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3. 9. 03:14

나는 기도합니다

(빌립보서 1:9-11)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주님께서는 천국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시며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를 하신다. 90년대부터 한국교회의 주일학교에 유행했던 행사 중 하나가 달란트 시장이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주일학교 보조교사를 했고, 대학을 들어간 후부터는 주일학교 교사를 했는데, 주일학교 행사 중 달란트 시장 할 때 아이들이 가장 기뻐했다. 지금은 풍경이 좀 달라졌지만(지금 어른들 예배 드리는 시간에 주일학교도 하는 경향이 있다), 예전에 주일학교는 아침 9시에 있었다. 주일 아침 일찍 교회 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선생님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그러나 그때는 선생님들도 아이들도 아주 성실하게 주일학교에 참석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얼마나 게으른 종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성실하게 주일학교에 참석한 아이들은 달란트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 달란트 시장이 열리면 그동안 모은 달란트를 가지고 본인이 원하는 상품을 살 수 있었다. 달란트 시장에서 통용되는 ‘돈’은 달란트였다. 달란트가 없으면 달란트 시장에서 원하는 물건을 가질 수 없었다. 물론 동심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하여 선생님들이 달란트가 부족한 아이들에게 은혜를 베풀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모든 게 풍성하게 넘쳐나는 시절을 살고 있어 주일학교에 와서 달란트를 받는 것에 대한 재미, 모은 달란트로 달란트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재미도 별로 느끼지 못하는 시대이지만, 성경의 달란트 비유는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질문하고 있다.

 

우리는 달란트 비유를 보면서, 너무 먼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달란트 비유가 죽음 이후의 심판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달란트 비유가 죽어서 천국 갈 때나 유효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먼 이야기로 생각하다 보니 비유에 대한 현실감이 별로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 현실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까운 현실의 이야기로 가져오면 된다. 그 방법은 달란트 비유를 매주일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을 바꾸면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 매주일은 작은 부활절이니, 매주일은 우리에게 매순간 삶의 마지막을 생각하게 해준다. 주일을 그렇게 사유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쉽게 매너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나는 매주일을 주님께서 달란트를 나눠 주시는 날임과 동시에 한 주간의 달란트를 셈하시는 날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느낀다. 주일 예배를 마치면, 이런 음성이 들려온다.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셨다.”(마 25:14-15). 여기서 주님이 우리에게 ‘자기 소유를 맡기셨다’고 하신 말씀이 중요하다. 신앙의 관건은 이것을 실제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 우리는 주일에 모여, 주님께 달란트를 받는다. 그 달란트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자기의 소유이다.

 

나는 매주일, 주일이 가까이 오면 긴장이 된다. 그리고 한 주를 돌아보게 된다. 특별히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그렇다. 내가 지난 주일예배를 마치고 주님께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썼는가?(은혜로 바꾸어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몇 달란트를 받은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본인이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달란트를 통해 어떠한 열매를 맺었는지가 중요하다. 주님이 주신 달란트는 ‘땅’과 같다. 농부가 정직하고 성실하게 땅을 일궜으면 땅은 그 소산을 낼 것이고, 그렇지 못했으면, 땅은 농부에게 소산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한 주간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따라, 주님 앞에 나아오는 우리 두 손에 들린 열매의 양이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빈 손으로 오기도 할 것이고, 어떤 이는 기쁨의 열매를 들고 올 것이다.

 

나는 목회자로서, 개인적으로, 한 주간을 잘 보내지 못하면, 주일 설교를 하기 너무 힘들다. 설교자의 설교는 말이 아니라, 한 주간 동안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일군 달란트 열매여야 할 텐데, 한 주간을 잘 보내지 못하면 열매로서의 설교를 하지 못하고, 그냥 말로서의 설교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혹시 열매로서의 설교를 하지 못하고, 말로서의 설교를 하면 그렇게 공허할 수 없다. 그 공허함에서 밀려오는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언제든지, 말의 설교가 아니라, 열매로서의 설교를 하기 위해, 아주 필사적으로, 다섯 달란트 남긴 종과 두 달란트 남긴 종처럼 한 주간을 잘 보내려고 노력한다. “주께서 내 입에 말씀을 넣어주시길!”

