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6. 4. 09:40

아침묵상 시편 41편 - 복 있는 사람의 현대적 의미

https://youtu.be/g_m5BYWDpEk


오늘은 시편 41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시편은 다섯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시편 41편은 1권의 마지막 시편입니다. 150편의 시편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로서 정교한 문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듯이, 각 권도 묶음대로 정교한 문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죠. 시편 제1권의 서문인 1편과 2편은 복 있는’, 그리고 복이 있다로 번역된 아쉬레로 시작하고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시편 41편도 시편 1편처럼 아쉬레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제1권의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죠. 한 마디로, 시편 제1권의 주제는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를 묻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39편을 묵상하며 언급했듯이, 시편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강조합니다.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자기 사랑물질 사랑을 강조하는 부류는 대개 자본주의를 강화시켜 거기서 이익을 취하려는 부류들이 대부분이죠. 가령 대중문화는 대개 자기 사랑을 강조합니다. 대표적으로 요즘 한류를 이끌고 있는 BTS가 있습니다. BTS가 청소년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Love yourself’입니다. 그런 점에서 BTS는 그냥 연예인이고 비즈니스 하는 친구들이지, 이 시대의 선지자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대중매체는 자기 사랑물질 사랑을 부추깁니다. ‘이 상품을 소비하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던지죠. 이런 구조 속에서 사랑은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본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사랑은 철저하게 물질화 됩니다. 사랑에 물질/자본이 매개화 되지 않으면,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게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물질적 풍요를 보장하지 못하거나 대물림 해주지 못하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는 게 아닌 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주장하고 있듯이,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세습 자본이 되는 겁니다. 세습이 곧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죠. 현대인들은 자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기를 쓰고 세습합니다. 사랑이 물질화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하기에 여념이 없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할 겨를이 없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시편 41편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1).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는 단순히 돈 없는 자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가난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약하다’, ‘무력하다의 뜻을 지는 말로, ‘사회적 약자를 가리킵니다. 가진 자와 대조되는 없는 자, 건강한 자와 대조되는 병약한 자, 강자와 대조되는 약자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 가난한 자이웃이라고 하죠.

 

지금 시대는 가난한 자이웃에 대한 정의(definition)가 많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사회적 약자라기보다실패자로 인식합니다. 뭔가 문제가 있어, 또는 능력이 부족하여, 또는 게을러, 이 사회에서 낙오된 자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웃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이웃이라고 생각하죠.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이 아니라, 그저 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자와 이웃에 대하여 왜곡된 마음을 가진 현대인들에게 정면 도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믿는 복음은 그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이 복음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가난한 자이고 이웃입니다. 우리는 약자이고, 우리는 아무런 도움도 못되는 존재입니다. 바로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도 그렇게 살라는 부르심입니다. 사회적 약자, 내가 도움을 줘도 별로 나는 얻을 이익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위해서 나의 것을 내어놓고 나누는 것이 이웃 사랑이고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렇게 살지 못하면서, 복음을 통해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 중의 모순입니다.

 

가난하고, 정치가 혼란스러운 나라에서는 각 사람의 나눔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한 사회에서의 교회 공동체는 직접적인 나눔의 실천을 많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이나 미국처럼 부유한 나라, 정치체제가 안정된 나라, 복지국가에서는 각 사람이 가난한 자’, ‘이웃을 위해서 직접적으로 나눌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바로, 세금을 잘 내는 것을 통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투표 등 정치참여를 통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선진국일수록 국가의 기능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선진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역할은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평등한 복지를 촘촘히 잘 실행할 수 있도록, 첫째, 세금을 잘 내는 것이고, 둘째, 우리가 낸 세금이 사회의 구석구석 어두운 곳을 밝히는 데 잘 쓰고 있는지, 모니터링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금을 아깝다 생각하지 말고 정직하게 잘 내고, 정부가 주어진 역할을 잘 하도록 정치참여를 통해 써포드(support)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의 현대적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태어난 모든 귀한 생명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고, 의미 있는 삶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도록,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에 더 힘쓰는 진실로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6. 3. 08:50

아침묵상 시편 40편 - 말씀과 추억

https://youtu.be/K_LxkgknRNE


오늘은 시편 40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시편 40편은 개인적으로 추억이 담긴 시편입니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오죠.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 ,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학창시절,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아도나이라는 찬양선교단체를 만들어 활동을 했는데요, 그 당시는 각 교회마다 문학의 밤이 유행하던 시절이라, 저희는 이곳저곳 친구들의 교회 문학의 밤 행사에 초청이 되어 많은 공연을 했었죠. 그때 즐겨 부르는 레퍼토리 중 하나가, 시편 40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찬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하면입니다. 이 곡의 원래 제목은 시편 40입니다.

 

후렴구, ‘새노래로 부르자 랄라라할 때 넣던 화음도 생각나는데요, 시편 40편을 읽을 때면, 윤동주가 그랬듯이, 그때 아도나이활동을 함께 했던 친구들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윤동주를 흉내내 보면, ‘, , , , , …..’ 벌써, 모두 지천명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죠.

 

시편 38편부터 41편까지는 동일한 주제가 다뤄지고 있는데요, 질병, , 악인, 간구 등의 주제가 얽혀 있습니다. 인생의 실질적 고통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있죠.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린다고 고백하고 있은데요, 그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이유, 두 가지가 제시되고 있죠.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려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는 문자적으로 파멸(절망)의 구덩이라는 뜻이고, ‘수렁은 진흙탕인데요, 모두 음부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으로,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인생의 문제를 가리키죠. , 시인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음부에 그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인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또다른 결정적 이유가 있는데요, 1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셨다고 하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기울이다라는 동사는 손을 내뻗다’, ‘몸을 굽히다의 뜻을 가진 동사로서, 시인의 기도를 집중해서 들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시인이 경험한 하나님은 간절히 기도할 때,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기도를 집중해 들으시며 손을 뻗쳐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흔히,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헛된 것)과 하나님(진실한 것)의 차이죠. 구원하지 못하는 존재를 예배하고 섬기는 것만큼 허무한 일이 없죠. 그러나, 시인은 분명히 손을 뻗쳐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그 하나님을 날마다 새노래로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시편 40편에는 호세아나 아모스 선지자가 외쳤던, 동일한 선지자적인 말씀이 들어 있는데요, 6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출애굽기나 레위기에 제시된 율법과는 상반되는 이야기죠. 제사와 절기를 제정하신 하나님께서, 제사와 절기를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굉장히 모순되어 보입니다.

 

이에 대하여 시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함으로써, 그 모순을 풀고 있는데요,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8). 제사나 절기를 지키는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사랑하는 것에 대한 외적인 표지이죠. 외적인 표지만 지키고, 마음 속 깊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면, 제사나 절기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아모스가 선포하는 것처럼, 공의와 진리를 선포하고 실천합니다. “내가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10).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삶의 한 복판에서 경험했기에, 끊임없는 삶의 어려움 가운데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그리고 그 구원의 경험을 노래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경륜은 우리가 꼭 배워야 하는 것이죠. 말씀과 나의 삶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그 말씀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과 역사가 자동적으로 기억나서, 감사와 찬양이 저절로 나오게 끔, 우리는 말씀과 삶을 통합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해 나가야 합니다.

 

저에게도 시편 40편의 말씀은 구원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시편 40편의 말씀을 읽으면, 학창시절의 추억이 떠오르고, 미소가 지어지며, 그때 함께 했던 친구들의 안부가 궁금해지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경험이 지금 삶에서도,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죠.

 

여러분은 어떠한 구원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어떠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으신지요? 성경을 펼쳐볼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구원의 경험이 팝콘처럼 튀어나오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것이고, 그 미소로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가며,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행복한 날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6. 1. 14:35

아침묵상 시편 39편 - 헤벨(헛됨)과 나그네

https://youtu.be/B4E9vhA10pE


오늘은 시편 39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기독교 교육론>에서 어거스틴은 우리가 해야 할 네 가지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요, 첫째는 하나님 사랑, 둘째는 자기 자신 사랑, 셋째는 이웃 사랑,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물질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은 매우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데요, 이 네 가지 사랑 중에서 둘째인 자기 사랑과 넷째인 물질 사랑에 대해서는 가르칠 것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가르치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은 너무도 잘 하기 때문이라고 하죠. 너무나 맞는 말이죠?

