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맞아

(종교개혁 501주년)

 

기념은 그 때로 가보는 것이지 그곳에 머무는것이 아니다. 기념은 그 때로 돌아가 그 때에 그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한 정황을 잘 살펴서 지혜를 얻어, ‘현재로 돌아와 지금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지혜로운 대처를 하기 위한 시간 여행이다.

 

우리는 수많은 기념일을 지키면서 살지만, 정작 기념일을 통해서 지혜를 얻는 일에는 서툴다. 개인에게는 생일이라는 기념일이 있지만, 생일을 기념하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을 진지하게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매년 생일을 맞으면서도 그 모양 그 꼴로살아간다. 부부에게는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이 있지만, 결혼기념일을 보내면서 둘 사이에 애틋하고 감미로웠던 첫사랑의 기억, 또는 둘을 하나 되게 하신 주님의 뜻은 묵상하지 못하고 지나간다. 그렇다 보니, 결혼생활이 늘 권태롭게만 다가온다.

 

기독교인으로서 (특별히 개신교인으로서) 우리가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500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라는 역사의 사건을 배우기 위함이 아니다. 그 사건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아무런 교훈도 아무런 지혜도 주지 못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신앙이 더 진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기념하는가.

 

종교개혁이 남긴 유산은 참 많다. 그 중에서 소중한 유산 두 가지만 소개하려고 한다(옥성득 교수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밝힌 종교개혁 유산의 중). 첫째는 루터가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에게>(1520)라는 글에서 주장한 소위 만인사제론이다. 루터는 더 나아가 <교회의 바벨론 유수>(1520)에서 가톨릭 교회가 가르쳐온 사제와 평신도의 구분을 거부하며, 제도권을 통해 받은 사제의 안수가 성령을 통해 받은 평신도의 안수를 무시한다고 지적한다. 안수의 독점권은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를 몰락시키고 교회 내의 계급을 형성했다. 루터는 그러한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교회의 민주화를 이끌었다.

 

둘째는 종교개혁 전통에 서 있는 필립 스페너(Philip Spener) <경건한 요청>(1675)에서 재발견한 만인제사장설에서 비롯된 경건한 모임이다. 말씀과 기도는 목회자(사제)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루터가 이끌었던 교회의 민주화는 단순히 신분(직분)의 평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핵심을 함께 공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앙의 핵심은 말씀과 기도이다. 그것은 목회자만이 행해야 할 영성훈련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구성원, 즉 이제 모두 제사장(사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 모든 그리스도인의 과제인 것이다. 그래서 스페너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말씀과 기도의 훈련을 실행하기 위한 경건한 모임을 만든다. 이것은 나중에 경건주의로부터 배워 존 웨슬리(John Wesley)가 발전시킨 속회(class meeting)’와 같은 것이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선은 자신의 적정심리학을 펼치며 이런 주장을 한다.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치유가 가장 중요하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치유하지 못하고 전문가에게 의존하여 치유하러 다니면 일상 생활의 영유가 힘들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 정서적인 피폐와 심리 불안정이 우리의 삶을 짓누른다고 한다.

 

우리의 신앙은 왜 성장하지 못하고 점점 피폐해져 갈까? 우리는 왜 신앙 안에서 담대한 마음을 갖지 못하고 심리적 불안정에 시달리면서 살까? 우리는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소중한 유산을 아직도 물려 받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신앙의 문제를 전문가(목회자/사제)’에게만 맡기면서 살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건강해지려면 스스로 운동을 해야 한다. 옛날 양반들처럼 땀 빼는 일을 종에게 시키면, 자신의 건강은 스스로 지킬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의 문제를, 구원의 문제를 너무 전문가(목회자/사제)에게만 맡겨 놓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겨우 예배 드리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을 지켰다고 생각하고 만다. 바쁘다는 핑계로, 종교개혁 전통이 우리에게 물려준 소중한 유산인 경건한 모임을 물려받지 못한 신앙인처럼 산다.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물려준 유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남의 손에 섣부르게 맡기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구원의 문제를 세심하게 돌보기 위해 교회 공동체를 민주화시키는 것, 그리고 그 공동체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물려준 소중한 유산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 아직도 종교개혁 이전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최신 테크놀로지가 반영된 기기(device)를 사는 데는 그렇게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그것을 생활에 반영하며 살면서, 우리는 신앙의 선조가 물려준 신앙의 중요한 핵심 기술을 우리의 신앙에 적용하고 반영하는 데 왜 그렇게도 서투르고 게으른가. 민주적 교회 공동체에 적극 참여하여 서로가 서로의 신앙을 세워주는 것이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참된 방법이다. 기념은 실천이지 회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전통에 서 있는 우리는 조금 더 똑똑하고 부지런 해져야 한다. 종교개혁을 기념하면서, ‘나는 동일한 제사장이다라는 자기인식이, 신앙의 핵심을 실천하고자 경건한 모임에 참여하는 주인의식이 반석에서 물이 나듯 터져 나오길 소망해 본다.



