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꼭 잡는 신앙]

 

히스기야 왕은 요시야 왕과 더불어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히스기야가 좋은 평가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종교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입니다. 바른 신앙을 갖는 일은 늘 어려운 듯합니다. 하루라도 자기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인간의 운명인 듯하고요. 그리고 신앙이란 영의 일이라 오롯이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인 듯합니다. 신앙인에게 자기 반성이란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간절한 겸손일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산당들 제거, 주상(돌기둥, 신 임재 표식) 깨뜨림, 아세라 목상 찍어 버림, 모세가 만든 놋뱀 철거 등의 외적인 형태를 갖추었지만, 종교개혁의 핵심은 산당신앙에서 벗어나 성전신앙으로 가는 것입니다. 산당신앙은 오늘날에도 신앙을 괴롭히는 신앙의 형태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보다 신앙심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산당신앙은 개별신앙, 사적신앙의 형태를 말합니다. 신앙을 통해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죠. 신앙의 방향이 ‘자기self’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사회분열을 조장합니다. 자기의 이익과 맞지 않는 사람과의 분열을 조장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한 배제와 혐오가 조장됩니다.

 

반면에, 성전신앙은 공동체 신앙, 공적신앙의 형태를 말합니다. 성전신앙의 방향성은 나의 바깥입니다. 관계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전신앙은 화합과 평화를 추구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시대보다 현재 우리의 삶이 더 산당신앙으로 기울기 쉬운 시대입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적나라하게 폭로했듯이, 우리가 사는 시대는 남을 죽여야만 자기가 사는 시대인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징어 게임 하듯,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남을 무너뜨립니다. 이런 시대에서 성전신앙을 세워 나가는 일은 고대 이스라엘에서보다 더 힘든 일입니다.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 시대에 북이스라엘이 망합니다. 열왕기하 18장에 그 내용이 담겨 있는데, 히스가야를 평가는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왕하 18:6). 그런데 북이스라엘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그의 언약과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더라”(왕하 18:12). 이게 바로 산당신앙과 성전신앙의 차이입니다. 산당신앙은 신앙을 사사로이 사리사욕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내가 당장은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것 같아도, 결국 사회를 분열시켜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정말 경계해야 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히스기야의 신앙은 성전신앙의 모범입니다. 히스기야의 신앙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타흐’이고, 다른 하나는 ‘다바크’입니다. ‘바타흐’는 의지하다로 번역되었는데, 신뢰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뢰하니까 안정감을 갖는 상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바타흐’(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안정감을 가졌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안정을 주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계속 ‘불안’하다면 나의 신앙을 조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바크’는 연합하다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혓바닥이 입천장에 붙어 있는 형상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어린 아이가 부모의 손을 붙잡고 그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입니다.

 

성전신앙은 산당신앙과 달리 하나님의 손을 꼭 잡는 신앙입니다. 손을 꼭 잡은 모습에서 ‘애정’을 봅니다. 성전신앙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 잘 되고, 나만 잘 살면 그만인 신앙이 아니라 더불어 잘 살고 더불어 힘든 일을 극복하는 신앙입니다. 삶을 함께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것, 동행하는 신앙이 성전신앙입니다. 공동체가 이런 모습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 신앙의 성장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가 이렇게 성전신앙을 통해서 공동체(서로의 삶을 보듬어 주는 삶의 형태)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성전신앙, 공동체 신앙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불안을 극복하고 삶에 자신감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삶은 내가 실패하더라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줄 공동체가 존재할 때 가능합니다. 히스기야의 삶은 형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복을 주셨습니다. 형통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안정감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도, 우리의 교회도, 우리의 사회도, 이렇게 형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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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근대의 의미: 보수 사회]

 

근대(modernity)의 의미는 다음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

(자연보다 인간의 힘이 더 강력해진 시대)

2) 국민국가의 탄생

(국가는 개인의 또다른 자아가 되었다. 애국심의 탄생)

3) 사유재산의 허용

(내 재산은 아무도 못 건드려! 이건 하나님도 못 건드려!)

 

이 외에도 근대를 규정하는 여러가지의 현상이 있겠지만, 그래도 이 세 가지가 근대를 규정하는 가장 큰 현상이 아닌가 싶다. 이런 현상을 볼 때 근대는 아무래도 근본적으로 '보수적'일수 밖에 없다. 인간중심주의, 국가중심주의, 자유(사유재산)중심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변화'의 문제는 결국 보수 사회가 가져온 파국이다. 보수적 사고와 보수 사회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인간의 성공, 국가의 성공, 자기의 성공은 찬란한 것 같으나, 그 성공이 지니고 있는 내부의 모순을 외부로 '전가'시키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한 연못에 물고기 두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두 마리 물고기가 어느날 싸워서 한 물 고기가 죽었다. 이제 혼자 남게 된 물고기는 자신이 연못을 모두 차지한 것 같고, 더이상 싸울 일도 없어서 평안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좋아한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가 썩어들어가고 그 썩은 물고기가 연못을 오염시켜 결국 혼자 남은 물고기마저 죽게 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성공, 다른 나라에 대한 우리 나라의 성공, 다른 인간에 대한 나의 성공은 모두 '수탈'과 '외부 전가'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수탈과 외부 전가는 끝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분명, 근대와 헤어질 결심을 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세(Anthropocene)'는 짧을수록 좋다.  '지배와 종속'에서 벗어나 '평등'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보수적인 사회로 가야 한다. 가치가 올바르면 그 가치를 지키는 '보수'는 좋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치가 올바르지 못하면 그 가치를 지키는 '보수'는 좋은 것이 될 수 없다. 그저 꼴통 소리를 들을 뿐이다. 지금 근대의 가치를 지키려는 존재는 그저 꼴통일 뿐이다.

 

좋은 가치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좋은 보수 사회가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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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철학]

 

좋은 문학은 '비극'이다. 좋은 철학은 '아픈 철학'이다. 좋은 문학은 비극을 보듬어 안아 희망으로 이끌어 준다. 좋은 철학은 아픈 마음을 안아 희망으로 이끌어 준다.

 

좋은 문학을 하고 좋은 철학을 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들여다 보면, 대개 개인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비극과 아픔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파국 또는 비극으로 몰고온 일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 보며, 왜 이러한 파국과 비극이 닥쳤는지를 파헤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원인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토대를 제공한다.

 

일례로,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놀이하는 인간>는 아픔이 담긴 철학이다. 나치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노동의 경험이 그를 '놀이하는 인간'으로의 사유로 이끌었다. 나치 포로수용소의 모토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였다. 노동하느라 죽다 살아난 하위징아는 노동과 대비되는 '놀이'에 주목하여, 인간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노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놀이하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새로운 삶의 토대를 제공하여 노동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이렇게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는 아픈 철학이다. 그의 철학에는 아픔이 배어있다. 

