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2022. 11. 13. 04:06

저항이 필요한 시간

 

예수께서 우셨다.

   그리고 그는 울면서 애통하는 자들과 함께 영원히 함께 하셨다.

   그는 모든 시간에 걸쳐 계시며,

   이 우시는 예수는,

   울고 있는 자들을 그의 팔로 안아 주시며 말씀하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는 우리는 자들과 함께 계신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God-with us)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우셨다.

(앤 윔즈, 『슬픔의 노래』, 24쪽)

 

하나의 죽음이 발생하면 하나의 우주가 사라진다. 그런데, 떼죽음이 발생하면 우주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간은 살면서 숨쉬는 것만큼 죽음을 많이 경험한다. 죽음을 경험한 인간은 무기력에 빠지거나 불가지론에 빠지기 십상이다. 죽음을 경험하면 인간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왜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지’ 알지 못해 무지의 심연으로 추락한다. 무엇이 이렇게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인간의 손을 잡아줄 수 있을까? 죽음은 이렇게 인간에게 불안과 공포, 그리고 고통을 안겨준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많은 것을 인간에게 부정의 형식으로 남긴다.

 

미국의 계관 시인, 앤 윔즈가 쓴 『슬픔의 노래』에 보면, 그녀의 슬픔을 담은 시, 즉 탄식의 시편들을 쓰도록 격려해준 월터 브루그만의 간략한 시편 해제가 담겨 있다. 시편에 대한 아주 짧은 해제이지만 거기에는 시편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강력한 교훈을 담고 있다. 브루그만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아마도 이스라엘의 가장 독특하고도 생생한 믿음의 양식인 탄원과 푸념은 우리를 ‘저항의 영성’(spirituality of protest)으로 인도한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대담하게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옳은 것은 아님을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모든 것이 괜찮은’ 척하며 우리가 취하는 자기 부인의 쉬운 방식에 반대하는 것이다”(17쪽).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앞에서는 고분고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오해하는 경우 중 하나다. 실제로 시편을 보면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고분고분하지 않다. 욥기서에서도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욥의 고분고분한 모습보다는 욥의 저항하는 모습이다. 시편의 시인들도 욥도 자신들에게 발생한 죽음의 경험 앞에서 고분고분하지 않다. 그들은 저항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저항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에게 발생한 고통스러운 일들의 원인이 우리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쉽게 인정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시편의 슬픔 공동체는 “죄를 고백하기를 반항적으로 거부하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불의에 대하여 책임지기를 거부한다”(17쪽). 시편의 슬픔 공동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최고의 영성은 ‘저항의 영성’이다. 즉 그들은 “실패한 것과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것 그리고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시킬 줄 안다”(17쪽). 즉, 여기서 말하는 저항의 영성은 하나님을 향한 저항의 영성이다. 우리에게 발생한 고통스러운 일에 대하여 하나님에게 따져 묻는 것이다.

 

떼죽음의 고통이 발생한 대한민국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치쇼와 정쟁만 난무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는 자들과 그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자들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지혜를 성경의 슬픔 공동체로부터 배운다. 이미 존재하는 슬픔 공동체에 들어가 그들의 언어를 통하여 우리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슬픔의 언어는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저항’이다. 그 저항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치유와 회복, 그리고 정의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솟아오를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22. 2. 15. 09:34

[시론] 허수경의 시 ‘물을 좀 가져다주어요’ – 포기하기엔 너무도 아픈

 

물 좀 가져다주어요

물은 별보다 멀리 있으므로

별보다 먼 곳에 도달해서

물을 마시기에는

아이들의 다리는 아직 작아요

 

ㅡ 허수경의 시 ‘물을 좀 가져다주어요’ 부분,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에 수록

 

허수경의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은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한 인간이 쓰는 反전쟁에 대한 노래”다.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은 그만큼 전쟁의 참상을 알아버렸다는 뜻이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시인은 어떻게 전쟁의 참상을 알게 되었을까. 시집에는 곳곳에 고고학 발굴의 현장 묘사가 담긴 시가 있다. “에이디 2002년 팔월 새벽 여섯 시 삽으로 정방향으로 땅을 자른다, 비씨 2000년경 토기 파편들, 돼지뼈, 염소뼈가 나오고…”(‘시간언덕’ 부분).

 

독일로 건너가 고고학을 공부하며 현장에서 땅을 파면서 시인이 대면한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의 참상이었다. 땅을 파고 들어가다 보면 ‘파괴층’이라는 고고학적 지층의 끝이 나온다고 한다. 한 문명이 끝나는 곳에서 발견되는 마지막 층이 파괴층이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땅을 더 깊게 파고 들어가면 이 파괴층이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지층을 파괴층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거기에는 인류의 전쟁과 살육의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인류는 끊임없이 전쟁을 통해서 서로를 죽이고 죽는 역사를 반복하는 절망의 존재라는 뜻이다.

 

전쟁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또는 최후의 폭력이다. 전쟁은 폭력의 바다라고 부를 수 있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아감벤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전쟁은 궁극적 ‘예외상태’가 발생하는 비극의 시간이다. 정상적인 게 하나도 없는 시간, 인간의 마음도 육체도, 안과 밖으로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는 시간, 무엇보다 살인(남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 정당화되는 시간이다. 전쟁은 그야말로 인간성이 포기 당하는 최고의 절망적인 시간이다.

 

땅을 파내려 가다 발견하는 파괴층을 보면서 시인이 상상하는 것은 그 땅에서 농사를 지었을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그곳에 감자를 심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땅에는 아직 감자의 시간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 결국 전쟁터에 끌려 나가는 군인으로 성장하고 만다. 군인이 되고 싶었던 아이는 없었지만 전쟁은 그 아이들을 모두 군인으로 만들었다. 누가 별보다 멀리 물을 길러 가기에는 아직 연약한 다리를 가진 아이들에게 그러한 폭력을 휘둘렀을까. 물을 마시고 싶었던 아이들에게 누가 칼과 방패를 쥐어 주었을까.