Posted by 장준식

거룩성과 영적 크론병

 

Holiness, 즉 거룩성이라는 말은 온전한 전체를 말한다. 거룩하다는 것은 어떠한 행동이나 모양이 아니라, 존재의 완전성을 말한다. 가량 점잖게 앉아 있다든지,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한다든지 하는 행동이나 모양(동작)은 거룩을 담아내는 게 아니다. 물론 주일에 교회(또는 어떠한 성스러운 장소) 가는 행위도 거룩을 담아내는 게 아니다. 성스럽다는 것, 거룩하다는 것은 존재의 완전성을 이루고 견지하는 것에 대한 용어이다.

 

그런 면에서, 현대인은 성스러움에서 먼 삶을 살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인간성을 말도 못하게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성스러움을 찾고,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인간이 원래 지닌 인간성을 완전하게 회복할 때이다. 또는 인간성 회복을 향해 불굴의 의지를 보일 때이다.

 

우리는 얼마나 인간성이 모자란 삶을 살고 있는가. 이 세상은 인간성을 갉아먹으며, 그 패인 인간성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거짓된 것을 인간의 품에 안겨준다. 사람들은 그 거짓말에 속아 그것만 손에 쥐면 자신의 인간성이 회복되어 성스러운 인간, 거룩한 인간으로 구원받을 거라고 착각하며 산다.

 

거룩은 구원의 징표이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온전한 전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거룩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완전성 때문이다. 하나님은 온전한 전체이다. 그리스도를 거룩하다고 하는 이유, 성령을 거룩하다고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그리스도를 통해 신적인 완전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인간에게 열렸기 때문이다.

 

인간성의 온전함(인간성 자체)을 헤치는 현대사회의 어두운 일들에 맞서 싸우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에 이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과제이다. 그 싸움을 위해 우리를 교회로 부름 받았으며, 그 싸움을 성실하게 수행하고자 교회는 영적 무장을 한다. 인간성을 헤치는 모든 것은 존재의 적(enemy)이다


그런데, 불행한 일 중 하나는 무엇이 인간성(존재)을 헤치는 적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우리에게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꼭 면역체계가 고장나서 엉뚱한 세포를 공격하여 몸을 상하게 하는 크론병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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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화 원리와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개별화의 원리 (principle of individuation>를 바탕으로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겠다.

 

실체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물이다. 그러나 질료와 형상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우리는 질료와 형상을 실체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실체로부터 질료와 형상을 분리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추상에 의해 개념적으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개념은 본성상 보편적이기 때문에 개념 안에 개별자의 개별성(thisness)을 담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질료와 형상이 가지고 있는 개별성을 알 수 없다.

 

여기에서 인간 이성의 한계성이 드러나는 것 같다. 이성은 개념화되지 않은 실체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한다. 인간이 이성을 통하여 어떠한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이유는 보편적인 개념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은 개념이지 개별성이 아니다. 실제로 물은 100도에서 끓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개념화된 형태로 물이 어느 정도 온도에 도달하면 끓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인간의 학문이란 질료와 형상의 개별성을 파악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 이성이 어떠한 실체를 인식할 수 있도록 실체를 개념화시키는 작업이다. 우리가 신(God)에 대해서 학문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에게 이성이 있기 때문에, 그때 우리가 파악하는 신(God)은 개념화된 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통해서 개념화된 신을 인식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 개별성(thisness), 즉 신 자체의 본질(nature)을 완전히 알게 되었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태고적부터 신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노력은 늘 헛수고로 돌아갔으며, 결국 신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은 이성의 길이 아니라 신비의 길, 즉 신(God)이 자기 자신을 계시(revelation)하는 방법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신 이해는 매우 독특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신 이해는 개념적이나 형이상학적이 아니라, 인간이 된 신(incarnation)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God)이 한 실체로, 질료와 형상의 개별성을 모두 드러낸 형태로 우리의 감각이 경험할 수 있게 세상에 왔다는 것 자체가 헬라철학의 범주 안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또는 기괴한, 미련한 생각인 것이다.

 

* 질료(matter) – 가능태(dynamis)

* 형상(form) – 현실태(energeia)

* 질료는 형상이 될 수 있는 가능태이며, 형상은 질료의 현실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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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소풍


장자크 루소의 소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얼마 전에 풀키에 씨에게 이끌려 평소와는 달리 내 아내를 동반하고 그와 그의 친구 브누아와 같이 바카생 부인데 식당으로 각자 자기 식대를 부담해서(‘피크닉형태로) 점심 식사를 하러 갔었다. 바카생 부인과 그녀의 두 딸이 우리와 함께 식사를 했었다.”

 

서양에서 소풍(피크닉)은 몇몇 사람이 소량의 음식을 가지고 와 함께 식사하는 것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피크닉(picnic)의 어원은 불어인데, 불어의 ‘pique-nique’에서 왔다. ‘조금씩 먹다피케(piquer)’가치 없는 것이라는 의미의 니크(nique)’가 합해서 생긴 말이다. 서양의 소풍에는 소박한의미가 담겨 있다. 소풍은 몇몇이 각자 음식을 조금씩 가져와 나누어 먹으며 별로 의미 없어 보이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다.

