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9. 12. 18:10

로마서 2. 업신여기는 자, 비판하는 자

(로마서 14:1-12)

 

1. 성경이 시대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성경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친절하지 못하다. 구약성경 중 열왕기상하를 읽을 때도 가장 헷갈리는 것은 왕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면서 남유다 왕과 북이스라엘 왕에 대한 지시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잘 알고 있지 못한 이들은 남과 북 왕조의 이야기가 얽히고 설켜 있는 이야기 구조가 굉장히 헷갈린다. 현대인들이 열왕기상하를 읽으면서 잘 분별해야 하는 것은 누가 남유다 왕이고, 누가 북이스라엘 왕인지 구분해 가면서 읽는 것이다.

 

2. 신약성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이 쓰여진 시기에 따라서 차례대로 배열되어 있으면 좀 더 쉽게 다가올 텐데, 신약성경도 쓰여진 시기와 상관없이 뒤죽박죽 배열되어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굉장히 헷갈리게 만든다. 바울서신 중에 로마서가 가장 먼저 배열되어 있지만, 로마서보다 고린도서, 데살로니가서, 갈라디아서 같은 것이 먼저 쓰여졌다. 또한, 바울서신을 읽을 때는 사도행전과 함께 읽어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3.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전’, 즉 사도들이 예수님의 승천 이후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다녔는지를 기록한 책이지만, 실상 들여다보면, 베드로와 바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에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13장 이후부터는 바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도행전 28장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사도행전 다음에 로마서가 나온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굉장히 헷갈리고, 로마서의 메시지를 오해할 소지가 있다. 로마서는 사도행전 28장에서의 바울 사역을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 로마서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들여다보기 전에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을 먼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 이하에 보면, 바울은 베드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좋은 말로 표현을 해서 그렇지, 좀 거칠게 표현하면, 바울은 베드로를 욕하고 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갈 2:11). 게바(베드로)가 안디옥에서 무슨 잘못을 한 듯하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바울은 베드로를 만나 면전에 대고 욕을 했다. 도대체 베드로는 무슨 잘못을 한 것일까? 갈라디아서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베드로는 매우 비겁한 짓을 했다. 안디옥에서 이방인(이방인 그리스도인)과 함께 밥을 먹다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인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가 보낸 어떤 이들이 안디옥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는 급히 이방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자리를 피했다.

 

5. 베드로만 이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전도한 바나바조차도 베드로와 동조하여 이방인들과의 식사 자리를 급하게 떴던 것 같다. 바울은 베드로의 이 모습이 전혀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사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며 베드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다시 한 번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6. 바울이 베드로에게 화가 나서 욕을 퍼붓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힘주어 말하는 것에 대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도행전으로 가야 한다. 사도행전 15장에는 굉장히 중요한 공의회(Church Council)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이렇게 공의회를 열게 된 이유는 15장 1절 이하에 나온다. “어떤 사람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7. 초대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기독교의 유대화’ 문제였다. ‘그리스도인(follower of Christ)’이라는 말이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 11장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데, 안디옥에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모여 안디옥 교회를 세우고 함께 지냈을 때, 그곳 사람들이 이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안디옥은 이방 지역이었고, 이방인들이 주된 멤버들이었던 교회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큰 시련이 닥치는데, 그것은 교회 바깥에서 온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온 시련이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것이다. 이 핍박은 황당하게도, 복음의 핍박이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요구했던 것이다. “너희가 만약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거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이 되라!”

 

8. 이것은 이방인 전도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복음에서 벗어난 요구였다. 그러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완강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으며, 이방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 그리고 바울이 가서 복음을 전하여 세운 이방 지역의 교회마다 찾아다니면서 바울의 가르침을 뒤엎는 일들을 했다. “바울이 가르친 것은 거짓이다. 너희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바울 서신을 들여다보면, 온통 이 문제이다. 갈라디아서도 그렇고, 고린도전서도 그렇고, 로마서도 그렇고, 중요한 바울서신들은 바로 이것에 대한 싸움이다.

 

9. 이 문제는 초대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을 예루살렘에 모이게 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있었던 첫 번째 공의회였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진다. 그 결정문을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는 베드로나 바울이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였다)가 읽는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행 15:19-21).

 

10. 예루살렘 공의회의 판단은 한 마디로,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있어 율법을 준수할 필요가 없고, 유대인이 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악한 일들만 피하면 된다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공의회가 그렇게 결정했어도, 보수적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율법의 행위들을 하지 않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멀리했고, 그들에게 계속해서 율법의 행위들을 요구했다. 그래야만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복음을 율법의 행위들과 집요하게 결부시켰다.

 

11.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은 율법의 행위들과 복음을 연관시켜 구원을 말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가는 곳마다 골머리를 앓았다. 그리고 그 문제는 로마 교회에서도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로마서의 본문은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로마서에는 ‘강한 자들’에 대한 교훈과 ‘약한 자들’에 대한 교훈이 번갈아 가면서 나온다. 이러한 구조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것을 모르면, 로마서의 메시지를 완전히 놓치고 엉뚱한 해석을 낳게 된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바울이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에게 번갈아 가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면, 로마서가 눈에 들어온다. 이 구조를 기억하는 것은 로마서 이해에 있어 필수적이다.