 

넷플릭스에서 얼마 전에 공개된 <지금 우리학교는> 우리 시대의 아이들이 어떤 폭력에 놓여 있는지를 좀비 장르를 통하여 형상화시켜 잘 보여준다. 우리 시대의 전쟁은 총칼을 들고 하는 전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전쟁의 시기와 평화의 시기가 따로 있지 않고 삶 자체가 전쟁터로 변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세상은 누가 만들었는가. 아감벤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 시대는 ‘예외상태’가 일상화되었다. 우리는 파괴층이 일상화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고고학을 공부하면서 파괴층의 반복 순환이 인류의 역사라는 비극적인 진실을 마주하면서도 시인이 희망을 포기하지는 이유는 삶을 포기하기에 우리는 너무도 너무도 아픈 역사를 지녔기 때문이다. 아프기만 한 삶과 역사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너무도 아프기에 우리는 끝까지 희망을 놓을 수 없다. 물은 별보다 멀리 있고 우리의 다리는 연약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별보다 먼 물에 도착하여 물을 마시게 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22. 1. 12. 09:43

[시론] 장수진의 시 ‘2016 여름, 연우소극장’ – 불의의 가위에 맞서는 신앙의 주먹

 

인간을 파멸시키려거든 첫째로 예술을 파멸시켜라. 백치들을 고용하여 차가운 빛과 뜨거운 그림자로 그리게 하라. 가장 졸작에 제일 높은 값을 주고, 뛰어난 것을 천하게 하라. 그리하여 무지의 노동이 모든 곳에 가득 차게 하라.

 

ㅡ 장수진의 시 ‘2016 여름, 연우소극장’ 부분, 시집 <사랑은 우르르 꿀꿀>에 수록

 

지난 정권 때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소위, 예술검열이 그것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립국악원 등 공공기관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특정 연출가를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거나 그 연출가의 작품 공연을 취소하는 일이 있었다는 게 세상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장수진의 시 ‘2016 여름, 연우소극장’은 바로 그 사건에 대한 ‘저항시’이다. 위의 인용한 구절은 예술검열을 주도한 관료들의 비뚤어진 정신세계를 묘사한 것이다.

 

그 당시 예술인들은 ‘예술검열’ 사태에 맞서 ‘권리장전 2016_검열각하’ 프로젝트를 구성하고 2016년 6월 9일부터 10월 30일까지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20개 극단의 참여로 21개의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그때 소극장 문 앞에는 이런 포스터가 붙었다. “검열의 가위에 맞서는 연극의 주먹”. 예술인들의 저항 문구답게 매우 창의적이고 위트 있는 문구였다. 장수진의 시는 그때의 저항을 ‘매미와 개미’를 주연으로 해서 마치 연극 한 편을 상영하는 듯 묘사하고 있다.

 

시에는 검열 당국을 향한 저항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끝내 나를 죽일 셈인가 / 이유가 없다는 걸 알고 있네 / 날개를 가진 내가 친구와 함께 땅을 기어가는 것이 / 그리도 불편한가 / 그러나 너의 열등감은 / 너와 나를 함께 죽일 것이다.” 국가는 정치적인 이유로 불편한 예술인들을 죽이려 들지 모르지만, 그 행동 자체가 결국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하게 될 거라는, 예언자적 메시지가 여기에 담겨 있다.

 

우리가 저항해야 할 일은 일제강점기나 군사독재 시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저항시를 쓰는 일은 이육사나 김수영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다. 저항시 쓰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저항은 계속되어야 한다. 신앙은 저항이다.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한국역사의 밑에 숨어 흐르는 바닥 가락은 고난'이라고 말했듯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신앙을 갖는 이유는 우리를 고난으로 밀어 넣는 존재(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에 대하여 저항하기 위함이다.

 

시인은 시에서 “인간을 파멸시키려거든 첫째로 예술을 파멸시켜라”라고, 예술가 답게 말하고 있다. 신앙인은 신앙인의 관점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파멸시키려거든 첫째로 신앙(종교)을 파멸시켜라.”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어느 시대든 불의한 통치 세력은 종교를 탄압했고 예술을 검열했다. 그것이 인간성을 파멸시켜 자신들의 통치를 용이하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통치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성이 훼손되고 문화가 쇠퇴하며 나라가 망해 가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신앙인(종교인)과 예술인에 대한 탄압이 가장 먼저 자행되었다. (또는 신앙인과 예술인의 타락이 두드러졌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신앙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는 자칫 물질의 복을 받는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 모든 것의 가치가 돈으로 환원되는 세상만큼 짐승 같은 세상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요즘의 자본주의를 ‘야수 자본주의’라 부르지 않는가. 야수에 물려 죽는 어처구니없는 삶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신앙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갖는 데서부터 시작한다고, 나는 믿는다. 신앙은 저항이다. 인간성을 파괴하는 그 어떤 존재에 대해서 저항할 줄 아는 사람이 신앙인이다. 신앙인은 ‘불의의 가위에 맞서는 신앙의 주먹’을 내는 자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21. 12. 31. 05:21

[시론] 박경리의 시 ‘문필가’ – 그래야 그게 설교다

 

붓끝에 / 악을 녹이는 독이 있어야 / 그게 참여다

붓끝에 / 청풍을 부르는 소리 있어야 / 그게 참여다

사랑이 있어야 / 눈물이 있어야 / 생명 / 다독거리는 손길 있어야 / 그래야 그게 참여다

 

ㅡ 박경리의 시 ‘문필가’ 전문, 시집 <우리들의 시간>에 수록

 

문학평론가 조연정은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에 대한 평론에서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일상적 소통을 위해서든 심오한 진리의 전달을 위해서든 모든 인간이 점차 기능적으로 완벽한 말만을 추구할 때, 말의 효용성에 무심한 채 그 효용성을 제외한 다른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집중하고 있는 자가 바로 작가이다”(138쪽).

 

일상의 기능어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시 읽기'는 쉽지 않은 과제이다. 기능어를 사용하여 시를 쓰는 사람들의 시는 그나마 읽기 어렵지 않으나, 시는 원래 기능의 언어가 아닌 존재의 언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밥을 먹는다'는 기능어로 읽힐 수 있다. 밥을 먹는 기능적인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을 먹는다'라는 표현은 존재어이다. 현실에서 어둠을 먹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둠을 먹는다'는 말은 '밥을 먹는다'는 말보다 인간 존재를 더 깊이 드러내 주고 보여준다.

