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2. 16. 15:36

말씀과 기도는 왜 중요한가

(사도행전 6:1-7)

 

우리는 지금 ‘missional church’로 거듭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고 힘을 모으고 있다. 우리가 함께 지혜를 모아 추진하고 있는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missional church’를 세워 나가기 위한 핵심 프로젝트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missional church’, 선교적 교회는 무엇인가?

 

‘Mission’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사명이라고 번역한다. Mission은 라틴어 ‘mitto(mittere/missio’에서 왔다. 그 뜻은 보내다, 파견하다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기독교인의 경우 보냄을 받았다라고 할 때, 하나님은 하늘에 앉아 계시고(그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집무를 보시며),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어딘가에 가서 무슨 일을 수행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랜 세월, mission은 그렇게 이해되어 왔다. 우리도 이런 말을 한다. “주님! 보내 주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찬송 부르길 좋아한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이러한 신앙도 엄청난 신앙이다. 믿음이 변한 건지, 세상이 변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사실 요즘 이러한 신앙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아무튼, 우리는 미션을 생각할 때, 하나님에 의해 수동적으로 어디론가 보내져서 그곳에 필요한 일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물론 지금도 그렇다) 선교는 해외선교, 국내선교, 지역선교등으로 어떠한 공간으로 파송받아 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선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선교가 가지고 있는 그 뜻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선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선교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missio dei’라는 선교신학 용어를 알아야 한다.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이라는 영국의 신학자이자 선교사가 주창한 개념이다. 이는 그의 선교경험에서 나온 통찰로, 서남아시아에 가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활동하던 그는 그곳에서 이미선교하고 계신, , 이미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 이전까지, 그는 선교란 위에서 언급했듯이, ‘보냄을 받아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도 이미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은 후, ‘선교에 대한 개념을 다시 가지게 됐다. 그래서 ‘missio dei’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교를 뜻하는데, 이 개념을 통해 그가 주장한 것은 선교란 하나님이 이미 선교하고 계신 그곳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선교란 보냄을 받는수동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능동적개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단순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어떠한 오지에서 일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곳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도 일하고 계시고, 우리의 가정에서도, 우리의 교회 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나라, 그리고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어떤 지역에서도 일하신다. 하나님은 우주적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시며 모든 것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도록 붙잡고 계신다.

 

하나님의 선교란 이러한 뜻을 지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교에 능동적으로 동참하려면 요구되는 것이 영적 감수성(Spiritual Sensibility)’이다. 감수성(Sensibility)이라는 말은뭔가를 감지(sense)할 수 있는 능력(ability)’을 말한다. 여기서 영적 감수성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교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지금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 지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믿음의 선조들은 모두 이 영적 감수성이 뛰어났다. ‘하나님의 선교를 감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과 함께 그곳에서 동역한다는 뜻이다. 철이 아직 들지 않은 자식은 부모가 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만 부모로부터 받아내려고 한다. 그러나 철 든 자식은 부모가 하는 일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를 알고, 어떻게서든 부모님과 함께 가정을 세워 나가고 인생을 꾸려 나가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일례로, 이런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평생 목회하시면서 교회를 세 번 건축하셨다. 강화도에서 한 번(강화도에서 목회하실 때 내가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서울에서 목회하실 두 번 하셨다. 강화도에서 건축하실 때는 내가 한 두 살 밖에 되지 않았을 때라 내 힘으로 교회 건축을 도울 수 없었다. 물론 그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돌반지는 모두 교회 건축하는 데 쓰임을 받았다. (그 전통에 따라, 우리 두 아들의 돌반지도 모두 조지아에서 교회를 건축할 때,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드려졌다.)

 

그런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 교회 건축을 하실 때, 나는 대학생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고 싶었고, 아버지의 목회를 돕고 싶었다. 그러나 학생이 무엇으로 건축헌금을 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아르바이트를 할까? 어디 가서 모금을 할까? 하나님은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고 싶어하실까? 내가 무엇을 하면 아버지가 기뻐하실까? 많은 생각을 했다. 그때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그래, 내가 학생이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타자!” 그래서 학생신분에 맞게,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래서 장학금을 탔다. 그 당시 장학금은 70만원이었는데, 세 번을 연속해서 탔다. 210만원을 교회 건축하는 데 드릴 수 있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특별히 가난한 자들이 교회 구성원으로 많이 들어왔다. 예루살렘 교회는 multi-cultural church였다.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섞여 있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문화와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문화가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때론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본문은 그 갈등 상황을 말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뤘던 곳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예루살렘은 유대 땅에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유대문화와 언어에 익숙하지 못했던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은 불평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만해도, 사도들은 가난한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굶지 않도록 밥을 잘 먹이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터지고 보니, 단순히 밥을 잘 먹이는 것만이 하나님의 선교가 아니고, 그들의 마음을 돌보며, 그들이 차별 받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행정적으로 조직을 잘 정비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교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나님은 아주 세세한 부분에서까지도 일하신다.

