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8. 28. 04:10

부끄러워하는 자와 기뻐하는 자

(예레미야 1:4-10, 누가복음 13:10-17)

 

1. 예레미야의 말씀은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는 장면으로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이들이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보면 대개 매우 드라마틱하다. 사무엘 선지자의 이야기도 그렇고, 이사야 선지자의 이야기도 그렇다. 사무엘 선지자의 부르심에는 어린 사무엘의 순진함이 베어 있고, 이사야 선지자의 부르심에는 이사야 선지자의 결기가 묻어 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2. 예레미야 선지자의 부르심에는 신비와 저항이 묻어 있다. 이런 말씀은 매우 신비롭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5절). 예레미야가 산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그의 부르심은 매우 이례적이다. 남유다 왕국의 마지막 세 왕은 여호아김, 여호아긴, 시드기야이다. 여호아김 왕 때 이미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정복되었고, 마지막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이 격랑의 시대에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이 예레미야인데, 이 부르심이 예레미야에게 얼마나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 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3. 정황상,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나타나신 것은 그가 청소년 시절을 보낼 때인 것 같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나타나 그를 부르실 때 예레미야는 이런 말을 하며 그 부르심에 저항한다. “저는 아이라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6절). 이사야 선지자의 대답,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세요!”와는 매우 대조적인 대답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예레미야의 저항은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절대적인 경험이기에 결국 그 부르심에 순종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다. 순종은 자유의 박탈이 아니라 자유의 완성이고 은총의 수용이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임하는 법이다. (폭풍 속에서도 고요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갖게 된다.)

 

4.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보듯) 구한말 한국의 역사를 떠올려 보면, 예레미야의 부르심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10절). 남유다 왕국(이스라엘)의 멸망은 국제관계가 얽히고설켜서 발생한 일이다. 그 격변이 왜 발생을 했으며, 그 격변을 통해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그 격변이 남유다 왕국을 비롯한 세상의 나라들을 어떠한 미래로 이끌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말씀 선포가 예레미야의 소명인 것이다.

 

5. 이런 소명 이야기를 들으면 대개 두 가지 반응을 기대할 수 있다. 하나는 ‘나도 이 사람처럼 소명을 받았으면 좋겠다.’라는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이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는 반응이다. 소명(召命)은 문자적으로 ‘어떤 일이나 임무를 하도록 부르는 명령’을 뜻한다. 이걸 좀 더 강력하게, 은혜롭게 표현하면, 소명이란 ‘부름 받은 목숨’이라는 뜻이 된다. 좋은가, 부담되는가?

 

6.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시다가 열여덟 해 동안 귀신 들려 앓으며 허리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성을 치료하시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4장에서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과 연관된 이야기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선포하신다.

 

7. 그런데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병든 여성을 치료한 행위를 두고 사람들의 반응이 엇갈린다. 치료 받은 당사자는 당연히 너무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여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런데 회당장으로 대표되는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행위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14절).

 

8. 안식일은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이다. 안식일은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안식에 대한 선취이다.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런 안식일에 병에서 놓임을 받는 것, 병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안식을 얻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고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안식일에 발생한 일을 두고 불평했다. 그 불평하는 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통쾌한 한 방이었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9.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할 말씀은 17절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여기에 보면, 부끄러워하는 자가 있고, 기뻐하는 자가 있다.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는 엄청 중요한 말씀이다.

 

10. 우리가 살면서 예레미야처럼 소명을 받고, 예수님처럼 이런 기적을 베풀 일은 별로 없다. 그리스도인은 자꾸 소명 받는 것에 대한 부담감, 기적(선한 일)을 베풀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기 쉽다.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지 못하고 남을 감동시키는 선한 일을 하지 못하면 신앙이 뒤처진 것처럼 주눅이 든다. 가령 이런 것이다.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아 주의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 기적(선한 일)을 베푸는 사람은 1등 그리스도인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2등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한다.

 

11. 그런데, 사실, 우리는 대개 평범한 그리스도인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은 경험도 없고, 예수님처럼 기적을 베푸는 능력(선한 일)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이 배워야 하는 영성은 어떻게 하면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을까, 어떻게 하면 기적을 베풀 수 있을까, 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온 무리가 예수님을 향하여 했던 바로 그 반응이다.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12.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자꾸 우리 자신을 예레미야와 동일시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 시 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렇다 보니, 예레미야와 같이 드라마틱한 소명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죄책감에 휩싸이기도 하고, 예수님처럼 기적을 베푸는 일(선한 일 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조바심을 내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에 기쁨으로 반응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13. 주목받지 못하고 자신의 권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을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복음 이야기에 등장하는 회당장 같은 사람들이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 때문에 고생을 하던 한 사람이 그 병에서 놓임을 받게 되었는데,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런데, 회당장과 그 무리들은 거기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그 은혜가 기쁨이 아니라 분노였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권위가 그곳에서 드러나지 않고,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에게 임한 것은 부끄러움뿐, 하나님의 은혜가 주시는 기쁨을 선물로 받지 못했다.

 

14. 물론 예레미야처럼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는 것을 갈망하는 영성도 있고, 예수님처럼 기적(선한 일)을 베푸는 것을 갈망하는 영성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다. 특별하다는 것은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이다. 우리가 바라고 소망해서 들어주시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냥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임하는 것이다. 이런 일에 우리가 마음 쓸 일이 뭐가 있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것이다.

 

15. 우리가 배워야 하는 영성은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는’ 영성이다. 누군가 잘 된 것을 축하해 주고, 누군가 병에서/어려움에서 놓임 받은 것을 축하해주고,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을 함께 기뻐해 주고, 나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소한 하나님의 은총에 기뻐하며,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영성. 기쁨을 주는 영성이라기보다 그저 기뻐하는 영성!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기뻐하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다. 부끄러움에 처해지지 않기 위하여서라도, 우리는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