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18. 12. 27. 06:18

사랑의 이야기를 간구하는 기도

(1:39-45)

 

주님,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순종의 도를 배워

주님의 사랑이 지금 여기

우리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임하도록

우리의 삶을 내어드리는 겸손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우리의 헌신이 만날 때

우리의 삶에는 사랑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날 것이고

그것이 향기로운 찬송이 되어

우리의 입가에 날마다 넘쳐나게 되리라 믿습니다.

주님,

오셔서 우리의 구원이 되어 주십시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외로움을 극복하는 법

 

그는 "외로움은 주관적 고통"이라며 "원하는 사회적 관계와 누리고 있는 사회적 관계 사이의 차이가 바로 외로움"이라고 강조했다.

ㅡ 딜립 제스트 박사, UCSD 교수, 국제노인정신의학회지에 발표한 내용 중

 

원하는 사회적 관계와 누리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차이를 좁혀 나가는 것이 외로움을 덜어내는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제스트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지혜의 수준과 외로움 사이에 역학관계가 있다고 한다. 지혜가 많은 사람은 외로움을 더 느끼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은 외로움을 더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지혜가 외로움을 막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 신기하다며,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경의 대표적인 지혜서인 잠언과 전도서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1:7).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그리하라"( 12:7).

 

이것이 종교적인 언어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매우 실존적인 언어이다. 제스트 박사가 신기해하고 있듯이, 지혜는 외로움을 덜어내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강제성을 띠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도 자기의 삶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실존적인 언어를 종교적인 언어로 바꾸는 이유는 종교의 힘을 빌어 실존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절실함이 스며든 지혜이다.

 

인간은 외롭다. 이데아의 자아와 현실의 자아 사이에 언제나 괴리와 부조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두 자아 사이의 일치를 꾀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이다. 그 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끊임없이 창조주를 기억하는 일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지혜란 끊임없이 우리 인생의 유한성을 기억하는 일이다.

 

인생의 유한성을 기억할 때, 우리의 존재는 조만간 세상에서 없어진다는 것을 기억할 때, 인간은 헛된 꿈을 꾸지 않으며, 이데아의 자아와 현실의 자아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이상의 일을 하려 드는 무모한 삶을 살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인생을 외롭게 만드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내가 원하는 사회적 관계와 내가 누리고 있는 사회적 관계는 얼마나 일치를 이루고 있는가. 나는 혹시 헛된 꿈을 꾸고 있지 않은가. 나는 혹시 잘못된 꿈을 꾸고 있지 않은가. 결국, 원하는 것이 없으면 외롭지 않다. 원하는 것이 없는 상태가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상태이다. 우리에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외에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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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2. 19. 12:15

낙심마오!

(갈라디아서 6:2-10)

 

성탄절 분위기가 예전만 못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에서도 상업주의가 키운 성탄절 분위기가 상업주의에 의해서 쇠퇴하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아이굿뉴스, 1210일자 보도) 해방 후 한국에는 야간 통행금지 제도가 있었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경찰과 응급의료차량 외에는 아무도 밤거리를 돌아다닐 수 없었다. 이 제도는 1982년까지 지속됐다. (1982년 이후 생들은 통행금지 제도를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다.)

 

야간 통금시절 몇 개의 날은 통금이 없었다. 부처님 오신 날, 성탄절(1225), 그리고 1231일과 11일 등이 통금 없는 날이었다. 이 중에서 단연 인기 있는 통금 없는 날은 성탄절이었다. 해방 이후 미국의 영향으로 기독교 문화가 한국 사회를 휩쓸었고, 겨울과 연말이라는 특별한 절기와, 무엇보다 캐롤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전국민이 이날 들뜬 마음으로 소비를 확대하며 축제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때 생긴 한국교회의 전통이 성탄절 이브 올나잇과 새벽송’, 그리고 송구영신예배이다. 그 당시 성탄절 이브에 집에 가서 자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사람이 교회에서 성탄절 행사를 즐겼으며, 성탄절 행사가 끝나면 각종 게임을 하면서 밤을 지새웠고, 새벽이 되면 새벽송을 돌았다. 그리고 비몽사몽 간에 성탄절 아침, 모두 모여 성탄절 예배를 드렸다. 그러면서 통금으로부터의 해방을 맛보았다.

 

한국에서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된 계기는 88올림픽이다. 1981 9 30일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84 IOC 총회에서 서울이 일본 나고야를 제치고 제24회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자, 한국에서는 그것에 발맞춰 치안을 강화하고 시민들의 불편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정책 변경을 꿰 했다. 그래서 198215일 마침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야간 통행금지법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통행금지법이 존재한 36 4개월 동안 교회의 성탄절 문화와 송구영신예배 문화는 한국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통행금지법이 폐지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성탄절 행사와 송구영신 행사를 통해서 해방과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다, 2000년대에 들어서 그 문화는 바뀌기 시작했다. 상업주의는 상품을 팔기 위해 더 많은 이벤트가 필요했고, 겨울 뿐 아니라 봄여름가울겨울, 사계절 내내 이벤트를 만들어 축제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게다가 통행금지법의 향수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밤새 놀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성탄절과 송구영신 예배의 특별한 분위기는 점점 사라져갔다.

