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프로젝트: 돌보는 사람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 어느 맑은 여름 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 / 연한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 연못 속에선 아무 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죠

(김민기 작사/작곡: 작은 연못)

 

평화를 기원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원래 정치적 평화를 기원하는 노래입니다.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정치적 평화만 잘 해결되면 아주 평화로운 세상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만 잘 해결되면 모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이상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만 생각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과 자연 사이의 평화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를 다루는 분야를 ‘정치학(politics)’라고 한다면, 사람과 자연 사이의 평화를 다루는 분야를 ‘생태학(ecology)’라고 합니다. 정치의 역사는 매우 깊습니다. 동서양 고전은 모두 정치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서구사회의 고전인 플라톤의 <국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그리고 동양사회의 고전인 공자나 맹자 등은 모두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하면 평화를 이루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생태학의 역사는 짧습니다. 그동안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매우 수동적이고 배타적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인간은 자연을 존재 바깥에 있는 존재로 여겨왔습니다. 자연에 어떤 인격을 부여하거나 의미를 부여해서 돌봐야 하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은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고, 인간은 자연을 필요한 대로 ‘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인간의 삶에 아무런 영향이 없을뿐더러, 인간은 자연을 이용해서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과학기술이 급격히 발전하자, 자연에 대한 ‘착취’는 극에 달했습니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라는 책은 생태 문제를 공론화 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책입니다.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이 생태계를 얼마나 망가뜨리는 지, 레이첼은 4년 간의 직접 조사와 연구를 통해 과학에 기초한 기술이 초래한 재앙을 온 세상에 고발합니다. 1962년에 발생한 일입니다. 레이첼 카슨의 책이 기폭제가 되어 그 이후 인류(특별히 미국 정부)는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정부가 정책을 세울 때 경제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생태 문제를 함께 돌보기 시작합니다.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지 60년이 지난 지금,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는 더 이상 인간과 인간에 대한 노래로만 여겨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인간이라는 존재와 자연이라는 존재의 두 붕어가 살고 있다는 상상력이 꼭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지구라는 연못 속에는 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입니다. 둘이 싸우고 있습니다. 인간 붕어는 자연 붕어를 두들겨 패고 있는 중입니다. 다행히 자연 붕어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반 죽게 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인간 붕어의 폭력은 멈출 기색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자연 붕어는 죽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작은 연못의 이야기가 치닫는 결론으로 인간의 운명은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 붕어의 연한 살이 썩어 들어갈 것이고, 지구 연못도 썩어 들어갈 것이고, 결국 인간 붕어는 더 이상 지구 연못에서 존재를 감추게 될 것이다.

 

상상력은 창작할 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상상력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현재 인류가 멸망의 길을 벗어나 생존과 번영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상상력입니다. 기후변화가 가져올 미래에 대한 상상력, 그리고 그 미래를 끔찍하게 여길 수 있는 상상력, 또한 그 끔찍한 미래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상상력, 그리고 그러한 실천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생존과 번영의 상상력, 이런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상상력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기후변화 프로젝트: 돌보는 사람들]은 단순한 교회의 프로그램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루는 구원에 대한 스토리입니다. 이 스토리는 흥미와 재미를 유발하는 스토리를 넘어선 변화(transformation)를 이끌어 내는 스토리입니다. 우리는 변해야 하고, 변하지 않으면 멸종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절박한 상상력이 추동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하여 우리가 다루게 될 것들은 우선, 기후변화에 대한 이해입니다. 예언자적 목소리를 지닌 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 그리고 신학자들은 60여년 전부터 끊임없이 생태 문제를 거론해 왔습니다. 특별히 지난 몇 년간 급박해진 기후변화 앞에서 절망의 목소리를 내는 예언자들(과학자, 인문학자, 신학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는 시간을 갖을 것입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브레이킹 바운더리스 Breaking Boundary> 같은 다큐멘터리는 기후변화 이해를 도와줄 것입니다.

 

둘째, 이 프로젝트를 통하여 우리가 다루게 될 것은 기독교 창조론과 생태 영성에 대한 이해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왜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예수 잘 믿고 천국 가면 그만인데, 우리가 왜 이 땅의 일을 돌봐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명백한 오해가 불러온 참사입니다. 기독교 창조론과 생태 영성에 대한 이해를 갖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질문이 기독교 신앙과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그 누구보다 기후변화에 대해서 적극적인 대응을 하도록 이끈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생태 영성은 하루 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태 영성이란 어떤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고 마인드 셋입니다. 생태 영성의 지혜와 마인드 셋을 갖추는 일은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수행해 나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셋째, 이 프로젝트를 통하여 우리가 다루게 될 백미는 실천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실천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손과 발이 움직이기 전에 머리와 가슴에 변화가 있어야 하고, 손과 발이 지속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머리와 가슴을 언제나 뜨겁게 유지해야 하기에 생태 영성을 갖추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는 실천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기후변화를 촉발시키지 않는 삶의 방식을 갖추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고, 어떠한 생활의 변화를 이루어야 하는지, 배우고 실천하고 구성하는 작업이 이 프로젝트의 백미입니다. 이 실천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도 상상력입니다. 실천은 매우 창조적인 작업입니다. 배우고 구상하는 것을 실현해 낸다는 것은 상상력 없이 불가능합니다.

 

[기후변화 프로젝트: 돌보는 사람들]을 시작하면서, 확실한 목표를 하나 더 설정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여정을 꼼꼼히 기록하여 1년 후에 책을 출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것, 우리가 나눈 것, 우리가 실천한 것들을 꼼꼼히 기록해서 우리와 같은 길을 걸어가려고 결단한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이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또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길을 걸어가는 일이 의미 있는 삶이라는 것, 그리고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메시지를 담아보려고 합니다. 이 의미 있는 여정에 도반(道伴/함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