에서 성직과 세속직의 구분은 없습니다. 이점을 종교개혁자 칼빈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르심(calling)이라는 단어를 직업에 쓰고 있습니다. 어느 직업이든지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말로는 천직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계시던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충분히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천직
(calling)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나누어 놓은 직업의 높고 낮음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천한 직업도 없고 귀한 직업도 없습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찾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자신의 일에서 소명을 찾는 자는 그 일을 하면서 즐겁고 기쁘겠죠. 그렇지 못한 자는 그 일이 아무리 세상적으로 칭송을 받는 직업일지라 하더라도 자신의 일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오해는 없어져야 합니다. 목사나 선교사 등 소위 주의 일을 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이 천직(calling)이 아니라, 각자 하는 일 안에서 소명을 발견한다면 그것이 바로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작업이 이미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 정리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영성이 아직도 16세기에도 못 미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의 부르심을 보십시오. 사무엘은 처음에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저 자신의 스승인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도 엘리 제사장이 그렇게 훌륭한 제사장으로 역사에 남지는 못했지만, 이것 하나만은 괜찮았습니다. 아무나 제사장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무엘은 몰랐지만, 엘리 제사장은 그 부르심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성령 받으면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그렇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령 받는 것도 무슨 무당이 신 내리듯이 그렇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받으면 못 치던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시는데, 그것이 성령의 역사의 보편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통계에 의하면, 하나님의 음성은 저절로 듣게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앙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신앙훈련을 위해서 목사 같은 교회의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고요. 그래서 성경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라고 말하는 겁니다. 훈련 없이 신앙의 성장은 오지 않습니다. 혼자서 독불장군식으로 열심히 믿는 기독교 신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통한 신앙훈련이 꼭 필요합니다.

 

사무엘이 처음부터 훌륭한 제사장이 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 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애송이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부르심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받은 결과, 그것을 잘 소화하고 연습하고 습득한 결과, 이스라엘 역사에 길이 남을 제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 훈련이 교회에서 잘 이루어져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요즘 현대교회의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초대교회만 해도 기독교인이 되려면 3년 동안의 훈련을 꼭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만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교회의 멤버가 되려면, 기독교인이 되려면 3년 동안 훈련 받아야 한다고 하면 교회에 남아 있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겁니다. 우리가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또한 우리는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꺼려 합니다. 세상 살기도 힘들고 바쁘고 죽겠는데,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여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삶 속에서 자신을 귀찮게 한다 싶으면 아예 신앙에 대해서 마음을 닫아 버리는 것이 요즘 세태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께 받은 부르심은 참 곤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부르셔서 사무엘의 스승인 엘리 제사장의 가문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전합니다. 애송이 제사장 사무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얼마나 당황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사무엘은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이 그를 안정시키고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주셨는지 말해 보라고 합니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물론 그것이 자신의 가문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은 스승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은 그 말씀을 듣고 사무엘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이런 말로 응답합니다.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그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엘리 제사장의 가문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망하고 맙니다. 그 일의 사정이 사무엘상 4장에 나옵니다.

 

사무엘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예언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예언은 미래를 보는 능력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을 뜻합니다. 인디언에게는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것과 성격이 좀 다릅니다. 우리가 보통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갖기 원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능력을 통해서 나의 미래를 좀 평탄케 하려는 욕심인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의 예언은 내가 들어설 자리가 사실상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예언은 하나님에게 집중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하실 지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에 두렵고 떨린 것이죠. 엘리 제사장 가문에 내려진 예언을 보십시오. 여기에 나의 욕심이 또는 내가 들어설 자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엘리 제사장 가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냥 그렇게 망하고 맙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인 겁니다. 함부로, 섣부르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겠다고 선뜻 나설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메시아를 만나고 싶어했던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진리에 목말랐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그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나다나엘이 찾고 있던, 기다렸던 그 메시아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빌립의 전도에 나다나엘은 냉소적으로 반응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다나엘은 메시아를 기대하긴 했으나 뭔가 특별한 방법으로 메시아가 오실 거라고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것이죠.

 

빌립은 이렇게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나다나엘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와서 보라고 끝까지 권면합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권면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예수께 나아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분이 바로 자기가 그토록 갈망하던 메시아라는 것을 알아봅니다. 예수님과 나다나엘 사이에 오갔던 몇 마디 말로 어떻게 나다나엘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인 것을 알아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말씀은 50절과 51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신 부르심의 핵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나다나엘에게만 일어난 부르심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리시는 부르심이라는 데 그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려면 위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첫째, “하늘이 열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둘째,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현재의 세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는 것은 지금 이 세상이 돌아가는 상태로만 세상을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 이 세상은 죄와 악과 죽음이 편만한 것 같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들, 즉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으신다는 것, 새롭게 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이렇게 숨쉬고 사는 것 같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은 사실상 태어나자마자 죽은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이 우리의 전부를 말해 줍니다. 우리 인간의 끝은 죽음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인생은 참으로 덧없고 허무합니다. 결국 죽게 될 인생인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옹다옹 하면서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누구는 조금 더 살고 누구는 조금 덜 살고, 누구는 조금 더 건강하고 누구는 조금 더 건강치 못하고, 누구는 더 많이 가졌고 누구는 덜 가졌고 하는 것 때문에 희비가 갈릴 것 같지만, 사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로애락은 그러한 것에서 오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은 인간의 아주 본질적인 문제에서 오는데, 그것이 바로 죄, , 그리고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배타적인 문제들입니다. 우리가 개입해서 어떻게 해볼 여지가 없는 문제들입니다. 조금 더 산 사람이라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조금 더 건강하다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조금 더 가졌다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현실에 놓여진 굴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 , 죽음)이 이 세상을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것 같고, 이것 때문에 인간의 삶이 좌우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는 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개입하셔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들(, , 죽음)을 해결하시고 바로 잡으시고 새롭게 창조하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야곱의 벧엘 체험과 같습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 땅으로 도망가던 중 한 곳에 이르러 유숙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거기서 야곱은 꿈에서 사닥다리를 통해 천사들이 하늘과 땅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봅니다.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 곳이라고 깨닫고 돌단을 쌓은 뒤 예배 드리고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칭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께로 통하는 길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제자들은 나중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에 대한 신앙고백이 오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나다나엘에 대한 부르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부르심이란 무엇입니까? 부르심이란 근본적으로 어떠한 사역으로의 부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르심이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비 목사도 나오는 것이고 사이비 교회도 나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그 부르심이 없다면, 우리의 사역(부르심)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부르심이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부르심이란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진리에 나를 매는 것, 바로 그것이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을 알고 믿을 때, 우리의 인생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값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으면서, 여기에 모든 인생을 걸지도 않으면서 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아무리 성직이라고 불릴지라도 바람의 나는 겨와 같은 것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하늘이 열리는 것이 보이십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새창조의 능력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살아가시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은 덕을 세운다  (3) 2012.01.30
종말론적 신앙  (1) 2012.01.23
갈렙에게서 배우라  (1) 2012.01.10
하나님의 능력  (0) 2012.01.02
위로를 기다리는 자  (3) 2011.12.26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 10. 09:01

2012 18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여호수아 14:6-16, 고전 4:1-2

제목: 갈렙에게서 배우라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을 받는 기분입니다.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고,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옛날,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을 지파별로 나누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14 2절에 보면, 땅을 나누는 방법이 나오는데, 다름 아닌 제비뽑기입니다. 죽어라 싸워서 쟁취한 땅을, 우리 같으면 어떻게 분배받고 싶겠습니까? 우선 누가 더 혁혁한 공을 세웠는가 따져서, 가장 공이 큰 사람에게 가장 좋은 땅부터 분배하는 원칙을 세우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세우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것은 그나마 좀 민주적인 방법입니다. 더 고생한 사람이 더 좋은 것을 차지하는 것. 그러나 그것도 사실 실제 생활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실제 생활에서는 무조건 힘센 사람이 좋은 것을 차지하니까요.

 

세상은 이렇게 돌아갑니다.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강자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죠. 돈 많은 사람이, 더 많이 배운 사람이, 더 잘생긴 사람이, 더 건강한 사람이, 등등 저 사람을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못 견디는 세상이 인간의 보편적인 세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땅 분배를 할 때, 그들은 세상의 이치를 따르지 않았고, 하나님의 법칙을 따랐습니다. 그것이 제비를 뽑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제비뽑기가 곧 하나님의 법칙은 아님에 유의)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신앙이 들어 있었습니다. 우선,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더 나아가, 소유권 자체를 하나님께 두는 것이죠.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셔서 내가 지금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것뿐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또 한가지는 토지공개념입니다. 토지의 공동 소유개념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생각입니다. ‘네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네 것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러니, 어느 땅을 분배받던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주어진 땅에서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죠. 아무튼, 재산의 사유화와 개인주의가 만연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해하기 힘든 개념들이긴 하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땅을 분배받을 때는 이러한 기본 정신 아래서, 제비뽑기를 통해서 그 일이 행해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예외의 인물이 한 명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은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감사함으로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갈렙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땅을 소유할 권한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러한 권한이 생겼는지는, 민수기 14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광야의 가데스바네아라는 곳에서 머물면서, 12명의 정탐꾼을 뽑아 가나안 땅으로 보냈을 때, 그것을 정탐하고 돌아온 이들 중 10명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동요시키고 혼란하게 만들었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보내야 했고, 출애굽 1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같은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도, 누구는 멸망을 받고, 누구는 축복을 받습니다.