 

요즘 한국에서는 성탄절 시즌에 더 이상 크리스마스 캐럴이 거리마다, 그리고 상점마다 울려 퍼지지 않는다. 대신 한류의 영향으로 아이돌 음악이 사시사철 울려 퍼진다. (요즘 아이들의 입에서 캐롤이 나오는지, BTS의 노래가 나오는지 살펴보라.) 예전에는 성탄절에 맞춰 아티스트들이 캐럴 음반을 내놓는 게 유행이었다. 개그맨들도 성탄절에는 코믹한 버전의 성탄 음반을 내놓곤 했다. (기어나는 것은 심형래와 최양락의 성탄 음반이다. ‘달릴까 말까~’)

 

한국 뿐 아니라, 미국의 팝송계에서도 성탄절이 되면 세계적인 팝스타들은 팝송을 내놓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웸(조지 마이클)라스트 크리스마스이다. 물론 그 이전의 빙 크로스비(Bing Crosby)와 펫 분(Pat Boone) 같은 뛰어난 캐롤 팝송 가수들이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팝송계에서도 머라이어 케리(Mariah Carey)의 크리스마스 캐롤 음반을 끝으로 더 이상 성탄절 절기에 캐롤 음반을 내는 아티스트들이 없다. 새로운 캐롤 음반이 보급되지 않는 상황에서 요즘은 어디를 가나 옛날 캐롤들을 반복해서 트는 경향이 짙다.

 

성탄절이 아예 없는 일본에 비해 한국에서는 성탄절이 한국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미국은 원래 성탄절 문화의 원조 격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이든 문화로서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 못하면 그 의미가 퇴색되는 법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세속화되면서 기독교의 위상이 예전만 못한 것과 발걸음을 같이 하여 성탄절 문화가 쇠퇴하는 것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한 사회에서 문화적인 자리를 점차 좁아지고 있다는 것은 굉장한 도전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며칠 전 신문에, 중국 쓰촨성에서 중국 공안에 의해 지하교회의 성도 100여명이 예배 드리다 체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교회의 이름이 인상적인데, ‘조우교회였다. ‘이를 조비 우를 쓴 것을 보니, ‘이른 비를 나타내는 듯하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이른 비 교회. 참 멋진 교회 이름이다. 통계 보도에 의하면, 작년 중국에서 체포된 지하교회 기독교인은 3000명 정도이고, 올해는 1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의 주석 시진핑은 집권 이래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종교는 아편이고, 기독교는 외래사상이다.” 중국의 최고 권력자 입에서 이러한 말이 나오는 것을 보니, 그리고, 미국과의 무역 전쟁 가운데 있으니,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한국이나 미국 등, 기독교 문화가 저변에 깔려 있는 나라에서 사는 우리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리고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성탄절을 즐기고 있지만, 일본이나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의 불교국가나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인이 되는 일, 그리고 성탄절을 지키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그곳에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아직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그 나라의 문화로 자리잡기까지는 굉장한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세계 기독교 역사를 보면, 서구 사회에 기독교 문화가 자리 잡은 것도 그리 쉽게 된 일은 아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분파에서 떨어져 나와 완전한 개체 종교의 모습을 갖추게 된 이후, 로마에서 하나의 문화로 뿌리 내리기까지 300여년 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3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자로 죽어갔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1880년대,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오고, (그 이전에 천주교가 100년 먼저 들어왔다), 그 이후 개신교가 한국의 문화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수많은 질곡이 있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여러가지 상황이 겹치면서 정말 매직같이 성탄절이 한국의 가장 큰 축제의 절기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소식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무겁고, 더불어 기독교 문화를 지켜 나가야 하는 책임 또한 크다.

 

우리는 도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대로 가다간 한국 사회나 미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소수 종교가 되어 중국에서처럼 지하로 내려가고 탄압을 받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다. 문화 형성은 쉬운 게 아니지만, 한 번 형성된 문화 또한 해체되는 일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잘못된 문화는 투쟁하여 고쳐나가야겠지만, 거룩한 문화는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지켜나가야 한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은 이를 두고 이렇게 우리를 도전한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 ‘캐롤(carol)’이라는 말의 유래는 복잡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옛날 로마시대 때 사람들이 모여 둥글게 원 모양을 하고 춤을 추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강강술래(강강수월래)를 생각하면 쉽다. 왜 사람들은 둥글게 원을 그리고 돌면서 춤을 추었나? 그것은 기쁨의 표현이다. 캐롤은 그래서 기쁨의 노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뻐하며 춤춰야 한다. 이 기쁨의 시간에 다른 곳에 있으면 안 된다. 함께 모여 캐롤을 부르며, 그리스도의 오심을 세상에 널리 전해야 한다.

 

또한, 캐롤이 세상의 문화에 맞선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가 되어야 한다. ‘강강수월래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서 온다라는 뜻이다. 한국에 강강술래 전통무가 생긴 유래를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으로 꼽는다. 몰려오는 적군에 비해 숫자적으로 열세였던 이순신 장군은 부녀자들로 하여금 남장을 하게 하고 높은 산에 올라 원을 그며 돌게 했다. 적군은 그 모습을 보고 조선의 군대가 계속 행진해 오는 것으로 착각하여 도망쳤다. 그리고 물러간 적군을 보며 여인들은 기뻐서 원을 그리고 돌며 강강술래를 외쳤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기독교의 문화를 지켜내는 일은 강강수월래와 같다. 이것은 서로 짐을 지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이 성탄절 문화를 지켜내지 않으면, 누가 대신 지켜주겠는가. 우리는 누군가 어떠한 일을 대신해 주는 문화에 너무 길들여 있다. (나열하자면 끝도 한도 없다. 휴지를 버리는 사람과 휴지를 줍는 사람이 따로 있다. 화장실을 더럽게 쓰는 사람과 청소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심지어, 아이까지 대리모 출산을 한다. 대리모가 되는 여자들은 대개 가난한 나라의 젊은이들이다. 경제 불평등 논리가 여기에 들어간다. 자녀를 가지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나, 요즘시대, 대리모를 통한 출산은 명백한 불평등이고 착취이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 서로 짐을 지는 수고가 필요하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우리를 도전한다. “만인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3).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기 위하여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으면서, 다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우리는 왜 서로의 짐을 지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를 두려워하는가?

