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네스 팰트로(Gwyneth Paltrow)의 소신발언과 교회]

 

기네스 팰트로가 마블 히어로물에서 떠난 뒤, 미국의 토크쇼에 나와서 다음과 같이 소신 발언을 했다.

 

"요즘 영화계는 질보다는 양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독창적으로 느껴지는 좋은 영화들도 많다. 슈퍼히어로 영화 전반적으로 본다면 큰 압박이 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다 보니 때때로 영화의 작품성이나 독창성 등 진짜 관점이 방해를 받는 경우가 있다. 독립영화가 블록버스터 대작에 비해 예술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이해관계가 적을 때 예술의 다양성이 더 커진다.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를 표현하고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영화들이 더 큰 울림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것을 '상품'을 만들어 팔아 매출을 올려야 살 수 있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모든 생태계가 망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인식을 잘 하지 못해서 그렇지, 교회도 복음도 '상품'이 된 지 오래됐다. 교회도 복음도 하나의 '상품'으로 사람들에게 어필하지 않으면 '구매'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돌아보면, 기네스 팰트로가 영화계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교회도 질보다 양에 더 중점을 둔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더 좋은 교회이고 더 부흥한 것이라고 말한다.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다가서려 하다보니 교회는 '작품성이나 독창성'을 잃어버린다. 일부러 작품성과 독창성을 포기한다.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을 받고 '부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복음의 진짜 관점이 방해를 받는다.

 

기네스 팰트로의 다음 발언은 이 시대에 교회가 사는 길에 대한 제언과 일치한다. "독립영화가 블록버스터 대작에 비해 예술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이해관계가 적을 때 예술의 다양성이 더 커진다."

 

블록버스터 대작은 요즘 우리가 '대형교회'라 부르는 것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우리는 아주 큰 실수를 범하고 있는데, 대형교회를 기준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구분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형교회를 기준으로, 사이즈가 작으면, '작은 교회'라고 부른다. 어떤 교회는 자신들은 형편없는 대형교회와 같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건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건강한 작은 교회'.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작은 교회라니. 작다는 것은 '크다'라는 다른 기준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인데, 교회의 기준이 '대형교회'이다보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작은 교회'라는 용어가 남발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생긴 것이다. '교회는 두 종류의 교회만 존재한다. 대형교회와 대형교회가 되고 싶은 교회. 목사는 두 종류의 목사만 존재한다. 대형교회 목사와 대형교회 목사가 되고 싶은 목사.' 이 모두, 교회가 자본주의에 포획되었다는 뜻이다. 

 

독립영화가 예술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고, 이해관계가 적을 때 예술의 다양성이 커진다는 기네스 팰트로의 말은 영화계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교회의 현실에도 절실하게 필요한 말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다양성을 말살시킨다는 것이다. 일례로 유행은 개성의 표현인 것 같지만 결국 같은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여 매출을 극대화시키는 상술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콜린 건턴은 자신의 삼위일체론인 <하나 셋 여럿>에서 밝힌 바 있다.

 

교회가 위기를 맞이한 이유는 다양성이 형편없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모두 자본주의의 기획에 당한 것이다. 모든 교회가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어처구니없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보니, 복음은 대중들의 구미에 맞는 것으로 양념이 버무려지고 팔린다. 그래야 상품화된 교회와 복음이 일반 대중들의 구매력을 자극하여 선택 받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교회가 위기에서 탈출하여 교회도 살리고 세상도 살리는 방법은 자본주의의 기획에 저항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기획은 다양성의 말살이다. 교회가 블록버스터 대작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작품성과 독창성이 살아있는 독립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생태계에 다양성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해관계를 최소화하여 다양성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나는 교회에서 '작은 교회'라는 용어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그 앞에 자신들의 고유한 성격/성품을 드러내는 이름만 있으면 된다. 교회 앞에 '작은'이라는 것이 붙는다는 것은 결국 교회의 기준이 '대형교회'라는 뜻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 사이즈가 어떻게 교회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너무 천박한 생각이다.

 

작고 건강한 교회를 세우지 말라. 건강으로 따지면 대형교회를 따라갈 수 있나? 가난한 자가 부자들의 건강을 따라갈 수 있나? 작품성과 독창성이 있는 교회를 세우라. 이해관계가 적은 교회를 세우라. 그래야 복음이 '상품'으로 팔리지 않고, 이 시대를 향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스데반 사건이 말해주는 복음의 핵심

 

스데반 사건의 보편성

스데반 사건은 스데반의 순교에만 너무 집중되어 그 사건이 말해주고 있는 의미를 놓치기 쉽습니다. 일곱 집사의 선출을 마친 뒤, 스데반 순교 이야기가 곧바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스데반의 특별한 사역을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다른 여섯 집사 모두 스데반처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고, 스데반 이야기가 대표격으로 소개되는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극적이면서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스데반처럼 복음을 전하다 고난 당하는 일이 매우 보편적인 일이었습니다. 스데반만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모든 ‘보편’ 그리스도인들이 스데반처럼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 현상을 계속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스데반과 헬라파 유대인의 갈등

스데반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스데반이 전한 복음이 왜 헬라파 유대인 공동체와 충돌을 일으켰는가 입니다. 우리는 ‘왜’를 물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은 그 정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자,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논쟁을 합니다. 이 논쟁은 점점 과격해집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지만 스데반의 기세를 꺾지 못하자 불법과 폭력을 통해 스데반을 죽음으로 몰아세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왜, 무엇이 헬라파 유대인들을 그토록 분노하게 만들었을까요? 이것에 대한 답을 찾아가다 보면 복음의 핵심을 만나게 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고소 이유

스데반이 야비하게 헬라파 유대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막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은 말 그대로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헬라파 유대인들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유대당국에 고소를 하는데, 스데반이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했다고 하면서 고소합니다. 스데반은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한 적이 없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욕을 한 적도 없고 성전을 향하여 침을 뱉은 적도 없습니다. 스데반은 그냥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이 말은 복음이 유대인들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하고 있다고, 헬라파 유대인들이 느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복음이 무엇이길래 헬라파 유대인들이 그렇게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요?

 

복음이 뭐길래

헬라파 유대인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가진 특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복음이 유대인들의 특권을 빼앗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과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속에 있고, 자신들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인들과는 다른 처지의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선민의식’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과 성전을 통해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전한 복음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정체성과 세계관을 무참히 깨뜨리고 있는 듯했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통해 은혜의 보편성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한 마디로 은혜의 보편화입니다.

 

스데반이 죽은 이유

복음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말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과 온 우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이 말을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은혜의 보편성이 불편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가진 특권이 무너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은 특권의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게 되자 폭발합니다. 복음을 통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에 대하여 시기(jealousy)가 발생된 것입니다. 시기는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갑니다. 시기는 반드시 폭력을 불러옵니다. 스데반이 죽게 된 이유는 복음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희생자가 된 것이죠.

 

복음과 죄악의 보편성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죄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저 사람과 내가 같다는 평등성을 참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차별을 두어야 속시원합니다. 인간은 저 사람이 나랑 같아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내가 저사람보다 못하게 되는 것도 참지 못합니다. 관계가 평등하면 불편해합니다. 오히려 차별이 발생해야 속시원해합니다. 복음은 이러한 인간의 교만, 즉 죄악에 대한 치유입니다. 복음을 삶에 받아들인 스데반은 자신의 죽음이 어떠한 특권을 불러오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죽을 때 자신에게 저질러진 폭력의 책임을 그 폭력의 가해자들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죽음은 의로운 죽음이고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가해자들은 불의한 자가 되어,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사이에 차별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데반이 죽으면서까지 전하고 싶었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인과 죄인에게 동일하게 내린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편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데반처럼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복음은 특별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도 평화롭게 지내는 것입니다.