 

축복받은 사람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갈렙입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하나님 편에서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신앙 가지고 헌신을 서슴지 않았던 갈렙은, 이제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가장 좋은 땅을 분배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갈렙은 의외의 요구를 합니다. 이 사람, 갈렙의 믿음이 또 한 번 빛나는 순간입니다.

 

갈렙은 리더 여호수아에게 나와서 자신의 요구를 말하는데, 우선 지난 날을 회상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자신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부터 의외입니다. 우리 같으면, 정당성을 내세워 가장 좋은 땅을 분배해 달라고 서둘러 말할 텐데, 갈렙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은총을 받은 사람인지, 거기에 대한 감사의 고백을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장수하고 있다는 겁니다. 40세 때에 정탐꾼으로 활동했는데, 45년이 지난 지금 85세가 되었는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기력이 같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건강 주셔서, 하나님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결론적으로 12절에 나옵니다.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이 산지가 어디입니까? 이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복음성가도 있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날에 주께서 말씀하신~”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찬양을 부를 때, 우리의 욕심을 담아서 내가 원하는 이것을 주십시오’, 라며 하나님께 떼쓰는 마음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갈렙이 요구하고 있는 이 산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명시적으로, 이 산지는 기럇 아르바라는 곳으로, 헤브론이라는 도시입니다. 헤브론이라는 도시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누구나 탐내는 곳이었기 때문에 갈렙이 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헤브론은 땅 분배를 하고 있었을 당시, 아직 정복하지 못했던 곳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던 사람들이 아낙 사람들이었는데, 그 아낙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강성한 자들이 자리잡고 있었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골리앗 같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던 곳이 헤브론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마음으로는 선뜻 그곳을 달라고 하지 못할, 그런 꺼려지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땅 분배에서 우선권이 있었던 갈렙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사람인가를 이야기 한 뒤, 자신의 우선권을 자신의 잇속을 채우는데 쓰지 않고, 남들이 하기 어려운 일을 감당하겠다면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갑니다. 이건,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강력한 믿음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지금까지 부어주신 은총으로 미루어볼 때, 12절의 말씀대로, “그 성읍들이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낼 것이다.”라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갈렙의 믿음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15절에 보면, 그 땅에 전쟁이 그쳤다고 나옵니다. 갈렙이 헤브론을 차지하는 일화는 이어지는 15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갈렙에 대한 평가가 14절에 나오는데, 이렇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읽은 또 다른 본문인 고린도전서 4장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였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아는 깊은 영성의 소유자였다는 겁니다. 85세의 나이로, 거인족들과 싸워 그 땅을 차지하겠다는 신앙고백은 흔히 어떤 객기에서, 자신을 드러내려는 교만함에서, 자신의 능력을 한 번 테스트 해보겠다는 우월감에서, 하나님이 진짜 계신가 아닌가 시험해 보고 싶은 불경스러운 마음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였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확신의 신실한 믿음의 고백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맡은 사람들입니까?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사도 바울께서 힘주어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무엇을 향해 충성하고 있고, 하려고 합니까?

 

갈렙이 정복한 헤브론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깊은 연관이 있는 유서 깊은 곳입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막벨라 굴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 굴에 장사된 사람이 사라, 아브라함, 이삭, 리브가, 요셉이 장사되어 있는 곳입니다. 나중에 이곳은 6개의 도피성 중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헤브론은 다윗이 자신의 왕조를 세울 때 처음 왕으로 등극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매우 중요한 곳이긴 한데, 꼭 차지해야 할 땅이긴 한데,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너무 강성해서 아무도 감히 차지하겠다고 요구하지 않았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던 갈렙은 바로 그 땅을 달라, ‘내가 그 험한 일을 감당하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걱정 없다고 하면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는 말씀처럼, 끝까지 하나님께 충성했습니다.

 

특별히 오늘 집사, 권사로 임직하시고, 각부서장으로 임명되시는 여러분들, 이 말씀을 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나는 누구의 일꾼인가를 늘 묵상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지, 세상의 일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뭡니까? 그게 복음입니다. 그게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임직하시는 분들은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충성을 다하겠다는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행동하기 전에, 이것에 대한 묵상이 꼭 있어야 합니다. 이것에 대한 확실한 묵상이 없으면, 분주하기만 하지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힘들어집니다. 무슨 일을 하시든지, 기도 먼저 하시고, 말씀 먼저 보시고 하십시오. 그게 맡은 자들이 먼저 해야 할 충성입니다.

 

이것만 확실하게 삶에 자리 잡으면, 갈렙처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남들이 꺼려하는 일,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갈렙처럼 땅에 떨어져 겸손하게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교회를 확장하고 부흥시키는 귀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 권사 집사로 임직하시고 각 부서장으로 임명받으시는 분들 뿐만이 아니라, 오늘 예배 드리는 우리 모두가 새롭게 시작된 2012년도, 믿음의 선배인 갈렙에게서 한 수 배워서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갈렙의 온전한 헌신이 이스라엘을 풍요롭게 했던 것처럼, 나의 온전한 헌신이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세우신 우리 교회를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찬양이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는 당당하게, 힘차게 부를 수 있습니다. 주를 믿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충성된 주의 일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갈렙처럼,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는 주님의 일꾼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말론적 신앙  (1) 2012.01.23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1) 2012.01.16
하나님의 능력  (0) 2012.01.02
위로를 기다리는 자  (3) 2011.12.26
율법과 복음은 어떻게 다른가?  (0) 2011.12.19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 2. 06:14

2012 1 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43:1-8

제목: 하나님의 능력

 

2012년도를 맞이하신 모든 분들께 축하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어릴 적에 이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내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저 같은 경우도 그런 상상을 가끔 합니다. ‘나는 2050년도에 살아 있을까?’ 여러분들도 그런 상상을 해 보셨을 겁니다. 어릴 적에 2012년도에 살고 있을 상상을 해보셨겠죠. 새로운 해를 맞는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새해는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새로운 해를 맞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새롭게 맞이한 2012년도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이 소중한 2012년도에 여러분은 어떠한 소망과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인간 사는 것은 모두 비슷비슷 하기에, 건강, 자녀, 사업 등 우리가 삶을 살면서 부딪치게 되는 문제들이 모두 형통하기를 소망하실 겁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12년도 여러분이 소망하시고 계획하시는 모든 일이 형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형통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첫째, 서로가 서로에게 걸림돌이 되지 마시고 디딤돌이 되어야겠습니다. 내 소망과 내 계획만 소중한 것은 아닙니다. 내 소망과 내 계획이 소중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소망과 계획도 소중합니다. 내 소망과 내 계획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헤치는 일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소망, 계획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는 붙들고 있지 말아야겠습니다. 다 아시는 통계이지만 우리가 근심걱정 하는 문제의 95%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이라고 합니다. 그런 문제들을 붙들고 있어봐야 정신과 몸만 상하고 맙니다. 수명을 스스로 단축시키고 맙니다. 그런 문제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서 아뢰어야 합니다. 올 해에는 더욱더 하나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와 아뢰어서 건강하고 형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의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당연히, 나라의 회복이었을 겁니다. 고향 땅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이들의 가장 큰 소망이었을 겁니다. 남의 나라에 잡혀 와서 산다는 것이, 아무리 그 나라에서 잘 먹고 잘 살아도 쉽지 않은 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표면상 그랬다는 겁니다. 표면상으로 이들의 소망은 고향 땅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곳을 들여다 보면 도사리고 있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문제였습니다.

 

이들은 포로생활을 하면서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나라가 망하는 수치를 당하고 있는가?” 이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해서였습니다. 이 깨달음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겪는 어려움을 보면서 우리도 그런 생각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 그럴 때마다 우리 믿는 이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되돌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편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도 불신앙의 한 형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편해서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가 온 건지 아닌지 분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는 우리에게 닥친 그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하나님이 가려진다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건강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더 찾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 질 수 있습니다. 비즈니스가 잘 안 되면 그 일에 신경 쓰느라 하나님을 찾는 일이 드물어 질 수 있습니다.

 

포로생활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된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들은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마음의 간절한 소망은 나라가 회복되어 고향 땅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이룹니까? 나라가 없어진 마당에 자신을 구원해 주러 올 왕도 군사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소망을 이룰 수 있습니까?

 

이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었을 때 이들은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바알 신이나 아세라 신 같은 우상들이 자신들의 삶과 더 관련이 있고 그들에게 실질적인 능력을 베풀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농사의 신이요 풍요의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곳에 정착해서 농사 짓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비와 풍년을 바알과 아세라가 가져다 준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우상의 능력에 더 기대었던 것뿐입니다. 우상은 눈에 보이는 형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형상도 없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들은 믿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렇게 따랐던 우상, 바알과 아세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들은 그야말로 허상이고 우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에 기대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회복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은 바알이나 아세라가 아니라, 그들이 능력이 없다 생각하여 무시했던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겪으면서 이스라엘은 믿음이 회복되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귀로, 손으로 보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동안 이들에게는 눈이 없었습니까? 귀가 없었습니까? 손과 발이 없었습니까? 그들은 그들의 눈과 귀로 우상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손과 발로 우상에게 예배 드렸던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눈과 귀, 그리고 손과 발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듣고 깨닫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의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생활 하고 있는 이들에게만 들려졌던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서 왕조를 이루어 살고 있었을 때에도,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기 전 광야에서 살 때도, 광야에서 헤매기 전 애굽에서도, 애굽으로 들어가기 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 때에도 이들에게 들려졌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말씀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 말씀이 이 귀에 들리십니까?