 

아픔을 일부러 경험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살면서 아픔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우리는 아픔을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쳐서는 안 된다. 모든 '좋은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아픔이 낳은 창조물이다.

 

아픈 철학이 좋다. 그가 왜 그런 철학을 하는 지, 인생의 뒤안길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의 아픔이 어떻게 새로운 길을 내고 있는지 세심하게 살피면 좋다. 그렇게 우리는 아픔을 이겨내기도 하고, 아픈 철학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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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조찬기도회를 폐지하라]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인격을 생산의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인격을 비인간화한다. " (라쿠나, <우리를 위한 하나님>, 398쪽>

 

우리 사회를 '자유 민주주의 사회'라 한다. 그 바탕에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깔려 있다. 이 체제의 악마성은 '인격을 생산 수단'으로 전락시킨다는 데 있다. 인격이 생산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인격으로서의 대우는 증발되고 만다.

 

우리 사회에서 인간 인격이 외롭고 지치고 탈진하는 이유는 인격이 '생산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한 인격으로 존귀하게 대우를 받지 못하고 '생산 수단'으로 전락했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한나 아렌트의 용어를 통해서 표현하면, 우리 사회의 인간 인격은 '정치적 삶'이 박탈당한 것이나 다름 없다. 나치가 유대인들에게서 '정치적 삶'을 박탈한 뒤 저지른 참사가 일상생활에서 발생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이러한 상황을 더 심화시켰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의 지위는 말도 못하게 약화되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는 '현대판 노예'라 부를 만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정치철학적 이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발언은 예수님을 해방자(liberator)가 아니라 억압자(oppressor)로 둔갑시키는 일이다.

 

아무데나 '기도회'를 갖다 붙인다고 그것이 거룩한 시간이 되거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시간이 되지 않는다. 아무데나 '예수님'을 갖다 붙인다고 그것이 거룩한 개념이 되거나 정당화되지 않는다. 아무데나 '기도회' 그리고 '예수님'을 갖다 붙이는 행위는 자신의 무지와 몽매를 드러낼 뿐이다. (내가 무지몽매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가르쳐 주시라.)

 

국가는 인간 인격의 '정치적 삶'을 보장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교회는 국가가 그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감시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정치적 삶'을 빼앗고 있고, 교회가 그것을 묵인할 뿐만 아니라 조력하고 있다면, 국가와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짓밟고 있는 것이다.

 

그 반대를 말하고 있는 국가조찬기도회의 존재 이유는 묘연할 뿐이다. 이럴거면, 국가조찬기도회는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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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인생은 없다 (No life is late)

 

재물이 많은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유대인들의 영성이 담긴 질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선한 일을 많이 해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덕을 많이 쌓으면 그만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쉽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 재물이 많은 청년은 선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계명을 잘 지킨 것이 그에게는 선한 일입니다. 어디 흠잡을 데 없이 아주 도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한 가지를 더 행하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 21). 이 말씀을 들은 재물이 많은 청년은 근심하며 예수님 곁을 떠나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에서 아주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24).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부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일까요? 그렇다면, 부자가 된 사람이나, 부자 나라의 국민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일까요? 모두가 부자가 되기를 꿈꾸는 이 시대에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절대로 부자되기를 갈망하면 안 되고, 부자가 된 사람들을 오히려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 이 시대에 이 말씀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같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도 놀랐던 모양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여기에는 탄식이 묻어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이까?” 맞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인 사람과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 상황이 이럴진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이 말씀은 정말 맞는 말씀 같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꿈꾸는 것은 언감생심인 듯합니다. 말씀을 듣고 당황해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이 맥락에서 예수님은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비유로 알려주십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마 20:1).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아주 쉬운 비유입니다. 포도 수확철에 흔히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오전 6시) 인력시장에 나가 하루 일당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일꾼을 데려다 씁니다. 일꾼이 더 필요했는지, 포도원 주인은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도 나가서 일꾼을 구해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후 5시에도 인력시장에 나가봅니다. 오후 6시에 하루 일과가 끝나기 때문에 오후 5시에 인력시장에 나가서 일꾼을 구해오는 일은 매우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집 주인은 인력시장에 나가서 아직까지 일을 구하지 못해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는 노동자를 발견합니다. 집 주인은 ‘아무도 써 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우두커니 서 있다’는 일꾼을 데려다 포도원에서 일을 시킵니다.

 

이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할 시간입니다. 집 주인은 회계 담당자를 시켜 일당을 지불합니다. 일당 지불은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노동자들부터 지급됩니다. 그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그들보다 훨씬 일찍 와서 일한 노동자들은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노동자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자신들은 그들보다 더 많은 일당을 받게 될 것 같아 기대감에 부풉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집 주인은 그들에게도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노동자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일당으로 지급합니다. 한 데나리온을 받아든 일꾼들은 불평합니다. “아니 어떻게 1시간 일 한 사람하고 하루 종일 일 한 사람하고 일당이 같을 수 있어요? 이건 불공평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신을 가치 있게 여긴 노동자들과 자신을 별로 가치 없다고 여긴 노동자들을 봅니다. 일찍 와서 오랜 시간 동안 일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 일찍 선택되어 노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오후 5시에 겨우 선택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별로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고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가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에 걸맞은 대우를 요구했습니다. 자신들은 가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겨우 1시간 남겨 놓고 일에 투입된 사람들과는 차별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한 데나리온 받은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노동의 대가를 받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자신들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집 주인에게 이렇게 불평하고 있는 겁니다. “왜 우리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것입니까?” 이 사람들은 바로 위에서 본 부자 청년과 같습니다. 자신은 이미 선하고 도덕적인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 천국에 들어가기에 유리한 위치에 올라서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집 주인은 이들의 기대를 완전히 뒤집어 엎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 ‘네가 악하게 보느냐’는 문자적으로 ‘너의 눈이 악하다’는 뜻입니다. 집 주인은 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잣대로 자기를 평가합니다. 집 주인의 평가를 불신합니다. 자기의 잣대로, 자신들을 선하게 평가하고, 자신들을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그래서 자신들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집 주인은 이들을 일컬어 악하다고 꾸짖습니다.