 

기이한 현상

요즘 (기독교) 교회를 보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헬라파 유대인’이 된 것 같습니다. 마치 복음이 누군가를 차별하는 도구인 양, 그리고 교회만이 하나님을 독점하고 있는 양, 복음의 이름으로 다른 존재를 차별하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복음의 왜곡입니다. 성경을 신실하게 읽지 않고 자의적으로 읽고 해석하여 자기의 의(righteousness)와 기득권을 보호하고 자랑하는데 사용하는 범죄입니다. 복음은 은혜의 보편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동일하게 내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인들과 죄인들에게 동일하게 내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남녀노소, 자유인이나 종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인데, 교회가 무슨 권리로 하나님의 은혜를 차등 적용하여 사람들을 차별하고 정죄합니까. 우리 모두 복음 앞에서 겸손해지고, 감사하며, 힘껏 서로 축복해주고 사랑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러시아의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 P. Mussorgsky, 1839-81).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강력한 음악을 남긴,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19세기는 ‘낭만주의’ 사조가 예술계를 휩쓸던 시기입니다. 이성에 경도되어 모든 것을 ‘과학적 사실’로 증명하려고 했던 시대에 사실, 또는 현실을 초월한 공간을 창조함으로 사람의 마음과 삶에 숨쉴 공간을 제공했던 것이 낭만주의입니다. 그런 낭만주의에 가장 가까웠던 예술은 음악이었습니다. 반대로 사실주의에서 가장 먼 것도 음악이었습니다. 음표로 세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림과 비교해 보면 이게 무슨 뜻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좋은 도구입니다. (물론 그림도 사진이나 동영상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긴 했지만요.) 그러나 음악의 음표를 통해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있죠.

 

무소르그스키는 그림(회화)에 비해 음악의 표현력은 제한된다는 생각에 도전장을 내밉니다. 음악을 그림처럼 눈에 보이듯이 표현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낭만주의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낭만주의 음악가들 사이에서 무소르크스키의 지위는 독특합니다. 남들이 하지 않던 것, 시도해 보지 않았던 것, 시도해 볼 생각조차 못하던 것을 통해서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무소르그스키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전람회의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그의 절친 빅토르 하르트만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작품입니다.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빅토르 하르트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무소르크스키는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죽은 친구의 유작을 모아 전시회를 엽니다. 전시회의 작품 중 깊은 인상을 받은 10개의 작품을 골라, 무소르그스키는 친구의 작품을 음악으로 표현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전람회의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전람회의 그림>에는 죽은 친구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담겨 있는 동시에 음악적 제약을 뛰어넘은 혁신-창조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후 수많은 음악가들이 원래 피아노 독주곡으로 작곡된 <전람회의 그림>을 여러 버전으로 편곡하여 연주합니다. <전람회의 그림>은 음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것이죠. 그 중에서 모리스 라벨(J. M. Ravel)의 관현악 편곡 연주가 가장 유명합니다.

 

<전람회의 그림> 열 개의 작품 중 여덟 번째 작품의 표제가 ‘카타콤’(Catacombae)입니다. 이 곡은 하르트만이 랜턴을 들고 파리의 카타콤을 조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카타콤(지하 공동묘지)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곳은 로마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곳이라 그리스도교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카타콤에서 예배드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우리는 카타콤교회라 부릅니다. 카타콤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산 자와 죽은 자를 포용하는 공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하 공동묘지에서 예배드리며 삶과 죽음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주 현실적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런 깨달음은 그들의 신앙을 더 깊고 단단하고 여유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더 이상 신앙의 핍박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삶과 죽음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죽은 자들과 교통하고, 마치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과 교통하면서 그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눌 줄 알았던 카타콤교회의 교인들의 신앙에 비추어 볼 때, 우리들의 신앙은 얼마나 보잘것없고 세속적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100세 시대를 살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영원히 살 것처럼 삶에만 집착하는 우리들의 욕망, 그리고 죽은 자들과 교통하는 영성을 잃은 시대에 살다 보니, 마치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약자들을 향한 우리들의 무관심 등이 우리의 신앙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런 우리의 자화상을 반성하며, 오늘은,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한 번 감상해 보면 어떨까요.

Posted by 장준식

교회에 있으면 안 되는 것

 

신약성경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제자들이 많아지면서 발생한 문제와 그 해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제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스도교의 제자는 헬라어의 ‘마세테스’를 번역한 말입니다. 영어로는 ‘disciple’이라고 합니다. 보통 우리는 ‘제자’를 ‘배우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당시 소피스트들이 철학교사로서 대중적인 활동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종속적인 관계’로 만들어 스승으로서 자신들이 행한 가르침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금전적인 요구를 했기 때문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이러한 종속적인 관계가 마음에 안 들었던 소크라테스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민주적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하여 ‘제자’를’ 함께 알아가는 동료(companion)’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그는 ‘마세테스’와는 다른 용어, 즉 ‘헤타이로스’라는 용어를 통해 제자를 표현합니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의 관계 재정립을 통해 소피스트들을 비판하며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대가를 제자들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의 제자 개념은 이보다 더 깊어집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한창 가르침을 주실 때 예수님의 가족이 방문합니다. 그때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께 가족들이 찾아온 것을 알립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그런 후,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위의 소피스트들이나 소크라테스의 제자 개념과는 확연히 다른 ‘제자’의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에게 제자란 ‘가족’입니다. 가족처럼 친밀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제자의 의미입니다.

 

사도행전 6장은 이런 가족과 같은 제자들 사이에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하여 보도합니다. “그들 가운데 헬라파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파 유대 사람들에 대해 불평이 생겼습니다. 매일 음식을 분배 받는 일에서 헬라파 유대 사람 과부들이 빠졌기 때문입니다.”(1절b) 한 마디로, 제자 공동체에 ‘차별’(discrimination)이 발생한 것입니다. 일반 사회 안에서 차별이 발생해도 기쁨이 없어지고 삶이 힘들어지는데, 가족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차별이 발생했으니 차별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 지, 그리스도교의 제자 개념에 비추어 보면, 정말 큰 일이 교회 내에 발생한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도들이 지혜를 냅니다.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집중하고, 구제(봉사/디아코노스)하는 일을 전담할 사람들을 선발하는데,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제자들로 칭찬 받는 사람들 중에서 일곱 명을 선출합니다. 여기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기도와 말씀 사역이 희미해지면 ‘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충만하지 못한 이들이 봉사의 자리에 있으면 ‘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리더십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집중하고,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늘 충만하도록 날마다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교회(제자 공동체)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은 차별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제자’는 단순히 ‘배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제자는 ‘가족’입니다. 친밀한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제자를 생각하고, 교회를 떠올릴 때 ‘가족 메타포’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는 가족 메타포를 통해 표현됩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서 가족만큼 친밀한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메타포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가족이 지닌 친밀한 사랑의 메타포를 떠올린다면, 교회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은 차별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현저히 부족한 요즘, 사회 곳곳에서 차별만 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선취(미리 맛보기)이므로, 교회는 차별이 늘어가는 세상에서 피난처가 되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별을 물리치고 우리가 서로 더 사랑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더 많아지고, 세상은 더 따스해질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삼위일체 신학과 전망]

ㅡ 한국인이 삼위일체 신학을 어려워 하는 이유와 해결방안

 

삼위일체 신학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낯설어 하고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그리스 철학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특별히, 플라톤 철학과 그 철학이 발전해서 생긴 신플라톤주의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현대 한국인이 조선 시대 성리학을 잘 알지 못하는데, 어찌 고대 시대의 그리스 철학을 잘 알 수 있겠는가.

 

삼위일체 신학을 공부하다 보면 난관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플라톤 철학과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왜 삼위일체 신학이 그러한 언어로, 그러한 형태로, 그러한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깊이 파악할 수 없다. 기독론(Christology)을 공부하다 보면,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sus) 논쟁을 만나게 된다. 동일하게, 플라톤을 공부하다 보면 ‘역사적 소크라테스와 등장인물 소크라테스’에 대한 주제를 만나게 된다. 또한 역사적 플라톤과 철학적 플라톤의 주제도 만나게 된다.

 

역사적 예수는 2천년전 팔레스타인 땅에 실제로 존재했던 ‘인간 예수’에 대한 논의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예수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고 실제로 어떤 생각과 행동을 했는지를 탐구한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 예수를 만나기 쉽지 않다. 우리가 예수를 접하게 되는 자료는 ‘신학화된’ 예수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만나는 예수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다. 신학화된 예수다. 소크라테스도 그렇다.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있지만,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제자 플라톤이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자신의 저서에서 ‘등장인물’로 전해지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역사적 소크라테스이지만 실제로는 ‘등장인물’ 소크라테스이다.