 

우리나라 말의 소풍은 한자어이다. 거닐 와 바람 이 합해서 생긴 말이다. 소풍은 바람을 쐬며 거닐다라는 뜻이다. 동양의 소풍은 목가적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어렸을 적 소풍은 모두 걸어서 갔다. 물론 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않아서 그랬기도 하지만, 소풍은 기본적으로 바람을 쐬며 걸어서 가야 그 의미가 살아난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소풍의 설렘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도 기술의 발달로 인해 교통 수단이 발전하면서부터 인 것 같다.

 

소풍하면 떠오르는 두 문학작품이 있다. 하나는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이고, 다른 하나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다. 황순원 소설 <소나기>에서 소년과 소녀는 소풍(바람을 쐬며 거닐다)을 갔다 소나기 때문에 불어난 개울물을 건너는데 애를 먹는다. 병약한 소녀가 불어난 개울물을 건널 수 없자, 소년은 소녀를 업고 개울물을 걷는다. 그때 소년의 옷에 소녀의 손에 들린 보라색 꽃 물이 든다. 소녀는 소나기를 맞은 탓에 감기가 들어 병색이 깊어져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다. 소녀는 유언으로 보라색이 물든 옷을 입혀 묻어 달라고 한다. 그렇게 소녀는 소년과의 아름다운 소풍을 가슴에 간직한 채 땅에 묻힌다.

 

천상병 시인은 시 <귀천>에서 이 세상의 삶을 소풍이라고 표현한다. 하늘로 돌아가게 되면, 이 땅에서의 삶을 소풍이었다고, 아름다운 소풍이었다고 말할 것이라고 한다. 사실 천상병 시인의 삶이 그렇게 소풍 같은 삶은 아니었다. 그는 동백림(동베를린)사건에 연루되어 간첩으로 지목돼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그 사건으로 인해 천상병은 평생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살다 결국 1993년 그가 말하던 소풍 같던 삶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간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소풍은 유토피아같은 시간적 공간이다. 어떠한 시간은 우리의 기억 속에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는데, 그 아름다움 중에 하나가 소풍일 것이다. 우리는 소풍 때 갔던 장소를 기억하기 보다 소풍이라는 사건, 즉 그 시간을 기억한다. 그 소풍의 시간은 언제나 우리 마음 속에 강렬하게 자리 잡고 있어, 힘들고 어려울 때, 또는 세월에 떠밀려 낯선 시간 속에 머무르게 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해주는 등불과도 같다.

 

소풍 모티브는 복음서에서도 매우 중요한 이야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오병이어 사건이 그것이다. 한 소년이 엄마가 싸 주신 도시락을 들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간 날은 그 소년에게 소풍이었다. 식사 시간이 되었을 때 소년은 자기의 도시락을 자기 혼자 먹지 않고 나누어 먹기 위하여 엄마가 싸 주신 도시락을 예수님 앞에 내어놓는다. 아마도, 그 날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 또는 나눔에 대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 말씀을 들은 소년은 차마 자기 혼자 도시락을 먹을 수 없었다. 주변에 도시락을 싸오지 않아 배고픈 사람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들은 말씀대로 자기의 것을 나누었을 때, 그곳에는 배고픈 사람이 사라졌고, 소년의 삶은 풍성해졌다. 그의 소풍은 말할 수 없는 은혜로 가득 찼다.

 

바람을 쐬며 거니는 시간, 또는 소박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의미 없어 보이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시간, 소풍은 우리의 영혼을 풍성하게 해주는 선물과도 같다. 우리의 삶이 그러한 소풍과 같은 시간이었으면, 우리의 예배가 그런 소풍과 같은 시간이었으면, 우리의 교제가 그런 소풍과 같은 시간이었으면, 그러면, 우리도 보라색으로 번진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우리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며 살다가, 소풍이 끝나는 날, 저 하늘로 미소 지으며 올라갈 수 있을 텐데……


Posted by 장준식

유로지비

 

살인마는 사람을 죽이면 죄책감을 갖는 게 아니라 우월감을 갖는다. 자신이 굉장히 잘난 사람이고, 상대방의 삶과 죽음까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이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잉여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과 정남규를 심문한 프로파일러의 통찰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우월감을 갖는 것 자체가 이미 상대방에 대한 '살인'이 아닐까.’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시기하며 질투한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그 미움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한다. 비난, 비협조, 무관심, 왕따, 외면, 혐오, 폭력. 반대로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시하고 멸시한다. 인간은 그 마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한다. 비난, 비협조, 무관심, 왕따, 외면, 혐오, 폭력. ,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우월감을 갖든지, 열등감을 갖든지 표현하는 방식은 대개 비슷하다.

 

러시아어에 유로지비(yurodstvo)’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성스러운 바보라는 뜻이다. 이것은 러시아 정교회(러시아 기독교)가 발전시킨 영성의 개념인데, 성경의 케노시스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케노시스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을 뜻하는데, 이는 빌립보서의 말씀에서 비롯된 말이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케노시스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갖는 영성과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영성을 말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성을 본받아 러시아 정교회는 유로지비의 영성, 성스런 바보의 영성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러시아의 유로지비 영성을 본받아 살아간 사람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러시아의 대 문호 중 한 명인 도스토예프스키와 대 작곡가 중 한 명인 쇼스타코비치가 있다. 이들은 유로지비의 마음으로 자기 시대의 사람들을 섬겼고, 글을 쓰고 작곡을 했다. 그래서 이들의 작품은 지금도 러시아 사람들의 마음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준다.