 

이 이야기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정말 통쾌한 비유이고, 정말 안심되는 비유이고, 정말 멋진 비유입니다. 천국은 정말 유쾌한 곳입니다. 집 주인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이들은 자기보다 가치 없는 인간이 자기와 동일하게 대우 받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보통 우리가 하는 행동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이룬 만큼, 거기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집 주인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데 중점을 둡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자신이 가치 없다고 자책하는 사람이나, 똑같이, 가족을 부양하고 삶을 이어가는데 한 데나리온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한 겁니다. 남보다 더 가치 있고 남보다 더 우위에 있는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게 아닙니다. 천국은 생명의 깊이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아니, 이런 사람은 이미 천국을 사는 것이겠죠. 그래서 이런 이들은 부자되는 것과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들은 인생의 깊이에 관심을 둡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조금 부족한 것 같아도 너무 힘들어 하거나 낙심하지 마세요. 그리고 자신이 조금 일찍 온 자 같거든, 겸손하세요. 늦은 인생은 없습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자기의 가치를 평가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선하심에 삶을 맡겨드리세요. 하나님이 구원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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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제사와 사랑]

 

이름이 주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이름은 원래 각 책의 히브리어 첫 글자를 따자 지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는 히브리어 ‘베미드마’로 시작합니다. 한국말로 ‘광야에서’라는 뜻입니다. 민수기는 ‘광야에서’ 발생한 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레위기는 히브리어 ‘바이크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레위기는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민수기라는 이름은 특정한 사건을 지칭하는 인상을 주지만, ‘광야에서’는 뭔가 기대를 갖게 합니다. 광야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실제로 민수기에서 우리는 광야에서 발생한 다양한 사건을 만납니다.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레위기는 ‘레위지파의 기록’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온갖 지루한 법으로 채워진 것 같지만, 실은, 레위기는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 호기심이 생깁니다.

 

레위기는 제사를 둘러싼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사의 종류와 방법,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들에 관한 규칙들, 그리고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들이 레위기를 메우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성경을 읽어 나가다가 처음으로 막히는 곳이 레위기입니다. 너무 낯선 풍경을 접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로 가득 찬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제사의 종류나 방법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사실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레위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제사 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구약의 예언서에 보면 선지자들은 모두 제사를 비판적으로 기술합니다. 아모스, 호세아 같은 선지자들의 제사 비판은 신랄합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에게 비춰진 제사는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희생제사에 대한 기록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해 놓은 것일까요? 희생제사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새크라멘트. 성례전. 이것은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보이게 끔 하는 거룩한 장치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숨은 사랑이 아니라 ‘보이는’ 사랑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세요!”(요일 3:18). 희생제사는 사랑의 새크라멘트입니다. 희생제사는 사랑이 드러나는 장치입니다. 레위기에 기록된 희생제사에 쓰이는 제물들은 그 당시 농부와 유목민들의 생계였습니다. 가축이나 곡식, 열매는 생명과 직결되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자들은 자신이 바치는 제물을 사랑했습니다. 희생제물은 사랑입니다. 희생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제물로 바치면서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는 겁니다. 곧, 희생제물은 사랑입니다. 여기서 제물을 빼고 다시 진술하면, 희생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희생은 주는 것, 헌신, 내어줌, 나눔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희생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희생이 줄어든 사회입니다. 다른 말로, 사랑이 줄어든 사회입니다. 희생제사는 히브리어 ‘코르반’과 ‘레하크리브’가 합쳐 생긴 말인데, ‘가까이 다가오다’, ‘친밀한 관계를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희생은 관계를 굳세게 만드는 가장 좋은 접착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우리 시대는 희생이 희귀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모두 자기 것을 챙기느라 남을 희생시키지, 자기를 내어주어 다른 이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희생을 찾아보기 힘든 사회입니다. 희생이 없다 보니, 서로의 관계가 가까워지지 못하고 멀기만 합니다. 이런 시대에 레위기의 희생제사를 묵상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합니다. 희생(헌신, 내어줌, 나눔)을 통해, 사랑받고 사랑하는, 따뜻함에 삶이 스며들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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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지배질서와 사건]

 

수학, 시, 정치, 사랑.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혁명적인 것'이다.

이것은 모두 '지배질서'를 거부하고, 뛰어넘는다.

 

한병철이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밝히고 있듯이,

권력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권력은 사람들에게 저항을 받지 않고 작동한다. 권력이 사람들에게 저항을 받게 되면, 그때 권력은 더 이상 권력이 아니게 된다.

 

지배질서는 법을 통해 체제를 만들어 놓고, 그 바깥에 나가는 것을 '범죄'로 규정하여 죄의식과 죄책감을 심으며 작동한다. 법 바깥의 일들은 모두 '불가', '불허'로 규정한다. 불가능 한 것, 불허된 것은 금지되고 배제된다.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드는 것이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이다. 사건은 불가능한 것, 불허된 것을 파고든다. 지배질서 바깥에서 발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건'이다.

 

바르트는 말씀을 '사건'으로 보았다. 바디우의 사유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말씀은 인공세계(지배질서)의 바깥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불가능 한 것, 불허된 것, 그래서 금지되고 배제된 것 바깥에서 발생하는 것이 '말씀이다. 말씀은 사건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이유는 젊은이들을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지배질서는 소크라테스를 규정하기를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자'라고 했지만, 이것은 지배질서의 언어에 불과하다. 지배질서에 의문을 품게 하고 도전하게 하고 전복시킬 수 있는 '혼'을 불어넣는 것, 지배질서의 입장에서는 '타락'이지만, 이러한 '타락' 없이 어떻게 세상이 바뀌겠는가.

 

지배질서에 봉사하는 것은 경건하고 온건한 것이고, 지배질서에 맞서는 것은 타락하고 불온한 것이라는 '이념'이 이미 우리 안에는 권력처럼 자리잡고 있다. 지배질서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그 질서를 벗어나면 큰 일 날 것 같은 불안감과 죄책감을 심어주면서.

바디우는 철학자이므로, 혁명적인 것의 범주를 수학, 시, 정치, 그리고 사랑으로 제한했다. 신학자는 여기에 혁명적인 것을 하나 덧불일 수 있다. 신앙. 혁명적인 것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수학, 시, 정치, 사랑, 그리고 신앙.

 

좋은 신앙과 그렇지 못한 신앙의 차이는 혁명적이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있다. 다른 말로, 지배질서에 저항하느냐, 아니면 지배질서에 봉사하느냐에 있다. 신앙이 수학보다, 시보다, 정치보다, 사랑보다 못하면 부끄러운 것이다.

 

도덕과 윤리는 지배질서에 봉사하지만, 신앙은 도덕과 윤리를 넘어서면서 지배질서에 도전한다. 그래서 신앙은 그 시대의 바로미터이다. 좋은 신앙은 지배질서에 봉사하지 않는다. 좋은 신앙은 지배질서에 저항한다. 지배질서가 신앙을 우숩게 아는 사회는 질서를 가장한 악이 판을 치고, 지배질서가 신앙을 무섭게 생각하는 사회는 악이 고개를 들지 못한다. 들더라도 눈치를 본다.