 

하나님께서 이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하나님께서는 늘 이렇게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의 이 사랑을 깨닫고 있지 못했을 뿐입니다. 5-7절 말씀은 이렇게 사랑하시는 당신의 백성의 소망을 바로 그들이 무시했던, 능력이 없다고 등한히 했던,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고,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소망인 나라의 회복, 포로귀환을 이루어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겪는 삶의 어려움들이 이 눈과 귀를 막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겪는 삶의 어려움들이 이 손과 발을 묶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그 어려움들 때문에 이 눈과 귀가 막혀버리면 오늘 우리가 읽은 1절의 귀한 하나님 말씀이 안 들립니다. 이 손과 발이 교회에 나오는 것조차 힘들어 집니다.

 

우리의 삶의 어려운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해결해 주는 능력이 어디에 있다고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나라가 망해가는 위기에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들(그것도 정말 위대한 선지자들인 예레미야와 이사야 같은)을 통해 망해가는 나라를 실질적으로 구해주실 분은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으니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셨습니다. 예레미야서를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이 말씀을 외치다가 왕과 고관들에게 붙잡혀 죽을 뻔한 위기를 많이 넘깁니다. 그러나 왕과 고관들, 그리고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줄타기 하다가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오해는 마십시오. 몸이 아프신 분에게 약 먹지 말고 병원도 가지 말고, 교회에 나와서 기도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12시에 야참을 먹으면서 이것 먹고 건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 건강해집니까? 건강 하려면 야참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몸에 해로운 것 먹으면서 건강하길 바라는 것은 공부 안 하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길 바라는 것과 똑같고 운전대 놓고 하나님께서 알아서 운전해 주실 줄 믿는 어리는 석은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런 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십니까? 약을 먹어도 그 약이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약의 효과가 내 몸에서 일어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에 따르는 좋은 결과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운전은 내가 하지만 내가 운전해서 목적지까지 잘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셨기 때문에 목적지까지 잘 도착한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 삶의 어려운 문제들, 건강, 자녀, 가정, 사업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회복시켜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것이 보이는 눈, 그것이 들리는 귀, 그것으로 인해 손과 발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귀한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1) 2012.01.16
갈렙에게서 배우라  (1) 2012.01.10
위로를 기다리는 자  (3) 2011.12.26
율법과 복음은 어떻게 다른가?  (0) 2011.12.19
내가 증거자 요한이다  (0) 2011.12.12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2. 26. 04:22

2011 12 25일 성탄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누가복음 2:22-39

제목: 위로를 기다리는 자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이 태어난 지 한 사십일쯤 지나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물론 예수님이지만, 그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에 쓰인 두 사람이 나오는데, 한 명의 이름은 시므온이고, 다른 한 명의 이름은 안나입니다. 시므온은 남자고, 안나는 여자입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을 읽을 때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인데, 누가복음에서는 어떠한 이야기를 전개시킬 때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나옵니다. 일종의 남녀평등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기록될 당시의 세계는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남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시대였는데, 누가복음의 저자는 여자를 남자와 같은 위치에 올려놓고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의 특징 중 하나 입니다. 누가복음을 한 번 잘 읽어보십시오. 모든 구조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누가복음의 구조는 아니고요, 시므온과 안나가 노인이었다는 겁니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노인들은 거의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노인들은 전문적인 직원들이 돌보는 양로원에 보내지지 일쑤입니다. 우리는 자주 노인들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이 자꾸 거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모든 소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하는 그런 노인들에게, 그 누구에게서보다도 더 큰 소망이 있었음을 우리는 오늘 읽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누가의 기사에서 시므온과 안나는 노인이지만, 그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지혜로운 사람들도 그려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일이 벌어진 곳은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 중에서도 가장 북적대는 성전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에는 사람들로 북적댑니다. 그리고 자칭 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권력자들, 부자들, 젊은이들, 성직자들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오직 노인에 불과했던 시므온과 안나만이 부모의 팔에 안겨 성전 뜰로 들어오고 있는 아기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이들 노인이 부모보다도 아기 예수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33절의 말씀에서 예수님의 부모님이었던 요셉과 마리아는 노인의 말에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이 노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것은 요엘서에도 분명하게 나와 있는 사실입니다 요엘서 2 28절의 말씀입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임하시면, 꿈을 잃었다고 하는 늙은이가 꿈을 꾸게 된답니다.

 

이런 말씀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설교는 양로원에 가서나 하시지우리는 아직 젊은데…” 우리는 모두 늙어갑니다. 젊음을 자랑할 때가 있었고, 그 젊음이 영원할 것 같았던 때가 있었지만, 결국 우리의 인생은 늙어갑니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는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은 늙어감을 한탄하고, 어떤 사람은 늙어감을 괴로워하고, 어떤 사람은 늙어감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늙어가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 이 두 노인들의 삶을 한 번 들여다 보면, 이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소망하고 살았는지를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젊은이에게나, 노인에게나,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25절 말씀에 보면, 누가복음 저자는 시므온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리고 37절에는 안나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위의 요엘서에서 묘사된, 장래일을 말하고 꿈을 꾸고 이상을 보는 일은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장래일을 말하고 싶어하고, 꿈을 꾸고 싶어하고, 이상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뿐,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끔 힘을 쓰지는 않습니다. 마음뿐이고, 힘쓰지 않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은 실망과 절망뿐입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안나의 삶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다는 말이고, 경건하게 살았다는 말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쓸데 없는 일에 낭비하지 않고, 이웃과 나누면서,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면서 살았습니다.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은 성전에서 살았다는 말이 아니라, 성전이 그들 삶의 중심이었다는 말입니다. 예배가 삶의 중심이었다는 말입니다. 금식과 기도는 예배의 형태입니다. 이들은 그만큼 성전 드나들기는 자기 집처럼 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살았던 시므온과 안나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그토록 기다리던 위로였습니다. 시므온의 기도는 눈물이 나게 하는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배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죽기 전에 이러한 신앙고백을 여러분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까? 진정으로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을 받기 전에, 이러한 신앙고백이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머무는 입술에서 흘러나올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신앙인입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위로를 기다리는 자입니다. 사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기다리는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다림입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이유는 그들의 기다림 때문이었습니다. 안나는 나이가 84세였다고 합니다. 결혼한 후 7년 만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이 여인의 삶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참으로 쉽지 않았을 겁니다. 스므온도 미루어 짐작해 보건 데, 참으로 힘든 세월을 보냈을 겁니다. 그런 가운데서 이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기다림이 있습니까? 조바심을 내기 일쑤입니다. 조금 열심히 하다가도 금방 주저 앉습니다. 일생을 두고 끈질기게 하나님의 위로를 간구했던 스므온과 안나와는 달리, 우리의 기다림은 너무도 짧고 견고하지 못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가 우리의 장래일을 말하고, 꿈을 꾸고, 이상을 보는 일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불평하고 불안해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성탄주일이기도 하지만 2011년도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결단이 있어야겠습니다.

 

시므온과 안나처럼 의롭고 경건한 자,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기도하며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이것을 목사가 잔소리처럼 하는, 교회 열심히 나오라는 상투적인 말로 듣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직접 눈으로 본 이 두 노인네들의 삶이 얼마나 복됩니까? 이러한 복된 삶이 아무렇게나 살다가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의롭고 경건한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께 이러한 은총을 받았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나만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 뭐해?’하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과 섞이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 그리고 구원이 있는 사람으로 늙어간다는 것,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인생이 짜증으로 가득 차 있고, 위로와 평강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의롭고 경건하게 산다는 것을 너무 거창한 것으로,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지키고 가꾸면 됩니다.