 

유로지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스도 때문에 성스런 바보처럼 세상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때문에 양보하고, 용서하고,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는 희생정신이 생기는 것이다. 못나고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은 케노시스의 마음으로 유로지비(성스런 바보)가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의 소망은 이 땅의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은 하늘 나라의 약속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로지비(성스런 바보)의 삶을 사는 자에게는 상대방을 향한 우월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우월감을 마음에 갖지 않기 때문에 유로지비의 삶을 사는 자는 부지불식 간에 상대방에 대한 살인의 마음을 갖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순간에서도 생명을 죽이는 자가 아니라, 부지불식간에도 생명을 살리는 자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그리스도처럼 케노시스의 영성’, 즉 유로지비(성스런 바보)의 삶을 살게 될 때만 가능하다. 그렇게 살다 간 바울 사도의 간증은 이렇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나,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영광을 누리고 있으나, 우리는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각까지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고전 4:10-13, 표준새번역).

 

우리도 성스런 바보처럼 살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도, 우리가 속한 공동체도 행복하고 아름다울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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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어울리는 사람?

 

의자의 용도는 무엇일까? 의자는 원래 을 위한 기구였다. 의자는 생활하다 힘들면잠시 앉아 쉴 수 있도록 고안된 물건이다. 그런데, 어느새 의자는 쉼을 위한 기구보다는 일을 위한 기구로 탈바꿈 한 듯하다. 어느 시인은 그의 시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에서 그러한 현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곧추 세운 등뼈 아래로

엉덩이를 엉거주춤 유지해야 하는

이 포즈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각자의 배후를 전적으로 위탁하는 포즈를

우리는 언제부터 배워야 했습니까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어디부터 구부려야 했습니까

어디를 숙여야 했습니까

……

 

사로잡힌 척 의자에 앉아 우리는 손만 쉴 새 없이 움직입니다

한 끼를 위한 너덜너덜한 손의 동작을 왜 멈출 수 없습니까

……

 

뒷모습이 구겨져 있습니다

캄캄한 곳에 우리는 너무 오래 접혀 있었습니다

(이원의 시집, <사랑은 탄생하라> 중에서)

 

우리는 의자에 갇힌 인간 같다(새장에 갇힌 새처럼). 우리는 왜 하루 종일, 그토록, 지루하게, 또는 집요하게,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왜 몸의 가장 중요한 마디를 구부리고 사로 잡힌 척쉴 새 없이 너덜너덜한 손의 동작을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이 시는, 현대 미술의 거장 피카소가 '현대판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칭한 이탈리아의 예술가, 브루노 무나리가 1944년 발표한 포토에세이 [불편한 안락의자에서 편한 자세 찾기]라는 작품을 생각나게 한다. 안락의자인데, 불편하다는 것이 비극이다. 그런데, 작품에서 주인공은 어떻게든 편한 자세를 찾아보려고 애쓴다. 그러나 모두 엉거주춤, 안락해 보이지 않고, 불편해 보인다. 그렇다면, 편한 자세를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안락의자이지만 자기 자신에게 맞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앉아보아도 불편한 안락의자는 나에게 쓸모 없다. 그러므로, 안락의자에 앉아 편안함을 느끼려면 나에게 맞는 안락의자를 다시 만들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한 일을 잘 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이미 우리에게 안락의자라고 제작해 준 그 의자에 편안하게앉아보려고 나의 몸을 이리 구겨보고 저리 구겨보곤 한다. 나의 몸에 맞지 않는 의자에 사로잡힌 척앉아 그 의자가 나의 몸에 맞는 의자라고 정신수양하며 한 끼를 위한 너덜너덜한 손의 동작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 사람에게 어울리는 의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애쓰며 사는가. 세상에 나와 있는 각종 자기계발서는 자기를 계발하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이 이미 만들어 준 안락의자에 나 자신을 꾸겨 맞춰보려는 몸부림에 불과하다.

 

예수는 말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진리를 안다는 것은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의자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준 안락의자에 맞춰 앉아보려고 몸의 중요한 마디를 구부리고 숙이며산다.

 

우리는 그렇게 너무 오래 접혀 있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면, 우리는 이제 사로잡힌 척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한 끼를 위한 너덜너덜한 손의 동작을 멈추고, 한 끼를 위해서가 아닌, 생명을 위해서,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는 의자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너무 구겨져 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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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과 이끌림  (0) 2018.08.31
Posted by 장준식

우리는 아직 다 태어나지 않았다

 

어느 시인은 키스하는 순간을 '아직 다 태어나지 못한 내가 조금 더 태어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김기택, <갈라진다 갈라진다> 시집 중, '키스'에서)

우리는 엄마 자궁을 통해 이 세상에 오기는 했으나, 아직 다 태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신의 배려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한꺼번에 모두 태어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신은 우리에게 생명의 신비를 가르쳐 주기 위해, 엄마 자궁을 통해 나올 때 모든 것이 태어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가 태어나기 위한 진정한 자궁은 엄마의 자궁이 아니라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은 신이 우리에게 선물로 준 '태어남의 자궁'이다. 이 세상에서, 매일, 무엇을 통해 '조금 더 태어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달라진다.