 

플라톤 철학은 서양 사상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플라톤 철학을 모르면 서양 철학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바울에 의해서 예수 사건이 헬라 지역에 전파되고, 결국 기독교가 로마를 통해서 서양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 이상,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필수가 되었다. 특별히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서 플라톤 철학은 일종의 신학 문법으로의 역할을 감당한다.

 

역사적 플라톤은 당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역사적 플라톤은 정치적 관심과 열정으로 당대 사회를 개혁하고자 정치철학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플라톤은 그 당시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소피스트들과 한 판 대결을 벌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의 괴변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플라톤은 현실 정치에 관심을 두고 자신의 철학 사상을 펼쳐 나갔다.

 

그런데, 후대에 플라톤의 철학을 발전시킨 사람들의 관심은 좀 달랐다. 특별히 신플라톤주의를 꽃피운 플로티노스에 이르러서 플라톤 철학은 플로티노스의 신비적 형이상학을 펼치는데 활용된다.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철학을 사용하여 자신의 철학 사상을 주조해 가지만, 역사적 플라톤의 관심사였던 현실 정치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을 잘 알아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잘 알아야 한다. 신플라톤주의는 플로티누스에 의해서 발전했는데,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특징은 ‘범신론적 일원론’과 ‘철학의 종교화’였다. 플라톤 철학은 이원론의 구조를 지닌다. 이데아를 상정하고, 육체와 영혼을 구별하여, 사상을 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형상계(이데아)와 현상계(현실계)에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중간 단계를 설정해서 플라톤의 이원론을 범신론적 일원론으로 재설정한다. 그리고 플라톤 철학의 현실 정치적 색채를 현실을 초월한 신비주의적 색채로 탈바꿈시킨다.

 

플로티노스는 그의 저서 『엔네아데스』를 통해 '일자'(The One) 또는 '성선'(The Good) 사상을 펼친다. 플로티노스가 플라톤 철학으로부터 이러한 사상을 전개시킨 결정적인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출현과 영지주의 신학의 만연 때문이었다. 영혼의 구원과 신에 대한 추구라는 당대의 종교적 분위기는 플로티누스로 하여금 플라톤 철학을 신비주의적 형이상학으로 발전시키도록 이끌었다. 다시 말해, 신플라톤주의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러한 시기에 발전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신플라톤주의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일례로, 일자에 대한 생각, 누스(지성)의 개념, 그리고 관상의 개념 등은 삼위일체 신학과 기독교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플로티노스와 더불어 신플라톤주의의 부흥을 이끌었던 프로클로스(Proclus)도 그리스도교 신학의 발전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철학자이다. 프로클로스의 일자의 ‘삼위일체적 구조’는 그리스도교 신학자 위-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플로클로스의 ‘삼위일체 구조’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삼위일체’ 개념을 형성하는데 깊은 영향을 미친다. 삼위일체 신학을 급격하게 발전시켰던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경에 드러난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삼위일체 신학을 신플라톤주의에서 발전시킨 철학들과 용어들을 통해서 정립한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은 어느 신학자가 발명한 개념이 전혀 아니다. 삼위일체론을 인간이 발명했다고 말하거나,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교 신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신학은 발명하는 게 아니다. 신학은 계시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로 구성한 것이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신학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하나님 고유의 존재 방식이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가 정확하게 모두 담아낼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학이란 계시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인간이 임의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사건이 발생하고, 그 예수 사건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정리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에, 그리스도교는 헬라 문명에서 꽃피고 있었다. 그때 그리스 문명은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특별히 삼위일체 교리가 정립되고 있을 당시 헬라 문명은 신플라톤주의의 지대한 영향 아래 있었고, 그들의 용어는 어떠한 사상을 보편적으로 표현하기에 적합한 철학/신학 용어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은 신플라톤주의의 철학과 신학을 발판삼아 그들의 사고구조와 용어를 통해 정립되었다.

 

그렇다고, 헬라 철학,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발전된 삼위일체론이 삼위일체론의 전부이거나 가장 정확한 계시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계시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을 어느 한 사람이나, 한 사회, 또는 한 역사적 시대가 독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여기에서 한국인이 삼위일체론을 어렵게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나온다. 헬라 철학으로 표현된 삼위일체론이 삼위일체론의 표준이고 절대적인 기준인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 자신의 언어로 열심히 표현해야만 한다. 이미 표현된 계시만이 계시가 아니다. 우리의 언어, 나의 삶의 자리에서 표현된 계시가 우리에게는 더 쉽게, 편안하게, 그리고 간절하고 진실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한국인이 삼위일체 신학을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삼위일체 신학이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처음에 정립되어 있다보니, 플라톤 철학,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에 전혀 익숙하지 않고 잘 모르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 있다. 또다른 하나의 이유는 우리의 일상언어로 하나님을 경험을 풀어내는 데 서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다른 누군가가 해놓은 것을 가져다 하나님 경험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데 익숙하다. 그렇다 보니, 내가 내 삶의 일상언어로 하나님 경험을 표현하는데 서툴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야한다는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이것을 신학적 사대주의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러면, 한국인이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 신학을 쉽게, 그리고 건전하고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좀 어렵지만 힘을 내서 플라톤 철학,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이다. 교부들이 성경을 통해 계시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용어를 어떻게 활용하여 표현하고 있는지를 공부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했는지 알 수 있게 되고, 더불어, 두 번째 과제도 수행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기게 될 것이다. 두 번째 과제는 우리의 일상언어로 우리에게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교부들이 그들의 일상언어로 하나님의 계시를 표현했던 방식을 모범삼아,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의 계시를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어떠한 인간이, 어떠한 사상이, 어떠한 시대가 독점적으로 표현하고 가둬놓을 수 있는 분이 전혀 아니시다. 그러니, 우리는 조금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남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내것으로 하나님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하나님이 더 소중하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진정 내것이 될 때, 우리는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남이 표현해 놓은 하나님을 내가 따라 표현하려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나의 언어로 하나님을 표현하게 될 때, 하나님은 남의 하나님이 아니라 비로소 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두 가지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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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어른 모세

 

한국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 받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대개 한국의 무속신앙인들이 그들을 추앙합니다. 대표적으로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등입니다.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구했고, 강감찬은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구했습니다. 이순신은 명량, 한산, 노량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구했습니다. 요즘 <고려 거란 전쟁>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주목 받고 있는 강감찬만 보더라도 수많은 신화적 이야기들이 전해집니다.

 

강감찬이 태어난 곳을 ‘낙성대’라고 부릅니다. 서울의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있다 보니 사람들이 또다른 ‘대학교’로 오해합니다. 낙성대는 강감찬의 탄생 설화에서 생긴 이름입니다. 강감찬이 태어나는 날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 별은 문곡성인데, 북두칠성의 네 번째 별이랍니다. 문(文)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입니다. 그래서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집을 일컬어 낙성대, 즉 ‘별이 떨어진 곳’이라고 부릅니다.

