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가야 할 때

 

누군가 길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이 길을 만들기 이전에는 모든 공간이 길이었다. 인간은 길을 만들고 자신들이 만든 길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들이 만든 길이 아니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먼 곳에 여행 갔다 돌아올 때, 정말로 희한한 것은 길을 따라온 것뿐인데, 집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길이라는 것은 정말 신기한 것이다. 그 길만 따라 가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길이 안전하고 평안하길 바란다. 길을 따라 가다가 안전하지 않아 보이거나 울퉁불퉁하면 긴장하거나 불평을 늘어 놓는다.

 

우리는 대개 누군가 이미 닦아 놓은 길, 또는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로 다닌다. 길이 놓여 있지 않거나,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은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감히 길이 아닌 곳에 길을 놓거나, 아니면 혼자서 그 길을 걸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보스턴에서 죽은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 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서리 내린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고

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

, 먼저 길은 한번 가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 여기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 정현종 번역

 

이 시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시이다. 이 시를 통해 어떤 이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한다고 말한다. 명백한 오독이다. 이 시의 주제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 한다가 아니라, 인생의 어느 시점에 놓여 있던 두 갈래의 길 중, 한 길을 택했더라도, 나중에, 선택하지 않은 길을 생각하며 후회하게 되는 게 인생이라고 말하는 시이다. 그렇다. 우리는 후회 없이 살 수 없다. 아무리 확실해 보이는 길을 선택해서 걸었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 뒤돌아 보면 후회가 몰려오는 것이 인생이다.

 

그렇다면, 길을 가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느 지점에 주의(Caution)’ 간판이 놓여 있다. 길이 울퉁불퉁해서 빠르게 지나면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을 안전하게 통과하는 방법은 천천히, 느리게 지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속도를 줄인다.

 

그렇다. 인생의 길이 울퉁불퉁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평소보다 조금 느리게 가는 것이다. 울퉁불퉁 한데도 평소처럼 빠르게 지나다가 소중한 것을 잃을 수 있다. 우리는 할 수 없었던 일을 돌아오며 후회하기 보다, 할 수 있었는데 하지 못한 일을 돌아보며 더 큰 후회를 한다. 느리게 가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울퉁불퉁한 길을 갈 때는 무조건 느리게 가야 한다. 그래야 후회 많은 인생의 길을 돌아보며 지혜로웠던 자기 자신을 대견스럽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9. 6. 16:05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요한일서 4:7-11)

 장례예배


요즘 한국에서 죽음학 전도사로 열심히 활동하시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정채현 교수라고 있다. 죽음에 관해서 몇 권의 책도 출간하신 분인데, 그분이 그렇게 죽음학 전도사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깨달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의사의 일상은 환자를 돌보는 것이고, 돌보던 환자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 일이 매일 같이 반복되면, 어느 누구든 그 일에 대하여 둔감하게 되어 있다. 정채현 교수도 그랬다. 매일 같이 죽음을 목도하는데, 그 죽음이 전혀 자기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이라는 깨달음이 생겼다. 그때부터 가까이에서 보는 죽음을 관찰하고, 누구든지 겪게 되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연구해서, 강연도 하고, 책도 출간하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도 올 해 초, 방광암 진단을 받고, 실제로 닥친 죽음을 감당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한다.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이 코 앞에 닥치는 그 순간까지, 죽음을 남의 일로만 생각할 뿐, 나의 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것도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같이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아가면, 어떻게 인생을 정상적으로 살 수 있겠는가. 죽음의 공포를 견딜 육신과 정신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도 목사로서 장례식을 많이 집례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위에서 이야기한 정채현 교수와 같은 깨달음이 온 적이 있다. 그때 집례한 장례식은 젊은 사람의 장례식이었다. 달리기 모금 행사에 나갔다가, 자동차에 치여 죽은, 교회 할머니의 딸이었는데, 관 속에 곱게 누워 있었다. 예배 드리는 내내, 관속에서 미동조차 안 하고, 예배가 끝난 후,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몸은 저렇게 멀쩡한데, 무엇이 저 사람과 나의 생을 가르고 있는가. 그러면서, 어느 날, 내가 저곳에 저렇게 누워 있고, 누군가가 나의 장례식을 집례하겠지, 라는 생각이 마음 속 깊이 들어왔다. 그때부터 죽음이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고, 나의 일처럼 여겨졌다. 그러는 순간,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면, 한 사람의 인생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다. 나는 김행삼 집사님을 생각하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가 생각난다. 김행삼 집사님과 함께 한 세월이 2년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김행삼 집사님이 나에게 보여준 인생의 가치는 자유와 평화였다.

 

자유와 평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의 특징은 유머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김행삼 집사님은 유머감각이 뛰어난 분이셨다. 몇 달 전,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찾아 뵈었는데, 그때 마침 사돈이신 이정헌 집사님도 일반병원 입원 후 호스피스 병원에 머무실 때였다. 그때 마침, 함께 사는 며느리(이은주 집사)에 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때 며느리 칭찬을 한참 하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며느리가 아버지랑 시아버지랑 둘 다 병석에 누워 있는데, 여기 왔다, 저기 갔다, 여기 저기를 오가면서 힘들텐데도, 성격이 좋아서, 살이 안 빠져.” 그러면서 웃으셨다.

 

또 몇 주 전, 잠시 코마 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신 때가 있었다. 그때 모두가 아버지 돌아가시는 줄 알고, 긴장하면서 기도했다. 그런데 다행히 코마 상태에서 깨어나셔서 눈을 뜨시고, 걱정돼서 찾아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마침, 이진주 자매가 문병을 갔었다. 김행삼 집사님은 그때 이진주 자매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아직 안 죽었다.” 그러면서 웃으셨다.

 

김행삼 집사님은 저를 만날 때마다 미소를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목사님,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겠지만, 소신껏 하세요.” 어르신이 젊은 목회자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려 하시거나, 지루한 옛 이야기를 늘어 놓지 않으시고, 언제나 미소로 대하시며 소신껏 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리스인 조르바>에 보면, 조르바가 들려주는 어떤 노인의 이야기가 있다. 그 노인은 세상을 자유롭게, 그리고 평화롭게 산 노인인데, 그 노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 동네를 돌면서 만난 젊은 처자를 붙잡고 이렇게 말한다. “.. 내가 너처럼 고운 아이를 두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니…”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을 긍정하지, 부정하지 않는다.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향유하고 나누어 줄줄 알기 때문에, 언제나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한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은 교회의 장로, 즉 나이가 지긋하신 한 할아버지가 젊은이들에게 주는 사랑의 교훈이다. 나이가 지긋이 든 요한은 교회 공동체를 향해, 때로는 Dear Children(나의 자녀들아, 소자야)이라 부르고, 때로는 Dear Friends(나의 친구들이여, 사랑하는 이들이여)라고 부르면서,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준다.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성경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요한이 경험한, 요한의 눈에 들어온, 요한의 입술로 고백되는 하나님(예수님)사랑이시다. 요한이 깨달은 비밀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을 알게 되고, 사랑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이 말하는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우리가 살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신 후, 부활, 승천하셔서 이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지만, 우리가 사랑할 때 그 사랑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아버지(할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유가족 여러분! 그리고 친지, 친구,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시며 여러분을 미소로 대하시며 사랑하신 김행삼 집사님을 기억하시려는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법 중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특별히, 유가족들에게 전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을 생각하면서, 서로 사랑하시라. 교회에 출석하여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할 때, 그리스도가 여러분 가운데 함께 계시며,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셨던 아버지, 할아버지가 여러분 가운데 함께 계실 것이다.

<
그리스인 조르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학교의 꼬마 친구가 이렇게 물었다. “너희 할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는데?” 그래서, ‘(화자, 그리스인 조르바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는 할아버지에 대하여 이러한 신화를 만들어 낸다.

 

우리 할아버지는 흰 수염을 날리던 분으로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지. 어느 날 할아버지는 우리 집 지붕에서 펄쩍 뛰어 오르셨는데, 떨어져 땅에 닿자마자 공처럼 튀었지. 차차 더 높게 튀어 우리 집보다 더 높게 튀시더니 드디어 구름 속으로 사라지셨어. 우리 할아버지는 이렇게 돌아가셨단다.”
(
그리스인 조르바, 105)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면, 할아버지의 자유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전염되어, 이러한 유먹감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여유롭게, 평화롭게, 자유롭게, 그리고, 미소를 잃지 않으며, 살아가게 될 거라 믿는다.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김행삼 집사님은 가셨지만, 그분의 사랑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을 거라 믿는다.


기도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제 육신의 삶을 끝내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故 김행삼 집사님을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서게 하여 주사, 눈물도, 죽음도, 생존경쟁도 없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하옵소서.

믿는 자의 소망이 되시는 주님, 어리석은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높고 크신 섭리를 다 깨닫지 못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영생의 소망으로,

이 땅에서의 유혹과 환난을 이겨 내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오늘 고인과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예배를 함께 드리면서

나누었던 말씀처럼,

서로 사랑하는 가족,

서로 사랑하는 친구,

서로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사,

그 사랑 안에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며,

그 사랑 안에서 영원히 기억될 김행삼 집사님을 마음에 품고,

사람은 이제 가지만, 그 사랑은 우리 마음에 영원할 것을 기대하며,

고인을 편히 보내드리게 하옵소서.

이제, 아버지, 할아버지 없이 살아갈 유가족들을 긍휼히 여겨 주사,

담대한 마음을 갖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살아가는 믿음의 가정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여서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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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9. 3. 19:31

쉬타후 라코디쉬 발루후 후

(아가서 2:8-13)


 

교회에는 교회력(Church Calendar)이 있다. 세상에서 쓰는 달력은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통해 만들어 내는 시간과 계절의 차이를 반영하여 만들었지만, 교회에서 쓰는 교회력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과 사역을 기억하고 찬양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The Church has a Church Calendar. The calendar used in the world reflects the difference in time and season that the earth produces through rotation and revolution, but the church Calendar was created to remember and praise the nature and ministry of the Triune God.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교회의 교회력은 끊임없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억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과 사역을 알아가며, 그 본질에 다가서서 그 사역에 동참하려 한다.

We believe in the Father, the Son, the Holy Spirit, which is the Triune God. The church calendar constantly remember the Triune God, and know the essence and ministry of the Triune God to join in the Triune God's ministry.

 

오늘은 창조절 첫 번째 주일이다. 창조절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만드는 이 지구와 온 우주를 돌아보는 절기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사역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절기를 중심으로, 성령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절기,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성부)를 기억하고 찬양하는 절기를 발전시켜 왔다.

Today is the first Sunday of the season of Creation. The season of Creation is a season to remember God the Creator and to look around this earth and all the universe that God makes. The church has developed a feast to remember and praise the Holy Spirit and to remember and praise the Creator God, focusing on the feast of remembering and praising the essence and ministry of Jesus Christ.

 

절기는 단순히 성자가 누구인지, 성령이 누구인지, 성부가 누구인지에만 초점을 맞추는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그분이 누구인지를 질문하면서 동시에, 우리 인간은 누구인지를 묻는다.

The season is not just a focus on who the Son is, who the Holy Spirit is, who the Father is. We throw a question about the Triune God and who we are at the same time.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하여 동시에 묻는 이유는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온전히 알 때 완성되고, 우리의 존재 완성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교에서 랍비의 가르침은 인간을 가리켜 쉬타후 라코디쉬 발루후 후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님과 함께 창조과업을 이루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The reason we ask about God and ourselves at the same time is that our existence is completed when we fully know who God is and our perfection is the purpose of God's salvation. So the rabbinical teaching in Judaism refers to the human being as 'shitahu lakodish baluhu hu '. It means 'a person who works with God in the work of creation'

 

우리는 오늘, ‘Song of Songs 또는 Song of Solomon’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함께 읽었다. 이 노래에는 연인의 사랑, 그 사랑이 뿜어 내는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아름다움과 지극히 잘 어울리는 자연의 향기로움이 담겨 있다. 사랑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 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은 사람과 자연을 연결시켜 주며, 온 세상이 온통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을 깨닫게 하고 보이게 해 준다. 한 마디로 사랑은 우리의 영안(마음의 눈)을 활짝 열어 준다.