 

엄마의 자궁에서 떨어져 나온 아기는 엄마와의 눈맞춤을 통해서 조금 더 태어나고, 엄마와의 입맞춤을 통해서 조금 더 태어난다.

 

한꺼번에 태어나는 생명은 없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생명들(사람들)은 이미 완성된 생명, 다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아주 조금씩 태어나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가장 모자란 눈, 한 참 더 태어나야 하는 눈을 가진 사람은 상대방을 고정된 생명으로 바라보고, 그 모자람에 눈살을 찌푸리며 손가락질하는 사람이다.

 

인생은조금 더 태어나는 순간을 찾는 놀이와 같다. 그 놀이에 열중하지 않으면 인생은 재미없다. 그 놀이를 하는 중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한 순간에 모두 태어나려 하는 욕심이다. 그러한 순간은 없다. 신은 그러한 순간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순간에 모두 태어나는 일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조금 더 태어나야 한다. 오늘 하루의 일(놀이)은 우리를 조금 더 태어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이 가장 허무를 느끼는 순간은 어느 일을 통해 조금 더 태어나지 못했다고 느낄 때이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생각해 보자. 지금 내가 하는 이 일(놀이)은 무엇을 위한 일인가? 나를 조금 더 태어나게 하지도 못할 무의미한 일인가, 아니면 나를 조금 더 태어나게 하는 의미 있는 일인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지만, 나를 조금 더 태어나게 하는 일은 어쩌면 따로 있는 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하찮게 여긴 바로 그 일, 그냥 지나쳐 버린 바로 그 일이 어쩌면 나를 조금 더 태어나게 해줄 일인지 모른다.

 

우리는 아직 다 태어나지 않았다. 시인이 키스를조금 더 태어난 순간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오늘 조금 더 태어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하는 것으로 그동안 멈추어 있었던태어남을 깨워보는 것은 어떨까? 키스할 수 있는 사랑의 존재(그것이 배우자이든, 자녀이든, 연인이든, 애완견이든, 신의 손등이든)가 있다는 것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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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느리게 가야 할 때

 

누군가 길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이 길을 만들기 이전에는 모든 공간이 길이었다. 인간은 길을 만들고 자신들이 만든 길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들이 만든 길이 아니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먼 곳에 여행 갔다 돌아올 때, 정말로 희한한 것은 길을 따라온 것뿐인데, 집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길이라는 것은 정말 신기한 것이다. 그 길만 따라 가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길이 안전하고 평안하길 바란다. 길을 따라 가다가 안전하지 않아 보이거나 울퉁불퉁하면 긴장하거나 불평을 늘어 놓는다.

 

우리는 대개 누군가 이미 닦아 놓은 길, 또는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로 다닌다. 길이 놓여 있지 않거나,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은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감히 길이 아닌 곳에 길을 놓거나, 아니면 혼자서 그 길을 걸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보스턴에서 죽은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 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서리 내린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고

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

, 먼저 길은 한번 가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 여기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 정현종 번역

 

이 시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시이다. 이 시를 통해 어떤 이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한다고 말한다. 명백한 오독이다. 이 시의 주제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 한다가 아니라, 인생의 어느 시점에 놓여 있던 두 갈래의 길 중, 한 길을 택했더라도, 나중에, 선택하지 않은 길을 생각하며 후회하게 되는 게 인생이라고 말하는 시이다. 그렇다. 우리는 후회 없이 살 수 없다. 아무리 확실해 보이는 길을 선택해서 걸었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 뒤돌아 보면 후회가 몰려오는 것이 인생이다.

 

그렇다면, 길을 가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느 지점에 주의(Caution)’ 간판이 놓여 있다. 길이 울퉁불퉁해서 빠르게 지나면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을 안전하게 통과하는 방법은 천천히, 느리게 지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속도를 줄인다.

 

그렇다. 인생의 길이 울퉁불퉁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평소보다 조금 느리게 가는 것이다. 울퉁불퉁 한데도 평소처럼 빠르게 지나다가 소중한 것을 잃을 수 있다. 우리는 할 수 없었던 일을 돌아오며 후회하기 보다, 할 수 있었는데 하지 못한 일을 돌아보며 더 큰 후회를 한다. 느리게 가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울퉁불퉁한 길을 갈 때는 무조건 느리게 가야 한다. 그래야 후회 많은 인생의 길을 돌아보며 지혜로웠던 자기 자신을 대견스럽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아름다움과 이끌림

 

자동차로 이동하는 동안 주로 두 개의 라디오 채널을 튼다. 하나는 NPR 뉴스 채널이고, 다른 하나는 클래식 방송 채널(Classical KDFC)이다. 뉴스는 주로 출근하면서 틀고, 클래식은 주로 퇴근하면서 튼다. 아침에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궁금하고, 저녁에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마음의 평안을 누린다.

아침에 출근할 때면 지난 밤에 돌려놓았던 클래식 채널을 잠깐 듣게 되는데, 대개는 기계적으로 뉴스 채널로 바꾼다. 그런데, 어느 날은 클래식 채널을 바꾸지 못하고 그냥 놓아두는 때가 있다.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올 때가 그렇다. 며칠 전, 그러한 경험을 또 했다. 아침에 자동차 시동을 건 동시에 클래식 라디오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이었다.

