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9. 9. 07:36

[로마서와 한국교회]

 

요즘 한국교회를 보면, 바울이 로마서에서 신랄하게 비판하는 '약한 자들(유대인 그리스도인)'이 된 듯합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특권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특권 의식을 가질 수 있는 구체적 물증은 '토라'였습니다. 토라를 통해 그들은 선민의식을 가졌고, 그 특권을 이용하여 그 특권을 공유하지 못한 '이방인 그리스도인(강한 자들)'을 비판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토라 준수를 강요하고, 특별히 음식정결법과 안식일, 할례의 준수를 통해서 이스라엘 회중에 들어와야 구원을 받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바로 이러한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들고, 경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고, 경계 바깥에 있는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 이들이라는 이상한 이분법을 통해 자신들의 특권을 주장하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바울은 "당신들이 틀렸소!"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를 보면, 바울에게 비판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는 '실패한 유대인'이 되려는 듯합니다. 성경(또는 복음)을 '토라'로 전락시켜 자신들이 토라를 가졌기에 특권층이고, 그 특권 의식을 앞세워 도덕적 정죄에 앞장서면서 위선에 빠져버린 듯합니다. 그들이 위선자인 것은 안과 밖을 경계짓는 몇 가지의 율법만 준수할 뿐, 율법 전체를 신실하게 지키려는 생각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에 등장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행위들은 음식정결법, 절기(안식일), 그리고 할례입니다. 그들은 이 세 가지를 지키는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유대인이냐 아니냐, 즉 구원받았느냐 아니냐를 구분 지었습니다. 이 행위들은 그들의 신실함을 표시한다기 보다 그냥 자신들을 다른 이들과 구분짓는 경계 표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경계 표시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함으로 그들도 자신들의 경계 안에 들어와야 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줄곧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구분짓는 경계 율법(행위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술담배 문제, 제사문제, 주일성수 문제 등이었다가, 최근에는 동성애 문제, 종교다원주의 문제 등으로 그 이슈가 바뀌었습니다. 성경이, 또는 복음이 '토라'화 되면, 경계 지으려는 행위들이 계속해서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이라는 것이 '행위들'로 축소되어 바울이 그토록 바로잡고자 했던 '율법과 복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발목이 잡혀 초등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딱 그 수준으로 전락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렇게 경계 짓고 구분 지어 사람들을 정죄하는 한국교회를 생각하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가 다음과 같이 경계를 짓는다면, 굉장히 기분 나쁠 것입니다.

 

E.P. Sanders(E.P. 샌더스)의 '바파유(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출간 이후, 바울 신학은 이전에 보던 방식으로 더이상 들여다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샌더스의 연구에 따라, 유대교도 행위의 종교가 아니고 은혜의 종교라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시대에, '은혜'를 말하면서도 결국 그 은혜와 믿음을 '행위'로 다시 환원시켜 온갖 경계들을 만들어내는 한국교회의 후진성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우리 시대의 과제입니다.

 

본인이 다니고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에게 'E.P 샌더스'를 아느냐고 한 번 물어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 샌더스의 '바파유'를 아느냐고 물어보면 어떨까요. 또한 샌더스가 바파유를 통해서 기독교가 바울 신학, 유대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어떤 통념을 뒤집었는지를 물어보면 어떨까요. 본인 교회의 담임목사가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그 교회를 계속 다녀도 괜찮을 것이고, 그러나 담임목사가 샌더스를 알지도 못하고, '바파유'가 뭔지도 모르고, 샌더스 이후의 바울 신학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른다면, 그 교회를 계속 다닐지 말지 한 번 고민해 보라고 하면 어떨까요. 이렇게 특정인이나 저서를 기준으로 해서 담임목사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그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아닌지 판단한다면, 굉장히 기분 나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마치 ‘율법의 행위들’을 요구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처럼 복음과 율법의 행위들을 연관시켜, 사람들을 판단하고 경계 짓는 일에 너무 열중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 이름 외에 어떤 것도 알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은 바로 이 복음에 있는 것인데, 왜 우리는 여전히 ‘율법의 행위들’을 요구하며,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나누고, 마치 자신들은 구원을 보장받은 사람들 인양 자신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경계 짓고 몰아내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아직도 복음이 온전히 전해지지 못해서 그런 듯합니다.

 

한국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입니다. 한국인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한국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인 한국교회가 바울의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2의 이스라엘(유대인)이 되려 하지 말고, 신실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 한국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행위들을 통해 경계 짓는 신앙을 구사하지 말고, 은혜를 사모하여 성령의 법을 통해 온 우주 만물을 품에 안아 사랑과 믿음으로 교회를 세워가길 소망합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