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5. 25. 13:43

그리스도인의 성례전적 삶 (Christian life as a sacrament)

(열왕기하 5:1-14)

 

지구상에서 가장 문제적인 도시는 예루살렘이다. 종교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성지로 생각하는 세 개의 종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수많은 분쟁을 겪었다. 그리고 그 분쟁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다행히도 국제사회의 압박 때문에 최근 일어났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간에 휴전협정이 맺어졌지만, 두 진영 사이에 있었던 분쟁 때문에 어린이를 포함한 무고한 시민들 수백명이 목숨을 잃고, 가자 지구 도시 자체가 마비 상태에 빠졌다.

 

지인이 나에게 물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냐고. 이번 분쟁으로 인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피해 규모를 보면, 이스라엘이 거의 일방적으로 팔레스타인을 학살한 것처럼 보인다. 질문은 그랬지만, 그 질문에 담긴 더 깊은 의미는 예루살렘의 평화는 어떻게 오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물론, 지인이 나에게 걸어온 질문은 무슨 깊은 학문적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냥 답답해서 한 말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할까? 사실, 굉장히 난감한 문제이다. 문제가 난감한 이유는 이스라엘은 유대교를 대표하고, 팔레스타인 하마스는 이슬람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두 거대 종교가 충돌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평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의 문제는 굉장히 난감하면서 심각한 문제이다. 물론 여기에는 종교적 문제만 개입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문제도 개입되어 있어, 그 문제를 푸는 해법은 굉장히 복잡하다.

 

나는 그 질문에 간단하게 이렇게 답했다. “종교가 없어지거나, 아니면, 역사가 끝나거나. 마라나타!” 인간들 사이의 분쟁, 또는 전쟁을 어떻게 종식시킬 수 있을까? 더군다나, 예루살렘이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종교 때문이니, ‘종교가 없어지거나’라는 대답은 사실 굉장히 절박한 말이다. 평안을 위해서 종교를 가지는데, 그 종교가 오히려 분쟁과 전쟁을 불러와 서로의 생명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니, 차라리 ‘종교’라는 것 자체가 없으면 서로의 생명을 해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더불어서 인간 사이에 있는 분쟁과 전쟁,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은 인류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에, 예루살렘의 평화의 문제는 역사가 끝나지 않는 이상 어려울 것이라는 절망감이 우리의 마음을 짓누른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끝장 내시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마라나타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왜 나는 성령강림절(오순절)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간의 분쟁을 이야기하는가?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 전개되는 성령강림 사건을 본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일이다. 세계 각국에서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 그리고 오순절 축제를 ‘관광’하러 온 수많은 외국인들(이방인들)이 모여들었던 오순절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특별한 일이 발생했다. 오순절 축제에 걸맞은 매우 흥분되고 기이한, 축제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그것이 바로 성령강림사건이다.

 

성령강림 사건의 요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방언을 했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들이 방언을 했다는 것은 쉽게 말해, 외국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외국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뭐가 그리 큰 일인가. 중요한 것은 방언이 아니라, ‘그 방언으로 무엇을 말했는가’이다. 그 상황을 사도행전은 이렇게 전한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구네레에서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9-11).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방언(외국어를 유창하게 한 일)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을 말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하나님의 큰 일은 무엇일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큰 일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은혜가 보이게 드러났다는 데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큰 일(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의 모든 감각을 통해서 경험했다는 뜻이다.

 

즉, 성령강림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연장선 상에 있는 사건이다. 성령강림 사건은 기이한 일(우리가 흔히 방언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현상의 발생)이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게 드러나는 사건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즉 그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온 감각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진 결과,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온 감각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 결과는 이것이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1).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끔 하는 사건이 발생하니까,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역사가 발생한다.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요즘은 많은 이들이 종교를 떠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믿던 이들도 신앙을 버린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끔 해주는 사건보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경험을 사람들이 더 많이 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위에서 이야기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이다.

 

