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처럼 사랑하기

 

이삭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식은 부모를 본받기도 하지만, 부모를 반면교사 삼기도 합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반면교사 삼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이삭의 독특한 경험이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이삭이 살면서 자신 만이 경험한 사건, 즉 이삭이 다른 족장들(아브라함, 야곱, 요셉)과 다른 삶을 살게 한 그만의 독특한 인생 경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스마엘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모리아산 제물 사건입니다. 두 사건 모두, 이삭에게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각인된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과 하갈을 광야로 쫓아낸 이유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도, 모두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이삭은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언약이 뭐길래?!” 그런데, 이삭이 쌍둥이 아들을 낳고 보니, 이들 가운데도 ‘언약’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되리라.” 그러면 이삭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아버지처럼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에서를 광야로 내쳐야 했을까요? 이삭은 자신의 끔찍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렇게 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결코 언약 때문에 자식을 사지로 내모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끝까지 큰 아들 에서를 지킬 거야. 사랑할 거야.” 이삭은 사랑하기로 결단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저명한 유대인 랍비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가 쓴 책에서 이삭에 대한 삶을 해석하는 부분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이삭이 에서를 사랑한 것은 에서가 그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아버지들의 모습이다”(매주 오경 읽기, 64쪽). 그러면서 이삭이 그러한 결정을 한 것은 이삭이 경험한 아버지와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을 내놓습니다. 즉, 이삭이 에서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한 것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 자신을 죽이려 한 사건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눈시울을 뜨겁게 만듭니다. 족장들 중에서 가장 평탄한 삶을 산 것 같고, 가장 믿음이 없는 것 같고, 무난한 삶을 산 것 같은 이삭이 사실은 가장 힘든 삶을 살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도, 야곱도, 요셉도 아버지(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형 이스마엘, 즉 아브라함의 큰 아들을 죽음에 내몰았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고 하는 트라우마 속에서 평생 살았을 것입니다. 그 사건을 보면서 이삭도 마음 속에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도 버리면 어떡하지?’ 그런데 실제로 그와 비슷한 일이, 아니 더 큰 충격적인 일이 발생합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 든 것이죠.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제사 드리러 갔던 모리아 산에서 이삭은 정말 죽다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향한 이삭(아들)의 마음을 차갑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삭의 경험은 아주 원초적입니다. 이삭의 경험은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경험입니다. 마땅히 사랑받아야 할 존재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일입니다. 이삭은 아버지(부모)와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그 단절의 경험이 이삭을 평생 괴롭혔습니다. 이삭은 야곱과 요셉처럼 물리적 단절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단절의 경험, 아버지(부모)와의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 누구보다도 더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이유불문하고 에서를 덮어놓고 사랑한 것은 “이삭 자신이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 결박당했던 사건이 초래했던 부자간의 관계 단절을 치유하는 일이었다”(조너선 색스)는 진술은 눈시울을 적시게 만듭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던 이삭이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이삭의 상처를 치유했을 뿐만 아니라, 에서의 상처도 치유합니다. 이삭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에서는 동생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합니다. 이삭은 평화롭게 죽었고, 에서는 나중에 동생 야곱이 하란 땅에서 돌아올 때 얍복강에서 ‘죽이고 싶었던 동생’ 야곱과 화해합니다. 에서가 동생 야곱에 대하여 마음을 푼 것은 아버지 이삭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상처를 치유합니다. 사랑은 구원입니다. 이삭처럼 사랑하면, 우리들의 상처도 치유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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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성서는 변혁이다]

 

앎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지의 폐기가 아니다. 앎이 늘어난다고 해서 미지의 영역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한 방식의 지적 탐구는 실존에 대한 불안을 통제하기 위한 자기중심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앎은 무한으로 뻗어 나간다. 앎이 늘어날 때마다 우리는 더 경이로워하고, 미지의 영역은 한층 더 넓어진다. 본문, 전통, 공동체, '나'는 기술을 좀 더 능숙하게 익히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본문도, 전통도, 공동체도, '나'도 베일에 가려진, 통찰과 계시를 필요로 하는 신비다. 이들에 대한 앎은 숙달된 기술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여를 통해 선물로 받게 된다.

ㅡ 월터 윙크, <성서는 변혁이다>, 130-131쪽.

 

이 책의 첫 문장은 충격적이다. "역사 비평은 파산했다."(Historical biblical criticism is bankrupt.)

이 책은 역사 비평이 왜 파산했는지, 그리고 파산한 역사 비평에 어떠한 새로운 경영 방침이 필요한지를 밝히고 있다.

 

역사 비평이 '파산'했다는 말은 역사 비평이 죽었다는 말이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파산했다는 것은 새로운 경영 방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즉, 역사 비평을 전혀 필요 없는 구시대 유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 비평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

 

이 책은 성서학자들에게 가하는 일침이다. 모더니티의 유산인 성서 비평을 통해서 성서학자들이 어떻게 권력을 쥐게 되고, 그것을 이용해서 학문과 공동체가 어떻게 분열시켰으며, 분열된 결과 어떠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학문과 공동체가 분열되어 있는 비극적 상황을 치유하기 위한 시도이다. 이 책은 성서 연구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주장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변증법적 해석학'(dialectical hermeneutic)이다. 이 책은 대부분은 이것에 대한 서술이다. 이 변증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해석자와 성서본문 사이에 있는 주체-대상 이분법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잘 보여준다. 변증법적 해석학을 설명해 나가면서 쓰이는 두 가지 도구는 1) 지식 사회학적 분석과 2) 정신 분석학적 비평이다.

 

이 책이 주장하는 성서해석의 중요성은 이 책이 인용하고 있는 리처드 팔머의 진술에서 드러난다.

"참된 해석은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것이며 존재가 새롭게 드러나는 것이다. 해석은 현재와 분명한 관계가 있는 활동이다. 해석자는 해석을 통해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을 한다"(115쪽).

우리는 왜 성서를 읽는가? 왜 우리는 성서를 해석하는가? 왜 우리는 성서와 교제를 나누는가? 답은 변혁(transformation)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악한 일의 대부분은 '자기 중심성/자기집중'이라는 교만의 죄 때문이다(판넨베르크). 이러한 죄는 성서본문 해석의 왜곡에도 관여한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를 왜곡한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성을 잃고, 세계는 파괴된다.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변증법적 해석학'은 그것을 치유할 힘을 제공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감명 받은 문장 중 하나이다.

 

"위대한 신화와 종교 문헌들 가운데 그 무언가는 우리와 만나며 특별히 나자렛 예수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를 만나고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보여준다. 이때 '나'는 나에 관한 앎을 얻기 전에 먼저 내가 알려짐을 안다. 무언가는 대상을 통해 '나'의 계산을 뛰어넘는 깊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깊이를 통해 나는 '나'를 중심으로 짠 전략에서 벗어나 모든 피조물과 다시 연합하기 시작한다. 변증법의 과정을 거쳐 주체-대상의 이분법이 주체-대상의 관계로 대체되면, 그리하여 지평들의 친교가 이루어지면, 본문과 만남을 통해 우리의 삶은 변혁될 수 있다"(116쪽).

 

이 문장은 모더니티가 망쳐 놓은 '주체-대상의 관계'를 치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더니티의 발명 중 최고는 '주체-대상의 이분법'이고, 모더니티의 발명 중 최악도 '주체-대상의 이분법'이다. 인간이 자연을 대상화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삶은 비극으로 치닫았고, 급기야 기후변화 문제를 야기하여 집단 자살 상태에 들어섰다. 모더니티가 낳은 그렌델 '주체-대상의 이분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따라, 인류의 운명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에는 그 해결책이 담겨 있다. '주체-대상의 관계'가 그것이다. 지평들의 친교. 결국 친교가 중요하다.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 대상이되 대상이지 않은 주체들의 친교.

 

월터 윙크의 책은 솔직하고 담백해서 좋다. 허세가 없다. 아는 것을 친절하게 말해주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한다. 이는 존 도미닉 크로산 책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책을 읽으면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이 책에서 인용되고 있는 T.S 엘리엇의 시를 옮겨 적는다. 이 책이 말하고 싶은 해석의 깊이를 잘 전하고 있다.

 

그대가 알지 못하는 곳에 이르려면

그대는 무지의 길로 가야 한다.

그대가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하려면

그대는 무소유의 길을 가야 한다.

