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4. 13. 11:59

부활의 증언

(사도행전 4:32-35)

 

얼마전 이런 글을 써서 포스팅 한 적이 있다.

 

[요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 책을 보다 이런 문장을 읽었다. "I was country, when country wasn't cool(컨츄리 음악하는 것이 멋지지 않았던 때에 나는 컨츄리 음악을 했다(또는 컨츄리 음악을 좋아했다))." 이것은 바바라 만드렐(Barbara Mandrell)의 컨츄리 송의 가사인데, 제임스 스미스가 존 카푸토를 묘사하면서 가져다 쓴 문장이다. 그는 존 카푸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Caputo was an Augustinian before being an Augustinian was cool(카푸토는 어거스틴주의자가 되는 것이 멋졌던 시기 이전에 어거스틴주의자였다)"

 

이런 문장을 보면서,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나는 모태신앙이고, 1930년도부터 기독교신앙을 가지게 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이 멋진 일이 되기 이전부터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기에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역사에서(또는 미국 역사에서) 현재만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별로 자랑스럽지 못한 때가 있었나 싶다.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 부르고, 목사를 먹사라 하며, 기독교는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회악이라고 비난하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훗날, 나는 오늘날을 뒤돌아보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멋지지 않았던 때에도 그리스도인이었다. I was a Christian when being a Christian wasn't cool." 이렇게 고백하기 위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 또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나는 이전에도 그리스도인이었고, 오늘도 그리스도인이며, 내일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사실 이런 고민은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나만, 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만 이런 고민을 한 것이 아니다. 여호수아서에서도 비슷한 고민과 고백이 등장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나는 이전에도 그리스도인이었고, 오늘도 그리스도인이며, 내일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동일한 맥락의 고백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러한 고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전하는 사도행전을 가만히 읽다 보면, 그때(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와 지금 시대 간의 신앙의 괴리 현상이 발견되어 적지 않은 당혹감을 경험하게 된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이때의 경험은 육적 경험과 더불어 그것을 넘어선 영적 경험이다)한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키워드는 ‘부활의 증언’이었다. 이것은 그들 만의 독특하고 유일회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다. 부활의 증언은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자, 또는 믿는 자에게서 발생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 우리의 삶 가운데, 이 보편적인 현상이 희미해졌다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리의 삶의 ‘키워드’는 무엇인가?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의 삶의 키워드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나의 삶의 키워드는 ‘부활의 증언’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물론 교회에 와서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부활의 증언’보다 ‘성공’이 삶의 키워드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느덧 이렇게, 신앙과 일상의 영역을 분리하여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신앙의 영역에서는 ‘부활의 증언’이 키워드 일지 몰라도, 그것이 삶의 전영역의 삶의 키워드가 되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상당한 혼란과 비극을 가져오고 있다.

 

부활은 신앙의 영역에서만 발생한 일이 아니다. 부활은 삶의 전영역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부활은 모든 시공간을 덮는 사건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을 우주적 사건이라고 칭한다. 이 세상 구석구석 부활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부활 사건은 땅 끝까지 전해져야 하는 보편적 사건(누구나 알아야 하고,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라는 뜻이다.

 

성령을 받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증언은 사도행전 2장 14절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베드로와 열한 사도는 광장에 서서 소리 높여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다. 베드로와 열한 사도가 부활의 증언을 마치자, 엄청난 일이 발생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1). 어딘 가에서는 이러한 일이 아직도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는 더 이상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지 않다. 왜 그럴까? 우리는 도대체 어떤 곳에서, 어떤 시대를 살고 있길래, 이런 일을 경험하기 힘들까. 이런 생각을 하면, 설교자로서 무력해지기도 한다.

 

사도행전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부활의 증언을 했을 때 사도들을 비롯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으로 핍박을 받았다. 3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치는 이야기는 재미난 것을 보여준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쳐주는 이야기는 주일학교 때 들은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찬양 때문이다. “금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네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사건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공의회에 잡혀간다. 그런데, 공의회에 잡혀간 이유는 그들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쳐 주어서가 아니다. 그 상황을 사도행전은 이렇게 전한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되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행 4:1-2). 베드로와 요한이 공의회에 잡혀간 이유는 ‘부활의 증언’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즘 예수의 부활의 증언을 하다가 핍박을 받는 일은 없다. 적어도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는 그렇다.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부활의 증언’을 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4장에 전개되고 있는 이야기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생소한 풍경이다. 다른 부활의 증언 사건들은 실제 우리 삶 속에서 발생한다고 해도, 그렇게 큰 저항감이 없다. 오히려 그렇게 핍박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본문에서 증거되고 있는 풍경이 현실에서 성취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저항이 심할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은(누가는) 경제적 분배 행위(경제적 평등/요즘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경제적 불평등과는 달리)를 ‘부활에 대한 증거’로 제시한다.