 

강감찬의 어머니는 인간이 아니라 여우라는 설화도 있습니다.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진이 태몽을 꾸고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을 때, 귀가 중 여인으로 둔갑한 여우를 만나 관계를 맺어 낳은 아들이 강감찬이라는 겁니다. 영웅설화의 전형적인 이야기입니다. 강감찬에 대한 신화 중 벼락설화도 있습니다. 강감찬이 벼락을 부러뜨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쟁 중에 벼락에 맞아 죽는 병사가 많고, 걸핏하면 일반 백성들이 벼락에 맞아 죽자 강감찬은 벼락을 분질러 없애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하루는 일부러 샘물가에 앉아서 일을 보는데 하늘에서 벼락칼이 내려와 강감찬을 치려고 했답니다. 그때 강감찬은 벼락을 얼른 잡아서 분질렀다고 합니다. 그후부터 벼락 치는 횟수도 줄어들고 부러진 벼락은 얼른 나왔다 다시 자취를 감추게 되어 사람들이 벼락에 맞는 일이 훨씬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훌륭한 인물은 이렇게 신화적으로 승화되어 칭송을 받는 법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 받던 인문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 단연 모세가 돋보입니다. 모세는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책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책을 ‘모세오경’이라고 부릅니다. 모세오경은 ‘모세 이야기’로 바꾸어 불러도 됩니다. 모세오경의 중심 사건은 ‘출애굽 사건’인데, 그 출애굽 사건의 중심은 모세입니다. 모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표현해 주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나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오경에 그려진 모세의 모습을 보면 모세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던 사람이고, 온유했던 사람이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모세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입니다. 또한 후계자를 세워 공동체를 든든하게 하고 후일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모세는 자기가 우상화 되는 것, 즉 자기가 신적인 인물로 높임 받는 것을 방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끝을 보면 안다고 합니다. 모세의 인생 마지막을 보여주는 신명기 34장은 모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한 마디로, 전무후무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한국 역사의 영웅적 인물이나 성경의 위대한 인물을 언급하는 이유는 요즘 우리 시대에 들리는 탄식 소리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는 탄식합니다. “어른이 없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하는 시절입니다. 강감찬이나 모세처럼 세상에 널리 알려진 어른이 되지 못하더라도, 내 삶의 자리에서 작게라도 어른이 된다면 우리가 머무는 삶의 자리가 얼마나 평안해지고 따스해질까, 상상해 봅니다. 어른이 없다는 탄식 소리가 들리는 이 때, 우리 함께 조금씩만 더 어른이 되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이다]

 

 푸코는 권력이라는 말 대신 '통치'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가 주조한 '통치성'이라는 용어는 '통치와 관련된 것'을 말한다. 푸코는 권력을 실체로 보지 않고 '관계'로 보았다. 그래서 권력은 빼앗고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정립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권력을 실체로 보지 않고 관계로 보았기 때문에 푸코에게 중요한 것은 통치성 안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이었다. 권력을 관계로 보면 자유의 개념이 바뀐다. 권력을 실체로 보면 자유란 자기실현을 위해 타자들의 저항이나 비판이 없는 '평온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권력을 관계로 보면 자유란 사람들 간의 경쟁이나 대항, 그리고 차이를 인정한 상태에서의 연대 등의 역동적 관계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자유란 권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서로의 배려이다.

 

푸코에게 권력은 관계이기 때문에 권력관계가 유연성을 잃고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고 고착되어 버릴 때, 이것을 지배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권력은 관계이기 때문이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견제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그 균형을 유지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푸코의 권력론(통치론)의 핵심은 '비판'과 '저항'의 문제이다. 통치자의 핵심 역량 중 하나는 비판적인 직언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것이다. 통치는 상호관계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강요할 수 없다. 정부가 통치권을 가졌다고 해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강요할 수 없다. 국민 입장에서는 정부의 정책이나 국정수행에 대하여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이 정부의 통치에 대응하는 '통치'이다. 그러므로 비판과 저항은 통치 행위이다. 권력은 관계적이기 때문에 정부도 통치 행위를 하는 것이고, 국민도 정부를 향하여 통치 행위를 하는 것이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관계이기 때문에 권력관계가 지배 상태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자기배려'이다. 자기배려는 권력관계(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 요구되는 자기의 힘을 조절하는 실천이며, 자기의 존재 방식과 행동 방식의 지속적인 비판과 문제화이다. 즉, 권력관계의 유지를 위해서 개인에게 필요한 자질은 끊임없는 자기 비판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타자와의 소통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여는 행위.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이다. 현재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이 정부(대통령)의 통치를 보면서 답답해 하는 이유는 권력이란 관계적이라는 것을 이해 못하는 권력자의 모습 때문이다. 자신의 통치만 중요하고, 자신의 통치만 일방적으로 강요할 뿐, 국민 쪽에서 정부(대통령)을 향해서 하는 통치에 대해서는 수용할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인데, 일방적인 통치만 실행되고 있으니, 민주주의의 후퇴는 물론이고 국민들의 마음에는 분노만 쌓여 가고 있는 것이다.

 

권력자들은 푸코의 통치성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싫어할 것이다. 푸코 공부는 피통치자들만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피통치자들은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푸코의 통치성을 공부해야겠지만, 더불어 권력자들도 '이런 식으로 통치하지 않기'위해서 반드시 푸코의 통치성을 공부해야 한다. 통치는 주고 받는 것이다. 통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통치는 양방향에서 서로 주고 받아야 바른 통치이다. 이것을 알고 국민의 통치를 수용할 줄 아는 정부(대통령)가 바른 통치자이다.

 

대통령의 KBS 대담을 들은 국민들의 입에서 탄식 소리가 들린다. 대한민국은 불행하다. 권력의 자리에 좋은 통치자가 앉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판을 물같이, 저항을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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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교회가 다시 살려면]

 

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가 분석한 현대사회의 현상.

 

ㅡ 스펙타클은 "보이는 것은 좋은 것이며, 좋은 것은 보이는 것이다"라고 말할 뿐이다. 스펙타클이 원칙적으로 요구하는 태도는 무기력한 수용이다.

ㅡ 스펙타클은 현대의 수동성의 제국 위에 머물고 있는 결코 지지 않는 태양이다.

ㅡ 사회생활을 지배하는 경제의 첫 번째 국면은 인간이 실현하는 모든 것을 존재로부터 소유의 관점으로 규정하는 명백한 퇴행을 초래한다.

ㅡ 인간의 특권적 감각은 다른 시대에는 촉각이었다. 스펙타클은 그것을 시각으로 대체한다.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신비화되기 쉬운 감각인 시각은 현대사회의 일반화된 추상과 일치한다.

 

이 정도만 살펴보아도, 우리 시대가 '스펙타클 사회'인 것과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모두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구조로 돌아간다. 그래야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정치. 이 두 분야만 봐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스펙타클의 사회인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스펙타클 정치, 스펙타클 종교.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정치와 종교만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런 곳만이 부흥을 한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스펙타클을 일으키는데 귀재이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부흥하는 교회는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것을 잘하는 교회들이다. 이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낳을 수밖에 없다. 자본과 인력이 있는 대형교회는 상대적으로 스펙타클을 일으키기 쉽다. 반대로 자본과 인력이 없는 교회들은 스펙타클을 일으키지 못한다. 결국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대형교회로 교회들은 흡수되어 간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현상이 정치를 망가뜨리고, 교회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포퓰리즘 정치, 포퓰리즘 종교. 위에서 기 드보르가 지적하고 있느 것처럼,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정치와 종교를 통해 사람들은 점점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간다. 스펙타클의 위력에 일방적으로 그들이 강요하는 것은 수동적으로 수용할 뿐, 저항하지 못한다.

 

이는 고도로 발달된 상품 사회, 즉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베오울프의 그렌델일 뿐이다. 스펙타클은 그렌델의 엄마 물의 마녀이다. 원래는 추악한 모습이지만, 물의 마녀이기에 자기의 모습을 스펙타클하게 변형시켜 사람들의 마음을 꾀어낸다. 그 꾀임에 넘어간 사람들은 모두 희생자가 될 뿐이다.

 

교회가 스펙타클을 일으킨다는 것은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세속에 물드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신비한 현상은 교회에서 그토록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외치면서도 정작 교회 자체가 세속에 물들어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데 혈안이라는 것이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생명의 힘을 지키려면,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일에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저항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수동적으로 수용하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 상품 사회의 무력한 소비자로 전락시키며 소비의 희생자로 만들어 버리는 스펙타클 사회에서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인지, 오히려, 너무 자명하지 않은가?

 

스펙타클 사회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너무 자명하다.

1)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교회에 가지 않기

2) 스펙타클을 일으키지 않기

3)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목회자 조심하기

4) Indication 해서 쉽게 말하면, 대형교회 가지 않기

5) 대형교회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기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었다. '한국교회는 대형교회와 대형교회가 되고 싶은 교회, 이렇게 두 종류의 교회 밖에 없다. 목사도 마찬가지. 대형교회 목사와 대형교회 목사가 되고 싶은 목사, 이렇게 두 종류의 목회자 밖에 없다.' 물론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 스펙타클 사회의 교회/목회자 현상을 잘 지적한 듯하다.

