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7. 6. 03:58

겸손은 치유와 구원의 시작이다

(열왕기하 5:1-14)

 

 

1.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개념은 참 중요한 것 같다. 구약의 이야기는 신약에서 재현되고 있다.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재현되고 있다. 열왕기상에서는 엘리야가 활약하고, 열왕기하에서는 엘리사가 활약한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의 사역을 재현하고 있다. 엘리사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흥미로운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2. 나아만 장군 이야기 전에 아주 짧게 나오는 보리떡 이십 개 이야기를 보면 이렇다.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왕하 4:42-44).

 

3. 이것은 복음서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엘리사의 이 이야기는 가뭄이 들었을 때 발생한 일이다. 가뭄 가운데 수확한 곡물을 바알에게 바치거나 자기가 먼저 먹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엘리사)에게 가져왔을 때 그것은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기적과도 같은 곡식이 된다. 우리가 나눔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해서 그렇지, 나눔은 이런 큰 기적을 일구어 낸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나눔의 가치를 잃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자기 자신만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한 자기 집중성을 내려놓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에 자기를 헌신하는 것 자체가 신앙이다.

 

4. 위기의 때에,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팬데믹이 처음 닥쳤을 때 그로서리의 식료품이나 공산품이 남아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인간은 쉽게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중국에서도 봉쇄령이 내려지면 식료품 가게는 금방 동이 나는 현상을 목격했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또는 신앙인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지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위기의 시대에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5. 평소에 위기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놓지 않으면 인간은 상황에 휩쓸리기 십상이다. 바알 살리사에서 온 한 사람도 가뭄의 때에 상황에 휩쓸릴 법했으나 그가 자신의 수확물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먼저 가져온 것은 그가 평소에 어떠한 신앙생활을 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행동이다. 위기의 때에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위기의 때에 자신 만의 안위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을 돌아보면, 위기의 때에 힘이 되어준 사람이 기억에 남는 법이고, 힘이 되어준 사람들을 위해서는 간절한 기도가 나오는 법이다. 위기의 때에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소중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

 

6. 열왕기하 5장 전체에 걸쳐 나아만 장군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을 보면, 나아만 장군의 위상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나아만 장군에 대한 수식어는 화려하다. “크고 존귀한 자”, “아람을 구원한 자”, “큰 용사” 등의 수식어가 그에게 붙어 있다. 그런데 그러한 수식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한 용어가 등장한다. “나병환자더라.” 그렇다. 나아만 장군은 화려한 명성을 지녔으나 나병환자였다.

 

7. 열왕기하 5장 전체는 나아만 장군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막상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성경은 나아만 장군보다 이름 없는 한 아이에게 주목한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 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2절). 나아만 장군의 병 치유와 그의 구원은 바로 이 이름 없는 한 아이에게서 시작된다.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3절).

 

8. 나아만 장군이 평소 같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노예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그의 상황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어둠이 짙으면 작은 빛도 환하게 보이는 법이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이렇게 우리가 절박할 때, 그리고 한없이 겸손해져 있을 때 들린다. 우리는 평소에 겸손을 연습해야 한다.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높아진다. 교만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다. 날마다 자기를 쳐서 말씀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없다.

 

9.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라는 이어령 선생의 시집에 보면, 이런 시가 있다.

 

피었다

시드는 꽃을 보면 눈물이 난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누군가 울면

나도 따라 운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흐린 날 안개 속에 산이 없어지고

답답한 유리창에 빗방울이 흐르면

나의 눈에 눈물방울이 구른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신문을 읽다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너와 비슷한

이름을 발견하면

어느새 차가운 눈물이 흐른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거울 속의 나를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면

거기 남의 얼굴처럼 주름진 모습

눈물이 흐른 자욱이 보인다

정말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10. 딸을 잃고 한없이 겸손해진 시인은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 들리지 않던 것, 느끼지 못했던 것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 겸손해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눈과 귀가 열리고 감각이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 들리지 않던 것, 느끼지 못했던 것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아만 장군의 마음도 이랬다. 승승장구할 때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법한 노예 소녀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11. 눈이 가려 있고, 귀가 닫혀 있고, 감각이 무디어져 있다면, 그것은 내가 교만해져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안 들리던 것이 들리고, 못 느끼던 것을 느끼면, 비로소 내가 낮아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우여곡절 끝에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가지만, 그의 교만은 아직 완전히 꺾이지 않았다.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의 홀대에 기분 상해한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신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극진하게 자신을 대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아만의 예상은 빗나갔다.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10절).

 

12. 나아만 장군은 자신을 향한 엘리사의 이러한 처사에 분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나아만 장군을 치료와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 이름 없는 ‘종들’이었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13절). 이야기의 주인공은 위대한 나아만 장군이지만, 성경이 주목하는 것은 권력과 재력을 지닌 나아만 장군이 아니라 권력과 재력을 전혀 가지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이 주목하는 대로, 권력과 재력을 지닌 나아만 장군에게 집중하기 보다 권력과 재력을 전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그들에게 집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13. 나아만이 궁극적으로 나병에서 치유를 받고 구원받게 된 것은 이름 없는 자들의 활약 덕분이다. 나아만은 ‘이스라엘에서 온 소녀’에게서 예상치 못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종들 덕분에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치유와 구원의 길로 다가설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성이고 구원의 성격이다. 구원은 언제나 예상치 못하게 온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현재의 삶 속에서 발생한 어려운 일 때문에 숨 막혀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은 것, 보잘것없는 것, 그런 존재를 무시하지 말고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14.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의 지시대로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씻는다. 그리고 그는 병이 나았을 뿐만 아니라 구원(새로운 생명)을 받는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너무도 명백히 복음서의 ‘세례’에서 재현되고 있다. 세례는 무엇보다 겸손의 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자리이다. 겸손하지 않으면 죽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 겸손한 자리에서 치유와 구원이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15.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을 만나 치유와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그가 겸손의 자리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에게 나병은 그의 위대함을 무색케 하는 병이 아니라 그를 겸손으로 이끈 하나님의 은혜였다. 나병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스라엘에서 온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그는 엘리사에게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고, 그가 엘리사에게 나아가지 못했다면 그는 요단강에서 몸을 씻지 못했을 것이다.

 

16. 그러나, 그는 결국 요단강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몸을 씻고, 나병에서 놓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던 자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겸손의 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발생하는 일들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있다면, 그 일들 때문에 힘들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겸손은 치유와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겸손한 자에게 치유와 구원이 임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한없이 겸손하게 만들어주시길! 우리를 겸손하게 하실 때 슬퍼할 것이 아니라 기뻐하길! 우리에게 치유와 구원이 임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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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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