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의 신학]

 

성취는 자기 구원이고, 자기 자신을 다른 존재와 차별성을 두려는 행위이다. 성취는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결국 성취는 나의 생명은 풍성하게 할지 모르지만 나 외의 다른 생명은 착취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취를 부추기는 사회는 생명이 고통 당하고 생명의 크기가 작아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놀이는 생명들과의 어우러짐이다. 놀이는 자기 바깥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존재와 차별성을 두기보다 그들과 어울려 모든 생명을 보듬으려 한다. 그러므로 놀이의 사회는 생명이 만족을 느끼고 생명의 크기가 커질 수밖에 없다.

 

돈을 버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사귐을 갖는 것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우리 인간의 모든 활동은 성취가 되는 순간 생명의 크기는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놀이가 되는 순간 생명의 크기는 커진다.

 

나는 성취하려 일하지 않는다. 나는 성취하려 공부하지 않는다. 나는 성취하려 목회하지 않는다. 나는 생명을 보듬기 위하여 일하고 공부하고 목회한다. 나는 이것을 '놀이의 신학'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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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