 

브람스의 선율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의 곡 자체가 워낙 아름다워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의 교향곡 1번에는 그의 아름다운 고뇌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브람스는 베토벤을 잇는 독일의 대표적인 낭만파 작곡가이다. 그런데, 그는 세상에 이름을 내놓은 후에도 20년이 넘게 교향곡을 작곡하지 못했다. 베토벤 때문이었다. 베토벤이 죽은 후, 그는 베토벤의 교향곡과 어깨를 나란히 할 교향곡을 작곡할 자신이 없었다.

 

브람스의 교향곡 1번에는 그러한 그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그의 교향곡 선율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베토벤이라고 하는 큰 산을 기어이 넘어선 후, 자신만의 선율을 조가비 속의 진주처럼 반짝이며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아름다운 선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채널을 돌려버리는 것은 브람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멈추어 서게 하는 이끌림이 있다. 그런데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움은 짧은 시간에 빚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고뇌와 노력, 그리고 오랜 수련을 통해서만 빚어지는 신비이다.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들으며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베드로후서 1장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듯, 구원은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에 이르는 길인 것처럼,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는 길은 정말 부단히 걸어 높은 산을 넘는 것과 같다. 마치 브람스가 부단히 걸어 베토벤이라는 높은 산을 넘었던 것처럼.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를 꿈꾼다. 베토벤의 교향곡 같이 아름다운 교회, 베토벤의 교향곡을 넘어서기 위하여 무단히 고뇌하고 노력했던 브람스의 교향곡 1번 같이 아름다운 교회, 우리 모두가 함께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간다면,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는 길이 아름다운 선율을 듣는 것처럼 가슴 뛰는 일이 될 거라 믿는다. 그 꿈을 마음에 품고 오늘도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듣는다.


Posted by 장준식

좋은 설교란


1. 좋은 설교는 그 설교를 듣기 전과 들은 후의 세상이 달라 보이게 한다.


2. 좋은 설교는 인간은 비탄, 슬픔, 고통에 침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료로 뭔가 ㅡ 비탄, 슬픔, 고통을 다른 일로 바꾸는 일, 이를테면 선교 또는 봉사, 섬김 (즉, 하나님 나라의 일) ㅡ 를 만들고 있는 중이란 것을 알려준다.


3. 좋은 설교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확대, 반복,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세상'에 대해서 말하려고 애쓴다. 


4. 좋은 설교는 어디선가 진실은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며 기도의 자리로 이끈다.

5. 좋은 설교는 문제와 사태를 다루는 데 있어 내 방식과는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사태를 보는 다른 눈, 제 3의 눈을 가질 수 있게 돕는다.

6. 좋은 설교는 성경과 신앙의 선조들의 이야기 속에서 장차 내 생각이 될 것을 찾아내고 다른 것을 느끼도록 자극하고 다른 일을 해보도록 격려한다.

7. 좋은 설교는 누군가 이미 용기를 내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예화가 하는 일)

8. 좋은 설교와 만나는 어떤 특별한 순간, 서러운 마음도 자아도 사라지고 ‘이건 진짜다, 멋지다’라는 마음과 가벼운 한숨, 벅찬 가슴만 남는다. 


(정혜윤의 <뜻밖의 좋은 일>에서 얻은 문장을 바탕으로 재구성)


Posted by 장준식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을 읽고

 

악의 이상야릇한 모습에 현혹되지 않으면서 자유, 타자와의 공존이라는 주제로 관심을 돌리고 자기 안의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인 것을 바꿔 서로의 자유를 해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찾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사회를 사는 의미가 아닐까요.”(175).

 

악은 왜 존재하고, 악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그 악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적인 악을 파헤치고, 그 시스템적인 악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악은 텅 빈 마음에 깃든 병이다. 악은 관계를 결여한 병이다. 악은 자기 자신에 대한 소외, 타자에 대한 소외, 이 세상에 대한 소외에서 발생한다. 악은 자신을 세상의 일부로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아와 세계 사이에 팬 골 사이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 악은 죽음과 파괴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악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문학과 철학과 성경(신학)을 동원한다. 다양한 악의 실체를 밝힌 후,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면 자신을 세상의 일부로 느낄 수 있을까? 이 세상은 과연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나는 사랑할 만한 존재인가?

