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2. 24. 05:46

내가 바로 바로(파라오)다

(출애굽기 10:15-20)

 

1. 이런 상상을 해봤다. 천국문이 있고 그 문지기로 구약을 대표로 모세가, 신약을 대표로 베드로가 문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천국문을 통과하려면 모세가 내는 퀴즈와 베드로가 내는 퀴즈를 맞춰야만 한다.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는 그들이 낼 문제를 예상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러면 모세는 어떤 문제를 낼 것이고, 베드로는 어떤 문제를 낼 것 같은가. 아마도, 모세는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본인이 일으킨 열 가지의 재앙이 무엇인지를 순서대로 나열해 보라고 문제를 낼 가능성이 크고, 베드로는 열 두 제자의 이름을 성경에 나오는 순서대로 외워보라는 문제를 낼 가능성이 크다. 모세는 자신이 낸 문제를 맞힌 사람을 칭찬하면서 자신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고, 베드로는 자신이 낸 문제를 맞힌 사람 앞에서 열 두 제자의 이름 중 자기의 이름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는 것에 대해서 강조하며 자랑할 것이다.

 

2. 천국문을 통과할 때 풀어야 하는 문제가 이 정도라면 많은 이들이 어렵지 않게 천국문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식적인 문제를 넘어, 심층적인 질문을 던지면 어떻게 될까? 모세가 이런 문제를 냈다고 생각해 보자. ‘열 가지 재앙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열 가지 재앙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말 해보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천국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열 가지 재앙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해석을 내놓을 것이다. 그 대답이 만족스러우면 천국문을 통과하게 되는 것이고, 만족스럽지 못하면 통과 못하게 된다.

 

3. 가장 훌륭한 해석이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 보아야겠지만, 가장 저급한 해석은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열 가지 재앙은 우리에게 이러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안 들으면 이런 재앙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모세가 이러한 해석을 들으면 이렇게 말한 사람을 천국문에 들이겠는가, 아니면 들이지 않겠는가. 내가 만약 모세라면 천국문에 들이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것은 참으로 저급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폭력의 하나님으로 전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4. ‘하나님 말 안 들으면 이런 재앙을 입을 것!’이라는 해석은 가장 저급한 해석이다. 하나님을 폭력의 하나님으로 전락시키는 말이다. 우리는 누구든지 공포와 불안을 자아내는 사람과 멀리해야 한다. 공포와 불안을 자아내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공포와 불안 가운데 산다. 공포와 불안을 부추기는 자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취하려는 자일 가능성이 크다. 광고들(약장사들)이 다 우리의 공포와 불안을 이용해서 돈을 번다. 우리를 악에 내어주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다. 우리에게 공포와 불안을 가져다주는 일이 혹시 발생하거든, 그것에 휩쓸리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이 우리에겐 더 필요하다.

 

5.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재앙을 겪는다. 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사람은, 그런 때가 언제 자기에게 닥칠지 알지 못한다. 물고기가 잔인한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는 것처럼, 사람들도 갑자기 덮이는 악한 때를 피하지 못한다”(전도서 9:11b-12). 우리는 살면서 죽음, 질병, 인간관계의 손실, 금전적 피해, 자연재해, 전쟁 등의 재앙을 겪는다. 재앙이 닥치는 것은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무력해지고, 그 무력한 실존을 조금이라도 극복해 보고자 신앙을 갖는다. 정말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를 이루게 해주는 어떤 힘이나, 또는 우리를 너무도 괴롭게 하는 어떤 일의 원인적인 힘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차라리 섬기고, 그것으로부터 구원을 얻기 바라는 마음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무속(무당)은 인류가 숨쉬며 살아 있는 한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못 말린다. 권력의지가 있는 사람(정치인들이 무속을 의지하는 것), 성공의지가 있는 사람(‘나의 아저씨’ 고사지는 모습 공개), 무엇이든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간절함을 이루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하게 되어 있다.)

 