 

우리 인간의 악함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으로 기우는 데 있는 것이죠. 가르치지 않아도 매우 잘 하는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놓치고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안 계신 양, 다른 사람이 눈에 안 보이는 양 생각하고 행동을 하죠. 그러다 보니, 우리는 쉽게 하나님과 이웃을 무시하는 악한 행동을 일삼습니다. 이러한 악한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금도 우리의 삶에서 매일 같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시편 39편은 구원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시인은 인생을 살아가다 맞닥뜨리게 된 좌절과 허무 앞에서 그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데요, 이 시에서 사용되는 핵심용어는 헤벨입니다. 헤벨은 전도서에 무수하게 등장하는 말이죠. ‘헛되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입니다. 시인은 지금 인생이 헛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1절에서 시인은 악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말합니다. 이미 앞서 38편에서 시인은 그 태도를 말한 적이 있죠. 침묵. 악인에 대하여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겠다고 시인은 다짐하는데요, 그런데, 그렇다 보니까, 시인의 마음이 극심한 근심에 빠지고 맙니다. ‘선한 말까지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선한 말까지 못하게 된 상황을 참다 못해, 폭발하는데요, 그는 침묵하고 또 침묵하다, 극한 상황에 이르러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할 것은, 침묵의 극한 상황에 이르러 비로소 말 문을 연 시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악인에 대한 탄식이나 비난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대신 시인은 인생의 무상함과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악인들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도 있죠. 악인은 인생의 무상함도 모르고, 자신의 죄도 고백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니까요.

 

시인은 자신의 덧없는 인생에 대하여 한 뼘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 구절을 한 번 읽어보죠.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헤벨)뿐이니이다”(5). 시인은 고백합니다. 인간의 인생은 한 뼘 길이 밖에 안 되고, 그렇기 때문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인생이고, 살면서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졌었다 하더라도, 그 인생이 모두 허사라고 합니다. 헤벨, 영어로는 a breath라고 하는데, 한 호흡 뿐이라는 뜻입니다. 한 호흡. 정말 허무하죠. 한 호흡 뿐이 안 되는 인생. 숨 한 번 쉬어 보세요. 이게 인생이랍니다. 허무하죠?

 

시인은 힘들 게 연 입을 통해 악인을 저주하거나 그들의 악함에 대하여 하나님이 심판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대신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있는데요, 시인이 악인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악인들이나 자신이나, 이 세대에서 똑같이 헤벨’, , ‘한 호흡일 뿐이기 때문이죠. 한 호흡 뿐이 안 되는 인생이 악한 일을 벌이는 것도 정말 허무한 일이고, 한 호흡 뿐이 안 되는 인생이 자신과 동일한 호흡을 가진 악인을 비난하는 것도 허무한 일입니다.

 

시편 39편의 중심 구절은 7절인데요, 시인은 이렇게 헤벨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여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인생의 헤벨’, 인생이 한 호흡 밖에 안 된다는 것, 인생의 무상함을 깨달은 시인은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고백이죠. 단순히 인생의 무상함 가운데 하나님을 소망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생의 무상함, 인생의 헤벨을 진실로 깨달은 사람이 가지게 되는 인생의 방향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무상함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입에서 심심치 않게, 인생의 허무, 인생의 무상함, 공허함 등을 들으며 살죠. 그러나, 그렇게 헤벨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시인처럼 이제 나의 소망이 주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진실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실로 인생의 헤벨을 깨달은 사람은 시인이 12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이 세상의 나그네로 생각할 것입니다. , 진실로 인생의 헤벨을 깨달은 사람은 믿음의 선조인 족장들처럼 이 세상의 에 대하여 아무런 권리 없이 지나가는 나그네로 자기 자신을 포지셔닝(positioning)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인생의 헤벨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입으로는 인생의 허무와 공허함을 말하고 있으나, 그 인생의 허무와 공허함을 달래기 위하여 여전히 이 땅의 것에 집착하겠죠. 그러한 사람은 아직도 이 땅의 것에 자신이 어떠한 권리가 있는 양 행동하는 것이기에, 자기 자신을 나그네라고 생각하지 않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못하고, 여전히 인생의 허무와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땅의 것, 헛된 것에 소망을 둡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땅의 것에 엄청난 집착을 하며, 땅의 것에 엄청난 권리 주장을 하며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을 이 땅의 것에 아무런 권리도 없는 나그네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떻게서든 권리를 주장하여, 주인 행세를 하려 들죠. 그렇기 때문에, 시편 39편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이 말하고 있는 인생의 헤벨과 나그네 됨에 대하여 깊은 묵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도록 하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생의 깊은 헤벨, 허무, 공허함을 경험하더라도, 결국 더 땅의 것에 집착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처럼,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도록, 말씀 앞에 겸손해져야겠죠.

 

우리의 인생은 허무하고 공허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나그네입니다. 그러니, 땅의 것을 붙잡으려는 헛된 욕심을 버리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그리스도인이 되 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29. 08:45

아침묵상 시편 38편 - 함구의 영성

https://youtu.be/6vDloOdTKWQ


오늘은 시편 38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있죠, ‘엎친데 덮친다는 말과 같은 뜻인데요, 어려운 일이 겹쳐서 오는 형편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 일을 마주할 때면, 인생은 짓궂은 귀신의 장난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차마, 짓궂은 하나님의 장난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네요. , 알 수 없는 일이죠.

 

시편 38편의 시인이 지금 딱 그런 처지에 놓여 있는데요, 1절부터 10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시인은 지금 거반 죽을 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그 병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고 있는데요, 얼마나 괴로운 지,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라고 고백하는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1절부터 22절의 내용을 보면, 시인은 가까운 사람들을 잃었을 뿐 아니라, 원수들의 음모와 음해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삼중고를 겪고 있는 것이죠.

 

시편 38편은 다윗의 고백이 아니라, 마치 욥의 고백처럼 느껴지는데요,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고통을 대하는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에서 보듯이, 욥도 병을 얻고, 가까운 사람들을 잃었죠. 특별히 가장 가까운 욥의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저주의 말까지 듣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찾아와 아픔을 같이 해주는 듯하였으나, 시간이 지나자 친구들은 욥을 몰아붙이며, 욥을 정죄합니다. 친구가 원수로 변한 것이죠.

 

시편 38편의 시인도 욥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시인도 병이 걸렸고, 가까운 사람들을 잃었고, 원수들의 조롱을 받습니다. 그런데, 욥과 시인에게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결코 굽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정죄하는 원수 같은 친구들과 당당하게 변론을 펼칩니다. 욥의 원수 같은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과의 변론이 욥기서의 주된 내용이죠. 욥기서에는 아주 지루한 논쟁이 길게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욥과는 달리 자신의 의로움을 전혀 주장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처음부터 자신이 병이 걸린 이유는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욥과는 달리 원수들과 전혀 논쟁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조롱과 악한 일에 눈과 귀를 닫고, 입도 일체 열지를 않습니다. 무반응으로 대응합니다.

 

시편 38편은 사무엘하 16장에 나오는 다윗을 향한 시므이의 저주 일화를 생각나게 하는데요, 다윗이 셋째 아들 압살롬의 역모에 의해 예루살렘 왕궁을 떠나 피신을 갈 때, 사울 왕의 친족 중 한 사람인 시므이는 피난 가는다윗 왕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저주의 말을 퍼붓습니다. 시므이의 저주를 듣다듣다 못참은 아비새 장군은 명령만 내려주시면 가서 시므이의 목을 베겠다고 합니다. 그때, 다윗 왕은 아비새와 휘하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하죠.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의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 16:10-12).

 

여기에 나타나는 다윗 왕의 심정이 시편 38편에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려고 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이렇게 병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하는데요, 요즘 사람들이 바라보는 질병에 대한 태도와는 사뭇 다르죠. 요즘에 누가 병들었다고 그것이 자신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시인의 관점을 구시대적 유물로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발생하는 일을 너무도 작은 관점에서, 사소하고 사사롭게 바라보고 마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요, 그렇게 작은 관점에서 어떠한 일을 바라보면 죄책감도 안 들고, 머리가 복잡해지지 않아 좋다는 생각을 갖게 될 지 모르지만, 그렇게 작은 관점에서만 문제를 바라보고 말면, 우리의 인간성은 성숙해지지 못할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다른 말로, 어떠한 일을 큰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작은 관점에서만 바라보게 되면, 결국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정의와 도덕이 사라진, 매우 혼란스러운 사회가 되기 십상인 것이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시인이 자신의 문제를 큰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삶의 자세를 반드시 배워야만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시인이 원수들의 음모와 악행을 향해서도 큰 관점에서 무대응, 함구의 정책을 쓰고 있는 것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관용과 용서보다는 다툼과 투쟁이 너무도 많습니다. 한국 사회도 변호사가 많아지면서 점점 그러한 현상이 확산되고 있습니다만, 미국에서는 이미 다툼과 투쟁이 아주 합법적으로 생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죠.