 

'시 읽기'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들은 기능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어를 사용한다. 시의 언어는 존재의 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 존재의 언어로 씌어진 시를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그것이 존재의 언어로 씌어졌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너무도 기능어에만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우리가 일상에서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얼마나 무관심하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박경리의 시 ‘문필가’는 작가의 언어는 어떠한 존재를 담아내야 하는지 명료하게 보여준다. ‘악을 녹이는 독’, ‘청풍을 부르는 소리’, ‘사랑과 눈물’, 그리고 ‘생명을 다독거리는 손길’이 붓끝에 묻어나야, 비로소 그것이 작가의 글이고, 작가가 세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이러한 작가의 글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기능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존재의 언어이다.

 

존재의 언어를 사용하는 시를 읽는다는 것은 존재의 낯선 세계로 들어가 존재를 끌어안는 행위와 같다. 낯설기만 한 존재의 언어, 시를 읽고 또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존재의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 다가오는 존재를 경험하게 된다. 물론 존재의 언어인 시를 아무리 많이 읽어도 존재의 언어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언어는 영원히 낯설 수밖에 없다. 이것이 기능어와 존재어의 결정적인 차이다. 기능어는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낯설지 않지만, 존재어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세상에서 기능어로 담아내기 가장 어려운 존재는 무엇일까? 당연히, 하나님일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절대 기능어로 담아낼 수 없다. 존재 그 자체이신 하나님은 존재어로만 겨우 담아낼 수 있을 뿐이다. 존재어로만 겨우 담아낼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설교란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이라 말한다. 문득 박경리의 시가 이렇게 바뀌어 보인다.

 

말끝에 / 악을 녹이는 독이 있어야 / 그게 설교다

말끝에 / 청풍을 부르는 소리 있어야 / 그게 설교다

사랑이 있어야 / 눈물이 있어야 / 생명 / 다독거리는 손길 있어야 / 그래야 그게 설교다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21. 5. 9. 08:26

[시론] 장수진의 시 ‘서울의 혜영이들’

 

혜영아 밥은 먹고 다니니

엄마 메시지 치지 마세요

내 시를 읽어드릴 수 없어요

나는 오늘 밤에도 바람에 스치우는 별을

찢어버리는 년이에요

우리의 우울을 합치면

껍질 벗긴 바나나로도

서로 찔러 죽일 수 있을 거에요

 

ㅡ 장수진의 시 ‘서울의 혜영이들’ 부분, 시집 <사랑은 우르르 꿀꿀>에 수록

 

1980년대 대학생들의 최고 키워드는 '데모'였다. 1990년대 대학생들의 최고 키워드는 '취업'이었다. 현재 대학생들의 최고 키워드는 '생존'이다. 198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낭만'이 있었고, 199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꿈'이 있었다. 현재 대학생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한국은 '헬조선'이라 불린다.

 

1997년 IMF 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왕은 '금융자본'이다. 지금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자본(돈)'이 세상의 왕노릇을 하고 있는 시대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자본이 우리에게 대항해야 할 '적'으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병철은 마르크스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자본은 자신의 번식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착취하는 것이다. 자유 경쟁 속에서 자유롭게 해방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자본이다"(심리정치 13쪽).

 

신자유주의 체제가 무서운 이유는 눈에 보이는 적이 없다는 것이다. 넘어야 할 산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 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해야 한다'는 외적 강제 대신 '할 수 있다'는 내적 강제를 통해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자기 착취를 하게 끔 유도한다. '할 수 없다'며 내적 강제인 '할 수 있다'에 저항하는 자는 무능력한 사회의 낙오자로 전락하고 만다.

 

요즘 대학생들은 모여서 ‘데모’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공공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모여서 ‘꿈’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넘어야 할 산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따로 각자 알아서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자기계발’에 힘을 쏟을 뿐이다. ‘할 수 있다’는 자기 동기,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아는 신자유주의적 주체이다. 즉, 신자유주의 체제에 묶여 있는 주체이다. 한병철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목적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심리정치 11쪽). 여기서 존재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무한한 자유 경쟁의 토대를 만들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고 오히려 노예의 상태에 놓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개개인이 고립되어 있어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을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이다”(같은 책 12쪽). 결국 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현할 기회를 박탈당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개인은 우울할 뿐이다.

 

시인은 신자주유주의 주체에 ‘혜영’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 주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서울에는 ‘혜영이들’이 가득하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 혜영이들의 ‘슬프고 우울한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자본주의가 몰려온다. 슬프고 우울한 감정이, 그것은 블루스…”(백색 숲의 골초들). 이 우울한 주체, 혜영이들은 “오늘 밤에도 바람에 스치우는 별을 찢어버릴” 수밖에 없다. 누가, 어떻게 ‘혜영이들’에게 시를 다시 읽을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21. 4. 18. 08:06

[시론] - 황인숙의 시 ‘떨어진 그 자리에’

 

언제까지라도

떨어진 그 자리를 지킬 고양이였는데

어떤 모진 발길이 쫓아버렸을까

부디 그 아가씨가 데려간 것이기를!

아, 나도 떨어뜨려버린

그 고양이

 

ㅡ 황인숙의 시 ‘떨어진 그 자리에’ 부분, 시집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에 수록

 

이야기는 화장을 하다 떨어뜨린 화장수 뚜껑을 찾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바닥에 떨어진 뚜껑을 찾으려 이리저리 헤매다 결국 찾아낸 뚜껑. 주우려다 “떨어진 그 자리에” 있는 뚜껑을 보며 시인은 “지난 가을 늦은 밤”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후암동 종점에서 시인이 본 것은 “문 닫힌 가게 앞에 가만히 엎드려 있는 노란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왜 풀 죽은 얼굴로 가만히 엎드려 하염없이 찻길을 지켜보고 있을까? 시인의 짐작은 그 고양이가 누군가에 의해 유기된 것에 이른다. “누군가 차를 몰고 지나가다 그 자리에 떨어뜨리고 쌩하니 가버렸나 봐.”

 

어떤 아가씨가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을 보고 지나칠 뿐 하루의 일과로 인하여 피곤한 시인이 가엾은 고양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으로 고양이를 지나쳐 시인은 집에 이르러 깊은 잠에 빠졌다. 동틀 때 잠에서 깨어나 시인의 머리를 가장 먼저 스치고 지난 것은 어젯밤 그냥 지나쳐버린 그 가엾은 고양이였다. 그래서 시인은 “가책에 싸여 달려갔다.” 그러나,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그 고양이는 떨어진 그 자리에 더 이상 있지 않았다. 누가, 어떤 모진 발길이 “떨어진 그 자리를 지킬 고양이”를 쫓아버렸을까?