 

12. 14장 1절의 말씀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여기에 두 주체가 등장한다. 하나는 ‘믿음이 연약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당연히 ‘약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너희’는 그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강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먹는 것’과 ‘절기를 지키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울서신에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아는 것은 로마서뿐만 아니라 바울서신 전체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하다.

 

13.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율법을 지키라”고 말하고, 바울서신에 자주 등장하는 ‘율법의 행위들’은 율법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강요하는 율법의 행위들은 세 가지이다. ‘음식정결법(먹는 문제/무엇을 먹을 것인가)’, ‘절기법/안식일 지키는 문제’, 그리고 ‘할례’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도행전 16장에 등장하는 ‘디모데’다. 디모데의 엄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이방인)이었다. 디모데는 사실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를 데리고 선교 여행을 떠나려 할 때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유대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행한다. 또한 사도행전 21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데리고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아주 큰 소동을 겪게 된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오해하길,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드로비모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했다. 이 일 때문에 바울은 유대인들에 의해 고발을 당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바울은 체포되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로마로 압송된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한 사람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14. 교회의 일상생활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을 심하게 유발시킨 것은 ‘먹는 일’과 ‘절기를 지키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의 삶의 터전은 로마가 점령한 이방 도시들이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방 도시들에는 이방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방 신전에 바쳐진 음식들은 제의가 끝난 후 그 도시의 시민들이 나누어 먹었다. 이게 문제가 된 것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코셔 음식만 먹었다. 이방신에게 드려진 음식은 절대 먹지 않았다. 그러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이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이방신에게 드려진 음식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음식이었지, 다른 의미를 갖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에서 이 두 부류는 이 문제 때문에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식탁을 공유하기 힘들었다. (너랑 같이 밥 안 먹어!)

 

15. 본문은 이렇게 먹는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2-3절).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어떤 사람은 ‘강한 자들’을 가리키고, 믿음이 연약하여 채소만 먹는 자는 ‘약한 자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지금 두 부류에게 동일하게 교훈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어서 절기에 관해서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5절). 여기서,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어떤 사람은 ‘약한 자들’이고,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어떤 사람은 ‘강한 자들’을 가리킨다.

 

16.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무엇인가?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고,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서로를 업신여기고, 비판하는 자들 사이에 무슨 평화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교회에서 발생하는 일이라면, 이러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평화가 없는 교회는 그 자체로 악한 교회일 뿐 아니라 덕이 없는 교회요,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는 교회요, 하나님의 나라를 전할 수 없는 교회로 보인다는 것이다.

 

17. ‘업신여기다’는 헬라어의 ‘엑수테네오’를 번역한 말이다. 좀 더 쉬운 말로 ‘멸시하다’는 뜻이다. “어떤 이를 지위나 장점이나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대하고, 고려 대상도 되지 않는 사람으로 여긴다는 말”이다(요즘 말로 개무시하다는 뜻). ‘비판하다’는 헬라어 ‘크리노’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사람이나 사물을 판단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정죄한다는 뜻”이다(요즘 말로 꼴깝떤다는 뜻). (스캇 맥나이트) ‘업신여기다’와 ‘비판하다’는 말의 뜻을 보면서, 로마 교회를 한 번 떠올려 보라. 참담하지 않은가? 교회가 두 부류로 나뉘어서, 이 부류는 저 부류를 업신여기고 있고(개무시하고 있고), 저 부류는 이 부류를 비판(정죄)하고 있는(꼴깝떨고 있는) 모습 속에서 무슨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가.

 

18. 이러한 두 부류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6-8).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말씀이다. 그런데, 어떤가, 이게 단순히 개인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다가오는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극명하게 갈등을 겪고 있는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자신의 삶 속에 있는 극명한 갈등을 해결할 마음도 없고 관심도 없으면서, ‘사나 죽으나 나는 주님의 것’이라고 은혜 받고 마는 것은 말씀을 사사롭게 만드는 일이다.

 

19. 안디옥에서 베드로는 야보고가 보낸 유대인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더라도 결코 이방인들과 나누는 식사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안 되는 거였다.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은 아마도 매우 강경한 보수적인 유대인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정말로 복음에 붙들린 사도였다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의 행위들’을 요구했던 보수적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맞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지켜주었어야 한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식사 도중에 자리를 피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뻘쭘하고 황당했을까. 이 사건 때문에 아마도 교회를 떠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20. 우리가 삶 속에서(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든, 어디서든) 경험하게 되는 갈등들을 보면서, 우리가 그 갈등들을 해결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그 갈등을 해결해 나갈 때, 로마서의 말씀은 우리를 잠시 멈추어 세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알려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평강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나니…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17-19, 23b).

 

21. 우리가 어디에, 어느 자리에 있는지, 업신여기는 자가 되거나 비판하는 자가 되기보다, 믿음을 따라 의와 평강과 희락을 생각하고,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들에게도 칭찬받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되면 좋겠다. 존재하는 자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하지 말고(존재하는 자를 존재로 인정하는 첫걸음은 문안 인사 나누는 것 / 사람을 보면 인사를 하라), 내가 곧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존재하는 자를 존귀하게 여기고,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화평과 덕을 세우는, 즉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화평케 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