 

교회가 다시 살려면,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우리 사회에 저항해야 한다. 쉽게 말해,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해야할 일을 하면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도록, 조용히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예배 조용히 드리고, 진실한 교제 나누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손길을 내밀되, 그냥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하는 것이다. 흑탕물을 맑게 만드는 법은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다. 이처럼 스펙타클이 너무 심해 흑탕물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 우리 삶, 우리 신앙을 다시 맑게 만드는 방법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요즘 우리 시대의 교회들이 어려운 이유는 무슨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너무나 많은 일을 해서 스펙타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스펙타클 사회에 저항하지 못하고 이 사회의 요구를 따라가면서 가뜩이나 스펙타클 사회 때문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더 지치고 힘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스펙타클 사회에 저항하는 교회가 진짜 교회다.

스펙타클 사회에 저항하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고로 존재한다.

Posted by 장준식

[성만찬에 대한 세 가지 생각]

 

기독교 예배의 중심에는 성만찬이 놓여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오랜 세월 동안 성만찬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신학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특별히 예배학(Liturgical Theology)의 발달이 더딘 탓도 있습니다. 새로운 밀레니엄(2000년) 전만 해도 한국의 신학교에는 예배학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예배학을 전공한 신학자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예배의 중심에 놓인 성만찬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예배학에서 가장 유명한 신학자는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입니다. 화이트 교수가 쓴 『기독교 예배학 입문』(Introduction to Christian Worship)은 예배학 분야의 교과서로 널리 쓰이는 책입니다. 이 책은 1980년에 쓰였습니다. 한국에 이 책이 번역 소개된 것은 2000년도입니다. 이와 더불어, 2000년대 이후 예배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한국의 각 교단 신학교에 포진하게 되면서 예배에서 성만찬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성만찬은 보통 영어로 ‘The Eucharist’(유카리스트)라고 합니다. 성만찬에 관한 명칭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존재합니다. ‘주님의 만찬’(Lord’s Supper), ‘떡을 뗌’(Breaking of Bread), ‘성례전’(Divine Liturgy), ‘미사’(Mass)’,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 그리고 ‘주님의 기념’(Lord’s Memorial) 등입니다. (화이트, 261쪽) 여기서 ‘주님의 만찬’과 ‘거룩한 교제’는 비교적 우리들에게 익숙한 용어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성만찬을 영어로 표기할 때 ‘Holy Communion’이라고 씁니다. 위의 용어에서 ‘미사’도 많이 들어본 용어일 겁니다. 천주교의 예배를 ‘미사’라 부릅니다. 이 말은 곧 천주교에서 예배와 ‘성만찬’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예배를 ‘감사성찬례’의 뜻으로 ‘미사’(Mass)’라고 부릅니다. 천주교 예배에 참석한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실제로 천주교는 성만찬이 예배의 ‘중심’입니다. 모든 예배에서 성만찬을 합니다. 그들에게 예배란 곧 성만찬이기 때문입니다.

 

성만찬의 보편적인 용어는 ‘유카리스트’(Eucharist)’입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받은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처음 교회(예루살렘교회)의 풍경을 보면, 교회가 세워진 뒤 교회의 구성원이 교회에서 행한 일은 ‘떡을 뗀’ 것입니다. 위의 용어에서 보았듯이, 이것은 성만찬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만찬은 교회가 처음 시작된 이래 교회에서 행하여 온 활동들 중 가장 핵심적인 활동에 해당합니다.

 

성만찬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 즉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드십니다. 그 유월절 식사 시간에 떡(빵)과 포도주를 축사하신 후에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시며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때만 해도 제자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뒤에 제자들은 그때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 만찬에서 나누었던 떡과 포도주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교회가 세워진 이후에 성만찬은 기독교 예배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외에 성만찬을 언급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며 그들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만찬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서에서 보았듯이, 유대인들은 세 가지 율법의 조항을 물고 늘어지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혔습니다. 음식 정결법, 절기법, 할례가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음식 정결법에 대한 문제가 고린도교회에 발생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가르침을 주면서 바울은 성만찬을 언급합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여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여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교회에서 성만찬이 ‘예식’으로 자리잡으면서 성만찬에 대한 복음서의 구절이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쓴 편지에서 예식문을 가져다 썼다는 겁니다. 성만찬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복음서나 고린도전서나 별로 차이가 없지만, 예배의 예문으로 쓰이기에는 고린도전서의 진술이 더 적합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복음서(마 25장, 막 14장, 눅 22자)와 고린도전서(고전 11장)의 성만찬에 대한 말씀을 비교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복음서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섞어서 성만찬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내어 주시면서 하신 말씀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성만찬 하나에도 이렇게 재밌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후 1500년간 성만찬에 대한 논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 종교개혁 시기에 이르러 성만찬에 대한 결렬한 논쟁이 발생합니다. 성만찬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보면, 종교개혁의 갈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때 발생한 성만찬 논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화체설(Transubstantiation), 다른 하나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 그리고 또다른 하나는 상징적 기념설(Symbolic Memorialism)입니다. 그냥 기념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화체설은 가톨릭 측의 신학이고, 공재설은 루터의 주장이고, 기념설은 쯔빙글리의 주장입니다. 각 ‘설’을 이해하는데 기본이 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입니다. 좀 크게 이야기하면 헬라철학이 성만찬 논쟁의 바탕입니다. 특별히, substance(실재)의 개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헬라철학에서 substance는 물자체를 말합니다. 어떠한 사물의 그 자체를 substance(실재)라고 지칭합니다. 성만찬에서는 빵과 포도주를 사용합니다. 빵은 빵의 substance가 있고, 포도주는 포도주의 substance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될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성만찬에 대한 신학이 갈립니다. 1) 가톨릭이 주장하는 화체설이란 substance가 transfer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가 예수님의 살과 피의 substance로 변화(transfer)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2) 루터가 주장하는 공재설이란 substance가 함께(con)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가 가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살과 피로 transfer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는 변하지 않더라도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와 함께(con) 예수님의 살과 피의 substance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직접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빵과 포도주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함께 실제로 임한다(real presence)는 뜻입니다. 3) 쯔빙글리가 주장했던 기념설은 가톨릭이나 루터의 주장을 모두 부인합니다. 성만찬에 덧입혀진 철학적 논의를 다 거두어 내고, 그냥 빵은 빵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이지 어떻게 이게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고, 어떻게 거기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실제로 함께 할 수 있느냐고, 아주 나이브하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쯔빙글리는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그냥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 성만찬이지, 거기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실제로 임하는 것은 아니라고, 아주 심플하게 말합니다.

 

성만찬에 대한 생각은 교회의 분열을 가지고 왔습니다. 루터는 화체설을 거부하고 공재설을 주장하면서 가톨릭에서 분리되었고, 쯔빙글리는 루터의 공재설을 거부하고 기념설을 주장하면서 종교개혁 운동을 함께 벌여왔던 루터와 작별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성만찬에 대한 신학 문제는 보통 큰 이슈가 아니었습니다. 성만찬에 대한 의견 차이로 루터는 쯔빙글리와 작별하게 되는데, 루터는 갈라설 때 쯔빙글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와 나는 영이 다르다!” 그리하여 오늘날 기독교에서 성만찬을 이해하는 세 갈래가 생겼습니다. 가톨릭 입장의 화체설. 루터의 입장인 공재설. 쯔빙글리의 입장인 기념설. 개신교의 주류 교단(감리교,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은 루터의 공재설 입장에서 성만찬을 이해합니다. 루터 이후에 종교개혁 2세대인 칼뱅이 성만찬 신학을 조금 다듬기는 합니다만, 큰 틀에서는 루터의 공재설 입장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침례교는 쯔빙글리의 기념설을 따릅니다. 우리교회는 개신교 주류 교단의 성향이니, 루터의 공재설을 따르는 입장인 것이죠. 물론 개인마다 다른 입장을 가질 수는 있지만요. 성만찬 하나에도 이렇게 흥미진진한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교회는 생명이고 사랑이다

 

최근 미국에서 <The Great Dechurching>이라는 책이 발간됐습니다. 한국어로는 ‘대규모 탈교회’ 정도로 옮길 수 있을 듯합니다. 영어에서 ‘de’자를 붙이면 ‘분리나 이탈’을 의미하니까, ‘de-churching’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조어’입니다. 이런 신조어가 생겼다는 것이 참 안타깝고 마음 아픕니다.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성장경제에서 ‘떠나야 한다’는 의미로 ‘Degrowth’(de-growth)/탈성장’라는 신조어가 생겼고, 이것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좋은 뜻의 신조어인데 반해, de-churching(탈교회)라는 용어는 교회의 위기를 표현한 신조어이기에 그리 좋은 뜻은 아닌 거죠.