 

베네딕도(Benedict of Nursia) 성인의 '정주(Stabilitas)'라는 개념이 있다. 정주란 자기 자신 곁에 있는 것, 즉 자신의 암자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 사막 교부들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책에 이런 말이 있다. "암자에 머무르며 너 자신과 노동에 집중하여라. 밖으로 나가는 것이 조용히 앉아 있는 것만큼 너의 성장에 이로움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화도 나온다. 한 수도승이 아르세니오스 원로에게 말했다. "저는 금식도 못하고 일도 못하니 나가서 병자라도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괴롭습니다." 그러자 거기서 악의 싹을 알아본 스승은 그에게 말했다. "가서 일하지 말고 쉬면서 먹고 마시고 잠을 자거라. 그러나 암자를 떠나지는 마라!"

 

무슨 일을 하든 한 곳에서 오래 머무는 일은 일종의 수행처럼 여겨져 왔다. 인류는 오랜 세월동안 한 곳에 정주하여 머무르며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그러한 것을 허용치 않는다. 모든 것이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흘러간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현상을 일컬어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라고 불렀다. 사회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액체처럼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그러한 ‘안정적인 삶’의 향수에 젖어, 액체처럼 유동하는 사회를 힘들어 하며 견딘다.

 

더군다나 느닷없이 불어 닥친 바이러스 팬데믹 현상으로 인하여 삶의 안정성은 더 위협받고 있다. 비즈니스가 묻을 닫아야만 하는 현실, 다니던 회사를 그만 다녀야 하는 현실, 그래서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한숨 짓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현실 속에서 우리 모두는 불안에 떤다. 문닫는 교회가 많아지고 있다는 소식, 목회를 그만 두고 다른 직업을 갖는 목회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 또한 마음을 아프게 한다. 떨어진 그 자리에서 자리를 지키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지키던 자리를 떠나야만 한다는 현실 앞에서 “떨어진 그 자리를 지킬 고양이였는데 어떤 모진 발길이 쫓아버렸을까”라며 가슴 아픈 질문을 던지는 시인의 문장을 보며, 떨어진 그 자리를 신실하게 지킬 사람들이었는데 어떤 모진 ‘발길’에 의해 그 자리에서 쫓겨난 모두가 “부디, 이 어려운 시대를 잘 살아내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21. 3. 18. 06:09

[시론] 강성은의 시 ‘어떤 나라’

 

어떤 나라에서는

아무도 살지 않는데

날마다 조종(弔鐘)이 울렸다

(강성은의 시 ‘어떤 나라’ 부분, 시집 <단지 조금 이상한>에 수록)

 

시인이 펼쳐 놓는 ‘어떤 나라’는 마치 마르크 폴로의 여행기 같다. 시 속에 펼쳐진 여섯 나라의 풍경은 모두 각자의 특색을 지니고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상하다, 이해가 안된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슬프다. 시인이 경험한 첫 번째 나라는 ‘청바지 입는 것이 금지된 나라’다. 거기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청바지를 밀수입하면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바지를 입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은 막지 못하는 듯, “집집마다 옷장 깊은 곳에 청바지”가 숨겨져 있다. 두 번째 나라는 ‘부모가 늙으면 산에 버려야 하는 나라’다. 아들은 늙은 부모를 버리러 산에 올라간다. 아들은 부모를 버리러 가며 ‘새처럼 운다.’ 그러나, 늙은 부모를 산에 버릴 수는 있었지만 자신의 몸에 밴 늙은 냄새는 버릴 수 없었다.

 

세 번째 나라는 ‘음악 연주가 금지된 나라’다. 음악 연주가 금지되어 있는 까닭에 연주자들은 이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피아니스트는 타이피스트로, 드러머는 대장장이로, 가수는 약장수로 직업을 바꾸었다. 그러나 음악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네 번째 나라는 ‘영토의 시작과 끝을 몰라 지도 제작이 불가능한 나라’다. 지도 제작이 불가능한 나라에 사는 이들의 삶은 어땠을까.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처럼 혼란스러웠을까, 아니면 자유로웠을까.

 

다섯 번째 나라는 ‘죽는 것이 금지된 나라’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허용되는 것도 있었는데, ‘꿈 꾸는 것’과 ‘오래 잠을 자는 것’이다. 죽는 것이 금지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했을까? 살다가 지루해지면 죽는 대신 오랜 잠에 빠져 그 안에서 꿈을 꾸면 되니까. 그러나 어쩐지, 이런 나라는 키아누 리브스(Keanu Reeves)가 주연한 <매트릭스> 영화에 등장하는, 프로그래밍 된 나라 같아서 끔찍하다. 여섯 번째 나라는 ‘아무도 살지 않는데 날마다 조종이 울리는 나라’다. 아무도 살지는 않지만 조종이 울린다는 것은 이전에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그곳에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으며, 사라져버린 그 사람들을 위한 조종이 울릴 뿐이다.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자. 여기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시인에 의해 소개된 여섯 나라가 있다. 당신은 어느 나라에 가서 살고 싶은가. 아마도 우리는 우선 자신의 이해와 상충되지 않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평소 청바지를 입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 사람은 청바지 입는 것이 금지된 나라를 택할 것이고, 음악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금지된 나라를 택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현재의 삶에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떠올릴 것이다. 가령, 죽고 싶은데 죽을 수 없는 사람은 대신 깊은 잠을 허용하는 나라에게 가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모두 ‘어떤 나라’에 살고 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나라는 시인이 제시한 여섯 개의 나라와 모습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방문한다면, 시인은 내가 사는 나라에서 무엇을 경험하며 신기해 할까? 나는 또 이런 상상을 해본다. 몇 세대가 지난 후, 어떤 시인이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하여 시를 쓴다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어떤 문장으로 표현될까? 이런 문장이 아닐까? “어떤 나라에서는 인간들끼리 사랑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사랑을 나누다 발각되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돈을 사랑하는 것과 돈을 위해 살인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21. 2. 27. 06:30

강성은의 시 ‘외계로부터의 답신’

 

어떤 날에는 우주로 쏘아올린 시들이 내 잠 속으로 떨어졌다

 

어쩌면 이것은 외계로부터의 답신

당신들이 보낸 것에 대한 우리들의 입장입니다

 

ㅡ 강성은 시 ‘외계로부터의 답신’의 한 부분, 시집 <단지 조금 이상한>에 수록

 

2004년 11월, 북유럽의 시인들이 스웨덴에 모여 외계인을 상대로 시 낭송회를 열었다. 이 시는 그 이벤트에 대한 기록이다. 북유럽의 시인들은 모여 26광년 떨어진 항성 베가를 향해 무선방송으로 시를 쏘아올렸는데, 그들의 시낭송은 그곳에 2054년에나 도착할 것이라 한다. 참 재밌는 이야기다. 북유럽이어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아마 남태평양의 시인들도 동일한 생각을 했을 지 모른다. 그들은 모두 하늘의 별을 밤마다 경험할 테니까. 산업화가 진행된 나라의 시인들은 더 이상 밤 하늘에서 찾아볼 수 없는 별을 그리워만 할 뿐, 그들처럼 이렇게 앙증맞은 이벤트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으면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힘든 법이다.