그대가 그대 아닌 것에 이르려면

그대는 그대가 아닌 길을 거쳐 가야 한다.

그대가 모르는 것만이 그대가 아는 것이다.

(<사중주 네 편>에 실린 East Coker라는 시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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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쁨의 편지]

 

218쪽. 나가며. "사랑해서 행복합니다."

책의 마지막을 읽어내려가며, '나가며', 눈물이 흘렀다.

떠나보낸 남편을 '프레드릭'에 비유하며, 남편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사랑을 고백하는 부분에서 눈물이 그냥 흘렀다.

 

이 책은 '기쁨의 편지'이다. 그런데, 그 기쁨을 전하는 사람은 이미 세상에 없는, 고인이 되었다. '로슈 이신근'. 누구라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일 것이다. 무명이다. 로슈라는 이름은 예수원에서 얻는 신명이다. '뿌리'라는 뜻이다. 로슈라는 신명도, 이신근이라는 이름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로슈라는 신명과 이신근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와 박힌다. 아주 평온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마샬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은 <미디어의 이해>라는 책에서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a is the message)"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경우에 따라서 매우 보수적인 말이다. 미디어, 즉 전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메시지의 경중이 갈린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유명하고 저명한 사람이 전하는 메시지는 사람들이 귀담아들을 만하고, 무명한 자가 전하면 사람들이 메시지를 귀담아듣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전하는 자, 즉 미디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명백히 정치적 수사다.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아젠다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정치적 수사다. 사실, 미디어보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다. 누가 전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메시지 자체보다 그 메시지를 전하는 '미디어(메신저)'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별거 아닌 메시지를 뭔가 있는 메시지로 둔갑시키기 위해서 '스펙터클'을 조성한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런 내용 없는 메시지에 영혼을 털털 털린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공허한 이유이기도 하다.

 

메시지가 중요하다. 로슈 이신근. 무명이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기독교 신앙의 무게를 맛보게 해준다. 그는 '비운동성 섬모 증후군'이라는 희귀병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약한 몸 때문에 생명은 그에게 늘 '문제'(matter)'였다. 그래서 그에게 '생명'은 '살라는 명령'이었다. 생명이 '살라는 명령'이 아니면, 그는 살아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삶과 죽음에 대한 '테마여행'처럼 꾸며져 있다. 들어가며 뭉클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가게 되고, 나올 때 그 뭉클한 마음에 눈물이 맺힌 채로 나오게 된다. '희년함께'에서 간사로 일하며 경험한 것들 뿐만 아니라, 공부하며 배우고 깨달은 신앙과 세계의 이야기가 담담한 일상의 언어로 잘 풀어져 있다. 신학자들의 언어처럼 현학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시장의 언어처럼 정제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삶 자체가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답게 그의 언어는 '종말론'을 품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오늘은 영원이고, 사랑은 구원이고, 신앙은 종말 그 자체다.

 

그가 감당했던 육체와 삶의 고통은 개인적으로 남지 않는다. 그의 고통은 자기를 넘어 타인에게로, 그리고 사회에로 확대된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따뜻하다. 그에게 신앙은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공동체적이다. 그에게 신앙은 혐오와 차별이 아니라 포용과 안아줌이다. 생명은 원래 그런 것이다. 살라는 명령이다. 살고자 하는 자를 살지 못하게 하는 폭력만큼 악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생명을 향한 따뜻한 '살림'이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희년의 정신을 체현한 신앙인 답게 그의 시선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통받는 인류에게 확장된다. 신앙이 이것을 말하지 않고 신앙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할 수 없다. 교회를 향한 그의 비판은 날카롭고 정직하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 안에서 자본주의의 영향력은 교회 밖과 다르거나 덜하지 않다. 대다수 교인이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을 살기보다 한국이 선택한 자본주의 세상을 산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122쪽). 그래서 그에게 '기쁨'은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간다'의 유체이탈이 아니다. 그에게 기쁨은 오늘 여기에서 '차별과 가난'이 없는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위해 싸우다 영원한 하늘 나라로 갔다.

 

그에게 결혼은 현실 바깥에 있는 상상이었다. 선천적으로 약한 몸 때문에 결혼을 꿈꾸지 못했다. 그런데 '희년함께' 운동을 하면서 뜻밖의 사랑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고, 두 아이까지 하나님께 선물로 받게 된다. 그 두 아이의 이름은 '희서'(기쁨의 편지)와 '예서'(사랑(예수님)의 편지)이다. 아직 어린 두 딸을 남겨두고 눈을 감는 게 고통스러웠겠지만, 그가 남긴 신앙의 유산은 두 딸을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편지로 키우기에 충분하다. 두 딸이 성장하여 아빠의 유작을 읽게 되면, 두 아이의 마음을 그 어느 누구보다 밝게 빛나게 될 것을 믿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고 믿는 이유는 '나가며'에서 고백한 이신근의 아내 이소영의 사랑 때문이다. 아내 이소영은 이렇게 고백한다. "프레드릭을 닮은 당신은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시인처럼 따뜻한 말로 나를 녹이는 사람이었어요. 손으로 핸드폰을 쥐는 것조차 힘들었던 당신이 힘겹게 꾹꾹 늘러 쓴 마지막 메시지를 기억해요. '당신을 만난 건... 꿈같은 선물이었어.' 당신의 메시지에 나도 간절한 마음으로 답장을 했어요. '당신도 나에게 꿈같은 선물이었어요'"(221쪽).

 

눈물 고인 눈으로, 책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가족 사진을 보았다. 저절로 기도가 나왔다. "희서와 예서가 아빠가 남겨준 신앙과 사랑의 유산 가운데서, 엄마의 사랑과 보호 속에서 잘 크게 해주세요. 그리고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깊은 슬픔을 안고 살아갈 아내 이소영을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그 무엇에도 꺾이질 않을 사랑으로 두 아이를 잘 키우며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세요."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면한다.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이것은 분명 '기쁨의 편지'이다.

 

*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어울릴 책은 단연 <슬픔의 노래>이다. 기쁨의 노래와 슬픔의 노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위로이다. 위로가 필요한 이 시대에, 우리 모두 위로 받고 힘을 내길, 진심으로 바란다.

 

* 로슈 이신근 형제, 평안히 잠드소서.

Posted by 장준식

[기독교 신앙과 미래]

 

존 쉘비 스퐁. 미국 성공회의 감독입니다. 지난 팬데믹 기간(202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머리가 거부하는 것을 결코 가슴이 예배할 수 없다”는 신념 아래서 계몽주의 이래 엄청난 변화를 맞이한 세상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발견하여 대중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한 명의 기독교 사제(목회자)입니다. 이분이 쓴 책 중에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Why Christianity Must Change or Die)>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제목부터 내용까지 아주 도발적인 책입니다. 보수적인 전통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읽으면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를만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1998년도에 출간되었습니다. 벌써 25년 된 책입니다. 25년 전에 기독교의 미래를 예견하고, 그 미래를 걱정하고, 거기서 그친 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기독교 신앙이 여전히 의미 있는 것으로 작동하려면 기독교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제시한 책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기독교 신앙을 지속 가능한 종교로 거듭나게 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한 선각자들이 한 두 명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말은,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 어느 때부터인가 기독교의 위기를 감지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들이 감지한 기독교의 위기는 일반 대중들에게(일반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피부로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 그리고 정치적 격변과 바이러스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면서, 기독교의 위기는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수면 위에 떠올랐습니다. 이는 마치 ‘기후변화 문제’가 몇몇 과학자들에게만 기우가 된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기우가 된 경우랑 같습니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이제 세상은 기독교를 걱정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독교 내에서는 두 가지의 극명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이 극보수화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 신자(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교회를 안 나가는 사람들)가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극보수화 시키는 사람들은 결집을 위해서 배제와 차별과 혐오의 전략을 씁니다. 타종교에 대한 혐오, 소수자에 대한 혐오 등 이러한 전략을 통해 내부결집을 다집니다. 가나안 신자들은 기독교 내부 문제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방관자’로 남기 쉽습니다. 그냥 교회를 안 나갑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기독교 인구의 약 30퍼센트 정도가 교회 출석을 안 하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기독교인 10명 중 3명은 교회를 안 나가고 있다는 것이죠.