 

우선, 기본적인 십계명부터 좀 지켜보십시오. 1. 다른 신을 섬기지 마십시오. 특히 현대사회의 가장 강력한 신인 돈신 맘몬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지 마십시오. 2. 우상을 만들지 마십시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마음을 쏟지 말라는 말입니다. 3.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마십시오. 하나님 욕먹이는 일, 부끄러운 일을 하지 마십시오. 4.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십시오.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일 없이, 다른 일을 하지 마십시오. 무엇을 하고 싶어도, 예배 후에 하십시오. 5. 부모님을 공경하십시오. 여기서 부모님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기도 없이 자기 혼자 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고아도 부모님의 해산의 고통 없이는 이 땅에 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님을 극진하게 모시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장수를 약속하셨습니다. 6. 살인하지 마십시오. 칼로 사람을 찌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닙니다. 말로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것도 살인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그리스도인이지 죽이는 살인자가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7. 간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생활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8. 도둑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훔치지 마십시오. 9. 거짓 증거하지 마십시오. 없는 말 만들어 내지 마십시오. 아니면 아니오, 그러면 그렇다고만 말하십시오. 10. 남의 것을 탐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만 만족하시고 감사하십시오.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십계명부터 지키는 일, 우리가 평소에 하찮게 여기는 이런 일부터 시작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경건하게 사십시오.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얌전을 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러했듯이, 우리 예수님이 그러했듯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시간과 물질, 건강과 배움 등, 모든 것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전을 떠나지 마십시오. 주변 사람들에게 너는 교회가 집이니? 교회에서 사니?”, 이런 비아냥거림을 들을 정도로 교회를 가깝게 하십시오. 교회를 가깝게 하면서 감내라 콩내라참견하라는 말씀도 아니고, 교회에 모여 수다 떨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교회를 내 집 드나들듯이 드나들면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목사보다 기도 많이 하는 성도님이 나왔으면 좋겠다.). 교회에서 드리는 모든 공예배에 참석하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기 위한 것들입니다. 자녀가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교회에서 제공하는 모든 것은 떡이고 생선입니다. 때로는 여러분이 그것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일은 있을지언정, 돌과 뱀을 받아 드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우리는
2011년 성탄절 예배 그리고 2011년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중대한 말씀을 받아 들었습니다. 우리의 결단만이 남아 있습니다. 더 이상 꿀 꿈이 없다고 생각하는 노인이었던 시므온 할아버지와 안나 할머니에게서 우리는 그 누구도 꾸지 않고 있던 꿈이 그들의 삶 속에 꿈틀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꿈을 꾸면서, 인내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를 끝내 받아 들었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도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우리의 소망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 있으셔도, 끝까지 인내하시면서 기도하십시오. 경건함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십시오. 그런 사람은 분명 시므온과 안나처럼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입니다. 의롭고 경건한 가운데 사셔서, 날마다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눈으로 보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렙에게서 배우라  (1) 2012.01.10
하나님의 능력  (0) 2012.01.02
율법과 복음은 어떻게 다른가?  (0) 2011.12.19
내가 증거자 요한이다  (0) 2011.12.12
주의 길을 준비하라  (0) 2011.12.05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2. 19. 04:54

2011 12 18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1:28-30, 5:17-20; 12:2, 3:1

제목: 복음은 마음(생각)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은 어떻게 다른가?)

 

시 한편을 읽겠습니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유명한 시입니다.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란이 피기까지 / 김영랑)

 

이 시를 분석하기 위해서 읽은 것은 아니고요, 마지막 이 구절 때문에 읽어드린 겁니다. “찬란한 슬픔이 봄”. 우리 말로 이러한 표현을 모순형용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역설적인 표현이라고 하죠. 여기서 모순되는 단어는 찬란한슬픔입니다. 슬픔이 찬란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모순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된 표현은 엄청나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참 좋은 시적 표현이고 기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러한 모순형용
, 역설적 표현을 알지 못하면 성경의 내용이 이상하게 해석됩니다. 작게는 이렇게 몇 문장이 모순형용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크게는 성경의 전체 내용이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성경의 가장 크고 대표적인 역설적 표현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모순형용입니다.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그 당시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이 보기에 전혀 지혜로운 것,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그야말로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만이 당하는 처절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그러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모순형용이고 역설적인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도 이러한 모순형용, 역설적인 표현을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두 구절은 서로 모순됩니다. 우선 마태복음 11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그리고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중에서 5 20절 말씀만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두 개의 말씀이 서로 모순형용, 역설적이라는 것을 알려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그 가르침은 우리가 흔히 산상수훈이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가르침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6장에 보면 유대인들의 종교적 3대 의무(구제, 기도, 금식)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이 나옵니다. 1) 구제 할 때 은밀히 하라는 것, 2)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서 하라는 것, 그리고 3) 금식 할 때 금식하는 것을 티 내지 말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이 어떻게 종교적 의무를 감당했는지 드러내 줍니다. 이들은 구제할 때 자신들의 구제행위를 통해 영광 받으려고 나팔 불고 다녔습니다. 이들은 기도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큰 거리, 즉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데서 큰 소리로 열심히 기도하는 척 했습니다. 이들은 금식할 때 자신들이 지금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엄청나게 티 내고 다녔습니다. 물론 이러한 모습들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이 얼마나 열심으로 그러한 일을 감당했는지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그들의 그런 행위를 보면서 부러워하거나 그들과 감히 말을 섞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열심에 비하면 자신들은 너무도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기에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은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의 업적을 쌓은 데만 치중했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기준으로 삼았고, 그것으로 자신들은 하나님의 큰 은총을 받고 하늘 나라에 들어간 의인이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즉 자신들의 의로운 행동을 구원의 근거로 삼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을 뒤쫓아 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죄해서 죄인을 만들어 버렸다는 겁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에 대한 예수님의 종합적인 평가는 마태복음 23장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서기관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란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위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23:3-7).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위선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에게서 종교적 짐을 떠안고 눌려 살고 있던 일반 서민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28-30).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일차적으로 인생의 짐이 아니라 종교적 짐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생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종교적 짐을 얹어서 가난한 자들을 못살게 구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철퇴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이렇게 쉽고 가벼운 것이라고 깨달아지는 듯 하면서도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두 번째 본문을 보면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율법사(서기관)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분명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지워 놓았던 종교적 짐을 벗겨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요즘 우리의 신앙생활로 따지자면, 예배에 열심히 참석해야 한다는 부담감, 교회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부담감, 직분에 대한 부담감, 십일조 등 각종 헌금에 대한 부담감, 윤리 도덕적인 삶에 대한 부담감 등을 덜어주시겠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왠 걸요? 오늘 말씀을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것을 죽도록 지켰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서기관들)보다 더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또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언제는 종교적 짐을 벗겨주시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보다도 더 무거운 종교적 짐을 우리에게 지우고 계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헷갈려 하는 율법과 복음의 문제입니다. 초대교회나 지금이나 이 문제는 여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 싸움의 흔적과 결과 그리고 결론이 바울 서신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로마서는 율법과 복음의 문제 대한 최대 격전장입니다. “율법과 복음의 문제에 대한 치열한 싸움 끝에 사도 바울은 복음의 승리를 외쳤습니다. 그것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서신서가 성경이 된 겁니다. 그것이 정통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초대교회에서 이미 끝나서 정통으로 인정되고 성경으로 받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율법과 복음의 문제는 끝나지 않은 미해결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집니까
?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성경(특별히 바울 서신)을 면밀히 읽고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율법이 더 눈에 들어오고 몸에 익히기 쉽기 때문입니다. 율법에는 마법과 같은 힘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만족, 자기 성취, 자기 확대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 의라고 하는데, 이것은 말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치 에덴동산 중앙에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와도 같습니다. 그야말로 율법에서 오는 자기 의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합니다. 그래서 이 유혹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복음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이것을 무 자르듯이 개념적으로 구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빗대어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마르다에게 율법을 대입해 보고, 마리아에게 복음을 대입해서 들여다보십시오. 그 이야기를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니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1:38-42).


마르다율법으로 마리아복음으로 대입해서 이 이야기를 보았을 때, 율법과 복음이 어떻게 다른지 구분이 좀 가십니까? 다만 여기서 조심할 것은 열심히 일하는 것을 율법, 아무 일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복음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무슨 일을 열심히 하고 안 하고는 율법이나 복음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어디에 관심이 있느냐를 염두에 두고 율법과 복음을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입해서 보셔야 합니다.

 

이것으로 조금 부족하고, 더 헷갈리고, 어려워하실지 몰라 한 가지 예를 더 들겠습니다. 두 가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A 가정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건유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건유의 아빠, 엄마는 매우 저명한 분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저명함에 걸맞게 이들은 자녀의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건유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건유가 원하는 것이나, 또는 건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아낌 없이 제공해 주었습니다. 어느덧 건유는 성인이 되어서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인이 된 건유는 아빠 엄마를 생각할 때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저명한 아빠 엄마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신 아빠 엄마였지만 건유는 늘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자신에게 잘 해주는 것 같고, 무엇이든지 부족함 없이 채워주는 아빠 엄마였지만, 건유가 느끼기에 아빠 엄마는 자신에게 마음을 두고 그러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아빠 엄마 본인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 거라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 큰 건유는 아빠 엄마한테 이렇게 불평할 때가 많았습니다. “아빠 엄마가 나한테 해 준 게 뭐 있어요?” 건유의 아빠 엄마는 이러한 건유의 불평을 들을 때마다 당황스럽고 불쾌했습니다. 그리고 마음 속에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어떻게 키웠는데……’

 

B 가정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찬유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찬유의 아빠 엄마는 그냥 평범한 분들이셨습니다. 찬유의 아빠 엄마는 일 하느라 시간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해 찬유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지 못하면서 아들을 키웠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찬유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찬유는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성인이 된 찬유는 자신을 키워주신 아빠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물론 아빠 엄마는 시간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시지는 못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럴 때마다 아빠 엄마를 원망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커서 생각해 보니, 아빠 엄마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을 모두 사주지 못하셨고,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할 수 있도록 해주시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언제나 아빠 엄마의 마음은 자신을 향해 있었다는 것을 찬유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찬유는 아빠 엄마에게 한 없이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찬유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빠 엄마에게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빠 엄마는 남들만큼 더 잘해주지 못해 마음이 더 미안했습니다.