Today we read a beautiful song called 'Song of Songs or Song of Solomon'. This song contains the love of the lover, the beauty of the love, and the fragrance of the nature that goes well with its beauty. Love is not just to connect people and reveal their beauty, but to connect people with nature and to make us realize that the whole world is full of beauty. In a word, love opens the eyes of our spirit (eyes of the heart) wide.

 

요즘 들어 세계 교회는 창조절의 중요성을 점점 더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어머니 지구가 그 생명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병약하거나 죽으면 어린 자식들이 살아남기 힘들 듯, 어머니 지구가 생명력을 잃어가면서 지구 이에 사는 모든 생명체의 생명이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Nowadays the world church is increasingly 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the season of the Creation. It is because our Mother Earth, which God has given us, is gradually losing its vitality. The life of every living creature in the earth is seriously threatened by the loss of the mother earth's vitality, as it is difficult for young children to survive when their mothers are dying.

 

얼마 전 모 언론사를 통해북극 최후의 빙하가 무너졌다라는 제목의 뉴스가 있었다. 그린랜드 북쪽 지역 그리고 캐나다 북쪽 지역, 대륙하고 맞닿아 있는 지역에서는 대륙이 차갑기 때문에 빙하가 잘 녹지 않는데, 그 지역의 빙하마저 녹았다는 것이다. 이곳의 빙하는 2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있었을 때 형성된 빙하이고, 여름 절기 동안 한 번도 녹은 적이 없는데, 이곳의 빙하가 녹았다는 것이다.

Not long ago, there was news in the media, titled 'The Arctic' s Last Glacier Has Fallen '. In northern Greenland and northern Canada, where the continent is in contact, the continents are cold, so the glaciers do not melt well, and the glaciers in the area have melted. The glacier here is a glacier that was formed 20,000 years ago when it was the last Ice Age and never melted during the summer season, and the glacier here has started to be melted.

 

지금 세상은 두 가지 문제로 고통 받고 있다. 하나는 불평등(일부 소수의 사람들만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지구온난화의 문제이다. 이것을 그림 언어로 표현해 보면 이런 것이다. 엄마의 자궁 속에 있는 태아가 영양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는 것(불평등)과 동시에 엄마가 병약해져서 엄마가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Now the world is suffering from two problems. One is the problem of inequality (with the exception of a handful of people and the rest of us eating and living) and the other is global warming. It can be described this way. The fetus in the mother 's uterus is threatened with life because it does not receive nutrition properly (Inequality), and at the same time the mother is dying because the mother is getting weak(Global Warming.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일을 하고 계실지, 그리고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과 더불어 어떤 일들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자각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우리는 ‘쉬타후 라코디쉬 발루후 후('shitahu lakodish baluhu hu)’이다. 우리는하나님과 함께 창조과업을 이루는 사람이다.

In this world, we can not help but think what God the Creator is doing, and what we should do with God the Creator. So we must have an awareness of who we are. We are 'shitahu lakodish baluhu hu'. We are 'those who work with God in the work of creation'.

 

세상은 지금 하나님의 창조와 그 창조 과업을 함께 이루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무시한 대가로 죽음의 문화, 억압의 문화, 지배의 문화 속에서 고통 당하고 있다.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일은 악마나 하는 짓이다. 악마가 아름다운 것을 훼손하는 이유는, 악마는 사랑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The world is now suffering from the culture of death, the culture of oppression, and the culture of domination in exchange for neglecting to know the identity of God as the creator and know who we are as 'those who work with God in the work of creation'. To undermine beauty is the evil thing. The reason the devil damages the beautiful is because the devil does not know love or is not able to love.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아가서가 성경에 들어 있는 이유는, 아가서에서 노래하고 있는 연인의 사랑과 아름다움이 곧 하나님과 사람(피조물) 사이에 있어야할 사랑과 아름다움을 그림언어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The Song of Songs, which never has the word "God", is contained in the Bible, because the love and beauty of the lover singing in Song of Songs is the metaphor of love and beauty that must be between God and human.

 

다른 말로 표현해서, 지금 이렇게 인간이 자연을 마구 훼손하면서 지구온난화를 초래하고 고통당하는 이유는 결국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면, 상대방은 파괴와 훼손, 착취의 대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사랑이 없으니, 세상의 아름다움은 점점 훼손되고 파괴되어, 점점 껍데기만 남게 되는 것이다.

In other words, the reason why human beings now damage the nature and cause global warming and suffering because humans have lost the power of love in the end. Without love, the other is only seen as an object of destruction, and exploitation. Because there is no love, the beauty of the world is getting destroyed, and only the shell remains.

 

사랑이 생명을 살린다. 사랑은 생명 속에 들어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한다. 사랑을 통해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면 생명은 그것을 향유하며 지키게 되지, 파괴하거나 훼손하지 않는다.

Love saves lives. Love makes you discover the beauty in life. When we discover beauty through love, life does not destroy or damages it, but does enjoy and keep it.

 

우리는 누구인가? ‘쉬타후 라코디쉬 발루후 후’, ‘하나님과 함께 창조과업을 이루는 사람인가? 아니면, 사랑을 모르고, 사랑할 줄 몰라,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해 파괴와 훼손을 일삼는 악마의 친구인가? 악마(같은 사람)은 파괴와 훼손, 그리고 착취를 통해 죽음의 문화, 억압의 문화, 지배의 문화를 만들어내어 생명체에게 고통을 가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창조과업을 이루는거룩한 사람은 사랑을 통해 생명체(피조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 놓는다.

Who are we? Are we 'shitahu Lakodish Baluhu hu'? 'Is the man who works with God in His Creation'? Or a friend of the devil who does not know love, is not able to love, so cannot find beauty, and destroys it? The devil creates the culture of death, the culture of oppression, and the culture of domination through destruction, and exploitation, and causes suffering to life, but the holy human being, who works with God in His Creation, finds beauty in life (creature) and gives oneself out to enrich the life.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쏟으신 그 거룩한 사랑으로 인하여 구원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가 그것을 고백하고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계속하여 하나님과 함께 창조과업을 이루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지 기도하고 고민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간구하는 사랑이 흘러 넘치는 아름다운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이 주신 사랑의 능력으로 상대방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발견하여 그 생명을 더 풍성케 하는 주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We are a new creation saved by the holy love poured out on the cross, and God's holy people. If we are Christians who confess it and believe in it, we must be a beautiful, full of love, praying for God's mercy, praying and thinking about what to do in order to achieve 'the work of creation with God.' I hope we try to be a holy child of the Lord who constantly finds out the beauty of our neighbors and nature with the power of the Lord's love and enrich the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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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9. 2. 15:48

Jesus, Marriage, Freedom

(John 8:31-36)


As a pastor, one of the greatest privileges is that I can share the happiness and sorrows together as it happens. In one's life, marriage is a big turning point in life, and I am very happy to be here with you. Especially, I am really happy to officiate the marriage service of Mr. Francisco who is one of my best friends, and Ms. Monica, who is one of my greatest co-workers of the kingdom of God.

Christian weddings have a special aspect. The image of the bridegroom and the bride is not only an image used to express God and Israel in the Bible but also an image used to express the relationship between Jesus Christ and the church. Marriage is holy and has a special meaning. This wedding service is not just for the two, but it is also the time to renew the wedding of everyone who is attending this ceremony.

Today's wedding service is a holy time to look back at your own marriage. While remembering the excitement, promise, the eyes of love, God's grace and love from the wedding ceremony, you need to recall the meaning of your marriage. Under the guidance of the Holy Spirit, I hope that such a work will be at this time.

Among the verses that we read today, there is a verse that we are very familiar with, one that refreshes our hearts.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32). Including this verse, there are many instances of the word ‘freedom' in the passage. What is freedom? How can we get freedom? 

To be "free", does not mean simply that one is not bound or tied to any obligation. The things that give freedom to people are not liberation and separation but affiliation belonging. A state that is not connected to anything raises fear and anxiety. 'Fri', which is the roof of the Indian-Germanic languages such as frei, friede, and freund, means 'to love'. So, to be free means to belong to a friend or lover. Human beings feel freedom in the relationship of love and friendship. Freedom is the most archetypical relational vocabulary. There is no freedom without a support. (Byung-Cheol Han, The Fragrance of Time, pp.61~62)        

In today's words, the reason why Jesus said to people that if you stay in the Word, you will truly become his disciples,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is that because they are now misplaced to be bound. People want to belong to somewhere(or someone) in order to dispel fear and anxiety. However, fear and anxiety are so strong that they cannot tell whether they belong to the truth or not. In such a situation, a tragedy arises.

Jesus wants to free those who have tied themselves to the wrong, and to bind them back to the truth. The truth is Jesus Christ, whom we confess as the Lord. Since we are bound to the truth of Jesus Christ and we belong to Him, we are free. The apostle who is tied to Jesus and most strongly expresses belonging is Paul. Paul introduces himself as a slave of Jesus Christ whenever he introduces himself.

We often think that a slave is not free. But, rather, the Apostle Paul calls himself a slave of Christ. Why would the Apostle Paul speak of his own identity through the metaphor of 'slave', which would not fit with freedom? The apostle Paul knew what 'freedom' means. He wanted to say that the more you are bound to Jesus Christ, the truth itself, the more you can be a free man. That is why he speaks of himself as a 'slave' of Christ.

Marriage is the task of binding ‘me’ to the other. Marriage is a human activity that brings more freedom than any other activities. The Apostle Paul says this in Galatians. "You, my brothers, were called to be free. But do not use your freedom to indulge the sinful nature; rather, serve one another as a slave in love" (Gal. 5:13). Marriage is a work of binding one another. And in order to confirm the bondage of one another in their real life, they try to be a slave one another. So, the husband insists on the wife's body, and the wife insists on the husband's body. Marriage is "declaring that I am no longer mine, but my partner."

Christians enjoy true freedom because they belong to, and are bound to Jesus Christ, the Truth. Like apostle Paul, we declare ourselves to be   'a slave of Christ'. We do not fear binding one another through marriage. Rather, we are delighted and joyful because we know what freedom is in Christ. We belong to Christ and are bound together. Just as Jesus freed the Church, the Bridegroom and the bride may believe that each would be a slave to one another, driving out the fear and anxiety, and enjoy the true freedom.                                

Through this marriage, I would like to express my heartfelt congratulations to both of you, who will give one another as a slave in order to get real freedom. There will be no fear because you are bound to one another. There will be no anxiety because you will always be on each other's side no matter what happens.           

Today, this time, I am truly grateful that Jesus Christ is giving freedom to these two through marriage, and to all of us who are attending and celebrating this wedding. I believe that Christ is restoring freedom that we have forgotten. We thank God who has made us belong and bind one another through marriage in the love of Christ. Through marriage, I hope we could be renewed to be children of faith who experience and enjoy the true freedom that the Lord has brought to us.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9. 2. 15:29

예수, 결혼, 자유

(요한복음 8:31-36)

 

목회자의 가장 큰 특권 중 하나는 한 사람의 희로애락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결혼은 엄청난 인생의 사건이고 전환점이다. 그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하고 기쁘다. 특별히, 평소에 가깝게 지내는 김 원장님과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일꾼(자랑) 중 한 분인 이영주 집사님의 결혼식 주례를 맡게 되어 특별히 감사하다.

 

기독교인의 결혼식은 특별한 면이 있다. 신랑과 신부의 이미지는 성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빗대어 표현할 때 쓰는 이미지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표현할 때도 쓰는 이미지이다. 그만큼 결혼은 거룩한 것이고,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별히, 이 결혼식은 이 두 분만의 결혼식이 아니라, 이 결혼식에 참석한 모든 분들의 결혼식을 Renewal(갱신)하는 시간이다.