 

가장 큰 이유는 그러한 일을 하다 낙심할까봐서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나하나 쯤이야 빠져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무엇이 달라진거야? 똑같잖아!’ 이러면서 우리는 낙심한다. 그러나 기억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낙심 중의 낙심이다. 2천년 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데, 세상이 달라진 게 있는가? 세상에는 여전히 폭력이 난무하고 평화가 묘연하다. 이런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할 수 있는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우리를 위로한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

 

도산은 병환으로 죽어가며 자신을 문병 온 동지의 손을 잡고, 겨우 목소리를 내서 이렇게 말했다. "낙심마오!" 그 당시 한국인은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의 길은 아득하고 일제의 탄압은 날로 심해졌기 때문이다. 1938년의 일이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낙심마오'라며 위로를 건네고, 생명이 다해갔지만 끝까지 절망하지 않고, 민족독립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스스로 낙심하지 않았던 도산은 어떻게 그러한 신념을 가질 수 있었을까?

 

도산은 성경을 즐겨 읽었다. 그는 때때로 교회의 신자들 앞에서 설교할 정도로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그러한 도산의 이력을 토대로 추측해 보건 데, 도산은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마음 속에 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6:6). 진실로 선을 행하고 있다면 낙심할 필요 없다. 도산은 이렇게 말했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낙심마오!" 성경을 사랑했던 도산 안창호, 그는 숨을 거두면서까지 낙심하지 않았다. 낙심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고 일을 그르치는 것도 없다. 무슨 일이든, 낙심만 하지 않는다면, 뜻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 낙심하지 말자.

 

낙심하지 말고, 우리의 정체성(Christian identity)을 지켜 나가기 위하여, 성탄절의 거룩한 문화를 지켜 나가기 위하여 서로 짐을 지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 나가자. 성탄절기에 다른 계획 세우지 말고, 더 열심히 교회로 모이고, 더 열심히 캐롤을 부르자.

 

낙심마오!’(서로가 서로의 등을 두드려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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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8. 12. 16. 14:26

기쁨과 즐거움을 간구하는 기도

(스바냐 3:14-20)

 

주님,

우리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선포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선포는 곧 약속이고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낙심되는 일과 두려운 일이 우리에게 닥칠지라도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기뻐할 이유가 없고, 즐거워할 상황이 아니어도

주님께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기에

우리에게 곧 구원을 베푸셔서

기쁨과 즐거움을 선물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기에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붙들어야 할 목적인 줄 믿습니다.

주님,

먼 데 계시지 아니 하시고 우리 안에 계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겠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8. 12. 15. 05:03

파국

 

무슨 일이니

 

오른쪽은 하늘을 향해 왼쪽은 바닥을 향해

꺾어져야 한다

그리고 나서 앞을 향해 고꾸라지면 시간의 문은

뒤를 향해 열린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앞이 안 보인다

 

이 세상에서는 안 통하는 상식이 하나 있다

눈물은 슬픔이 아니라 사탄이 눈물샘에 타 놓은 독이다

 

무얼 하고 있어

 

하마터면 마실 뻔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은인은

파국을 몰고 다니는 미치광이다

 

지나가는 미치광이가 말한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

 

귀를 다친 사람만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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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8. 12. 12. 22:44

패러독스를 넘어서기를 간구하는 기도

(누가복음 21:25-36)

 

주님,

세상의 일은 매우 패러독스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지혜가 없으면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주님, 세상의 패러독스를 넘어서기 위하여

우리를 깨어 있게 하시고

지켜 보게 하시고, 또한 기도하게 하소서.

이 세 가지의 지혜로운 행동이

세상을 이길 힘임을 믿습니다.

주님,

우리는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그분이 다시 오셔서 구원의 완성을 이루실 때까지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은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중입니다.

겸손과 여유와 믿음을 주셔서

이제 곧 오실 그리스도를

거룩함 가운데 기다리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8. 12. 11. 11:00

멈추기를 간구하는 기도

(3:1-6)

 

주님,

멈추지 않으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말씀을 듣지 못하면 구원이 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알지 못하여

멈추지 못한 채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잡다한 음성을 듣느라

피곤에 지쳐 삽니다.

세례 요한이 빈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처럼

우리도 광야로 나아가

적막한 시간 고립된 공간 속에서

오직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

주님의 말씀만이 구원인 줄 믿사오니,

주여 말씀 하옵소서,

우리가 지금 멈추어 섰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한국의 선교적 위치

 

이사야 19장은 한국 교회의 선교적 비전을 보여주는 신비한 말씀이다.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고난도 외교를 폈던 것처럼, 요즘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고난도 외교를 펴고 있다. 현재 한국은 중국보다는 미국과 더 가까운 동맹을 맺고 있지만, 앞으로의 국제 정세는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아 그 어느때보다 민족적 지혜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이사야 19장은 애굽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앗수르 세력에 맞서 살 길을 찾기 위해 하나님 대신에 애굽의 힘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굽에 대한 심판은 이스라엘이 오판하지 않고 나라를 지켜 나가게 하기 위함 하나님의 지혜다. 특별히 이사야 19장에서 주목해서 봐야 할 대목은 이 구절이다. “그 날에 애굽이 부녀와 같은 것이라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흔드시는 손이 그들 위에 흔들림으로 말미암아 떨며 두려워할 것이며”(16).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왕이실 뿐 아니라 만군의 왕이시다. 그 분은 애굽 위에 손을 흔드신다. ‘흔들다(테누파)’는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는 요제와 같은 뜻이다. 레위기의 제사법 중 요제라는 제사법이 있는데, 이는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흔들어서 드리는제사를 말한다. 제사장이 제물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흔드는 이유는 그 제물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애굽 위에 손을 흔드신다는 것은 애굽도 하나님의 것이요, 그들 또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뜻이다. , 애굽은 하나님보다 크지 않다. 힘이 세지 않다.