 

신앙의 극보수화든, 가나안 신자의 증가든, 모두 마음 아픈 일입니다. 두 방향은 모두 바람직지 않습니다. 신앙을 지키겠다고 신앙을 보수화시키는 문제나, 교회가 마음에 안 든다고 교회를 그냥 떠나버리는 것도 교회를 위한 일이 전혀 아닙니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를 지키며 기독교 신앙을 올바로 세워보겠다고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노력은 참 귀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모두가 허심탄회하게 지난 2천년 간의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치열하게, 많은 토론과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미래를 열어가야 하는 시대를 맞이한 듯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어디에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는지, 두 가지 정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입니다. 무엇이든지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신학을 정립한 교부로서 지대한 공헌을 했고, 종교개혁은 기독교를 좀 더 신실하게 구성하고자 노력을 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신학 가운데는 현재 21세기와 양립하기 어려운 신학, 다시 말해, 현재의 세상과 어울리기 힘들게 만든 결정적인 오류가 있다는 게, 요즘 신학자들의 비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의 박사, 사랑의 박사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 교부입니다. 은총, 사랑, 이것은 정말 중요한 기독교 신앙이죠.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총)이 주어졌으므로 생각할 필요 없고 그 말씀에 그저 순종만 하면 된다는 신학을 펼칩니다. 생각의 자리에 순종을 배치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기독교인들은 ‘사고(생각함)’보다는 ‘순종’을 더 높은 가치로 여기며 살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생각’ 보다 ‘순종’을 강조하게 된 것이죠.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고력’을 지닌 존재인데 그것을 작동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순종적인 인간 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만들었습니다. 계몽주의, 이성의 시대를 거치면서 기독교의 순종 논리는 기독교 신앙을 세상과 부대끼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사고력이 결여된 인간, 이것은 맹목적인 순종을 낳게 하는 독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또는 교회에서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비이성적인 행동을 보이는 기독교인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종교개혁은 기독교 신앙을 좀 더 신실하게 만들고자 한 노력이었지만, 결정적인 실수를 한 가지 합니다. 과학을 등진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 중세의 기독교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위에 세워졌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철학을 발전시키고 확립한 철학자입니다. 옛날에는 과학을 철학자들이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방법론을 따라 신학방법론을 발전시킨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자연신학이라 불립니다. 요즘 말로 하면, 과학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과학의 언어로 신학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은 기독교를 새롭게 한다는 명목으로 ‘르네상스 운동’에 동참합니다. 르네상스는 과거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새로움’이란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돌아간 과거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때, 종교개혁자들은 자연철학/자연신학을 버립니다. 이것은 크나큰 실수였다는 게, 요즘 신학자들의 비판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자연철학/자연신학, 즉 과학을 버리는 바람에 과학을 등지는 ‘반지성주의 신앙’이 기독교 내에 자리를 잡았다는 겁니다.

 

요즘,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답답해하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대표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사고력의 부재’와 ‘과학을 등진 반지성주의’를 답답해 합니다. 그렇다면, 21세기에 기독교가 여전히 의미 있는 신앙체계로 세상에 기여를 하려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적어도 두 가지는 자명합니다. 교회에서 순종의 가치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사고력의 가치도 동시에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순종은 생각의 끝에 가서 필요한 것이지, 사고력을 눌러버리는 권력이 아닙니다. ‘합리적 의심과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인간 사회는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사고력을 기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자명합니다. 역사 공부를 하는 겁니다. 성경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역사 공부를 통해서, 역사 안에서 기독교 신앙의 위치와 역할을 고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 교회에서는 과학 공부가 필요합니다. 과학의 언어와 사고를 익히고, 신앙을 과학의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지성이 필요합니다. 과학의 발견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과학의 언어와 신앙의 언어가 배타적이 아니고 진리를 위한 친구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바람이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성경공부와 더불어 역사공부와 과학공부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역사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으로 거듭나면 좋겠습니다. 또한 과학의 언어와 신앙의 언어가 어떻게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지, 탐구하고 나누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말이 통하는 인간’으로 거듭나면 좋겠습니다. 기독교의 미래는 이렇게,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자기를 넘어서는 신앙]

 

미국에는 거대한 심리적 병리 현상이 존재합니다. 이는 인종차별에 기반을 둔 현상입니다. 심리적 병리 현상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Guilty(죄책감), Anger(분노), 그리고 두려움(Fear). 죄책감은 백인에게서 나오는 심리적 병리 현상입니다. 분노는 흑인에게서 나옵니다. 두려움은 아시아인에게서 나옵니다. 미국 사회 이면에는 죄책감, 분노, 그리고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 사회가 건장하지 못한 이유이고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주요 요인 중 하나입니다.

 

백인은 근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면서 세계를 정복했고,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원주민 대학살의 역사가 있습니다. 5000만 명 정도를 학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잡아와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명과 자연을 훼손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 과정에서 백인은 '우월감'을 가지게 됐지만, 그 이면에서는 '죄책감'이 자리 잡았습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백인은 '백인우월주의'를 바탕으로 자신들 이면에 있는 '죄책감'을 덮으려고 합니다. 죄책감이 저변에 병리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은 '표리부동'입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사악한 마음을 품습니다. 한 마디로, 속을 알 수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서 '선한 일'을 많이 합니다. 무덤에 회칠이라도 하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선한 일을 통해서 속죄하려고 합니다.

 

흑인은 인종적으로 최고의 피해자입니다. 사람으로 취급 받지 못하고 자신들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노예로 잡혀 와서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영혼이 있는 생명체로서 최악의 경험을 한 것이죠. 그래서 흑인들에게는 '분노'가 많습니다. 분노가 많은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의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거칠어진다는 것입니다. 감정 표현이 매우 거칩니다. 흑인 영어는 매우 거칩니다. 제스처도 그렇습니다.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삽니다. 삶 속에서 무슨 피해를 입을까봐 노심초사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의 특징은 절대 다른 사람의 일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매우 소극적이고 수동적입니다. 자기가 피해 입는 것을 두려워하고, 남에게 피해주는 것을 꺼려합니다. 피해를 입어도 그것을 입 밖에 꺼내기를 주저하고, 왠만한 일은 그냥 참고 넘어갑니다. 아시아인이 미국에서 폭력에 쉽게 노출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각 인종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병리적 현상은 각 인종의 신학과 예배에도 반영됩니다. 백인은 '죄와 용서의 신학'을 중요시합니다. 백인들은 로마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고, 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셨다는 '복음'은 그들에게 그야말로 구원의 말씀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행동은 죄인인 '타자'를 구원하기 위한 구원 행위였다는 것이죠. 우월감을 가지고 저지른 나쁜 행동들은 모두 그렇게 정당화됩니다. 제국주의자들은 모두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뻔뻔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월한 자신들이 미개한 조선인들을 구원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반성이 어렵습니다.

 

흑인은 해방과 기쁨의 신학을 추구합니다. 억압당하며 산 이들에게 해방은 그 자체로 구원입니다. 그래서 흑인들은 해방을 이야기하는 누가복음의 말씀이나 선지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같은 성경을 좋아합니다. 예배에서도 그들은 울분을 토하고,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는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들을 벌주시고, 약자들을 신원해 주신다는 말씀을 들으면 '에이멘'이 합창처럼 터져 나옵니다. 눌린 억압을 풀어주고, 묶여 있는 분노를 발산할 때 이들은 기뻐합니다. 그래서 흑인 교회의 예배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늘 축제입니다.

 

아시아인의 신학은 백인과 흑인의 신학과 결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아인들의 신학은 대체로 ‘기복적 요소'가 강한데, 그 이유는 건강이나 물질의 복을 통해서 자신들이 가진 두려움을 극복하거나 달래주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씀에 감동을 많이 받습니다. 두려움에 쌓여 있기 때문에, 그래서 소극적이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들에겐 하나님의 지도편달이 필수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두려움을 보호해줄 보호막이 필요한데, 그것은 대부분 물질적 복이나 건강 또는 자식이나 가족들의 평안입니다. 더이상 바라지 않습니다. 사회 변혁이나 미래에 대한 깊은 관심도 없습니다. 그냥 자기와 자기 가족이 평안하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아시아인들은 정치 참여를 잘 하지 않습니다.