 

율법과 복음이 어떻게 다른지 이제 좀 감이 오시는지요? A 가정은 율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고, B 가정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이 결정적으로 다릅니까? 그렇습니다. 마음이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 입니다. A 가정의 부모는 겉모양만 보면 마음이 자식을 향하고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그 마음이 자기 자신들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B 가정은 겉모양만 보면 마음이 자식을 향하고 있지 않은 것 같으나 실상은 그 마음이 자식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적인 신앙에 충실했던 그래서 일반 서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서기관들)의 신앙을 질타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A 가정의 부모처럼 열심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았으나, 실상 그 마음에는 자기 자신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들은 결국 하나님은 안중에 없고, ‘자기 의를 쌓는 일에만 치중한 것입니다.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드렸으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예수님 만나서 회개한 삭케오처럼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주님이 하시는 일을 위해서 자신의 전 재산을 절대로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죽어라 지켰지만,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안식일의 뜻은 알지 못한 채 안식일에 사람이 죽어가도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 죽어가는 사람을 향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어라 구제도 하고, 기도도 하고 금식도 했지만 절대로 자신의 전 재산이나 목숨을 내놓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높아지는 일을 위해서는 영혼도 팔아 먹었으나, 그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서기관들)을 질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23:12).

 

열심히 안 해서 문제 된 것이 아니라, 열심히 안 해서 예수님께 질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열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가지고 있는 자기 의에 대한 마법 같은 매력입니다. 율법에 매료된 사람은 자기 의를 쌓기에 여념이 없어집니다. 자기 만족과 자기 성취, 자기 확대에 휩싸이게 됩니다. 스스로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됩니다. 스스로의 의로움으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너희 의가 율법사(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열심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열심을 내도 방향이 잘못되어 있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좀 더디더라도 방향만 잘 잡는다면 문제 없다는 뜻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사와 바리새인처럼 열심으로 하되 올바른 방향을 향해 가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율법사와 바리새인처럼 열심을 내되 자기 의를 위해서 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도록 주일을 지키십시오. 그러나 자기 의를 위해서 지키지 마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십시오. 여러분, 헌금 많이 하십시오. 주님이 쓰시겠다 하면 전 재산이라도 바치십시오. 전 재산이 뭡니까? 목숨이라도 내 놓으십시오. 그러나 자기 의를 위해서 하지 마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십시오. 이렇게 주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놓는 믿음의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16:25). 구제도, 기도도, 금식도 할 수 있는 한 많이, 열심을 다해 하십시오. 그러나 자기 의를 위해서 하지 마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십시오.


삭케오를 보십시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났더니, 이전에는 자기 의를 위하여, 즉 자기 자신을 위하여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되어서 동족들에게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아가면서까지 악착같이 세금을 걷었는데, 이후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재산 절반을 내어놓고, 강제로 빼앗은 재산은 네 배를 더해서 돌려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바로 삭케오의 마음에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안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마음에 없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서기관들) 같으면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껏해야 남들에게 강제로 빼앗았던 부분만 겨우 내 놓았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복음의 차이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의 말씀은 우리를 삭케오처럼 결단케 합니다. 물론 이 결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온전히 깨달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겠죠. 예수님이 누구인지 히브리서의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2:2). 히브리서는 이러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권면하는지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3:1). 우리 말로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번역됐지만, 영어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Fix your thoughts on Jesus.” 이는 생각을 예수님에게 고정시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란 이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지 못하면, 우리의 하는 모든 일을 율법적인 일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열심을 내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일, 나의 의를 쌓는 일 밖에는 되질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열심이 그렇게 자기 의를 위한 허무한 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보물을 쌓은 귀한 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로 성화되려면 우리의 마음이 단단하게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음과 십자가와 못을 나누어 주고, 마음을 십자가(예수님)에 고정시키는 퍼포먼스를 한다.)

 

너희 의가 율법사(서기관)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볍게 듣지 마십시오. 율법을 잘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자이시니,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부터 우리는 실천해야 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십시오.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강제로 십자가를 졌던 것처럼, 나오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나와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하나님께 거룩하게 예물을 드리십시오. 거룩한 마음으로 하나님 주시는 직분을 사모하십시오(‘그까짓 것’, 이거 좋은 생각 아닙니다). 하나님 섬기는데, 이왕이면 하나님께 귀한 직분을 받는 것, 얼마나 영예롭습니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무흠하게 살도록 노력하십시오. 하나님 믿는다 하면서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오히려 조롱당합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바르게 사십시오.

 

그러나 이러한 율법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이나 율법사(서기관)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복음으로 무장된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보다 더 나은 의는 그들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 할 때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덧입을 때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의를 덧입지 않으면(칭의), 아무리 바리새인이나 율법사처럼, 아니 그들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덧입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되어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되어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으나, 그의 행실의 열매를 보면 압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다라는 야고보서의 가르침도 그래서 우리는 새겨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신앙과 복음신앙이 이렇게 헷갈리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속해서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아무쪼록 이렇게 마음을 예수님께 고정시키셔서 예수님의 의를 덧입는 참된 복음 가운데 사시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능력  (0) 2012.01.02
위로를 기다리는 자  (3) 2011.12.26
내가 증거자 요한이다  (0) 2011.12.12
주의 길을 준비하라  (0) 2011.12.05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는 하나님  (0) 2011.11.28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2. 12. 22:26

2011 12 1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요한복음 1:6-8, 19-28

제목: 내가 증거자 요한이다

 

우리는 세례 요한 John the Baptist’라는 명칭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에 대해서 매우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요한을 세례 주는 자로만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왜 세례를 주었습니까? 요한이 세례를 준 이유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임박한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무슨 정치적 상황이나 장소로 이해하기 쉽지만, 그것은 한 인물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인물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례 요한이라는 명칭보다는 증거자 요한 John the Witness’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져야 마땅합니다. 물로 세례를 주었던 증거자 요한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물 세례와 성령 세례는 다릅니다. 그러나 물 세례 없이 성령 세례가 임하지 않습니다. 물 세례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물 세례 없이 성령 세례가 없다는 뜻은 회개 없이 성령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머리에 물을 붓는(또는 몸을 물 속에 담갔다 올리는) 세례의식은 종교적 퍼포먼스가 아닙니다.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존재의 전향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머리에 백 번 물을 부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례의식이라는 종교적 퍼포먼스는 얼마든지 행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일어나는 그리스도를 향한 존재의 전향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교회에서 행해지는 세례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세례의식이 절기(부활절, 성탄절)마다 베풀어지긴 하지만, 존재의 전향은 세례의식을 베푸는 만큼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세례를 통해서 존재의 전향’, 즉 회개가 일어나면 그 때 성령세례가 베풀어집니다. 이것은 시간 상으로 또는 절차 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칭의와 성화가 시간 상으로, 절차 상으로 구분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편의상의 구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는 또 무엇입니까? 한국 교회는 성령세례에 대한 오해가 편만합니다. 이것도 부흥회 신앙에서 비롯된 것인데,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물 콧물 다 빼면서 토해낸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성령세례라고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거기다 한국인은 워낙 감정이 풍부한 민족이라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가 없으면 무엇인가 신적 체험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세례는 감정의 카타르시스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눈물 콧물 빼내며 겪는 감정의 카타르시스는 나훈아, 남진 오빠의 디너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성령세례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능력이 주어지는 겁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능력은 증거자 요한처럼 나는 아니다라는 자기부정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증언하러 온사람이라고 합니다. 무엇에 대한 증언이냐 하면, ‘에 대한 증언을 위해서 온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통하여 그 을 믿게 하게 하기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요한은 빛을 증언하러 온 사람이지, 그 빛이 아니라고 복음서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증거자 요한이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 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내서 예루살렘에서 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요한에게 와서 묻습니다. “네가 누구냐?” 이는 단순한 질문이 아닙니다. 정체를 밝히라는 질문입니다. 이들은 요한이 그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 또는 엘리야가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이들의 질문에 요한은 당당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엘리야가 아니다.”

 

이 대답이 쉬워 보이지만,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닙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을 일컬어 우리는 이라고 부릅니다. 연예인들을 다루는 기사에서 우리는 이러한 문구를 자주 접합니다. “자체 발광, 아무개 스타이처럼 인간은 스스로 빛나고 싶어합니다. ‘스타가 되고 싶어 합니다. “나는아니다가 아니라 나는이다가 되고 싶어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내서 예루살렘에서 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요한에게 지금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빛이오? 당신이 별(스타)이오? 당신이 그리스도요?”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질문에 우쭐해서 그렇다고 대답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빛으로, 스타로 살아가려 했을 겁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을 부추깁니다. 이렇게 하라고 꼬드깁니다. 우리보고 “‘이 되라 하고, 우리 보고 스타가 되라.”고 합니다. 이것은 태초부터 있어왔던 인간에 대한 유혹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것도 바로 아담과 하와에게 빛이 되라 하고 스타가 되라.”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게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3:5). 스스로 지혜 있는 자가 되어(스스로 빛이 되어), 하나님 없이도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라는 꼬드김이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이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삽니다. 그래서 그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그러한 유혹을 부추기는 시스템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타락했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제가 연예인이 되는 것은 나쁜 것이다. 그것은 타락한 일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을 하라고 부추기는 이 세상을 고발하는 중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내서 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꼬드기던 뱀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꼬드김과 시험에 굴하지 않고 증거자 요한은 당당하고 솔직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아니오!” 그리고 그는 자기 뒤에 올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일컬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존재의 전향이란
, 성령세례를 받는 일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나는아니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그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증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빛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빛날 수 있는 분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일이 회개(존재의 전향)이고 그것이 바로 성령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빛이신 그리스도에게로 향한 그리스도인은 분명 그 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천체에서 그것을 확인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도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합니다. 지구의 행성인 달도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까만 밤에 태양빛을 반사하는 달을 볼 수 있는 겁니다.