 

개인이든 국가든 살아가며 주변의 힘 센존재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특별히 국제정세 가운데 국가가 존속하기 위해서 주변의 힘센 나라에 의존하는 것은 한국 역사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특별히 한국은 5천년 역사에서 오랜 세월 동안 중국에 많이 의존하였다. 한국이 미국에 의존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최근 미국과 중국이 벌이고 있는 무역 전쟁은 세상을 편가르기 하는 것 같다. 이사야 시대에 앗수르 세력과 반앗수르 세력(애굽과 구스 등)이 맞선 것과 같은 격이다. 최근 미국은 중국의 이동통신 기업 화웨이의 CFO 멍완저우를 체포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화웨이가 대이란제재(sanction)를위반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내면적인 이유는 IT 업계에서의 중국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있다. 미국의 우방은 미국과 행보를 같이하여 국내 통신기술 시장에서 중국의 화웨이를 퇴출시키고 있는 분위기다. 그러나, 한국의 LG 그룹은 미국의 우방들의 행보와는 달리 5G 통신망에 화웨이 제품을 쓰겠다고 공표하여 뭇매를 맞고 있다.

 

큰 나라들의 전쟁이 노골화되면 작은 나라는 큰 나라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아야 한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금 한국이 딱 그렇다. 이런 상황에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사야 19장은 그에 대한 지혜를 주고 있다.

 

나라가 어렵고, 시대가 어렵고, 국제정세가 어려울수록 교회는 성경을 통하여 지혜를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 이사야 19장은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더 힘 센 나라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그 힘 센 나라들을 그 발 아래 두고 계신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강력하게 선포한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이 땅의 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을 의지해야 한다. 한국은 실제적으로 미국도 중국도 너무 믿지 말아야 한다. 이 땅의 힘을 의지하다가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다시 겪을 수 있다.

 

이미 한국은 그러한 경험을 한 바 있다. 19세기 말, 제국주의가 판을 칠 때, 제국을 표방한 나라들은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혈안이었다. 조선은 그 당시 일본의 표적이었는데, 각 제국들은 자신들의 표적을 확실히 확보하기 위해서 서로 간에 협약을 맺는다. 그 당시 고종 황제는 러시아의 힘에 의지하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통해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물리치고, 러일전쟁을 통해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간섭을 물리쳤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은 미국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다. 그 밀약을 맺은 이후, 미국은 한국에서 영사관을 물렸고, 일본은 조선통감부를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한다.

 

현재 미국은 한국의 최고 우방이지만, 역사를 볼 때, 자신의 이익과 관련하여 어떠한 자세를 취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최근 중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미 사드 배치문제로 한국 기업(롯데)에 대한 제재를 시행한 이력이 있다. 이렇듯 땅의 은 믿을 만한 게 못된다.

 

이사야 19장은 앗수르와 애굽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날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앗수르와 애굽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나라가 되고, 그들은 서로 왕래하며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거라고 한다. 이사야는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라”(24)는 말씀을 선포한다.

 

한국(교회)이 거대한 힘,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나라들에 대하여 주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미국과 중국이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며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협력하도록 기도하며 선교의 고삐를 놓치 않는 것이다. 특별히 중국은 아직도 신앙의 불모지와 다를 바 없다. 기독교는 중국 영토 내에서 공적인 활동을 할 수 없다. 그런 상황 속에서 중국인들을 향한 복음 전도의 길은 매우 위험하고 험난하다.

 

중국 선교의 한 방법은 미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 주변에는 중국교회가 많이 존재 한다. 그들의 신앙은 한국의 7,80년대 신앙처럼 뜨겁다. GTU에서 공부하는 한 중국 친구는 중국의 종교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오듯 왔다고 고백하는 친구도 있다. 그러므로, 신앙의 선배 격인 한국(이민)교회는 중국이 미국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배하는 나라가 되도록 중국(이민)교회와의 협력을 통해서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하며 힘써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국(교회)의 선교적 위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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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2. 11. 10:57

멈춤과 구원

(누가복음 3:1-6)