 

신앙인이여. 지배질서를 견뎌내는 데만 신앙을 쓰지 말고, 지배질서에 '사건'을 일으키는데 신앙을 쓰십시오. 사건이 없으면 지배질서는 태평성대를 누리며 생명을 마구마구 착취할 것입니다. 사건이 많으면 지배질서는 그것에 대응하느라 바빠서 정신을 못차릴 것입니다. 사건을 일으키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그 사건이 바로 메시아가 우리 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지배질서의 전복은 그렇게 발생합니다. 그러니, 힘을 내십시오. 신앙을 버리지 말고, 신앙을 더 굳건히 가지십시오. 신앙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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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산당신앙과 성전신앙

 

구약 성경에는 각각 신명기사관(신명기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것)과 역대기사관(역대기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것)에 의해서 기록된 책들이 있습니다. 신명기사관에 의해서 기록된 책들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입니다. 역대기사관에 의해서 기록된 책들은 역대기 상·하, 에스라, 느헤미야입니다. 이 두 사관이 어떻게 다른지는 열왕기서와 역대기서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동일하게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한 기록을 하고 있으나 왕들에 대한 기술 방식이나 평가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일례로, 열왕기에 그리고 있는 므낫세 왕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가 어떻게 아버지 히스기야의 산당 폐쇄 정책을 뒤집어 산당을 통해 악을 꿰했는지를 보여주고 그를 악한 왕으로 평가하는 반면에, 역대기에 그리고 있는 므낫세 왕의 기록은 그가 악을 저지른 후에 앗수르를 잡혀 간 뒤 회개 기도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열왕기에서 므낫세 왕은 악한 왕이지만, 역대기에서 므낫세 왕은 악했지만 회개하여 구원 받은 착한 왕으로 묘사됩니다.

 

신명기사관은 ‘범죄-징계-회개-구원’의 도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 구조가 명백히 드러나는 곳은 사사기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하나님은 징계하고, 그 징계가 너무 고달파 하나님께 회개하면,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 그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인데, 그 이유는 사사기가 신명기사관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사관의 역사 관점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사관은 단순히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하시고, 그 역사가 예언자를 통해서 예언되고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신명기사관은 예언자적 전통에 서 있는 역사 관점입니다. 예언자 그룹이 쓴 성경이라는 뜻입니다.

 

역대기사관은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복귀한 후 이스라엘 공동체를 다시 재건하는 것에 큰 관심을 둡니다. 70여년 동안 바벨론 포로로 지내면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 정체성이 많이 모호해지고 약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으로 다시 복귀한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의 정체성을 다시 살려,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이어 그와 같은 영광스러운 나라를 재건하는 데 목적을 둡니다. 그렇다 보니, 역대기사관은 다윗 왕과 그 왕조를 이상적으로 그립니다. 그래서 역대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신명기사관에서 밝히 드러낸) 다윗이 밧세바를 불의하게 취한 사건도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역대기사관은 성전신앙을 아주 중요하게 다룹니다. 다윗 왕조와 성전신앙의 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자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역대기사관은 제사장적 전통에 서 있는 역사 관점입니다. 제사장 그룹이 쓴 성경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두 사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지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산당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를 고민할 때, 그 이유 중 하나가 ‘산당 제거 실패’입니다. 산당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것 때문에 한 나라가 망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산당이라는 것을 그냥 가볍게 보고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산당은 히브리어로 ‘바마’(단수), ‘바모트’(복수)라 불립니다. 이것은 어떤 장소의 높은 곳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산당은 영어로 ‘high place’로 불립니다. 높은 곳은 신과 가까운 자리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 높은 곳에 지어진 산당은 신과 소통하는 장소로 쓰였습니다. 산당은 신에게 제사 드리는 장소입니다. 가나안 땅에는 이미 토착세력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 입성 이후 그 토착세력의 전통을 이어받아 산당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산당신앙에 물든 것이죠. 그런데, 이게 왜 악한 것으로 평가받는 것일까요? 산당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게 무엇이 잘못일까요?

 

산당은 단순히 제사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산당은 기득세력의 본거지 역할을 했습니다. 가나안 도시국가들은 지방의 산당들과 연합하여 통치체제를 형성했습니다. 산당은 예루살렘 중심의 성전신앙에 대한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이것은 다윗 왕조에게 굉장히 큰 정치적 부담을 안겼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솔로몬 이후에 분열된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를 중심으로 남유다가 형성되고, 다윗 왕조에 반기를 든 지파를 중심으로 북이스라엘이 형성됩니다. 북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은 북쪽 지파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내려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막기 위해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워 그곳에 금송아지를 둡니다. 산당은 이렇게 정치적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문제는 산당이 추구하는 가치에 있습니다. 산당은 가나안 농민들의 신전으로 풍요를 기원하는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곳이었습니다. 사람들과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오직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가까운 가족에게만 쏟게 만들었습니다. 권력을 추앙하게 하고, 성공과 물질 축복 기원만 바라게 했습니다. 공공성, 정의, 윤리와 같은 보편적 인류애를 찾아볼 수 없는 게 산당신앙입니다. 이러한 산당신앙의 가치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여호와 하나님 신앙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평화, 정의를 추구하여 보편적 인류애를 완성하는 우주적 샬롬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그 일에 부름 받은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산당신앙은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를 가로 막는 방해물이었습니다.

 

신앙이 보편성을 잃어버리면, 언제든지 산당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면 내가 삼일만에 다시 짓겠다’하신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보편적 신앙의 가치를 제대로 실행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 그룹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은 로마 정권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대가로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수많은 수탈들에 대해서 눈감고 있었죠. 삭개오 같은 무리가 백성들에게 큰 세금을 징수하여 수탈해도 못 본채 했습니다. 자신들의 자리가 보존되고 자신들은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전신앙을 산당신앙으로 전락시키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고 다시 짓겠다고 선포하신 것이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산당신앙으로 전락하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거꾸로 돌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개인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전신앙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앙은 생명과 평화 정의를 통해 공공성을 추구하며 보편적 인류애를 구현하는 우주적 샬롬의 신앙을 갈망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신 것처럼, 기독교 신앙은 자기 집중의 신앙이 아니라 자기를 넘어서고 자기를 내어놓는 보편적 인류애의 공공신앙을 추구합니다.

 

시대가 혼란스럽고 어렵습니다. 이럴 때 고개를 드는 게 산당신앙입니다. 먹고 살기 힘들다 보니 이웃을 살필 겨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 남들 돌볼 겨를이 어딨냐고 반문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때 자기를 내어놓는 신앙입니다. 자기에게 매몰되지 않고, 더 큰 존재에 연결되어 더 큰 세상을 바라보고 꿈을 꿉니다. 오히려 어려울 때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성전에 나와 자기를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부지런히 주변을 돌보고 자기 자신을 내어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려운 시절을 보내면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고 지키는 방법입니다. 자기 자신 안으로 숨어버리는 산당신앙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 내어놓는 성전신앙을 지켜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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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정치와 종말]

 

사도 바울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15장 24절)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고 나서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드릴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권세, 권력, 권능은 '천사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즉, 최후의 심판 이후에는 인간적이든 천사적이든 모든 권력이 종말을 고하고 우리는 직접적으로 신 아래 있게 된다. 결국 메시아의 도래와 더불어 신이 직접 군림하기 때문에 더 이상 천사들의 매개에 의한 통치와 행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천사들을 파멸시킨다. 다시 말해서 신은 모든 권력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무위'로 돌리고, '비활성화'시키며, '실업의 상태'로 남겨둔다.