 

기독교인의 결혼식은 단순히 결혼 당사자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자리, 그 뜻을 넘어서 나의 결혼생활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거룩한 시간이다. 결혼식 할 때의 그 설렘, 그리고 다짐, 또한 예물반지를 주고 받을 때의 그 사랑의 눈빛, 나를 응원해 주는 지인들의 축하를 받으며 내딛었던 결혼생활의 첫 발, 그리고, 결혼예식을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등을 기억하면서, 결혼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이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그러한 역사가 이 시간에 있기를 소망한다.

 

오늘 봉독한 말씀 가운데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고, 또한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2). 이 말씀을 포함해서,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 가운데는 자유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자유란 무엇일까? 그리고 자유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현대인에게 가장 오염된 단어(현대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말) 중 하나는 자유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건, 어딘가에 전혀 속박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결혼을 하면, 남자(남편)가 여자(아내)에게, 여자(아내)가 남자(남편)에게 속박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또는 자유에 대한 이해가 오염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생각에 불과하다.

 

자유롭다는 것은 단순히 구속되어 있지 않거나 의무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를 주는 것은 해방이나 이탈이 아니라 편입과 소속이다. 그 무엇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자유롭다(frei), 평화(friede), 친구(freund)와 같은 표현의 인도게르만어 어원인 'fri' '사랑하다'라는 뜻이다.그러니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나 연인에게 속해 있는'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바로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묶여 있지 않음으로 해서가 아니라 묶여 있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적 어휘다. 받침대 없이는 자유도 없다. (한병철 <시간의 향기 >, 61~62쪽)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 안에 거하면 참으로 당신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뜻은, 곧 그들이 지금 어딘가에 잘못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을 떨쳐 버리기 위하여 어딘가에 속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공포와 불안이 너무 강해서, 자신이 속해 있는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비극이 생겨난다.

 

예수님은 자신을 잘못된 것에 묶어 놓은 사람들을 해방시켜, 진리에 다시 묶어 놓으려 하신다. 그 진리는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묶여 있기 때문에, 그분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자유롭다. 예수님에게 묶여 있다, 속해 있다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한 사도는바울이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a slave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히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slave이라고 말한다. 자유와 어울리지 않을 법한 ‘slave’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신분을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도대체 왜 그런 표현을 쓸까?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자유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단단히 묶여 있을수록 참 자유인이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slave’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은 나를 상대방에게 묶는 작업이다. 결혼은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자유를 가져다 주는 인간 활동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말을 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사로 종 노릇하라”(5:13). 결혼은 서로가 서로에게 묶는 작업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묶여 있다는 것을 실생활에서 확인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종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의 육신를 주장하고, 아내는 남편의 육신을 주장한다. 결혼은 나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고 묶여 있기 때문에 참 자유를 누린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까지 선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고 묶여 있기 때문에 얻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결혼을 통하여 사랑 안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속하고 묶이는 일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 신랑이신 예수님이 신부인 교회를 자유롭게 하신 것처럼, 남편과 아내는 서로가 서로에게 종노릇 하며, 공포와 불안을 몰아내고, 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 결혼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어 참 자유를 얻게 되실, 두 분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속하고 묶여 있는데, 이제 무엇이 두렵겠는가.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생겼는데, 이제 무엇이 두렵겠는가.

 

오늘 이 시간, 참으로 감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혼을 통하여 이 두 분에게 자유를 주시고, 이 결혼식에 참석하여 두 분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께서, 잊고 살았던 자유를 되찾게 해 주신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결혼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고 묶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결혼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참 자유를 경험하고 누리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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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아름다움과 이끌림

 

자동차로 이동하는 동안 주로 두 개의 라디오 채널을 튼다. 하나는 NPR 뉴스 채널이고, 다른 하나는 클래식 방송 채널(Classical KDFC)이다. 뉴스는 주로 출근하면서 틀고, 클래식은 주로 퇴근하면서 튼다. 아침에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궁금하고, 저녁에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마음의 평안을 누린다.

아침에 출근할 때면 지난 밤에 돌려놓았던 클래식 채널을 잠깐 듣게 되는데, 대개는 기계적으로 뉴스 채널로 바꾼다. 그런데, 어느 날은 클래식 채널을 바꾸지 못하고 그냥 놓아두는 때가 있다.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올 때가 그렇다. 며칠 전, 그러한 경험을 또 했다. 아침에 자동차 시동을 건 동시에 클래식 라디오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이었다.

 

브람스의 선율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의 곡 자체가 워낙 아름다워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의 교향곡 1번에는 그의 아름다운 고뇌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브람스는 베토벤을 잇는 독일의 대표적인 낭만파 작곡가이다. 그런데, 그는 세상에 이름을 내놓은 후에도 20년이 넘게 교향곡을 작곡하지 못했다. 베토벤 때문이었다. 베토벤이 죽은 후, 그는 베토벤의 교향곡과 어깨를 나란히 할 교향곡을 작곡할 자신이 없었다.

 

브람스의 교향곡 1번에는 그러한 그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그의 교향곡 선율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베토벤이라고 하는 큰 산을 기어이 넘어선 후, 자신만의 선율을 조가비 속의 진주처럼 반짝이며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아름다운 선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채널을 돌려버리는 것은 브람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멈추어 서게 하는 이끌림이 있다. 그런데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움은 짧은 시간에 빚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고뇌와 노력, 그리고 오랜 수련을 통해서만 빚어지는 신비이다.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들으며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베드로후서 1장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듯, 구원은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에 이르는 길인 것처럼,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는 길은 정말 부단히 걸어 높은 산을 넘는 것과 같다. 마치 브람스가 부단히 걸어 베토벤이라는 높은 산을 넘었던 것처럼.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를 꿈꾼다. 베토벤의 교향곡 같이 아름다운 교회, 베토벤의 교향곡을 넘어서기 위하여 무단히 고뇌하고 노력했던 브람스의 교향곡 1번 같이 아름다운 교회, 우리 모두가 함께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간다면,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는 길이 아름다운 선율을 듣는 것처럼 가슴 뛰는 일이 될 거라 믿는다. 그 꿈을 마음에 품고 오늘도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듣는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8. 27. 13:31

교회총행복(Gross Church Happiness)

(요한계시록 2:1-7)


어느 신문 기사 보도에 따르면, 세계 500대 기업의 평균수명은 40~50세 정도이고, 미국의 경우 매년 50만개의 기업이 탄생하나 10년 후에는 그중 4%만 살아남는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 10년 후 기업생존률이 18.3%라고 한다. 대한상공회의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코스피 상장기업 686개의 평균수명은 약 32.9세로, 하나의 기업이 탄생해서 생존하는 기간이 약 33년이라고 한다.

 

기업 생존율 상황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SK 최태원 회장이 말한 것에 따르면, “변화하지 않는 기업은 서든데스(sudden death·돌연사)할 수 있다고 하며, 기업수명이 15년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일반 기업들에게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한 목회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개척된 교회가 생존할 확률은 10% 미만이고, 아무런 지원 없이 개척된 교회의 생존률은 0.4%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리고, 교회도 기업과 마찬가지로 평균수명이 점점 짧아지고 있고, 갑자기 사라지는 교회가 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창립 20주년 감사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요한계시록 2, 3장에는 소아시아의 7개 교회(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 우리는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대한 말씀을 읽었다. 이들 교회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지금은 현실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 교회 뿐 아니라, 사도 바울이 목숨을 바쳐 세웠던,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교회들 중, 현재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교회는 없다.

 

그렇다고교회라는 존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신비롭게도 교회는 생명체와 같아서 한 교회의 수명이 다해서 없어질지라도 교회는 여전히 또 생겨나며 여전히 살아 숨쉰다. 한 사람의 생명은 일정 기간 존재하다가 사라지지만, 생명 활동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개체 교회는 일정 기간 존재했다 사라지지만, 교회를 존재케 하는 성령의 활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교회의 외형이 아니라, 교회가 지닌 스피릿이다.

 

사람들은 흔히 어느 나라가 잘 사는 나라인지 아닌지를 물을 때, GNP(Gross National Product)를 본다. 그 나라가 어떤 경제활동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유형의 생산을 했느냐를 따진다. 기업들을 평가할 때도, 그 기업이 가진 지적재산, 기업문화, 브랜드 가치등 외적인 것을 먼저 따진다. 교회를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 교회의 유형자산(교회 건물, 교인 수, 재정)을 따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러한 것이 과연 나라와 기업과 교회의 온전한 평가 잣대인가?

 

이러한 의문을 가진 역사적 인물이 있었다. 부탄의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 왕이 그랬다. 1972, 17세의 나이로 부탄 왕국의 왕위에 오른 그는 인도순방을 하는 동안 인도 기자에게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 “부탄은 국내총생산(GNP)이 얼마입니까?” 이런 질문은 받은 부탄의 왕은 사람들이 왜 국가의 총생산에만 관심을 가지고, 국가의 총체적 행복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다. 그래서 그는 GNP가 아닌, GNH(Gross National Happiness) 지수를 말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부탄은 왕추크 왕의 국가총행복의 관심 덕분에 다른 나라가 이루지 못한 국민의 행복을 이룬 나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도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교회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우리는 지금 교회를 교회답게 잘 세워 나가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교회를 세워 나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 교회의 목표를 잘 설정하는 게 중요하다.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이 아니라방향이다.

 

산업혁명 이후 국가에서 GNP의 성장을 목표로 하여 국가를 경영했을 때 생긴 부작용이 너무도 현저하게 드러나 있다. GNP가 성장하여 국민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살게 되었으나,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행복도는 현저하게 하락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GNP 성장과 맞물려 여러가지 물질적 혜택 속에서 교회의 외형적 성장이 있었으나, 요즘엔 교회가 사회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듯하다. 이런 말이 있다. “가톨릭 교회는 성 때문에 망하고, 개신교회는 돈 때문에 망한다.”

 

우리는 어떻게 교회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것인가?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나는 우리 교회가 GNP가 목표가 아니라, GCH(Gross Church Happiness)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총행복! 물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교회가 어느 정도 경제적 부흥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Poverty(가난)는 일종의 병 같아서 존재를 죽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교회가 너무 가난하면 생존하느라 아무 것도 못하는 불쌍사가 벌어진다. (그러니 전도 열심히 하자.)그러나 분명한 것은 Gross Church Product(교회총생산)에 방점을 두면 안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GCH(Gross Church Happiness)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과학기술은 많은 것을 변화시키고 있다. 어느 책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교사의 역할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의 저자는 예전에 교사는 지식전달자였으나, 이제는 멘토, 코칭의 역할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제는 선생님을 통하지 않고도 배울 수 있는 길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You TubeMOOC(Massive Open Online Course)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시대에 나는 목회자의 역할에 대해서도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 중세시대 때, 성경(복음)의 전달자는 성직자가 독점하고 있었다. 라틴어로 된 성경만이 유통되었고, 라틴어로 예배를 드렸으며, 일반 신자들은 라틴어를 몰랐기 때문에 성직자가 해주는 이야기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다. 성직자를 통하지 않으면 성경을 알 수 없었다. 성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했다.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성경에 대한 성직자의 독점을 깬 사건이다. 루터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독일어를 할 수 있는 일반 신자들이 성경을 직접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게 길을 열어주었다. 엄청난 혁명이다. 그 이후, 성경은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지금에 이르렀다. 성경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나라 말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설교말씀은 자신이 속한 교회의 담임목사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담임목사(자신이 속한 교회의 목사)를 통하지 않고도, 설교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You Tube에 들어가 듣고 싶은 설교자의 설교를 마음껏 들을 수 있다. 물론, 나는 High Quality의 설교말씀을 제공하려고 노력하지만 내가 여러분을 향해 말씀을 독점할 수 있는 구조가 더 이상 아니다.

 

나는 목사님 설교만 들어요!’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실제로,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유명하시다는 분들의 설교를 듣고 있지 않은가. 들으시라. 괜찮다.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된다면, 들으시라. 다만, 부작용을 조심하시라. 담임목사의 설교가 아닌, 다른 분들의 설교는 우리 교회의 Context, 그리고 우리 삶의 Context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일례로, 강남이나 분당의 대형교회 목사님이 그 교인들을 상대로 하는 설교의 내용이 이민교회의 작은 교회를 다니는 우리들에게 오히려 어려움을 안겨 줄 수 있다.