 

우리는 변화시키는 것은 세계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 세계가 아무리 악하다 할지라도 세계와 자기 자신을 선하다 여길 수 있는 능력, 즉 사랑의 능력이다. 사랑의 능력은 책임(responsibility = response + ability)’을 불러오는데, 책임이란 타자에게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타자가 요청하면 거기에 응답하는 것, 세상과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악과 타락을 대면하고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사랑의 능력이다.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통찰력은 악의 극복을 위해서 혁명이나 사회 변혁 같은 거대담론보다 세간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일본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에게서 얻은 것인데, 악을 극복할 수 있는 도덕은 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엉망진창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어 보이는 세간의 세부에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소소한 일상, 지루하고 진부한 일상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서로를 끊임없이 신뢰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과 나를 뛰어 넘는 어떤 존재와 이어져 있다는 소망 안에서 악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의 시대에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악은 자기 자신, 타인, 그리고 이 세계와의 단절의 골 속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교회는 자기 자신 안에 생긴 골, 타인과의 관계에서 패인 골, 그리고 이 세상과의 사이에서 생긴 골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단절된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과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고, 사랑을 통하여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하여 책임감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한 마디로, 교회는 사람들의 마음(존재) 안에 사랑의 능력을 태동시키고 성장시켜, 자기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하여 책임 있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만드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는 세간의 즐거움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토마스 홉스의 사상으로 보는 남북관계


근대는 전쟁을 통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별히 유럽에서 발생한 30년 전쟁(1618-1684)은 종교에 대해서, 그리고 정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며 자신의 사상을 키운 토마스 홉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명제를 남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every man against every man. 왜 인간은 서로를 향해 투쟁할 수 밖에 없을까?


토마스 홉스가 주목한 것은 자연 상태(the state of nature)이다. 여기에서 홉스의 독특한 인간론이 발견되는데, 그는 인간에 대해서 비관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비관론은 어거스틴이나 루터, 또는 칼뱅이 말하는 신학적 비관론이 아니다. 앞의 신학자들은 죄의 개념을 인간에게 가져와 인간에 대한 비관론(죄에 의한 타락)을 전개하지만 홉스에게서 발견되는 비관론은 신학적 비관론이 아니라 경험적 또는 철학적 비관론이다.


홉스는 사람의 정신과 몸은 모두 평등하다고 말한다. 더 뛰어난 몸이나 더 뛰어난 정신이 없고, 모두의 몸과 정신은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평등성이 인간에게 고통과 비참함을 가져다 준다. 사람은 누구나 같은 몸,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것을 바라고 소망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그때 발생한다. 서로 같은 것을 얻고자 할 때 거기에서 긴장이 발생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고 서로를 파괴하려는 열망이 생긴다.


남한이나 북한, 그리고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는 같다. 그것은 국가의 안전이다. 홉스의 평등성에 기대서 말한다면, 어느 나라가 다른 나라를 다스리거나 간섭할 수 없다. 모두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은 모든 나라가 같은 것을 향해 경쟁할 때이다.


홉스는 이러한 상태를 자연 상태(the state of nature)라고 말한다. 이러한 자연 상태에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투쟁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까, 인간은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에 놓이게 된다. 홉스는 여기에서 중요한 정치적 사상을 발전시키는데, 바로 그 죽음의 위협이 인간들 간에 사회 계약(social contract)을 낳게 한다는 것이다. 사회 계약을 통해 서로 투쟁 관계에 있던 인간들은 생명을 보존하고 평화를 일구어 낸다.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은 서로 간에 평화 계약을 맺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 전쟁이 일어나면 공멸하기 때문이다. 서로 으르렁거리는 자연 상태에서 서로 간의 평화 협정을 이끌어 내는 가장 큰 원동력은 홉스가 말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the fear of death’이다. 이처럼 남한과 북한은 21세기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자연 상태’에 놓여 있을 뿐이다.


홉스가 발견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져오는 사회 질서는 굉장히 원시적인 것 같으면서도 매우 심오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국제 정세에 그대로 적용되는 실제적인 정치 이론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남한과 북한이 평화 협정을 맺게 되는 계기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는 데 있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크고 위대한 가치가 없을까’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두려움이라는 부정적인 심리적 압박이 아니라, 보다 위대한 긍정적 가치가 남한과 북한의 평화를 일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한 측면에서 기독교는 남한과 북한의 평화를 위해서 어떠한 가치를 제공하고 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Posted by 장준식

해방의 끝은 어디인가?


해방신학()을 공부하면서, 사회의 구조적 악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남미해방신학, 흑인해방신학, 여성해방신학, 흑인여성해방신학, 남미여성해방신학(Mujerista), 퀴어신학, 탈식민지신학, 그리고 장애인신학,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경험하는 악들과 맞서 싸우느라 참 고생이 많다.


해방신학을 공부하면서 분명히 느끼는 것은, 우리는 모두 가해자이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그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그만큼 사회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파악해야 할 것은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지목하는 일 보다(물론 이것도 중요하다)는 어떤 악이 구조적으로 사회에서 생산되고 사회에 아무렇지도 않게 배어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정말 쉽지 않다.


