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2. 18. 06:35

구원은 온다

(이사야 12:2-6, 스바냐 3:14-20, 빌립보서 4:4-7, 누가복음 3:7-17)

 

1. 빌립보서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바울은 기뻐할 것과 기도할 것에 대하여 말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절). 우리는 바울의 권면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기뻐해야 할 일이 있어야 기뻐하지. 기뻐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맞는 생각이기도 하고, 틀린 생각이기도 하다.

 

2. 제임스 스미스가 쓴 <습관이 영성이다>라는 책을 보면,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라는 말을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어떤 사람이 무엇을 욕망하는 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 또는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욕망의 문제와 관련 있다. 본인이 욕망하던 바로 그것을 손에 넣거나 성취하면 우리는 기뻐하게 되고, 본인이 욕망하던 것에 대하여 좌절을 경험하면 우리는 기뻐하지 않는다.

 

3. 그러니까, 바울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한 것은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주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욕망을 두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다. 우리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욕망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욕망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4.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표지(sign)이다. 야고보서에 보면 참 좋은 말씀이 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으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3-15).

 

5. 기뻐하는 것, 그리고 기도하는 것, 이러한 것들은 분명 믿음의 표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훈련이 필요하다. 기뻐하는 훈련, 그리고 기도하는 훈련. 실 없이 기뻐하는 게 아니다. 소망 없이 기도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고,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이라 부른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 아닌가.

 

6. 임마누엘 신앙은 어려운 현실을 맞닥뜨리며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현실을 뛰어넘어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우리가 살펴본 이사야의 말씀과 스바냐의 말씀 안에는 ‘구원’이라는 말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그들은 구원을 갈망했고, 구원을 경험했고, 구원을 증언했다. 그들에게 구원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는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불렀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팍팍한 현실이 아니라 그 팍팍한 현실 가운데서 그들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7.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습 3:17, 19). 이러한 문장들은 그냥 상상 속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깊이 경험한 이들이 온 힘을 다해서 증언하고 있는, 살아 있는 말씀 그 자체다.

 

8. 구약성경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과 기대는 모두 출애굽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 거대한 구원의 경험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의 작고 큰 일 가운데서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했다. 여기서 그들이 구원을 ‘기대’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은 굉장히 묘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구원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 임재하심 자체가 주는 결과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9. 구원이란 가량 이런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나를 찾을 때는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본인들 힘으로 해결이 불가능할 때이다. 그 중에서 나를 가장 열렬히 찾는 때는 본인들이 하는 게임에서 어떤 아이템을 구매하고 싶을 때이다. 그때 우리 아이들은 나를 아주 열렬히 찾는다. 아이들은 내가 자신들 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본인들 앞에 나타나면 좋아한다. 왜냐하면, 내가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곧 문제의 해결이기 때문이다. 나의 임재와 나의 임재를 통한 문제의 해결은 그들에게 ‘구원’이 된다.

 

10. 이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약간의 비유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그 차원이 훨씬 깊다. 우리는 흔히 문제의 해결이 구원이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 신앙에서의 구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자체이다.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곳에 계신다면, 그것 자체가 구원이다. 물론, 하나님의 임재는 문제의 해결을 수반한다. 수많은 무리들이 줄지어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기 위해 따른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 였다.

 

11.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태로 구원이 임하는 경우도 있다. 바울이 대표적이다. 바울은 어떤 병을 앓고 있었다. 그 병을 고쳐 달라고 바울은 주님께 세 번 기도했다. 아주 간절히, 아주 깊고 높은 경지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네 은혜가 족하다”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 자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강함은 곧 약함에서 나온다는 고백을 한다. 바울은 비록 병 고침을 받지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구원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삶 전체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12. 구약성경에 면면히 흐리는 구원에 대한 ‘기대’는 세례 요한에게도 이어졌다. 그는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면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렇게 예언한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눅 3:6). 먹고 살기 정말 힘들었던 시대, 로마의 압제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팍팍한 삶의 현실 속에서 구원을 기대하며 세례 요한에게 나아왔다. 구원을 간구하는 그들이 세례 요한에게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13.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세례 받으러 나아온 세리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군인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그들은 왜 주변에 헐벗은 자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옷을 나누지 않고 두 벌이나 가지고 있었을까? 그들은 왜 굶주리는 자가 있는 것을 보면서도 먹을 것을 나누지 않았을까? 세리들은 왜 부과된 것 외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했을까? 구인들은 왜 사람들에게서 강탈하고 거짓으로 고발하고 받는 급료에 만족하지 못했을까? 이게 참 아이러니컬한 것이지만, 그들은 ‘구원’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구원은 옷 두 벌 가지고 있는 것, 남들보다 음식을 많이 쟁여 놓는 것이었고,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 부당 이득을 취하는 것이었고, 사람들에게서 강탈하고 거짓으로 고발하여 뒷돈을 챙기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4. 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들이 행했던 일들은 ‘구원의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무엇이 구원인지를 올바로 가르쳐 준다. 올바른 구원을 알고 나면 그들은 더 이상 거짓 구원을 행하느라 삶을 낭비하거나 죄를 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6-17).

 

15. 옷 두 벌을 가지고 있고, 먹을 것을 쟁여 놓고, 부과된 것 외에 더 거두고, 강탈하고 거짓으로 고발하고, 받는 급료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떠한 행위를 가리킨다기보다, 우리가 무엇을 구원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언어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이 표지판이 되어 구원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것을 안다면, 당연히, 너무도 당연히, 우리에게는 두 벌의 옷이 필요 없고, 음식을 쟁여 놓을 필요 없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되고, 부과된 것 외에 더 거둘 필요도 없고, 강탈하거나 거짓으로 고발할 필요도 없고,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불평할 필요도 없어진다. 한마디로, 강퍅하게, 악하게 사는 이유는 구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16. 우리는 왜 기뻐하고 기도하는가? 우리는 왜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데도 기뻐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데도 기도할 수 있는가? 우리의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기뻐하라. 기도하라. 구원은 온다. 반드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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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