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9. 9. 06:10

로마서 1: 서로 문안하라

(로마서 16:1-16)

 

1. 로마서는 편지다. 2000년 전, 편지는 지금처럼 우편 배달부가 대신 배달해 주는 체계가 아니었다. 신뢰할 수 있는 인편을 통해 자신의 편지를 전달했다. 로마서는 바울이 썼지만, 그것을 로마교회에 전달한 인물은 ‘뵈뵈(Phoebe)’이다. 로마서가 편지라를 것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편지는 구체적인 발신자가 있고, 구체적인 수신자가 있다. 그리고 편지는 구체적인 내용을 다룬다. 즉, 편지를 쓴 사람은 수신자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의견을 표출하고, 그 의견을 통해서 수신자가 겪는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2. 로마서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교회가 당면한 삶의 정황을 먼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바울 당시 로마는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제국이었지만, 그곳에 자리 잡은 로마교회는 매우 보잘것없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로마교회는 한 덩어리의 교회가 아니었으며, 3~5개 정도의 가정교회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당시 교회는 지금처럼 한 처소에서 다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몇 명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각 가정에서 삼삼오오 모였다. 3~5개 정도의 가정교회 구성원을 모두 합하면, 100명에서 최대 200명 정도의 그리스도인이 로마교회를 구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몇 명 안 되는 구성원이 모인 교회였지만, 그 안에서 발생한 문제는 굉장히 다이내믹하고 해결하기 쉽지 않았다. 로마교회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 부류는 로마교회를 세운 유대인 그리스도인(Jewish Christian)이었고, 다른 부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Gentile Christian)이었다. 유대인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로마교회는 처음에 유대인이 가진 문화 중심으로 교회가 운영되었다. 그러다, AD 49년경 로마의 황제 클라우디우스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추방을 당한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 18장 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글라우디오(클라우디우스)가 모든 유대인들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4. 사도행전 18장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유대인 추방 명령 때문에 브리스길라(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그곳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 함께 사역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침 생업도 같아서 바울과 이들 부부는 함께 일하며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그곳에서 사역하는 일에 서로 잘 협력할 수 있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바로 그 시절에 고린도 근처에 있는 항구도시 겐그레아에서도 이들은 사역을 했고 그때 세워진 겐그레아 교회에서 뵈뵈를 만났을 거로 추측한다. 그러니까, 바울과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 그리고 뵈뵈는 꽤 특별한 인연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5. 몇 년 후, 추방령을 내렸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죽자 그 뒤를 이어 네로가 황제에 등극을 했고, 네로 황제는 클라우디우스가 시행했던 유대인 추방령을 취소한다. 그러자 로마를 떠났던 유대인 그리스도들은 다시 로마로 돌아왔고, 로마교회를 지키고 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다시 교회를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추방당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교회를 떠나 있는 동안에 시작된다. 유대인 중심으로 로마교회의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교회에서 떠나 있는 동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형성했던 교회 문화를 없애 버리고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교회 문화를 구축해 놓았던 것이다.

 

6. 게다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로마에서 오랜 세월 터를 잡아 살아온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추방당했다 다시 돌아온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신분에는 차이가 존재했다. 추방되었다 돌아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은 미미했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 또한 낮아졌다. 무엇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교회에 다시 합류했을 때 그들을 가장 괴롭힌 문제는 율법 준수의 문제였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떠나 있는 동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아도 되는 교회의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두 부류 간에는 갈등이 끊이질 않았고 둘 사이에는 깊은 골이 생겼다.

 

7. 로마서에는 로마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두 부류를 각각 지칭하는 명칭이 나온다. 강한 자들(the strong)과 약한 자들(the weak)이다. 누가 강한 자들이고, 누가 약한 자들일까?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강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약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정확히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르는 명칭은 아니다. 이방인 중에서도 약한 자들의 부류에 끼는 사람들이 있었고, 유대인 중에서도 강한 자들의 부류에 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을 나누는 기준은 율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율법을 준수하고 구약성경의 내러티브 안에 존재하기를 원했던 이들은 약한 자들의 부류에 속했고, 율법과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내러티브에 별 감흥이 없는 이들은 강한 자들의 부류에 속했다. (한국교회의 술담배 문제를 생각해 보라.)

