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9. 19. 13:32

로마서 3.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로마서 15:1-7)


1. 바울 신학 연구(로마서)의 권위자 중 한 명인 비벌리 가벤타가 쓴 로마서에 대한 대중적 안내 책자인 <로마서에 가면>을 보면, 로마서에 충분히 머물라고 조언한다. 그래야 로마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충분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현대인들이 가장 못하는 것 중의 하나가 ‘충분히 머무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구석구석 보는 일을 시간 낭비라 생각하거나 지루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현대인의 습관은 ‘관광’이라는 여행 상품에 녹아 들어 있다. 아무리 좋은 곳에 가도 우리는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그래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피곤함과 ‘그곳에 다녀왔다는 약간의 만족감과 우월감’ 뿐이다.

 

2. 충분히, 오래, 머문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를 내어준다는 뜻일 거다. 자기를 내어주지 않으면 우리는 변화를 이룰 수 없다. 로마서에, 좀 더 넓게 말해, 성경에 충분히, 오래, 머무는 일은 단순히 시간을 거기에 쓰라는 말이라기 보다, 자기 자신을 로마서에, 성경에 내어주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 현대인들이 잘 하지 못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개인에 대한 숭배’, ‘개인의 우상화’가 깊이 뿌리내려진 현대 사회에서 ‘자기를 내어준다’는 말은 그 개념 자체를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이 말을 이런 식으로 알아들을 것이다. ‘나를 팔라는 뜻인가? (우리는 로마서에 오래 머물면서 구석구석 살펴볼 것이다.)

 

3. 인간이 가장 쓸쓸함(lonely feeling/마음이 외롭고 허전하다)을 느끼는 때는 (상대방/사람들/공동체로부터) 이해 받지 못할 때이다. 쉽게 얘기하자면,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줄 때 가장 섭섭하고 쓸쓸하다. 예수님의 인생도 그랬지만,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의 인생이 그랬다. 바울은 쓸쓸했다.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것에 대해서, 사람들로부터, 특별히 동족인 유대인(그리스도인)으로부터 이해 받지 못했다. 바울이 일평생 사역을 하면서 많은 동역자를 만나서 위로를 받았지만, 그의 마음 한 켠은 언제나 쓸쓸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서도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사람, 특별히 인정받기를 가장 바랐던 한 사람(그게 아버지든, 어머니든, 누구든)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바울은 동족/부형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4. 15장 후반부에 보면, 로마에 직접 방문하고 싶은 바울의 소망과 더불어 예루살렘 방문 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특별히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 계획에 대해서 기도 부탁을 한다.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라면서 간절히 기도 부탁을 한다. 이것은 참 간곡한 기도이고, 쓸쓸한 기도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예루살렘을 방문하려 했던 것일까?

 

5. 로마서는 AD 56년경에 쓰였다. 이제 쉰 살이 넘어선 바울은 지중해 동쪽 지역 선교를 끝내고, 지중해 서쪽 지역 선교를 하면서 인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지중해 동쪽 지역 선교를 하면서 바울은 유대인 동족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에게서나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서나 똑같았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대하여 적대감이 심했다. 그리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선교 방식에 대해서 별로 좋은 마음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지중해 동쪽 지역을 선교할 때 바울은 유대인들과 계속해서 아주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바울이 극심한 갈등 중에 선교를 그만 두지 않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바울이 자신의 편지 곳곳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없었다면 선교를 진작에 그만 두었을 것이다.

 

6. 15장 후반부에서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에 가난 자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얼마를 연보한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참 훈훈하구나’라며 그냥 지나칠 지 모르지만,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다. 일단, 이방인들의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받아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로마서에서 발생한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의 갈등에서 보았듯이, 이방인들의 구제 헌금은 유대인들이, 그것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넙죽 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방인들의 헌금은 마치 이방신에게 드린 제물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이 주는 구제 헌금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치 이방신에게 드린 제물을 먹는 것과 같았다.

 

7. 게다가,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다. 지옥의 불쏘시개 정도로 쓰이면 될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전하고 다니는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이방인의 멸망, 특별히 로마 제국의 잔혹한 멸망을 외치고 다녀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판에, 오히려 이방인의 구원을 전파하고 다니는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일제 시대 때 어떤 목사가 일본 사람들에 대하여 구원을 전파하고 다녔다고 해보라. 그러면 독립 운동하는 사람들이나 일반 한국 사람들에게 그 목사가 좋게 보일 리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였던 것이다. 피해자 측이 가해자에 대한 구원을 외치는 사람에 대하여 고운 시선을 갖는 것은 쉽지 않은 법이다.

 

8. 바울은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이러한 상황 때문에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방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모은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는 일은 매우 중차대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기 보다 자신이 직접 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에 가서 그곳의 성도들에게 전달하고 싶어했다. 만약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이방인들의 헌금을 흔쾌히 받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헌금이 전달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동안 그토록 노력해 왔던, ‘막힌 담’이 허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방인 사역이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9. 예루살렘에 이방인들의 헌금을 전달하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기에 한 사람의 동역자로부터라도 기도를 더 받고 싶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에게도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애달픈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바울이 경험하고 있는 쓸쓸함을 느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로마서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만약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일이라면, 우리는 바울의 사역을 위해서 함께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매우 긴장하고 궁금해할 것이다. 과연,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교회들의 구제 헌금을 기쁨으로 받았을까?