 

이 이벤트 소식을 접한 시인의 시선은 자꾸 우주로 향한다. 그래서 시인은 어떤 날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에서 멜로디를 듣는다. “한밤중에 세탁기에서도… 냉장고에서도 가방에서도 심지어 변기에서도” 시인은 멜로디를 듣는다. 그 멜로디가 어떤 멜로디인지는 모르지만, 멜로디를 듣는다는 것은 경쾌한 일이다. 심지어 변기에서도 멜로디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시인의 마음이 그만큼 열려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멜로디만 들리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어떤 날 주변의 모든 것에서 ‘독’의 기운을 느낀다. “읽은 페이지마다 독이 묻어 있고 내 머리털 사이로 예쁜 독버섯이 자라난다”고 말한다. 독은 사람에게 치명적인 물질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독을 만지고 또는 자기 안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이뿐만 아니라 시인은 어떤 날 “미치도록 사랑에 빠져든다.” 사랑을 하면 생기가 넘쳐야 할 텐데, 시인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내어놓는다. “그런데 이상하지 나는 병들어가고.”

 

비로소 우주를 바라보게 된 시인은 ‘외계’로부터 밀려오는 답신을 들은 것 같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인생에 대하여 묻는다. 인생이란 무엇이냐는 질문, 산다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 삶의 의미는 무엇이냐는 질문. 이 질문에 대하여 ‘외계’는 인간을 향해 수없이 답신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바깥에서 답신이 밀려오지 않는다면, 외계가 우리에게 답신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의 인생에 대하여 성찰할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는 답신이 있었다는 것도 모른 채, 자기 자신에게 몰입되고 침잠되어 의미없이 사라져갈지 모른다.

 

외계로부터 온 답신을 통해 우리는 인생을 돌아본다. 인생은 부조리하다고, 인생은 알 수 없다고, 인생은 온통 신비로 가득 차 있다고, 어떤 날은 사물에서 멜로디가 들리는 것 같다가도, 어떤 날은 독을 만지고 먹었는데도 죽지 않는다고, 어떤 날은 미치도록 사랑했는데 오히려 병들어 간다고, 우리는 우리의 부조리한 인생을 직면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해 의미를 찾으며 산다. 우리 자신의 바깥에서 들려오는 답신에 귀 기울인다는 것, 그것은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모험이다. 우리는 “우주로 쏘아올린 시들”에 대하여 어떤 답신을 듣고 사는가.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21. 2. 2. 05:26

[김남주의 시 "어떤 관료"]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ㅡ 김남주 시 "어떤 관료" 전문

 

외할아버지( 故 오지섭 목사님)께서 우리집에 내리신 가훈은 이렇다.

 

적극신앙

성실근면

평화위주

순종효도

 

전형적인 유교이념이 반영된 가훈이다. 이 시와 연관해서 눈에 띄는 가훈의 대목은 '성실근면'이다. 시에 등장하는 관료가 관료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근면하고 성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의 눈에 보이는 관료의 근면과 성실은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근면과 성실 자체는 좋은 덕목이나 어떤 근면, 어떤 성실, 무엇을 위한 근면과 성실이었나를 물었을 때, 문제는 달라진다.

 

철학자 강신주의 김남주의 이 시와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 사상을 연결시켜 해석한 적이 있다. 나치에 부역했던 전범 아이히만이 보인 덕목도 '근면과 성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근면과 성실은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이히만에게서 보이는 이 사실만 보더라도 무엇을 위한 근면과 성실인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대개 학창시절 각 학급에는 '급훈'이라는 것이 있었다.(지금도 있는 지는 모르겠다.) 그때 각 학급의 급훈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던 것이 '근면과 성실'이었다. 학교 교육의 목표가 마치 학생들을 근면하고 성실한 인간으로 키워내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근면인지, 무엇을 위한 성실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근면하고 성실한 학생들은 공부도 잘했다. 그렇게 그들은 근면과 성실로 좋은 대학에 입학을 했고, 각종 나라 시험에 합격을 했고, '관리'가 되었다. 나라는 관리들에 의해서 운영이 된다. 근면하고 성실한 관리.

 

그러나, 근면하고 성실한 관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나라에 봉사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우리는 독일의 관리 아이히만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근현대역사를 통해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근면과 성실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사유'이다. 사유하지 않는 사람, 사색이 없는 사람, 생각이 없는 사람이 근면하고 성실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이히만'과 같이 엄청난 대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렌트의 통찰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불렀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해 분업화가 심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떠한 사회적 파장을 불러올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각자 분업된 일을 근면하고 성실하게 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지금 발생하고 경험하고 있는 악한 일들에 대하여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듯이 방관하며 산다. 바로 이러한 현상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교묘히 들어와 있는 악의 실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지금 시대는 그 어느때보다 '사색적인 삶'이 절실히 필요하다. 내가 하는 일이 단순히 나를 먹고 살게 해준다고, 그 이후에 발생하는 일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말 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일이 혹시 누군가를 맘 아프게 하거나 누군가의 생명을 해치거나, 우리가 사는 지구(프란치스코 교황의 용어를 빌리자면 'common home')를 망가뜨리는 것은 아닌지, 순간순간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사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좋은 '근면과 성실'이라는 덕목은 가장 추악한 덕목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너무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지 말자." 좋지 아니한가.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20. 12. 6. 06:34

[시론] 박경리의 시 유배ㅡ 유배 같은 삶

 

황사 속을 맴돌고 헤집고

이 자리

나는 책상 하나 안고 살아왔다

ㅡ 박경리의 시 유대의 한 부분, 시집 <우리들의 시간>에 수록

 

시인은 이렇게 시를 시작한다. “내 조상은 역신(逆臣)이던가 / 끝이 없는 유배”. 시인은 자신이 유배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이유를 조상에게서 찾는 듯하다. 이것은 단순한 조상 탓이 아니다. 자기 실존에 대한 긴급한 질문이다. ‘나는 왜 이렇게 유배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할 때, 우리는 조상의 탓으로 돌린다. 조상 탓으로 돌리는 것도 그나마 괜찮은 거다. 어떤 이는 조상에게서조차 그 이유를 찾지 못할 때, 결국 신에게 그 탓을 돌린다. “하나님이 지금 나한테 장난치고 있는 거다!”