 

미국은 변호사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생활전반에 걸쳐 변호사의 도움을 아주 쉽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호사들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법적 투쟁을 걸어, 의뢰인에게는 금전적 보상을 안겨주고, 자신은 수임료를 챙기죠. 생활의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모두 법적 투쟁을 통한 돈벌이 수단으로 바뀐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앞에서는 웃지만, 뒤에서는 소송을 걸죠. 이는 모두 자신의 삶에 벌어지는 일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큰 관점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작은 관점에만 머물기 때문입니다. ‘가 삶의 중심이니, 세상의 중심, 신 같은 에게 해를 끼친 자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죠.

 

함구의 영성. 억울하고 분한 상황 앞에서 입을 다무는 일.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인생의 모든 일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큰 관점에서 볼 줄 아는 사람만 가질 수 있는 영성입니다. 자기 자신의 자그마한 죄에도 민감하여 과감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할 줄 아는 사람,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부끄러워할 줄 알며, 죄책감을 가질 줄 아는 영적 민감성을 지닌 사람, 그리고,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을 믿는 신실한 사람, 이런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함구의 영성이라는 게 말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에 입을 닫고 있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시인이 보여주는 것처럼 함구의 영성이 있지만, 욥이 보여주는 것처럼 저항의 영성도 있습니다. 언제 입을 닫아야 하고, 언제 입을 열어야 하는 지 아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이겠지요. 함구의 영성을 가진 사람은 저항의 영성도 더불어 가지고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큰 관점에서 바라볼 줄 아는 영성을 끊임없이 키워야 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영성을 지닌 자의 간구는 너무도 간절하고, 너무도 절박하여, 하나님의 심장을 뛰게 할 것입니다. 그 순간, 구원이 임하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우리도 시인처럼 이렇게 고백해 볼까요?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1-22).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28. 07:57

아침묵상 시편 37편 - 악을 버리고 의를 택하여 살고 싶은 생각

https://youtu.be/CbdH2kzZ7p0


오늘은 시편 37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시편 36편과 37편은 악인에 대한 주제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비슷해 보이는데요, 36편이 악인에 대한 탄원시라면, 37편은 악인에 대한 지혜시입니다. 특별히 37편은 아주 전형적인 지혜시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잠언에 실렸다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시편입니다. 실제로 잠언에서 볼 수 있는 지혜의 교훈이 동일하게 이곳에서도 나타나고 있죠. 잠언을 읽어 보신 분이라면 어렵지 않게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시인이 주는 지혜는 우리의 일상에서 대단히 중요한 힘을 발휘하는 지혜인데요, 시인은 이렇게 조언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거나 시기하지 말라.” 악인들이 저지르는 악행들을 보면 화가나고 속상하죠. 더군다나 악인들이 악을 저지르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이 형통한 것을 보면, 화 나는 것을 넘어, 시기심까지 들기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신세도 한탄하게 되고, 의롭게 살려고 이렇게 아등바등 하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인생의 회의감마저 들기 마련입니다.

 

시인은 악인을 바라보며 들 수 있는, 바로 이러한 감정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악인들이 벌이는 악행을 바라보면서 내는 분노는 의로운 분노라 할 수 있으나, 악인을 바라보며 생기게 되는 분노나 시기심 등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의로운 자신이 오히려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악행을 저지르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 하는 너무도 중요한 지혜의 조언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군대에서 군복무를 할 때, 대전 계룡대의 육군본부에서 장군 운전병을 했는데요, 그때 참 인격이 훌륭한 장군을 만나 많은 것을 가까이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일화가 생각나는데요, 장군을 모시고 서울에 가다가 경부고속도로 중간에서 관용차가 퍼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일로 저는 장군한테 많이 혼났는데요, 그때 우왕좌왕 하는 저를 보며 장군이 이렇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일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막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일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이다.” 그때는 저는 깨달은 바가 큰데요, 그 이후, 저는 똑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을 함과 동시에, 일이 발생했을 때,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일을 잘 처리하도록 노력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어떠한 일이 발생하는 것을 우리가 모두 막을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악인들이 벌이는 악행의 피해자가 되는 일을 막기란 참 쉽지 않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미 벌어진 일을 우리가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벌어진 일을 우리가 바꿀 수는 없지만, 그 벌어진 일에 대한 우리 자신의 태도와 반응은 우리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시편 37편은 40절로 구성된, 꽤 긴 시입니다. 시인은 한결같이 악인과 의인을 대조하고 있는데요, 악인은 악의 속성상, 그 악 속에 심판과 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고요, 의인은 의인의 속성상,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시인이 줄기차게 주장하는 악인과 의인의 삶이 어떻게 다른 지에 대한 지혜의 말씀을 보면, 자연스럽게 악을 버리고 의를 택하여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40절의 모든 말씀이 하나하나 주옥같은 말씀이지만, 그 중에서 제 눈에 가만히 들어와 꽂히는 말씀이 하나 있는데요, 이것입니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성함보다 낫도다”(16). “부자 되세요!”가 최고의 안부가 된 요즘,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위해서는 영혼이라도 기꺼이 팔아먹는 것이 미덕이 된 요즘, 누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일까 싶습니다만, 그래도, 이 말씀에 위로 받는 의인들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시편 37편의 말씀이 너무 주옥 같아, 오늘은 이 말씀을 낭독하는 것으로 마칠까 합니다. 제가 40절 중, 16절까지만 낭독을 하겠습니다. 나머지는 여러분이 직접 낭독하며, 시인이 전해주는 지혜를 마음에 새겨 보시면 좋겠습니다.

 

1.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2.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12.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그를 향하여 그의 이를 가는도다

13. 그러나 주께서 그를 비웃으시리니 그의 날이 다가옴을 보심이라

14.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려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15. 그들의 칼은 오히려 그들의 양심을 찌르고 그들의 활은 부러지리로다

16.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성함보다 낫도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27. 08:12

아침묵상 시편 36편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https://youtu.be/jxaRFaMN7WQ


오늘은 시편 36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를 보면, 거기에는 아주 간절한 문장이 하나 담겨 있습니다. “다만,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 산다는 것은 각종 악과의 투쟁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악이라는 것은 우리의 생명력을 방해하고 제한시키는 일련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세상의 모든 문명은 악과의 투쟁 속에서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쪽으로 발전되어 왔죠. 하다못해, 이집트와 같은 건조한 기후에서 문명이 발달한 것은 건조한 기후에서는 생명을 해치는 바이러스의 창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고 하죠.

 

세상에 악이 왜 존재하는가?” 인류의 가장 깊은 물음이고, 가장 오래된 물음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물음입니다. 악에 대한 물음을 신학에서는 신정론(Theodicy)라고 하죠. 신정론은 단순히 악에 대해서 묻는 게 아니라, 악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명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학문입니다. 참 쉽지 않죠?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고, 전지전능하신 분인데, 왜 그런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이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시며, 왜 그 악으로부터의 고통을 허락하실까요? 이렇게 질문은 할 수 있지만, 그에 대하여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질문에 대하여 끊임 없이 대답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죠. 존재의 선함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간절함이 베어 있는 것이죠.

 

우리가 살펴볼 시편 36편은 악인에 대한 묵상으로 시작하고 있는데요, 시인은 먼저 악인의 에 대하여 묵상을 합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1). 악인의 눈에는 하나님이 안 보인다는 뜻인데요, 왜 악인의 눈에는 하나님이 안 보일까요? 왜냐하면, 악인은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작고하신 독일의 신학자 판넨베르크는 죄를 정의하기를 자기 집중이라고 했는데요,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만 안 보일 뿐 아니라 자기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눈에 안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만 너무 집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악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시인은 계속해서 악인의 특징을 진술하고 있는데요, 눈에 이어, 악인의 말, 악인의 행동, 그리고 악인의 마음까지도 관찰합니다. 분명히 존재하는 하나님과 이웃을 보이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눈을 가진 악인은 속이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혜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없으니, 그의 행동은 지혜로울 수 없다고 하고요, 악인이 하는 악한 행위는 우발적이거나 실수가 아니라, 열성적인 의지와 계획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폭로합니다.