 

빛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눈이 시력을 갖는 이유는 빛 때문입니다. 빛이 없는 곳에서는 눈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불빛이라도 있으면 눈은 금방 그 빛에 적응해서 물체를 보게 만듭니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형광들을 껐을 때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경험을 해 보셨을 겁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나, 방 안에 있는 작은 불빛에 적응해서 다시 보이게 되는 경험을 해보셨을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밤낮으로 바라보며 그분의 빛을 이 세상에 반사시켜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태양처럼 밝게 빛나지는 않지만, 망망대해의 등대처럼 자그마한 불빛이 될 수는 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일수록 희미한 불빛은 더 빛나는 법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패배의식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뭘…’, ‘나처럼 신앙생활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어.’ 자기 자신의 초라한 신앙의 불빛을 보며 의기소침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작은 불빛이 이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을 밝혀 이 어두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눈을 보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빛나는 별이신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큰 빛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추시는 빛이십니다. 그분이 오시는 날에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얼굴과 얼굴을 대면해서 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힘을 내서 우리의 이 작은 빛을 비추는 일에 힘을 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된다는 것은 이 작은 빛을 세상에 비추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증거자 요한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증거자 요한만이 증거자 요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는 모두 증거자 요한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2. 5. 04:24

2011 12 4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40:1-11, 마가복음 1:1-8

제목: 주의 길을 준비하라

 

어른과 어린아이의 차이점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어른은 듣고 있는 것 같으나 듣지 않고, 어린아이는 듣지 않는 것 같으나 듣고 있습니다. 또한 어른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거나 또는 듣고 싶은 대로 듣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그대로 듣습니다. 그래서 어른 앞에서는 말을 가려서 해야 하고, 어린아이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설교를 듣고 나서 돌아서면 잊어버린다고 호소합니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설교를 듣는 것 같으나 듣지 않았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듣고 싶은 것만 듣거나 듣고 싶은 대로 들었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 그럴까요? 설교말씀을 나의 생명()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설교말씀은 나의 삶과 별로 상관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나의 생명()과는 별로 상관 없는 것이기 때문에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설교시간에 설교를 듣고 있는 것 같으나 실은 듣지 않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시죠. 지금 나는 부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음식을 만들고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런데 로비에서 어느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서 소근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음식 만드는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온통 신경이 그쪽으로 가게 됩니다. 듣지 않는 척 음식을 만들고 있긴 하나, 실상은 자신에 대해서 소근거리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죠. 자기 자신과 상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신경을 쓰는 겁니다.

 

믿음, 영성, 이런 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나의 생명()직접적으로 연관시키고 있는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느 사람을 가리켜 믿음이 좋다”, 또는 영성이 있다라고 할 때 이것은 그 사람이 신앙생활에 극성을 떤다의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극성을 떨면서 신앙생활을 해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생명()과 연관시키지 않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런 경우는 신앙생활의 초점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극성을 부리는 경우입니다. 비유하자면, 엄마가 아이의 교육에 대해서 극성을 부리는 이유가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엄마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그러는 경우와 같은 것이죠. 엄마는 자신이 못 배운 한을 아이에게 푸는 것이고, 아이의 성공을 통해서 대리만족 하려는 것이지요. 대개 이런 마음으로 아이의 교육에 대해서 극성을 부리는 엄마는 자기가 속상해 죽거나 아이를 죽음에 내몰거나 합니다.

 

신앙생활은 자기 만족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극기훈련도 아니고 극성 떨 일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의 일치를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생명과의 일치가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이시니까, 곧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생명()과 일치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저는 목회를 시작한 이래로 강단에서 계속해서 이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 교회력입니다. 그래서 저는 컬럼버스교회를 개척한 이래로 말씀선포와 교회 운영을 교회력에 맞추어 했습니다. 올해로 새로운 대림절을 맞아 6번째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교회력이라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섰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분위기는 교회력을 무시하는 겁니다. 교회력이라고 하면 대개 성탄절,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정도를 생각합니다. 그 절기들만 지키고 맙니다. 그리고 그 절기에는 명목상 감사헌금을 더 풍성이 내야 하는 것만 기억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력(절기)는 헌금내는 날로만 기억됩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으로 보여드리고 실천하려고 우리 교회는 일명 절기 헌금이라는 것을 따로 걷지 않습니다. 절기마다 헌금봉투를 따로 나누어드리지 않습니다.

 

한국교회가 교회력을 무시하는 다른 이유는 교회의 초점이 온통 부흥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부흥회신앙을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 당장 회심하고, 예수 믿고, 뜨겁게 성령체험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 나와서 지금 당장 눈물 흘리고 감격하는 것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교회력이 무의미합니다. 신앙의 형태가 뜨거운 체험중심 신앙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은 별로 무의미합니다. 신혼부부가 결혼해서 뜨거운 사랑만으로 결혼생활을 지속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이 뜨거운 사랑의 체험 이상이듯이, 그리고 결혼은 결국 환상이 아니라 일상이듯이, 신앙생활도 뜨거운 체험이상이요, 환상이 아니라 일상임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 교회력은 대림절기부터 시작합니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첫 번째 오심)과 재림(두 번째 오심)을 주제로 하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은 단순히 성탄절을 준비하는 절기가 아닙니다. 성탄절에 예수님께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그 사건을 준비하기 위해서 있는 절기가 아닙니다. 성탄절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절기가 아닙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사람됨)을 증거하는 절기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대림절로 시작되고 성탄절에서 정점에 이르는 이 시대의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휩쓸려 정작 중요한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약점을 안고 살아갑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들뜬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어떻게 잘 이용해서 돈을 얼마나 더 벌 수 있을까에만 관심을 갖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는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고 영성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돈이 나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그리고 그분의 인성은 나와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무관심, 믿음 없음, 영성 없음에 대해서 경고하고 경각심을 불어 넣어 줍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영적 각성입니다. 이들의 생명은 지금 위태롭습니다. 생명은 온데 간데 없고, 죽음이 편만합니다. 삶의 터전을 잃고 남의 나라로 끌려와서 사는데 거기에 무슨 생명의 기운이 있었겠습니까? 그저 죽지 못해 사는 것뿐이죠. 이들이 포로귀환에 대한 소망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회복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계속해서 그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70년 동안이나 이들은 포로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사람의 심리는 기대했던 것이 금방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기소침해지고 실망하게 됩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그렇게 의기소침하고 실망 가운데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장면입니다. 이들은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잃기 전, 수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우상숭배에 대한 지적과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라고 하는 메시지를 들었음에도, 이들은 끝내 하나님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생각하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들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이방신이었던 가나안의 바알, 아세라 같은 우상들이 자신들의 생명()과 더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고 포로신세가 되어서 고통 가운데 살다보니,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죠. 그 옛날 그토록 선지자들이 외쳤던 그 외침이 이제서야 귀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들은 생각했습니다. 왜 이렇게 우리가 치욕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바로 이들이 생명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렸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당연한 결론 같지만,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 아닙니다. 그 깨달음이 이사야서 40 2절 말씀에 이렇게 드러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이것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회개이기도 하지만, 소망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신들이 이렇게 바벨론 포로로 잡혀와 고통 가운데 살게 된 이유는 하나님을 저버린 것 때문이며 그래서 이들은 여호와의 손에 벌을 배나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벌을 배나 받았다는 선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 벌을 다 받았다는 희망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이제 노역의 때가 끝나고 죄악이 사함 받았으니앞으로 이들에게 일어날 일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복귀입니다.

 

말씀을 잘 보십시오. 이 일을 누가 이루십니까?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죽음과 같은 포로생활에서 생명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의 복귀는 다른 어느 누구가 아닌, 그들이 자신들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다고 생각해서 등한히 여겼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나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선포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리라.”

 

그 어느 것보다도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그야 말로 복음입니다. 생명 되신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생명을 다시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40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그 하나님이 이제는 눈에 들어옵니다. 이전에는 나의 삶(생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 하나님이 이제는 내 생명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눈에 들어오니, 그 하나님이 어떻게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는지 보입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40:11).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는 대림절기를 맞아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해야 합니까? 그 분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온통 그분을 맞이하는 일로 가득 차야 합니다. 이는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접고 산속으로 들어가, 또는 교회에 모여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날만 기다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재림신앙을 오용하는 이단들이나 저지르는 일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그 분 맞이하는 일로 온통 채우라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극성으로 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무엇인가를 하는 것으로 그분을 맞는 일에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일상을 온통 그분을 맞이하는 일로 가득 채우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마가복음에서 세례 요한이 목놓아 외치고 있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뉘우치는 행위가 아닙니다. 회개는 어떠한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전향입니다. 위에서 말씀 드린 용어로 다시 설명하면, 나의 생명()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는 겁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설명으로, 또는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끈임 없는 자기 성찰과 간구(기도) 끝에 오는 깨달음입니다. 이 말씀이 들리십니까?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1. 28. 06:20

2011 1127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64:1-9

제목: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는 하나님

 

삶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기다림이 있네.

