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3. 21. 07:35

2011 3 20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3:1-4, 4:1-5

제목: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평생을 이야기해도 다 이야기하지 못할,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교만과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부터 먼저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불안합니다. 진리가 아니라서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신비라서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확실해서 불안합니다. 그리고 이 확실함이 오직 한 사람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걸려 넘어집니다.

 

성경에 보면, 오늘 제목에 나오는 거듭남이라는 말도 나오고, 의라는 말도 나오고, 구원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성경은 온통 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듭남, , 그리고 구원은 모두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단어로 구원의 여러 다른 낱말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거듭남이란 무엇인가구원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겁니다.

 

그런데 이 구원이라는 것도 그 실체를 우리가 잘 알지 못합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안다고 떠벌리는 자들은 구원이 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구원은 완성품이 아니라, 되어져 가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창조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실체를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 구원이라는 것도, 한 사람의 운명에 걸려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니까 좀 답답하신가요? 구원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정확하게 설명해 주어야 속 시원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 그 누구도 구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구원을 완전하게 담지하고 있는 분에게로 이끌 수 있을 뿐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이 무엇인지 아시고, 그 분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모든 삶을 거는 겁니다.

 

영국이나 일본에 가보신 적이 있는지요? 그 나라에 가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자동차가 달리는 방향입니다. 한국이나 미국 등 대부분의 나라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자동차들이 달립니다. 우리는 운전석이 왼쪽에 있지만, 그들은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왼쪽에 앉아 오른편 도로를 달리지만, 그들은 오른쪽에 앉아 왼편 도로를 달립니다. 헷갈리시죠? 우리처럼 왼쪽에 앉아서 오른쪽 도로를 달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 영국이나 일본에 가서 운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횡단보도 건너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 왼쪽을 먼저 바라보도록 훈련받습니다. 그런 상태로 영국이나 일본에 가서 횡단보도를 건너다가는 차에 치어 사고 당하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영국이나 일본에서는 왼쪽에서 차가 달려오지 않고, 오른쪽에서 달려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국이나 일본에서는 외국인 관광객 중에 그러한 사고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이나 일본에 가면 횡단보도 바닥에 어김없이 이런 글자가 써 있습니다. “Look right, 오른쪽을 보시오.”

 

바울이 쓴 로마서의 수신자들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로마의 제사법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율법에 물든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횡단보도 건너는 습관과 똑 같은 것이지요. 도로는 건널 때 왼쪽을 바라보도록 어려서부터 훈련 받은 사람들이 도로를 건너면서 오른쪽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을 들어 구원의 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여겨진 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하고 있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의로워져야 구원 받습니다. 의가 곧 구원입니다. 이게 곧 거듭남입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질문 드리겠습니까? 의로워지기 위해서, 거듭나기 위해서, 구원 받기 위해서 여러분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행하는 그 무엇이 우리 자신을 의롭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면 그것으로 의로워진다고 생각했고, 그들은 스스로 구원받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자기 의를 통해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구원이란 자기 몫이 됩니다.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임금이 되는 것이죠. 자기가 받을 몫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랑스러워 합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게 신앙생활 합니다. 제가 이렇게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주일 예배 나오면 구원 받나요? 십일조 생활 잘 하면 구원 받나요? 아침에 졸린 눈 비비면서 어려운 가운데 아침 기도회 꼬박꼬박 잘 나오면 그것으로 우리가 구원 받나요? 그것이 의로운 행동인가요? 이런 거 잘 하는 사람은 괜히 신앙이 좋아 보이고 의로워 보이고 위대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거 잘 못하는 사람들은 괜히 신앙이 없어 보이고 스스로 자격지심을 갖습니다. 이런 거 잘 하는 사람은 이런 거 잘 못하는 사람을 얕잡아 보고 정죄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런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백보나 오십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라는 거죠.