 

책의 저자들이 조사(research)를 해보니, 지난 25년 동안 미국에서 자그마치 4천만명 정도가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미국 성인의 15% 정도에 해당되는 규모라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는 한 가지로 설명될 수 없겠지만, 주된 이유는 ‘소련 붕괴’, ‘극우에 결부된 기독교’, 그리고 ‘인터넷의 발달’ 등이 제시됐습니다. 구소련과 미국은 악과 선의 체제 대결로 미국인들에게 비춰졌는데, 소련이 붕괴되고 나서 악의 축이 사라졌기에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극우세력과 복음주의 교회들이 영합하게 된 것도 사람들이 교회에서 관심을 멀리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터넷(정보통신)의 발달로 누군가의 간섭없이 기독교 세계관 바깥의 세계관을 접하게 된 것도 기독교를 떠나게 된 요인입니다.

 

미국의 탈교회 현상을 설명하는, 그럴싸한 이유들이지만, 제 생각하는 이유는 조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탈교회 현상 문제는 좀 더 심층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 중 하나가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심층적으로 일으키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복음주의권 학자들은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주의 자체가 기독교의 자본주의화를 통해 부흥을 일군 미국 특유의 기독교 신앙체제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탈성장(자본주의로부터의 탈출)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반해, 미국 복음주의권 교회에서는 아직도 자본주의성장신화를 비호하며 탈성장을 오히려 비판하고 기후변화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탓을 자본주의 체제에 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미국의 탈교회 현상(또는 한국 교회의 탈교회 현상)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자본주의 문화 때문인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고, 이윤과 이익을 남기는 것을 최대의 과제로 삼는 자본주의 문화는 인간의 생명 현상을 말도 못하게 축소시킵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동료를 동료 인간으로 대하지 못하게 하고, 서로 이익을 취하는 사이로 만듭니다. 삶의 모든 부분을 시장화(market)시켜, 이윤과 이익을 위해 생명을 소모시키는 장으로 삶을 변환시켜버립니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은 생명을 나누는 사이가 더 이상 아니게 됩니다. 인간의 삶은 고립되고 파편화됩니다. 서로가 서로의 고통에 무관심합니다.

 

생명현상이 줄어든 것은 고스란히 비혼과 저출산으로 드러납니다. 사랑을 하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서로의 삶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회성이 줄어듭니다. 소통하지 않습니다. 무반응과 무관심으로 인해 사회가 삭막합니다. 사람들 사이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도 동일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자연은 인간의 이윤과 이익을 위한 착취의 대상일 뿐이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할 동료 ‘생명’이 전혀 아닙니다. 이렇게 생명력은 말도 못하게 축소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명백한 병폐입니다.

 

생명현상이 줄어든 사회에서 탈교회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교회는 생명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사건은 생명현상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생명력이 넘칠 때 교회는 부흥하게 되어 있고, 생명력이 축소될 때 교회는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생명현상인 성령으로 인하여 이 땅에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확장된 가족(extended family)입니다. 비혼과 저출산 사회에서 교회가 함께 생명현상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서 결혼이나 출산이 발생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랑이 없는 곳에서 교회는 생겨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책에서 아주 실질적인 사회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비영리단체 경영컨설팅업체 브리지스팬그룹에서 “미국 주요 6개 도시에서 신앙에 기반을 둔 비영리기관이 해당 지역 사회안전망의 40%를 제공한다”는 내용을 2021년에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가 사라지는 것은 사회안전망이 사라지는, 아주 실질적인 위협이라는 지적입니다. 교회가 사라지면 어려운 사람들은 더 어려운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사라지면 사회안전망이 줄어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가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 사회에 ‘사랑’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게 더 큰 문제입니다. 지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은 오직 ‘사랑’ 뿐인데,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교회가 사라진다는 것은 세상을 이길 힘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더 지옥이 되어 갑니다.

 

교회는 세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교회는 세력을 키워 누군가를 지배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랑을 키워 세상을 섬기는 생명체입니다. 교회는 마치 어머니의 자궁과 같습니다. 교회 하나가 없어지면, 사랑이 줄어듭니다. 교회를 여느 사회 집단으로 보는 것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숫자가 아니라 능력입니다. 생명이 형편없이 축소된 우리 시대, 그래서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우리 시대, 우리는 마음 아파해야 합니다. 단순히 교회 숫자가 줄었다고, 교인 숫자가 줄었다고 아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없음을, 사랑이 없음을, 그래서 사람들의 고통이 더 심해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아파해야 합니다. 교회는 생명이고 사랑입니다. 이 악한 시대를 이기고 견딜 힘입니다. 교회를 사랑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성경 읽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

 

4세기에 활동했던 사막의 교부 에피파니우스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는 절벽이요 깊은 심연이다.”

 

기독교 영성가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에 대한 탐구를 진지하고 처절하게 했습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고, 오롯이 하나님과 대면하기 위하여 무던히도 애썼습니다. 그 중에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c.345-377)라는 사막의 교부가 있습니다. 이 수도사가 개발한 영성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 가운데 있을 때 우리의 생각을 어지럽히고 산만하게 방해하는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 유형을 밝히고, 그것을 이 길 힘인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한 것입니다.

 

에바그리우스가 밝힌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탐식’

(2) ‘음욕’

(3) ‘탐욕’이 그 뒤를 잇고,

(4) ‘슬픔’

(5) ‘분노’

(6) ‘아케디아’가 있고,

(7) ‘헛된 영광’

(8) ‘교만’이 있습니다.

 

1)~3)은 인간의 기본 욕구입니다. 4)의 슬픔은 인간의 기본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느끼는 좌절감의 감정입니다. 그래서 이 슬픔은 시기나 질투의 감정으로 나타나 인간을 괴롭힙니다. 5)의 분노는 슬픔의 시기가 지나면 오는 것인데, 인간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처음에는 슬픈 감정에 휩싸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슬픔이 분노로 바뀝니다. 대개 타자(other people)를 향한 폭력은 이 감정에 휩싸이게 될 때 발생합니다.

 

6)의 ‘아케디아’는 한국말로 옮기기 힘든 용어인데, 권태, 절망, 무기력, 우울 등의 감정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 아케디아가 무서운 것은 이 감정은 사람을 자살로 이끄는 치명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슬픔과 분노의 시기를 지나면, ‘아케디아’의 상태, 즉 우울한 상태가 되고, 이때는 타자를 해치는 게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해치게 됩니다.

 

7)의 헛된 영광은 ‘자기애, 자기의(self-righteousness), 인정욕구’를 의미합니다. 자기애가 강하고, 자기의를 표출하며, 인정욕구를 갈망하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조차 모릅니다. 불쌍한 인생이지요. 그리스 신화에서 나르키소스(Narcissus)가 가졌던, 그런 욕망이죠.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 부릅니다. 나르키소스는 물가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것에 매혹되어 결국 그 환영을 쫓아 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8)의 교만은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위에 올려놓은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교만은 단순히 자기를 다른 사람보다 낫게 여기는 행위가 아닙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 그것이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겸손한 척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교만은 결국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 최고의 악한 행동인 것이죠.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을 제시하고, 이것을 이길 힘은 성경을 읽은 데서 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악한 생각에 대응하는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위의 악한 생각 중에서 ‘아케디아’에 대한 대응 말씀을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제시합니다.