 

각 인종의 신학이나 신앙 형태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각자 자신들의 병리적 현상을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기독교 신학, 신앙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백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죄책감(guilty)을 덮으려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하고, 흑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분노(anger)를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하고, 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두려움(fear)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합니다. 이렇게 각자 기독교를 전유하는 방식이 다르다 보니, 백인이 흑인 교회나 아시아인 교회에 가는 게 불가능하고, 흑인이 백인 교회나 아시아인 교회에 가는 게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도, 아시아인이 백인 교회나 흑인 교회에 가는 게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쇠퇴하는 이유는 다방면으로 살펴봐야 하겠지만, 분명한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가 심리적 병리 현상을 달래는 데 너무도 큰 에너지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이 심리적 병리 현상을 남몰라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런 병리적 현상을 달래고 치유하는 것을 훨씬 넘어섭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심리 기저에 있는 병리적 현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를 자신들의 병리적 현상을 달래는 데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원래 가진 '전복성'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소 잡는 데 쓰는 칼을 닭 잡는 데만 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시대는 소를 잡아야 하는 상황인데, 손에 쥔 칼로 닭만 잡고 있다면, 칼의 쓰임새가 너무 축소된 것이고 아까운 것이겠죠.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바로 그 원인을 없애는데 쓰여야겠죠. 원인을 없앨 수 있는 힘이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결과를 치료하는 데만 쓰이는 것은 아까운 일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좀 더 폭넓게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밝혀주고 치유하는 데 쓰이면 좋겠습니다. 신앙을 너무 자신의 심리적 불안을 달래는 데만 쓰지 말고, 신앙의 지평을 넓혀 나가면 좋겠습니다. 자기를 넘어서는 좋은 신앙인이 됩시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변화 문제와 탈성장 공부를 위한 안내]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하기 원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자 간략히 안내를 드립니다.

 

기후변화 문제는 단순히 '기후가 변화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덥던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고, 춥던 날씨가 갑자기 더워지고, 또는 비가 안 오던 지역에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지 않던 지역에 눈이 내리지 않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눈이 내리지 않던 지역에 눈이 내리면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눈 구경해서 좋다, 이런 식으로 기후변화 문제를 접근하면 안 됩니다.

 

기후변화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식량폭동'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후변화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통과하면 인류가 맞닥뜨리게 될 가장 비극적인 일은 '식량폭동'입니다. 농사가 되지 않고,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해양생물이 급격히 줄어들게 됩니다. 날씨 변화로 추운 것과 더운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지만, 식량이 없으면 인류는 곧바로 야만의 상태에 빠집니다.

 

최근에 미국 UC Davis 연구진이 국제 학술지 '퀘터네리 리서치'에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남미 안데스 산맥 중남부 지역에서 470~1540년 사이에 나타난 사람 간 폭력 행위를 유골을 통해 분석했는데, 두개골 조사를 통해서 폭력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그 지역에 폭력이 난무했는지를 분석한 결과, 그 당시 그들이 겪은 기후변화가 그러한 폭력을 이끌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고산 지대로 갈 수록 폭력이 심해졌는데, 기후변화가 닥치자 식량 부족으로 인해서 식량을 차지하기 위한 폭력 난무했다는 연구 결과입니다. 이것은 끔찍한 진실입니다.

 

기후변화 특강을 할 때, 처음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게 중요한 지 아세요?" 대부분 이 질문에 답을 못합니다.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탄소가 한 번 배출되고 나면 배출된 탄소는 지구 대기권 내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탄소는 배출되고 나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탄소는 배출되면 배출될수록 지구에 온실효과를 높여 기온을 상승시키는 주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탄소는 무조건 배출을 줄여야 하고, 결국 탄소 배출을 zero 수준까지 낮춰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인류의 삶의 방식/문명은 탄소를 배출하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이면에는 자본주의가 있고요. 그래서 기후변화 문제는 자본주의를 되돌아보는 철학적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할 때, 마음을 열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이상한 질문을 합니다. "왜 교회에서 기후변화 공부를 해? 기후변화 문제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결해 주지 않으실까? 그냥 우리는 주어진 것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면 되는 거 아니야?" 기독교인은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것은 평소 교회에서 기독교 창조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배우지 못하고 오직 구원론에만 매달린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와 구원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할 때는 처음으로 창조론에 대한 이해를 다시 정립하는 것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조생태영성을 말하는 책들을 먼저 읽는 것이죠. 생태문명연구소에서 나온 '생태문명 시리즈' 책들을 읽으면 됩니다.

 

그런 후에, 짐 안탈이 쓴 <기후교회> 읽기를 권합니다. 짐 안탈은 미국에서 가장 왕성하게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서 운동을 펼치는 활동가입니다. 목회자이기도 하고요. 이 책을 읽으면, 아주 실제적인 운동 방향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기독교 단체뿐만 아니라 일반 단체와의 활동 영역과 네트워킹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 단체들이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미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우리는 뭐 하고 있었나, 반성하게 됩니다.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를 접하게 됩니다. 인간성의 파괴, 그리고 자연의 파괴의 배후에는 자본주의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기 때문이죠. 또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으로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한국 사회에는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이 '빨갱이'로 잘못 알려져 곤욕을 치르고 있지만, 이제는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을 바르게 평가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미의 해방철학자 엔리케 두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21세기에 마르크스 사상이 점차 중요해지리라 생각한다... 마르크스 사상은 우리의 현실을 읽는 새로운 눈이 될 것이다"(탈성장, 115쪽).

 

마르크스 사상에 대해서 그동안 가졌던 잘못된 시선을 거두어내고 그의 사상의 진가를 습득하도록 도와주는 책들은 여러가지 있으나,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가 가장 최근의 연구성과를 반영한 대중서로서 적절한 것 같습니다. 사이토 고헤이라고 일본의 신진 학자인데(무려 1987년생), 독일에서 새롭게 출간되고 있는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인 'MEGA'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한, 마르크스 전공자입니다. 어렵지 않은 이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그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어떤 사회를 제시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할 때 빼놓지 말고 공부해야 하는 것은 실제 우리의 현실 사회에서 탄소 배출이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배출되는 지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온통 탄소를 배출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냥 누리는 '행복한 일상'이 얼마나 탄소를 무자비하게 배출하고 있는 지, 우리는 잠시 멈추어서 속속들이 살펴보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탄소 배출의 메커니즘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현실에서 탄소 배출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무자비하게 발생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책은 <탄소로운 식탁>입니다. 세계일보 환경전문 기자가 쓴 책인데, 알기 쉽게, 탄소 배출의 원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쏙쏙 머리 속에 들어올 수 있게, 톡톡 튀는 문장으로 잘 정리한 책입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책상에서 쓴 책이 아니라 발로 뛰며 쓴 책입니다. 기자 답게 현장 답사를 하고 관련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아주 현실적인 문제들을 담아낸, 탄소 배출에 관한 수작입니다. 꼭 한 번 읽어 보시기를 강추합니다.

 

기후변화 문제의 종착지는 '탈성장'(degrowth)입니다. 탈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우리의 생각과 생활방식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탈성장 논의는 매우 철학적이고, 매우 신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탈성장 논의는 필연적으로 '고해성사'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인류가 살아온 역사의 궤적을 돌아보며, 인류의 살아온 길이 실은 성장과 진보가 아니라 죽음으로 치닫는 길이었다는 처절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탈성장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합의된 논의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그리고 탈성장으로 가는 길은 매우 험난합니다. 종교적인 메타노이아 수준의 '돌이킴'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탈성장'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이루고, 도달해야만 하는 고지와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마음을 열고 서로 협력하면서 '탈성장'에 대한 논의를 진지하게 해나가야 할 시점입니다. 그러니까, 현재 모든 제 분야에서 최고의 의제는 '탈성장'입니다. 정치도, 경제도, 철학도, 과학도, 그리고 신학도 '탈성장'의 주제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각 분야마다 접근 방법은 다르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문제의식만은 동일합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믿습니다.

 

기후변화 문제와 탈성장 주제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싶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어떤 책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진에 나온 책들 중 제가 위에서 언급한 책들부터 읽기 시작하면 됩니다. 그리고 사진에 나온 책들을 한 권씩 구매하여 읽어나가면 기후변화 문제와 탈성장에 대하여 '컨셉'이 생길 것입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컨셉'을 갖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컨셉을 가지고 나면 불안하거나 두려움 없이, 방향을 설정하고 그 길을 잘 걸어갈 수 있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두려움만 쌓여가고 절망만 늘어갑니다. 공부(하는 행동)가 중요한 이유는 막연하던 것에 길을 놓아주고 지도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길을 찾고 지도를 갖게 되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절망 대신 희망을 마음에 품을 수 있습니다.