우리네 삶은 시작부터

기다리고 있다는 말로 위로 받고
기다려 달라는 부탁하며 살아가네.
봄을 기다림이

꽃으로 피어나고
가을을 기다림이
탐스런 열매로 익어가듯

삶의 계절은
기다림은 고통, , 그리움이지 않은가?
기다림은 생명, 희망이지
.

우리네 삶은 기다림의 연속인데

어느 날인가?
기다릴 이유가 없을 때

떠나는 것이 아닌가?

우리네 가슴은 일생을 두고

기다림에 설레이는 것

기다릴 이유가 있다는 것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용혜원)

 

삶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위의 시와 관련해서 대답한다면, 삶이란 기다림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곳이 교회이고, 여기 모인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 기독교인의 삶은 기다림과 깊은 연관이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기다림이 없다면, 우리 기독교인의 삶은 참으로 권태로울 것입니다.

 

오늘부터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공통으로 쓰는 것은 태양과 달의 상관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달력이지만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기대와 오심,그리고 고난과 죽으심 부활하심, 그리고 승천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교회의 달력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은 태양도 아니고 달도 아니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교회력에 의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참으로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마디로 정리해서, 우리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고, 기다리면서 하는 모든 일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일종의 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시 중에서 제 가슴에 가장 와 닿는 구절은 제 2연입니다.

삶의 계절은
기다림은 고통, , 그리움이지 않은가?
기다림은 생명, 희망이지.

이 시를 쓰신 용혜원이라는 분은 목사님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기다림에 대해서 매우 신학적인 해석을 토대로 이 시를 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경험이 없는 일반 사람들에게 삶의 계절, 기다림은 그저 고통, , 또는 그리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기다림이란 바로 생명, 희망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경험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기다림이란 생명, 희망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사야서는 굉장히 광범위한 선지서입니다. 그것을 오늘 이 짧은 시간에 다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핵심만 이야기하자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담긴 40장 이후의 이사야서의 주제는 희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림절 첫 번째 주일에 이 부분을 우리는 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의 주제가 바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사야 선지자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느냐입니다.

 

사실, 오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매우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이야기 할 수 있고, 또 이야기 해야 하는 것은 희망 밖에는 없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절망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절망적일수록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듣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희망이 어떤 희망이냐는 것입니다. 희망도 희망 나름입니다. 거짓말로 드러난, 그야말로 더 절망에 빠지게 할 거짓 희망이냐, 아니면 진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진짜 희망이냐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서 엄청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그 옛날 다윗 왕조를 통해서 누리던 영광을 다 잃어버리고, 성전 파괴는 물론이요, 땅까지도 빼앗겨 버리는 비통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한마디로 삶의 근거를 모두 잃어버린 처지가 된 것입니다. 사실, 저부터도 삶의 근거를 모두 잃어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이 없어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난 때문에 고생을 해 보신 분들은 그래도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기서 삶의 근거를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은 사실 가난 때문에 겪는 고생을 훨씬 넘어서는 것입니다. 일제시대를 겪으신 분은 어쩌면 그것이 무엇인지 조금 이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 쓰신, “백범일지라는 책을 보면 일제시대에 우리 민족이 어떠한 고난을 겪었는지, 어떻게 우리 민족의 삶의 근거가 일제에 의해서 파괴되었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간접적인 이해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무튼, 절박한 상황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구원의 손길을 내밀면서 하소연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탄원기도라고 부릅니다. 우리도 살면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탄원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도, 절망적인, 그리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는 탄원기도가 저절로 나오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탄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고 탄원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위의 시 구절을 이용해서 다시 표현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고 탄원하는 것은 고통, , 그리움의 수준에 머물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사람의 탄원은 생명, 희망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은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는 분인데, 그 하나님의 강림 앞에서는 산들도 진동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떨지 않을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이렇게 경험합니까? 요즘은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어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이러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이해가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와 공의를 행하는 자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 얼마나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사느냐가 문제이고, 얼마나 공의를 행하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와 공의를 행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선대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6절 말씀이 전합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공의를 행하고 살지 않는 모습을 그려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다음 7절은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앙망하지 못하는가를 그려 보여 줍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이사야 선지자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 어떠한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여기에 선 저도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삶이 어떠한지를 일깨워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십니까? 여기에서 자유로우십니까? 당당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을 앙망합니까? 여기서 앙망한다는 말은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을 운영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사십니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내 시간에 맞추어서, 그리고 내 뜻에 맞추어서 내 삶을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살지 않다가, 7절 말씀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지 않고 살다가”, 이렇게 망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공의를 행하면서 사십니까? 구약성경에서 공의는 단순히 옳은 일을 말하지 않고, 언제나 약한 자와 결부해서 공의를 설명합니다. 소외된 자, 가난한 자, 약한 자, 억압받는 자를 얼마나 돌보면서 살아가느냐의 문제와 공의는 엮여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돌보려면, 나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고는 절대 그런 일을 행할 수 없습니다. 살아가는 이유가 나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주변의 어려운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착취의 대상이 될 뿐이지, 섬김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는 자, 그런 자는 공의를 행하지 않는 자입니다.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행한 모든 일은 사람들을 아프게만 했지, 사람들을 이롭게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6절의 말씀대로, 무늬만 의로울 뿐이지 실상은 더럽고 시들어 버린 잎사귀와 같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이스라엘이 지금 망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살지 않고, 공의를 행하지 않고 살다가 절망적인 상황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이 순간에 결코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절망 가운데 있을지라도, 희망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8절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이것은 매우 결정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해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희망입니까?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 그것도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작품(Masterpiece)라는 사실입니다. 작품은 작가의 인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작품은 작가를 말해줍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희망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절망과 고통의 상황 속에서 부정한 자와 같이 살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로움으로 우리를 다시 의롭게 해주실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9절에서 이렇게 탄원합니다.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참으로 하나님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엄청난 탄원입니다. 이러한 탄원을 듣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을 수 없으실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우리는 진흙입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은 창조주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넘어서는 말입니다. 토기장이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에 따라 우리를 빚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인격이 우리 안에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인격이 우리의 죄 때문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그것을 회복시키는 힘은 우리의 의로운 행동이나 우리의 의로운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내 의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를 구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낸 창조물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이요,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그분께서는 창조의 완성을 위해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완성은 이미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을 맞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더딜지라도, 기다리면서 고통스러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생명과 희망을 늘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입니다. 주의 백성은 주님을 앙망하는 자요, 공의를 행하는 자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과 희망 가운데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주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 아니겠습니까?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1. 21. 05:25

2011 11 20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에스겔 34:11-16, 20-24

제목: 그리스도는 우리의 목자요 왕이시다

 

에스겔은 주전 597년 제 2차 포로송환 때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예언을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죽습니다. 에스겔의 사명은 포로로 잡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절망 속에서 희망을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예언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에스겔 본문에는 메타포가 들어있습니다. 목자와 양이 그것입니다. 정황상 목자는 왕과 정치적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메타포입니다. 그리고 양은 그들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목자는 이스라엘의 왕들과 고관들을 가리키고, 양은 이스라엘의 일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에스겔은 이 메타포를 들어 이스라엘의 왕들과 고관들을 힐난하게 비판합니다. 그들이 왕으로서, 지도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해서 이렇게 백성들이 고생하고 수치를 당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직무를 유기했는지, 에스겔 34 3-4절 말씀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여기에서 정의를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왕과 고관들의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정의를 백성들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과 고관들은 정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자기들 뱃속만 챙기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을 전혀 돌보지 않고 백성들에게서 오히려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 불의한 일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흘러 온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사라진 나라, 그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것입니다.

 

내 양 떼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34:8). ‘노략거리’, ‘들짐승의 밥’, 이러한 표현들은 이들이 나라를 잃고 이방 나라의 포로 신세가 된 처절한 시련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듯이 이들에게 목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목자가 정의로운 목자, 선한 목자가 아니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죠.

 

목자(, 고관들)는 정의를 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목자가 행해야 하는 정의란 무엇일까요? 이는 단순히 옳은 일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가 행해야 하는 정의는 언제나 하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정의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정의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일을 바탕으로 해서 그들에게서 기대되는 반응을 가리킵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이스라엘의 목자(, 고관)는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했고,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했고,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했고,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했고,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을 뒤집어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연약함을 돌아보아 그들을 강하게 하셨고, 병들었을 때고 고쳐주셨고, 상한 자를 싸매주셨으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셨으며, 잃어버린 자를 찾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이라면, 이스라엘은 이것에 대한 기대되는 반을 보였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기대와 어긋나게 반응했다는 것이죠.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했어야 합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갈 때 그들은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당신의 종 모세를 보내어 바로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광야에서 헤맬 때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시며 인도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담대함과 용기를 주시고 그들을 물리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살진 송아지로 풍성한 열매로 당신의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부터 마땅하게 기대하는 것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비웃는 듯이 그들은 정의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불의한 일을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신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요 불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배역하고 패역한 당신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크게 실망하셨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당신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목자가 되어 당신의 백성을 찾아내고 건져내서 그 땅으로 되돌아오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역사적으로 이는 포로귀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희망을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셔서 회복시켜 주신다니 말입니다. 이제 이들은 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목자와 양의 메타포는 신약시대로 넘어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동안은 당신이 세우신 종들을 통해서 당신의 정의를 행하셨는데, 이제는 당신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정의를 세우십니다. 참된 목자, 선한 목자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십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아나선 목자의 비유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사명을 드러내십니다.