 

지금 제가, 예배 생활, 그리고 십일조 생활 잘 하시는 분들을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스스로를 구원 받은 백성이라고 스스로 의로운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유대인들처럼 율법에 얽매여 율법으로 의롭게 되어 자기 의로 구원 받으려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구원이 그런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너무 거기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이 말을 듣고, 예배를 소홀히 해도 되는구나, 십일조 생활 안 해도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아직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의로움은 우리의 거듭남은 그런데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이게 무엇인지 알아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은 니고데모라는 유명한 율법학자가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남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니고데모가 어떻게 하여야 거듭날 수 있습니까?”라고 물은 것은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과 똑 같은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물과 성령으로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바로 이 뜻입니다. 구원이란, 거듭남이란,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아브라함의 행위 때문에, 즉 아브라함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5절의 말씀처럼 일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임금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포도원에 일찍 와서 장시간 일 한 일꾼이나, 일이 끝나가기 한 시간 전에 와서 일한 일꾼이나 똑 같은 임금을 받았습니다. 이게 바로 임금(구원)은 일한 일꾼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구원)을 주는 주인(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은 인간이 어떻게 타락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반역하고 폭력과 죄 가운데 살게 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1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당신에게 반역하고 폭력과 죄 가운데 있는 당신의 피조물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자손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복을 내리시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복이란 출생능력, 생명, 성공, 행복, 그리고 명성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의 상태를 봐서는 이것이 사실 불가능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그들이 알지 못하는 곳 가나안이라는 곳에서 어떻게 땅을 얻습니까? 세상은 이방인에게 늘 차갑습니다. 우리 미국 이민자들도 미국에 와서 우리의 소유를 얻기 위해 얼마나 피땀 흘려 일 해야 했습니까? 옛날엔 더 했습니다.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는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생식능력을 상실한 나이에 도달했습니다. 생리적으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자손을 번창시킵니까? 불가능합니다. 이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는데, 이제 늙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복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복을 내려주셔 봐야 남겨줄 자손도 없는 마당에요.

 

하나님은 이런 상태에 있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부르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흑암과 같은 상태에 있었던 아브라함과 사라를 부르셨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와 같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복주셨듯이,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과 자손, 그리고 복을 내리셔서 그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온 세상에 미치도록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당신의 피조물을 향한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내려주시고, 의를 베풀어 주시고, 거듭남의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죄 많은 우리에게 나의 사랑을 받아 줄래라고 묻지 않으시고, 먼저 찾아오셔서 당신의 사랑을 폭포수처럼 부어 주십시오. 그 사랑이 바로 저 십자가에 걸려 있습니다. 저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저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와서 그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거듭남이란 바로 그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바로 그 사랑을 힘입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그 사랑에 온 존재를 다해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결과가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예배로, 우리의 헌신으로, 우리의 찬송으로, 우리의 기도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에게 복을 내리셨을 때, 아브라함 혼자 그 복을 누리라고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내리신 복은 아브라함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그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에게 흘러내려가는 복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받은 사랑은 그 사랑을 받은 자에게만 내려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그 사랑을 받은 자와 연관된 모든 피조물들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전도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믿음으로 응답할 때 옵니다.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고. 구원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오히려 거기에 걸려 넘어지게 될 겁니다. 그냥 십자가만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에서 쏟아지는 폭포수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믿음으로 받으십시오. 그 은혜로 신앙생활 하십시오. 그래야 십자가에서 받은 사랑을 우리의 이웃에게 아낌 없이 흘려 보낼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해서 임금으로 받은 구원은 아까워서 남에게 나눠주지 못합니다. 더 지키고 더 자랑하려고만 들죠. 그러나,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 주어진 은혜는 아낌 없이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조차도 욕심부리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온전히 깨달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사랑을 아낌 없이 나누어 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거듭남이, 우리의 의가, 우리의 구원이 저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분에게만 집중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폭포수처럼 여러분의 삶 가운데 쏟아질 줄로 믿습니다. 그 은혜로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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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