평화의 촛불을 켰다. ‘평화라는 단어는 매우 정치적인 용어다. 적어도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느낀다. 예수님 당시에도 평화는 정치적인 용어로 쓰였다.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 로마가 일군 평화. 그런데, 그 평화는 온전한 평화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로마의 평화는 로마의 힘(무력, 폭력)을 통해 일궈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참 아이러니 하지 않는가? 평화는 폭력이 없는 상태인데, 그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 폭력을 써야만 한다는 것 말이다. 오늘 말씀도, 정치적인 상황을 언급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세례 요한이 광야(빈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때는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레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그 지역을 통치한사람들의 명단이 나열되고 있다. 디베료 황제, 본디오 빌라도, 헤롯, 빌립, 루사니아, 그리고 안나스와 가야바, 이 사람들은 나름대로 그 시절 평화를 지키지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지도력을 통해 그 당시 세상은 나름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이루며 살았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위에서 나열한 지도자들과 요한을 대조시키고 있다. 팍스 로마나의 평화를 이루고 살던 사람들은 모두 나름 이었으므로, 궁전에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렸다. 그런데, 그들과는 달리 요한은 빈 들에서 살았다. 그리고 요한은 그 빈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요한이 받은 말씀은 생뚱맞은 말씀이 아니었다. 그가 받은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내려온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 요한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물, 그리고 다른 예언을 전하는 선지자가 아니라, 구약의 전통에 서 있는 정통 예언자라는 뜻이다. (구약은 신약의 예언이고, 신약은 구약의 성취다.)

 

요한이 받은 이사야의 책에 있는 말씀은 다음과 같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4-6).

 

이것은 이사야서 403-5절의 말씀이다. 골짜기의 메워짐, 산과 언덕의 낮아짐, 고르지 않은 곳의 평탄해짐, 거친 길이 평지가 되는 것은 모두 평화와 평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이 세상의 왕들과, 요한이 예비하고 있는 주님의 대조된 모습이다.

 

세상의 왕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평화를 이룬다고 하면서, 골짜기를 만들고, 산과 언덕을 만들고, 울퉁불퉁하고 거친 길을 만들었다. 나누고 쪼개고 탄압하고 착취하고 억압하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평화를 만들어 갔다. 그러한 평화가 얼마나 가짜 평화인가. 그리고 그 평화는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그러나, 주님의 평화는 낮고 쉬운 평화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11: 28-29). 주님은 세상의 왕들이 만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평평하게 하고, 울퉁불퉁하고 거친 길을 평탄하게 하신다.

 

본문은 빈 들에서 말씀을 받은 요한의 사역을 전하는데, 그의 사역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회개의 세례에서 세례밥티즈마라는 헬라어의 번역이다. ‘밥티즈마가 가진 원어의 뜻은 침수’, 물에 잠기다이다. 그래서 지금도 Baptist(침례교)들은 세례를 베풀 때, ‘침수를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회개의 세례(침례)’에서 방점이 있는 곳은 세례가 아니라, ‘회개이다. ‘회개방향을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회개는 마음의 방향, 영혼의 방향, 발걸음의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되돌아 가는 것을 말한다. ‘방향을 틀어 돌이켜 돌아가려면가장 먼저해야 하는 것은 가던 길을 멈추는 것이다. 멈추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을 세상에 출간해서 유명해진 스님이 있다. ‘혜민 스님이다. 혜민 스님과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야구선수 박찬호와 스타강사 김창옥이다. 세 사람이 자주 만난다고 한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출생년도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 사람과 나의 공통점도 같다. 우리 모두 1973년 생이다. 기회되면 그들의 모임에 끼고 싶다. 그래야 구색도 맞는다. 혜민과 박찬호는 불자고, 김창옥은 그리스도인이다. 내가 거기 껴야 불자 2, 기독교인 2, 이렇게 구색이 맞는다. (이 글을 혹시 읽으시거든, 나를 불러달라.)

 

나는 이런 생각을 가끔 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을 내가 썼어야 하는데. 불교 승려가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라고 말했지만, 사실, 멈춘다는 것은 기독교의 용어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회개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상의 왕들은 멈추는 법을 몰랐다. 그들은 팍스 로마나라는 명분 아래, 계속해서 폭력을 저질렀다. 그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 폭력을 멈추기 위해서 또다른 폭력을 저질러야만 했다. 결국 그들은 팍스 로마나의 명분으로 하나님의 아들까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폭력을 저질렀다. 멈추지 못하고 끝까지 간 것이다.

 

요한이 빈 들로 간 이유는 멈출 줄 모르는 그 왕들과 다른 길, 다른 삶을 살기 위함이었다. 요한은 빈 들에서 모든 것,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는 것, 그 모든 것을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멈추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한다.

 

멈추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멈추지 못하니, 나 자신이 안 보이고, 멈추지 못하니, 배우자, 그리고 자녀들이 안 보이고, 멈추지 못하니, 이웃이 안 보이고, 멈추지 못하니, 하나님은 더더군다나 안 보인다. (나 스스로 회개 많이 했다. 아들이 20파운드 살이 빠지는 게 안 보였다. 얼마나 못된 아버지인가. 한동안 죄책감 속에 살았다. 그래서 이런 시를 썼다.)

 

죄책감

 

라면을 먹는다

면발이 꼭 눈물 같다

목구멍으로 칼칼하게 넘어간다

국물은 면발이 짜낸 눈물의 찌꺼기인가

맵고 짜다

마시면 탈이 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냄비에 얼굴을 들이대는 무모함은

용기가 아니라 무지다

면발이 짜낸 눈물의 찌꺼기를 들이킨 바람에

몸은 하루 종일 퉁퉁 부어

죄책감을 끌어 안고 있다

(이 시는 라면에 대한 시가 아니라 나의 죄책감에 대한 시이다. 이런 게 시의 묘미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골짜기를 오르내리느라 우리는 얼마나 멈추지 못하고 사는가. 세상이 만들어 놓은 산과 언덕을 넘느라, 울퉁불퉁하고 거친 길을 힘겹게 건너느라 우리는 얼마나 멈추지 못하고 사는가. 저 골짜기만 지나면, 저 산과 언덕만 넘으면, 저 거친 길을 건너면, 평화가 올 거야, 하면서 우리는 멈추지 못하고 산다.