 

시인은 악인에 대한 묵상을 하며 악인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에 대하여 묵상을 이어가는데요, 시인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에 주목하는 이유는 악인의 악행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뿐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여기서 시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중요한 통찰은 이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 지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것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한다고 말이죠. 존재하는 악을 애써 외면할 필요는 없는 것이죠. 우리는 이 세상 어디에나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우리에게 한 가지 더 알려주는 것이 있죠. 이 세상 어디에나 악이 존재함과 동시에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도 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악에서 건지시길 원하신다는 겁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당연한 이야기 같으나,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악을 경험했을 때, 사람들은 그 악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악에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악이 주는 고통 가운데서 생명을 점점 잃어갈 뿐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악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듯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악이 발생하기 전, 우리는 기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이 짤막한 기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리 삶의 현실에서, 우리가 매일 같이 빼먹지 말고,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해야 할 기도는 이 짤막한 기도입니다. “주여,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시인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여,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은 악한 자의 손과 발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악의 문제를 쉽게 여기면 안됩니다.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은 그의 기념비적인 책,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신정론의 문제를 그리스도론으로 푼 것으로 유명한데요, 몰트만의 신학에 의하면, 십자가는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한 자리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십자가에 직접 달리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일컬어 ‘the crucified God,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시인이 우리에게 주는 지혜를 마음에 꼭 품어 보세요. 우리가 사는 세상 어디에나 악이 존재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상 어디에나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날마다, 간절히,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이 기도가 실제로 우리를 악에서 구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요.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26. 08:22

아침묵상 시편 35편 - 영혼을 괴롭게 하기

https://youtu.be/oDC7XW2hh4E


오늘은 시편 35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성경의 시편은 다섯 권으로 구성되어 있죠. 그 중에서 1권은 시편 1편에서 41편까지 인데요, 대부분 다윗의 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다윗이 겪은 구체적 사건이 표제로 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다윗의 시로만 표기됩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의 상상력이 필요한데요, 다윗의 시편은 사무엘상하에 걸쳐 전개되는 다윗 이야기와 오버랩시켜 읽으면 더 생생하게 다가오곤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시편 35편은 다윗의 이야기 중, 사무엘하 16장에 나오는 므비보셋의 종 시바 이야기와 엮어서 읽으면 풍성한 영감을 얻게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윗은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죠. 그의 인생에는 비극이 많았는데요, 그 중에서 가장 큰 비극은 셋째 아들 압살롬과 사이에서 생긴 비극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려고 한 사건이죠. 흔히 이것을 역모라 하는데, 역모가 아들에 의해서 발생했다는 것은 아버지 입장에서 참 슬픈 일이죠. 그리고 그 역모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듯하여,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공격을 피해 피난을 떠나야 하는 신세였습니다.

 

다윗은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 왕궁을 떠나 급히 피난을 떠납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다윗 왕이 아들 때문에 초라해진 상태입니다. 그러던 중에,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다윗 왕을 찾아옵니다.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 그리고 여름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삼하 16:1)를 가지고 다윗 왕 일행을 맞이 합니다.

 

푸짐한 음식을 대동하여 자신 앞에 나타난 므비보셋의 종 시바를 마주한 다윗은 시바에게 이것을 가지고 자신 앞에 나타난 저의를 묻습니다.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그러자 시바는 그 저의를 말하지 않고, 아주 상투적인 대답을 합니다.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삼하 16:2).

 

그러자, 다윗은 다르게 질문합니다.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삼하 16:3). 여기서 네 주인은 사울 왕을 가리키고, ‘주인의 아들므비보셋을 가리킵니다. 므비보셋은 사울 왕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이죠.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죠. 사울 왕과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마지막 최후를 맞이했을 때,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벳은 이제 겨우 5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 였습니다. 그 이후, 사울 왕의 죽음으로 사울 왕가가 멸망하고, 그 남은 식솔들이 다급하게 왕궁을 빠져나갈 때 유모가 그만 어린 므비보셋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그는 평생 두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되고 맙니다. 참 가슴 아픈 얘기죠.

 

다윗은 사울 왕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사울 왕가에 자비를 베풉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에게 재산을 돌려주고,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왕궁에 들인 후, 자신과 함께 식사를 하도록 합니다. 요나단이 죽기 전, 다윗에게 자신의 아들을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피난길에 자신을 알현하러 온 시바에게 다윗이 네 주인이 어디 있느냐?” 물었을 때, 너의 주인, 므비보셋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시바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삼하 16:3). 시바의 대답에 의하면, 다윗의 선대를 받아 이때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산 므비보셋이 다윗 왕을 배신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시바의 말을 듣고, 자신의 피난길을 도운 시바에게 므비보셋의 재산을 모두 하사합니다. 참으로 어리둥절한 광경이죠.

 

바로 이 정황이, 시편 35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15절까지의 구절이 그것입니다. “불의한 증인들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질문하며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나는 그들이 병들었을 때에 굵은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같이 그들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몸을 굽히고 슬퍼하기를 어머니를 곡함같이 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넘어지매 그들이 기뻐하여 서로 모임하여 불량배가 내가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서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아니하도다.”

 

다윗은 과거에 그들이 병들고, 아픔을 당했을 때에, 그들을 위해 겸손한 마음으로 금식하며 기도했고, 그들을 친구나 형제처럼 대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보며 부모님이 돌아가신 듯 함께 슬퍼했다고 말하고요. 그런데, 이제 다윗의 실패를 보며 그들은 한 통속을 이루어 기뻐하고, 은밀히 자신을 해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고 토로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압살롬의 공격을 피해 피난길을 떠날 때, 다윗이 겪은 수모를 생생하게 기록한 것 같은 생각을 너무도 명백하게 들게 만드는 진술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요, 하나의 부류는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의 부류는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이죠. 위에 전개된 이야기를 보면, 므비보셋은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인 것 같고, 다윗은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인 것이죠.

 

그런데,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무엘하에서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시바가 다윗에게 고했듯이, 므비보셋이 그렇게 다윗을 배신한 게 아닌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죠. 이 사건은 불의한 시바가 정치적 계산에 의해 다윗을 선대했고, 그 일 덕분에 불의한 시바는 다윗의 의로움으로 인해 큰 재산을 가지게 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엔 승자도 패자도 없습니다. 다윗은 다시 왕궁으로 돌아왔고, 므비보셋은 참수당하지 않았으며, 시바는 쫓겨나지 않고 재산을 가지게 됐죠.

우리는 시편 35편을 읽으며, 아주 쉽게, 시인에게 감정을 이입을 하여, 자신이 시인의 입장인 양,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곤 합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자신은 시인처럼 의로운 사람이 되고, 자신을 괴롭히는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악인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읽기를 아전인수격 성경읽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말씀을 지극히 사사롭게 유용하는 것이죠.

 

시편 35편은 그렇게 읽으면 안 됩니다. 시인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읽어버리고 말면, 우리는 오히려 시편 35편에서 시인이 고발하고 있는 악인이 되고 맙니다. 시인이 말하는 악인은 이런 사람인데요, “다른 사람의 고통과 고난을 자신의 즐거움과 기쁨으로 여기며, 스스로를 뽐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만약 시인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시편 35편을 읽어버리고 말면, 우리는 우리의 대적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고통과 고난을 당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기뻐할 것이고, 자신이 그들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는 양, 자기 자신을 뽐내게 될 것입니다. 전형적인 악인의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보다 우리는 시편 35편을 통해서, 시인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영혼을 괴롭히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서 시인이 13절에서 내 영혼을 괴롭게 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자신을 가난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이는 케노시스의 영성을 간직한 것이지요.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읍소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한없이 가난하게 만드는 일이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원수를 갚아 주셨을 때, 악인의 추락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이 아닙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 기도는 정의를 이루는 것이지, 자기 만족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정의는 신비한 것입니다. 원수 갚음으로 인해 내 속이 시원해지는 것이 정의는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살면서 여러가지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일을 당하지만, 그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가난해지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우리의 자기만족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억울한 일을 당한 우리가 진실로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죠.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가난해지는 법을 배우며, 신비한 방식으로 정의를 이루시는 하나님께 나의 억울함을 온전히 맡기는 법을 배워야겠죠. 그럴 때, 위에서 말한 다윗, 므비보셋, 그리고 시바에게서처럼 어떤 폭력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가 창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평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가난해지는 영성을 가지는, 겸손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25. 08:49

아침묵상 시편 34편 - 하나님의 선하심 맛보아 알기

https://youtu.be/Qpe9441J--U


오늘은 시편 34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시편 34편의 표제/제목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인데요, 이는 사무엘상 2110절에서 15절에 나오는 다윗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 사이에서 다윗이 사울 왕보다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죠.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

 

다윗이 백성들에게만 인기가 높았던 것은 아닙니다.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도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했고, 무엇보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죠. 우리는 성경을 다윗의 입장에서 보는 게 익숙해 있습니다만, 사울 왕의 입장에서 보면, 사울 왕이 얼마나 외로웠을 지, 상상이 갑니다. 암튼, 사울 왕은 어느 순간부터 다윗을 지독히 미워하게 됐죠. 다윗이 떠오르는 별이긴 했지만, 아직 실세는 사울 왕이었으므로, 다윗은 사울 왕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울 왕을 피해 망명생활을 하던 중, 다윗은 이웃나라 블레셋의 가드로 도망하게 되는데요, 다윗은 가드의 왕 아기스가 자신을 알아본 것을 두려워하여 위기를 모면하고자 미치광이로 변신합니다. 그것을 사무엘상은 이렇게 전하고 있죠.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삼상 21:13). 도망자 신세로 살아남는 게 참 쉽지 않아 보입니다. 시편 34편의 제목에서 아비멜렉은 바로 가드의 아기스 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미치광이 연기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다윗은 가드를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을 쳐, 거기서 가족들을 만났을 뿐 아니라,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이때 다윗이 시편 34편을 지어 공동체와 함께 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역사적 사실의 진위는 알 수 없으나, 이 시를 이러한 구체적 이야기를 배경 삼아 읽으면, 더 애잔하게 다가오는 게 사실입니다. 만약, 능력 있는 작가와 PD다윗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든다면, 다윗이 가드의 아기스 왕을 피해 아둘람 굴로 모여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든 장면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연민을 줄 것입니다.