 

더군다나, 그분들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의 말씀 듣기는 나의 신앙을 오히려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분들은 여러분을 위해서 단 한 마디도 기도하는 분이 아니다. 아무리 어떤 사람이 옳은 말을 해도, 여러분에게 젖을 물리지 않은 사람은 여러분의 엄마가 될 수 없다. 신앙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신앙은 생명의 깊이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 현장성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니 다른 누군가의 설교를 들으실 때, 이러한 점을 조심하면서 들으시라. (얘기하다 보니,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듣지 말라는 말로 들리는 것 같다. 아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면, 들으시라. 다만, 분별력을 갖고 들으시라 조언한 것이다.)

 

목사의 역할은 이제 지식 전달자(교사)’를 넘어, 인격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교회 모든 구성원의 풍요로운 생명을 위한, 행복을 위한 멘토와 코치의 역할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목사는 소통과 화합의 징검다리이다.

 

한국 사람은 교육에 관심이 많다. 자신 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고등교육을 받는 일에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한다. 그러나, 고등교육을 받는 의미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고등교육을 받는 의미는 일자리를 찾아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필요한 일자리, 이 사회에 필요한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함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펙 쌓으러 유학 나온 사람들이 가장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목회자 세계에서도 보면) 스펙 쌓아서 기성교회(좋은교회) 들어가려고 한다. 스펙 쌓아서 세습하려고 한다. 나는 유학 나와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내가 공부하는 이유와 목적은 분명하다. 일자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필요한, 이 시대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창출(세워나가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나는 목회학석사학위를 마치고, 33살에 과감하게 개척했다. (나는 내 젊음을 바쳐 이 현실 세계에 교회 하나를 세웠다. 너무 감사하고 뿌듯한 일이다. 그 일을 생각하면, 내가 사도 바울이 된 것처럼 기쁘다.)

 

내가 2년전 이곳에 오기 전, 교회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이곳에 있는 어느 교회에도 원서를 넣지 않았다.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곳에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지금 와서 말이지만, 이곳에 올 때, 내가 갈 수 있는 교회가 3군데 더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곳에 서 있다.) 교회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누군가는 내가 한 일에 대한 가치(또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를 이곳으로 불러주신 것이라 믿는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됐다라는 말을 쓴다.)

 

나는 기존의 일자리를 찾아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시대에, 이곳 Bay지역에 세우기 원하시는 교회를 창출(세워나가기)하기 위해서 왔다고 믿는다. 이것은 나만의 과제가 아니라, 우리 교회로 부름을 받은 우리 모두의 과제가 아니겠는가?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 보다, 아는 것을 얼마나 실행하는 실행력이다. 우리는 세상적으로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우리는 신앙적으로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경공부를 하는 이유는 아는 것을 늘려 가기 위함이 아니다. 성경공부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을 차별하기 위함도 아니다. 성경공부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죄책을 심어주기 위함도 아니다. 성경공부를 더 하나, 안 하나,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우리는 이미 모두 주님의 자녀이고, 세화인이다. 우리가 함께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는 아는 것을 더 확실히 알아, 실행하기 위함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에베소 교회는 많은 칭찬을 받는다. 1) 실천과 수고와 인내가 다른 지역의 교회와는 구별된 헌신적인 교회였다. 2)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도덕적인 기준이 높았던 교회였다. 3) 자칭 사도라고 주장하는 거짓 사도들을 검증하고 검증되지 않은 자들을 퇴출했던 신학적인 교회였다. 4)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오래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진실하고 성실한 교회였다. 5) 육체의 악행을 조장한 니골라 분파에 동화되지 않은 경건한 교회였다. (한병수, <교회란 무엇인가, 에베소서 강해>, 20)

 

다시 정리하면, 에베소 교회는 헌신적인 교회, 도덕적 기준이 높았던 교회, 신학적인 교회, 성실한 교회, 경건한 교회였다. 정말 멋진 교회다. 이런 교회를 지금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주님께 이러한 책망을 받는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

 

나는 이러한 에베소 교회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헌신적인 교회, 도덕적 기준이 높았던 교회, 신학적인 교회, 성실한 교회, 경건한 교회인데, 막상 그러한 교회를 세워 나가면서 그들에게는 행복이 없었던 것 아닌가. 왜냐하면,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장 핵심적인, 목표 그 자체인, ‘사랑이 그 교회에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사랑하면 성장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퇴보한다. 세상의 지식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성장시킨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하라.”

 

우리도 에베소 교회처럼 헌신적인 교회, 도덕적 기준이 높은 교회, 신학적인 교회, 성실한 교회, 경건한 교회를 세워 나가면 좋겠다. 그러나, 아무리, 헌신과 도덕과 신학과 성실과 경건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교회가 된다. 교회총행복의 알파와 오메가는 사랑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교회를 세워 나감에 있어, 어떠한 순간이든, 사랑을 선택해야 한다.

 

창립 20주년 감사 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하나님과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싶다. I am not here to preach you. I am not here to teach you. I am not here to heal you. But, I am here to love you. 물론 설교와 가르침, 그리고 치유는 목회자의 고유한 영역임으로 게을리 하지 않겠지만, 나는 그보다, 더 어려운 일,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일을 위해 쓰임 받고 싶다. 그 일은 바로, 사랑하는 일이다.

 

이것은 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하나님은 어떠한 일을 시키기 위해 우리를 교회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고 부르신다. 나는 사랑이 교회총행복이라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만남이 거듭될수록,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러한 고백이 우리 입술에서 터져 나와야 한다고 믿는다. “형제님, 자매님,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일에 실패한 교회는 에베소 교회처럼 책망을 받고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기쁨이 충만한 교회는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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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8. 13. 11:20

예수, , 영생

(요한복음 6:51-58)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성경은 왜 기록되었을까? 사도들(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가 누구인가를 증언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또는 비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성경이 증언하는 예수가 누구인지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사도들이 기록했다. 사도란 누구인가?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선택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흔히 그들을 열 두 사도라고 부른다. 그리고, 나중에 바울 자신도 다메섹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선택된 사도라고 주장한다.

 

도의 직접적인 뜻은 히브리어의 샬리에와 같다. , 영어로는 messenger의 뜻을 가지고 있다. 구약의 선지자와 같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사도는 사적인 신분을 가지지 않고, 공적인 신분을 가진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자기 자신의 뜻이나 의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선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을 공직자라고 부른 것과 같다. 공직자는 스스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선택하여 뽑아주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공직자가 법에 의해 어떠한 권위를 가지듯, 사도는 성령의 법에 의해 어떠한 권위를 갖는다. 사도는 교회를 세우고 다스리는 권위가 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말하고)하고 기록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의 법에 의해 부여된 권위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다스렸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다. 우리는 현재 그들이 기록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읽고 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는 예수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I am the living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If anyone eats of this bread, he will live forever.)”(51).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의 중요 단어와 그들의 관계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예수, , 그리고 영생이다.

 

우선 분명한 것은, 사도는 예수를 구약(출애굽기)에 나오는 만나와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만나는 먹거리였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그 광야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도록 한 것은 하나님께서 매일 같이 하늘에서 내려 주신 만나였다. 구약성경에서도 명시되고 있는 바, 만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고, 그것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렸다.

 

사도가 예수를 만나와 연결시켜 설명하는 것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말할 때, 우선적으로 예수는 생명이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먹을 때만가능하다. 그래서 사도는 예수를 먹는 것, 이라고 명시한 뒤, 그것을 먹으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 정황이 52절에 나온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이러한 오해가 실제 한국 기독교 역사에도 있었다.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이런 소문이 파다했다. “야소교인들은 사람의 살과 피를 먹는 식인종이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얘기지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반응이나, 한국 기독교의 초기 시기의 반응이나, 또한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모르는 현대인들의 반응이나, 다르지 않다. 어떻게 살과 피를 먹을 수 있나?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초대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님을 먹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실천하고 증언하기 위해서 성찬식을 발전시킨다. 성찬식에서 쓰이는 빵과 포도주는 성찬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 순간 더 이상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예수의 살과 피가 된다. 그래서 초대교회부터 성찬식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복음을 전하는 핵심 전례가 되었다. 성찬식에서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받아 먹는 게 아니라, 예수의 살과 피를 받아 먹는 것이다. ? 그것이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영생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잘 모르거나, 오해한다는 것이다. 대개 영생은 영어로 ‘eternal life’라고 한다. 생명(life)‘eternal’이라는 게 붙어서영원한 생명이라고 번역한다. ‘eternal’은 헬라어 원어로 ‘eis ton aiona’이다. 사도가 이 단어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죽은 이후의 영원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죽은 후 천국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원을 미래적인 사건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다.

 

‘Eternal, eis ton aiona’의 의미는 신적인이라는 의미이다. ‘영원은 미래적인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인 사건이다. , ‘영생하리라죽은 후 영원히 살 것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생명을 살 것이다라는 뜻이다. 사도가 말하고 싶은 것을 자기 마음대로 이해한 사람과 사도가 말하고 싶은 것을 온전히 이해한 사람의 삶은 같을 수 없다.

 

영생을 미래에 일어날 사건으로 생각하는 사람, ‘죽은 후 천국에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벌어지는 일은 현실부정이다. 그들에게 현실은 악한 것이고, 현실은 벗어나야 하는 것이고, 현실은 가치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의 일에 대하여 등한시하고, 죽은 후에 천국가는 일만 생각한다.

 

대개 이러한 유혹에 빠지는 일은 현실 세계에서 고통을 겪거나, 영혼의 고독, 영혼의 굶주림과 갈증을 심하게 겪는 이들에게 나타난다. 사기꾼이 속여 먹기 가장 좋은 사람은 누구인가? 절실한 사람이다. 건강이 나빠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 가장 속여 먹기 좋은 것은 약장사이다. 약장사는 이 약을 먹으면 병이 금방 나을 수 있다고 속인다. 영혼이 곤고한 사람들은 이단에 쉽게 빠진다. 그래서 그들은 가정과 직장, 친구들을 버리고, 즉 현실을 부정하고, 영생을 보장하는 그 집단에 들어가서 산다.

 

삶의 여러 가지 문제가 절실할수록 조심해야 한다. 평소에는 시덥지 않게 보이던 것도, 절실한 상황이 오면 그것이 나의 생명을 구원해줄 것처럼 왜곡되어서 보이는 법이다. 쉬운 예로, 평소에는 로또 전광판이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으면 로또 전광판이 강력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로또를 사는 데 열광한다.

 

삶의 문제가 절실할수록, 가장 좋은 솔루션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문제가 절실할수록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기도만 하는 것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그리고, 평소에 건전하고 선한 공동체에 속해서 그들과 사귐을 가지며 그들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신뢰를 쌓아야 한다. (내가 우스겟소리 같이 한 이야기를 잘 기억해 두라. “교회는 집 가까운 곳에 있는 데를 다니는 게 아니라, 성경에서 가까운 곳을 다녀야 한다.”)

 

사도가 말하는 영생은 미래적인 의미가 아니라, 현재적인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으면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면서 살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 여기에서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 여기에서 영혼의 고독, 영혼의 굶주림과 갈증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줄 아는 능력이 생긴다는 뜻이다.

 

사도가 말하는 ‘eternal’의 속성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사도(적 공동체)요한 사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한 사도(적 공동체)에서 말하는 ‘eternal’, 즉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그러므로 예수라는 만나’,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에 접근하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통찰이 있다.

 

사랑의 역사(work of love)

 

언제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타자(상대방, 또는 사물)를 착취하지 않게 될까? 온갖 착취가 행해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어떠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분명 이 세상과는 다른 '착취가 없는 세상'이다. 착취가 자취를 감출 때는 사랑이 지배할 때뿐이다. 그리스도로 온전히 옷 입는다는 것은 그의 사랑이 우리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삶의 방식이란 '사랑의 역사(work of love)'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임하는 종말에는 이 세상의 모든 불의한 착취가 사라지겠으나, 종말을 기다리며 사는 우리들이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는 일에 힘써 그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 외에, 우리에게 어떠한 희망이 존재하겠는가.