 

10. 로마서는 이러한 긴장감이 흐르는 시기에 쓰여진 편지이다. 로마교회에 편지를 보내 놓고, 바울은 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런데 사도행전(21장 이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폭동으로 인하여 체포된다. 바울의 바람과 기도대로 일이 잘 진행되지 못한 듯하다. 이방인들의 구제 헌금은 예루살렘 공동체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된다. 로마로 압송되어 갔을 때 로마 교회는 이미 뵈뵈를 통해서 바울의 편지를 받아본 후였다. 그럼 우리는 어떤 기대를 가질 수 있을까? 바울의 편지를 받아본 로마 교회 공동체가 바울이 편지에서 복음을 따라 권면한 대로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화평을 이루어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바울을 도와 스페인 선교를 했을까?

 

11. 아닌 것 같다. 사실 이게 마음 아프고 안타까운 장면이다. (성경을 읽을 때 이렇게 정서적으로 읽는 일(정서적 성경읽기)은 굉장히 중요하다. 감정의 교차가 있어야 성경이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 <나의 사랑하는 책> 찬송가에서 어머니의 성경읽기를 자식이 기억한다. 어머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의 신앙이 위대한 이유다. 우리는 그 장면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가?) 만약 로마교회가 바울이 편지에서 권면한 대로 화평을 이루어 바울의 스페인 선교를 도왔다면,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스페인 선교를 한 것까지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바울의 스페인 선교와 그의 말년 인생에 대해서 아무런 기록도 하고 있지 않다. 굉장히 열린 결말을 맺고 있다.

 

12. 로마서를 읽어 나갈 때, 바울에 대한 이러한 파토스(감정적 호소)를 느끼지 못하면, 로마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굉장히 수사적으로 쓰고 있지만(이성적으로 쓰고 있지만), 그 뒤에 흐르는 정서는 굉장히 감정적인 호소이다. 로마 교회에 화평이 있어야, 그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자신의 인생 말년의 마지막 사역 목표인 스페인 선교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서는 절실하다. 교리서가 아니라, 로마 교회 공동체를 온 힘 다해 설득하고 있는 호소문이다.

 

13. 본문은 ‘강한 자들’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바울은 자신을 ‘강한 자들’과 동일시한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바울은 혈통으로는 베냐민 지파로서 엄연한 유대인이었지만, 바울은 자기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다는 소명을 가졌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강한 자들’, 즉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동일시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즉 ‘강한 자들’은 로마에서 ‘약한 자들’에 비해서 훨씬 지위가 높았다. 그들에겐 힘이 있었다. 힘 있는 자가 마음을 악하게 먹으면 힘 약한 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힘 있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내에서 악한 마음을 먹으면 힘이 약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차별을 받고 억압받으며 교회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14.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에서 ‘약점’은 ‘약한 자들’이 열등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법이다. ‘자기를 기쁘게 한다’는 말은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다. 강한 자들은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보통,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강한 자가 되고 싶어한다.) 이것은 ‘자기에게 좋을 대로 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지위가 있다고, 힘이 있다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한다.

 

15. 바울은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지 말라고 말하며, 그 이유를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결시킨다. 그리스도께서 만약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셨다면,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며,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지 않고 고난을 감당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을 내가 대신 다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힘 있는 자들이 행동할 때는 반드시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덕을 세우다는 ‘교회를 세우다, 공동체를 세우다’의 뜻이다. 덕이란 무엇인가를 허무는 게 아니라 세우는 것(upbuilding)이다. 우리는 무너뜨리는 사람인가, 세우는 사람인가. 덕 있는 사람은 세우지 무너뜨리지 않는다.

 

16.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4절). 바울의 이방인 선교 사역에 얽힌 괴로움과 쓸쓸함을 안다면, 이 구절은 정말 짠하게 들려올 수밖에 없다. 바울에게 성경은 구약성경이었겠으나, 바울은 이방인 선교 사역을 감당하면서 당하는 고통 가운데서 성경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이방인 선교 사역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내가 목회를 그만두지 않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목회 사역을 하는 이유는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인내할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인내와 위로와 희망을 준다. 그래서 성경은 정말 소중하다.

 

17. 바울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은 5절부터 7절에 담겨 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5-7절). 로마교회 성도들은 인내와 위로와 소망(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을 때’ 가능한 일이다.

 

18.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못하는 것이 ‘인내’이다. 참지 못한다. 기다리지 못한다. ‘내가 왜 참아!’하면서 폭발하기 일쑤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목말라 하는 것이 ‘위로’이다. 위로 받고 싶어 몸부림을 친다. 위로에 목말라 엉뚱한 것에 빠져 목숨과 생활(삶)을 잃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없는 것이 ‘희망’이다. 희망 없이 산다. 그렇다 보니,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소비하면서 산다. 남아나는 게 없다. 희망이 없으니 영혼까지 탈탈 털어서 오늘 끝장내고 만다.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19.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결국 로마교회 공동체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여기에 있다. ‘강한 자들’, 즉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나, ‘약한 자들’ 곧 유대인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으면 된다. 이거 너무 당연한 결론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리고 너무나 쉬운 결론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처럼 보이고, 너무나도 쉬운 일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 1세기 초대교회에서 너무도 당연하고 쉬운 일이었을 것 같은 ‘그리스도 예수 본받기’, 쉽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초대교회로 돌아가라!’는 말은 굉장히 어리석은 구호이다.

 

20. 우리의 신앙,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그리고 이 구절을 진지하게 묵상해 보자.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너희도 서로 받으라!” 너무나도 당연하고 쉬운 일 같으나,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하고 있지 못하는 일이다. 왜 1세기 로마교회 공동체는 이것을 하지 못했으며, 왜 우리는 여전히 이것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로마서는 그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 이유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