 

시편 34편은 알파벳 시입니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알파벳을 배열하여, 1절에는 알레프, 11절에는 라메드, 그리고 마지막 22절에는 페를 배치하여, ‘배우다’, ‘가르치다의 의미를 가진 알레프라는 동사를 만드는데요, 그것인 이 시가 지혜시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송축하며, 공동체에게 자신처럼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송축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경험한 하나님은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시고, 모든 어려움에서 틀림없이 구원해 주시는 분인데요, 위에서 말한 다윗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시인의 고백을 들으면, 미치광이로 연기하며 목숨을 구했던 모습을 떠올려 볼 때, 시인의 고백이 정말 가슴 짠하게 들려옵니다.

 

이 시의 백미는 8절이 아닌가 하는데요,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인은 아주 감각적인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맛보다 taste’라는 미각적인 동사와 보다 see’라는 시각적인 동사를 동시에 사용합니다. 이것은 시인이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 각 개인이 하나님을 맛보고, 보듯이, 직접적으로 경험할 것을 권면하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우리가 무엇인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와 맛있다하면서 이것 좀 먹어봐하면서 상대방에게 권합니다. 좋은 것을 봐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렇듯 시인은 예배 공동체에게 여호와의 선하심맛보다 알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하심인데요, ‘선하심은 히브리어 토브를 옮긴 말입니다.

 

토브’, ‘선하다’, 영어로는 ‘good’. 하나님을 이해할 때, 토브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데요, ‘토브는 일차적으로 행복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뭔가 좋은 일이 있을 때, 마음이 흡족한 일이 있을 때, 행복한 일이 있을 때, ‘~ 좋다. 행복하다. 기쁘다라고 표현하는데요, 벌써 말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행동에 기쁨과 행복이 가득 차죠. 그러한 상태를 토브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이기에 토브하더라라는 말은 하나님이 피조물을 보시고, ‘~ 좋다. 행복하다, 기쁘다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토브를 주시는 것인데,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기쁘고 행복한 일이기도 하지만,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 자체가 우리를 기쁘고 행복하게만들어 주시는 것이죠. 그러므로, 성경에서 토브’, ‘선하다’, ‘good’이라는 말이 나오면, 엔도르핀이 솟아나야 하는 것이죠.

 

신앙의 기쁨이 어디에 있을까요?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데있는 것이겠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직접적인 경험이 없다면, 신앙은 허무한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려면말과 행동에서 악한 것을 버리고,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선을 좇아 말하고 행하면,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자를 일컬어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그리고 의인이라고 부르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신앙인이 되시길 응원합니다. ‘토브’, 생각만 해도, 신나는 단어인데요, 하나님을 통해 그렇게 신나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일이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22. 05:25

아침묵상 시편 33편 - 새 노래

https://youtu.be/JajLVgcYe-k


오늘은 시편 33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의와 정직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운 자와 정직한 자, 하나님의 성품을 간직한 자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간직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하다못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은 우리에게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우리가 하나님을 새 노래로 찬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매우 장엄하고, 위대한 통찰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유념해야 하는 아주 근본적인 찬양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새 노래로 찬양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하여 시인은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서 서술하고 있는데요, 과거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현재는 하나님의 통치를 담고 있고, 미래는 하나님의 헤쎄드, 즉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창조신앙은 기독교인의 신앙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신앙입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창조신앙, 또는 창조신학을 창조과학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주로 근본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창조과학을 주장하고 있죠. 창조과학은 한 마디로, 성경의 진술을 가지고 과학을 풀어보려고 하는 것인데요, 주로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창조설화를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며, 지구의 나이를 6천년 정도로 보는 젊은 지구론을 주장합니다. 이는 지구의 나이가 45억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 과학계의 주장과 대치를 이루는 주장입니다. 겉으로 보면,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이들의 신앙이 무지 신실한 것 같으나,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상식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할 뿐 아니라, 과학을 배척 함으로써 갈등을 조장하고, 기독교 신앙의 우경화를 기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여 갈등을 조장하고 편 가르기 하는 일은 건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창조신앙, 또는 창조신학은 현대 과학과 적극적인 대화를 합니다. 신앙과 과학은 경쟁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협력 관계에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신앙과 과학은 둘 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모든 생명, 모든 만물을 존재 가능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폴 틸리히 같은 위대한 신학자는 그래서 하나님을 아예 God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Ground of Being(존재의 근거)’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죠. 성경, 신앙의 용어를 철학, 문화의 용어로 바꾸어 세상과 적극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소통하려고 했던 폴 틸리히의 노력은 현대 기독교인들이 따라야할 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를 말하고 있는데요, 이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물 안에서 역사(work)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역사(history)는 창조주 하나님과 상관 없는 딴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는 창조주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에게 구원으로 경험되기 때문에, 매일 발생하는 그 구원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시인은 미래의 소망을 노래합니다. 우리가 미래를 소망 가운데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헤쎄드, 언약적 사랑 때문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중 한 명인, 그리고 현존하는 최고의 신학자로 불리는 몰트만이 쓴 20세기 최고의 신학서적 중 하나로 불리는 <희망의 신학>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최고의 수식어를 붙여서 화려하게 소개하는 이유는, 기독교인이라면 <희망의 신학>을 반드시 읽어봤으면 하는 바람 때문인데요, 아무튼, 그 책을 보면 몰트만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시간이 진보를 이룩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활동이 미래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미래는 그리스도 사건 자체의 내적인 필연성이다”(237).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냥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언약적 사랑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감정적 사랑은 당연히 상대방이 나한테 하는 것 봐서 반응을 하는 사랑이겠죠. 상대방이 잘하면 나도 잘하고, 상대방이 못하면 나도 못하고, 대개 이것을 인과응보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대게 이런 사랑을 하죠.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러한 인과응보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헤쎄드입니다. 언약적 사랑입니다. 상대방의 행위에 따라서 달라지는 사랑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 없이 언약에 근거하여 신실하게 이루어지는 사랑입니다. 위에서 몰트만이 미래는 그리스도 사건 자체의 내적인 필연성이다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근거한 사건이므로, 우리의 미래는 바로 언약적 사랑의 성취인 그리스도 사건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는 희망 찬 것이죠. 우리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에 근거한 미래는 어둡지만, 우리의 미래는 그러한 것에 담보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 덕분에 우리의 미래는 소망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미래를 생각할 때,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창조신앙과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안에 있는 우리의 미래를 생각할 때, 우리는 소망과 기쁨 가운데, 하나님을 매일같이 새롭게 경험하며, 매일같이 새 노래로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우리가 신앙 안에 있다면, 시인이 선포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새 노래로, 날마다 소망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실한 주님의 자녀가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21. 10:33

아침묵상 시편 32편 - 참회와 인간성

https://youtu.be/cOgRPIZMJTM


오늘은 시편 32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150개의 시편 중에는 7개의 참회시가 있는데요, 그 중의 하나가 오늘 우리가 묵상할 시편 32편입니다. 시편에 있는 7개의 참회시 중에, 32편이 가장 중심이 되는 참회시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구조를 보면, 시인 개인의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참회는 개인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참회의 권고로 이어집니다.

 

1절과 2절은 죄를 고백하고, 그 죄에 대하여 용서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진술하고 있는데요, ‘복이 있다라는 말을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말이고, 중국의 학자 오경웅 같은 경우는 이것을 한자의 ()’을 써서, ‘즐겁구나’, 기쁘구나로 번역합니다. 죄 용서 받은 자의 기쁨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죠.