사랑하는 일을 멈추느니, 차라리 나에게 죽음을 달라.

(장준식)

 

사랑의 능력을 가진 자, 사랑의 능력을 회복한 자는 현실을 도피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가진 자는 영혼의 고독, 영혼의 굶주림과 갈증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사랑은 결핍이 아니라 넘침이고 나눔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마음에 충만한 자는 가정을 버리고 떠나지 않고 가정을 사랑으로 잘 섬긴다. 사랑이 마음에 충만한 자는 세상에 무관심하지 않고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바라보며 공감할 줄 알고, 그 아픔과 고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무엇이라도 헌신하려 한다. 사랑이 마음에 충만한 자는 자기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이를 착취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이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준다.

 

우리는 사도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고 있는가. 우리는 사도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깨닫고 있는가. 예수는 생명의 떡이다. 그 떡을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 그 영생이란 죽은 후 가는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말한다.

 

어느 누가 주는 소위 생명의 떡을 먹었더니, 가정에 소홀하게 되고, 가정을 버리게 되고, 세상의 고통에 무관심하게 되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게 되던가? 그것은 사이비가 주는 떡이다. 그리고, 지금 당신의 영혼은 곤고한 것이다. 그러니, 그 떡을 토해내라. 그리고 자신의 영혼의 곤고함을 위해서 기도하라.

 

사도가 주는 생명의 떡은 사랑의 능력을 갖게 해주고, 사랑의 능력을 회복시켜 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가정을 위해, 교회를 위해, 세상을 위해, , 이웃을 위해 나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게 한다. 생명이 풍성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나누어 줄 사랑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사도가 주는 생명의 떡을 먹으라. 참 생명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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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8. 10. 00:26

성도의 자기 인식

(벧전 2:1-10)

 

키에르케고르와 동시대에 살았던 덴마크의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주옥 같은 다수의 작품을 세상에 남겼다. 그의 작품은 그의 삶의 반영인 경우가 많은데, 그 중에서 <성냥팔이 소녀>는 가난했던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쓴 것이고, <눈의 여왕>은 나폴레옹 전투에 참전했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자 눈의 여왕이 데려간 것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쓴 것이고, <미운 오리 새끼>는 작가 데뷔 후에 그의 출신 때문에 홀대 받던 시절을 생각하며 쓴 작품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중에 <벌거숭이 임금님>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명작이다. 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임금님을 백성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환호했지만, 그 중에서 한 아이가 현실을 말한다.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사람들은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본대해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살지만, 어린 아이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대로 말할 줄 아는 순진한 마음과 용기를 지녔던 것이다.

 

<미운 오리 새끼>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명작이다. 한 백조가 오리 알 가운데 섞여 있어 오리들과 같이 태어나고 오리들과 같이 성장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 오리가 아니라 백조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기쁨과 자유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리들 가운데 섞여 오리들에게 구박을 받으며 자란 백조의 서러움이 한 순간에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진실하게 인식하고 있는가. 우리는 백조임에도 불구하고 오리 가운데 섞여서 온갖 구박을 받으며, 신세 한 탄 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성도의 자기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자기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온전히 인식한 자만 자신의 신분에 걸맞게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오리 가운데 섞여 자신이 오리인 줄 잘못 알고 살았던 백조는 어느날 백조들의 모습에 반해, ‘나도 저렇게 우아한 백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그런데, 한 백조가 다가와 오리인 줄 착각하고 있는 백조에게 너는 백조야라고 말해 주었을 때,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처럼 훨훨 하늘을 날아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오늘 말씀은 성도, 즉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성도의 자기 인식이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3)” 나는 돈까스를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맛보았다. 형 친구 만나러 대치동에 따라 갔다가 그때 먹은 돈까스의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중학교/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가장 많이 간 곳이 돈까스 파는 식당이었다. 은광여고 입구, 말죽거리에 있는 뜨라레라는 곳에서 돈까스를 엄청 먹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큰 아들이 돈까스를 엄청 좋아한다. 그것까지 닮은 게 신기하다. 물론, 지금은 내가 나이 들어서 그런지, 돈까스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무엇인가 맛보아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나면, 우리는 그것을 맛보기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1a). 주의 인자하심을 맛 본 자들은 더 이상 몹쓸 말과 몹쓸 짓을 하는 세상사람들처럼 살 수 없다. 돈까스를 맛본 아이가 계속 돈까스를 찾듯, ‘주의 인자하심을 맛 본 사람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되어 있다. 거기에 주의 인자하심이 가득 들어 있기 때문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듬뿍 들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고 자란 성도는 엄마의 젖을 먹고 자라나는 아이들처럼 자란다. 그의 자람은 구원에 이른다. 구원에 이른 자는 이제 신분/정체성이 완전히 바뀐다. 나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뛴다.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9).

 

누군가에게 택함을 받는다는 것을 참 고맙고 신비한 일이다. 나는 동물의 왕국 보는 것을 좋아하는 데, 숫사자들이 암사자에게 택함을 받기 위하여 싸우는 모습을 보면 처절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싸움에서 승리한 숫사자만이 암사자에게 택함을 받는데, 싸움에서 진 숫사자는 갑자기 그 위용이 사라지고 쥐구멍으로 들어갈 것 같은 자세와 감정을 보인다. 누군가에게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은 참 비참한 일이다.

 

그런데, 성도는 맹수처럼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한 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것이다. 무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고맙고 신비한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는 것에 대하여 그렇게 큰 고마움과 신비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사람들은 누군가(사람이나 조직/회사)에게 택함 받으면 엄청 기뻐하고, 택함 받지 못하면 분노를 보이지만, 하나님께 택함 받은 것에 대하여 기뻐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택함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다.

 

본인이 또는 자녀가 좋은 학교 /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구원 받은 것처럼 기뻐한다. 그런데, 나를 구원해 주는 것은 좋은 학교나 좋은 직장이 아니다.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유익을 가져다 줄지, 아무도 모른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인간사는 잠시의 기쁨과 만족을 줄지 모르지만, 그것이 우리의 생명 자체를 구원하지 못한다.

 

인간사가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러한 것들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택해 주신 그 은혜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그러한 것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한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9b).

 

성도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10). 이러한 자기 인식이 확실한 성도(그리스도인)는 다른 것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나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나를 긍휼을 입은 자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삶을 산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순간순간, ‘나는 누구인가를 수없이 물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께 택함 받은,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이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우리는 긍휼을 입은 자들이다. 이러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자는 결코 세상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삶이 힘에 겨워, 비록 처지는 머슴 같을 때가 많아도,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마님처럼 배짱과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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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8. 6. 15:29

man-hû (-) - Manna (만나)

(출애굽기 16:2-4, 9-15)

 

출애굽기에서 홍해를 건너는 이야기는 14장에 나온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출애굽 시키실 것에 대한 의지를 전하시고, 마지막 열 번째 재앙 때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신 후, 결국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다.

 

어딘가에 묶여 있던 곳 (유형이든 무형이든)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쉽지 않다.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에도 큰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따르는 것 만이 살 길이다.

 

이스라엘은 어렵사리 출애굽하여 길을 나섰다. 그러나, 그 뒤에서 애굽 군대가 쫓아왔다. 그러한 상황에서 망연자실할 만한 일이 발생한다. 길 앞에 바다(홍해)가 놓여 있었다.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한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홍해를 가르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예상치 못한 도우심에 힘입어 무사히 출애굽에 성공한다.

 

출애굽 사건의 긴박함을 전하는 14장이 끝나고, 이스라엘은 이제 살았구나안도의 한 숨을 쉰다. 그리고 입술에서 저절로 찬송이 나왔다.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의 입에서는 감사와 찬양이 저절로 나오는 법이다. 모세와 이스라엘의 감사와 찬양의 시가 15장에 나온다. 모세와 남자들만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미리암과 여인들도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른다. 그야말로 모든 이스라엘이 이제는 살았구나하며 안도의 한 숨을 쉬며 기뻐했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들어선 곳은 수르 광야라는 곳이었다. 광야에 이르자, 그들의 입에서 나오던 감사와 찬양의 노래는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그 입에서 원망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수르 광야의 마라라는 곳에 이르러 그곳에서 쉬면서 물을 마셨는데, 그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다.

 

그리고, 장면은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출애굽기 16장으로 넘어간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있던 엘림을 떠나, 신 광야로 들어선다. 그때가 출애굽을 한지 45일쯤 된 때였다.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또다시 원망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원망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3).

 

우리는 흔히 이렇게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실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철 없다 거나, 나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원망(탄식)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정말 나쁜 것은 힘들고 어려운 데도 (주님 앞에 나아와) 원망(탄식)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원망과 탄식을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연약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일종의 권리 또는 의무 같은 것이다.

 

왜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있는데, 원망(탄식)을 하지 않는가? 성경은 온갖 원망(탄식)으로 가득 차 있다. 대표적인 성경이 시편이다. 시편은 원망(탄식)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실 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며, 과부와 재판장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과부는 원한이 있어 재판장에게 매일 같이 나아가 재판장에게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조른다. 결국 재판장은 의로워서 과부의 원한을 풀어준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이 찾아오는 과부가 귀찮아서 그의 원한을 풀어준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18:7-8).

 

힘들어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것을 마음에 담고 있으며 속앓이 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와 원망을 늘어 놓으라. 그 문제가 풀릴 때까지 주님 앞에 나아와서 원망을 늘어놓으라. 괜찮다. 주님 앞에 원망을 늘어 놓는 일은 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다. 주님께서 속히 우리의 원망에 응답해 주실 것이다.

 

(돈이 필요한가? 은행 찾아가지 말고, 주님 앞에 원망을 늘어 놓으라. 몸이 아픈가? 병원만 가지 말고, 주님 앞에 원망을 늘어 놓으라. 마음이 아픈가? 상담사나 친구만 찾아가지 말고, 주님 앞에 원망을 늘어 놓아라. 속상한 일 있는가? 엄한 사람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주님 앞에 원망을 늘어 놓아라. 나는 우리 교회가 원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거든, 차라리 나를 찾아와서 원망을 늘어놓아라. 그리고 함께, 주님께 나아가 그 원망을 늘어 놓아보자. 주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지 않겠는가. 나는 우리 교회가 너무 점잖고 조용한 것이 마음 아프다. 교회 의자를 너무 뽀송뽀송 하게 놓아두지 말고, 교회 의자를 눈물로 적시라. 그런 교회가 좋은 교회, 그런 교회가 하나님이 긍휼하게 여기시는 교회가 아니겠는가.)

 

4절 말씀을 보라. 광야에서 물이 없어 원망하고, 먹을 게 없어 원망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벌을 내리시는 게 아니라, 그들의 원망을 들으시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려 주신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4). 하나님은 우리의 원망을 꾸짖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원망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면, 원망이 전혀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진짜 문제인가? 이스라엘에게 무엇이 문제였는지,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는 다음 구절에 나온다. 하나님은 그들의 원망에 응답하셔서 그들에게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4).

 

하나님이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 주시며그들에게 내리신 명령은 이것이었다.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게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16). 그리고 이어서 이런 명령을 내리신다.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19).

