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라는 신앙의 무대]

 

요즘은 개그맨들이 자신의 정신성을 펼칠 무대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공중파에서는 더이상 그들을 위한 무대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신성을 가지고 아주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특별히 요즘은 유튜브가 그들의 주 활동무대가 되어 가고 있다. 개그를 표현하는 방식과 개그를 소비하는 방식이 변했다는 뜻이다.

 

개그맨들의 웃픈 현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독교 신앙인들의 이야기가 오버랩 됐다. 예로부터 '교회'는 기독교인들의 정신성을 펼치는 '무대'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교회 공간은 예수님 시대의 성전처럼 '강도의 소굴'이 되어 가고 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공간인지 알 수 없게 됐다. 그리하여 점점 그 신앙의 '무대'를 찾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던 사람들마저 자리를 떠나는 현실을 맞이하게 되었다.

 

복음주의 신학의 가장 약점으로 지목되어 온 것은 교회론의 부재였다. 모더니티에 기반을 둔 복음주의는 '너가 곧 성전'이라는 매우 개인주의적인 교회론을 서슴지 않고 말한다. 이것은 개인을 굉장히 성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 같으나, 결국 교회를 개인에 의해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추락시키는 생각일 뿐이다.

 

'교회'라는 것이 참 신비스러운 게, 실체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신비를 다 지워버리고 교회를 어떠한 '실체'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그렇다 보니, 현재 우리가 '교회'를 떠올릴 때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실체로서의 교회가 그렇게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정신성이다. 기독교인의 정신성이 응집되면 교회라는 것이 발생한다. 거꾸로 말해, 기독교인의 정신성이 사멸하면 교회는 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인지, 아니면 죽은 교회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느덧 '교회는 이런 것이야'라는 어떠한 실체에 사로잡혀 왔다. 어떤 물질적인 것들이 교회라는 생각, 그래서 교회건물이나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소위 성물들, 그리고 그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가지 활동(프로그램)들 등을 교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교회 현상들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신성이 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기에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개그맨들처럼 기독교의 정신성을 펼칠 무대, 교회를 잃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지금 존재하는 '무대'에서 기독교의 정신성을 펼치기에는 그 무대와 정신성이 충돌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기독교의 정신성을 멋지고 아름답게 펼치기 원하는 신앙인은 그 정신성에 합당한 '무대'를 찾고 있거나,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성례전 신학(sacramental theology)에 의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상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성을 펼쳐내는 '무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어느 곳 하나, 그 어느 시간 하나 '성전'이 아닌 것이 없다. 우리가 사는 모든 세상, 우리가 보내는 모든 공간과 시간은 기독교의 정신성을 펼치는 무대이다. 즉, 우리가 사는 모든 세상, 우리가 보내는 모든 공간과 시간은 '교회'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어느 곳에 있든지 기독교의 정신성을 펼쳐 보인다면, 그곳에 '교회'가 생길 것이고, 그 교회는 많은 이들에게 생명을 전달해 주는, 기쁨의 사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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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