 

우리의 삶이 복되려면, 우리의 삶이 “악하고 게으른 종의 삶”이 되지 않으려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기지 않으려면” 우리는 매주일, 주님께 달란트를 받는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고, 주일에 주님께 나아올 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지난 주 받은 달란트에 대한 열매를 들고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안다. 만약 우리가 일주일 동안 아무런 열매 없이 주님 앞에 나오면, 스스로 자책하게 된다. 우리의 삶 자체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김을 당한 것처럼, 왠지 쓸쓸하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가끔 경험하는 삶의 현실일 것이다.

 

무엇이든지 너무 멀리 생각하지 말고, 짧게 끊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한꺼번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매주일 예배를 드리며 주님께 수여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종들을 불러”, 주님께서 주일에 우리는 부르신다. 그리고, “자기 소유를 맡기”신다. 우리는 주님의 소유를 맡은 종으로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에, 주님의 삶에 참여(participation)하는 삶을 살게 된다. 우리의 삶은 주님의 삶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에 발을 들여놓고 사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주님께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식으로 주님의 삶에 참여하게 되는 것일까? 달란트 비유는 비유이다. 우리가 주일에 주님께 예배 드리면서 실제로 무슨 달란트를 받는 것은 아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종들은 실제로 금 다섯 달란트, 금 두 달란트, 금 한 달란트를 받지만, 우리는 교회를 나서며 어떤 실체가 있는, 어떤 금품을 손에 받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100달러짜리 돈 다발 다섯 묶음, 두 묶음, 한 묶음, 이렇게 실물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고, 어떤 영적인 달란트를 받다 보니, 달란트를 받은 우리가 주님의 삶에 참여한다고 하는 게 무엇인지 손에 안 잡힌다.

 

영적인 달란트를 받은 우리가 주님의 삶에 참여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것은 기도생활이다. 기도생활을 보면, 참여를 알 수 있다.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은 그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바울은 육신적으로 매여 있는 상태라 빌립보 교회에 직접 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빌립보 교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삶에 참여했다. 어떻게? 기도함으로!

 

바울은 빌립보서를 ‘기도’로 시작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매어 있는 몸이라 기도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기도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가장 신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며,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잘 세워져 나가는지 어떤지, 직접 가볼 수 없어 애타는 마음으로 교회를 ‘염려’했다. 그러나 그는 염려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염려를 기도로 바꾸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삶을 놓아두고, 염려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염려를 기도로 바꾸는 일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는 참으로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확실 하기 때문이다. 온통 들려오는 소리를 염려의 탄식 뿐이다. 직장에 대한 염려, 비즈니스에 대한 염려, 자식에 대한 염려, 가족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미래에 대한 염려 등등, 우리의 삶은 전방위적으로 염려에 놓여 있다. 그런데, 그 염려를 기도로 바꾸는 일은 좀처럼 잘 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나친 염려 가운데 살아간다. 그렇다 보니, 두 가지 삶의 방식에 빠져버린다. 하나는 무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몰두하는 것이다. 염려가 심하면, 사람은 ‘될 대로 되라’고 삶을 포기한다. 모든 것에 무관심해진다. 내 삶이 어떻게 되든, 다른 이들의 삶이 어떻게 되든, 아니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관심이 없다. 이렇게 세상 무관심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반대로, 염려가 지나치면, 너무 삶에 몰두하게 된다. 삶의 모든 것에 너무 집착해서, 자신의 삶에 엄습해 오는 염려를 어떻게 해서든 물리쳐 보려고 한다. 바로 이러한 무관심과 몰두가 기도를 지나치게 만드는 변명거리들로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주님의 삶에 참여한다는 것은 주님께 삶을 맡긴다는 것과 같다. 맡기는 자는 동시에 맡은 자가 되는 것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염려가 많아서, 맡기지도 못하고 맡은 자가 되지도 못한다. 염려가 너무 많아 삶에 무관심한 자는 심지어 자신의 삶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내가 내 삶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염려가 너무 많아 삶에 너무 몰두하는 자는 자신의 생사여탈권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생명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기도가 필요 없다. 기도하지 않아도, 자기가 자기의 삶에 있는 염려를 몰아낼 수 있다는 자기확신이 기도를 멀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대한 염려가 많았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염려를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염려를 기도로 승화시키고 있다. 나는 기도합니다! I pray!”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삶에 참여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다른 이들의 삶에 참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 나의 삶과 다른 이들의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여한다는 것은 나의 삶이나 다른 이의 삶에 함부로 개입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된다. 자신의 삶에 함부로 개입한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현대인들에게는 이러한 성향이 강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남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사람을 일컬어서 ‘사이코패스(Psychopathy)’라고 한다. ‘사이코패스’의 특징은 자신이 상대방에 대하여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는 ‘네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내가 지금 너를 살려 두어서 그런 것이고, 나는 너를 언제든지 죽일 수 있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제도적 사이코패스로 발전하기도 한다. – 검찰개혁이 필요한 이유: 니가 감방 안가고 살아 있는 이유는 우리가 탈탈 털지 않아서야! / 군부독재(미얀마사태) / 전체주의 – 집단이나, 정권이나, 국가가 사이코패스 성향을 보이면 사는 게 힘들어진다. 그래서 조직이나, 집단이나, 정권이나 국가나, 민주적 개혁이 필요한 것)