 

이러한 명령을 주신 후,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하늘에서 양식을 비와 같이내리신다. 그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만나이다. 만나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잘 못한 일, 또는 우리가 잘 못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우선, 하나님은 그들에게 약속을 지켜,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보내 그들에게 고기를 먹게 하시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내리게 하고, 그 이슬이 마른 후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은 것이 놓이게 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그것이 무엇인지 못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15절을 보면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만나의 히브리어는 ‘man-hû -이다. ‘man’ ‘from’이라는 뜻이고, ‘hû’‘he or it’이다. 히브리학자들은 ‘man-hû’‘what is it?’ 이라고 번역된 것에 대해서는 이집트어의 영향이 컸을 거라고 말한다. 그들은 지금 이집트(애굽)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중에는 잡다한 족속, 이집트 사람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이집트어로 ‘man’ ‘what’이다. 그리고 ‘hû’ ‘it’이다. 그래서 ‘man-hû’‘what is it?’이라고 번역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히브리어로는 명확히 다르게 번역될 수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man’ ‘from’이라는 뜻이고, ‘hû’‘he or it’의 뜻이기 때문에, 이른 번역하면, ‘From Him’이 된다. 여기서 ‘Him’은 누구를 가리키겠나?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이다. ,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그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것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 지 그들은 몰랐다.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비 같이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 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이 이것이 무엇이냐 (what is it?)”이라고 물었을 때, 모세는 그들에게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고, 콕 짚어서 이야기를 해 준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원망을 해서 하나님께서 그 원망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응답을 해 주셨는데, 그래서 지금 내 삶 가운데 만나가 지천에 널려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으로 내려 주신 만나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원망을 원망으로 머물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원망을 감사와 찬송으로 바꾸어 주신다. 문제는 우리의 원망을 들으시고 그 원망을 감사와 찬송을 바꾸어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내려 주신 만나를 우리가 몰라보고, 여전히 원망하며 산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이것 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뒤,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만나를 거두는 법에 대하여 지침을 내리신다. 그 지침은 간단하다. 각자 먹을 만큼만 거두고, 절대로 내일을 위하여, 또는 필요 이상으로 먹기 위하여 남겨두지 말라는 것이었다. ? 하나님은 만나를 오늘만 내리실 것이 아니라, 그들이 광야의 여정을 마치는 동안, 매일 같이, 성실하게 내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내일을 위하여, 더 많이 먹으려고, 만나를 불필요하게 모은다. 그러자,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가? 그 만나에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다. 그들은 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만나를 더 거두어들였을까?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4).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거두어 들이면서 서로 이렇게 속삭였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그분이 어떤 분인 줄 알고 우리가 믿냐? 이 만나가 내일 또 내리리라는 법이 어디에 있어? 이 광야 한 가운데서나는 못 믿겠어! 그러니, 나는 내일을 위하여, 그리고 내 배를 더 부르게 하기 위하여 모을 수 있는 한 많이 모을거야!.

 

이처럼, ‘만나(만후)’는 믿는 자에게는 ‘From Him,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뜻이 되지만, 믿지 못하는 자에게는 ‘What is it?, 이게 뭐야?’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요한복음은 6장에서 예수님을 만나와 대비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증거한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48-5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내렸던 만나와 비교될 수 없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이다.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From Him)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안 자들은 그 분을 따랐다. 그 분을 믿었다. 그래서 그분의 제자가 되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떡인지 몰라보고, 그분에게 -, What is it? 이게 뭐야?’라고 한 사람들은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man-hû -’, 지금 여러분 주변에 주님께서 놓아주신 만나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알아보고 있는가? (배우자, 자녀, 교회, 목회자, 친구, 직장, 동료 등, 이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내려 주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만나인가, 아니면, 어디서 온지 모르는 이게 뭐야?’의 만나인가. 혹시, 원망스러운 것이 있거든, 그 원망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하라. 그러면, 주님께서 그것이 무엇인지, 밝히 알려주실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은 원망을 감사와 찬송으로 바꾸어 기쁨으로 살고 있는가? 여러분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온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알고, 그분의 살과 피를 먹으며,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주님은 우리의 원망(탄식,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만나를 내려 주시는 신실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여러분, 두려워하지 말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으라.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평안히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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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8. 3. 15:44

: 마음의 초상

(야고보서 3:1-12)

 

야고보서는 믿음와 행함의 관계에 대하여 말한다. 그 관계란, ‘믿는 바 대로 행하라, 또는 믿는 바 대로 살라라는 뜻이다. 행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믿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야고보서가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특별히 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주장의 일관성을 생각해 볼 때, 말은 믿음과 큰 상관관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저명한 철학자인 에머슨은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말도 행동이고 행동도 말의 일종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말은 행동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의 관계와 믿음과 말함의 관계는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말에 관한 여러 격언을 알고 있다. 그 중에서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것들을 몇 개만 보면, 다음과 같다.

1) 죽마고우도 말 한마디에 갈라진다

2)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3) 말 많은 집은 장 맛도 쓰다

4) 살은 쏘고 주워도 말은 하고 못 줍는다

5) 말은 행동의 거울이다

6) 혀 아래 도끼 들었다

7) 입과 혀라는 것은 화와 근심의 문이요, 몸을 죽이는 도끼와 같다. – 명심보감

 

티베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말이란 토끼와 같이 부드러울수록 좋다.” 말에 대한 이러저러한 속담이나, 그리고 야고보서에서 신앙생활에 있어 말조심을 특별히 강조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잘 보여준다. 약간 길지만, 중요한 부분이므로 인용해 본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치적 동물이다.… 어째서 인간이 다른 모든 동물들, 그리고 꿀벌이나 군집 생활을 하는 다른 동물들보다 한층 더 정치적인가 하는 점도 분명하다.… 동물들 중에서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소리라면 그것은 기쁨이나 괴로움을 표시하는 징표이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언어는 유리한 것이나 해로운 것, 따라서 올바른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점, 즉 선, , 올바름, 사악함 등에 대해서 지각을 가진다는 점이 다른 동물에 비해서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정이나 국가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선, 악 등에 관한 공통된 지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의해서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은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이 공동체를 떠나서 살 수 없는 두 가지 이유 중, 첫째는 생존 때문이고, 둘째는 인간의 인간 됨 때문이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할 수 없다. 서로 돕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들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자기 혼자 장 봐서 자기 혼자 밥 먹고 살 수 있으니,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시장의 구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사람은 공동체 내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 위의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주장하는 바, 언어는 인간의 고유 능력이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언어나 의사소통, 또는 윤리적 실천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능력을 고유하게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사람이 공동체 내에서 성장하지 않고 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자기 실현을 할 수 없게 된다.

 

말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기 실현이다. 그런데, 그 말은 반드시 공동체를 세우는 덕스러운 말이어야 한다. 말은 공동체를 세워야지 무너뜨리면 안 된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자기 자신도 더 이상 사람으로서의 자아 실현을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통찰을 신앙에 적용해 보면, 신앙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서 하는 것이다. 신앙인의 자아 실현(이것을 성서적 용어로 표현하면 구원인데)은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며, 그것은 인간의 고유 능력인 언어와 의사소통, 그리고 윤리적 실천이 원활하게 이루질 때 충만해진다.

 

쉽게 말해서, 야고보서가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를 세우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충고한다.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선생이 되면 말을 많이 해야 하는데, 말을 많이 하다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말실수를 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선생(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말을 할 때 지혜가 있어야 하고 절제가 있어야 하며 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 하기 전에 그 입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반드시 해야 한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온전한 사람(perfect man)’은 소위 많이 배우고, 집안 좋고,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온전한 사람말에 실수가 없는 자이다(2).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간과한다. 그러다 보니, 학력을 높이는 일에, 돈을 많이 버는 일에, 외모를 가꾸는 일에 시간과 물질을 투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온전한 사람’,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이다.


야고보서는 말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세 가지를 예로 든다. (horse)과 배와 불이 그것이다. 말을 타기 위해서 사람들은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말을 조정한다. 배를 움직이는 것은 작은 키이다. 혀도 작지만 인생 전체를 세울 수도 있고 망칠 수도 있다. 작은 불이 온 산을 태운다. 그처럼 작은 혀가 온 몸을 더럽힐 수도 있고 온 몸을 불사를 수도 있다.

 

야고보서는 혀 아래 도끼 들었다는 말과 같은 말을 한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8). 우리는 온갖 동물을 길들여, 그것을 통해서 이익을 얻고 산다. 지금은 환경단체의 맹렬한 비판 때문에 없어졌지만, 씨월드에 샤무 쇼(Shamu Show)가 있었다. 우리는 바다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포식자인 범고래(Killer Whale)를 길들여 쇼를 만드는 위대한 인간이지만, 정작 자기 혀를 길들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기도 하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음을 깨닫고,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며, 형제자매(이웃)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으로 산다고 아버지를 찬송하면서, 어떻게 나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형제자매(이웃)을 저주 할 수 있는가. 한 입에서, 어떻게 찬송과 저주가 동시에 나올 수 있는가. 자연의 샘물은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동시에 내지 않는다. 무화과나무는 무화과 열매를 맺고,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를 맺는다.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정말 대단한 능력이 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동시에 나온다.

 

그것은 자연보다 뛰어나다는 증거일까, 아니면 자연보다 못하다는 증거일까. 아마도, 자연보다 못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리는 샘물보다 못하고, 무화과나무, 또는 포도나무보다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보다 뛰어난 존재가 되기보다는, 그저 자연(하나님의 피조물)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은 마음의 초상이다” (J. 레이).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다. 그러나, 방법이 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의 생김새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이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외모는 자기 자신이지만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바로 말에 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인간은 입이 하나 귀가 둘이 있다. 이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 더하라는 뜻이다.” 결국 이 말도, ‘말조심하라’, ‘필요한 말만 하라는 뜻이다. 야고보서는 말한다. ‘믿는 바 대로 행하라, 믿는 바 대로 살라.’ 우리가 믿는 바는 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말은 마음의 초상이요, 마음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온전한 사람(perfect man)’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자기의 혀에 마땅히 굴레를 씌울 줄 아는 믿음의 자녀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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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7. 17. 05:49

오벧에돔은 왜 복을 받았을까?

(삼하 6:1-19)

 

여호와의 법궤는 블레셋 족속과의 전투에서 빼앗긴 후 버려져 있었다.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긴 일로 엘리 제사장의 가문은 망하고,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아간 블레셋에게는 재앙이 닥쳤다. 신앙(여호와의 법궤)을 빼앗긴 자도 망하고, 신앙을 빼앗은 자도 망한다! 여호와의 법궤 이야기는 사무엘상 6장까지 나온다. 그 이후로, 여호와의 법궤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다, 본문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여호와의 법궤 이야기가 다윗의 이야기와 더불어 다시 등장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다윗은 신앙에 기대어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신앙은 삶을 일으켜 세우고, 가정을 일으켜 세우고, 교회를 일으켜 세우고,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신앙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버려져 있던 여호와의 법궤를 다시 제자리로 가져다 놓은 것은 다윗이었다. 다윗과 같은 은혜가 우리의 삶에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버려진 신앙을 제자리에 옮겨다 놓는, 축복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신앙을 구석에 처박아 두고 살지 말라.

 

여호와의 법궤를 옮겨 놓는 일은 세 단계에 걸쳐서 진행된다. 첫째, 다윗이 삼만 명을 택한 백성을 거느리고 아비나답의 집을 찾아가 그곳에서 법궤를 가지고 나오는 이야기, 둘째,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 , 웃사의 잘못으로 인해 법궤가 곧바도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가는 이야기, 그리고 셋째,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다윗이 다시금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가지고 나와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야기 순으로 진행된다.

 

본문의 이야기를 봐서 알지만, 좋은 마음, 거룩한 마음을 가지고 무슨 일을 진행해도 그것이 생각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을 때가 있다. 대개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슨 일이든, 인내와 지혜와 믿음과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첫 단계 이야기에서 다윗은 법궤를 운반해 오기 위해 장정 3만명을 선별한다. 두 사람에서 네 사람만 있으면 들 수 있는 법궤를 옮기기 위해 장정 3만명이나 필요할까? 효율성을 따지는 게 아니라, 중요성을 따져야 한다. 다윗은 그만큼 여호와의 법궤를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한 두 사람만이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집안의 모든 사람들, 모든 이들, 모든 민족이 해야 하는 일이다.

 

교회는 한 두 사람의 열심, 헌신으로 세워지면 안 된다. 교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세워 나가야 한다. 그만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소중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 대표만 보내서 그 일을 처리하는가? 그렇지 않다. 집안의 모든 이들이 그 일에 동참한다. ?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중요하고 소중한 일이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참여하고 동참해야 한다.