 

우리는 정치적 핍박은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경제적 평등은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의 증언을 반쪽만 하는 것이다. 부활의 증언은 정치하고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 경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기독교 우파, 또는 기독교 보수주의(또는 복음주의)의 사악함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부활의 증언을 정치하고만 연결시킨다. 그들은 부활의 증언을 경제적 평등과 연결시키는 것을 꺼려한다. 이것은 비겁한 일이다. 그들은 그렇게 ‘성경, 성경’하면서도 실제로 성경에서 증언되고 있고, 부활의 증언인 경제적 평등을 철저하게 외면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평등을 마르크스주의로 생각하면, 그것은 부활의 증언을 매우 오해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와 기독교의 경제적 평등은 닮은 구석이 있지만, 근본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는데,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적 평등(공산주의)는 무신론적 경제의 평등이지만, 기독교의 경제적 평등은 명백한 ‘부활의 증언’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적 평등은 모더니티의 산물이지만, 기독교의 경제적 평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선물’이다.

 

본문을 차근히 다시 읽어보면 이렇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33-35절). 여기서 보면, 주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의 실제적인 결과, 열매, 선물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부활의 증언이 온전히 전해지는 곳에 나타나는 현상 중 매우 고무적인 현상은 바로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복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부활의 증언이 온전히 선포되는 곳에 오는 것은 마음의 평안이 아니라 물질의 평등이다. (부활은 우선적으로 심리학이 아니라 경제학이다!)

 

사도행전은 부활의 증언을 통해 주님의 선물로 임하는 경제적 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뒤, 부활의 증언이 긍정적으로 작동한 예와 부정적으로 작동한 예를 하나씩 전하고 있다. 긍정적으로 작동한 예는 바나바라 일컬어졌던 레위 사람 요셉의 이야기가 제시되고 있는데, 그는 부활의 증언을 듣고 자신의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둔다. 부정적으로 작동한 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통해 제시되는데, 그들은 부활의 증언을 듣고 소유를 팔아 그 값을 사도들에게 온전히 내놓지 못하고 얼마간 감추었다가 결국 생명까지 빼앗기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요즘 부동산 문제로 대표되는 경제적 불평등을 경험하면서,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부활의 증언’이 얼마나 희귀한 세상이 되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더욱이 지구에서 가장 부자 나라들은 대개 기독교 국가이거나 기독교 비율이 높은 나라들인데, 그러한 부자 나라들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더 심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부자 나라들과 가난한 나라들 사이에 경제적 불평등이 심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 만 보더라도, 이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증언’을 입으로만 하고, 삶으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를 보게 된다. ‘부활의 증언이 실종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

 

경제적 평등은 정치 또는 국가 정책으로 오지 않는다. 정치 또는 국가의 권력은 경제적 불평등을 더 조장할 뿐이다. 그것이 정치 또는 국가 권력이 지닌 현실적인 한계이다. 그들은 힘 있는 자들을 우선시하여 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평등은 부활의 증언을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경제적 평등은 부활의 증언을 삶으로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온다. 부활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부활의 현실을 사는 자는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지 않는다. 지금 이러한 부활의 증언을 들으면서 이러한 부활의 증언이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부활의 현실성을 전혀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경제적 평등이 부활의 증언이었다’는 엄연한 성경의 증언은 이 시대에 가장 외면당하는 부활의 증언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성경을 금쪽같이 여기면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은 모순이고 비극이다. 예수 믿으면 꿈이 이루어지고, 잘 먹고 잘 살게 되고, 평안이 온다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경제적 평등이 부활의 증언이라고, 부활의 증언을 하는 자, 또는 부활의 증언을 들은 자는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말해서 미안하다. 그러나, 요즘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멋지지 못한 이유는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잘 먹고 잘 살지 못해서, 평안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멋지지 못한 이유는 부활의 증언이 경제적 평등으로 이어지는 부활의 현실성이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사회 속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 대통령이 되고, 아무리 정부에서 훌륭한 정책을 내어놓아도, 정치나 국가가 경제적 평등을 이룰 수 없다.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한다. 경제적 평등은 부활의 증언이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증언을 현실로 살아간다면, 정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것을 증언한다면, 선물처럼 임하는 것이 경제적 평등이다. 경제적 평등은 정치로 오는 것이 아니고 신앙으로 온다. 그래서 신앙은 그 어떤 정치보다 능력이 있고 생명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부활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자기의 것(property)’라 주장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선포하며, 최선을 다해 나눔의 삶을 살자. 그리하여 정치보다 신앙이 위대하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자. 그러면, 초대교회에서 발생했던 바로 그 일, “부활의 증언을 보고들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의 역사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개독교라고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온 백성에 칭송을 받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질문한다. 당신의 삶의 키워드는 무엇인가? 성공인가, 부활의 증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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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