(양창렬 , "조르조 아감벤",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 244-245쪽)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종말은 메시아의 도래를 통해서 온다. 우리는 '아직' 메시아의 도래를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메시아의 도래를 경험했다. 우리는 이 역설 속에서 산다.  최후의 심판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우리는 '천사들'의 통치 아래 산다. 여기서 천사들이란 권세, 권력, 권능을 말한다. 현실 정치 용어로 말하면, 대통령, 총리, 장관, 국회의원, 시장, 구청장 등이다.

 

모든 권력은 종말을 고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통치하는 '천사들'의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겸손이고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어차피, 메시아의 도래를 통해 사라질 권력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권력을 사라지게 할 능력을 가진 메시아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미 그들은 자신을 메시아 반열에 올려놓은 메시아 병에 걸린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 우리는 매개된 통치와 행정의 세상에 살고 있다. 그렇다 보니, 어렵고 혼란스럽다. '천사들'이 잘 해주면 좋은데, 보통 천사들은 잘 하지 못한다. 여기서 교회의 기능은 확연해진다. 천사들이 잘 하도록 채찍질하거나, 천사들이 매개되지 않은 통치와 행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자신의 기능을 상실하면, 천사들과 한통속이 되어, 세상의 고통을 더 가중시킨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다음과 같은 우화를 전한다.

 

하시딤(경건한 유대인들)은 도래할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는 모든 것이 이곳과 꼭 같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방은 도래할 세계에서도 지금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아이는 다음 세상에서도 지금 자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자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생에서 걸치고 있는 옷들을 저 생애에서도 입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지금과 같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약간 다르게.

 

위 우화를 전하며 에른스트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약간을 실현하는 것은 너무 어려우며, 이 세상에서 인간이 그 방도를 찾기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메시아의 도래가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의 세상에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직 이 세상은 '천사들'의 매개를 통해서 통치가 이뤄지고 있다. '약간 다르게'만 해도 살만할 텐데, 인간에게는 그 약간 다르게 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고통 가운데 신음한다. 그 신음은 출애굽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것과 닮았다.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다. 그러나, 그 도래를 막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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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방사능 오염수 방류와 생명정치]

 

1.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한덕수 총리가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와 관련하여 브리핑을 하면서 "국가와 과학을 믿어달라"고 했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권을 가진 나라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국민이 반대하는 일을 정부가 막아서지 못하고 오히려 변호하고 있다.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국민인가 정권인가?

 

2. 예외상태

칼 슈미트는 예외상태에서 누가 주권을 갖는가에 대한 논의를 했다. 주권자는 예외상태에서 주권을 가진다. 주권자는 예외상태에서 무엇인가를 결정할 권한을 가진다. 한덕수 국무총리의 말에 의하면, 예외상태에서 주권을 갖는 것은 정부와 과학인 것 같다. 그러므로, 국민들에게는 주권이 없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권을 가진 나라가 아니거나, 무정부 상태이거나, 아니면 정권이 국민의 주권을 빼앗아간 나라처럼 보인다.

 

3. 호모 사케르

조르조 아감벤은 예외상태에서 발생하는 생명정치를 말하며,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는 계속해서 예외상태를 만들어 생명정치를 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 사건이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외상태가 발생하면 예외상태에서 뭔가를 결정한 주권자가 필요하게 되고, 그러한 상태에서 정권은 국민을 제쳐놓고 주권자로 등극한다. 그리고 예외상태에서 모든 국민은 호모 사케르가 된다. 생명정치가 작동하는 것이다.

 

4.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를 직역하면 '신성한 생명'(인간)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면서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는 않는 자들을 말한다(아감벤, <호모 사케르>, 156쪽). 호모 사케르는 배제 속에서 작동하는 생명 정치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금 국민을 '호모 사케르'로 만들어 놓고 있다. 생명과 직결되는 방사능 오염수 방류 사건에서 주권자인 국민을 배제하고, 예외상태를 만들어 정부가 주권자의 역할을 감당하며, 국민들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몰아넣고 있다.

 

5.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주권의 문제

지금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 문제와 그것에 동조하는 한국 정부의 문제는 단순히 국가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주권의 문제이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권을 가진 나라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일개 5년짜리 정권이 주권자 노릇을 하며 예외상태를 만들어 국민들을 호모 사케르로 전락시키고 국민들의 생명을 벌거벗은 상태로 만드는 행위는 헌법에 대한 가장 큰 위법/반역 행위이다.

 

6. 대한민국 국민들이여, 들고 일어나라!

호모 사케르의 생명 정치가 발생하면, 누군가 호모 사케르를 죽여도 그 사람은(그 주체는) 처벌 받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금 국민을 호모 사케르로 만들었고, 방사능 오염수 방류로 인하여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이후에 방사능 물질로 인하여 수많은 생명이 죽어 나가는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들은 처벌 받지 않게 될 거라는 것을 안다. 즉, 늘 그랬듯이, 사건은 발생하고 희생자는 넘쳐나는 데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처벌 받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이여, 호모 사케르의 생명 정치를 통해 벌거벗은 생명으로, 죽음으로 몰아 세우고 있는 정권을 향하여 들고 일어나라. 주권을 빼앗기지 말라.

 

7. 에스겔의 외침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재앙이로다, 비상한 재앙이로다, 끝이 왔도다 끝이 너에게 왔도다 볼지어다 그것이 왔도다. 이 땅 주민아 재앙이 네게 임하도다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 요란한 날이요 산에서 즐거이 부르는 날이 아니로다. 이제 내가 속히 분을 네게 쏟고 내 진노를 네게 이루어서 네 행위대로 너를 심판하여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네게 보응하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 (겔 7:5-9).

 

8. 한국교회여, 유체이탈 집회는 그만하고, 거리를 예배당 삼아 길거리에서 외치라

모 교단에서는 지금 00 영적 각성 대회가 한창이다. 기사를 보니, 대회에서 낭독된 선포문은  이렇다. "지금 우리 사회는 도덕적 기초가 흔들리고 대립과 갈등으로 양극화되고 있다... 미래 세대들이 교회에서 희망을 찾지 못해 떠나고 있다...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길은 철저한 회개 밖에는 없다."

미래 세대가 교회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유체이탈 화법을 교회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국에 잘 지어진 교회 건물안에서 '도덕, 양극화, 영적 각성, 회개, 부흥'을 외칠 것이 아니라, 길거로 나가서 '방사능 오염수 방류 반대'를 외치길 바란다. 그러면, 그렇게 걱정하는, 미래 세대들이 교회에서 희망을 찾고, 교회로 밀려들 것이다. 