우리는 왜 누군가를 차별하게 되었는지, 왜 차별하고 있는지 모르고 차별한다. 일례로, 장애인신학에서 말하는 근대의 주체는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주체이다. 근대는 경제적 관심에 의해서 인간의 주체를 파악하지, 인간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경제성이 없는 인간은 구조적으로 사회에서 거부된다. 그러한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거부에 의해 가장 큰 상처를 받는 것은 장애인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현재 탈근대(Post-Modernity)를 살고 있다고 흔히 말하지만, 탈근대는 근대를 벗어난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근대를 더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들어간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그런데, 경제적 양극화의 문제가 심화되는 것을 보면, 내 생각에 탈근대는 근대의 심화가 아닌가 싶다. 모든 분야에서 자기 자신의 경제성을 확보하고 어필하느라 모두 피곤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 탈근대는 근대의 심화일 뿐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상품화시키는 현대인은 그렇게 사회에서 소비되다 쓸모가 없어지면 쓰레기처럼 버려질 뿐이다. 이 거대한 소비사회에서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나 니어링 부부가 주장하고 실천했던조화로운 삶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다. 그러므로 이제는 돌아갈 것이 아니라 돌파해야 하는데, 어떻게 인간성을 지키며 이 거대한 소비사회를 돌파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메시아를 더 갈망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 메시아 사상이 할리우드에 히어로 물들과 만나 판타지로 치닫고 있지만, 판타지가 아닌 희망(궁극적 해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기독교는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어둠은 깊고, 내 발걸음은 너무 느리다.


Posted by 장준식

김태리 주연의 <리틀 포레스트>, 그리고...

마음의 고향 같은 작은 숲(리틀 포레스트), 우리는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작은 숲을 가지고 있는가. 그 숲은 치유와 회복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게 없다면, 인생의 아픔을 어디에서 달랠 수 있을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읽는 느낌,
스캇 & 헬렌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을 읽는 느낌,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는 느낌,
그리고,
나영석 PD의 <삼시세끼>를 시청하는 느낌이었다.

아프면서도 그 아픔을 치유(힐링)할 공간과 방법을 모르는 현대인의 삶에
작은 숲이 되어 작은 힐링을 제공하는 <리틀 포레스트>,
결국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자연과 그 자연에 깃든 추억과,
무엇보다 인생의 이야기를 함께 써나갈 '사람'일 것이다.

우리의 삶에 작은 숲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숲을 함께 거닐며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행복을 완성한 것이다.

<리틀 포레스트>는 말한다. "잠시 쉬어가도, 괜찮아".
‘괜찮아’의 위로가 필요한 현대인들에게 권하는 영화,
그리고,
<괜찮아, 하나님이 계시니까>도 일독을 권한다.


Posted by 장준식

교회를 살리고 싶다

Christianity is Platonism for the masses.
기독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토니즘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처방약을 보면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써 있다. "의사가 이 약을 당신에게 처방해 준 이유는 이 약이 부작용을 가지고 있음에도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명을 받았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장)


초대교회부터 기독교인들은 이 사명을 열심히 지켰다. 유대땅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세계로 뻗어나갔고, 땅과 사상의 경계를 넘어 서기 위해서 그 땅과 그 땅의 사상을 차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한복음만 봐도, 로고스 개념으로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로고스는 유대 개념이 아니다.


유대 땅을 넘어 헬라 세계로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이 차용한 것은 헬라인들의 철학인 플라토니즘(플라톤 철학)이다. 그런데, 그 플라톤 철학은 기독교를 설명하기 매우 좋은 사상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원론이다. 플라톤 철학의 특징은 이 세상을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하는데, 세계를 존재(의 세계)와 생성(의 세계)로 이원화하고, 전자를 후자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적, 가치적 우위를 부여하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플라톤 철학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차용하는데, 사실, 거기에는 부작용이 분명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기독교를 전하기 위하여 플라톤 철학이 더 큰 유익을 준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이용한다.


현재 기독교에서 유통되는 소위 기독교의 교리는 대개 플라톤 철학을 차용한 교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 등장하는 두 왕국 이론도 그렇고, 그의 원죄 개념도 그렇고, 그의 종말론적 시간 개념도 그렇다.


중세에 가면, 플라톤 철학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더해져, 더 복잡한 기독교 교리가 생성된다. 중세 가톨릭 교회가 만들어낸 성만찬 교리가 대표적이다. 가톨릭 교회의 성만찬은 화체설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플라톤의 생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섞인 교리이다. 형상(Form)과 질료(Matter)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바탕으로 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다.


중세의 보편 논쟁은 모두 플라톤 사유의 반영이다. 보편의 개념(이데아)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한 철학이 실재론이고, 그것에 대항하여 보편은 존재하지 않고 개별만 존재한다고 주장한 철학이 유명론이다. 중세의 가톨릭이 교회를 보편 교회(catholic church)라고 주장한 것은 교회가 보편의 개념으로 교회론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래야, 보편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교회가 자기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제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한 교회는 영토와 사상을 확장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에 만만치 않게 복음의 훼손을 가져왔다. 복음의 이원론적 해석이 불러온 가장 큰 재앙은 기독교인들의 역사적 몰이해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더 이상 현실을 정의롭게 정화시키는 원동력을 잃었고, 오히려 사회의 적폐가 되었으며, 여전히 몰역사적인 구원만 외치고 있는 데 머물고 있다.


니체가 외친 구호, “기독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토니즘이다”는 옳다. 그리고 그가 말한, “오직 한 명의 기독교인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말도 옳다. 니체가 도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왜곡한 교회의 파렴치한 역사와 권력이다. 치료를 위해 처방한 약이 그 부작용 때문에 오히려 해를 끼친 격이다. 교회가 지금 부작용으로 죽어가고 있다. 어떻게 그 부작용을 걷어내고, 약효가 온전히 발휘될 수 있게 끔 만들 수 있을까? 교회를 살리고 싶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