 

예배는 여호와의 법궤를 운반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예배는 언제든지 모든 성도들이 나와 드리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출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문제, 신앙의 중요성의 문제이다. 우리가 이러한 저러한 일 때문에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 예배에 참석하지 못할 때가 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예배에 나온 이들은 지금 이곳에 있지 않은 지체들까지도 품는 마음으로, 그들이 모두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예배 드리고 있다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들도 비록 몸은 지금 다른 곳에 있지만, 성령 안에서 그 영혼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거룩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영화롭고,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는 풍요로운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법궤를 빼앗길 당시 전쟁터에서 죽은 장정이 3만명이라는 사실이다. 그때와 똑같이 3만명을 이끌고 법궤를 찾으러 갔다는 것은 흥미롭고 의미심장하다.

 

본문에서 우리의 흥미를 가장 끄는 이야기는 법궤를 옮기는 중에 발생한 웃사의 죽음사건이다. 웃사는 왜 죽었을까? 웃사는 최선을 다 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다. 죽고 말았다. 웃사의 잘못은 무엇일까?

 

트럼프 대통령이 영국 방문 중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본의 아닌 듯 하나) 무례를 범해서 영국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그 이유는 영국 왕실 의장대의 사열을 받을 때 트럼프 대통령이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앞 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여왕의 앞길을 막는 것는 영국 사회에서는 굉장히 무례한 일이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인 필립공도 공식행사에서 함께 걸을 때 몇 발짝 뒤에서 따른다.

 

웃사의 잘못은 그와 같다. 여호와의 가는 길을 막아섰다. 여호와께 벌어지는 일을 자신이 조종, 또는 조작하려 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보기에 좋아보이는 상태로 이끌려 했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법궤가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놓아두었어야 하는데, 웃사는 그것이 자신이 보기에 좋아 보이지 않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무슨 일을 할 때, 누구를 위한 열심인가를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부흥회를 자주 다니시는 어떤 목사님의 일화이다. 그 분은 부흥회를 가면 교회에서 제공해주는 숙소에서 자지 않고, 부흥회 기간 내내 집회가 열리는 본당에서 자면서 부흥회를 인도하신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분은 교인들에게 자신과 함께 교회에서 함께 자면서 철야할 사람을 모집한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참 열심인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은 누구를 위한 열심인가? 어떤 교인 한 명은 나에게 그 목사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분이야말로 정말 훌륭한 부흥강사라는 듯한 뉘앙스의 말을 했다. 그러면, 부흥회 하면서 교회에서 자는 강사는 훌륭한 강사이고, 교회에서 제공한 숙소에서 자는 강사는 부족한 강사인가?

 

대개, 열심은, 자기의, 자기만족일 때가 많다. 그 분도, “나는 부흥회 기간 동안 여러분이 제공한 숙소에서 자기 않고, 교회의 맨바닥에서 자면서 기도합니다!”라고 이야기는 것은, ‘나는 이런 부흥사야!’라는 자기의와, 그렇게 해야 자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자기만족이 있는 것이다.

 

나 스스로도, 지난 13년간의 담임목회를 돌아보며, 반성할 때가 많다. 내가 정말 열심히 했는데, 그게 어떠한 열심이었나. 자기의와, 자기 만족을 위한 열심은 아니었다, 많은 반성을 하게 된다.

 

담임목회 초년 생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설교를 열심히 준비했다. 그때 설교의 주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었다. 그 말씀을 열심히 전하면서, 나는 거기에 내 의를 실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그랬다. 나는 나 스스로 부모를 잘 공경하고 있다는 자기의를 내세워 (사실 그렇지도 못하면서), 설교를 통해서 부모를 잘 공경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난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목소리에 너무 힘을 주어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전했다.

 

어떤 결과가 왔을까? 부모 공경을 잘 안 하던 사람이 회개하면서 부모 공경을 잘 하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던 집사님 가정이 시험에 들어서 교회를 떠났다. 그러면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시집 식구랑 잘 지내지 못하는데, 제가 시부모님을 잘 못 모셔 죄송합니다.”

 

담임목회 초년생 때, 개척교회 할 당시, 한 사람이 귀하고 아쉬운 그때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열심히 교회 일을 하시던 집사님 가정을 잃고, 크게 깨달았다. ‘나의 의를 드러내는 일과, 자기만족에서 오는 열심은 아무런 덕이 되지 못하는구나.’ 그 이후, 설교하면서 나의 의, 나의 만족, 나의 열심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늘 노력한다. 그냥 주님이 말씀하시는 통로로만 쓰임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성경에 보면, 엘리야도 같은 경험을 했다. 850명의 바알/아세라 선지자와의 대결에서 큰 승리를 거둔 뒤, 이세벨의 살해 위협이 무서워서 브엘세바로 도망을 친 엘리야는, 사환을 남겨두고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구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정신을 차린 엘리야는 호렙산에 이르러,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0).

 

엘리야는 열심이 유별났었다. 그런데, 그는 그 열심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은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열심 때문에 실의에 빠지고, 절망에 빠지고, 죽을 위기에 처해진다. 엘리야의 열심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열심이었는가!

 

여기서 12절 말씀을 보자.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한지라”.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오벧에돔은 왜 복을 받았을까? 열심을 보였던 웃사는 허무하게 죽고 말았는데, 오벧에돔은 왜 복을 받았을까?

 

오벧에돔은 왜 복을 받았을까? 오벧에돔이 복을 받은 이유는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그렇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는 길을 가로막지 않았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열심을 다한 웃사가 복을 받게 될거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오벧에돔이 복을 받았다고 말한다. 참 기이한 일이다.

 

우리는 복 받기 위해서 때로는 너무도 많은 열심을 낸다. 그런데, 그것은 누구를 위한 열심인가? 결국, 자기 만족, 자기의 가 아닌가! 웃사처럼 손을 뻗어 떨어지는 법궤를 잡으며, 주님, 내가 이렇게 몸을 날려서 법궤를 잡았어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회 건축하면서, 애들 돌반지, 예물로 받은 금, 모두 다 교회 건축 헌금으로 바쳤다. “주님, 제가 이렇게 금 다 바쳤어요!” 자기의, 자기만족?)

 

(이스라엘 광야에서 금송아지 만들 때, 성막 만들 때, (땅 파서 채굴한 것이 아닌)그들이 낸 금으로 만든 것! 급하게 나오면서 금은 어떻게 그렇게 많이 챙겨 나왔는지! 우리가 금을 바쳤으니, 물 줘!, 고기 줘!, 안전하게 가나안 땅에 데려다줘!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금을 바쳤는가!)

 

요나, 처음에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일 당함 ? 그의 열심 때문에! 그가 생각하기에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느니웨를 망하게 놓아두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게 그의 열심이었다. 하나님께서 가는 길을 막아 선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요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열심을 내지 않는다. 그저 마지못해 니느웨 성에 이끌려 성을 걸으며 열심도 없이 그냥, 몇 마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온 성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렇다면, 지금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열심 내지 말아야지, 라는 말인가? 아니다. 다윗을 보자. 어떻게 했나?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 힘을 다했다는 것은 진실한 마음의 표현이고, 춤을 추었다는 것은 사랑과 기쁨의 표현이다.

 

내가 주님을 향해서 하는 일은 진실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가? 그리고, 나는 그 일을 하면서, 주님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고, 기쁨이 넘치는가? 어떤 사람은 그러한 모습을 미갈처럼 업신여기는 사람도 있다. 진실을 몰라주는 사람은 꼭 있다. 그런 사람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주님이 갚아 주신다. 여호와를 향한 다윗의 진실한 마음을몰라주고 비웃었던 미갈은 부끄러움에 처하게 된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심(섬김)에는 반드시 복이 따른다. 그 열심은 자기의와 자기만족을 뺀, 다윗과 같은 힘을 다해 춤을 추는진실한 열심,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열심이다. 그러한 열심에는 반드시 오벧에돔에 내렸던 복처럼, 그리고 다윗에게 내린 복처럼, 나만 복 받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복을 나눌 수 있게 된다. “모든 백성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 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19).

 

하나님의 가는 길을 막아 서지 않고,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복을 받은 오벧에돔처럼, 진실한 마음에서, 그리고 사랑과 기쁨의 표현으로 힘을 다해 춤을 추었던다윗처럼, 주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주의 자녀들이 되어서, 오벧에돔처럼, 다윗처럼 복을 받는 믿음의 자녀들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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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좋은 설교란


1. 좋은 설교는 그 설교를 듣기 전과 들은 후의 세상이 달라 보이게 한다.


2. 좋은 설교는 인간은 비탄, 슬픔, 고통에 침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료로 뭔가 ㅡ 비탄, 슬픔, 고통을 다른 일로 바꾸는 일, 이를테면 선교 또는 봉사, 섬김 (즉, 하나님 나라의 일) ㅡ 를 만들고 있는 중이란 것을 알려준다.


3. 좋은 설교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확대, 반복,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세상'에 대해서 말하려고 애쓴다. 


4. 좋은 설교는 어디선가 진실은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며 기도의 자리로 이끈다.

5. 좋은 설교는 문제와 사태를 다루는 데 있어 내 방식과는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사태를 보는 다른 눈, 제 3의 눈을 가질 수 있게 돕는다.

6. 좋은 설교는 성경과 신앙의 선조들의 이야기 속에서 장차 내 생각이 될 것을 찾아내고 다른 것을 느끼도록 자극하고 다른 일을 해보도록 격려한다.

7. 좋은 설교는 누군가 이미 용기를 내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예화가 하는 일)

8. 좋은 설교와 만나는 어떤 특별한 순간, 서러운 마음도 자아도 사라지고 ‘이건 진짜다, 멋지다’라는 마음과 가벼운 한숨, 벅찬 가슴만 남는다. 


(정혜윤의 <뜻밖의 좋은 일>에서 얻은 문장을 바탕으로 재구성)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7. 10. 15:19

파레시아

(요한 14:11-21)

 

우선 11절의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 ‘이같이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의 내용은 두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다. 모노게네스(독생자)와 힐라스모스(화목제물)가 그것이다. ‘모노게네스는 요한복음 316절에서도 나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모노게네스)를 주셨으니에서 모노게네스유일한, 하나의뜻을 가진 모노스발생하게 되는 원인이 되다, 완성되다의 뜻을 가진 기노마이를 합해서 만든 단어이다.

 

헬라어 모노게네스는 풍부한 뜻을 지니고 있는데, 성경은 그것을 외아들(독생자)’로 옮기고 있다. 특별히 유교문화권에 속한 한국에서 외아들(독생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한 경향이 모노게네스의 뜻을 확장시키지 못하고 축소시키는 면이 있다. 이렇게 질문해 보자.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아들을 낳기 위한 하나님의 배우자는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생각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다. ‘모노게네스는 하나님의 가족관계를 따지기 위한 단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게 하나님의 가족관계를 따지려 한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이 모노게네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우리의 인식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유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유비적 표현은 우리 인간에게 익숙한 것을 비유로 들어서 우리의 인식 너머에 있는 것을 설명하려는 표현방식이다. ‘모노게네스는 유비적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모노게네스를 단순히 외아들(독생자)’로만 이해서는 안 되고, 그것이 가지는 풍부한 뜻을 통해 모노게네스를 파악해야 한다. 거기에는 유일하다는 뜻과 시작과 완성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것은 딥쉬코스(두마음)’라는 단어의 반대말이기도 한데, ‘딥쉬코스와 비교하면 모노게네스한마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딥쉬코스는 선악과를 따먹고 두 마음을 품게 된 인간의 타락한 마음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인데, 이것과 대조적으로 모노게네스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으로 살다 하나님에게로 돌아간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힐라스모스(화목제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 마음인 우리가 한 마음이 되도록 그 길을 열어주셨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한마음(모노게네스)’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독생자가 되는 것이 구원이다. 두마음을 떠나, 한마음을 가지는 것이 구원이다. 두 마음을 떠나서, 사랑 안에서 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상호거주(메노)하는 것, 이 상태가 구원이다.