 

시편 32편 참회시의 백미는 3절과 4절인데요, 참회하지 않고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을 때 시인의 불행한 삶을 표현한 부분입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 침묵 상태에 있었다는 것, 죄를 지었음에도 인정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는 것, 바깥으로 죄에 대한 고백이 없었지만, 마음 속은 죄책감으로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요, 참회가 없으므로 시인은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쇠약해져서, 마치 죽은 것처럼 살았다는 것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참회에 대한 주제를 말할 때,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죠. 한 명은 윤동주이고, 다른 한 명은 어거스틴인데요, 두 명 모두 기독교인이죠. 윤동주의 참회는 그의 시 참회록에 담겨 있습니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어거스틴의 참회는 그의 책 참회록(Confession)’에 담겨 있죠. 기독교 신학에서 어거스틴이 쓴 참회록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요, 기독교 교부들 중 어거스틴 외에 그 어느 누구도 개인의 삶을 털어놓으며 신학적 진술을 전개한 교부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참회록을 읽은 많은 이들이 그의 글을 읽어 나가면서 회심의 경험을 했는데요, 그 중에 20세기 최고의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은 실로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책인 것이죠.

 

우리가 참회를 하게 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존재의 부족함 때문에 참회를 하게 되고, 다른 하나는 실존적인 죄를 지었을 때 하게 됩니다. 실존적인 죄도 두 가지로 나뉘죠. 하나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도덕적인 죄를 지었을 때, 다른 하나는 남에게 해를 끼친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윤동주의 참회록 같은 경우는 존재의 부족함에서 오는 참회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민족의 거대한 질곡의 역사 가운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존재의 부족함 때문에 참회를 하고 있는 것이죠. 신학적으로 말해서, 인간은 유한성으로 인해,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고, 참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죠.

 

어거스틴의 경우는 실존적인 죄를 지은 것을 참회하는 경우인데요, 하지만, 살인 같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죄를 지은 경우는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하는 참회는 윤동주의 경우와 어거스틴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32편이 다윗의 참회라고 한다면, 경우가 좀 달라집니다. 사무엘하 11장에서 볼 수 있듯이, 다윗은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남에게 해를 끼친 죄를 지었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 장군을 죽이는 죄까지 범했습니다.

 

이런 경우, 참회는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참회와 용서를 잘못 다루면, 피해자 중심이 아니라 가해자 중심의 편리한 죄 용서로 참회가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려를 잘 표현한 영화가 있었죠. 이창동 감독이 만들고, 전도연과 송강호가 주연한 영화 <밀양>이 그것입니다. 전도연은 동네 체육관 원장에게 아들을 잃게 되는데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체육관 원장을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교도소로 찾아가죠. 그런데, 거기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살인죄를 저지른 체육관 원장은 아이의 엄마인 전도연을 향해, ‘자신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 받아서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피해자, 자식을 잃은 엄마 전도연은 실성합니다. 자신이 용서 안 했는데, 누가 함부로 그를 용서하냐고요! 그 존재가 아무리 하나님이어도, 자신보다 먼저 용서할 수는 없는 거라고 하며 분노하죠.

 

실존적인 죄를 지었든지, 안 지었든지, 연약한 인간에게 참회는 숙명입니다. 참회의 기도는 평생에 걸쳐 가장 많이 드려야 할 기도인 것이죠. 시인이 전해주고 있는 이야기에서처럼,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하고 있으면, 인간은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내적으로 죽어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지런히 참회의 기도를 드린다면, 우리는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만, 참회는 가해자 중심이 아닌, 피해자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회는 죄 지어 놓고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편리한 속죄의 방편이 아닙니다. 참회는 유한한 존재가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참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대면하고,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표현하며, 진실을 통해 평화를 만들고자 하는 거룩한 마음을 가진 이들의 인간성입니다. 그러므로 참회를 올바로 사용하면 참된 인간이 되지만, 참회를 자기 중심적으로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인간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오늘 하루, 아니 평생에 걸쳐, 윤동주가 그랬던 것처럼,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으며”, 진실하게 참회하며, 인간성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20. 11:37

아침묵상 시편 31편 - 그리하여도 나는

https://youtu.be/MrYzff_RZkc


오늘은 시편 31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거지를 가장하여 암행어사로 남원에 다시 돌아왔을 때, 변학도에게 술 한 잔 받으며 이러한 시 한 수를 읊죠.

 

金樽美酒(금준미주)는 千人血(천인혈)이요,

玉盤佳肴(옥반가효)는 萬性膏(만성고).

燭淚落時(촉루낙시)에 民淚落(민루락)이요,

歌聲高處(가성고처)에 怨聲高(원성고).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많은 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일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았더라.

 

변학도의 눈에는 백성의 눈물이 안 들리고, 변학도의 귀에는 백성의 원망소리가 안 드렸지만, 이몽룡의 눈에는 백성의 눈물이 보였고, 이몽룡의 귀에는 백성의 원망소리가 들렸던 것이죠. 누군가 눈물을 흘리고 있고, 누군가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그 눈물과 신음소리를 알아봐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됩니다.

 

시편 31편을 읽고 있노라면,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편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저마다 고통의 크기가 다릅니다. 물론 우리는 자신이 당한 고통의 크기를 서로 경쟁하고 자랑하듯 살아가면 안 되겠죠. 때로는 고통도 무기가 되죠. 본인의 고통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겪은 고통보다 작은 고통을 겪은 사람에 대해서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자랑하죠. 이러한 심리에 대해서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매우 위험한 심리인 것을 지적하고 있죠. 아들러는 말합니다. “불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려는 사람은 건강하지 못하다.” 불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려는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무기삼아 상대방을 지배하려 든다는 것이죠. 이에 대해서는 한국에서 열풍을 몰고 왔던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한 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시편 31편을 읽고 있노라면, ‘사람은 어디까지 고통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고요,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상황에서, ‘죽지 않고, 살아갈 힘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겪고 있는 이러한 극심한 고통에 처해지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만약 이러한 극심한 고통에 처해지게 된다면, 그때 죽지 않고 살아갈 지혜를 얻게 된 것 같아서 또다른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인생을 반성하게 되기도 하는데요, 시인이 당하는 고통은 그가 그만큼 치열한 삶을 살았기 때문인데, ‘나는 그렇게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시인은 9절과 10절에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고통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시인이 탄식하고 있는 고통은 겹겹입니다. 질병 때문에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고, 기력이 쇠하고 있고, 대적들의 중상모략과, 사회적 고립감,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로부터의 배신감 등,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고통이 겹겹이 시인을 괴롭히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총체적인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죠.

 

사방이 꽉 막힌 것 같은 고립감 속에서, 아무도 자신의 눈물과 신음소리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할 때, 인간은 외로움 속에서 죽어가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고통 때문에 죽지 않고, 외로움 때문에 죽죠. 그런데, 그러한 극심한 고통과 극심한 외로움 속에 있을 때, 누군가 나의 눈물과 신음소리를 알아봐주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 자체가 희망이 됩니다. 그 희망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구요.

 

보물과 같은 시, 시편 31편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5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이 구절은 신약성경에 세 번이나 인용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에 의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순교 당하면서 스데반에 의해,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7:59). 복음 전하는 베드로에 의해,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우리의 고통과 시인의 고통의 간격이 커서, 시편 31편을 읽으며 우리는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당하고 있는 극심한 고통에 다가서면 설수록, 시인의 탄식이 남의 탄식이 아니라 자신의 탄식으로 체화되고, 시인이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처럼, 시인의 고백이 자신의 고백이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자신의 영혼을 주의 손에 맡겼기에,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그리고 힘을 내어 일어나, 23절과 24절에서, 주를 의지하고자 하는 성도들(하시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당하는 고통/불행은 다른 이들을 지배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불행을 통해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하는 마음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대신,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고통과 불행은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경건이요,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요, 길을 잃은 자들에게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고통을, 우리의 불행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은혜일 것입니다. “그리하여도 나는”, 예수님처럼, 스데반처럼, 베드로처럼, 나의 영혼을 주님의 손에 맡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19. 06:29

아침묵상 시편 30편 - 슬픔 뒤에는 기쁨이

https://youtu.be/B6OpY5Y9LNQ


오늘은 시편 30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시편 30편은 찬양시로 분류되는 이 시편에는 한아름 커다란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시편을 성문서 또는 지혜서라고 하는데, 지혜서의 정수를 볼 수 있는 시편이죠.

 

우선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요, 시인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세 가지인데, 이게 모두 엮여 있습니다. 시인은 병들어 죽게 되었던 같은데요, 그렇게 되면 시인이 죽기를 바랐던 원수들이 기뻐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병을 고쳐 주시고, 죽음에서 살려 주시고, 원수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이죠.

