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2. 23. 15:0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고린도후서 4:3-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익숙한 말이지만, 막상 뜯어보면 정말 어려운 말이다. 일단 언어구조를 보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형상이 동등한 관계로 설정되고 있다. A는 B이다(A = B).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복음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14:9).

 

세 단어,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형상 중에 어떤 단어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일까? 바로 ‘형상’이라는 단어이다. 영어로는 ‘Image’로 번역되는 ‘형상’이라는 말은 영어의 ‘이미지’라는 번역 때문에 많이 오해되는 단어이다. 우리가 대개 ‘이미지’라고 하면 어떤 상상적인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미지’는 어떠한 물체에 대한 ‘상상된 모사품’으로 이해된다. 또는 ‘그림’이나 ‘영상’ 같은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렇게도 쓴다. “그 사람 이미지가 어땠어?”라고 어떠한 사람에 대한 인상을 표현할 때 쓰기도 한다.

 

형상, 이미지라는 단어가 현대인들에게 위에서 열거한 용도로 사유되고 쓰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도 대단히 오해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모사품 정도로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인상을 볼 수 있다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을 매우 가벼운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불상사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형상(image)’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형상(이미지)’은 헬라어의 ‘에이도스(ειδως/eidos)’를 옮긴 말이다. 에이도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데아’라는 뜻이다. 플라톤 철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이데아’가 무엇인지 감이 올 것이다. 오래전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중 ‘교실 이데아’라는 노래가 있었다. 다음과 같은 가사를 지니고 있다.

 

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 족해 족해 족해

내 사투로 내가 늘어 놓을래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 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곤 덥석 모두를 먹어 삼킨

 

이 시커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 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진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교실 이데아>라는 노래를 통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교실의 이데아와 교실의 현실이 전혀 맞지 않고 심각한 괴리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실의 이데아를 회복하는 것이 학생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라는 강변이다. 교실은 원래 어떠해야 하는가? 교실은 학생과 학생이 뭔가 새로운 것을 함께 배우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서로의 기쁨을 나누고, 서로의 사랑을 나누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는 아이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경쟁자로 의식해 서로의 관계를 처참하게 밟아버리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즉, ‘형상’이라는 것, ‘이데아’라는 것, ‘에이도스’라는 것은 ‘~인 것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교실 이데아는 ‘교실인 것 자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교실인 것 자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 교실의 학생들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교실인 것 자체의 모습에서 벗어나면 교실의 학생들은 행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형상’이라는 것이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이 무엇인지를 마음 깊이 깨달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인 것 자체이다. 이것을 좀 더 설명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사람을 포함한 모든 물체들)는 ‘에이도스(이데아)’를 가지고 있다. 세계의 인구가 70억명이지만, 우리가 인간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라고 불리는 본질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에이도스(이데아, 형상)이다. 사자도 마찬가지고,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것들의 에이도스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각각의 에이도스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인간의 에이도스, 사자의 에이도스, 고양이의 에이도스는 어떠한 에이도스에서 나온 것일까? 각각 존재하는 에이도스의 에이도스를 일컬어서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플라톤 철학에서는 이것을 ‘일자’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일자인 하나님의 에이도스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에이도스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구원자)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보통의 고백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에이도와 동일한 존재라는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 자체라는 고백이고, 우리의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대어 있다는 고백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생명의 기원이시고 주인이시고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 자체가 그분의 존재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이도스(이데아/형상)는 우리의 감각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플라톤 같은 경우는 ‘동굴의 비유’를 써서 동굴 바깥에서 비춰오는 햇볕에 의해 동굴 벽에 맺힌 그림자를 보는 것처럼 우리가 ‘에이도스’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플라톤이 말하는 것보다 더 나아가서 매우 래디컬하게 말하고 있다. ‘에이도스’를 우리가 직접 봤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에이도스가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독교는 성육신 사건이라고 부른다. 플라톤이 말하는 구원은 인간이 죽어서 에이도스로 돌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는데, 기독교는 죽어서 에이도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에이도스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왔기 때문에 그 에이도스를 알아보고 믿으면 죽지 않아도 이미 구원 받았다고 말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3절). 여기서 말하는 복음은 ‘에이도스가 우리에게 육신을 입고 와서 우리의 눈 앞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정말 기쁜 소식 아닌가?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런 소망 없이 살다가 죽어서야 에이도스로 돌아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는 삶을 살다가, 에이도스가 우리에게 와서 그 에이도스를 알아보고 믿으면 지금 당장 구원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기쁨인가.