 

9. 믿음에 대하여

한덕수 총리가 말했다. "국가와 과학을 믿어달라." 국가는 믿을 만하고, 과학은 믿을 만한가.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믿음은 무엇인가? 한덕수 총리는 믿음이라는 용어를 더럽히지 말라. 그리고, 이 국가적, 지구적 대재난을 앞에 두고, 국민의 신복 대통령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본인이 직접 나서지 못하고, 아랫사람들을 내세워 면피하고 있는가?

 

10. 인류세의 재앙을 끝내야

오펜하이머가 트리니티 작전(맨하튼 프로젝트)을 수행한 날(1945년 7월 26일 새벽 5시 29분)을 인류세로 보는 시각이 있다. 핵폭탄을 만든 날이다. 그 핵폭탄의 실질적 피해국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지금 핵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고 있다. 피폭에 대한 보복인가? 이제 핵물질은 공기, 땅, 그리고 바다까지 모두 오염시켜 인류의 생명을 말살하고 있다. 인류는 스스로의 생명을 빼앗고 있다. 인류세의 재앙은 멈춰야 한다. 스스로 멈출 수 없다면, 모든 것을 잃은 후, 멈춤을 당하고 말 것이다.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그리고 미국 정부에게 고한다. 야합을 끝내고, 당장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멈추라. 정부와 과학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정부와 과학은 믿음의 대상이 될 능력이 없다. 겸허히 인정하고, 당장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멈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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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거와 마병이여!

 

최정례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를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어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적어봤습니다.

 

당신을 통해 나의 가난은 드러난다

당신 앞에서 나는 나의 가난을 감출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은 나의 구세주다

 

내 머리속을 맴돌던 문장인데, 이 문장이 맴돌던 시간, 또다른 문장을 만났습니다. 열왕기하 13장의 문장입니다. 거기에는 엘리사의 죽음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와 자기의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왕하 13:14).

 

한 사람의 죽음을 이토록 애도하는 문장을 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엘리사의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는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를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지칭합니다. 한 존재에 대한, 실로 엄청난 존경입니다. 병거와 마병.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국방력입니다. 엘리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런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존재감, 이러한 존경을 받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성경에서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표현한 것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엘리사의 죽음 이야기를 두고 한참 동안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묵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죽음에 비추어 나의 인생을 돌아보았습니다. 최정례의 시집을 읽으며 떠올랐던 문장이 스쳐갔습니다. “당신을 통해 나의 가난은 드러난다. 당신 앞에서 나는 나의 가난을 감출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은 나의 구세주다.” 엘리사의 죽음에 비춘 나의 삶은 참 가난합니다. 부끄럽고 보잘것없습니다. 누가 나의 존재를, 나의 삶을 이렇게 애도하며 평가해 줄까, 생각해 보면, 나의 삶은 그저 가난하기만 합니다.

 

엘리사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 말씀은 그래서 구세주이기도 합니다. 존재의 가난함에서 벗어나, 지향해야 할 존재의 목적을 가리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래, 엘리사처럼 누군가에게 병거와 마병이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 한 사람만이라도 나를 ‘병거와 마병’으로 인식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무지막지한 존재의 가난함에서 벗어나서 약간의 부요함을 맛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요함을 약간이라도 맛보는 일, 이것이 구원이겠죠.

 

마침, 미국에 온 지 만 20년 되는 날(2023년 8월 11일)을 맞았습니다.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드는 날, 마침 최정례 시집을 읽으며 떠오른 문장과 성경을 읽으며 맞닥뜨린 엘리사의 죽음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나그네로서의 지난 20년 간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래도 늘 존재의 가난함 만을 맛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족도 일구었고, 바울처럼 교회도 개척해 보았고, 교회 건축도 해 보았고, 새로운 곳에 와서 또다른 교회를 섬겨보았고, 어려운 교회였지만 헌신하면서 신앙의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나를 그리워하는 친구들, 고향 교회도 있습니다. 엘리사의 죽음 이야기를 보며 존재의 가난을 느꼈는데, 다시 돌아보니, 그렇게 가난하게만 산 인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엘리사의 죽음 이야기를 보면서, 소망이 생겼습니다. 지난 20년의 나그네 삶을 돌아보며, 앞으로 20년의 나그네 삶을 생각해 봅니다. 기독교 (교회)가 어려운 시절이지만, 그것에 굴하지 않고,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교훈을 나의 교훈으로 삼아 봅니다.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누군가에게, 특별히 교회에 엘리사처럼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구나, 하는 다짐을 해봅니다.

 

이것은 나만의 고백, 다짐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앙을 지키는 것이 어려운 이 때에, 모든 그리스도인들, 좁게는 우리교회의 모든 교우들의 고백과 다짐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가 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 교회, 서로가 서로에게 ‘병거와 마병’이 되어 주는 교회, 그래서 든든하게 세워져 가는 교회. 이런 교회를 꿈꾸고 소망합니다.

 

엘리사의 이야기는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가난한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묵상하다 보면, 결국 우리에게 힘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하나님께 맡기고, 엘리사처럼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로 성장해 가도록, 나의 존재를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지체에게 내어줄 때, 우리는 오늘보다 더 풍요롭고 행복한 교회를 세우고, 더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가 되겠습니다. 당신도 나에게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가 되어 주세요. 이렇게 병거들과 마병들이 모인 교회를 누가 대적하겠습니까? 이게 부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병거와 마병 같은’ 당신이 있어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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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구원은 바깥에서 온다

 

절망(絶望)

ㅡ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사악했던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린 예후 왕조는 또다른 사악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게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아합 왕으로 대표되는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리는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은 예후 왕조인데, 그들도 결국 오므리 왕조와 다를 바 없이 ‘여로보암의 길’로 갔습니다. 다윗의 길로 가지 못하고 여로보암의 길로 간 것 때문에 예후 왕조는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린 특별한 공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이웃 나라인 아람에게 학대를 당했습니다.

 

학대를 당한 예후 왕조의 여호아하스(예후 왕의 아들) 왕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습니다. 학대당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는 하나님은 배은망덕한 여호아하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 구원자를 보내주십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아람의 학대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말씀이 여호아하스에게 이미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구원은 바깥에서 옵니다. 시대의 모든 선지자들은 이것을 동일하게 말합니다. 2차대전 당시 독일 나치에 의해 수많은 고통을 받았던 발터 벤야민도 구원을 바깥에서 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메시아 사상’를 펼칩니다. 우리 나라의 어두운 독재 정권 시절을 살았던 김수영 시인도 동일한 말을 합니다.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우리가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기도는 구원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구원이 바깥에서 온다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 스스로 해결하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온통 바깥의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매순간, 기도하는 일은 우리의 삶이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의 소망처럼 구원이 실제로 바깥에서 오도록 길을 여는 것입니다.