 

그것을 이루게 해주는 두 가지 요소는 믿음과 사랑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독생자-모노게네스 / 주님/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그러면,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 안에서 사랑이 솟아난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비로소 보이게 되는 것들이 있다. 첫 번째, 하나님이 보인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12). 사랑하면, 하나님이 보인다!

 

이뿐 아니다. 사랑하면 비로소 상대방(타자)이 보인다. 자식은 부모가 제일 잘 안다. ? 사랑하니까. 친구는 친구가 가장 잘 안다. ? 사랑하니까. 아내는 남편을 / 남편은 아내를 가장 잘 안다. ? 사랑하니까. (살다보면, 잘 모르는 순간이 온다. ‘저 사람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 사랑의 적신호? / 옛날에는 결혼 안하고 사시는 신부님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사시는 목사님들이 더 대단한 거다. 결혼관계를 행복하게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자식 키우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사랑하지 않으면, 감히 안다고 말하지 말라. 사랑하지 않는 상대에 대해서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다. 괜히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관계만 더 나빠진다. 반대로, 무슨 말을 하려거든 절대적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하라. 다른 마음이 들어가면 시험에 든다. 부모가 자식에게 100만번 잔소리해도 자식은 부모에게 절대로 시험에 안 든다. ? 사랑의 마음으로 하는 거니까. 그런데, 우리는 남들에게 무슨 말 할 때는 사랑의 마음으로 말하기 보다는 의로운 마음으로 한다. 그래서 시험에 드는 거다.

 

왜 믿음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가? 그래야 구원 받으니까? 맞는 말이다. 그런데 구원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모호하다. 구원이 확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구원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구원이 무엇인지, 즉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사랑 안에서 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상호거주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은 모든 생명이 완성을 이루게 되는 종말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믿는 일과 사랑하는 일이 중요한가? 이게 핵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왜 믿어야해요? 왜 사랑해야해요?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믿는 일이나, 사랑하는 일이나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믿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 쉽지 않더라도 믿는 일에,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 말씀에 나와 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17).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본성이 있다. 식욕, 성욕 등으로 대표되는 욕망과두려움이 인간 본성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욕망과 두려움의 문제가 은혜롭게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죄인으로 전락한다. 욕망과 두려움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본성을 나쁘다 할 수 있나. 나쁜 것은, 인간의 본성인 욕망과 두려움을 이용해서 이익을 취하려는 자들이다.

 

후배 중에 SNS IRS 사칭 사기(scam)를 당한 사례를 올린 친구가 있다. ‘IRS 직원인데 세금을 얼마얼마 빚지고 있는데 그거 빨리 안 내면 당장 체포(arrest)하겠다.’는 전화였다는 것이다. 두려움을 이용한 전형적인 사기행각이다. 요즘엔 사기 전화(scam call)이 많이 온다. 얼마 전 나도 사기 전화(scam call)에 당한 적이 있다. 쓰레기 처리 회사(Republic)이라며, 미지급 대금(unpaid balance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처리해야 하니까, 카드번호 알려달라고 했다. 의심 없이 알려줬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Republic 회사에 전화 걸어서 확인해 보니까, 그 전화는 사기(scam)였다. 곧바로 카드 정지시키고, 새 카드로 바꾸었다.

 

세상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우리의 두려움을 이용해서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고, 우리를 타락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자극하고 선동하고 이용하는 방식으로 돌아간다. 어떠한 제품을 향한 욕망, 또는 어떠한 것을 가지지 못하면, 구비하지 못하면 뒤처진다는 두려움을 조장해서 우리는 죄짓게 하고 가난하게 하고, 못살게 만든다.

 

학교를 예로 들면, 하버드(Havard)를 향한 욕망을 말할 수 있다. 그런 명문대를 안 나오면 사회에서 먹고 살기 힘들다는 두려움이 우리 사이에 팽배해 있다. 그런 욕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르고, 욕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산다. 아무리 이렇게 얘기해도, 하버드를 향한 욕망과 이 사회에 대한 두려움은 안 없어질 것이다. 책을 덮으면서도, 마치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래도 하버드 가야지! 내 자식은 거기 보내야지!’ 그럴 것이다. 그만큼 욕망과 두려움은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욕망과 두려움을 해결하는 이 세상의 방식도 우리 안에 깊게 뿌리내려 있다.

 

인간이 죄를 범하게 되는 이유는 욕망두려움때문이다. 그 앞에만 서면, 인간은 작아진다. 여호수아서에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작은 성 아이와 싸울 때 이스라엘은 왜 졌는가? 한 사람의 욕망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드렸어야 하는데 (헤렘법), 한 사람의 욕망이 그것을 망쳤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이름이 뭔가? 아간이다. 그가 묻힌 아골 골짜기는 욕망의 무덤이다.

 

복음서에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주인에게 왜 꾸지람을 들었는가? 한 달란트를 가지고 이윤을 남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아무 것도 안 해서 그렇다. 한 달란트 받은 종 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25:24-25). 이처럼 두려움은 사람은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정말 생뚱맞은 짓을 하게 만든다. 어떠한 사람이 황당한 일을 하게 되는 이면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어떻게 될까봐…’

 

두려움의 반대말은 담대함이다. 담대함이 바로, 헬라어로 ‘파레시아이다. 내가 성경의 말씀 중 가장 좋아하는 두 단어는 파루시아파레시아이다. 담대함(파레시아)을 가진자는 이 세상을 파루시아(종말)처럼 산다.

 

타락한 종교와 거룩한 종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타락한 종교는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이용해서 이익을 취한다. 반면에, 거룩한 종교는 욕망과 두려움을 넘어서도록 도와준다.

 

그렇다면, 타락한 신앙인과 거룩한 신앙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타락한 신앙인은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 사람들을 이용해서 이익을 취한다. 이것을 기복신앙이라고 한다. 반면에 거룩한 신앙인은 욕망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담대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산다. 이 세상이 조장해 놓은 욕망과 두려움의 덫에 걸려 허덕거리지 않고 자유롭게 산다.

 

믿음과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 두려움과 믿음은 공존할 수 없다. 두려움과 사랑은 공존할 수 없다. 우리가 일상에서 욕망과 두려움 때문에 죄를 지어, 죄인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믿는 일과 사랑하는 일에 날마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만 중요한 일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에서 중요하다. 우리가 만약,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심판 날이 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우리는 이미 그 마음에 담대함(파레시아)을 얻어,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주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불쌍한 자녀는 부모 앞에서 담대하게 서지 못하고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자녀들이다. “아빠 100원만!”이라고 말할 때, 아이는 내 앞에서 당당한가, 아니면 두려워하는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느니라”(18).

 

믿는 일에,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예수 그리스로를 구주(독생자 / 모노게네스)로 시인하는 일, 믿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주하게 되시는데, 사랑 안에서 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상호거주(메노)하면, 거기에서 생겨나는 사랑이 담대함을 만들어 내고, 그 담대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믿음의 자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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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8. 6. 30. 09:59

 

아이 같은 지도자

(3:1-1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2:22). 이렇게 끝나는 말씀에 이어, 이사야서 3장 말씀은 이스라엘이 의지한 것들을 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선포가 이어진다. 무서운 말씀이다.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사람 높이는 것을 그만두라는 뜻이다.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며 사는가? 두터운 질문이다.

 

의지가 되는 것에 마음을 쏟는 게 인지상정이다. 의지가 되는 것을 우리는 소중하다고 여긴다. 선지자는 계속해서 강조한다. “하나님만 높다!” , 하나님만 의지할 가치가 있다는 선포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치 없는 것에 얼마나 매달리며 사는가.

 

이스라엘이 의지한 것들을 끊으시겠다는 선포에 포함되는 것은 양식과 물을 포함해, 사회를 지탱하는 요소인 용사, 요술자부터 군사, 재판, 정치, 행정, 종교, 기술 등 각 분야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지도자들까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손쉽게 이야기 한다. “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러는 거지!” 그러다 보니 양식과 물을 얻기 위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양심을 팔고 신앙을 저버린다. 우리는 하나님을 간구하지 않고 양식과 물을 간구한다. 하나님은 양식과 물을 공급해 주시는 분에 불과하다. 양식과 물을 주신 후, 하나님은 인생의 무대에서 사라져야 한다. 우리는 각 분야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자들에게 굽신거린다. 그들이 우리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친해지려고 재물과 시간을 쓴다. 그들과의 교제를 위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등한시한다.

 

양식과 물이 제거되고, 각 분야의 유능한 인재들이 모두 제거된 사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선지자는 계속 선포한다. 그 빈자리를 어린아이와 같이 우매하고 무능한 자들이 대신할 것이라 한다. 그러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학대와 폭력이다. 계층 간의 갈등의 증폭이다. 5절에 나오는 교만할 것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하브압박하다’, 혹은 공격해 겁먹게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유능한 인재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우매하고 무능한 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게 되면, 다스림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윗사람을 겁박할 정도로 사회가 무질서해진다는 것을 말한다.

 

사회 질서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경제도 무너진다. 이것을 표현하기 위한 구절은 웃픈 현실을 드러낸다. “어떤 사람은 자기 아버지 집에서 자기 형제 하나를 붙들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게는 겉옷이 있으니 우리의 우두머리가 돼 다오. 이제 이 폐허더미가 네 손안에 있다’”(6). 경제가 무너지니, 단지 겉옷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우두머리가 되는 상황이 펼쳐진다. 궁핍이 극에 달한 것이다. 겉옷 하나 가진 사람이 폐허더미를 어떻게 일으켜 세우겠는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허망한 것을 소망하는 이 현실이 웃프다.

 

양식과 물도 제거되고, 사회의 유능한 지도자들도 제거되고, 경제도 파탄나는 일이 왜 예루살렘과 유다에 일어났을까?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예루살렘이영광의 눈을 범하였도다!”(8). 여기서 범하였도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마라반역적이다’, ‘도전하다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마땅히 겸손하게 엎드렸어야 하지만, 그들은 그 앞에서 반역하고 도전했던 것이다.

 

구약의 개념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율법에 드러난다. ‘영광의 눈을 범했다는 뜻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율법에 순종하지 않고 그 율법과 반대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의 뜻에 도전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개념에서 의인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율법을 지키는 자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율법주의로 잘못 해석하면 안 된다. 여기서 언약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율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으로 인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의로운 자, 의로운 행동이란 하나님과의 맺은 언약에 대하여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오직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소중히 여기는 자는 의로운 자로서, 율법에 근거하여 의로운 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못한 자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가볍게 여기고 율법을 벗어나 반역적이고 도전적인 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과 유다 지도자들의 자질과 상태에 대하여 문학적인 조롱을 한다.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다스리는 자는 여자들이라”(12). ‘학대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가쉬누르다’, ‘압박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백성을 압박할 만큼 힘을 가진 자들이 아이들이라고 하는 것은 큰 조롱이다. 지도자들의 자질과 능력이 형편없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자질과 능력이 없는 자들이 백성을 압박할 만큼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인도자(메아쉐르)’아사르에서 파생된 말로, ‘반듯하게 가다, ‘(반듯하게 가도록) 인도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미혹하다로 번역된 타아방랑하게 하다’, ‘벗어나게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아사르타아는 매우 상반된 뜻을 지닌다. 그런데, 인도자란 아사르’, 즉 백성이 하나님의 길로 반듯하게 가도록 인도하는 자들이어야 하는데, 선지자의 질책을 받고 있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지도자들은 타아’, 즉 백성을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하여 타락하게 만들고 있다.

 

성경의 비유는 문학적인 비유라는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이와 여자가 어리석거나 악하다는 뜻이 아니다. 아이의 어리석음과 여자의 약함이라는 특성을 빌려올 뿐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약함을 극복하는 것이다. 아이와 같은 지도자는 지혜와 힘이 모자라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길로 바르게 인도하기에 부족하다. 아이와 같은 지도자가 백성을 압박할 만큼 힘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한 불행이 닥치지 않도록,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자들은 어리석음과 약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고, 지도자를 세우는 백성들은 아이 같은 지도자를 걸러내는 분별력이 필요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