 

기후 변화 문제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 숨만 쉬고 있지 말고, '공부하는 행동'을 취해 보세요. 뭐라도 할 수 있는 지혜와 뭐라도 하고 싶다는 용기가 생겨날 것입니다. 이것이 기후 변화 앞에서 멸망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인류의 희망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민주주의의 몰락과 인권의 종말]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실존한다는 '상상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는 마치 화폐라는 존재 자체가 실존한다는 상상을 하며 화폐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화폐를 손에 넣기 위해서 생명을 소진하는 일과 같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존재할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해 보면, 그런 것 같지 않다. 인권이 너무도 많이 짓밟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결코 인간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보라. 인간에게 인권이 있는가.

 

우리는 그저 상상 세계에서만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상상'할 뿐이다. 그 상상력을 깨는 무수한 요인들이 존재하므로, 우리는 쉽게 상상세계에서 이탈한다. 그래서 어떠한 존재는 다른 존재에게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너는 나의 세상에서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는 나에게 인간대접(인권)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말이 설정되고 나면, 인권은 없고 폭력만 난무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국민국가의 몰락과 인권의 종말>이라는 글에서 국민국가의 쇠퇴는 필연적으로 인권의 위축을 함축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국민국가의 몰락(민주주의의 몰락)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다. 국가가 몰락하고 있으니, 인권이 묘연하다. 인권이 위축되고 있으니, 탄식소리만 들려온다.

 

우리는 시리아 난민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마음 아파한다. 지중해를 건너다 배가 파산되어 목숨을 잃은 수많은 난민들에 관한 소식. 선택할 여지도 없이 희생되는 아이들의 모습. 그러나, 그 난민에 대한 소식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강 건너 불구경'인지 모른다. 뉴스를 보면서 안타까워 하지만, 그러한 일이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마음을 떠받치고 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민국은 난민의 위험성을 가장 많이 품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이다. 전쟁에 휩싸이거나 경제적 몰락을 경험하게 되면, 한국인은 난민이 되어 황해를 건너다, 현해탄을 건너다, 태평양을 건너다, 지중해를 건너다 희생당한 시리아 난민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국민국가의 몰락(민주주의의 몰락)은 이러한 비극을 잉태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몰락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거나, 민주주의의 몰락의 위험성을 전혀 모르며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살고 있다는 착각이 삶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민주주의가 위기를 겪고 몰락하고 있어 인권(생명)이 위협 받고 있는데도, 엔터테인먼트만 즐기고 있다.  거리는 한산하고 공연장은 붐빈다.

 

위기를 감지 못하면, 곧 닥칠 재앙의 비참한 희생자가 되고 만다.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 비상경보기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 듯하다.

Posted by 장준식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와 지옥으로서의 모더니티]

 

이것은 발터 벤야민의 사유이다.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지구 역사에 나타난 가장 강력한 종교로 파악한다. "자본주의는 제의로만 이루어진, 교리도 없는 종교"이다. 자본주의는 '걱정'을 보편화한다. 걱정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지닌 보편적인 병리현상이다. 이 종교(자본주의)는 신학도 없고 은총도 없는 무자비한 종교로서 종국에는 신까지도 죄(부채)에 끌어들인다. 

 

자본주의는 독자적으로 탄생한 종교가 아니다. 막스 베버처럼 벤야민도 자본주의는 기독교에서 기생적으로 발전된, 기독교 신앙의 환속화(세속화)된 종교라고 말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지만, 벤야민은 더 날카롭게 말한다. "신은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 속에 편입되었다."

 

벤야민은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와 함께 지옥으로서의 모더니티를 말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 모더니티, 현대 시대는 지옥이다. 왜 지옥인가? 벤야민은 이렇게 진단한다. "문제는 세계의 모습은 가장 새로운 것에서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점, 가장 새로운 것이 항상 동일한 것으로 머문다는 점이다. 이것이 지옥의 영원성을 구성한다."

 

자본주의와 모더니티. 종교와 지옥. 이러한 체제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모든 종교는 자본주의라는 종교 안으로 포획될 수밖에 없고, 뭔가 아무리 새로운 것을 말하고 꿈꾼다고 해도 항상 동일한 것에 머무는, 시지프스 같은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리 새로운 것을 말해도, 아무리 새로운 것을 행하여도 금방 진부하고 지루해지고 만다. 존재가 종교(자본)과 지옥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는 기독교적인 자본주의일 뿐이다. 복음주의가 가진 신학의 부재, 그리고 모든 것을 죄(부채)로 빨아들여 죄의식/부채의식을 갖게 만들어, 열심을 조장해 부채(죄)를 갚게 만드는 메커니즘, 그리고 대속의 희망(부채를 갚을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 넣어,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 복음주의가 기독교적 자본주의일 뿐이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신학적 과제는 너무도 자명하다.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와 지옥으로서의 모더니티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어떻게 자본주의와 지옥에 포획된 기독교가 그 결박을 풀고 나올 수 있을 것인가. 기독교는 어떠한 미래를 제시할 것인가.

 

벤야민을 인용한 아감벤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하여 속죄가 아니라 죄로, 희망이 아니라 절망으로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는 세계의 변혁이 아니라 세계의 파괴를 목표로 한다." 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계속 파멸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문장이다. 자본주의와 지옥이 이 세상의 체제를 이루고 있는 한, 우리의 운명은 필경 파멸이 될 수밖에 없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예루살렘이 파괴될 것을 예견하시며 슬피 우시던 예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19세기에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했고, 20세기에 푸코는 인간의 사라짐(이성의 죽음/주체의 죽음)을 선언했다. 신이 사라지고 인간이 사라진 이 세상에 들어와 왕 노릇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지옥(모더니티). 그 어느때보다 신의 귀환과 인간의 귀환이 절실한 시대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손을 맞잡으시고 함께 귀환하는 시대를 꿈꿔본다. 신과 인간의 귀환. 그것은 온전한 신이시며, 온전한 인간이신, 메시아의 귀환이기도 할 것이다.

 

발터 벤야민,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조르조 아감벤, <세속화 예찬>

Posted by 장준식

삼위일체와 우리의 미래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의 신앙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점은 신론입니다. 기독교 신론은 유일신(monotheism)도 아니고, 다신론(polytheism)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론은 삼위일체론(Trinity)입니다. 기독교 신론을 까닥 잘못 해석하면, 유일신론에 빠지거나 삼신론(다신론)에 빠질 수 있습니다. 4세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서 삼위일체론이 확립되기 전까지, 300여년 동안 기독교는 유일신론도 아니고 삼신론도 아닌, 삼위일체론을 증언하기 위해서 무한한 노력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론을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삼위일체론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은 용어인데, 이후의 신학자들이 철학적/신학적 사유를 통해서 만들어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오해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세워 나간 교부들이나 신학자들,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는 삼위일체론을 발명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가 삼위일체론을 말하는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 경험이 삼위일체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만큼, 보여주시는 것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계시’(revelation)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경험한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사건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삼위일체로 드러낸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유일신론도 아니고 다신론도 아닌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서와 바울 서신은 삼위일체 신앙 고백의 교과서입니다.)

 

삼위일체를 말할 때 기독교인들조차도 헷갈려 하는 것은 이것이 ‘수학놀이’인줄 안다는 것입니다. 1+1+1=1. 이렇게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쉽게, 삼위일체론은 비합리적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1+1+1이 1이 될 수 있냐고 말이죠. 1+1+1=3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요. 이것은 삼위일체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용어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고, 삼위일체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삼위일체는 수학이 아니라 교제(fellowship/relationship)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삼위일체는 신적 교제입니다. 그리고 피조물(창조세계)과의 교제입니다. 삼위일체가 품고 있는 근본적인 교제(fellowship)의 의미를 담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인 용어는 ‘perichoresis (페리코레시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어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실한 교부들이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을 포착하여 표현한 언어가 ‘페리코레시스’입니다. 페리코레시스의 뜻은 ‘빙글빙글 돌면서 춤춘다’는 뜻입니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강강술래’가 딱 페리코레시스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강강술래 춤을 추듯이, 손에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춤 추는 것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정말 흥겹고 기쁘고 생명력이 넘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페리코레시스의 모습으로 존재하시고, 우리에게 그러한 모습을 계시해 주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고 살아갈 힘입니다. 슬픈 일을 당했거든 그 슬픔 때문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망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가 가장 낮아지는 순간은 실패했을 때, 병들었을 때, 육신이 약해졌을 때, 그리고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등입니다. 사랑과 생명이 적을 때 우리는 힘들어합니다. 그런 슬픔 가운데 처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죄책감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당당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페리코레시스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미래가 어디에 달려 있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저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알고 사랑하고 경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페리코레시스이시구나. 강강술래이시구나. 저렇게 사랑과 기쁨이 넘치시구나. 저렇게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보듬어 안으시며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는구나. 이것을 알고, 그분의 부르심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공동체의 미래와 우리 개인의 삶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누구도 ‘강강술래의 기쁨과 생명력’(페리코레시스)으로부터 소외되는 존재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더 사랑하세요!