 

시인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배어 있는 시이다. 시에서 화자는 작가와 일치하지 않는다. 시적 화자와 이 시를 쓴 작가와는 별개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시는 왠지 화자와 작가가 일치된다. 그래서 더 코 끝이 찡해진다. 대작, <토지>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서 그녀가 벌였던 사투는 그녀가 그 자신으로 하여금 나는 지금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책상 하나 안고 살아왔다.” 자신의 유배지에 놓인 하나의 물품은 책상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자유인인가, 아니면 유배지에 유배된 죄인인가를 분간하기 힘들 때가 있다. 뭐 하나 새로울 것 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마주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유배된 삶이라 정의 내리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한숨을 내쉰다. 창세기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이 아담때문이라고, 그에게 탓을 돌리기도 한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 자신이 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에게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원초적인 조상. 이런 생각이 들 때, 우리는 더 깊은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체념, 그 절망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문제를 조금 다르게 바라볼 필요도 있다. 시인이 자신의 유배 같은 삶의 이유를 역신이었을지 모르는 조상에게서 찾지만, 그렇다고 조상 탓만 하면서 유배지에서의 삶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시인은 유배 같은 삶이지만, 그 유배 같은 삶에서 책상 하나 안고 살며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그 책상에서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그려내고 유배 같은 삶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루어내지 못했을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 그래서 그의 유배 같은 삶은 유배를 벗어난 참 자유의 시간이 될 수 있었다.

 

시인의 삶, 책상 하나 안고, 평생을 글쓰기와 씨름한 삶, 그 고단함이 '유배'로 표현되고 있는 이 시는, 한 자리에서 유배당한 것처럼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큰 위안을 준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각자 맡은 바 '소명'을 붙들고, 바로 그 자리에 '유배'당한 것처럼, 그렇게 끈질기게 살아야 할 것이다. '유배' 같은 삶이 나를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그것 만이 유배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20. 8. 26. 03:36

[시론] 하재연의 시 이해’ – Under-standing

 

당신의 표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당신의 밑에 서 있기로 합니다.

 

위가 깜깜합니다만,

 

위로부터 무엇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만,

 

신들의 이유 없는 장난처럼

 

내가 알 수 없었던 것은 또한

나의 아래 있었던 것

 

ㅡ 하재연의 시 '이해'의 한 부분, 시집 <우주적인 안녕>에 수록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under-standing', 상대방의 밑에 서 있는 것, 이것만 잘해도, 우리는 얼마나 행복할까. ''이라는 단어는 참 겸손한 단어다. 그러나 인간은 ''에 서고 싶어하지 않고, ''에 있으려 한다. 밑에 서 있으면 '이해'를 선물로 받지만, ''에 서 있으면 '판단'을 재앙으로 받는다. 밑에 있는 사람은 상대방을 이해하지만, 위에 있는 사람은 상대방을 판단한다.

 

공부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밑에 있던 사람이 위로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 공부이고 신앙인가? 그렇다면 공부 안하고, 신앙을 갖지 않는 게 낫다. 공부란, 신앙이란, 밑으로 내려오기 위한 수단이다.

 

우주의 밑으로, 만물의 밑으로, 인간의 밑으로, 나 자신 밑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밑으로 내려와야 한다. 그래야 '이해'를 선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라는 선물 없이, 우리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

 

우리는 '(God)'이 하늘에 있다고 믿지만, 사실 그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신은 ''에 있다. 하늘은 ''가 아니라 ''이다. 기독교 신앙이 전복적인 이유는 하늘은 ''가 아니라 ''이라는 것을 너무도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타락, 또는 세속화는 다른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통해, 신앙을 통해 밑으로 내려가서 '이해'를 선물로 받으려는 생각을 접고, 공부와 신앙을 통해 위로 올라가 '판단'을 선물로 받으려는 욕심을 갖는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얼마나 타락한, 세속화된 세상에 살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남을 판단하는 자는 다음의 말씀을 두렵게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면서 자기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결국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이런 짓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하느님께서 마땅히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 2:1-2 /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20. 6. 20. 08:43

[시론] 하재연의 시 고고학자ㅡ 인간이란 무엇인가

 

지구라는 이상한 행성에서

죽음에 둘러싸여

가끔 사랑을 나누는

인간이라는 현상

ㅡ 하재연의 시 고고학자일부, <우주적인 안녕>에 수록

 

인간이란 무엇인가? 평생 질문을 해도 답을 얻지 못하는 질문이 아닌가 싶다. 시인의 서술처럼,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현상이 아닌가 싶다. 뭔가 본질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현상 말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생각에로 회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플라톤을 말하고 싶지 않다. 존재라고 말하기엔 너무도 허무하고 아마득하여, 또는 너무도 찰나여서, ‘현상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미국 드라마 웨스트월드(Westworld)’를 보면, AI 로봇은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기 위하여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프로그램밍 된 삶은 삶이 될 수 없다는 인식, 존재는 의식(consciousness)’이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거기서 나는 더 인간다운 AI를 본다. 인간은 오히려 인간 답지 못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유를 갈망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내 무엇인가에 쉽게, 또는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한동일은 <로마법 수업>에서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 말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권리(Ius vivendi ut vult)”를 지닌 존재이다. 그는 로마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로마법은 숱한 압력 속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고 싶어했고, 끝내 인간답게 사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나의 아집과 편견을 넘어 너와의 소통과 상생을 꿈꾸었던 로마인들이 하나하나 쌓아올렸던 돌과도 같습니다”(서론에서).