 

8.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로마서에서 율법에 대한 이야기가 첨예하게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정황 때문이다. 율법이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이 평화롭게 지내는 것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두 부류가 평화를 이루는데 있어 율법의 문제를 넘어서지 않고는 해결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율법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매우 달랐기 때문에 두 부류 사이에는 긴장이 멈추질 않았다. 한 마디로, 평화가 없었다. 이 두 부류의 이러한 긴장 관계를 떼어 놓고 로마서에서 벌이고 있는 율법 논쟁을 읽으면 안된다.

 

9. 바울신학과 로마서는 개신교인들에게는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신학과 로마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색깔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서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바울의 신학과 로마서의 내용을 아주 면밀하게 살펴왔다. 최신 연구에 의하면, 로마서를 읽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로마서를 거꾸로 읽는 것이라는 제안이 있다(스캇 맥나이트). 로마서를 1장부터 정방향으로 읽어 나가면 놓치게 되는 것이 있는데, 로마서가 편지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는 교리서가 아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1장부터 정방향으로 읽어 나가면, 로마서는 바울이 기독교 신학을 정교하게 다듬은 교리서처럼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로마서가 편지라는 것을 망각하게 되고, 편지라는 것을 망각하게 되는 순간, 로마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왜곡되기 쉽다는 것이다.

 

10.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로마서는 16장부터 거꾸로 읽어 나가는 전략이 필요하다. 16장부터 거꾸로 읽어 나갈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어떠한 교리적 선언(doctrines)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리고 공동체이다. 우리는 뵈뵈라 불리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먼저 만나게 되고, 곧바로 로마교회 공동체의 일원들(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바로 이거다. 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복음이지, 사람을 어떠한 교리에 맞춰 재단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문안하는 것이다. 서로가 문안한다는 것, 안부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상대방을 내 삶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귐이 없으면, 그 어떤 장대한 교리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11. 로마서에서 뵈뵈는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가본 적이 없다. 로마교회는 로마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교회이지, 예수님의 열 두 제자나, 바울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전혀 아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가본 적도 없고, 그곳의 구성원 중 몇몇만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 그 교회의 구성원들을 만나본 적이 없다. 즉, 그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나눈 적이 없다. 그래서 로마서는 편지 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조심스러운 말투와 격식을 갖춘 말투로 되어 있다. 이런 분위기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 특별히 빌립보서나 고린도전후서와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바울은 빌립보서나 고린도전후서에서는 그곳의 구성원들과 친밀한 교제를 했던 터라, 감정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로마서에는 그러한 감정의 호소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로마교회의 구성원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에게 감정적인 호소를 하는 일은 별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적이지 못하다.

 

12. 뵈뵈는 ‘로마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를 들고 로마에 왔다. 아마도 뵈뵈는 겐그레아를 떠나 로마에서 살려고 왔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뵈뵈는 로마교회의 교인들 앞에서 바울의 편지를 낭독해야 하는 중대한 사명을 가진 여인이었다. 뵈뵈가 어떻게 바울의 편지를 낭독하느냐에 따라서 로마교회를 향한 바울 사역의 성패가 달렸던 것이다. 뵈뵈라는 이름의 뜻은 ‘타이탄의 여인’이라는 뜻이다. 이름에서 벌써 이방인이라는 게 나타난다.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에서 왔고, 그곳의 일꾼이었다. 한국어로는 일꾼이라고 번역했지만, 영어로는 servant 또는 deaconess로 번역한다. 우리가 잘 아는 말로,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였다.

 

13. 한국교회에서 집사(servant, deaconess/deacon/일꾼)라는 호칭은 장로나 권사 되기 전 단계의 직분 이미지가 강하지만, 성경에서 집사의 원래 뜻은 ‘교회의 사역을 공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교회의 공직자’라는 뜻이다. 지금도 공직자로 세워지려면 여러가지 도덕적 성품이나 지도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처럼, 뵈뵈가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였다는 것은 그가 교회 공동체로부터 그리스도인다운 성품이나 지도력의 은사를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집사 직분에는 이렇게 인정과 책임이 담겨 있는 것이다. (공무원, 공무수행)

 