Posted by 장준식

[삼위일체 주일을 보내며]

 

삼위일체 주일(Trinity Sunday)입니다. 기독교가 시작된 지 벌써 2천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가 정립된 지도 1700년이나 지났습니다. 이렇게 어머어마한 시간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낯설어 합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가장 큰 이유는 독특한 신관(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 신관입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정말 놀라운 신관입니다. 한 하나님을 세 위격의 관계로 파악하는데, 그것에 대한 사유가 깊고 신비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집요하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쉽게 다른 종교, 또는 다른 사상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의 독특한 하나님 사유를 잘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기독교가 시작된 지 벌써 2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낯설어 합니다.

 

삼위일체 주일을 맞아 예배를 구성하면서 삼위일체 주일에 부르는 찬송가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각각에 대한 예배 찬송을 찾아볼 수 있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예배 찬송은 없었습니다. 그만큼 아직도 우리의 일상 신앙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사유가 별로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장 시급한 일 중 하나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예배 찬송을 만들어 보급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가톨릭으로부터 종교개혁을 해서 개신교를 따로 분리하여 처음으로 한 일은 예배 의식을 바꾼 것입니다. 예배는 신앙의 일상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그 예배 안에서 무엇을 고백하고 무슨 예식을 행하느냐가 곧 우리의 신앙생활을 규정해 줍니다. 예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고백되지 않고, 고백할 수 있는 찬송이나 기도문, 또는 다른 예식이 없으면, 우리는 그만큼 삼위일체 하나님과 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죠.

 

기독교에서 삼위일체 신학을 정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런 신앙 고백을 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는 ‘고난과 죽음과 하강과 부활’을 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우리는 고백하고 신앙합니다. 바로 이러한 신앙고백은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Godhead/신적인 존재)’에게만 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만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예배를 하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에 예배하는 행위만큼 헛된 행위가 없고, 자신이 하나님이 아닌데 예배 받으려고 하는 행위만큼 악한 행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예배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둘 중 하나의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가 하나님(Godhead)이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우상숭배자이거나. 그러나 우리가 고백하다시피, 그리스도인은 우상숭배자가 아니라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온 교리가 삼위일체 신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학을 말할 때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는 신학은 사변적으로 고안된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는 이런 게 없는데 무슨 사상을 만들어 내듯이 창작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아주 큰 오해이고 불경한 말입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부를 비롯해서 현대의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고백’이지 ‘창작’이 아닌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이 창조해낸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삼위일체로 계시하셨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신이 보여주시는 대로 그것에 대해서 정직하게 고백을 할 뿐이지, 뭔가를 꾸며내는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삼위일체로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보여주시는 대로 고백을 할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적 사고를 방해하고 왜곡해온 것은 유대교의 유일신론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바탕으로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제시한 일자(一者) 신관입니다. 이러한 신관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관을 가부장적으로 이해하게 하거나 종속론적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가부장적인 신관은 존재에 위계를 만들고, 종속론적인 신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열등한 것을 만듭니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삼위일체론은 성부, 성자, 성령의 용어가 왜 사용됐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신적인 본질을 성부와 성자가 공유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지, 아들이 아버지에게 종속되고, 아들이 아버지보다 열등한 지위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전혀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골치 아픈 수학 놀이가 아닙니다. 1+1+1=1이라는 괴상한 방정식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숫자 놀음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것이고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무한한 신적인 존재가 이 땅 위에 있는 유한한 존재와 어떠한 식으로 관계(fellowship)를 맺고, 어떠한 식으로 구원을 베풀고, 어떠한 식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지에 대한 풍성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신실한 신학자들은 한 입으로 말합니다. 현재 기독교가 이렇게 쇠퇴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삼위일체 신론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유와 신앙은 그만큼 기독교의 존폐를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독교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가 함께 한 마음으로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열심히 탐구하고 고백하고 신앙하겠다’고 말이죠. 바로 이러한 다짐에 기독교 신앙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을 가슴 깊이, 진지하게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도마복음/영지주의문서]

 

'도마복음 연구회 창립'이 있는 이 때에, 나도 그냥 한 마디 보태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부족한 글이지만 그냥 편하게 읽어주시면 좋겠다.)

 

유학의 가장 큰 장점은 견문을 넑힐 수 있다는 것이겠다. 나도 유학을 나오기 전까지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유학 나와서 알았다. 에모리에서 공부하면서 방대한 신학연구물에 놀라서 압도당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내가 키에르케고르를 정말 좋아했는데, 미국에 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키에르케고르 연구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되어 있었다. 내가 이 틈에서 무슨 학문적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엄청 고민을 하면서 키에르케고르 전공에 대한 꿈을 접은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은 약간 후회한다. 그냥 키에르케고르 전공자로 나갔으면 지금쯤 내 삶은 또 다른 궤도를 달리고 있을 지 모르겠다. 아마튼, 나는 여전히 키에르케고르를 좋아한다.

 

'나그함마디(The Nag Hammadi Library)' 문서에 대해서 '한 마디'도 들어보지 못한 내가,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유학을 나와서이다. 그리고 조금씩 나그함마디 문서를 들여다보았고, 영지주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나그함마디 문서와 영지주의에 대해서 이해를 높이게 된 것은 일레인 페이절스(Elaine Pagels)의 책을 읽으면서부터였다. 그 시기가 2009년도,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이다.

 

사해사본과 나그함마디 문서는 비슷한 시기에 발견되었다. 에모리 유학 시절 내 지도 교수였던 캐롤 뉴섬(Carol Newsom)은 사해사본 중 지혜문헌을 연구한 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비슷한 시기에 발견된 두 문서는 비슷한 시기의 학자들을 통해 동시에 연구되었다. 물론 정통 기독교에서는 사해사본의 가치를 더 높게 보고,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나그함마디 문서를 들여다본 사람은 그 문서가 가지고 있는 '놀라움'에 대해 무시할 수 없었다. 일레인 페이절스는 나그함마디 문서 전문가로서 프린스턴 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을 했고, 영지주의를 positive하게 해석하여 소개한 학자로 유명하다. 나는 페이절스 교수의 <The Gnostic Gosples>을 읽으며, 영지주의에 한 빗장을 풀 수 있었다.

 

한국에 도마복음/영지주의/나그함마디 문서를 대중들에게 소개한 사람은 도올 김용옥이다. 그분이 하버드에서 공부할 때, 하버드에서는 사해문서와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한 연구가 붐을 이루었다. 위에서 언급한 캐롤 뉴섬이나 일레인 페이절스도 모두 하버드 출신 박사들이다. 그리고 나이 때도 비슷하다. (페이절스가 가장 선배다.)

 

14년 전부터 영지주의 문서를 읽었고 관심을 두었지만, 사실, 함께 이야기 나누며 생각을 전개시켜 나갈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주변에 영지주의 문서를 읽은 목사 동료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성경 읽고 연구하기도 바쁜데, 정통에 의해 정죄 당한 영지주의 문서를 읽는 일은 awkward 한거다.) 그래서 혼자 읽고, 글을 조금 쓰고 했다. 물론 아무도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한 번은 애틀란타에 김세윤 교수가 와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영지주의 문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세윤 교수의 강연장에 가서 강연을 들으며 마침 김세윤 교수가 옆자리에 앉아 계셔서 영지주의 문서에 대해서 질문한 적이 있다. 그때 단칼에 거절을 당했다. "목회자들이 영지주의 문서에 관심을 둘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가 바울신학의 권위자로서, 당연히 그렇게 이야기할 수 밖에없었겠지만, 김세윤 교수와 영지주의 문서에 대해서 대화를 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정통 기독교 라인에 있는 신학자들을 읽었고, 나름대로 신학에 대한 전반적인 지성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영지주의 문서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영지주의 기독교가 왜 정통 기독교에게 밀려나게 되었는지를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아주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지주의 기독교가 정통 기독교에게 정치적으로 밀려났다고 하는 것이다. 페이절스 교수의 책을 보면 그러한 정황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실제로 영지주의 기독교와 정통 기독교 간의 치열한 정치 싸움이 있었다. 특별히 영지주의 기독교 집단은 사도권과 교권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그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계속 강조했다. 게다가 정통 기독교는 대리인(사도, 사제)을 통해 하나님께 다가설 수 있지만, 영지주의자들은 직접 하나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정치 싸움이 심했다.