 

그러한 상황을 시인은 매우 대조되는 두 동사를 사용하여 보여주고 있는데요, 하나는 내려가다라는 동사이고, 다른 하나는 끌어올리다라는 동사입니다. 요즘은 수돗물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물 사용이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십년 전만해도 왠만한 집 마당에는 우물이 하나씩 있었죠. 개인 집에는 없더라도 동네 중심에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저도 어릴 적 살던 동네 중앙에 우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어린 호기심에 우물 속을 들여다보곤 했죠. 매우 깊었습니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 보면 어릴 때 보았던 우물의 깊이가 다르게 느껴질 지 모릅니다.

 

시인이 1절에서 쓰고 있는 나를 끌어 내사(딜리타니)’라고 하는 단어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릴 때 쓰는 말입니다. 3절에서도 비슷한 단어가 쓰이는데요, 시인은 주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냈다고 고백하고 있죠. 모두, 어딘 가 깊은 곳에 빠졌는데, 그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짐을 당하는 상황을 표현한 단어들입니다. 아마도, 어릴 적, 우물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이 말이 더 깊이 다가오실 겁니다. 바로 그런 상황을 묘사한 것이니까요.

 

한마디로, 시인은 죽다 살아난 경험을 한 것이죠. 그런데, 시인이 죽다 살아난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2절에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물에 빠진 나를 동네에 살던 누군가 구해준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신을 구원해 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물에 빠져서 죽을 뻔했는데, 누군가 살려줬다면, 그 사람에게 우리는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할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그와 똑 같은 심정으로, 자신을 스올, 무덤과 같은 병에서, 죽음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전하고 있고, 찬양하고 있는 것이죠. 구원을 실제로 경험하는, 이러한 영적 감수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영적 감수성이 없으니,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인데, 그것을 경험으로 경험하지 못하니, 저절로 나와야 할 감사와 찬양이 억지로 강요에 의해 겨우 나오는 것 아닐까요?

 

5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슬픔 뒤에는 기쁨이 와야 합니다. 이것은 하늘의 이치죠. 그런즉, 슬픔 뒤에 기쁨이 오도록 그 길을 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나, 슬픔 뒤에 기쁨이 오지 못하도록 그 길을 막는 자는 누구의 자녀라고 불러야 할까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는 그의 <팔복>에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를 여덟 번 쓰고, 그 끝에 "저희가 영원히 슬퍼할 것이요"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슬픔 뒤에는 기쁨이 와야 하는데,

누군가 기쁨이 오는 그 길을 막고 있기에, 영원히 슬플 수밖에 없는 현실을 한탄한 것이겠죠. 아직까지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이러한 비통한 현실이 반복되는 것은 비극입니다.

 

슬픔 뒤에는 기쁨이 와야 합니다. 이것은 하늘의 이치입니다. 여기에 순복하여 영원한 슬픔을 영원한 기쁨으로 바꾸는 자는 하늘의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나, 슬픔을 영원한 슬픔으로 머물도록 방치하는 자는 하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시인이 10절에서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슬픔을 당한 후에, 기쁨이 반드시 오도록, 그래서 그 기쁨 덕분에 앞서 겪었던 슬픔이 기억조차 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반드시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11절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인이 6절과 7절에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어리석은 일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야겠는데요, 시인은 자신이 형통할 때, 자만심에 빠져 모든 것이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생각하죠. 그러나, 시인은 10절에서 다음과 같은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주의 은혜로 나를 산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나누면서, 4절에서, “주의 성도들을 불러모아 함께 하나님께 예배 드리자고 권고합니다. “주의 성도들은 히브리어로 하씨다이브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말하는 히브리어 헤쎄드에서 온 말이죠.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 경건한 자, 언약 백성을 일컬어 하씨딤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헤쎄드에서 온 말입니다. 경건한 자, 하나님의 백성은 하씨딤”, ,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받고, 그리고 그 사랑을 아낌없이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충만히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을 이웃들과 충만하게 나눕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거하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해야 할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슬픔 뒤에 기쁨이 오도록 그 길을 내는 일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고,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시는 주님과 함께, 슬픔 뒤에 기쁨이 오도록, 그 길을 내는 헤쎄드의 백성, “하씨딤이 되어,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18. 07:11

아침묵상 시편 29편 - 오즈와 샬롬

https://youtu.be/S10uTEMQsko


오늘은 시편 29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오즈와 샬롬, 시편 29편을 묵상하면서 정한 주제인데요, 오즈는 을 뜻하는 히브리어이고, 샬롬은 평강을 뜻하는 히브리어이죠. ‘오즈라는 말을 들으니, 왠지 오즈의 마법사가 생각이 나는데요, ‘오즈의 마법사에서 오즈가 무엇일까 늘 궁금했는데, 아마도, 히브리어에서 뜻하는 바로 이 오즈에서 온 것은 아닐까요? 확인된 사실은 아닙니다. 오즈가 이라는 뜻이다 보니, ‘오즈의 마법사힘 있는 마법사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그냥 상상해 보았습니다. 혹시, ‘오즈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계신 분이 있으면, 저한테 알려주세요.

 

오즈와 샬롬’, ‘힘과 평강’, 시편 29편 전체에 흐르는 주제인데요, 시인은 하나님의 힘은 어떤 힘인가를 묘사하고 있고, 그 힘의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힘을 주셔서, 평강을 누리게 하신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전쟁터와 같은 이유는 사실 모든 사람이 을 얻기 위한 투쟁 때문이죠. 또한 우리의 인생이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자유를 빼앗긴 듯 불안하고 불행한 이유는 우리보다 힘 센 존재에게 우리 자신을 노예처럼 바쳐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만이 이시고,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평강을 누리게 하신다는 고백은 너무너무 중요한 통찰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어떠한 힘을 가지신 분인가를 아주 장엄하게 그려내고 있는데요, 우선, 1절과 2절에서는 천상의 힘 있는 존재들이 모두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예배해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천상의 힘 있는 존재들도 하나님의 힘에는 전혀 미칠 수 없다는 선언이죠.

 

그리고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의 힘을 여호와의 소리라고 하는 청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그려내고 있는데요, 옛날,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많은 물즉 바다, 그리고 큰 나무(백향목), 높은 산(레바논과 시룐), 광야나 홍수 같은 자연존재들을 으로 생각하고 숭배했습니다. , 옛날 사람들은 시인이 열거하고 있는 그러한 존재들이 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힘에 굴복하며 살았죠.

 

그런데, 시인은 그들의 생각에 전면 도전하며, 그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힘 있는 존재들은 모두 하나님의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힘에는 상대도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 줌으로서, 그들을 우상숭배로부터 해방시키려 합니다.

 

시편 29편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한국어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 문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요, 9절에 보면,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낙태라는 말은 그렇게 좋은 의미로 쓰이는 낱말이 아니죠. 이것을 잘못 읽으면, 하나님이 암사슴에게 폭력을 가한 것처럼 느껴지는 데요, 그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에 놀라서 암사슴이 새끼 사슴을 씀풍낳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새끼를 낳다라는 뜻을 가진 ‘calve(캐브)’라는 단어를 씁니다. 성경을 읽으며, 이렇게 폭력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번역들은 원어 또는 다른 성경을 대조하며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오해에서 비롯된 폭력의 희생자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즈와 샬롬’, ‘힘과 평강’, 오직 하나님만이 이시고, 힘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통해 평강을 누리게 된다는 시인의 선포와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는 나를 노예 삼으려는 권세()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권세에 굴복하면 안 되겠죠. 또한, 자기 자신이 권세자가 되어 주변의 존재들을 노예 삼으려는 마음에 우리는 쉽게 힘을 추구합니다. 힘을 가지게 된 나는 행복할 수 있으나, 힘을 가진 순간, 나는 필연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노예 삼아 그들의 평강을 빼앗아 가게 됩니다.

 

그런즉, 우리는, 시편 29편에서 시인이 선포하고 고백하는 것을 본받아, 오직 하나님만이 힘이시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고백하며, “힘 있는 척하는 모든 허세를 버리고”, “우리를 종으로 만들겠다고 위협하며 혼란을 일으키는 모든 무서운 세력들에게는 저항할 줄 알아야 합니다. (크리스토퍼 애쉬, <티칭시편>, 380).