 

인간은 참 이상한 행성에 살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 빼고, 주변은 모두 죽음으로 덮여 있다. 인간은 죽음에 둘러싸여 그 죽음에 압도당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며 산다. 인간에게는 죽음을 잊게 만들어 주는 삶의 방식이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 인간에게서 사랑을 빼내어 버리면, 무엇이 남을까, 싶다.

 

그런데, 그 사랑이라는 것도 참 허무하기 짝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도 죽음의 그늘을 이기지 못하는 듯하다. 인간이 가진 착각 중 가장 비참한 착각은 사랑은 영원할 거야라는 착각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사랑의 영원성을 시간의 길이에서 찾지 않고 그 사랑 자체에서 찾는다. 사랑이 시간적으로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에 사랑은 영원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그 순간우리는 이미 영원에 들어가 영원을 경험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현상’. 우리는 그 현상에서 무엇을 관찰할 수 있으며, 무엇을 관찰하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으며, 무엇을 읽어내지 못할까. 현상을 관찰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감추는 상대방의 탓일까, 아니면 관찰해 내지 못하는 나의 탓일까.

 

시인은 인간이라는 현상을 이렇게도 말한다. “슬프고 아름다운 자국에 대해 / 자국으로만 남은 존재들에 대해.” 자국만을 남길 뿐인 인간이라는 현상은 어쩌면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라는 현상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 말고, 그저 사랑하면 어떨까.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20. 3. 26. 05:15

[시론] 허수경의 시 오래된 일’ - 바이러스와 교회

 

모든 죽음이 살아나는 척하던

지독한 봄날의 일

그리고 오래된 일

 

ㅡ 허수경의 시 오래된 일부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에 수록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팬데믹 현상은 아주 오래된 일이다. 대표적으로 중세의 패스트 팬데믹과 1차대전 당시 스페인 독감이 있다. 그 팬데믹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최근에는 사스와 메르스 팬데믹이 있었다. 그때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경제적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외쳤던 이상화가 다시 살아나서 모든 죽음이 살아나는 척하던 지독한 봄날온 세상을 뒤덮은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을 보면 뭐라고 시를 쓸까? 겨우내 오지 않던 비가 요 며칠 끊이지 않고 왔다. ‘자택연금행정 명령이 내려진 상태라 길거리에 눈에 띄게 자동차 행렬이 줄었고, 비가 내려와 하늘의 먼지를 씻어준 덕분인지, 공기가 확연히 좋아졌다. 게다가 바이러스 팩데믹 때문에 죽어 있는 인간 세상의 모습과는 달리 길가에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은 제각기 꽃을 피워내고 있고, 산등성이는 초록색 풀로 뒤덮이고 있다.

 

하늘이 맑으니 뭉게구름도 새옷을 입은 양 깔끔하다. 바이러스의 팬데믹 현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의 날개짓이 힘차고 그네들의 지저귐은 청아하다. 무엇이 평화인지 헷갈린다. 경제가 돌아가지 않으니 세상은 평화를 잃었다고, 연일 방송에서는 떠들어대나, 자연은 그러한 것과 상관없이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다.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죽음은 아주 오래된 일이다. 과학이 발전되기 전,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죽음은 그저 신비한 죽음이었다. 그 누구도 죽어가는 사람이 왜 죽어가는 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래된 시간 속에 살던 사람들은 그 신비를 풀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중세, 페스트가 돌고 있을 때 교회는 적극 나서서 사람들에게 그 신비를 알려주려고 했다. 그리고 중세의 교회는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성수(聖水)를 뿌려대며 치료의식을 행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병에서 낫지 않았고, 교회에 모인 군중들은 원인도 모르는 채 페스트에 감염되어 더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다.

 

바이러스는 전염병이다. 바이러스는 대면 접촉을 통해서 전염된다. 그러므로 전염병을 막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예방은 대면 접촉을 피하는 것이다. 중세 교회는 이것을 몰랐다. 그들은 치료의식을 행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았다. 그 행위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페스트 전염을 더 가속화시켰을 뿐이다. 그 결과, 수많은 귀중한 생명들이 그 수명을 다하지 못한 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고, 그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가족들과 친구들은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살아 있으나 죽은 것처럼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중세교회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교회의 치료의식이 거짓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모든 죽음이 살아나던 척하던 지독한 봄날의 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일을 어떻게 대처했느냐에 따라, 교회의 운명이 갈릴 것이다. 중세적인 마인드로 바이러스 팬데믹에 대처한 교회는 중세교회와 같이 몰락할 것이지만, ‘이성과 공공신학적 마인드(이웃과 상식을 함께 공유하는 교회)’로 대처한 교회는 지금 당장 어렵더라도 살아나던 척하던 중세교회와는 달리 실제로 살아날 것이다.

 

살아 있는 척하지 말고, 진실로 살아 있는 교회가 되면 좋겠다. 그리하여, 모든 죽음이 살아나는 봄날, 그 모든 죽음을 끌어안고, 그 모든 죽음보다 먼저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생명력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부활절에는 모든 것이 부활하게 되기를!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20. 3. 14. 09:14

[시론] 하재연의 시 해변의 아인슈타인

 

나는 무지한 언어를 가지고

낯설고 어두운 입술로

나의 이름을 꺼냈습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ㅡ 하재연의 시 해변의 아인슈타인부분, 시집 <우주적 안녕>에 수록

 

생각해 보면, 나는 고문서를 읽은 고전학자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우선 나는 성경을 읽는다. 신약은 2천년 정도의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구약은 3천년 정도의 역사를 지닌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구약성경의 기록이 바벨론 포로기에 행해진 것이기에 25백년 정도의 역사를 지녔다고 말해야 하지만, 그 이전에 구전으로 구약의 이야기가 전해져 왔으므로, 3천년이 되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나는 초대교부들의 문서를 읽는다. 디다케나 바나바서신 등은 1세기 문서이고, 순교자 저스틴의 문서는 2세기 문서다. 그러므로, 못해도 1900년 정도의 역사를 지닌 문서들이다. 그 이후 교부들의 문서도 100년 단위로 나오기 때문에, 못해도 1000년의 역사를 지닌 문서들을, 나는 읽는다.