 

정통 기독교라고 자부하는 교회들이 너무 개판을 치고 있는 요즘, 얼마나 교회의 현실이 답답하면 영지주의 문서가 틈새를 파고 들고, 영지주의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어필을 하는 시절이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프다. 정통 기독교에 속한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엄청나게 반성해야 할 지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은 정통 기독교와 영지주의 기독교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무엇인가에 있다. 4세기까지 정통 기독교가 무엇인지 결정이 나지 않았다. 삼위일체론(기독교의 독특한 신론)의 정립도 되지 않았고, 성서(정경)도 정립되지 않았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있기 전까지 기독교에 '정통(Orthodoxy)'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진리를 위한 싸움이 치열했다. 그러나 비로소 예수 사건이 있은 지, 300년이 지나, 정통과 이단(정통의 가르침을 벗어난)을 가르는 기준이 생겼다.

 

그 기준은 이것이었다. "하나님의 의인가 아니면 사람의 의인가." 이것은 단순히 믿음인가 행위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정통 신학은 인간이 구원에 기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구원을 맡긴다. 그러나 영지주의 신학은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맡기지 않고 인간의 선함에 주목한다. 이것은 단순히 성악설, 성선설의 문제이거나 전적타락과 부분타락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인데,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고 인간의 기여를 말하는 순간, 사람 사이에 배제와 차별과 혐오가 발생하고 만다. 다시 말해, 영지주의 기독교는 도덕(지혜)을 말하고, 정통 기독교는 사랑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왜 요즘, 영지주의 문서(기독교)나 수도원 운동 같은 것에 대한 논의가 일고, 사람들이 왜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정통 기독교의 도덕이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이 바닥을 치니, 기독교 역사에서 도덕을 중요시했던 운동들이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내가 우려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영지주의 기독교나 수도원 운동은 엘리티즘(elitism)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하나님과 직접적인 합일을 이루고, 속세를 떠나서 도덕적으로 깨끗한 신앙운동을 하는 일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영지주의 기독교나 수도원 운동이 주류(mainstream)로 자리 잡지 못한 까닭이 분명히 있다. 도덕적인 기독교는 엘리티즘을 향하고, 결국은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고 혐오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신앙이 오히려 사람을 향한 차별과 배제와 혐오를 불러온다면, 이것은 구원이 저주가 될 수밖에 없다.

 

도덕은 굉장히 중요하다. 체제와 운동을 지속시키는 가장 큰 내적인 힘 중 하나이다. 요즘 기독교가 무너지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라고 하는 체제 내에 '도덕이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도덕을 중요시하는 기독교 신앙 운동(영지주의, 수도원 운동)이 치고 들어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지주의나 수도원 운동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거기까지다. 도덕을 바로 세우는 것. 하지만 인간이 구원에 다다를 수는 없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이 점을 겸허하게 인정하면서 영지주의 문서나 수도원 운동을 해 나갈 필요가 있다. 지혜와 은혜는 종이장 한 장 차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로 구원에 이르는 게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다. 정통 기독교가 지금은 개판을 치고 있지만, 구원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겸손이 있기 때문에 정통으로 불리는 것이다.

 

어떠한 약초는 독이 될 수 있고 약이 될 수 있다. 돌파가 그 약초를 쓰냐 아니면 명의가 그 약초를 쓰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온다. 영지주의 문서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신앙에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 연구를 충분히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에 오히려 혼란을 가져오는 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여러가지로 힘든 이 시절에, 명의들이 영지주의 약초를 잘 쓴다면 기독교의 아픈 상처를 회복시키는 데 긴요하게 쓰일 것이다.

 

도마복음 연구회가 명의의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Posted by 장준식

[신자유주의 체제의 악마성]

 

"금융 시장은 연금 연령 인상, 급여 축소, 노동 유연성 향상을 요구한다. 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지배한다."

(<탈성장>, 69쪽)

 

'연금 연령 인상'은 인간을 부려먹을 수 있을 때까지 부려먹겠다는 뜻이고, '급여 축소'는 노동력의 가치를 평가절하시키겠다는 뜻이고, '노동 유연성 향상'은 노동자를 노예 취급하겠다는 뜻이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이처럼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체제다. 

 

신자유주의 체제를 수용한 요즘 국가가 악마인 것은 금융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의 보이는 손으로 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최고의 우상숭배자인 것이다. 요즘 정부가 하는 일은 연금 연령 인상, 급여 축소, 노동 유연성 향상을 위한 일들뿐이다.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한 대승적 결단이라는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이고 있지만, 한 마디로, 악마 짓이다. 인간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고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노동 시간의 단축이다. "시민의 자치 활동을 이루려면, 그만큼 많은 휴식처가 필요하고, 토론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도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탈성장>, 83쪽).

 

노동에 시달린 현대인은 무기력과 무관심에 빠져 있다. 이것은 세상을 바꾸어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기득권 세력들의 기획이다. 이러한 악마적 기획들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말하지 않고 '복음'을 말할 수 없다. 이런 것을 외면하면서 복음만을 외치는 자는 '보이지 않는 손'에 봉사하는, 또 하나의 우상숭배자에 불과하다.

Posted by 장준식

[문명의 바깥으로]

 

이번 한국 방문 중 신촌에 가서 연세대와 홍익문고를 들렀다. 학교 구경 잘 하고, 교내 식당에서 밥 잘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예전 학교 다닐 때 습관처럼, 홍익문고에 들러 책 한권을 샀다. 나희덕 시론집 <문명의 바깥으로>.

 

예전 학교 다닐 때 습관처럼, 지하철에서 책을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서문을 읽고, 첫번째 챕터를 읽었다. 내가 요즘 깊은 관심을 갖고 교회 식구들과 공부하고 있는 '기후변화'에 대한 주제였다. 제목은 '자본세에 시인들의 몸은 어떻게 저항하는가'. 도나 해러웨이에 대한 언급을 시작으로, 백무산, 허수경, 그리고 김혜순의 시를 분석한 글이다. 그리고 다시 도나 해러웨이를 언급하며 글을 맺는다. 마지막 부분을 직접 옮겨본다.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해러웨이는 자본세의 파괴가 극심한 지구 곳곳에서 그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창의적 공동체들을 '퇴비 공동체'라고 불렀다... 따라서 만물과 '살'을 공유함으로써 그들과 함께하는 '시쓰기'는 일종의 '친척 만들기' '퇴비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 심보선의 말을 빌리면, "시란 시인의 고뇌에서 탄생하여 나아가는 수직적인 이행이 아니라, 하나의 몸에서 또다른 몸으로 나아가는 평면적 확장"이다. 그는 수평적 이행과 새로운 고동체의 탄생을 위해 모든 형태의 이분법과 위계를 부정하고 낯선 타자들과 함께하는 것, 이러한 저항과 창조는 생태적인 동시에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37쪽).

 

인류세/자본세를 맞아, 시인의 시쓰기는 일종의 '친척 만들기' '퇴비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는 나희덕의 말은 희망적이다. 시인들만이라도 저항과 창조에 적극적이면 숨통이 트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시인들만의 저항과 창조만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게 참 어려운 시절인 듯하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대가 파괴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고 피난처를 복구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관심이 없다기 보다, 정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책의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이, 문명의 바깥으로 향하는 것은 저항과 창조의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문명에 갇혀 있는 듯하다. 문명의 바깥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산다. 문명의 바깥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는 마치, 애굽에서 400 여년동안 살던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는 일과 같다. 그들은 문명국인 애굽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발터 벤야민이 사유했듯이, 우리 시대는 또다시, 아니 더 절실하게 '메시아적 사유'가 필요하다. 문명의 바깥으로 우리를 데리고 나갈 메시아가 필요하다. '시쓰기'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에게 시적 상상력이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메시아가 될 수 없으니, 메시아가 도래하는 강력한 상상력이라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 메시아를 상상하는 일은 또한 생태적인 동시에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Posted by 장준식

인사만 잘해도 좋은 그리스도인이다

 

로마서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로마서를 바울의 교리서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한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저명한 신약 학자 스캇 맥나이트는 로마서를 거꾸로 읽어보라고 제안합니다. 이것은 로마서를 1장에서부터 읽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의 마지막 장인 16장부터 읽는 방식입니다. 로마서 16장을 먼저 읽으면, 우리는 로마서에서 ‘교리’를 먼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먼저 만납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라”(롬 16:1).