 

그래서 사도들은 모든 제자들을 불러서 지혜를 모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 쓰리라!”(2-4).

 

사도들은 사역을 하면서 아차싶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선교’, 또는 사역이라는 것은 그들이 발명(invent)’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mission)에서, 사역(ministry)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감수성이다. , 하나님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신 지를 감지하는 일이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우리가 발명해서 해 놓고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고 있다고 자기기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기만의 행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사도행전에 등장한다. 그게 누구인가? 나중에 이름이 바울로 불리는 사울이다. 사울의 등장은 스데반의 죽음과 엮여 있다. 바나바의 등장도 심상치 않았듯이, 사울의 등장도 심상치 않다. 일곱 집사 중 가장 촉망받던 스데반이 그 짧은 인생을 순교로 마감하게 될 때, 사도행전은 사울의 등장을 알린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7:60; 8:1).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사울이 어떻게 초대교회를 박해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울은 초대교회를 박해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든 열심을 다해 교회를 박해했다. 그런데, 사울은 어느 순간, 자신이 하는 일이 선교가 아니라, ‘자기기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게 바로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다메섹 도상의 이야기이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9:4) 사울이 했던 일은 하나님의 선교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박해하는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 ‘영적 감수성(spiritual sensibility)’이 부족하면 누구에게든지 이러한 일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질문을 갖게 된다. “어떻게 하면, 영적 감수성을 가질 수 있을까?” 바로, 본문에서 사도들이 깨닫고 시행한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4). 이 말은 사도들이 다른 일에는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씀만 보고 기도만 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밥 퍼주는 일은 느그들이 하고, 우리는 그 일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씀만 보고 기도만 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본인들이 행한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영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채,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기만에 빠져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과 상처를 불러 일으키는 어리석음을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감수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말씀과 기도 사역에 전념하고자 한 것이다.

 

영적 감수성을 키우는 일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영적 감수성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기만에 빠지고 만다. 하나님의 선교는 구원을 이루지만, 자기기만은 죄악(추악한 일)’을 드러낼 뿐이다. 하나님의 선교가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지 못하고, 생명을 죽인다면, 그게 무슨 하나님의 선교인가. 하나님의 선교는 반드시 생명을 낳는다(풍성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풍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해야지, 우리가 선교를 발명하면 안 된다. 인간의 일은 생명을 풍성케 하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말씀과 기도는 왜 중요한가? 영적 감수성은 말씀과 기도로 키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언어이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 없는 상태에서 그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발명해서 그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기기만에 빠지고 만다.


우리가 실제 삶 속에서 소통이 되지 않는 것때문에 얼마나 어려움을 겪으며 살고 있는가. 부부의 예를 들면, 꽃 사오는 것을 싫어하는 부인과 꽃 사오는 것을 즐기는 남편 사이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들꽃 하나에도 감동을 느끼는 아내와 그러한 마음을 전혀 모르는 남편 사이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아내는 들꽃 하나만 꺾어다 주며 사랑을 속삭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남편은 아내가 돈을 많이 벌어다줘야지 행복할 거라고, 들꽃 따위에게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고, 돈을 버느라 생명을 허비한다면, 이 소통의 부재가 그 가정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가.

 

“missional church”는 단순히 선교 많이 하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 가운데 영적 감수성이 예민하여, ‘하나님의 선교’, 즉 하나님이 지금 어디에서 무슨 사역을 하고 계신 지를 감지하여, 부르심을 받아,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교회를 말한다.

 

우리는 지금 성경공부와 기도훈련을 통하여 영적 감수성을 키우는 중이고,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를 통하여 영적 감수성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속회의 mission project발견해야 하는지 감이 잡혔으리라 믿는다.) 이 가슴 벅찬 일을 진행하고 있는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영적 감수성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에 부르심을 받고,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우리들의 삶에는 아주 실제적이고 생생한 구원의 열매가 팝콘처럼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파루시아를 살다, “우리는 왜 성경을 읽는가를 진지하게 읽어보시라.)

혹시, 복잡하다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면, 딱 한가지만 해달라. 참여! (함께 가자!)

 

‘missional church 선교적 교회’, ‘missio dei 하나님의 선교’, ‘spiritual sensibility 영적 감수성’, 그리고 말씀과 기도 사역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good spirit’지닌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여, 세상에 희망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키며, 시대를 이끄는, 아름다운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