 

복음이 가리었다는 것은 구원의 현재성(구원을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누리는 기쁨)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의 현재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런 소망 없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일 뿐이다. 얼마나 불쌍한 인생인가. 그러나, 에이도스가 지금 여기에 오셨다는 것을 안 사람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인생은 이미 구원에 들어간 인생이기에 죽음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죽음이 두렵지도 않고, 이미 영원한 생명(에이도스)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삶 자체가 어메이징 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를 통해 다시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교실 이데아에서 묘사되고 있는 아이들은 교실 ‘이데아(에이도스)’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산다. 그들은 이데아(에이도스)에서 한참 벗어난 인생을 산다. 그렇다 보니, 교실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지옥을 사는 것 같다.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 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 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이런 교실의 풍경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다. 그러나, 교실 이데아(에이도스)가 실현된 교실을 경험하는 아이들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얼마나 생명력이 넘칠까. 그들은 더 이상 경쟁할 필요도 없고, 교실 안에 있는 다른 친구들을 자신의 경쟁자로 의식해서 그들을 미워할 필요도 없고, 교실의 다른 친구들과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 것이다. 그런 풍경, 그것이 바로 구원의 풍경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즉, 그리스도는 에이도스의 실현이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에이도스’, 그 생명의 깊이, 생명 그 자체를 경험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을 통해서 일희일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자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에이도스를 경험했다고 하면서, 이미 천국을 산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의 일들에 의해서 압도당하여 두려움에 떤다.

 

우리가 경험하는 불의, 폭력, 압제 등은 하나님의 에이도스를 경험하지 못한 ‘망하는 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서든 구원을 성취해 보겠다는 몸부림이고 아우성이다. 왜 세상 사람들은 옆의 사람들을 도와주기는커녕 그들에게 불의를 저지르고, 폭력을 가하고 압제하는가? 존재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내가 저 사람의 것을 빼앗아 좀 더 가지고 있어야 자신의 삶이 안정을 누릴 수 있다는 거짓된 착각, 거짓 구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에이도스’를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 그에게 구원이 묘연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한 일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이루려는 구원의 성취에 대한 욕망일 뿐이다. 그들은 참된 생명, 참된 구원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에이도스’, 하나님의 생명에 거하게 된 자들은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5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에이도스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전파한다. 그게 불의, 폭력, 압제와 같은 악으로 나타난다. 구원을 스스로 이루려는 사람의 비참한 운명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에이도스’라는 것을 알고 그를 믿는 자,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낸다. 예수가 바로 에이도스들의 에이도스이기 때문이다. 생명 중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내가 드러나면 악을 드러낼 뿐이지만, 생명 중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면 구원사건이 발생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전적으로 알려준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

 

이 진술은 스스로 구원 이루려는 세상의 가치와 완전히 반대되는, 완전히 전복적인 가치를 말해 준다. 스스로 구원 이루려는 사람들은 ‘주인’이 되려 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에서 말하고 있는 ‘옆에 있는 그 애보다 좀 더 비싼 존재’, ‘옆에 있는 그 애의 머리를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좀 더 잘난 존재’가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의 가치는 완전히 전복적이다. 그리스도인은 주인이 되려하지 않고, ‘종’이 되려 한다. 왜? 모자란(모질란) 존재여서가 아니라 ‘옆에 있는 그 애보다 좀 더 비싼 존재’가 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그 애의 머리를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좀 더 잘난 존재’가 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무슨 구원이 더 필요한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바쁘게 사는가? 우리는 무슨 필요를 채우기 위해 힘들게 사는가? 우리는 무엇이 부족하여 두려워 하는가? 우리는 ‘주인’이 되기 위하여 이렇게 바쁘고 힘들고 불안해며 사는가? 아니면,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생명의 풍성함을 잃어버린, 그래서 삶이 쪼그라든, 이 세상의 불의와 폭력에 희생당하여 정신을 잃어버린 그들의 종이 되기 위하며 바쁘고 힘든가? 세상이 조장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휩쓸려 이리저리 휘둘리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되신 하나님의 에이도스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에이도스를 경험했다면,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에 휩쓸려 있는 이웃들에게 소망과 사랑과 자유를 가져다 주기 위하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종의 모습으로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바쁠수록, 불안할수록, 두려울수록, 그 바쁨과 불안과 두려움에 휩쓸리지 말고,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에이도스(형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하나님의 형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주인’이 되고자 하는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에서 ‘종’이 되고자 하는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우리를 잠잠케 하실 것이다. 하루에 단 1분이라도 좋으니, 촛불을 켜고,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안에 푹 잠기라.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그 구원에 잇대어 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예배 드리는 우리 모두는 이미 구원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자기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성취가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누리는 ‘놀이’어야 한다. 그러니, 평안을 누리라. 그 평안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라.

Posted by 장준식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