 

뵈뵈를 로마교회에 소개하는 문구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로마서 16장의 내용은 온통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바울은 ‘문안하라’라는 말을 합니다. 지금 바울은 인사 중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인사하는 중입니다. 우리는 인사하는 일을 별거 아닌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사’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긴 공간을 할애하여 인사를 나누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 교회에 바울이 편지를 써서 보낸 이유이기도 합니다.

          

로마교회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는 자라온 환경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두 부류는 한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많은 갈등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갈등이 깊어지면 서로 간에 가장 먼저 끊기는 것이 ‘인사’입니다. 인사는 단순히 안부를 묻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자신들의 삶에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인사를 안 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자신들의 삶에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6장에 열거되고 있는 이름들은 모두 이국적인 이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떤 사람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인지, 이방인 그리스도인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로마교회 구성원들은 바울의 이 편지를 읽으면서 거기에 열거된 이름들이 누구인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아주 잘 알았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인사를 나눌 것을 권면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1장에서부터 논의한 내용의 결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서로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 갈등, 그 갈등 때문에 발생한 상처, 반목, 이러한 것들을 거두어들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받아들이는 일은 ‘인사’로부터 시작합니다.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라는 사회학 용어가 있습니다. 팬데믹 동안 이 말을 사용해서 서로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거리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사회학에서 ‘사회적 거리’는 원래 사람들 사이에 서로를 서로의 삶에 얼마나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측정하는 데 쓰는 용어입니다. 일례로, 한국인은 타인종을 자신들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굉장히 큰 거리감을 둡니다. 특정 인종은 회사나 마을에서 인사 정도 나누는 것, 그들과 식사 정도 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결혼을 통한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합니다. 이러한 것을 두고 ‘사회적 거리’라는 말을 씁니다.

          

팬데믹 동안 아시안 혐오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지금도 아시안들은 미국 사회에서 매우 약자로 살아갑니다. 그만큼 미국 사회에서 아시안들은 사회적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사회적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는 ‘인사’보다는 ‘폭력’을 쓰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어떤 사람인지 가리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인사를 반갑게 나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 거리가 가깝다는 뜻이고, 서로가 서로를 자신들의 삶에 잘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애석하게도 혐오와 폭력이 늘어난 요즘 세상에서, 아시아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좀 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손쉬우면서 의미 있는 일은 ‘인사’입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 보세요. 인사만 잘 해도 좋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의 인사에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와 복음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Posted by 장준식

나아만의 신앙과 게하시의 불신앙

ㅡ 게하시처럼 하면 안 되는 이유

 

신앙은 삶의 상태입니다. 신앙과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 지를 보면 신앙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삶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전에는 ‘저렇게’ 살았었는데, 신앙을 갖은 후에는 더 이상 ‘저렇게’ 살 수 없고, 이제는 ‘이렇게’ 살게 되는 것이죠. 물론 이것이 그 사람의 성품(성격)까지도 변하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타고난 성품은 신앙을 가진 이후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가진 후에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삶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한 신앙의 삶이 무엇인지, 우리는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 사람으로서 이방인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병에 걸려 어려움에 처했고, 그것을 긍휼히 여긴 ‘몸종(나아만 장군 아내의 몸종)’이 나병을 고칠 방도를 일러줍니다. 그렇게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오게 되고, 이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열왕기하 5장은 오롯이 나아만 장군 이야기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나아만 장군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아만 장군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가 구원받는 방식은 매우 독특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나아만 장군의 신앙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나아만 장군의 신앙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나아만 장군에게서 보이는 신앙의 모습은 6가지 정도 됩니다. 첫째는 그가 ‘하나님 앞에 섰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겸손을 말합니다. 나병이 낫기 전,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병을 고치기 위해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을 때, 그는 엘리사 선지자가 자신 앞에 서서 자신을 알현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병을 고침 받은 후, 엘리사 선지자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엘리사 선지자 앞에 선 것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경험한 사람, 즉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섭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아만 장군은 직접적인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 아나이다”(왕하 5:15). 이전에 나아만 장군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였습니다. 이것은 신에 대한 간접고백일 뿐입니다. 그러나 나아만 장군은 신앙을 갖게 된 후, ‘너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에서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으로, 고백의 방향을 바꿉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의 이야기 아니라, 이제 자신의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은 하나님을 완전히 ‘삶’으로 경험하게 하고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은 ‘너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나의 실존으로 파고 들어오는 사건입니다.

 

셋째,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예물(gift, blessing)을 드립니다.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병 고침을 받고자 올 때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병고침을 받은 후 엘리사 선지자에게 드리는 선물은 새로운 선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올 때 가지고 온 선물입니다. 그러나 처음 가지고 올 때의 선물과 이제 신앙을 가진 후 엘리사 앞에 내어 놓는 선물의 성격은 완전히 다릅니다. 처음에 나아만 장군이 선물을 가져올 때 그 선물의 성격은 ‘포상품’이었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쳐준 것에 대한 보상, 또는 ‘시혜’(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것) 정도의 의미를 가진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을 갖게 된 나아만 장군의 예물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표징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표현하는 성례전 같은 성격을 가집니다. 신앙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모두 그러한 뜻을 가집니다.

 

넷째, 나아만 장군은 자유를 얻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예배하겠다고 선포합니다. 그런 의미로 이스라엘의 흙을 얻어갑니다. 그러면서 나아만 장군은 자신이 모시는 아람 왕과 함께 림몬 신전에 들어가서 절하게 될 때, 그것은 림몬 신을 섬기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윗사람을 모시는 신하 된 입장에서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을 밝힌 후,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그의 용서 구함에 이런저런 말을 보태지 않고 그저 ‘평안히 가라’고만 대답합니다. 신앙은 이렇게 자유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에게만 매인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더 이상 아람의 신 림몬에게 매여 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신앙은 나를 속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선언입니다.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에게 예물을 받지 않은 이유는 명백합니다. 구원은 거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무엇인가를 받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구원은 교환이 아닙니다. 구원은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나아만 장군을 당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인정했습니다. 이 자체, 이 관계 자체가 구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으로부터 예물을 받을 이유와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관계에는 어떤 가격이 매겨지거나 교환가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안에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나아만 장군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은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 게하시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거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이는데, 다음과 같이 게하시를 저주합니다.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왕하 5:27). 게하시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토록 가혹한 저주를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게하시가 가혹한 저주를 받은 이유를 아는 것만으로도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매우 가치 있는 말씀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게하시가 거짓말을 통해서 나아만 장군에게 예물을 받은 것 때문에 가혹한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너무 지나친 처벌 같아 보입니다. 게하시의 거짓말을 보면 그렇게 큰 거짓말도 아닙니다. 그리고 나아만 장군에게 가서 예물을 억지도 빼앗아 온 것도 아닙니다. 거짓말 수준이 애교 수준이고, 나아만 장군은 게하시에게 예물을 기꺼이 내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게하시에게 가혹한 저주가 임하는 이유가 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왕하 5:20). 여기에 보면,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을 ‘이 아람 사람 나아만’이라고 부릅니다. 게하시에게 나아만 장군은 여전히 이방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반란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나아만 장군에게 ‘구원’을 베푸셔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아만 장군을 ‘타자화’시켜서,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 자신이 뒤집어버리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살면서 나아만에게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배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게하시 사건을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사람들, 즉 구원하신 사람들을 우리가 임의대로 ‘이방인’ 취급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제대로 배우고 이해해도, 신앙인이 자기 마음대로 누군가를 ‘이방인/타자’ 취급하며,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게하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나아만 장군을 자기 마음대로 이방인 취급하여 그에게 폭력(거짓말/물품강탈)을 행사했습니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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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