 

평화는 질주하는 데서 오지 않고, 멈추는 데서 온다. 이 세상의 왕들을 따라가는 데서 오지 않고,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빈 들로 나가는 데서 온다. 그러한 행위 자체가 멈춤이고 회개이다. 멈추지 않는 자에게는 회개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도 없고, 평화도 없고, 결국 구원도 없다.

 

멈추지 못하는 폭력을 거두라. 멈추지 못해서 자기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 멈추지 못해서 가족에게 가해지는 폭력, 멈추지 못해서 이웃에게 가해지는 폭력, 그 모든 것을 멈추라. 그리고, 요한처럼, ‘빈 들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볼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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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2. 6. 09:46

헤벨

(전도서 1:1-11)

 

전도서는 히브리어 코헬렛에 대한 번역이다. 헬라어는 코헬렛에클레시아스테스로 번역했고, 영어는 헬라어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Ecclesiastes). ‘코헬렛의 어근 코헬모으다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코헬렛회중을 모으는 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도서전도하다의 의미인 ‘evangelism’이라는 의미로 잘못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전도서(전도자)’전도(evangelism)’의 의미를 가진 게 아니라, 지혜를 구하는 회중을 모아 그들에게 지혜를 가르치는 자의 뜻으로 봐야 한다.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가톨릭 측에서는 전도서를 아예 코헬렛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한다.

 

전도서의 핵심 단어는 헤벨이다. 히브리어 헤벨은 우리 말로 헛되다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는 소량의 바람’, ‘수증기의 뜻을 가지고 있고, 영어로는 무의미한(meaningless)’로 번역하고 있다. 그래서 2절을 헤벨이라는 낱말을 넣어서 다시 읽어보면 이렇다. ”헤벨, 헤벨! 전도자가 말하노라. 헤벨의 헤벨! 모든 것이 헤벨이다!”

 

성경 전체에 헤벨(허무)’이라는 단어는 73번 등장한다. 그런데, 그 중 37개가 전도서에 집중되어 있다. 인생에 대한 전도서에 깔린 기본적인 생각은 허무이다. 그러한 허무가 가득한 인생 속에서 전도서에서 묻는 질문은 3절에 나타난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전도서에서 인생을 허무하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때문이다. 산과 들과 바다 등 자연 또는 세상의 항구성(영원성)에 비하면 인간의 삶의 너무나 빨리 증발해 버리는 수증기와 같다. 김빠지는 것처럼 소량의 바람이 휙 부는 것 같다. 그래서 인생은 공허하고 허무하다. 인생은 참으로 무의미한 것 같다.

 

전도서에서 나타나는 전도자의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다음의 네 가지이다.

1) 하나님은 확실하고 유일한 실재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삶의 전부를 선물로 주신 분이다.

2) 하나님의 방식은 항상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 사람 편에서 볼 때, “해 아래에서 하는 일”(2:17)이 그저 만족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4) 가장 평등한 것은 죽음이다.

(고든 피,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94)

 

죽음은 인생을 허무하게,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생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죽음은 부자와 가난한 자,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닥친다. 세상의 모든 일은 나에게 일어날 확률이 불분명하다. 내가 부자로 살지, 내가 가난한 자로 살지, 내가 지혜로운 자로 살지 내가 어리석은 자로 살지, 나에게 어떠한 불행이 닥칠지, 나에게 어떠한 행복한 일이 올지, 아무도 정해진 것이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죽음이다.

 

인생의 헤벨을 강조하는 전도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우울한 것 같다. 그리고 인생이 헤벨하니, 그 무의미한 인생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생을 즐기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오해할 만한 구절이 몇 군데 눈에 띈다.

 

1)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2:24)

2)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3:13)

3)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5:18)

4)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 없음이라(8:15)

5)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9:7)

 

이러한 구절을 보면,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도가 제시하는 해법은 먹고 마시는 것인양 착각을 불러 온다. 그러나, 전도서의 그 구절들을 자세히 보면, ‘먹고 마시는 것의 행위는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에게 선물로 주신 거라는 가르침이 함께 나온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우리가 아는 확실한 것은 모두 죽게 된다는 것, 허무한 삶일지라도, 그 허무한(헤벨) 삶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믿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죽음뿐인 삶을 허무한(헤벨)’ 것으로만 여길 것이냐, 아니면, 허무한 삶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여길 것이냐에 따라서 인생의 질은 달라진다. 전도서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듯이, 기쁨과 즐거움은 우리가 한 일을 통해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두 손으로 한 일은 결국 증발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우리가 아무리 재산을 많이 모은다 해도, 그 재산을 결국 증발해 버린다. 나의 손에 영원토록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숫자가 아닌 현물로 재산을 측정했던 옛날을 생각해 보라.)

 

렇다면, 기쁨과 즐거움은 어떻게 오는가?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이익을 확보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삶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할 때 온다. 기쁨과 만족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을 제어하고 그것을 얻으려는 노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온다. 그러므로, 3절에서 물었던 질문,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인가?”의 대답은, “사람의 모든 수고는 유익이 없다!”가 된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상 사람들은 허무(헤벨)를 극복하기 위하여 시간을 아낀다. 시간을 아껴 무엇인가를 이루어 내면서, 그 이루어 낸 일에 보람을 느끼며 산다. 물론 이것도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건전한 방법 중 하나이다. 이렇게만 살아도 인생은 복된 인생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아낀 시간이 결국 그들에게 죽음을 피할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아끼는 게 아니라, 시간을 구원해 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셔서 하신 일은 시간을 구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아끼지 않고, 시간을 내어준다. 시간을 아끼지 않고 내어줄 수 있는 이유는 전도서에서 말하고 있듯이 인생(시간/)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믿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전도서의 신앙은 확고하다. 허무한(헤벨) 인생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선포한다. 그 어느 시절보다 인생의 허무를 말하는 시대이고, 허무가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시대이지만,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사람들의 몸부림은 허무가 만연한 만큼 처절하다.