 

세상의 모든 존재, , 천상의 존재, 자연의 존재, 인간의 존재, 이렇게 모든 존재가 동일하게 하나님만이 힘이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통해서만이 평강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고백한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힘을 가지고 그 힘으로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폭력을 저지르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이런 세상은 얼마나 평화로운 세상이겠습니까? 시편의 말씀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유토피아를 꿈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평화의 세상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것을 믿고, 평강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숙명 아닐까요? 오늘 하루, 그 숙명을 생각하며, ‘오즈와 샬롬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16. 07:22

아침묵상 시편 28편 - 하나님, 나, 공동체

https://youtu.be/4NS9BGML-vM


오늘은 시편 28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시편 28편을 읽어보면, 악인에 대한 이러한 시인의 기도가 나옵니다.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그들은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3).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는데요, <자치통감>당기’, ‘현종천보원년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된 성어입니다. 거기에 이런 이야기나 나오는데요, “이임보는 현명한 이를 미워하고 능력 있는 이는 질투하는 그 성정이 음험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말하길 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을 품었다고 하였다”(오경웅, <시편사색> 165). ‘구밀복검’, ‘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을 품다라는 뜻입니다. ,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마음에는 악독이 있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중국의 당나라 황제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는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죠. 당 현종 때 재상을 지내며 정사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던 인물이 바로 이임보라는 사람입니다. 이임보는 당 현종의 눈과 귀를 가린 사람으로 유명한데, 그가 자기 서재에서 장고(오랜 시간 동안 생각함)를 했다면, 다음 날 어김없이 누군가 주살되었다고 합니다.

 

별 재능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재상의 자리까지 오른 이유는 그가 구밀복검에 능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그는 아무리 싫은 사람이 있어도 앞에서는 절대로 내색하지 않고 그를 칭찬하고 추켜세웠다고 하죠. 그리고 뒤에서 계략을 꾸며, 반드시 정적을 제거했다고 합니다. ‘구밀복검에 너무 뛰어나서, 아무도 이임보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네요.

 

그는 자신의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리거나, 자신보다 뛰어난 인물이 있으면, 조정에서 쫓아내거나 조정에 얼씬도 못하게 술수를 부렸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보니까, 조정은 점점 무능한 인력들로만 채워지고, 나중에 전란이 일어나자, 결국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지 못한 당나라 조정은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합니다.

 

악인은 다른 사람이 악인이 아니라, 결국 자신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시편 28편에서도 시인은 이것을 경계하며, 그러한 악인을 물리쳐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왜 악인은 결국 자신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하는 악한 일을 저지를까요? 이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5). 이것을 한자어로 목중무진재(目中無眞宰)’라고 합니다. “저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악인의 눈에는 하나님이 안 보이기 때문에, 악한 일을 통해 모두 망하게 하는 것이죠.

 

중국의 학자이자 그리스도인인 송경웅이 지은 <시편사색>에 보면, 악인들의 목중무진재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없다. 그러니 숨겨진 욕망이 솟구친다. 내가 해결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악을 징벌하고 싶어하는 욕망! 자신이 해결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더 나아가 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한다. 일순 보기에는 선한 것 같으나 지극히 위험하다!”(165).

 

이러한 악인의 묘사를 보며 우리들은 혀를 쯧쯧 차기도 하지만, 사실, 악인에 대한 이러한 본성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발현될 수 있는 위험이 있죠. ‘내가 판단하고 내가 악을 징벌하고 싶어하는 욕망! 자신이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는 욕망!’ ‘나는 그렇지 않다는 교만을,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어떻게 해야, 그러한 악인의 회중에 들지 않고, 그들과 함께 멸망당하는 일을 피할 수 있을까요?

 

시편은 온통 그것을 가르쳐 주는 듯합니다. 악인은 온통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인은 온통 관심이 하나님에게 집중되죠. 또한,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이웃/공동체를 향한 관심으로 눈을 돌리게 합니다.

 

시편 28편을 면밀히 보면, 그러한 구조로 전개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에게 탄원하는 탄원시로 시작해서, 탄원 드린 것에 대하여 응답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마지막에는 공동체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지켜주시길 간구하는 기도로 마칩니다.

 

내 눈에 지금 하나님이 들어오는지 안 들어오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나의 기도가 누구를 향해 있는 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나의 기도에 온통 밖에 없다면, 그 기도는 악인의 기도와 다를 바 없는 것이죠. 그러나, 그 기도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가득할 뿐 아니라, 내 주변의 이웃, 공동체를 향한 간구가 넘친다면, 나는 적어도 악인의 회중에 들어 그들과 함께 멸망당하는 자가 아닌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너무 자신의 문제에 파묻혀, 또는 자기 자신만 생각하느라,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을 잃어버리지 마세요. 또한 너무 자신의 문제에 파묻혀, 그 모든 문제를 자기 자신이 해결하느라 여유가 없어, 고통당하는 이웃/공동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도록 내버려두지 마세요. 시인이 6절에서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러니 기뻐하고 노래하며, 그 기쁨과 감사를 이웃/공동체와 함께 나누는 복된 인생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14. 09:14

아침묵상 시편 27편 - 주님의 선하심을 보게 되리라

https://youtu.be/f0UHN038_TA


오늘은 시편 27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시편 27편은 연예인급 시편이고, 보물창고 같은 시편이죠. 교회를 좀 다니신 분들은 시편 27편을 읽으면 저절로 찬양을 흥얼거리실 텐데요, 1절에서는 다윗과 요나단의 찬양이 떠오르고, 4절에서는 옹기장이의 찬양이 떠오릅니다.

 

1절은 이런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제 말이 맞죠? 문자로 읽히지 않고, 가락을 담은 찬양으로 읽히죠? 4절도 그렇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편 27편은 만나면 좋은 친구같은 시이고, ‘곁에 있으면 든든한남친, 남편, 또는 장성한 아들 같은 시입니다. 시에서 굉장히 남성적인 에너지가 느껴지는데요, 아마도 전쟁 용어가 많이 쓰였기 때문 일 것입니다. 또한 아주 강력한 사랑의 에너지가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시인이 하나님을 아주 간절하게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 전반에는 절박함과 간절함이 흐르고 있는데요,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삶이라는 게 원래 절박하죠.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에너지, 또는 하나님의 얼굴을 찾게 하는 에너지는 이러한 삶의 절박함에서 나오는 것이겠죠. 시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매우 절박하게 찾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7).

 

우리가 절박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할 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죠. 구원의 손길, 도움의 손길이 없다고 생각할 때, 사람은 절박한 마음을 접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박함 심정을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반드시 응답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절박함은 계속해서 전개되는데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죠. 시인은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셨다고 말합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시인은 이 말씀에 의지하여, 계속하여,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이렇게 간구합니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9). 너무너무 간절하죠. 이러한 간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편 27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매우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10). 부모들이 자식을 버려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 텐데요, 이 구절을 읽으며, 부모는 오히려 하나님처럼 자녀를 더 깊이 돌보고 사랑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것이겠죠.

 

제가 보기에, 이 시의 클라이맥스(가장 중요한 구절)13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개역개정 성경은 13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무 평범하게 번역을 했는데요, 히브리 원어에 있는 부정 접속사 룰레를 전혀 살려내지 못한 번역입니다. 그런 점에서 영어성경은 이 부분을 잘 번역해 놓았는데요, 영어성경으로 13절을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I would have despaired unless I had believed that I would see the goodness of the Lord in the land of the living.” 부정 접속사 ‘unless’를 써서 히브리 원어에 담긴 뜻을 잘 표현해 놓았죠. 우리 나라 말로 풀어서 번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산 자들의 땅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보게 되리라는 것을 내가 믿지 않았다면, 나는 절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산 자들의 땅이란 산 자들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땅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가 거하는 곳, 그것을 산 자들의 땅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이 절박함과 간절함 가운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 이유는 바로 산 자들의 땅에 거하기 위함 이었죠.

 

인생은 절망으로 치달을 수도 있고, 소망으로 고양될 수도 있습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덤벼드는 것과 같은 세상,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을 치고 전쟁을 벌이려는 것 같은 세상,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픔을 당하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절망하지 않고 살아가기 란, 참으로 기적 같은 것입니다.

 

시인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절박함과 간절함 가운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 이유는, 그에게 포기할 수 없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바로, “산 자들의 땅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보게 되리라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되는데요, 그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죠.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들이 달려들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예수님에게 마지막 남은 옵션은 죽음 밖에 없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보다,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했습니다.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었다면,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절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신뢰했기에,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시편 2713. “산 자들의 땅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보게 되리라는 것을 내가 믿지 않았다면, 나는 절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잠시 머물러서, 반드시 묵상해야만 하는, 생명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곁에 있는 한, 우리는 시인이 마지막 14절에서 하는 권면을 희망차게 받아들 것입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아멘이 용솟음 치리라 믿습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