 

큰 기도, 시간이 많이 드는 기도, 정성이 많이 들어간 기도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작은 기도, 찰나에 드리는 화살기도, 정성이 별로 들어가지 않은 기도여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구원을 갈망한다는 것, 구원은 바깥에서 온다는 것, 그리고 구원은 마침내 온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며 믿음입니다. 이 마음만 있다면,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 형태의 기도이든지 값어치가 있습니다. 그러니, 매순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 안에 있고, 기도로 마치십시오. 기도는 메시아가 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구원의 통로이고 열쇠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인류세 신학]

 

인류세. 영어로는 Anthropocene(안트로포씬). 2000년,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과 생물학자 유진 스토머가 기후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새로 고안한 개념입니다. 지난 7월 27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비장한 목소리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지구 온난화가 끝나고, 끓는 지구의 시대가 왔습니다!” 대개 우리는 더 좋은 시대가 도래했다는 ‘선언’을 듣고 싶어하지만, 그와는 달리, 유엔 사무총장의 선언은 비극적입니다. 지난 1만년 동안 기후는 인간에게 따뜻했습니다. 기후는 인간이 살아가기에 매우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1만년 동안 인류는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를 거치면서 찬란한 문명을 이루어 왔습니다. 지난 1만년 동안의 지질시대를 일컬어 ‘홀로세’(Holocene)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기후가 안정적이었던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epoch), 인류세가 도래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류세’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또다른 세금(tax)이 생겨난 줄 알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평온한 삶을 살아왔다는 뜻입니다. 기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인류세’가 기후에 대한 용어라는 것을 전혀 상상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인류세’는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용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이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가장 눈에 띄는 용어는 ‘인류세’와 더불어 ‘전례없는’(unprecedented)이라는 용어입니다. 인류세를 맞아 인류는 전례없는 경험을 합니다. 모두 기후 변화 때문에 겪게 되는 경험입니다.

 

왜 ‘인류세’라는 용어가 중요하고, 왜 인류는 ‘인류세’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그동안 지질시대를 구분하는 용어들은 모두 인간의 활동과 관계없는, 자연적인 활동에 근거한 용어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빙하기’(Ice Age)’가 끝나고 홀로세로 들어서게 된 것은 그냥 자연의 원리였지, 거기에 인류가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활동이 지질시대가 바뀌는 데 1도 관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인류세는 완전히 다릅니다. 인간의 활동이 지질시대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인류보다 몇 배나 더 강력한 생명체였던 공룡조차도 그들의 활동을 통해 지질시대를 바꾸어 놓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구생명체 중 유일하게 인류(인간)만 지질시대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는 정말 대단해!’라고 칭찬할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지금 자신들의 활동 때문에 스스로 죽을 위기에 처해졌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인류는 어떻게 활동을 했길래, 생명을 풍성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멸종을 가져왔는가?’ 이렇게 우리는 아주 깊은 반성의 시간이 필요한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제가 마음에 늘 품고 있는 문장 하나가 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말입니다. “If you want to change your way of life, acquiring the right image is far more important than diligently exercising willpower.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이 말 때문에 저는 어느 순간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인간은 머리속에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머리속에서 올바른 개념이 확립되지 않으면 인간은 의지력으로 자신의 삶을 바꾸거나, 자신의 행동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인간은 생각에 따라 행동합니다. 생각(사고)이 중요합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행동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먹고 하는 행동이나 또는 무심코 하는 행동 모두는 우리의 생각에 대한 반영입니다. 이것을 기후 변화 문제에 적용해 보면, 우리의 행동이 기후 변화의 원인이 되었다는 뜻은, 우리가 기후 변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다시피, 생각을 바꾸는 일은 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일만큼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이 바뀌면 ‘다시 태어났다’라는 말로 묘사할 정도로, 어떤 이의 생각이 바뀐 것을 보면서, ‘저 사람 다시 태어난 것 같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다시 태어난다’라는 말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중생, 거듭남’을 뜻하는 신학적 용어로 인식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을 일컬어서 ‘거듭났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인류세를 맞아 이 ‘거듭남’이라는 용어를 조금 다르게 사용할 필요가 생긴 듯합니다. 예수 믿고 거듭났는데, 그 거듭난 신앙인의 행동이 기후 변화를 불러왔다면, 그것은 진정 거듭난 것일까요? 거듭났다는 것은 생명이 풍성해졌다, 생명이 온전해졌다는 뜻인데, 실상, 인류세를 맞은 인류는 생명이 쪼그라들어, 생명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아주 큰 모순이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해야 할까요?

 

1990년을 전후로 서구권 나라에서는 ‘지구’에 대한 인문학적 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일컬어 ‘지구인문학’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인문학의 주제는 인간이나 국가(정치)였는데, 인문학 주제에 ‘지구’가 대두된 것이죠. 그동안 인문학의 주어는 인간 또는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지구인문학에 대한 논의가 일면서, 인문학의 주어가 인간 또는 국가에서 지구로 바뀐 것입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만의” 인문학에서, 이제는 지구가 주어로 등장하여, 모든 논의에서 지구를 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규정하는 ‘신학’도 마찬가지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기독교 신학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만의” 신학이었습니다. 신학의 주어는 하나님과 인간이었습니다.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더 나은 인간의 삶의 조건을 ‘신적인 삶(신에게 잇대어 있는 삶)’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지구를 주어에서 뺀 신학이 결국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만들었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죠. 우리는 이러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우리는 인류세를 맞아, 아주 깊은 신학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저는 ‘인류세 신학’이라고 명명합니다. 인류세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만 주어로 삼아 생각을 전개시키는 게 아니라 ‘지구’도 주어를 삼아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그러면 지난 2천년 동안 전개된 기독교 신학은 매우 다르게 재구성될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총제적 문제: 기독교만 문제가 아니다]

 

의료사회학자 아서 프랭크(Arthur W. Frank)는 이러한 의학의 효율적인 통제를 "모더니즘적 의료"가 지닌 하나의 특질로 설명한다. 모더니즘적인 의료는 환자의 몸을 통제하는 대신 환자에게 완치 가능성을 약속했다. 환자는 '낫기' 위해서 의료에 몸을 맡긴 채 "환자 역할 sick role"을 할 뿐, 그 외의 몸짓이나 목소리는 축소되거나 소거되었다...... 완치의 개념이 질병이 '끝나는 것' 아니라 '조절 가능한 질병과 함께 무난히 살아가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문제는 '완치 불가'라는 한계가 드러났음에도 현대 의학이 효율적인 통제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기병, <연결된 고통>, 42-23쪽)

 

한국이 서구의 모더니티 사회 속으로 편입되면서 여러가지 진통을 겪어왔다. 한국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깊숙이 빨려들어가면서 모더니티가 안고 있는 모순과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 문제점을 교회를 통해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그러면서 기독교 신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문제들을 한탄하며 괴로워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여러가지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기독교를 갱신할 수 있을까?