 

우리는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이유는 인생의 허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인생의 허무를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극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을 궁극적으로 허무하게 만드는 죽음을 물리치셨다고 믿는다. 우리가 인생을 허무하게 살지 않고, 우리의 시간을 주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인생은 이미 구원 안에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인생은 허무하다. 아무리 위대한 일을 우리 두 손으로 이루어 냈다 하더라도 그 수고는 모두 헛될 뿐이다. 그 수고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수고를 하되 무엇인가 이루어 내려는 수고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인생을 기쁘고 즐겁게살기 위하여 수고를 한다. 수고가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 우리를 구원한다. 이것을 믿는 자는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 손과 발에 힘을 주기 보다, 힘을 빼고, 주님이 선물로 주신 인생을 찬양하며 먹고 마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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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요한계시록 개론서, <십자가와 보좌 사이>를 읽고

 

저자가 결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의 저술 목적은 요한이 여러 가지 문학적 장치들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을 밝힘으로써 요한계시록을 보다 접근하기 쉬운 책으로 만드는 것”(116)이다. 책은 요한계시록을 문학으로 읽을 것을 요청한다. “만약 우리가 요한이 사용한 방법들(문학적 장치들)을 이해한다면, 요한계시록은 독자들이 읽기를 꺼려하는 책이거나 현대의 예측 차트가 아닌 본래 목적의 그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에 대한 증언으로 보일 수 있다”(18).

 

저자는 저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을 문학적으로 읽어내는 일을 해 나간다. 책은 개론서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첫 장부터 자세히 살펴보는 방식이 아닌 5개의 소주제(구속의 드라마 /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 대한 서술 / 하나님의 적들에 대한 서술 / 어린양의 전쟁 / 오늘날 요한계시록 읽기)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역거룩하지 않는 삼위일체(unholy Trinity)’와 대조하면서 서술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드라마는 거룩하지 않는 삼위일체와의 전쟁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때 하나님의 백성과 불신자들의 행동은 구속의 드라마 속에서 분리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신실하고 정결하지만, 거룩하지 않는 삼위일체의 기만에 속아 넘어간 불신자들은 추하고 악한 일들을 통해서 사탄에게 신실하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요한은 발생반복(recapitulation/재현)’이라고 불리는 문학적 장치를 통해서 구약성경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늘에서 뚝 덜어진 문서가 아니고, 구약의 예언자적 전통에 서 있는 문서라는 뜻이다. 구약과의 연장선 상에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찬양이고, 하나님이 아실 일에 대한 소망의 기록이다.

 

개론서라는 지면의 제약상 저자는 모든 문학적 비유를 세세히 풀어내지는 않지만 요한계시록을 본래의 기록 목적에 합당하게 해석하도록 돕기에 충분하게 풀어낸다. 특별히 요한이 왜 7이라는 숫자를 사용했는지(7이라는 숫자는 완전과 보편을 나타낸다), 또한 왜 6이라는 숫자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대적인 짐승의 숫자를 만들어 내는지(6은 인간의 숫자이고, 7이 아닌 불완전한 숫자이다)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게다가 저자는 하나님의 대적인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왜 거룩하지 않는 삼위일체(unholy Trinity)인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맞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조롱하는지를 비교적 자세히 밝힌다.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면서 주로 참고한 학자는 리처드 보캄(Richard Bauckham)G. k. 비엘(G. K. Beale)이다. 두 학자의 책을 참고하여 논의를 진행시켰다는 것은 이 책의 개론적 설명이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보컴과 비엘은 요한계시록 연구 분야에서 가장 인정받은 학자들이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설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고 그 적용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요한계시록 읽기에서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의 로마제국에 대한 비판을 상기시키면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적용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현대인들에게 탄압방탕이 개인들의 행동 속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조 속에 내재된 것을 환기시키면서, 주류 문화와, 정치권력에 맞설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저자가 미국인이어서 그런지 미국이 잘못한 옛일(Jim Crow )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갈 뿐, 현재 미국이 저지르는 잘못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고, 지면의 제약상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신기하고 안심되는 점, 그리고 책에 대한 신뢰를 할 만한 또다른 점은 저자가 삼위일체 사역 뿐 아니라 전례(Liturgy/예전), 그리고 성례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침례교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침례교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인 것을 감안하면 약간 이례적이다. (물론 미국의 학풍은 한국의 학풍과는 달리 어느 교단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것이 있다.) 그가 그러한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지적으로 배우는 것뿐 아니라 몸으로 반복해서 행하는 것을 통해서도 형성되기때문이다(109).