 

신앙은 이것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실증적으로 체험하고 실천하는데서 신앙이 강화됩니다. 이것을 알았던 신앙인은 시편의 95편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것이 남의 노래로 다가오는지, 자신의 노래로 다가오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니라”(시편 95 7).

 

이와 비슷한 신앙고백은 성경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시편 23편도 그에 대한 고백이고, 누가복음 15장과 요한복음 10장에서도 이 고백이 이어집니다. 시편 23편은 이러한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누가복음 15장에서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돌보고 기다리시는지 보여주고,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양과 선한 목자의 비유를 통해서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줌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도대체 누구의 고백입니까? 이것은 그리스도를 목자요, 왕으로 인식한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처럼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만약 그들처럼 그리스도를 목자요 왕으로 깨닫고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의 입술에서는 이와 동일한 고백이 흘러나오지 않을 수 없고, 이보다 더 귀한 고백을 찾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목자요 왕으로 고백하는 이 고백이 우리의 삶을 그의 양의 삶으로, 그의 백성의 삶으로 이끄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입술로는 그리스도를 목자요 왕으로 고백하면서 목자를 따르지 않고 왕을 거슬른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의 양도 아니고 백성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은 바로 이렇게 표리부동한 삶에서 왔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목자이시고 왕이신 그리스도의 양으로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그가 행하신 일에 근거해서 기대되는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 위에서 이것을 일컬어 정의(Justice, Mishpat)라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기대되는 행동은 언제나 약자와 연관 됩니다. 성경에서 약자를 가리킬 때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부류는 언제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공격이 들어오거나 착취가 들어오면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당할 수 밖에 없는 부류들입니다.

 

지금 시대에는 돈 없고, 빽 없고, 못 배운 사람들이 그런 취급을 당합니다. 돈 없다고 무시 당하고, 빽 없다고 착취 당하고, 못 배웠다고 구박 당하고.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죄성은 자기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화풀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돈 많고 빽 많고 많이 배운 사람들에게 당한 설움을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푸는 것이죠. 그래서 폭력은 노미노 현상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윗물이 맑아야 하는 겁니다. 위에서 설명드렸듯이,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바로 윗물이 맑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목자인 왕과 고관들부터 타락하다보니, 거기서부터 폭력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모든 나라가 타락하고, 가장 밑에 있는 부류(고아, 과부, 나그네)는 고통 속에서 울부짖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죠. 그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울음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신 겁니다. 그 울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정의이고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왜 우리의 목자이고 왕인지 이것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높고 높은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인데도 불구하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저 윗 선에서부터 내려오는 폭력의 도미노 현상을 온 삶으로 견뎌내야 했던 소외된 자들(세리, 창녀, 어린 아이들, 여인들)과 자신을 동일하게 여기시고, 결국 힘 있는 자들에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 땅에 있는 고통스럽고 아픈 울부짖음을 다 끌어 앉으시고, 그렇게 아프고 고통스럽게 하는 폭력()의 도미노 현상을 끊어내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세상의 목자들(, 고관, 대통령, 정치인)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를 가리켜 선한 목자’, ‘왕 중의 왕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런 그리스도를 목자로, 왕으로 고백하며 섬기는 우리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자신이 가진 힘(power)로 누군가를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 힘으로 어려움에 처한 자를 구원하는데 쓰십시오. 그것이 바로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목자요 왕이시다라는 고백을 온전히 깨닫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목자요, 왕이십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1. 14. 05:15

2011 11 1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사사기 4:1-7

제목: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사사기의 역사는 출애굽 직후의 사건을 담고 있지만, 사사기의 기록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행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만의 독특한 역사적 관점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을 일컬어 신명기사관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이 역사관이 등장을 하는데, 그 내용은 매우 단순합니다. 즉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단순해 보이지만, 이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능력으로 무엇이 순종이고 무엇인 불순종인지,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벌인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온전히 하나님의 입장에서 타당한 역사관이지, 우리 마음대로 재단할 것이 못됩니다. 우리 인간의 상식과 우리 인간의 눈을 따라 순종과 불순종, 복과 벌을 판단하면 거기에는 구원이 아니라 억압과 폭력이 난무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에서 발견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십자가 처형에 처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신성모독을 하는 것만큼 불순종한 행동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만 보더라도 소위 신명기사관이라는 것이 단순해 보이긴 해도 그렇게 단순한 역사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자신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셨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잊어버리셨는가?” 나라가 망하고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 왔다는 이 사실은 명백히 벌이었습니다. 그들이 붙들었던 신명기사관에 의하면 그들이 이렇게 수치스러운 포로의 벌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바벨론 포로생활은 분명 하나님의 징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진정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시고 잊으셨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희망을 찾고 싶었습니다. 온 존재를 다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믿고 싶었습니다. 물론 자신들이 믿는다고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대로 움직여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돌아봐 주시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죠. 이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사사시대에서 발견합니다. 사사시대의 역사를 면밀히 관찰해 보니 그때도 지금과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했을 때, 절망에 빠져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간절히 바라고 울부짖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역사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일정한 패턴(Sin-Downfall-Outcry-Redemption)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저버립니다. (Sin) 2. 주님께서 그들을 적군의 손에 넘겨버리십니다. (Downfall) 3.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며 울부짖습니다. (Outcry) 4.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적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평강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Redemption)

 

신명기사관에 의해서 씌어진 대표적인 성경이 사사기서와 열왕기서입니다. 사사기서와 열왕기서를 비교해 보면 쌍둥이 같습니다. 사사에서 왕으로 그 주인공만 바뀔 뿐이지 결국 사사기서나 열왕기서나 위의 네 패턴 속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굴러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신명기사관에 의해서 역사를 바라봤던 포로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왜 이렇게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된 것이죠.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저버렸나이다.”

 

사사기서와 열왕기서는 그것을 면밀하게 보여줍니다.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범죄했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저버렸는지 보여줍니다. 이렇게 들춰내면 자신들에게 수치 밖에 안 될 역사를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움을 당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를 저 깊은 곳에서부터 되돌아 보기 위함입니다. 병을 감추면 치유 할 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진단해야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이들이 왜 이렇게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있는지, 부끄럽지만 자신들의 모습을 발가벗길 때 이들은 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말씀도 자신들의 수치를 드러내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위에서 말한 패턴의 첫 번째 부분에 해당됩니다. 이어서 읽어봅니다.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손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위 패턴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이어서 읽어봅니다.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위 패턴의 세 번째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위 패턴의 네 번째 부분에 해당됩니다. 패턴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은 간략하게 묘사되지만, 네 번째 부분은 길게 묘사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들을 어떻게 구원해주시는지를 보이기 위함입니다. 이 부분이 사사기를 이루고 있는 각 이야기들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구원해주셨는지 자세하게 기록하는 이유는 흥미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읽으면서 재미 있으라고 그렇게 자세하게 흥미진진하게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거기에서 희망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무슨 희망입니까?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우리가 울부짖을 때, 즉 참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 구원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신명기 사관을 바탕으로 역사를 기록하면서 이들은 희망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결국 이들은 치부를 드러냄으로 부끄러움을 당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구원의 희망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고통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 부르짖음은 보통 부르짖음이 아니라 온 존재가 구원을 갈망하면서 부르짖는 영혼의 울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시편 123편에서 발견합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지금 우리가 읽은 이러한 시편의 울부짖음은 아무에게서나 나오는 가벼운 울부짖음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 나오는 영혼의 울림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당신에게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면서 당신의 백성이 고통 가운데서 영혼의 울림을 통해 당신을 찾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가벼운 일이 아니라, 모든 영혼을 걸어야 하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벼운 외침이 아니라, 온 영혼을 걸고 외치는 울부짖음 속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겁니다. 그러한 영혼의 울림이 나올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겁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가 보는 성경의 역사는 이스라엘이 결국 그 죄의 악순환을 끊어내지 못하고 망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의 역사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역사는 온 인류의 역사를 대표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온 인류는 스스로 죄의 악순환을 끊어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고통 가운데 처해진 상태로 멸망하고 마는 것일까요?

 

우리가 오늘도 이렇게 예배의 자리에 나와 바라보는 저 십자가는 이 질문에 대답합니다. ‘아니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망 가운데 처해져 멸망 받을 존재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새로운 희망을 얻은 새생명의 존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온 인류를 고통 가운데 처하게 하는 죄의 악순환을 십자가에서 끊어내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죄의 악순환을 끊어내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악순환 가운데 처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싸우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싸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우리는 연약한 존재라 죄와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싸우기 위해서 저 전장에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모여서 이렇게 예배 드리고 있는 겁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며 찬양하고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를 자꾸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죄와 맞서려 하지 마십시오. 죄와 대항해서 이기겠다는 교만을 버리십시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멸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일컬어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구원 받았습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는 하나님  (0) 2011.11.28
그리스도는 우리의 목자요 왕이시다  (0) 2011.11.21
소망  (0) 2011.11.07
십자가는 면죄부가 아니다  (0) 2011.10.31
무엇이 죽어야 하는가?  (0) 2011.10.25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