 

‘아케디아’의 사례 중 ‘아케디아에 빠졌을 때 형제들에게 얼른 가서 위로를 받고 싶다는 유혹’에 맞서 주님은 시편 77편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영혼은 위로도 마다하네. 하나님을 생각하니 즐거워지네. 내가 이 말을 하니 내 얼이 아뜩해지네” (『안티레티코스』 VI, 24).

 

우리는 성경 읽는 법을 배우는 것, 성경 읽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합니다. 요즘엔 스마트폰으로 성경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스마트폰이나 다른 전자기기가 없어 그냥 성경책을 손수 펴서 보아야 할 때보다 성경을 더 안 읽는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을 열어서 성경을 읽을라 치면 그보다 재밌어 보이는 온갖 자극적인 기사나 영상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왕도는 없습니다. 스마트폰을 좀 내려놓고, 아날로그식으로 종이 성경책을 곁에 가까이 두고 수시로 성경을 들여다 보는 것이 최선입니다. 성경을 왜 읽어야 하는 지 모르겠다고, 혹시, 투덜거림이 내 안에서 올라오는 분이 있다면, 신앙의 선배로부터 배워보세요. 성경은 하나님께로 가는 그 험난한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안내자입니다. 성경은 힘입니다. 이 힘을 잃지 마세요. 힘이 있어야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갈 수 있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인 성경을 가까이 두고, 자주, 펴서 읽어보세요. 성경이 힘을 주고, 길이 되어 줄 겁니다. 성경(말씀)은 우리의 최종병기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사도행전을 주목하는 이유

 

사도행전은 성령행전, 또는 기도행전이라는 별명을 가진 성경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후편으로서 누가복음을 읽은 후 읽어야 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가 같기 때문에 두 책의 강조점은 같습니다. 성령과 기도가 강조됩니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목격하고, 기도 사역을 배우게 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기도하는 주님’으로 묘사됩니다. 무슨 일을 하시든지, 예수님은 기도를 먼저 하십니다. 그래서 누가-행전은 성령행전, 또는 기도행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주님’이 부재한 상황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의 도우심과 이끄심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셨던 사역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어떻게 동일하게 수행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에서부터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의 사역, 그리고 십자가 죽음, 또한 부활과 승천까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성령 안에서 발생한 일인데, 사도행전은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교회(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것을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신앙과 사역의 매뉴얼입니다.

 

현대 기독교 신학이 교회를 비판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비판은 교회가 충분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고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야훼 신앙, 그리고 플라톤의 신학의 영향 아래 기독교인들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일신론/유일신론’으로만 생각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묵상이 부족하고, 삼위일체적 사고와 실천이 부족하다보니, 기독교 고유의 폭발력 있는 복음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충분히 사유하고 묵상하지 못하면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은 생활의 구조를 ‘가부장적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의 교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을 일신론/유일신론으로 인식하고 마니, 일상생활에서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이해보다는 ‘하나의 힘’에 집중해서 그 권위 아래 굴복하고 굴복시키는 생활 구조를 만들어 내고, 그러한 생활 구조를 오히려 편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죠.

 

일찍이 기독교 신학은 삼위일체론(Trinity)를 사유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삼위일체론에서의 쟁점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고유한 개체성을 유지하면서 삼신론이나 다신론으로 빠지지 않고 ‘한 하나님’이 될 수 있을 것인가였습니다. 이 문제는 너무도 중요하고 신비로운 것이라,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학이 발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삼위일체 신비를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신학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을 말하고 표현하고 싶은지,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왕적 군주의 모습을 가진 폭력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교제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일치를 이루지만 동시에 각자의 위격(고유의 품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민주사회를 이루어 가고, 생태 위기를 극복하는데 필수적인 신학적 통찰입니다.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강력한 신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사람들은 실제 교회생활에서, 그리고 선교활동에서 그것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한 하나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삼위 하나님이 위격을 가지고 고유의 사역을 성취하시는지,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역 속에서 몸소 경험하고, 그 경험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보여줍니다. 그래서 강력합니다. 하지만, 보여주다 보니,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그냥 우리의 눈에서만 흘러가 버리기도 합니다. 마치, TV 드라마를 보듯이 말이죠. 하지만,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이유는 우리에게 ‘구경’하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는 보여줄 수 있을 뿐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보여주고 있는 삼위일체의 역사를 눈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발생하도록 우리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 함께 사도행전을 거니는 동안,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더 사랑하게 되고, 그 신비를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실천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양심과 비양심]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양심이란 자기 사랑을 거부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타인을 위해 죽는 사람을 '천재'라고 부르는데, 소크라테스, 예수, 바울 등을 꼽는다.

 

양심적인 종교 저술가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저술가는 항상 논쟁적이고, 따라서 항상 반대파에 눌려서 고통을 받거나 반대파의 공격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그 반대파라는 것은 그의 시대에 있어서 독특한 악과 표리일체를 이루고 있다. 만일 그 악을 이루고 있는 것이 왕이나 황제, 교황이나 주교들, 그리고 권력자들이라고 한다면, 그가 그들의 공격과 표적이 되어 있다는 사실로써 종교적인 저술가라는 사실이 인지될 수 있다"(관점, 97쪽).

 

키에르케고르는 외톨이였다. 그 자신이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종교적 저술가였고, 국가와 교회로부터 핍박을 받았고, 자가면역질환인 척수병으로 투병을 했다. 그가 외로웠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존재의 무'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존재의 무는 비양심적 상태를 말한다. 존재하는데 양심 없이 존재하는 사람들은 자기 사랑하기에만 바쁘지, 타인을 향한 사랑을 실천/실현하지 않으며 산다. 자기 자신 이외에는 목적을 두지 않고, 타인을 수단으로 삶으로 사는 자들을 비양심적 존재, 즉 존재의 무라고 부른다.

 

키에르케고르는 <집단(군중)은 거짓이다 The Crowd is Untruth>라는 짧은 글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집단(군중)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집단을 이끄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보다 인간 존재의 의미를 모독하는 자는 없습니다"(생각하는 사람을 빛나게 도와주는 할아버지들, 26쪽).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을 싫어했다. 집단(군중)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겔의 정반합(변증법)은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반(Antithese)'을 없애는 방식으로 평등과 평화를 이룬다고 생각을 했다. 이것을 나치에 적용해 보면, 정(독일인), 반(유대인), 합(평화로운 세상)이라고 할 때, 나치는 유대인을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지금도 나치식 변증법이 보수 집단에서 통용되고 있다. 반(Antithese)을 없애는 방식으로 사회 통합과 평화를 이루려고 하는 생각은 언제나 '혐오와 폭력'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비양심적인 행동이다. 자기(These)만 사랑하고 타인(Antithese)을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인가 진보인가는 어떤 변증법으로 세계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가에서 갈린다. 보수는 '반(Antithese)'을 없애거나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려 하고, 진보는 '반'을 끌어안고 융합하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양심은 타인(반/Antithese)를 위해서 나를 내어놓는 일이다. 비양심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여 타인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반(Antithse)'를 없애거나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려 하지 않고, '반'을 끌어안고 융합하는 방식으로, 즉 '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반'을 없애고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려는 욕망이 훨씬 더 강한 것을 볼 수 있다. 군중(집단)을 모으고 그 힘으로 '반'을 없애고 굴복시키기에 혈안일 뿐이다. 이에 맞선 양심적인 사람들은 핍박을 받는다. 외로워진다. 양심을 지키며 사는 일은 어렵다. 양심을 지키는 자는 늘 '유혹자'로 산다. 양심을 저버리라는 유혹.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오늘 밤에도 유혹이 거세다.