 

저자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나 쾌락, 거짓 예언과 마주할 때, 여전히 그리스도께 신실하게 반응하도록 하기 위해 교회가 예배를 통하여 믿는 이들을 잘 인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성만찬의 중요성과 세례의 중요성, 그리고 말씀 선포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특별히 저자가 말하는 성만찬의 의미가 마음에 와 닿는다. “성만찬은 우리에게 과거를 상기시키고 미래를 내다보게 해 준다”(112). 저자는 말한다. “기억과 소망, 이 두가지 모두는 우리에게 현재를 살아갈 힘을 부여한다”(113). 세례도 말씀 선포도 모두 이 두 가지를 기억하고 실천하기 위한 전례들인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기억하고, 우리는 하늘의 보좌를 소망한다. 그래서 책 제목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두 번의 오심(십자가와 보좌) 사이에서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신 승리를 믿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면서 살아간다. 요한계시록은 미래의 일에 대한 감춰진 코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에게 신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소망의 복음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간과 교회력

 

수많은 위인들이 시간에 대한 명언을 남겼다. 그만큼 시간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시간에 대한 명언 중, 나의 가슴에 가장 남는 명언은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가 남긴 이것이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이다.”

 

같은 개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 광고계의 전설 데이비드 오글비(David Ogilvy)의 일화도 유명하다. 뉴욕 거리에서 한 맹인이 이런 문구를 들고 구걸하고 있었다. “저는 맹인입니다. 도와주세요! I am blind. Please help!” 오글비는 그 문구를 이렇게 바꾸어 주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날이네요. 하지만 전 볼 수가 없네요. It’s beautiful day, but I can’t see it.” 그 이후, 뉴욕의 맹인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시간에 대한 명언은 대개 시간을 아끼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간이 짧기 때문에 시간을 아껴야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성경은 시간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까? 대표적인 예로 에베소서의 말씀을 들 수 있다. “시간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5:16). 언뜻 보면, 이 말도 다른 여느 시간에 대한 명언처럼 시간을 아끼는 것에 대한 말 같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를 보면 번역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시간을 아끼라라는 말에서 아끼다의 헬라어는 엑사고라조이다. 이는 구해내다, 해방하다, 자유롭게 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 “시간을 구해내라 때가 악하니라라고 할 수 있다. 정말 멋진 말이다. 시간을 구해내다. 시간을 해방하다. 시간을 자유케 하다. 그리스도인에게 시간은 단순히 아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해내야 하는 것이다.

 

교회력은 교회의 행사력이 아니라 구원의 시간이다. 그리스도인의 몸인 교회가 교회력을 쓰는 이유는 교회는 구원 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공동체는 세상의 시간을 살지 않고 구원의 시간을 산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상 사람은 달력으로 11일에 새로운 해를 시작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대림절(Advent)에 새로운 해를 시작한다. 대림절은 희망의 절기이다. 그리스도인은 대림절에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린다. 대림절에 그리스도인은 구약성서를 통해서 고백된 그리스도가 이미 왔다는 것을 고백함과 동시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뒤,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 그리스도가 이제 곧 다시 오길 것을 고백한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기다림의 종교다. 그 기다림은 헛된 기다림이 아니라 이미 구원의 완성을 이루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의 거룩한 기다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시간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시간과 같지 않다. 세상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된 시간 안에서 산다. 시간을 아끼는 행위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구원된 시간 안에 사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

 

그리스도는 시간 안으로 들어오셔서(성육신 하셔서) 시간을 구원하신, 시간 너머에 계신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된 시간 안에 머물 뿐이다. 구원된 시간 안에 머무는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시간을 내어준다. 아낌 없이 내어준다.

 

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고자 한다면, 그 사람이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 자기를 위하여 시간을 아끼는 사람과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의 삶은 같을 수 없다. 자기를 위하여 시간을 아끼는 자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머물지만,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시간을 내어주는 자는 이미 구원 안에 머문다


시간을 아끼지 말고 시간을 내어주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 받은 자가 또다른 어떠한 구원이 필요하길래 시간을 아끼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 받은 자는 다른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아낌없이 시간을 내어준다. 그 아낌 없이 내어주는 시간이 또다른 구원을 낳을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8. 11. 28. 05:56

최후의 사람

 

모든 것을 다 가진

최초의 사람

모든 것을 다 잃은

최후의 사람

 

어느 쪽을 향해 달려가는가

 

이정표가 없어

무작정 달린다

 

심장에 기억된 방향이 없어

발걸음에 그림자만 가득하다

 

무턱대고 모래를 적시는 파도*처럼

무턱대고 시간을 적신다

 

숨쉬기 위해 바깥으로 뛰어나온

시간의 촉수를 움켜잡는다

 

적막, 고립, 정주, 그리고 투쟁

 

지루한 공기를 파헤치면

비로소 도착하게 될 허공

 

* 이원의 시 <호주머니칼>에서 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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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8. 11. 27. 07:22

기억으로 연결된 공동체를 간구하는 기도

(룻기 1:15-21)

 

주님,

주께서는 우리의 가장 깊은 곳,

우리의 기억 속에 머무십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그 기억을 통해서 연결됩니다.

나오미가 어려움 가운데 고향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기억 가운데 주님께서 계셨기 때문이고,

그 기억을 고향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억을 통해 나오미는 하나님과 연결되고,

공동체와 연결되어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우리가 생명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은

기억을 통해 하나님과, 그리고 공동체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주님을 기억하는 일에 온 힘을 쏟게 하시고,

기억을 공유하는 공동체에 머물러

혹시 나의 기억이 흐려진다 할지라도

기억으로 연결된 공동체를 통하여 생명을 보전하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8. 11. 27. 07:18

다시 오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9:23-28)

 

주님,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

죄사함을 아버지께 허락 받으시려,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사함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알고,

기뻐하며 찬양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오고 계시는 중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사함의 확신을 믿고

이 땅 위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간절히 기다리오니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오셔서 우리를 영원히 자유케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