 

이런 측면(자기 자신에게 함부로 개입하는 상황(자살률이 높다), 남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상황(갑질이 횡행한다))에서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도’이다. 기도를 단순히 목적으로 이루는 ‘수단’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기도를 그렇게 사용하는데 익숙하다. 뭔가 자기 자신이 이루고 싶은 열망이 생기면, 기도를 통해 그 목적을 이루려 한다. 그래서 기도를 그런 식으로 밖에 생각 안 하는 현대인들은 기도를 하면할수록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갈 뿐이다.

 

기도는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내려놓은 수단이다. 기도는 ‘참여’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에 직접 내가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통하여 나의 삶에 참여한다. 상대 방의 삶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상대 방의 삶에 참여한다. 특히나, 사람 문제에는 섣부르게 개입하면 안 된다.

 

조지아에서 목회할 때, 어떤 집사님 한 분이 부부문제로 상담을 해 오신 적이 있다.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였는지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분이 상담 끝에 나에게 아주 난감한 요청을 해오셨다. 본인이 곧 법원에 가서 이혼신청을 할 건데, 법원에 갈 때 남편이 자신을 해코지할 것 같으니, 본인을 법원까지 에스코트 해달라는 것이었다. 굉장히 난감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목회자인 내가 그분을 법원까지 에스코트하는 일은 부부관계에 직접 개입하는 일이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 이후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참 난감했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난감한 상황입니다. 00 집사의 청을 거절하자니 상처받을 것 같고, 들어주자니 너무 개입하는 것 같고, 어떻게 합니까. 주여, 주께서 해결해 주옵소서.” 그랬더니, 1주일 후에 그 집사님한테 연락이 왔다. “목사님, 법원에 갈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지난 번에 에스코트 부탁했던 것은 안 해주셔도 됩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염려와 위험으로 가득한 내 삶을 지키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기도하는 것이다. 내가 내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것만큼 나를 망치기 쉬운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나는 내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돌보심과 인도하심에 주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가장 안전하게 보살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기도합니다. 다른 이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것만큼 그 사람을 망치는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나는 그/그녀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그녀의 삶을 가장 안전하게 보살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 자신을 위해, 자식을 위해, 배우자를 위해, 부모님을 위해, 형제 자매를 위해, 친구들을 위해, 교우들을 위해, 나에게 염려와 걱정을 안겨주는 그 일을 위해, 이 세상의 불의한 일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가장 신실한 방법이다. 무관심 또는 몰두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그리고 다른 이들의 삶을 가장 따스하게 보살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삶과 다른 이들의 삶을 가장 안전하게 돌보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염려와 걱정이 우리를 엄습해 올 때, 또는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기도합니다.”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기도합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