 

기독교 내부에 있는 기득권자들도 문제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본인들의 권력과 밥그릇이 달린 문제라 사실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교회의 문제를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이 문제를 일으키는 바로 그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람쥐 쳇 바퀴 도는 꼴이다. 그렇다 보니,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우스운 꼴이 된다.

가령, 교단의 지도자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내세우는 단골 메뉴는 '영적 대각성'이라는 워딩 아래 벌이는 '스펙터클'이다. 복음주의권에서는 '로잔대회'를 준비하고 있고, 감리교에서는 '하디 영적대각성운동' 같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얼마 전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빌리 그래함 방한 50주년 행사를 거하게 치르기도 했다. 이들은 정말 이런 운동을 통해서 교회의 갱신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 열심을 낸다.

 

그러나, 열심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방향이 틀렸는데, 열심을 낸다면 틀린 방향으로 더 깊이, 더 멀리 가, 돌이킬 수 없을 뿐이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열심보다 방향이다. 방향을 바꾸느라 좀 느리고 더디더라도, 열심을 내려놓고, 방향을 제대로 잡는 작업이 중요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소위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그러한 안목이 전혀 없는 듯하다. 관심도 없는 것 같다.

 

기독교가 경험하는 위기는 사실 기독교만 경험하고 있는 게 아니다. 위의 인용문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의학계에서도 동일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의사를 성직자로, 환자를 교인으로 바꾸어서 진술하면, 이것은 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문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모더니티가 안고 있는 문제, 신자유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가 기독교라는 구체적 사회를 통해서, 의료라는 구체적 사회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더니티'라는 '바다'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이다보니 동일한 질병을 앓게 된다.

 

지금은 모더니티 식으로 스펙터클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면 안 되는 때이다. 프랑스 68혁명의 기수 중 한 명이었던 기 드보르(Guy Debord)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드러내주고 있듯이, 스텍터클은 현대 사회의 통치 기술이다. 스텍터클을 일으키는 것은 통지 욕망에 대한 표출일 뿐, 인간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여전히 스펙터클을 일으켜 '영적대각성'을 도모하겠다는 것은, 그저 그들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며, 모더니티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통치하겠다는 권력의지만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문제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스펙터클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물론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이것부터).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냥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진심을 다해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일상을, 그 지루한 일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자기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 것이다. 누구도 통제하고 통치하려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것이다. "질환 서사 속에는 가난, 고통, 성차별, 구조적 폭력이나 사회적 고통 등의 문제가 거의 언제나 상존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 삶에 담긴, 가난, 고통, 성차별, 구조적 폭력이나 사회적 고통 등에 귀를 기울이고, 그러한 문제를 통해 고통 받으며 사는 내 삶의 이웃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것이다. 그냥, 손잡아 주는 것이다. 폭력에 가담하지 않고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매체 중 스펙터클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우리의 삶을 보듬어주고 바꾸어 주는 것은 단연 '책'이다. 책 이외의 다른 매체들은 끊거나 줄이는 게 좋다. 그리고 시간을 할애하여 '책 읽기'에 전념하는 게 좋다.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스펙터클을 일으킬 시간과 에너지를 책 읽는데 진지하게 쓴다면, 한국교회는 갱신을 이룰 토양을 일굴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을 도구로 사용하면 망하듯이, 책읽기를 도구로 사용하면 망한다.

 

사실, 이런 글도 쓰지 말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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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과 언어문제]

 

해방신학에서 기본 원칙은 가난한 자들이 우리의 선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기술이나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희망을 배운다. 가난한 자들은 역사의 피해자들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당파성'(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함께 그들을 위하여 계시고 어떤 경우에서든지 억눌리고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존재한다.

(도로테 죌레, <현대신학의 패러다임>, 34-35쪽)

 

독일의 저명한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위와 같이 해방신학이 가진 의미를 아주 명료하게 풀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the poor'에 대한 한국어 번역입니다. the poor를 '가난한 자들'이라고 번역을 하면, 이것은 한국인의 인식 속에서 경제적 가난에 처한 이들을 떠올리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방신학에서 말하고 있는 '가난한 자들(the poor)'는 단순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죄'로까지 여겨질 정도로 사람들은 '가난'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해방신학이 단순히 경제의 개념 안에서만 '가난한 자들'이 우리의 선생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주장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일반 시민들에게 별로 설득력을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해방신학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가난한 자들’과 동일시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념을 담고 있는 언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대상을 인식하고 사고를 하고 그것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입니다. 언어가 사물, 또는 대상 자체를 잘 표현해 내지 못하거나, 잘 드러내지 못하면, 인간은 사물 또는 대상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삶 속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해방신학이 말하는 기본 원칙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우리의 선생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편이다." "사건의 인식과 해석의 기준은 가난한 자들이어야 한다."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이러한 원칙들은 너무 중요한 것이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the poor'를 '가난한 자들'로 번역한 한국말에 있습니다. 이 용어는 명백하게 경제적 가난을 연상시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난하게 살면 삶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청빈은 경제적 부담이 큽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영성가 중 청빈한 삶을 산 사람들은 본인의 청빈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짐을 지웠는지 모릅니다. 이는 유기농 식단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가능한 것과 같습니다.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the poor'란 단순히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만 가리키는 용어가 아닙니다. 이것을 한국어로 '가난한 자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the poor'의 의미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the poor를 '가난한 자들' 이외의 다른 용어로 옮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땅한 용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딜레마입니다.

 

그래서 죌레가 위에서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풀어서 말한 다음 문장은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들'이 누구인지를 인식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역사의 피해자들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이다."

 

이것은 경제적 가난의 유무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경제적 가난에 처해진 사람들 대다수가 역사의 피해자들이고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 이외에도 역사의 피해자들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것은 한 개인일 수도 있고, 한 가정일 수도 있고, 어떤 집단이나 또는 한 나라 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피해자들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은 오늘날 우리의 삶의 현장/현실에서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늘 가난한 자들의 편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피해자,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의 편이십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은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는 부단히 가난한 자들 곁에 서서 그들과 함께 서 있는 하나님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삶의 파괴를 경험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우리는 너무도 자주 삶의 파괴를 경험하고, 삶의 파괴를 경험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시방 위험’합니다.

 

역사의 피해자가 되는 일,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삶을 떠안는 일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희망을 만들어 가는 일은 남을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 한국의 수해 피해자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은총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하여 곡물 수출이 안 돼 굶고 있는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 국민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 이 땅의 모든 역사의 피해자,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삶을 떠안고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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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