 

고문서들을 읽다 보면, 그들의 삶의 자리와 그 삶의 자리에서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그들의 고군분투가 느껴져 마음이 짠하다. 현재의 자리에서 그들의 삶의 자리를 들여다 보면 그들의 언어는 무지한 언어이다. 아직 생각이 다 발전하지 않았고,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현재의 지금보다 더 명확하지 않다. 가령, 초대 교부문서들에서 발견되는 기독론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론에 비하면 무지한 언어의 진술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한 언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삶의 자리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이성의 힘을 발휘하여 진리를 발견하려고 애쓴다. 그들의 낯설고 어두운 입술에는 갈망과 용기와 희망이 묻어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입술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묻어난다. “나는 인간입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잃고 산다(잊고, 가 아니다). 아니, 어쩌다 우리가 누구인지 발견한다. 어쩌다 발견된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 자신을 깜짝 놀라게 한다. “나는 인간입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왜 자신이 인간인 것을 그토록 자주 잃어버리는가. 고의인가, 실수인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버리는 것은 축복인가, 재앙인가.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버리는 인간의 습성은 이어지는 시구(詩句)와 같다. “파도는 끝없이 돌아와 안녕, 인사를 하고, 안녕, 작별을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어느 때는 안녕, 하면서 만나지만, 금새, 안녕, 하면서 작별을 한다.

 

아인슈타인은 해변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우주로 돌아가는 기차에 탑승하여 지구를 떠나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 기차에 그저 손을 흔들며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보듬어 안았을까. “신학은 인간학이다.”라고 누가 말했다. 정말 그렇다. 성경이든 초대교부의 문서든, 그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다. 하나님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 누구 말했듯이, 우리가 고통 받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충분히 인간(fully human)’이지 않아서 그렇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도, 성경을 쓴 선지자들도, 그리고 초대교부들도 결국 하나님에 대한 상상과 발견을 통해 이루고 싶었던 것은 충분한 인간되기이다. 해변의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다. 그는 해변에 서서 우주를 바라보며 인간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인간입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비록 무지한 언어를 가지고 낯설고 어두운 입술로꺼내는 부끄러운 고백이라 할지라도, 이것이어야 한다. “나는 인간입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이 고백을 간절히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인간은 희망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19. 12. 28. 08:36

[시론] 허수경의 시우산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동물의 말을 하는 식물입니다

나는 희망의 말을 하는 신입니다

나는 유곽의 말을 하는 관공서입니다

나는 시계의 말을 하는 시간입니다

나는 개가 꾸는 꿈입니다

등등의 고백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허수경의 시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부분,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수록)

 

심리상담사의 꼬임, 혹은 인턴이 건네주던 하얀 줄이 박힌 푸른 사탕 때문에,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해 버린 시인은 후회한다. 우산을 만지작거리는 시인의 행동에서 그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지금 이미 마음이 유랑하고 있다. 어디로든 가고 싶은데,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우산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심리상담사는 시인에게 조언을 해준다. “먹는 것보다 자는 것이 중요해요.” 같은 조언이다. 누가 모르나? 그런데 잠이 안 오는 것을 어떻게 하나. 잠 드는 것이 힘들고, 잠이라도 들면 꿈 속에서 심리상담사를 죽이는 꿈을 꾸는데, 시인이 어떻게 잠을 설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시인을 보고, ‘먹는 것보다 자는 것이 중요하다는 상담을 해주는 심리상담사가 밉다.

 

시인은 심리상담사와 상담을 하면서, 점점 자신의 내면세계를 열어 보여준다. 그 안에는 편지가 가득하다. “죽은 허씨에쓴 편지, “얼어 죽은 국회에게쓴 편지, “맞아 죽은 은행에게쓴 편지, “우주로 납치된 악몽에게쓴 편지, “달에 있는 나의 거대한 저택에게쓴 편지,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시인이 자신의 실체를 고백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식물이에요.”

 

시인은 이 고백을 후회한다. 자신이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식물이라는 고백 뒤에, 시인은 계속하여 고백을 쏟아 놓는다. “나는 동물의 말을 하는 식물입니다. 나는 희망의 말을 하는 신입니다. 나는 유곽의 말을 하는 관공서입니다. 나는 시계의 말을 하는 시간입니다. 나는 개가 꾸는 꿈입니다.” 고백하지 말았어야 할 고백들은 시인은 하고 말았다. 그래서 시인은 후회한다. 시인은 이 고백을 강제된 고백이라고 부르고 싶어한다.

 

고백이란 상대방이 알지 못하는 나의 무엇을드러내는 놓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은 그 무엇은 좋은 것일수도 있고, 나쁜 것일수도 있다. 가령 사랑의 고백 같은 경우는 좋은 것이다. 반대로, 죄의 고백 같은 경우는 나쁜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때로, 사랑의 고백은 드러내 놓지 않는 게 좋을 때가 있고, 죄의 경우는 드러내 놓는 게 좋을 때가 있다. 사랑이 때론 죄보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에 쓴 [재고록(Retractationes)]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 고백록(Confessions) 13권은 나의 악한 행동과 선한 행동을 말함으로 공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이해와 사랑을 자극하여 하나님에게 향하게 하고 있다”(재고록 II, 32).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Confessions)>을 보면, 기독교인의 고백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번역한 선한용 교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왜 고백록을 썼는지 이렇게 밝히고 있다. 1) 자기 자신이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게(ad Deum) 마음을 향하게 하여 그를 사랑하고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 2) 교회를 돌보고 양떼를 양육하는 감독으로서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는가?’에 대하여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할 책임 때문에, 3) 교인들에게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4) 교회에 들어온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을 신학적으로 설명해 줄 필요를 느껴서, 5) 고백록을 듣거나 읽게 될 사람들로 하여금 그 깊은 곳을 알게 하기 위하여, 6)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오해와 비판에 대하여 정당하게 답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모두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이유를 따를 필요는 없겠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언제나 자기 자신 뿐 아니라 고백을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마음을 향하게 하고 그를 더욱더 사랑하고 찬양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시인이 심리상담사에게 고백한 이유는 자신의 삶을 사랑해서다. 살지 못해서 안달이 났는데,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고백하는 거다. 이처럼 고백은 생명에의 갈망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인간의 탄식이다.

 

우리는 나의 생명에 대하여, 이 세계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고백을 가지고 사는가. 남들이 들으면 얼토당토한 고백이라 할지라도, 고백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어떤 고백이 우리 안에 있는가. 고백하면 후회할지 모르지만, 고백 없이 우리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향하여 진심으로고백하는 자에게 은총을 베푸신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