14. 게다가 바울이 뵈뵈를 일컬어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라고 명확히 말하는 이유는 바울에게 있어 뵈뵈는 단순히 한 교회의 일꾼이 아니라 자신의 동역자라는 의미를 담고자 함이다. 뵈뵈는 그냥 집사가 아니었다. 바울의 동역자였다. 바울에게 아볼로나, 두기고, 디모데, 에바브로, 디도 같은 동역자가 있었듯이, 뵈뵈는 바울에게 이들과 같은 존재였다. 그뿐 아니었다. 뵈뵈는 “여러 사람과 바울”의 후원자였다. 그 당시 로마 문화에서 ‘후원자’라는 뜻은 매우 명예로운 호칭이었다. 바울에게 뵈뵈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뵈뵈가 바울의 편지를 로마교회에 전하는 사람인 것이다. 로마교회는 뵈뵈를 자매로 받아들여야 할 의무를 갖게 된다. 바울이 뵈뵈를 그들에게 추천했기 때문이다. 이제 뵈뵈는 로마교회에 머물며, 바울의 메시지를 생동감 있게 전하게 될 것이다. 바울의 사역은 뵈뵈에게 달렸다. (로마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그래서, 뵈뵈에 빙의하듯이 전해야 한다. 나는 뵈뵈다.)

 

15. 바울의 뵈뵈 천거에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는 온통 ‘문안’에 대한 것이다. 스물 대여섯 명의 이름이 나열되고, 거명되는 이름 외에도 그들을 둘러싼 이들에 대한 문안이 계속 이어진다. 인사를 나누는 이 장면에서 계속 반복되는 두 개의 용어가 있다. 하나는 ‘문안하라(greet)’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이다. 이들이 서로 나누는 문안 인사는 일반 사람들의 문안과는 다르다. 이들의 문안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문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권면을 아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이 편지를 로마교회에 보내게 된 이유를 알면 문안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16. 여기에서 열거되는 이름들을 볼 때 우리는 구분을 잘 하지 못한다. 우리가 보기에 모두가 그냥 이국적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 열거된 이름들은 그 사람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인지, 이방인 그리스도인인지를 드러내고 있다. 누가 유대인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이방인 그리스도인인지 구별하는 작업은 단순한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하지 않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이 두 부류 사이의 갈등을 생각하면 바울이 이들에게 서로 문안하라고 말하는 것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17. 마지막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서로 갈등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의 건강함은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서로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고 있는가, 아닌가. 서로 간에 평화가 없으면 서로 문안할 수 없다. 하지만 서로 문안하는 것은 서로 간에 평화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18.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첫 번째 원칙은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고, 그리고 서로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는 것이다. 문안하는 일은 내가 당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집중한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람의 삶을 보듬고 있다는 뜻이다. 진실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는지, 어떤지, 궁금할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안부를 묻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 새롭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19. 우리 교회의 정황을 돌아볼 때, 로마교회보다는 훨씬 평화롭다. 우리는 로마교회처럼 극렬한 대립 가운데 있지도 않고,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 문안하라’는 말씀을 지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00년대 들어와서 주류교회들이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동성애 문제 때문에 두 부류로 나뉘어 첨예한 대립을 함으로써, 교회가 분열의 아픔을 계속 겪고 있다. 최근 UMC 교회도 주류교회 중 마지막으로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는 중이다. GMC 교단이 새로 출범해서 UMC에 소속되어 있던 많은 교회들이 UMC를 떠나 GMC로 옮기고 있다. 우리는 적어도 이런 풍랑 가운데 있지 않으니, ‘서로 문안하라’는 말씀을 좀 더 잘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0.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면 좋겠다. ‘서로 문안하라!’ 이 말씀을 삶 속에서 실제로 실행에 옮겨보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문안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제애, 자매애는 교회 공동체의 기초이다. 기초가 튼튼해야 건물을 잘 지을 수 있듯, 신앙의 기초가 튼튼해야 교회 공동체가 든든히 세워지는 것이다. 말씀에 순종해 보자. (이번 주에 적어도 한 사람에게 카톡이나 전화해서 안부를 물어보자. 내가 먼저. 특별히 오랫동안 안부를 묻지 못했던 교회 지체에게 안부를 물어보자. 그리고 목사의 안부 연락을 수동적으로 기다리지만 말고, 목사에게 먼저 안부를 물어오는 형제자매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안부 묻는 일은 어떤 한 사람에게 지워진 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 된 교회 공동체 모든 구성원에게 지워진 사역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