유대인도 하나님을 믿고, 팔레스타인의 무슬림들도 하나님을 믿는다. 두 진영 모두 전쟁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인 일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니, 거기에 무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가.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하는 것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전혀 안 계신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가 공적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우리가 읽은 열왕기하의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에는 이와 사뭇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성례전적 삶,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끔 하는 경험을 이끌어내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배울 수 있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아주 실제적인 문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싸움을 어떻게 멈출 수 있고, 어떻게 예루살렘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아만 장군의 나라, 아람(지금의 시리아)과 이스라엘은 서로 적대관계였다. 두 나라 사이에는 평화가 없었다. 두 나라는 전쟁을 했다. 마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평화가 없는 것처럼 그랬다. 성경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2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포로로 잡혀가는 일은 비극이다. 우리는 나아만 장군보다 전쟁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긍휼하고 정의로운 마음이 필요하다. 실제로, 나아만 장군 아내의 몸종인 ‘어린 소녀’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엉뚱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나아만 장군을 가까이에서 본 ‘어린 소녀’는 나아만 장군이 가지고 있는 삶의 아픔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되었다. 나아만 장군은 크고 존귀한 자였으나 치명적인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 불치병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가 ‘나병’을 앓았다고 표현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나병이 아니라 ‘악성 피부병’이다. 만약 그가 나병을 앓았다면 분리 수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리 수용되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나아만 장군의 고통을 본 ‘어린 소녀’는 장군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3절). 전쟁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 자기에게 고통을 가한 자에게는 저주를 퍼붓는 법이다. 그런데, ‘어린 소녀’는 원망보다는 용서를 택한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어떠한 결과를 가지고 오는지를 보면, ‘어린 소녀’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선택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어린 소녀’의 말을 들은 나아만 장군은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서 적극적인 노력을 펼친다. 왕을 만나 적국에 가는 것을 허락받고, 선지자에게 줄 선물을 가득 마련해 자기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며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만나러 간다. 이 이야기의 중심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왕이 아람 왕의 편지를 받고 두려워하자, 사신(메신저)을 보내 이스라엘의 왕을 안심시키는 엘리사의 말에서 발견된다.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8절).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선지자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 사람들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즉, 선지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하는 일을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과 일치한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도 제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예언(Prophecy)을 한다. 예언이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에, 즉 우리의 삶에 어떻게 드러나실 지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끔 하는 일이다. 이처럼, 나아만 장군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존재’였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 사람이므로 아람 신의 존재는 알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병을 고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병을 고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온 이유는 병을 고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며, 자신의 병을 고치는 일에 엘리사 선지자가 화려한 제의를 행하고, 자신에게 엄청난 일을 요청할 것을 예상하며 갔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병 고침은 싱겁기 짝이 없었다. 선지자는 나와 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병 고치는 방법이 너무 보잘것없었다.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10절). 얼마나 쉬운가.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쉬운 것도 못한다. 오히려 화를 내며 돌아선다. 만약, 그에게 현명한 부하들이 없었다면, 그는 병도 고침 못 받고, 하나님을 아는 기회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마음 내키지는 않았지만, 엘리사 선지자의 말대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었다. 그랬더니, 정말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같이 회복되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 일을 통해서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을 알게 된 이야기이다. 어린 소녀의 용서의 마음이 나아만 장군의 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6장 23절에서 끝나는데, 이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 것을 알게 된 아람은 이스라엘과 섣부르게 전쟁을 하지 못하게 된다.

 

아람 왕은 자신의 도발 계획이 매번 수포로 돌아가자 나아만 장군을 스파이로 의심하지만(명시적으로 나아만 장군을 의심했다고 나오는 것은 아니나, 정황상 그렇다), 이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아람의 군대는 엘리사의 존재를 아람 왕에게 알린다. 그리고, 아람 왕은 엘리사를 죽일 계략을 꾸민다.

 

자기를 죽이러 온 아람 군대를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사마리아성으로 유인한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몰살시키고자 한 이스라엘 왕에게 그들을 죽이지 말고 살려주라고 말한다.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소서”(왕하 6:22).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아람 군대가 썼던 방법을 따르지 않고, 그들을 용서하는 것을 선택한다. 아람 군대는 포로를 자신들의 노예로 데리고 갔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을 용서하고 돌려보냈던 것이다. 그랬더니,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가 생겼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왕하 6:23).

 

평화는 용서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용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일이다. 용서는 엄청난 성례전이다. 용서의 경험은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낸다. 아람의 전쟁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는 주인인 나아만 장군을 용서하고 그에게 ‘하나님의 선지자’를 알려 주었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지만, 결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엘리사는 자기를 죽이러 왔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마리아성에 갇힌 아람 군사들을 용서하고 돌려보냈다.

 

‘어린 소녀’의 용서와 엘리사의 용서는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를 가져왔다. 나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우리는 이 가치를 놓치면 안 된다. 나의 작은 용서가, 또는 힘겨운 용서가 어떠한 위대한 결과를 가지고 올지 모른다. 다만,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용서(순종)를 들어 쓰실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평화는 사람이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고 높여질 때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기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고 높여진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하나님이 드러나고 높여지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다. 그러한 삶을 성례전적 삶이라고 한다. 성례전이란 바로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경험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역사에서, 그리고 현재 우리 시대에, 또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서 볼 수 있는 일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행동을 하니, 하나님을 원래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을 보고 “내 생각이 맞어.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시대는 점점 세속화되어 간다. 세속화란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없는, 하나님의 존재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강요를 통해서 갖게 될 수 없다. 더군다나 요즘 시대는 더 그렇다. 어떻게 종교적 신념을 강요할 수 있나. 요즘엔 그랬다가는 잡혀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어느 시대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게 끔 해주는 믿는 이들의 삶 자체가 더 중요하다. 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가 용서를 통해 나아만 장군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엘리사가 자기를 죽이러 온 아람 군대를 용서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람 사람들이 경험하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믿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는 성례전이 되어야 한다.

 

성령강림절(오순절). 예수의 제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끌었다. 덕분에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 전쟁의 소식만 늘어가고, 죽음의 소식만 들려오며, 하나님이 마치 안 계시는 것처럼 행동하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늘어가는 이 때에, 그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없다고 하는 확신하게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즐비한 이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삶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며 높이고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진 가장 깊은 질문이고 도전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끄는 성례전적 삶. 우리는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끄는 성례전적 삶을 가능케 하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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