6. 간암으로 6년 동안 투병하시던 아버지에게 병원에서 의사가 이제 8개월 밖에 못산다는 선고를 내렸을 때, 아버지가 우리들을 병원으로 불러서 그 말씀을 전하셨다.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으로 경기도 양평에서 암병을 고친다는 기도원에서 몇 달 간 지내기도 하셨다. 매주 금요일 나와 형이 번갈아 가면서 아버지를 양평 기도원에 모시고 갔다. 내가 지금 후회하는 것은 그때 아버지랑 더 열심히 기도할 걸, 그렇지 못한 거다. 이제 8개월 밖에 못산다는 의학적 선고를 받으신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두려우셨을까, 그때보다 철이 좀 든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그때 그 마음을 더 이해하고 함께 집회 참석해서 아버지의 마음에 힘이 되어 드렸어야 하는데, 아버지가 기도원에 들어가 집회 참석하시면서 기도하시는 동안 나는 차 안에서 잘 때가 많았다. 그때는 왜 그렇게 피곤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사실, 그때 기도원 원장이 여자 목사였는데, 솔직히, 사기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그때 잘못 생각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에 초점을 맞췄어야 하는데, 사기치는 것 같은 그 기도원 원장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에 신경이 쓰이다 보니, 아버지의 마음을 좀 더 따스하게 보듬어 드리지 못한 것 같다. (아버지는 주치의 선고대로 8개월 사시다 가셨다.)

 

7. 어떤 병으로 고생을 죽도록 하는 사람은 그 병을 내린다고 생각되는 존재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병을 거두어 가 줄 것을 요청한다. 그 뿐만 아니라 어떤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이 자꾸 우리를 괴롭힌다면, 우리는 그것을 일으키는 힘을 가진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으며 그 존재에게 제물을 바치며 구원을 간구하게 된다. 미신은 나쁜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 인간의 애환이 담긴 소박한 마음이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더 이상 그러한 미신은 많이 물러갔지만, 여전히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미신에 기대며 살기도 한다. 인간은 그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뜻이다.

 

8. 고대근동의 신화적 세계를 모르면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은 이해하기 쉽지 않고, 잘못 해석될 수 있다. 바로 위에서처럼 말이다. 열 가지 재앙을 보면서 ‘하나님 말씀 잘 안 들으면 재앙을 겪게 된다’는 해석처럼 말이다. 그런데 다행히 지금은 고대근동의 신화적 세계관에 대하여 많은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과의 대결이었다는 내용은 많이 알려져 있다. 옛날 사람들이 섬긴 신이라는 것이 사실은 별거 아니다. 간절한 소망이 미신을 만들어 낸다. 애기를 낳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는 여인은 삼신 할머니한테 정성을 들이는 법이다. 조선시대의 양반집 여인이 임신을 했을 때 신발조차도 가지런히 정돈하면서 조심조심 산 것은 출산을 할 때 어려움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아이가 잘못됐을 때 ‘나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인간은 아주 소박하고 연약한 존재이다.

 

9.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실존적으로 해석을 하게 되면, 하나님을 폭군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열 가지 재앙은 본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 재앙을 당하는 애굽의 입장에서는 그처럼 잔인한 폭력이 없다. 애굽의 생명줄이었던 나일강물이 피로 변하는 것은 애굽 사람들의 생명을 끊어 놓는 일과 다르지 않다. 매우 잔인한 재앙이다. 나일강에서 개구리가 올라오는 재앙도 그렇고, 티끌이 이가 되는 재앙, 파리가 가득한 재앙, 우박이 내려 삼과 보리 농사를 망쳐 놓는 재앙, 그리고 공포의 메뚜기 떼가 우박으로 인하여 상하지 않았던 밀과 보리까지 다 먹어버리는 재앙은 그야말로 애굽 사람들의 생명을 끊어 놓는 잔인한 일이다.

 

10. 게다가 세상이 온통 흑암으로 변하는 재앙은 어떤가. 지금이야 캄캄해지면 촛불을 켜든, 비상용 손전등을 켜든, 전기가 들어오면 전등을 켜든 하면 되겠지만, 그 시절 흑암은 공포 그 자체였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밤에 일할 수도 없고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밤은 깜깜했다. 불 끄고 떡을 칼 같이 써신 한석봉 엄마의 솜씨는 실로 신의 경지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깜깜한 흑암을 몰아내는 태양 빛을 사모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당시 사람들에게 폭력 중의 가장 큰 폭력은 태어난 것의 처음 것(장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 일이 발생했을 때,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애곡했다. 비극도 그런 비극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의 이야기를 실존적으로 해석하면 아주 끔찍한 폭력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경을 해석할 때 아주 조심스럽게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연습이 꼭 필요하다. 신학적으로 해석해서 실존적으로 적용해야지, 실존적으로 해석해서 신학적으로 적용하면 아주 큰 모순이 발생한다.