Posted by 장준식

영국교회에서 배우라

 

19세기, 20세 초, 영국의 별명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the empire on which the sun never sets)였죠. 이 별명은 특별히 영국에만 붙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국을 이루었던 나라들에게 일반적으로 붙여졌던 별명이고, 이제 이 별명은 미국에게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국을 주목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발전된 이후 사회가 급변하면서 겪게 되는 모든 문제점들을 제일 먼저 겪은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농촌 중심 사회에서 도시 중심 사회로의 변경을 가장 먼저 경험한 나라입니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기계가 발명되고, 기계를 이용한 산업은 농촌을 붕괴시키고 도시 문화를 형성합니다. 농사 짓고 살던 농부들은 더 이상 농촌에서 일 자리를 얻을 수 없어 도시로 몰리게 되는데, 그것 때문에 도시 빈민 문제가 영국 사회를 괴롭혔습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이 18세기입니다. 이때 존 웨슬리 목사님이 벌였던 ‘Methodist’ 운동은 도시 빈민들을 구제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그것을 계기로 ‘감리회’(Methodist)라는 교파가 탄생합니다.

 

도시가 발달하면서 발생하는 각종 사회적 문제를 먼저 경험한 영국에서는 정치이론과 사회이론이 발달합니다.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다 보니, 정치/사회 이론이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영국은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주자를 받아들였고,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나라의 사람들이 이주해서 영국 사회의 한 부분을 구성하면서 각종 사회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특별히, 종교 문제가 컸는데, 이슬람 국가 또는 힌두 국가에서 이주하여 온 이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영국 사회에서는 일찍이 ‘다원주의’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다원주의는 영국 사회의 통합과 안정을 위해서 채택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폭력사태가 발행하여 나라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죠. 보수 기독교인들은 ‘다원주의’라는 말을 들으면 매우 불쾌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을 단순히 신앙의 타협으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서로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은 타협이 아니라 평화입니다. 일찍이 존 로크가 <기독교의 합리성>(1695년 출간)에서 주장했듯이, 신앙은 ‘온유와 말씀선포와 모범적인 삶’으로 ‘설득’해야 하는 것이지, 힘으로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국 사회는 2차대전 이후에 아주 급격하게 변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종교 지형입니다. 영국국교회(성공회)에서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교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인구는 10% 밖에 되지 않습니다. (선교형 교회, 91쪽) 이것도 벌써 20년 전 통계이니, 지금은 그 인구가 더 줄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2차 대전 이후에 주일학교에 참석하는 어린이들의 비율이 매우 급격히 줄었는데, 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교회의 문화와 자연스럽게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신앙의 전수가 잘 되지 않았던 겁니다. 어려서 교회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교회에 안 다닐 가능성이 엄청 큽니다. 어린 시절의 교회 경험이 없기 때문에 교회를 아주 낯선 곳으로 받아들입니다.

 

영국교회는 기독교의 쇠퇴를 이미 2차 대전 이후, 1950년대부터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그리고 기독교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사회에서 어떻게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할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전세계 기독교 국가 중에 영국만큼 기독교의 쇠퇴를 먼저 경험한 나라도 없고, 영국만큼 교회와 신앙을 깊이 고민해본 국가도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 기독교 신앙의 쇠퇴를 경험하고 있는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의 교회들은 영국 교회에서 배울 게 참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세대가 자녀세대에게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선교학 연구에 의하면, 어릴 때 교회에 대하여 좋은 경험을 가진 사람일수록 일생동안 계속하여 교회를 잘 다닐 가능성이 클 뿐 아니라, 어른이 되어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더라도 교회로 다시 돌아올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가보았던 동물원이나, 엄마가 해 주신 음식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에게 어린 시절의 경험은 일평생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세대의 책임은 큽니다. 사무엘이 은퇴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 12:23-24).

 

교회의 풍경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은 여러가지 사회적 요인도 작용했지만, 우리 자신도 우리의 모습을 조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교회에 대하여 ‘좋은 경험’을 하도록 잘 이끌지 못한 것은 아닌지, 반성을 해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여 한마음으로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교회에 대하여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조금 더 헌신한다면, 광야에서 길을 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조금 더 힘을 모아, 좋은 교회를 세워보아요.

Posted by 장준식

그리스도인의 시간: 시간은 인격이다

 

“신은 죽었다.” 니체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열왕기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의 고대 왕국에 대한 역사 기록입니다. 그들의 역사 기록은 독특합니다. 한국에도 삼국사기나 고려사, 또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역사 기록이 있지만, 그 기록 방식이나 내용을 보면 열왕기의 그것과 분명한 차이를 지닙니다. 한국의 함석헌 선생이 성경의 역사서처럼 한국 역사를 기록한 책이 있습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그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글이 이 글 된 까닭은 성경에 있다. 쓴 사람의 생각으로는 성경적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 똑바른 말로 역사철학은 성경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양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 역사는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이 성경의 자리에서만 될 수 있다”(12-13쪽).

 

여기서 함석헌 선생이 말하고 있는 ‘역사는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이 성경의 자리에서만 될 수 있다’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기독교는 역사를 물리적 현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인격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사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 때문에 시간은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인격이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력을 지키는데, 교회력은 단순히 교회의 행사력이 아니라 시간을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살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사람과 시간을 그냥 물리적 현상으로 보는 사람과의 차이는 엄청 납니다. 시간을 물리적 현상으로 보는 사람은 그 시간을 그냥 자신의 소유 정도로 생각하고 그 시간을 이용하여 자기의 뜻(욕망)을 이루려 하겠지만,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사람은 시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보고, 무엇보다 시간 안에서 ‘구원’을 봅니다. 우리의 시간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된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간은 단순히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열왕기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열왕기는 시간을 하나님의 인격이 활동하는 ‘그 무엇’으로 기록합니다. 그래서 시간(역사) 속에서 발생한 모든 일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그 무엇 하나, 단순한 사건 하나, 그냥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열왕기는 하나님의 인격을 치열하게 대면하여 시간(역사)을 돌아봅니다. 열왕기는 바벨론 포로의 참상을 겪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반성을 하며 돌아본 역사책입니다. 열왕기하 25장을 보면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이야기가 나오는데,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벨론과 잘 지낼 것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갈대아 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왕하 25:24). 사반의 손자 그달리야 총독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유다의 마지막 왕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애굽을 믿고 바벨론에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다 결국 멸망 당하고 맙니다. 특별히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예루살렘 성이 포위 당하자 1년 7개월 간 버티다, 결국 성을 빠져나와 도망치다 바벨론의 추격대에 붙잡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앞에 끌려와 험한 꼴을 당합니다. 시드기야는 두 눈을 뜨고 자기의 자식들이 죽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고, 그리고 자신의 두 눈이 뽑히는 치욕을 겪습니다. 놋사슬에 묶여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압송되어 거기서 비참하게 죽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부하 장수 느부사라단이 몇 년 후 예루살렘에 다시 와서 성전과 왕궁, 그리고 고관들의 집들과 예루살렘 성벽을 완전히 불사르고 무너뜨립니다. 지체 높은 사람들은 모두 포로로 잡아가고 비천한 사람들만 가나안 땅에 남겨두고 떠납니다. 이러한 일을 보면서, 남유다 사람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당연히, “신의 죽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방인(이방신)에 의해 죽은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한 성전과 왕궁, 그리고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하나님은 죽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열왕기는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에 대한 반론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끔찍한 일을 경험하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지’ 질문하고,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의문을 품습니다. 그야말로 신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왕기는 무엇이 하나님(신)을 죽였는가에 대하여 강력한 클레임을 겁니다. 하나님을 죽인 것은 이방인(신)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악을 통해 총체적 파국을 만들어 놓고, 신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처럼 말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사 59:1-3).

 

폐부를 찌르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감히 ‘신의 죽음’을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부지런히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부지런히 시간을 인격으로 보아야 합니다. 시간 안으로 들어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를 구원하고 계신, 그 놀라운 ‘복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다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한 해가 가고, 새 해가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시간은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한 해가 가서 주어진 물리적 시간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구원이 가까워 온 것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텔레스는 파우스트의 영혼을 빼앗기 위해서 파우스트에게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정말로 아름답구나!”를 외치게 만듭니다. 파우스트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순간의 쾌락에 머물게 끔 타락시키려 했던 것이죠. 하지만, 시간이 인격이라는 것, 우리의 시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된 시간이라는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가는 세월’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그리스도의 인격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아끼지 않고 그 시간으로 ‘구원의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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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