 

11. 한국어로는 ‘뱀’으로 번역했지만, 히브리어의 ‘나하쉬’는 바다 용, 바다 괴물, ‘큰 바다 괴물’을 뜻한다. 고대근동 사람들이 바다로 대표되는 혼란과 무질서의 신비로운 영역에 큰 바다 괴물이 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세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고 애굽의 술사들이 만들어낸 뱀을 모세의 뱀이 잡아먹은 것은 애굽 사람들이 생각했던 큰 바다 괴물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주권과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열 가지 재앙에서 일관되게 하나님께서 그 재앙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나일강에서 애굽 왕 바로의 장자에 이르기까지, 애굽에서 신격화되어 숭배받는 자연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며 “이제까지 네(바로)가 듣지 아니하도다.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7:16-17)에 대한 선포이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신이시다.

 

12. 애굽 사람들에게는 나일강이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에 그들은 나일강을 신처럼 모셨다. 나일강 신의 이름을 하피였다. 그 당시 고대근동의 사람들은 파리 떼 때문에 엄청난 괴로움을 당했다. 파리는 위생의 문제를 일으켰다. 파리 떼가 들끓어 많은 이들이 질병에 시달렸다. 그래서 그들은 파리로부터 구원을 받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파리를 섬겼다. 파리 왕의 이름은 바알세붑(Beelzebub/비엘저법)이었다. 이와 연관된 이야기가 열왕기하 1장에 나온다. 북이스라엘의 왕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서 병들었는데, 아하시야 왕은 자신의 병이 낫겠는지 신탁을 받으러 신하를 이웃 나라 에글론에 보낸다. 그리고 에글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묻는다. “내 병이 낫겠소?” 바알세붑, 파리 대왕한테 가서 자기의 병이 낫겠느냐고 묻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했다. 그때 활동했던 선지자가 엘리야 선지자였다. 엘리야 선지자가 아주 화끈한 사람인데, 열 받아서 아하시야 왕한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왕하 1:6).

 

13. 열 가지 재앙은 여호와 하나님과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의 싸움이었다. 나일강의 신에서부터 메뚜기 떼를 막아 준다는 민(Min) 신, 그리고 태양신 라, 죽음의 신 오시리스, 파라오들의 신 호루스 등, 그들이 믿는 신들은 여호와를 물릴 칠 수 없고 이겨낼 수 없으며 여호와 앞에서 무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집트에서 신의 현현으로, 즉 눈에 보이는 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바로(파라오)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대로 이스라엘을 내보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앙은 신학적인 이야기이고 신앙적인 이야기이다. 폭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재앙을 겪을 까봐, 폭력을 당할까봐 하나님을 믿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밖에 없다는 진리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겠다고 결심해야 하는 것이다.

 

14. 열 가지 재앙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윤동주의 다음 시가 떠오른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15. 윤동주의 <참회록>이라는 시이다. 열 가지 재앙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보이는데, 애굽의 왕 바로가 그이다. 그리고 곧바로 내가 바로 바로(파라오)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바로 바로(파라오)다.” 자신이 섬기는 신들을 무력하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면서도 바로(파라오)는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고 점점 더 강퍅해진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강하고 완악하게 하신 거라고 성경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누군가 나의 마음을 보면서 완강하고 완악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내 마음을 이렇게 완강하고 완악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주님, 내 마음의 완강, 완악을 풀어주시고

내 마음을 부드럽게(온유케) 하옵소서.”

16. 팬데믹 때문에 경제가 어렵고, 전쟁의 소문이 들려오고, 대통령 선거로 인하여 이념갈등과 진영갈등이 심한 이때에, 사람들의 마음은 완강해지고 완악해진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인간은 그렇게 외부의 조건과 환경에 의해서 휩쓸리기 십상이다. 팬데믹 때문에 경제가 힘들어지고 정신적인 공황이 심해지니까 약자를 향한 폭력이 심하게 늘었다. 이 어려운 때에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큰 나라들이 작은 나라를 중간에 끼고 불안을 조성하고 있다. 세상이 점점 더 살기 어렵다 보니, 사람들은 정치가 세상을 구원해 줄 것 인양, 본인이 지지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살기 좋은 세상이 올 거라는 믿음을 관철시키려고 서로 비방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고 있다.

 

17. 어렵고 힘들고 혼란스러운, 이 재앙 같은 시절에, 마음이 휩쓸리면 우리는 열 가지 재앙 이야기에서 완강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사태를 점점 더 힘들게 만드는 바로(파라오)를 만나게 된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이 어디에서 오는지 늘 생각하며, 우리의 마음이 완강해지고 완악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내보내 나를 섬기게 하라.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바로와 같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는다면, 우리는 이 어렵고 힘들고 혼란스러운 재앙 같은 시절에, 더욱더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내 마음의 완강, 완악을 풀어주시고

내 마음을 부드럽게(온유케) 하옵소서.”

 

우리의 부드러운 마음(온유한 마음)이 평안과 평화를 이루게 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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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